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도쿄에서 베이징으로 두 나라의 현대문학관들을 돌아보는 강행군 여행을 했다. 도쿄에서 1박하고 베이징에서 2박으로 귀국했으니, 피로하다면 피로한 여행이었던 셈이다.
일행은 국회의원인 도종환 시인, 평론가 염무웅 선생, 그리고 국립도서관의 관계자 분들과 나, 그렇게 7인이었다.
도쿄에서는 일본 근대문학관, 일본 민예관, 가나가와 현립 문학관을 살펴보았고, 베이징에서는 중국현대문학관과 루쉰 기념관 현황을 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든 어떤 과업을 설정하고 그것을 이뤄내려고 생각하면 쉬운 일이 없다. 의미와 가치가 깊고 높은 것일수록 더욱 그렇다고 봐야 한다.
아주 오래 된 일이 되어버렸다. 1997년 2월, 그때 나는 후쿠오카, 오사카, 교토, 도쿄로 이어지는 10여일 여행을 했다. 일본 국제교류기금의 초청을 받았는데, 그 당시 아무 문학상의 실적도 갖지 못했던 나로서는 과분한 기회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 여행은 나를 크게 변화시킨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나는 한 마리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현실의 부조리에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저항하는 것에 제법 큰 가치를 부여하고 국문학 공부는 게을리하면서 평론이나`일삼는`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안으로는 그러한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이 꽉 차 있으면서도 그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나를 바꾼다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길을 알지 못했다. 그 겨울이 돌아오기 전의 몇 개월은 참혹한 번민과 방황의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혼자 배를 타고 인천에서 텐진을 통해 중국으로 가서 6박7일을 보낸 적도 있었다.
일본 여행의 기회는 내 의식에 심각한 격변을 가져왔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폭력적으로 지배하고 가혹한 수탈을 행했지만, 자기 나라의 전통과 문화에 대해서는 끔찍할 정도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숱한 일본의 절과 신사와 문학관과 전통적 거리와 책들은 나로 하여금 나의 나라 한국의 문화적, 문학적 상태에 대해 각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듯했다. 알에서 새가 나오듯, 고치에서 나방이 나오듯, 나는 깨어나야 했고 탈바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전통과 문화적 정체성을 확고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그래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것이라도 좋다 했던 어느 시인의 역설처럼, 그런 것을 갖출 수 있다면 차라리 국수적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감수할 수 있으리라고 혀를 깨물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돌아와서, 나는 내 공부의 방향을 수정했고, 비평의 색조를 바꾸었다. 이름하여 전향이라면 전향이다. 남이 뭐라 해서, 얻어 맞아서 한 전향이 아니요, 내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 한 전향이니, 아무 후회할 것 없는 기쁜 생각의 바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무렵부터다. 한 사람의 한국문학 관계자로서 나는 우리도 문학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키워왔다. 내가 상상하는 우리의 근대문학관의 형상을 글로 지어 어느 지면에 발표하기도 하고, 근대문학 자료들에 대한 관심의 폭도 가능한 한 넓혀가고자 했다.
지금도 나 혼자 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면 서글플 것이다. 그런데 문단 일각에서 나와 같은 경로를 거친 것은 아니로되, 똑같이, 더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제 그것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를 해나가게 되었다.
3박 4일의 여행은 몹시 피로했다. 남들은 50년전, 30년전에 한 일을 지금에서 하면서 늦은 것을 벌충하고 더 낫게까지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자니, 아닌 말로 식은 땀이 난다. 하지만 마음 속에 한 가닥 기쁨이 연기를 피운다. 우리도 이제 우리 어려운 시대의 문학 유산을 모으고, 정리하고, 보여주고, 즐길 때가 곧 오리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