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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쫓아오던 햇빛인데지금 교회당 꼭대기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윤동주, ‘십자가’ 전문(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정음사) 단 한 장 남은 12월이 십자가의 그늘을 지난다. 윤동주(1917~1945)의 시를 읽고 나면 쓸쓸해진다고 했다. 비에 젖은 나무가 젖은 흙으로 뿌리를 내리듯 한 시인이 거느리는 무게감을 그저‘쓸쓸’이라는 말로 견인 할 수 있을까. 그가 떠나고 3주기 되던 해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비로소 세상의 꼭대기 첨탑에 걸리었다. 윤동주가 걸어간 자리가 그렇다.“부끄럽지 않고 슬프고도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냐”고 반문했던 시인 정지용의 서문처럼. 온 국민이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그 첫 자리에 드는 시가‘서시’인 것은 ‘별 헤는 밤’‘자화상’등 그의 시편을 대할 때마다 마치 첫눈을 보는 마음처럼 순결해지는 것과 같음이리라.학기를 마무리하며‘영화가 있는 도서관’에서 그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몇몇 학생은 영화의 내용이 지루하고 어렵다고 했다. 상상할 수 없는 시대가 주는 고통과 절망의 낙차 때문일까. 학문과 사상의 자유, 양심과 표현의 자유 등 이미 우리가 성취했다고 믿는 오늘의 위치 때문일까. 그 무엇도 제 것을 가져보지 못한 시대, 주권 없는 그늘이 주는 상실의 폭은 멀고도 깊다. 하지만 대부분 학생은 몰입했고, 감상 후 학생들의 내면 고백은 뭉클한 여진으로 흔들렸다. 이희정 시인 가볍게 산책하려던 마음은 빗나갔다. 이 시를 쓴 때는 1941년 5월 31일이지만“종소리도 들리지 않는데”라는 문장은 11월경에 시를 수정할 때 썼던 얇은 펜으로 삽입되었다. 그 점에 주목해 보자, 시인‘동주’는 왜 이 문장을 삽입했을까. 쇠붙이를 녹여 무기를 만들려고 당시 일제는 쇠붙이란 것들은 죄다 쓸어갔다. 교회 종인들 남을 리가 있겠는가. 당연히“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끔찍한 상황이 되고 만다. 희망이 없는 시대에 그는 종소리 대신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린다고 했다.“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처럼 세상을,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기에 동주의 고뇌는 깊어갔다.언제나 흔들리는 곳에 십자가는 걸려 있다. 정황을 뒤집어 보면 “왜 흔들리는 곳에 십자가를 거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먼저와야 하지 않을까. 사실 그는 십자가를 남발하지 않았고, 종교 언어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 가슴속 울분은 기척도 없이 고결하게 정제되었다. 해서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면 서럽고도 외려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거리는 빙 크로스비의 음성으로 감미롭다. 울려 퍼지는 캐롤과 성탄 트리의 빛으로 더없이 환한, 이런 때 진정으로 빛나게 하는 것은 걸어 둔 십자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아닐는지. 밖을 향한 손쉬운 단죄 대신 안을 들여다보는 깊은 자성을 택한 영혼의 힘은 여기에 있다. 종소리 없이도 더 환하게 울리는 그의 시 앞에서 시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는 한 여학생의 소감 한 줄이 첨탑을 지난다.“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2023-12-10

지방소멸,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위현복 (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인구소멸과 지방소멸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지금 우리에게 동시에 대두된 난제이다.대부분의 지방 시·군 등이 인구가 줄어든 지가 오래고 이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소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난리가 난 상황이지만 수도권에서는 지금도 서울의 도시 경쟁력을 위해서 김포를 서울로 편입한다, 구리를 편입한다며 서울 메가시티 논란에 정치권이 뜨겁다.과도하게 밀집된 수도 서울은 국제적인 도시 경쟁력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입장에선 수도권과 지방격차, 도농격차의 상징이다. 모든 것이 수도 서울로 몰리다 보니 서울은 끝도 없는 주택난과 교통난에 부대끼고 이럴 바에는 제주까지 서울에 편입시켜 나라 전부를 메가시티서울로 개발하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느냐? 하는 자조 섞인 말조차 나온다.지방소멸을 방지하기 위한 여러 대책들이 총선을 앞두고 앞다투어 발표되고 있다. 그 중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지역별 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는 안도 있다. 이 정책은 특정지역, 특정기업, 특정인에게 특혜만 되고 투기만 조장할 뿐이다. 지방에 특화된 산업단지를 조성해도 이제 그곳에 일할 그 지방 사람은 없다. 공연히 외국인 근로자만 몇 명 더 늘어날 뿐이다.지방 소멸을 막기 위해서는 먼저 항상 물이 그득한 큰 댐(중급 대도시)이 존재해야 하며, 큰 댐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다양한 작은 수자원, 실개천이 튼튼하게 지탱해야 하는데, 그러면 아무리 큰 가뭄이 와도 들판이 살고 식물이 자라야 사막화를 막을 수 있고 소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지방의 사막화를 막으려면 먼저 댐을 채울 수원지, 수자원을 살려야 하는데 지금 당장 메마른 댐에 물을 보내줄 주변의 수자원으로 무엇이 있는가?특별시와 광역시를 빼고 전국 163개 시·군 등 각 기초자치단체의 면적은 대략 서울시와 비슷하다. 그런데 모든 부의 90% 가까이가 163개 시·군 중 하나와 면적이 비슷한 서울에 집중되어 있고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부의 규모는 형편없이 쪼그라든다. 서울에서 먼 지방에도 기본적인 부가 흘러넘쳐야 5일장도 살고, 각 급 학교도 살고, 사람도 살 수 있을 텐데, 산업화·근대화의 첫 번째 피해자가 지방인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서울-지방간 격차를 줄이고자하는 근본적인 노력 없이 수도권으로 자원과 인력을 빨아들이기만 했다. 지방이 살려면 지방이라는 전통적인 수원지에 물(부)이 흐르게 해야 한다.서울의 토지는 평당 1억 호가하는 땅이 수두룩한데 지방의 문전옥답들은 평당 10만 원 이하가 수두룩할 뿐더러 ‘LH투기 사태’ 이후 농민이 아니면 농지구입을 원천적으로 막아 농지거래는 희귀한 일이 되어 농지를 통한 생산소득이나 농지거래소득이 끊어진지 오래다. 첫째는 농지생산소득 증대 방안을 찾아서 농지생산가치가 평당 100만원을 넘어서게 해야 하고, 둘째는 농지거래를 활성화시켜 외부 자본이 농촌에 흘러넘치게 해야 한다. 셋째는 그렇게 흘러넘치는 물(부, 자본)을 댐(중급 대도시)에 모아야 지방 소멸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일본에서는 지방소멸 대책으로 거대도시 도쿄와 오사카 사이에 지역거점도시로 100만 명 정도의 중급 대도시를 적극 키우는 정책을 추진하였다.청송·봉화 사람들이 서울·부산으로 한 번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지만, 안동이 100만쯤 될 경우 청송·봉화 사람들이 안동 가서 살면 주말에 고향에 자주가게 되고 그러면 언젠가는 다시 고향 청송·봉화로 많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우리나라는 늦은 감이 있지만 안동 정도가 힘들면 현 광역시를 중심으로 댐 역할을 하도록 지역별 중심도시로 활성화시켜 나간다면 지방이 그냥 속수무책으로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경상북도에서 볼 때 포항·경주·영덕 정도를 하나의 경제권·생활권으로 묶일 수 있도록 선제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소멸되는 사태는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무엇보다도 지방 구석구석으로 물(자본)이 흘러들어 댐(중급 대도시)의 수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 마침 태양광농사(농지태양광 발전사업)는 현재 쌀농사 기준으로 영농복합형 태양광발전 사업은 8배 이상 소득증대가 기대되고, 순수 농지태양광 발전만 할 경우 38배, 스마트팜 융복합사업을 할 경우 현재보다 310배 정도의 소득증대가 예상되므로 농촌, 지방의 획기적인 변화와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댐에 충분히 물을 채울만한 수자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농촌, 지방에 물(자본)이 흘러넘치면 지방도 풍요로워지고, 지방이 풍요로워지면 지방 소멸도 막을 수 있고, 국토균형발전도 자연스레 이뤄질 것이다.재생에너지는 분산에너지라 한다. 에너지의 분산은 곧 부의 분산이고 부의 평준화이며 경제민주화의 구현이다. 적극적인 재생에너지 정책과 농지태양광 발전사업 활성화는 에너지 전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토균형발전과 빈부격차해소와 지방소멸 방지뿐 아니라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수 있는 만능 해법이 될 수 있으니 반드시 추진해야할 일이라 생각한다.

