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용묵의 소설 `백치 아다다`를 보면 아다다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 그녀는 지참금을 가지고 시집 갔다 남편이 돈을 잘벌게 되자 소박을 맞고 돌아온다.
새로 만난 남편도 아주 돈을 밝히는 사람이어서 아다다는 데려가는데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대단한 장점으로 여겼다. 하지만 아다다에게는 아무 돈도 필요치 않았다. 아다다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진정한 사랑이었다.
아다다는 돈이 자기 불행의 씨앗임을 직감했다. 새 남편이 감춰둔 돈을 몰래 가져다 바다에 내다 버린 아다다는 뒤늦게 알고 쫓아온 남편에게 맞아 죽는다. 아다다가 그냥 지냈더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그보다 지금 이 글의 관심사는 왜 아다다를 말 못 하는 이로 그렸을까 하는 것이다. 말을 하지 못해야 아다다의 불행한 삶의 의미를 더 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말 억울하고 슬플 때 우리는 말을 하지 못하고 대신 갑갑한 가슴을 친다. 아다다는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괴로운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하도록 태어났기에 아다다는 진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보통 말을 하며 살아가도록 생겨났다. 우리네 인생을 생각해 보면 사람은 숱한 말을 나누며 살아간다. 사람의 인생은 말을 수없이 주고받는 과정의 연속, 그것이다. 말 없이는 인생도 없다 해도 과장 될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말을 잘 주고받는 일처럼 소중한 것도 없다고. 아무리 많은 말을 주고 받아도 그 속이 허망하게, 텅 비어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단 한 마디의 말로도 상대방을 칼로 찌르듯이 깊은 상처를 내는 일은 또 얼마나 많던가? 실로 나는 오늘날처럼 말이 흘러 넘치고, 또 그 흘러넘친 말들이 홍수처럼 사람을 휘갈기고 휩쓸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도 하는 때가 다시 없었다고 생각한다.
아다다는 그런 말의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생래적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말과 아주 흡사한 성질을 가진 것이 이 세상에는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이 화폐다. 곧, 돈처럼 소중하고도 또 그렇게 타락하기 쉬운 것이 없다.
옛날 유주현의 소설에 `유전 24시`라는 게 있었다. 그것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옮겨다니는 돈의 시각으로 인간 세상을 본 것이었다. 돈이 굴러가는 방식이나 방향을 보면 세상을 볼 수 있다.
사람의 말처럼 사람이 쓰는 이 돈이라는 것도 주고 받고, 모습을 바꾸기가 능란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 안에 진실이 담기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아다다가 말을 못하는 여자로 설정된 것은 그녀가 돈의 가치를 모르고 대신에 사랑의 진실성만을 쫒는 성격을 가진 것과 관계가 있다. 말을 못하는 그녀는 돈을 믿지 않았다. 돈이 행복을 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인터넷이 생기고 나서, 이메일에, 블로그에, 트위터에, 퍼이스북에 너나 할 것 없이들 말하고 쓴다. 옛날에는 말하고 쓸 수 있는 신분이나 계급이 한정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분명 인터넷은 신이 내린 축복이다. 세상을 복되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지금 네이버나 다음을 보면, 또 트위터를 보면 신이 내린 축복을, 진실을 가리고 남을 속이고 정신병적 공격성을 드러내는데 쓰는 일이 너무 많다. 돈처럼 말도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돈 안드는 말이니 생각나는 대로 나오는 대로 쓴다. 남을 보고 죽으라고 쓰고 자기 편을 위해서는 어떤 거짓말도 허용한다.
말이 피를 흘리는 모습이 보인다. 가시 면류관을 쓴 오늘의 말이다.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말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