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에 공화국을 세우기로 하고 글을 써낸 지 며칠 지나서다. 서울 경복궁옆에 있는 시장 골목에서 어느 일간신문 기자분을 만났다.
내가 남극에 나라 세우는 허황된 얘기를 자랑 삼아 꺼내들자 이 분께서, 이건 농담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남극도 북극도 아닌 제3극이라는 게 있단다. 맙소사. 제3극이라니. 내가 허공에 뜬 얘길 하니 이분도 나를 놀리시려는 건가?
하지만 아니란다. 이건 정말 세상에 정말로 존재하는 곳에 관한 얘기란다.
그분은 당신이 그 제3극을 횡단했다는 분을 인터뷰한 기사를 인터넷에서 찾아내서 내게 직접 보여주었다. 그 기사에는 정말로 이런 문장이 나와 있다.
“무인구(無人區)라는 말을 들어봤을까. 티베트 장북고원(藏北高原) 해발 5천m 지점에 있다. 인류 문명의 모든 기기가 정지되는 곳이다. 잘 가던 시곗바늘이 멈춰버린다. 나침반도 작동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발사된 총알도 날아가지 않는`수수께끼의 땅`이다.”
아. 이런 땅이 있다니. 하늘이 이 사람의 염원을 저버리지 않으사 남북극 공화국에 이어 제3극 공화국마저 구상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구나.
과연 그럴 일이다. 왜 세상에 꼭 남북극밖에, 남자 여자밖에, 오른쪽 왼쪽밖에 없을소냐. 극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들을 중화시키고 화해시키고 서로 통하게 하는 것이 있을지니.
옳다. 제3극이로구나. 제3극 공화국이로구나. 나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것이로구나를 되풀이하며 신이 나 했던 것이었으니.
하지만 흥분도 그뿐이다. 그동안 어찌나 공사에 일이 다망한지 구체적인 방법을 고안해낼 짬을 낼 수 없었다.
역시 이상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더니.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더니. 죽이는 건 쉽고 살리는 건 어렵다더니.
급기야 일주일여를 허송세월한 끝에 오늘 출국일이 닥치고야 말았다. 오늘 이 시간 내로 비행기가 뜨기 전 한 시간 동안 제3극 공화국이라는 멋진 나라를 구상할 수 있을까.
손에 땀이 난다. 하지만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리라 했다던가. 어디 급한 마음을 가다듬고 그분, 그러니까 그 김문이라는, 술도 잘하고 인터뷰도 잘하고, 공상소설까지 쓰는 그분이 정말로 만났다는, 그 박철암이라는 구순 바라본다는 노선생 이야기를 찾아보도록 하자.
있다. 있어. 그 제3극 땅이라는 곳은, 넓이는 우리 한반도 크기에 가까운 22만 제곱킬로미터, 하지만 그 넓다면 넓은 곳에 태고적부터 사람이 안 산단다. 국가에서 지정한 금구라고도 한단다. 어디라고 지명을 얘기해 봤자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티벳 땅 무슨 무슨 산맥 사이에, 또 무슨 무슨 산맥들이 둘러처진 곳에 그 무인구는 있어, 그곳 “장서깡르산(藏色崗日山)과 서우깡르산(色烏崗日山)의 중간 지역에 이르면” 모든 기계가 작동을 멈춘다. 시계도 안 가고 라디오도 안 들리고 차도 엔진이 죽어버리고 총을 쏴도 나가지를 않는단다.
그것 참, 그런 곳이 다 있다니. 그야말로 나라 세우기 적당한 곳이 아니더냐. 신이 서로 괴롭히기 좋아하는 인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복지가 아니더냐. 그곳에는 응당 총칼 부리는 사람들은 살지 않으렸다. 사람이 안 사니 사람 부리기 도가 튼 사람도 응당 없으렸다. 엔진이 작동을 하지 않으니 교통사고도 전복사고도 애시당초 없으렸다.
“대신 스라소니, 곰, 늑대, 황양, 야생 당나귀 등이 천국처럼 살고 있다.”
천국처럼 살고 있다, 살고 있다, 있다, 다, 다ㅡ 하는, 김문 씨의 문장이 내내 내 귓가에 바다 물결처럼 속삭이는 듯하다.
나는 그곳에 나라 만들 자격이 있을까. 그것부터 곰곰히 따져 보아야겠다.
저 정지용 시 `백록담`에서처럼 먼저 마소가 되지 않으면 천국 같은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하물며 나라는 말하여 무엇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