2023-12-10

사람 앞에만 서면 두근두근

사공정규 동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학박사 오늘은 발표가 두렵다는 30대 K과장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K과장은 매월 1회 회사 전체회의에서 발표해야 한다. 평소 직원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괜찮은데, 많은 사람 앞에 나가서 발표할 때는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감이 엄습한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목소리가 떨리고 얼굴이 붉어지고 식은땀이 난다. 미리 적은 것을 읽는 것조차도 힘이 든다. 중요한 발표가 있는 날이 다가오면 전날 두려움과 불안으로 한숨도 못 자기도 하고 발표가 끝나고 나면 온종일 몸살을 앓기도 한다.K과장은 정신과적 검사와 진단적 면담을 통해 사회불안장애(Social Anxiety Disorder)로 진단됐다. 사회불안장애는 오랫동안 사회 공포증으로 불려 왔으며, 현재는 두 명칭이 혼용되나 사회불안장애가 대표 진단명이다.사회불안장애의 핵심적 특징은 타인에게 자세히 관찰될 수 있는 사회적 상황에 노출되는 상황에 대해 극도로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며 사회적·직업적 상황 등에서 현저한 고통이나 손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사회적 불안장애에서 말하는 사회적 상황의 대표적인 경우를 살펴보면, 여러 사람 앞에서 수행(예: 발표, 노래, 연주 등)을 하거나 어떤 행동(예: 음식을 먹거나 마시는 자리)을 하는 상황, 시험 특히 면접을 보는 상황, 낯선 사람이나 권위 있는 사람을 만나거나 대화를 하는 상황, 공중화장실에서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소변을 보는 상황 등이다. 불안장애의 분류에 속하는 공황장애, 범 불안장애의 평생유병률은 각각 3%, 9%인데, 사회불안장애의 평생유병률은 10% 정도이다. 사회불안장애는 이렇게 흔한 질병임에도 진단이 잘되지 않고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떨리고 긴장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므로 수줍음이 많은 성격 탓이라 치부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불안장애는 단순한 수줍음을 넘어 그 정도가 지나쳐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다는데 문제가 있다. 즉, 학교 적응, 취업률, 직업적 생산성, 사회경제적 지위, 낮은 사회적 안녕, 심지어 삶의 질과도 연관된다.만약 수줍음도 아주 심해 일상적인 사회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사회불안장애로 진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어린 시절의 수줍음은 대부분 거듭된 사회적 노출을 통해 호전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과는 반대로, 사회불안장애는 사회적 상황이 늘어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해지는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특히 사회불안장애는 공황장애, 우울장애, 알코올 의존, 약물 의존 등의 후유증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불안장애는 상황이 반복될수록 자신의 불안한 예측대로 들어맞는 것만을 기억하며 점점 악화한다. 사회불안장애를 단순한 수줍음으로 방치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치열한 경쟁 속에 사는 우리는 사회불안장애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고, 사회불안장애는 약물치료나 인지행동치료로 치료가 비교적 잘 되는 질환임에도 정신과를 잘 찾지 않는 경향이 있다.사회불안장애의 약물치료에서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는 꾸준히 복용하면 공포감, 불안감을 덜어 주는데 효과적이고 벤조디아제핀계 약물은 치료 초기 불안이 아주 심할 때 사용할 수 있고, 발표 공포증에 흔히 사용하는 베타 차단제(인데놀)는 신체적 증상(예: 떨림, 심계항진, 발한)을 완화하는 데 즉각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인지행동치료에는 왜곡된 생각을 고쳐주는 인지치료, 사회적 상황에 직면하여 연습하는 직면치료(노출치료), 긴장 이완을 해 신체적 증상을 조절해주는 신체조절법(이완치료법)이 있다.사회불안장애 환자는 2가지 핵심 인지왜곡이 있다.첫째, 모든 사람에게 인정, 칭찬을 받아야 한다. 완벽해야 한다는 인지왜곡이 있다.둘째, 사회적 평가에 대한 조건적 신념, 내가 실수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정적(예: 무시하거나 싫어할 것이라는 등)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인지왜곡이 있다.이러한 인지왜곡적 생각들이 두려움과 불안, 신체적 증상(예: 떨림, 심계항진, 발한)들의 증상을 일으키게 되고 증상을 줄이기 위한 방어적 시도들이 오히려 증상을 악화시킨다. 사람들에게 사회불안에 대한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예를 들면, “나는 지금 (주요하신 여러분들) 앞에 서니 상당히 긴장되고 떨린다”고 말하면, 상대방도 존중해주고 나는 겸손해 보이며 내 긴장도 풀고 1석3조이다.오히려 사람들이 더 긍정적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커진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과 같은 부족함을 발견하면 공감하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오히려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다.그런데 사회불안장애 환자들은 불안한데 불안을 보이려 하지 않으려 하기에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지고 더 불안해진다.오히려 자신의 사회불안을 알려라. 자연스러워진다. 덜 불안해진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2023-12-10

