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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에 보리의 새싹을 틔우며

등록일 2014-11-27 02:01 게재일 2014-11-27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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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

새벽에 문득 눈을 떠서 몇 시나 되었나 한다. 다섯 시 십 분쯤 되었다. 다섯 시에 맞춰 둔 휴대폰 알람이 벽에 걸린 외투 속에서 벌써 십 분씩이나 목이 터져라, 꼬끼요, 하고 앓는 닭 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잠결에 이 소리를 무슨 자장가 듣듯이 듣다가 마침내 깨어나 새벽 세상을 마주한 것이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나는 통증이라는 한 마디 말을 떠올린다. 어젯밤에 끊어진 의식이 다시 이어지면서 생각의 꼬리가 머리에 와 닿았다.

과연 내 몸은 통증 투성이다. 허리와 목에 디스크는 만성이 되었고, 이제는 오른쪽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길게 뻗을 수가 없다. 두통에 만성식도염은 나로 하여금 불쾌감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몸은 그래도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다. 어떻게든 일어나 움직일 수 있고 밤늦게까지 견딜 수 있는 체력도 있다.

마음은 그렇지 않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몇 년 전에 텔레비전에서 불행하게 죽은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을 사후에도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연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후의 영혼의 세계라는 것은 오늘날의 과학으로는 충분히 다룰 수 없고, 진실 여부도 판정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요즈음 내가 바로 그 사령들처럼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되풀이하여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 고통을 자꾸 맛보아야만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학대받는데 익숙한 사람은 그 학대가 있어야 자기 안정을 찾을 수 있다던가? 그것은 돼먹지 못한 이론일 것이다. 병자만이, 이미 병에 중독된 사람만이 그런 병적 상태를 자기 존재의 일부분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 원 투 파이브, 새벽 한 시부터 새벽 다섯 시까지, 늦은 밤마다 통증으로 돌아와 잠을 자고 통증과 함께 눈을 뜬다.

오늘은 새로운 단어도 의식의 망막 위에 떠올랐다. 단념이라는 말이 생각 난 것이다. 다들 잊어가는데, 내가 뭐라고 자꾸 돌이켜 생각하느냐 말이다. 아니, 사실은 이런 생각은 솜털만큼도 생기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태의 원인자가 너무 크고, 그것을 가로막고 선 벽이 너무 높아서, 과연 무슨 보람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괴로운 마음이 솟아나곤 한다.

이틀 전인가, 비가 내렸다. 가을이 바야흐로 끝이 났고 겨울이 본격적으로 찾아들리라는 신호다. 비가 오고 나서도 날씨는 갑자기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상 난동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더 깊은 추위가 이 세상에 겨울이 왔음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통증, 그리고 단념. 과연 마음을 끊으면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새벽빛 여명 속에서, 나는 언제 빚을 다 갚을 수 있는지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의 막막한 심정으로 내가 어떻게 이 겨울을 건너갈 수 있는지 생각한다.

이 막막한 눈길을 언제 다 걸어 저편 언덕에 다다를 수 있는지?

측량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생각한다. 사람은 각자의 삶을 살게 마련이므로 나는 통증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자유보다 복종을 사랑한다고 했던 만해 선사처럼 나 또한 통증의 슬픔을 무통의 기쁨보다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리라고.

따뜻한 봄을 가슴에 품고 보리 새싹을 마음 속에 틔우며 살아가야 한다. 내가 바라는 손님이 청포를 입고 찾아오실 것이라고 했다. 곧 올 것이어서 식탁에 은쟁반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선인들은 현실을 비현재화 하고 미래를 이미 임재한 것으로 의식하는 능력이 있었다. 우리 또한 이 지혜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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