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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설이 있는 풍경

등록일 2014-12-11 02:01 게재일 2014-12-1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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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

기차를 타고 보니 며칠 전 내린 눈이 상처 난 살갗에 연고를 발라 놓은 듯 여기저기 얇게 깔려 있다. 꼭 옛날 어렸을 적 삼월 초순 같다. 옛날에는 그때서야 비로소 눈이 녹기 시작했다. 이월까지도 땅이 꽝꽝 얼어붙어 있다 삼월에야 눈도 녹고 흙도 제법 부드러워졌다.

이 잔설들은 꼭 한국의 산야 그대로 같다. 우리 한국의 산야는 하늘에서 보면 숲도 푸른 숲만이 아니요, 군데군데 황토빛으로 얼룩져 있다. 눈이 내린 산하도 온 천지가 하얀 법은 적고 이곳저곳 흙빛이 묻어나 있다. 잔설은 누추하면서도 생생한 삶의 치부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올 한 해가 어떻게 지나가나 했는데 벌써 겨울이다. 한 번 몹시 추웠다 따뜻해졌고 또 추웠다 눈도 많이 내리고 도로 따뜻해지는 중이다. 덕분에 들과 산의 눈들은 많이 녹아 사라졌고 남은 눈들은 눈의 흔적들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뜬금없이 며칠 전에 세상 떠난 박남철 시인 생각이 난다. 새벽 가까워서 누군가 내게 부고를 전했다. 박남철 시인 본인이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포항 사람이고 경희대학교에서 공부했고 남들이 말하는 해체시를 썼고 내가 아는 바, 그는 기행과 악행으로 점철된 인생 후반기를 살았다.

그런데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생각, 이것은 착각일까. 적어도 나만은 그라는 존재가 다른 아무 것도 아닌 세상 떠난 시인 한 사람으로 이 순간 기억된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문자를 받고 나도 아주 오래 전에 그와 주먹다짐을 벌였던 시인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당신이 그 옛날에 때린 그 사람이 오늘에서야 죽었다고. 그가 답신을 보내왔다. 제 주먹이 잠복기가 십 년인 걸 이제 알았습니다. 싱거운, 그러나 씁쓸한 농담.

프리드리히 니체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비극의 탄생`이 생각난다. 그리스인들은 개별화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개별화의 고통이란 무엇이냐. 그것을 나는 인간이 이 세상에 하나의 개체로 태어나 살다 죽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 자연과 우주의 본체로부터 우리는 떨어져 나와 고독한 개체가 되었다. 우리는`나`라는 존재의 경계가 지극히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개체로서 인생을 살아간다.

이 삶의 고통을 우리는 두 가지 예술적 방법으로 지양하려 한다. 아폴론적인 것, 그것은 이성과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 그것은 황홀과 도취, 개체 이전으로의 존재의 환원의 경험을 의미한다.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다. 시인들은 술을 참 많이도 마시는 사람이 많다.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을 지경이 되어 어떤`행복한`시인들은 인사불성이 되어 개별화의 고통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은 채 평온한 망각 속에서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우리는 결국은 이 지구상에서는 영원히 방랑자일 뿐이고 여객일 뿐이다. 우리가 올 때 그러했던 것처럼 아무 것도 지니지 못하고 떠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빈손으로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라면 어느 분이 말씀하셨듯이 죽는 날이 인생의 모든 짐을 덜어버리는 날이므로 기쁜 날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신경주역에서 떠난 기차가 김천에서 한 번 서고 대전에 섰다 천안에서도 한 번 쉰다.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좁은 남쪽에서 KTX는 너무 빠르다. 황토 들판에 이곳저곳 바람의 흔적 따라 남아 있는 잔설들을 감상하며 완만히, 천천히 서울에 가고 싶다. 잔설들 위로 드러난 상처 난 들판 같은 우리네, 빛날 것도 화려할 것도 없는 인생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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