한계를 뛰어넘는 힘, ‘겅호’(工和)

장광일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선물’ 등과 같은 우화식의 경영서를 보면 재미도 있고, 감정이입이 잘 되어 그 메시지를 잘 전달 받을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그런 책 중에서 필자가 기업에서 혁신 컨설팅을 하는데 큰 영향을 준 책이 바로 ‘겅호’라는 책이다. 16년 전 QSS혁신 컨설턴트로 올 때 자신감을 주었던 이 책의 지혜는 기업에서 조직의 변화를 불러 일으킬 때 아직도 실천하고 있는 내용이다.‘겅호’를 한자로는 공화(工和)라고 하며 ‘침체된 조직에 열정과 패기, 용기 그리고 직무 혹은 임무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한한 책임을 달성하자’라는 강한 신념의 파이팅 구호이다.이 책 내용은 윌튼이라는 쓰러져가는 공장에 페기라는 공장장이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무기력증에 빠져있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의에 빠지지만 앤디라는 부하 직원에게 조직을 살리는 지혜를 배우게 되고 이를 현장에 실천하여 새로운 공장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이후 미국 대통령상인 말콤볼드리지상을 수상하는 실화이다.무너져가는 회사를 멋지게 성장시키는 핵심요소를 세 마리 동물의 지혜로 배운다.첫째 동물은 다람쥐이고 ‘다람쥐 정신’이다. 식량을 모으지 않으면 겨울을 날 수 없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동기부여가 되어 부지런히 먹이를 모으는 것이 다람쥐 정신이다. 즉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둘째 동물은 비버이며 ‘스스로 일하는 방식’이다. 자신들의 집이 폭우에 허물어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먼저 본 비버가 즉시 보수한다는 것이다. 즉 팀원 모두가 목표 달성에 필요한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적합한 일을 적합한 방식으로 스스로 추진하는 것이다.셋째 동물은 기러기이며 ‘칭찬과 격려의 선물’이다. 수천㎞의 멀고 먼 목적지를 여행하는 이들은 그 먼 거리를 V자로 날면서 선두에서 날던 기러기가 뒤로 처지면 다른 기러기가 선두 자리에 나서면서 다같이 힘내라고 울음소리를 낸다. 즉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면서 에너지를 얻고 나아가는 것이다.나를 변화시키고, 동료를 변화시키고, 조직이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하게 하려면 첫째 나의 삶의 터전인 직장에서 가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하고, 공동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둘째 스스로 일을 완성하는 조직은 일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최신 정보들은 공평하게 제공하고, 비밀이 없도록 해야한다. 셋째 팀원의 임무에 대하여 완료된 일의 결과에 대해서만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진행과정에서도 서로 응원하고 격려해야 동기부여가 확실히 이루어진다.동기부여에 의해 일어나는 열정(Enthusiasm)은 임무(Mission)와 격려(Congratulation)에 비례해서 증가한다고 한다. E=MC2 공식을 기억해야 한다.자신 스스로 묶여있는 한계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겅호 정신’으로 무장해야 하고, 세가지 동물의 지혜를 몸소 실천해야 한다. 기업의 변화를 일으키는 혁신 구호로 “지금 할 일은 지금, 오늘 할 일은 오늘, 즐겁고 신나게,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라는 구호를 외쳐본다.

2023-12-10

가까운 사람이 기뻐해야 멀리서 찾아온다

유영희 작가 올 12월에도 작년에 이어 지방 의회를 방청하고 있다. 의원들의 질의를 듣다 보면, 일부러 검색하지 못한 세세한 지역 소식을 알게 된다. 올해는 내가 사는 지역의 출산율이 0.5명대라며 육아 환경 질의가 오고 갔다. 나 역시 몇 년 전에 결혼한 두 딸에게 아이 낳는 것을 부추겨야 할지 망설이는 상황이라 관심이 갔다. 맞벌이하면서 육아를 해나갈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잘 되어 있는지 걱정되기 때문이다.출산율 하락이 세계적인 추세이기는 하지만, 한국 출산율의 하락 추세는 더 가파르다. 전국 출산율은 0.78명을 기록했고, 서울은 3년 전에 0.5명대로 떨어졌다. 이 수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2021년 평균 합계출산율 1.58명의 절반 수준인데, 앞으로 전망은 더욱 어둡다. 현재 인구 소멸을 걱정해야 할 지역은 인구소멸 고위험지역과 위험지역, 주의지역으로 지정된 기초자치단체를 합하면 전체 지자체 226곳 중 90%가 넘는 206곳이나 된다. 광주광역시조차 인구소멸을 걱정한다니,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취임 때부터 이민청(출입국·이민관리청) 신설을 주장하고 있다. 다만 이번에 추진하는 이민청은 완전한 신설이라기보다는 기존 기구의 승격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이미 있었던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의 업무에 외교부, 여성가족부, 행정안전부, 고용노동부 등에 흩어진 이민정책을 모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관리 업무는 1961년부터 법무부 산하에 있던 출입국관리소가 맡아 왔고, 이것이 2007년에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로 전환되어 외국인 등록이나 영주권 업무를 지금까지 담당해 왔다.이런 움직임에 대해 이주민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이자스민은 이민청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민청 설립만으로는 저출산 문제를 다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주민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출산율이 높아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77년생인 이자스민 자신만 해도 현재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필리핀에 살았더라면 더 낳았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참고로, 2022년 필리핀의 출산율은 1.9명이지만, 2020년만 해도 2.78명이었고 그 전에는 훨씬 더 높았다.‘논어’ 자로 편에는, 섭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가까운 사람이 기뻐하면 멀리서도 찾아옵니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민청 설립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한국이 아이 낳기 좋은 정치를 하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들도 아이를 낳기 어려운데, 이주민이 아이를 낳고 영주하기는 더 어렵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사용하려고만 한다면 출산율 제고는 더 불가능하다.먼저 한국에서 살고 있는 미등록 외국인들부터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고급 인력이 오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한국에 온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떠나지 않게 할지 이주민 정책을 잘 세워야 한다. 이것이 이민청이 저출산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2023-12-10

