위로가기 버튼

일본 문제에 관하여

등록일 2014-06-19 02:01 게재일 2014-06-19 19면
스크랩버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지난 며칠 사이 일본 문제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들이 몇 가지 발생했다. 하나는 국무총리 인준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모두 일제의 식민 지배를 어떻게 보느냐에 관계되어 있다.

또 요즘은 월드컵 시즌이기도 해서 한국과 일본이 모두 브라질에서 힘든 경기를 펼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은 러시아와 1대1로 비겼고, 일본은 코트디브아르에 2대1로 졌다. 일본 네티즌들은 한국의 조편성이나 대진운이 좋은 것에 화를 내고 있다. 일본이 졌을 때 한국에서도 꽤나 고소해 했을 것이다.

이런 대중적인 감정들에 얼마간의 불편함을 느끼면서 도대체 일본과 한국 관계, 특히 구한말 이후 36년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위한 기준이나 방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불행한 과거를 어떻게 읽어내야 하나 할 때, 무엇보다 나는 우리가 일종의 `공리`에 입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위력으로 지배하는 것은 인류적 이상에 비추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구미 제국들에 의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지배는 어떤 형태로든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다. 또 그렇게들 지속적으로 정당화 해온 것이 사실이다.

식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고귀한 이상을 내세우기 좋아하는데, 그것은 때로 문명화, 때로는 기독교화, 때로는 경제 발전 같은 것으로 변주되곤 한다. 문명화란 그렇게 지배하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미개한 채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이고, 기독교화란 서구 기독교만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논리이며, 경제 발전이란 그렇게 식민지화 되고 나니 잘 살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 셋 모두 지배받는 자들은 본래 무능력한 이들이고, 원조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라는 논리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셋 모두 가치에 대한 배타적 견해에 기초하고 있기도 하다. 서양이 문명의 표준이고, 기독교가 유일하게 가치 있는 종교이며, 사람은 무엇보다 잘 먹고 입고 살아야 그 다음에 문화도 있다는 것이다.

문화나 종교의 가치 문제는 논의하기가 더 까다로운 신념의 문제이기도 한 까닭에 여기서는 먹고 입고 사는 문제를 중시하는 입장에 관해 간략히만 생각해 본다.

과연 먹고 입고 산다는 것, 또는 경제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얼마만한 가치 또는 비중을 가진 것일까.

누군가에게 그것은 100에 90일 수도 있고, 비록 50을 차지한다 해도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50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 쪽은 일종의 본질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이 지극히 물질중심적, 육체중심적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물론 물질과 육체 없이 살아갈 수 없지만 동시에 정신, 의식의 존재다. 이것 없이 인간이 인간일 수 없다면 우리는 경제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자 쪽, 그러니까 양적으로 생각해 보아서, 경제는 인간 삶의 질 전체에서 어느 정도 분량을 차지하는 것일까?

일제시대에 어느 정도 경제 성장이 있었는가는 따로 따져보아야 할 것이지만, 멸시와 차별과 피억압 속에서 쌀을 몇십 그램 더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최인훈은 `화두`에서 말했다. 해방 되고 나서 가장 많이 바뀐 것 하나는 얻어맞지 않는 것이었다고. 인간의 존엄성이 유린되는 경제발전이라는 것이 과연 지고 또는 지선일 수 있는 걸까?

방민호칼럼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