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대구에 갔다. 경북대학교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있었고, 거기서 필자는 작가 이상과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관련성을 이야기 했다.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상, 그러나 그의 명성은 그의 사후에도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뭘까?
혹자는 그를 가리켜 천재작가라고 한다. 하늘이 낸 사람이라 그렇게 잘 썼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뿌려놓은 이야기들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는 기생 금홍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비롯하여 숱한 일화들을 남겨 놓았고, 더구나 폐결핵으로 이르게 세상을 떠남으로써 하늘은 재주 많은 이를 시샘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마도 그의 명성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치부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이상과 도스토예프스키, 특히 소설 `날개`와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비교 검토하면서 얻은 생각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자신보다 앞서 있는 작품들을 단지 감상의 차원에서 읽는 이는 절대로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없다. 이래서 좋았다거나 어디가 나빴다는 식으로 작품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인 작가는 언제나 자기 한계 안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진짜 작가는 그와 다르다. 그는 앞선 작가들을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문학적 현실로 받아들이고, 소화시키고, 또는 그것과 치열하게 싸운다. 말하자면 이상이 도스토예프스키를 그렇게 상대했다.
`날개`의 프롤로그 부분을 보면, 이상은 화자의 목소리를 빌려 “19세기는 차라리 봉쇄하여 버리오, 도스토예프스키 정신이란 차라리 낭비인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떻게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죄와 벌`로, `까라마조프의 형제들`로, `백치`, `악령`으로 오늘 이 시각까지 세계적인 대문호의 지위에서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에는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무식하면서도 오만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덮어놓고 명성을 가진 자를 무시하려 든다. 그가 어떤 정신의 고갱이를 가지고 있었는지 헤아려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충분히 숙고한 후에 초극하려는 사람이다. 이상에 있어서의 도스토예프스키로 말하면,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지닌 의미를 깊이 따져보려 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보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시대인 19세기를 현대로 인식했고, 그 현대의 의미를 깊이 성찰했으며, 자신이 처한 러시아적 현대성과 맞싸우려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유럽적 지성들, 또 그들의 논의를 작품에 끌어들였고, 때문에 불란서의 `앙뉘(ennui)`, 즉 권태를 자신의 소설 속에 이끌어들였다. 유럽적 현대성에 대비되는 러시아적 현대성을 자기 문제로 의식하고 싸워나갔던 것이다.
이로부터 이상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처리하는 방식을 뜯어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시대인 20세기의 현대성을 강렬하게 의식했고, 그러한 맥락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19세기의 현대성을 처리한 방식을 탐구했다.
그 결과가 바로 소설 `날개`였다. 이 소설에서 페테르부르크 네프스키 거리를 살아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는 식민지 시대 경성의 피로한 거리를 주유하는 백치적 지식인으로 재탄생했다. 이 소설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창녀 리자는 창녀적인 아내 `연심`으로 되살아났다.
`날개`를 통해서 보는 이상의 문학은 뼈의 문학, 현실의 본질을 투시해보려는, 엑스선의 문학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마찬가지로 깊은 자의식으로 파놉티콘을 방불케 하는 20세기 초반 서울의 모더니티와 맞싸우려 했다.
필자는 이상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상대하는 방식에서 문제적인 작가가 출현하는 메커니즘을 본다. 훌륭한 작가는 전통을 의식하고 그것에 합류하려는 문제의식을 가진 존재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