탄탄 단상 / 늘 숙제였던 삶

죽음의 강을 건널 때에 마지막 남기는 글을 세간世間에서는 사세辭世라 하고 불가에서는 임종게臨終偈, 열반송涅槃頌 혹은 입적게入寂偈라고도 한다. 선승들이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소회를 짧게 압축하여 후세에게 주는 글 대부분은 한마디로 인생의 무상함이다. 인간에게서 읽고, 쓰고, 느끼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대함이다. 한낮의 태양처럼 찬란한 역사든, 깊은 밤의 달빛에 젖은 야사든, 선인들께서 남아있는 자들에게 삶에 있어서 다시금 내밀히 관조하게 하려는 마지막 가르침이며 오롯이 할喝이요 방棒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삶의 등불을 켜주는 이는 죽은 자들이지만, 그들이 마지막 남긴 글 가운데 뼈에 사무친 말 대부분이 인생이 꿈만 같고 꿈꾸다 가는 것이며, 인생 성공의 삼위일체라는 출세욕, 물욕, 명예욕 이 모든 게 부질없으니 방하착放下着하라는 말이다. 인생이 "풀 초草, 이슬 로露" 풀에 맺힌 이슬과 같다 하여 초로인생이라고도 하지를 않던가? 아침나절 풀잎에 맺혀 있는 이슬은 한낮의 햇볕이 나면 흔적도 없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하니 덧없다고도 하지를 않던가? 불교든, 노장사상이든 주된 가르침은 내가 최고라는 오만방자하고 교만한 마음을 속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내 복력에 넘치는 지나친 욕심을 지니거나 잘난척하려는 얼굴 표정도 버려야 한다. 만사를 자신의 의지나 뜻대로 관철해 보려는 욕심 역시 버려야 한다. 공孔씨 가문의 큰 선생께옵서도 죽으실 때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입을 열어 보이시며, 다 빠져버린 이빨에 유일하게 남은 혀를 보임으로써 부드러운 게 진정 강함을 비유하여 몸소 보여 주었다 하지를 않던가? 세상을 다 지닌 절대 권력자라도, 가질 것 다 가진 부자라 하여도 만족하지 아니하고 더 욕심을 낸다면 권세와 재물의 노예일 뿐이며 거리의 노숙자만도 못한 부자유한 자가 아닐는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착취하거나 압박하여 타인을 궁지에 몰고 남을 어려움에 처하게 한다면 어찌 그를 인생의 승자라 할 것인가? 아프리카의 건조기에 수만 마리의 누우 떼가 살아남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건너야 하는 극지의 강에서 먼저 몇 마리가 뛰어들어 스스로 악어의 밥이 된다고 한다. 사실 유무를 떠나 몇 마리의 숭고한 희생으로 누우 떼가 유유하게 그 강을 건너게 하는 불멸의 리더십이 아닐 수 없다. 아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지? 무엇을 버리고 내던져 인습의 구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어야 하는지? 평야의 어느 어두워진 초막에서 달을 바라다 보며 조급한 고뇌에 빠진다.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나 내 살아온 이야기 전부를 보여 줄거나. 한 시대를 풍미하거나 한때의 영화를 누렸던 이들이여, 십수년 후면 우리 모두는 고인이 되어 한 줌 재로 돌아갈 터이다. 모질게 가지려고만 누리려고만 하덜말고 한번쯤 되돌아 보세나. 아, 그러고 보니 나 또한 부끄럽고 치욕스럽게 지나온 삶이었네라.

2023-12-08

‘달빛고속철도’와 정치력

홍석봉 대구지사장 ‘달빛고속철도특별법’의 연내 본회의 처리가 물 건너 가는 모양새다. 대구와 광주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사업이다. 지난 5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상정됐다. 하지만 결국 국회 소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동서화합과 지역균형발전의 염원을 담은 프로젝트였다. 헌정 사상 최다인 여·야 국회의원 261명이 공동 발의했다. 이례적인 기록이다. 연내 통과를 장담했다가 결국 헛물만 삼켰다. 의원들 스스로 약속을 깼다. 국토교통부와 기획재정부 등 관련 부처가 강력 반대했다.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와 철도 복선화 등 예산조달 방안이 문제였다. 공청회를 열어 전문가 의견을 듣자는 말도 나왔다. 앞뒤 재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밀어붙인 것이 화근이었다. 정부부처의 이견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공동발의했던 의원들이 뒤늦게 말을 바꾼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졸속 입법을 자인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는다.홍준표 대구시장도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그는 “자기가 법안 발의해놓고 반대하는 기이한 국회의원도 있다”며 “법안 내용을 알고 반대했다면 그런 이중인격자는 국회의원을 더 이상 해선 안 되고, 법안 내용도 모르고 발의했다면 그런 사람은 동네 의원도 시켜선 안 된다”고 질타했다.영호남은 소백산맥에 가로막혀 교류가 차단돼 이질적인 문화권이 형성됐다. 소원했던 양 지역에 지역 감정이 싹텄고 정치권이 불 질렀다. 선거때마다 되풀이되는 고질병이 됐다. 1981년 착공, 1984년 개통한 ‘88고속도로’는 동서화합의 상징이었다. 88고속도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영호남 상호교류 촉진과 지방 산업 활성화를 목적으로 건설됐다. 2015년엔 4차선으로 확장하고 이름도 ‘광주대구고속도로’로 바꿨다. 양 지역 교류가 활성화됐다.여기에 더해 광주시와 대구시가 양 지역을 잇는 고속철도를 만들자고 의견 일치를 봤다. 이렇게 11조 원의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당초 달빛철도는 사업성이 떨어져 계획에도 없었다. 그러다가 2021년 6월, 4차 국가철도망 구축 사업에 포함됐다. 이에 양 지자체와 정치권이 합심해 밀어부쳤다. 양 지자체장의 치적 욕심도 불을 당겼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예타통과가 어렵다고 판단한 양 단체장은 정치권을 부추겼다.특별법을 만들어 해결하자는 것이다. 지역 발전과 동서화합이라는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명분을 내세웠다. 이 대명제 앞에 여야 국회의원 261명이 참여, 달빛철도특별법을 공동 발의했다. 양 지역 지자체와 지역민들도 쌍수를 들고 반겼다. 연내 국회통과와 내년 예산 반영 등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달빛고속철도특별법은 연내 국회 통과가 무산됐다. 지역민들의 기대가 무너졌다. 장밋빛 희망에 안주했던 것은 아니었나 반성의 소리도 나온다. 한쪽에서는포퓰리즘 지적도 나왔다.시작은 창대했다. 하지만 결국 국회 벽을 넘지 못했다. 정치인들의 과욕과 무책임이 빚은 참사였다. 다시 시작하면 되겠지만 이미 동력을 잃었다. 정치권의 무책임을 질타하는 여론이 팽배하다.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2023-12-07

