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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KTX

등록일 2015-03-05 02:01 게재일 2015-03-0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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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KTX가 처음 생겼을 때 참 좋았다. 대전까지 불과 한 시간, 멋진 주행 시간이었다. 마음이 한가롭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훌쩍 갔다 금방 올라올 수 있는 그 단축이 좋았다.

그후 시간이 많이 흘렀다. 2004년 4월 1일에 경부선을 개통했다 하니, 벌써 10년도 더 지났다. 익숙해졌다. 일상이 되었다. 그러자 내 마음도, 생각도 변했다.

요즘 몇 년 동안은 무궁화호나 새마을호를 타고 대전에 간다. 부모님을 만나러, 친구를 만나러, 옛 동네를 찾으러, 생각할 여유 찾아, 시간 나면 느린 기차 타고 대전에 간다.

참 그 두 시간이 좋다. 서울역에서 천원 짜리 원두커피를 사서 천천히 기차를 찾아 오른다. 무엇보다 이 느린 기차들은 좌석공간이 넓다. 기차삯이 싼 데도 자리가 넓다보니 덤을 얻는 기분이다.

기차를 타면, 책을 펴거나 글을 쓰거나 창밖을 본다. 이런저런 생각에도 잠긴다. 그중에도 글을 쓰는 일이 좋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산문도 쓴다. 세상이 좋아지다 보니 스마트폰이라는 게 있다. 배터리만 충분하면 걱정할 게 없다. 빨리, 서둘러 쓸 필요 없는 글들, 스마트폰 글자 찍어 누르는 속도에 정확히 알맞다.

한참 쓰다 머리가 무거워진 듯 해서 고개 들면 창밖이 환하다. 연푸른 하늘빛 아래 메마른 들판, 지붕 낮은 집들, 갈라진 길들, 이파리 없는 겨울 나무들, 전봇대, 날아가는 새, 행인들…. 눈이 밝아지는 것 같다. 머리가 깨끗하게 씻기는 듯하다.

그런데 언제쯤이었나? 무심코 새마을호 표를 사서 탔는데, 그게 바로 새로 생긴 ITX 새마을호였다. 싸고 느려서 좋기는 한데 차량이 낡은 게 단 하나 아쉬움이었던 나는 이 새로운 새마을호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한결 더 넓어졌다. 기차에 올라타면 널찍한 공간이 기다리고 있다. 화장실도 장애인용 시설까지 잘 갖추어져 있다. 여행짐을 올려놓는 선반도 기차 호실 안에 안전하게 설치해 놓았다. 맨 앞자리나 뒷자리에는 좌석을 덜 배치해 드나드는 데 지장이 없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것 하나. 휴대폰이나 노트북을 충전할 수 있는 소켓 플러그들이 앞뒤로 여럿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ITX 새마을호는 꿈의 기차가 되었다. 이 기차에도 식당칸이 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궁화호에는 확실히 있었다. 좌석표를 구할 수 없을 때는 이 식당칸에 가서 커피를 한 잔 사서 창밖을 향해 놓인 의자에 앉는다.

그렇게 창밖을 보며 천천히 여행하는 한가로움은 그 어떤 사치도 부럽지 않을 정도다. 수원, 평택, 천안, 오송 같은 역을 하나하나 세며 대전으로 가다 보면 먼 옛날 비둘기호를 타고 간이역마다 서던 아련한 추억의 냄새가 난다.

며칠 전, 포항에도 KTX 시대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좋은 일이다. 이제 포항도 확실한 일일생활권에 합류했다. 포항에 오가는 일이 많은 내게 반갑다면 아주 반가운 소식이다. 그게 아마 4월 초였다고 했다. 두 시간 이십 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내가 무궁화호나 새마을호 타고 대전에 오가는 시간 정도 된다. 기대도 된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될까? 한편으로 웬지 아쉬운 이 기분은 뭘까? 포항이 그렇게 가까워진다는데 무엇이 어떻게 아쉽다는 뜻일까?

해서는 안 될 말인지 모르겠다. 포항은 웬지 서울에서 멀리 있어야 할 것 같다. 영일대해수욕장 바다, 그 너머 더 파란 동해바다, 깔끔한 바다횟집, 그곳에 가서나 맛볼 수 있는 싱싱한 고래고기, 정 깊은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은 그곳에 더 멀리 있어 늘 더 많이 그리워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그 모든 것들이 지켜질 것 같다.

속도는 그 모든 것을 빼앗아갈 것만 같다. KTX 시대가 정말 열리기 전에 느린 기차를 타고 포항에 가야겠다. 그 바다를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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