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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봉산

등록일 2014-06-12 02:01 게재일 2014-06-1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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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옛날에 점봉산 곰배령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토요일, 일요일 여정으로 곰배령으로 향했다. 동서울 버스 터미널에서 열 시 삼십 오분 버스, 연휴 길이 막혀서 두 시간 삼십 분.

강원도 홍천에서 버스는 내천 쪽 국도로 빠져 차량 드문 길을 굽이 굽이 돌아갔다. 현리는 그 끝에 있었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현리에서 점심을 가볍게 먹고 점봉산 쪽 도로를 따라 걷다가 시내버스를 타고 또 걸었다.

이제 바야흐로 풀꽃세상이다. 계란꽃, 엉겅퀴, 붓꽃, 찔레꽃에 그윽한 산안개다.

원래는 점봉산 안에 있는 민박집을 잡고 싶었지만 예약이 늦어 산 아래 민박촌에서 하룻밤을 쉰다.

이제 하루가 지났다. 아침이다. 민박집에서 북어국으로 속을 달래고 오전 열 시에 들어가는 팀이 되어 안내소를 통과했다. 미리 입산 신고를 하고 신분증 가지고 가야 하는 산이다.

산은 계곡 가파른 산도 있고 둥그스름한 곡선을 그리는 산도 있다. 이 점봉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만하기만 하다. 처음에는 조그맣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듯 하더니 아예 산책길처럼 느긋하게만 펼쳐진다.

걷는다. 왕복 다섯 시간 거리. 활엽수림이 하늘을 가린 그늘 진 산길을 걷고 또 걷는다. 홀아비바람꽃, 괭이눈, 꿩의바람꽃, 현호색 같은 꽃이름 단 초지가 조븟한 오솔길 양 옆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졌다.

걷는다. 요즈음 나는 걷기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한 심정을 다스릴 길이 없다. 일행도 있고 관광객들도 많지만 나는 마치 산에 혼자 오르는 사람 같다.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일행은 저만큼씩 떨어져 걷고 나는 오로지 산의 아름다움만을 생각한다.

염인증이라는 말이 있다. 염세증을 넘어 염인증이다. 사람끼리 어울려 만들어가는 일들이 어쩌면 그리도 끔찍스러울 수 있나.

어느 산모롱이 돌아가는 곳에 함박꽃 두 송이가, 한 송이는 활짝 피고 한 송이는 이제 막 다 맺혀 피어나려 한다. 나는 함박꽃 숨막힐 듯 순결한 흰빛을 바라본다. 숨어서 피어 있는 사연을 알 것 같아 내 눈시울도 뜨거워지려 한다.

이 숲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다. 옛날에는 이 길을 계속 가서 외설악 쪽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막아놓고 가지 못하게 한다나.

산끝이 가까워지면서 길이 늦게나마 산길 흉내를 낸다. 조금 가파른가 싶은데도 산길로서는 차라리 애교나 부린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름 모를 고산풀들이 줄지어 이어진 끝에 이윽고 하늘이 보였다. 활엽수림이 뚝 끊기고 풀꽃밭이 환히 드러나 보이는 하늘밑이다.

다 올라왔지만 역시 산속, 산 뒤에 산이요, 산 앞에 또 산이다. 이렇듯 속세에서 멀리 떠나온 것이 다행스럽다. 하지만 곧 내려가야 한다.

온 길을 똑같이 되밟아 내려가 차편을 알아본 즉 버스가 끊겼다. 관광버스를 얻어타고 현리까지 나갈 재주도 없다.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웬 자가용 차가 한 대 와 선다. 속초로 나가는 차란다. 현리나 홍천 쪽보다 차라리 서울 가는 차편이 많은 속초다. 가깝기도 해서 뒤로 가지만 앞으로 가는 격이다.

차를 운전하시는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간다. 평생 안 해 본 일이 없는 것 같은 이 분의 최근 직업은 장의업이다. 일 년에 삼백 구씩 삼천 구를 직접 염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만져 보기만 하면 어떻게 죽었는지도, 한의 크기까지도 가늠이 된다고 한다.

그럼 저는 지금 살아 있습니까? 한 번 봐주세요.

차안 좌중이 모두 웃는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다. 나는 요즈음 정말 내가 살아가는지 죽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어둠이 깊디 깊은 우중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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