경북대의 선택

우정구 논설위원 윤석열 정부는 비수도권 소재 대학 30군데를 선정해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대학으로 키우는 글로컬대학 육성사업을 벌이고 있다. 올해 10군데 대학을 선정했고, 내년에도 추가 선정한다. 선정된 대학에 대해서는 매년 1천억원의 파격적 예산도 지원한다.올해 경북에서는 안동대(경북도립대와 통합), 포항공대가 선정됐다. 대구는 해당 대학이 없다. 글로컬대학은 지방대학을 글로벌 수준의 대학으로 키워 지역사회와 경제를 혁신적으로 이끌도록 하는 사업이다. 학령인구 감소와 지방소멸 위협에 놓인 지방도시를 대학의 담대한 혁신을 통해 지역사회와 대학이 함께 동반성장하자는 것이다.교육계는 글로컬대학 사업을 비수도권 대학의 구조조정 사업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망한다”는 말은 옛말이다. 현재의 학령인구 추이로 보면 20년 후에는 비수도권 대학은 모두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수도권 대학의 정원만으로 전국의 학령인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올해 글로컬대 선정에 탈락한 국립 경북대가 국립 금오공대와 통합 논의를 벌인다는 소식이다. 내년도 글로컬 대학 공모를 앞두고 두 대학의 논의가 어떻게 진척을 볼지 모르나 학생들의 반대도 만만찮아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부산의 경우 국립 부산대와 부산교대가 통합을 조건으로 올해 글로컬대학에 선정돼 한발 빠르게 앞서가고 있다. 경북대는 금오공대와 통합은 물론 대구교대와의 통합도 과제로 남아 실제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대구 유일의 국립 경북대가 글로컬대학 선정에 빠지는 것도 좋지 않은 모양새다. 내외적으로 압박을 받는 경북대의 선택에 특별히 관심이 가는 이유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2-07

개쑥갓 겨울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12월의 들길을 걷는다. 거의 날마다 들길 산책이 주요 일과였으니, 올해도 들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온 셈이다. 좋게 보면 유유자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허송세월이었다. 하지만 남이야 어떻게 보든 후회나 미련이 남는 행로는 아니었다. 내가 들길을 걸으면서 누린 자유와 여유를 그 무엇과도 바꿀 생각은 없다. 그다지 어려운 길은 아닌데, 아무나 쉽사리 선택할 수 있는 길도 아닌가 보다.들판은 사철 살아있는 경전이다. 날마다 들길을 걸으면서 시시각각 오관으로 그 경전을 읽는다. 오늘은 이 경전의 개쑥갓에 밑줄을 긋는다. 개쑥갓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식물도감에는 국화과의 한해살이 식물로 봄부터 늦가을까지 성장을 하면서 끊임없이 꽃을 피우는 걸로 나와 있다. 하지만 한반도의 동남쪽인 이 지역에서는 상당수가 산 채로 월동을 하면서 날씨가 조금만 풀려도 꽃을 피운다. 물론 냉이나 봄까치꽃, 광대나물 같은 풀들도 양지쪽에서 월동을 하지만 개쑥갓의 겨울나기는 어느 풀에도 뒤지지 않는 것 같다.자연 경전에는 우열이나 귀천이 없다. 사람들은 삼라만상의 가치를 따지거나 의미부여를 하고 가격 매기기 좋아하지만, 자연에는 아예 그런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냉이는 냉이대로 개쑥갓은 개쑥갓대로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고 생명으로서의 역할이 있을 뿐이다. 비교나 경쟁이나 차별 따위가 불필요한 것이다.월동하는 풀들은 풀잎에 솜털이 나고 갈색으로 변한다. 엽록소를 버린다는 것은 성장을 멈추고 일종의 동면상태에 들어간다는 의미일 터이다. 개쑥갓에게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 계절인지, 왜 혹한의 계절에도 악착스레 살아남으려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극한상황 속에서도 포기하거나 좌절하는 기색이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조건만 주어지면 최선을 다해 살아있는 것에서 생명의 엄연함을 읽는다. 한편으로, 한 점 생기도 다 소진하고 바싹 마른 잎이나 대궁으로 겨울바람에 쇠락해가는 다른 풀들이라고 나약하거나 소심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생을 깨끗이 비워버린 허허로운 모습 또한 서늘한 의지로 다가온다.들판 가운데 멈춰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생각해본다. 내가 걸어온 길은 들길이고 서 있는 곳은 들판이다. 바싹 마른 억새가 같은 키로 서 있고 둑길 양지에는 가까스로 월동을 하는 풀들이 있다. 며칠 전에 도착한 청둥오리들이 무리지어 바삐 날아가고 까치와 비둘기, 참새 같은 텃새들도 먹이를 찾아 내려앉는다. 겹겹이 껴입은 옷의 두께만큼 저들과는 멀지만, 마음만큼은 나도 슬며시 저들의 자유에 끼어들고 싶다. 지나친 욕심을 내려놓고 단순하고 소박해져야 근처라도 갈 수 있을 것이다.들판이라는 경전에 쓰인 말씀들은 모두가 불립문자(不立文字)다. 개념이나 의미나 가치로 규정되기 이전의 날것이다. 뭐라고 서둘러 규정짓지 말고 단정하지도 말고 아집이나 독선, 고정관념에 빠지지도 않아야 보이고 들리는 우주의 메시지다. 개쑥갓도 그렇다.

2023-12-07

지방 균형발전의 꿈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우리나라의 수도권 집중 현상은 심각하다. 수도권 면적이 국토의 약 12%인데 인구의 50%가 몰려있어 비수도권 즉, 지방소멸의 위험지역은 12년 사이에 2배로 늘어났다. 국가 경쟁력은 훼손되고 지역 간 양극화로 국민의 불안감은 커지는 가운데 17개 시·도는 ‘지방분권-균형발전’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지방시대를 열자”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방시대 5대 전략은 교육혁신을 통한 지역 혁신 인재를 양성하고 특화 산업을 일으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시킴으로써 2030세대의 정착을 유도한다는 것이다.“지방소멸을 막자”는 목소리가 높다. 지방 균형 발전과 함께 경제 성장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그 보장의 원칙으로는 공업의 합리적 배치, 생산력의 적합성과 함께 교통 인프라 구축도 필요하게 된다. 지방마다 자연조건과 자원의 분포 상태가 다름으로 각자의 끊임없는 정책 개발과 실현이 중요하다.인구소멸과 투자가 없는 지방을 방치하게 되면 국가 균형발전이 깨어지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어진다. 국회는 ‘지역 균형발전 포럼’도 열고 권역별 메가시티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경북도는 2년 연속 산업통상자원부의 ‘투자유치 우수 지방단체’에 선정되어 지방세 30억 절감 효과를 가져왔으며 내년에도 지자체 지원이 가능하다. 그 평가는 투자유치, 투자 수행 방식, 사업 이행관리 및 만족도 등을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2024년부터 경북도 내의 균형발전 낙후 지역인 상주 문경 의성을 비롯한 11개 기초지자체는 국고보조비율 10%를 상향 지원을 받게 된다. 2차전지와 반도체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특화단지 2곳과 국가산단 후보지 3곳을 선정하는 등 경북도의 산업구조를 바꾸려고 한다.1960~70년대 울산은 반도체와 자동차, 선박 제조 산업을 통해 힘찬 공업도시로 발전하였고, 경기 화성은 근래 반도체와 자동차 산업을 집중시켜 신도시로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으며, 포항은 70년대 포항제철을 중심으로 동해안의 굴지의 철강 도시로 우뚝 섰었다. 그러나 이러한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는 지방자치는 갈수록 위축되고 국가균형발전은 요원한 듯하다. 인구 감소, 고령화, 지역 격차 등을 이겨나가도록 주민복지와 생활여건 개선을 위한 스마트빌리지 사업도 키우고 지방투자 촉진 보조금을 통한 기업의 지방투자 활성화도 지원하고 있다.경북도는 ‘K-U시티’ 사업에 ‘배우고 익히고 누리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2개 시·군에 맞춤형 사업과 지역 대학과의 인프라 구축을 통해 미래 신도시, 청년 정주 도시를 만들려고 한다. 구미는 반도체 산업을 금오공대 구미대와, 의성은 세포배양 산업을 영남대와, 포항은 2차전지 산업을 포항공대와 한동대 등과 협력하기로 하였다. 또 블루밸리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여 전기차 배터리의 재활용 클러스터를 만들고 일반산업단지에서는 2차전지 및 산업용 가스생산설비를 만들겠다고 한다.산업과 함께 교육 인프라도 중요하니 포스텍의 연구중심 의과대학도 꼭 설립되었으면 한다. 지방 정주와 교육, 문화와 산업 등 5대 분야의 대전환 정책이 달성되었을 때, 진정한 지방 균형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다.

