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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에서 `은세계`로

등록일 2015-01-29 02:01 게재일 2015-01-2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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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춘향전`은 18세기의 국문 고전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최근에는`심청전`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20년 전만 해도 `춘향전` 주해서나 연구서를 꽤 탐독할 정도였다. 또 임방울 같은 20세기 초엽의 판소리꾼이 부르는 `쑥대머리` 같은 것도 아주 좋아해서 신나라 레코드에선가 내던 복각판 씨디도 즐겨 사곤 했다.

이 `춘향전`은 사랑을 주제로 삼은 대작일 뿐만 아니라 사회변동의 바로미터 역할을 한 문제작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김태준은 이 `춘향전`에서 근대를 향한 조선사회의 이행을 보았다. 그가 쓴`조선소설사`에서`춘향전`은 아주 높은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요소 가운데 하나는 어사가 된 이도령이 변학도를 징치하는 대목이다. 변학도는 조선시대의 탐관오리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이도령은 잔칫상을 앞에 두고 그를 꾸짖는 시를 읊는다. 나는 이 시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들어 외우고 있었다. 이 칠언절구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의 맛있는 안주는 만 사람의 기름이라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 눈에 눈물이 흐르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도 높아라”

변학도의 가렴주구를 꾸짖는 시에 문자 깨나 익힌 이웃 고을 등에서 온 벼슬아치들이 허둥지둥 살 길을 찾고자 할 때, 마침내 어사출두의 높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런데 이 호쾌한 장면은 우리가 다들 잘 알고 있듯이 해학이 넘치고 있고, 이로써 변학도를 비롯한 지배계층과 민중의 갈등은 춘향이의 재생이라는 해피엔딩으로 귀결된다.

말하자면, 18세기에만 해도 이와 같은 중화 작용, 갈등의 해소가 가능했다는 말이다.

19세기 말이 되면, 그러나 사정은 달라진다.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걸린 이때 친일파 이인직은 `은세계`를 썼고, 여기서 최병도라는 자작농으로 하여금 정 감사의 가혹한 고문에 항거하다 죽어가도록 설정했다.

이인직의 논리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바, 조선의 지배계급이 이처럼 가혹한 학정을 일삼으니 어찌 왕조를 지탱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작중에서 이인직은 최병도로 하여금 이번에 자신이 정 감사와 타협한다고 해도 거듭 일이 계속될 것이라 하며 벼슬아치를 향한 원한을 간직한 채 죽어버리도록 한다.

이인직은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의 부패와 가렴주구를 들어 나라를 팔아먹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고자 한 것이다.

조선의 역사, 18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시기를 보면 우리는 보다 현명했어야 함을 깨닫는다.

나라와 사회는 어디에나 부자와 빈자가 있고 상층과 하층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유토피아가 아니고는 피할 수 없는 인간 삶의 근본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회, 나라는 이 두 개의 세력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지양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특히 아랫사람들, 빈자들이 삶의 의미와 보람을 얻도록 하는데 큰 힘을 기울였다. 왕도정치니 위민정치니 하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다.

패도에 치우친 시대는 그런 정치가 왜 필요한지 깨닫지 못하고 공자의 고사에 등장하는, 가정맹어호, 즉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말의 뜻에 귀 기울일 줄 모른다.

이때 위기가 닥치게 마련이다. 옛 일을 교훈 삼는 것도 다 이런 파국을 면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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