2023-12-07

김장철이 되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이맘때면 김장 담그기가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집안 행사다. 11월의 주부들의 인사는 “김장은 했느냐”, “올해는 배추 몇 포기나 할 것이냐”이다. 나도 해마다 그런 인사를 받지만 대답은 한결같다. “전 김장하지 않아요.”결혼한 지 42년째다. 김장을 딱 두 번 했다. 아, 올케들이 와서 한 것까지 치면 세 번이다.젊었을 적, 한 5년 시어머님과 함께 살았다. 모시고 살았다기보다 얹혀살았다는 표현이 맞다. 시간강사로 학교에 다니면서 학위공부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어렸다. 어머님께서 전적으로 살림 맡아주시고, 아이들이 제법 클 때까지 돌봐주셨다. 큰살림을 척척하셨던 어머님이셨다. 친척 중에 잔치가 있으면 메밀묵을 쒀서, 혹은 유과를 만들어 보내시곤 하셨다. 김장철, 이른 아침에 눈 뜨면 배추 100포기가 마당 한켠 수돗가에 쌓여 있었다. 저녁에 거들어야지 생각하고 퇴근 후에 돌아오면 이미 버무려놓으셨다. 일손 빠르신 어머님 덕분에 나는 겨우내 김장독에서 물에 둥둥 뜬 김치를 건지느라 애를 먹었다.그즈음 한해, 어린 마음에 객기를 부렸다. 그래도 명색이 며느리인 내가 김장을 해야지 싶었다. 한식요리책을 사서 김치 파트를 열심히 공부했다. 비늘김치, 호박김치, 개성보쌈김치 등 맛있고 특색있어 보이는 김치 몇 가지를 멋부리듯 만들었다. 결과는 실패. 한 달쯤 후 어머님께선 늦은 김장을 다시 하셨다.김치냉장고가 처음 나올 때였다. 김장하자던 남편에게 김치냉장고를 사주면 하겠다고 했더니 남편은 바로 사들였다. 그 해 또 한 번의 김장을 한 게 내 인생 김장 역사의 전부다. 10년 전 이맘때, 친정엄마가 돌아가셨다. 엄마를 모셨던 오빠는 청주에 살았다. 고향 가까운 대구에서 장례를 모시자며 형제간 합의했고 우리 집에서 모든 상을 치렀다. 장례 후 삼우재까지 지내려 삼남매와 올케들이 모두 집에 있었다. 이참에 김장이나 하자며 큰 올케가 주도해서 집엔 갑자기 김장 풍경이 펼쳐졌다.내가 김장하지 않아도 우리 집엔 맛있는 김장김치가 해마다 넘쳐났다. 큰집과 작은집 형님들이 직접 농사지은 배추로 담근 김치와 쨍한 맛의 동치미는 겨우내 식탁에 올라 우리 식구를 감동시켰다. 올케도 김장을 하면 해마다 보내주었다. 싱싱한 명태를 넣은 김치는 감칠맛이 그만이었다. 이웃에 사는 친구도 김장하는 날이면 김장체험하라며 부르곤 했다. 그리고는 한 통 가득 김장을 나눠주었다. 대학교 은사님의 사모님도 김장철이면 일부러 전화를 주셨다. “이 교수 올해도 김장 안했지. 그럴 줄 알고 좀 더 담았으니 가져가시게.” 이렇게 동서표, 올케표, 친구표에 사모님표까지 다양한 김치가 넘쳤다.최근에는 김장할 줄 모르는 내 처지를 아시는 청도의 어르신은 직접 아파트에 가져다 두시고 안동의 한 어르신은 택배로 보내주신다. 올해는 안사돈께서 귀하게 담근 배추김치에 고들빼기김치며 들깨김치까지 보내시니 황송하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세상에 나같이 김치복, 아니 인복 많은 이는 다시 또 없을 거다.

2023-12-06

손목 통증과 팔의 역학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손목 통증은 별 것 아닌 통증으로 보는 사람이 많고 실제 환자들도 그렇게 내원한다. 물론 오래되지 않은 손목 통증은 위치를 잘 잡고 적절히 치료를 잘하면 잘 낫기도 하나 손목에 구조적 부정렬이 있는 경우는 잘 낫지 않고 환자 본인도 심한 통증을 호소한다. 손목 건초염의 경우에는 상당히 치료가 어려운 것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 손목 터널증후군과 같이 신경이 눌리는 질환은 단순히 손목만 치료해서는 잘 낫지 않고 목 어깨를 교정해야 좋아진다. 손목 질환은 팔꿈치 요골 부위를 압박하면 그곳이 불편한 경우가 많다. 손목부터 팔꿈치 어깨, 목까지 톱니바퀴처럼 서로 관절로 연결돼 있어 이 중 한 곳의 심한 통증은 다른 부분도 같이 치료해야 빨리 좋아진다.사람들은 대부분 등을 굽히고 어깨를 앞으로 오므려서 일을 한다. 목은 앞으로 나와 있으며 이를 거북목 혹은 일자목이라고 한다. 이런 부정렬한 자세에선 당연히 목 어깨 팔꿈치 손목의 기능적 문제가 생기고 지속되면 기능적 퇴행 구조적 퇴행으로 이어진다. 텐트를 쳤을 때 사방에서 당기는 줄 한두개만 끊어져도 장력이 무너져 텐트의 모양이 무너지듯 인간의 구조적 부정렬에서도 그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굽은 등과 둥근 어깨는 어깨 관절의 부정렬을 만들고 팔꿈치의 부정렬을 만든다. 결국 손목의 부정렬도 생긴다. 그래서 손목의 치료는 단순히 손목만 치료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일차적으론 손목을 치료를 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좋아지고 나서 더이상 치료의 진전이 없거나 손목 모양이 틀어지거나 부어 있는 경우는 팔꿈치쪽의 요골과 어깨 목까지 치료를 해야 한다.손목치료의 기본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보통 환자본인도 정확한 위치의 통증을 모르고 손목 전체가 아프다고 내원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듯이 대부분 건초염이 생기는 엄지쪽이나 소지쪽 관절부위를 눌러 보면 통증이 있다. 그럼 그곳에 부항으로 피를 뽑고 약침을 놓고 침치료를 하면 심하지 않은 경우 4~5회의 치료를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증이 몇 달이 넘은 경우 또 아픈 부위가 틀어져 있거나 부어 있는 경우는 몇 번의 치료로 통증이 줄어들 수는 있으나 완치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손목이 틀어져 있고 부어 있는 경우는 단순히 손목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팔꿈치 근처 요골쪽의 뼈를 교정하고 근육을 풀어 주는 치료를 해야지 해결 되는 경우가 많다. 요골은 팔꿈치부터 손목을 이어주는 뼈로 일반적인 부정렬 자세에서 앞으로 약간 밀려나 있는 상태가 된다. 이것을 원래 자리로 살짝만 밀어주고 치료를 해도 더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손목터널증후군은 정중신경이 손목 부근에서 압박을 받아 발생하는 질환인데 이것도 역시 손목만 치료 하기 보단 손목 팔꿈치 목 어깨까지 교정을 해줘야지 효율적인 치료가 된다. 추나로 목 어깨 팔꿈치 정중신경의 눌리는 것을 감소시키는 교정을 하면 손목 주변만 치료하는 것보다 치료 속도가 상당히 빨라지니 보통은 추나와 함께 침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손목통증이 오는 환자들의 대부분은 과사용으로 손목에 계속 무리가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용할 때는 보호대를 끼고 쉴 때는 손목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2023-12-06

포항은 사라지는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최근 외신은 대한민국이 인구격감으로 곧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하였다. 합계출산율이 1 아래로 떨어진 나라가 세계적으로 드문 가운데, 우리나라는 놀랍게도 0.78을 기록하였다. 이는 한 세대 30년이 지나면 인구가 오늘의 39퍼센트 정도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숫자다. 5천만 대한민국이 2063년 경이면 2천만이 되고 2093년에는 1천만도 안 되는 작은 나라가 된다. 인구가 국력의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않지만, 이웃 일본이 합계출산율 1.3 이상을 버티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인구정책에 있어 우리가 큰 문제에 봉착했음에 틀림이 없다. 포항은 어떤가. 작년 통계는 합계출산율 0.88이다. 국가평균보다는 낫지만 안심할 수준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포항인구는 30년 안에 22만, 60년이면 10만 아래로 쪼그라든다.100년쯤 지나면 포항은 지도 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을 살리고 포항을 살릴 수 있을까. 인구동향에 지혜를 모아 대처해야 한다.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논설은 대한민국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까닭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극심한 교육경쟁 문화가 젊은 부모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에 더한 극심한 불안을 안겨주는 문제가 우선 크다. 그리고 문화적 보수성향과 문화경제적 현대화 사이에서 생기는 사회적 갈등의 문제가 극심하다. 교육경쟁은 심각하다. 인구의 감소로 대학정원이 급격히 줄어드는 데도 대학입시를 정점에 둔 교육정책의 결과로 수험생과 부모들에 대한 압박은 오히려 늘어난다. 자녀양육과 교육을 편안하게 대할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낼 정책적 배려가 시급하다.유교문화에 뿌리를 둔 우리의 가부장적 문화기반이 현대적 가족질서로 나아가는 길에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문화적 갈등을 빚고 있다는 지적도 따끔하다. 남성위주였던 노동시장의 질서는 양성이 모두 참여하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는데 가족관계와 자녀양육 등의 역할과 의무는 아직도 전통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모두 맡아야 하는 육체적 정신적 부담에서 탈피하려는 게 당연하다 싶다. 새 생명이 가정에 찾아오는 기쁨을 함께 누리고 다음세대의 성장을 즐겁게 도우며 미래를 가꾸어가는 보람을 만끽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고려가 있어야 한다. 가부장적 태도가 엿보이는 ‘여성중심’의 생각을 벗어나 ‘양성이 함께 참여하고 더불어 누리는’ 출산과 육아 그리고 가정으로 이끌어야 한다.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룬 결과 오늘의 인구수준을 유지하려면 합계출산율은 2.0이 되어야 한다. 두 사람이 만나 두 사람을 남기는 일. 선진국들의 추세는 1.50 정도로 보인다. 합계출산율 0.78은 낮아도 너무 낮은 수준이다.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순전한 기쁨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 가정의 행복이 나라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국가정책의 입안과정에서 인구문제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하고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특단의 조치들이 따라야 한다.아이를 더 낳고싶은 터전을 만들어 미래의 대한민국을 앞당겨야 한다. 아기 울음소리로 가득한 포항을 만들어야 한다.

2023-12-06

친구 이름 지어주기 전통

홍석봉 대구지사장 여유당은 다산의 당호(堂號)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온 말로,‘신중하기(與)는 겨울에 내를 건너는 듯하고, 삼가기(猶)는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는 뜻이다. 운치가 넘친다. 정약용은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 사암(俟菴) 등 많은 호를 가졌다. 김정희는 추사, 완당 등 호가 200개나 됐다.본명을 피하고 호를 쓰는 관습은 중국 당나라 때 생겼고 조선시대 때 성행했다. 선조들은 전 생애에 걸쳐 여러 이름을 사용했다. 본명 외에 ‘아명(兒名)’이 있었고, 혼례 전 성인식 때는‘자(字)’를 받았다. 성인이 된 뒤에는 일상에서 ‘호(號)’를 썼다.남자 아이들은 ‘아명’이라고 해 어릴 때 쓰던 이름이 따로 있었다. 관례를 치르기 전에는 아명으로 부르다가 관례를 치르고 난 뒤에는 ‘자’를 이름 대신 썼다. 나이 든 후에는 ‘자’ 대신 ‘호’를 쓴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 이름 대신 편하게 쓸 수 있는 ‘호’를 사용했다. 호는 자신이 직접 짓기도 했고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지어주기도 했다.상주향교가 최근 수호지례(授號之禮)를 개최, 관심을 끌었다. 수호지례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대신 벗 간에 쉽게 부르는 다른 이름을 지어주는 의식이다. 그동안 잊혔던 호를 지어주는 전통을 되살린 것이다. 호는 자아의 표상이요, 새로운 인격의 탄생으로 평생을 거울삼아야 한다고 여겼다.닉네임의 시대다. SNS 상 동호인 모임 등에는 닉네임으로 소통한다.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자신을 감추려는 목적에서다. 반면 호는 자신을 드러낸다. 호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취미, 인생관 등을 바탕으로 짓는다. 호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2-06

김장김치

윤명희 수필가 달력만 쳐다보고 있다. 배추농사만 짓지 않았다면, 올해는 남이 해 놓은 것을 사서 먹고 싶다. 절임배추를 사서 한다면 밤에라도 어찌 해 보겠는데, 절이는 일까지 하자니 마음이 부대낀다. 아파트에서 절이는 일도 쉽지 않지만, 내겐 시간이 없다.남편이 텃밭에 배추를 100포기나 심었다. 한 포기가 얼마나 큰지 아름이다. 그 배추를 친구가 50포기나 사갔다. ‘김장을 50포기씩이나 한다고? 두 식구에? 아들, 딸도 안 가져간다며?’ 나는 친구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친구는 친정엄마의 숙제를 한다고 했다. ‘돌아가신 엄마 숙제? 그걸 왜?’ 되묻는 내게 그녀는 처음엔 하지 않으려고 해봤다고 한다. 숙제란 것이 하지 않으면 마음에 항상 불편함이 따라다닌다.솜씨 좋은 그녀의 엄마는 해마다 김장을 해서 자식들에게 보냈다. 받아먹은 입들이 엄마김치가 최고라고 하는 말에 행복해 했다. 엄마의 행복이 친구에게는 숙제였다. 엄마와 가까이 사는 그녀는 김장철이 돌아오면 다른 일정을 잡을 수 없었다. 날씨가 따뜻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추워도 안 된다. 김장하기 적당한 엄마만의 날씨에 따라 진행되기에 혹여 약속이 겹칠까 해마다 김장철만 되면 불안했다.연로해진 엄마는 큰 집이 불편해서 작은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좁은 공간에서 김장하기가 힘이 들어 맏딸인 친구 집에서 김장을 해야 했다. 친구는 자기 김장 하는 김에 같이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매번 동생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화가 났다. ‘난 이제 맏딸 그만 하고 싶어.’라고 한 번도 말로 내 뱉지 못하고 표정으로만 보인 날이 몇 번인가 있었다.엄마가 아팠다. 아파도 김장철은 어김없이 왔다. 항암치료를 하고, 방에 누워만 있던 엄마가 김장을 하겠다고 일어났다. ‘당신 몸도 못 추스르면서 뭘 하겠다고?’ 친구는 말문이 막혔다. 친구가 승강기가 없는 4층으로 이사를 했기에 많은 양의 김장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엄마를 거역할 수 없었다. 배추장수 아저씨는 1층 입구에 한 무더기 내려놓고 가버렸다. 4층을 오르내리며 날라야 하는 것은 친구의 몫이었다. 김장을 하기도 전에 이미 파김치가 되었다. 배추를 절여놓고, 시장에 갔다. 양념 재료들을 양 손에 들고, 계단에서 몇 번을 쉬어가며 집에 올라갔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 벙거지 모자를 쓴 엄마를 보는 순간,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엄마가 못 하면 그만이지, 왜 나한테 하라고 그래! 내가 맏이로 태어나고 싶어서 나왔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나는 왜 매번 양보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줘야 하느냐고!”말문이 열린 그녀는 엄마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맏이의 서러움을 토해냈다. 미안하다는 말만 하던 엄마는 당신이 자식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김장김치뿐이라 했다. 한바탕의 눈물바람 뒤에 김장이 마무리되고, 동생들에게 택배 부치는 것까지 끝이 났다. 엄마는 남은 양념을 가져가도 되겠냐고 물었다.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도 전에 엄마는 돌아가셨다. 한동안 친구는 김장을 하지 않았다. 해방된 느낌이었다.여동생과 통화할 때였다. 동생은 엄마의 김치 이야기를 했다. 삐뚤빼뚤하게 쓴 엄마의 글씨가 택배박스에 붙어 있었다고 했다. 친구는 의아했다. 엄마의 글씨? 택배는 김장을 다 해 놓으면 남편이 보냈는데 엄마의 글씨라고? 동생은 그 김치가 마지막이었다고 했다.남은 양념을 가져가도 되겠냐고 했던 그날, 둘째 딸에게 조금 덜 넣은 것 같았나보다. 아픈 몸으로 배추를 사서 절여 버물려 박스를 만들고 택배를 부치고. 엄마는 마음이 편안해졌을까. 자매는 전화기를 붙들고 눈물을 훔쳤다.이제 친구는 김장할 때마다 돌아가신 엄마와 함께 한다. 겨우내 나눠먹으며 추억하는 친구를 보며, 나는 엄마와 김장을 했던 기억이 아스라해 마음이 저리다. 10포기만 할까 했던 마음에 몇 포기 더 얹어본다.

2023-12-06

소한(小寒)과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23번째가 소한(小寒)이다. 태양 황경이 285도에 위치하며, 2024년 1월 6일(음력 11월 25일)이 소한이다.소한은 양력으로 1월 6일부터 19일까지다. 이때 우리나라는 일 년 중 가장 추운 기간이다. 한겨울의 극심한 추위가 지속되며, 한랭한 기운으로 인해 날씨는 맑으나 기온이 가장 낮다. 음력으로는 12월에 접어들지만, 음력 11월부터 축적된 음기운이 가장 왕성한 때다. 정초한파(正初寒波)는 이 무렵의 추위를 묘사한다.소한의 한자 뜻을 보면 ‘작은 추위’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소한이 대한보다 더 추운 경향이 있다. 속담으로 ‘소한이 대한 집에 몸 녹이러 간다’ 또는 ‘소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있어도 대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없다’ 등이 있다. 그만큼 대한보다 더 매서운 추위라고 말한다.양력으로 보면 소한은 새로운 해가 시작되며, 가장 먼저 오는 절기다. 추위가 절정인 관계로 감기와 몸살에 주의해야 한다. 이 시기에는 따뜻한 기운을 많이 얻을 수 있는 먹거리가 건강에 좋다. 따뜻한 생강차나 단호박 같은 음식도 괜찮다. 옛날에는 도미를 먹었지만, 지금은 추운 겨울철에 제 맛인 과메기를 많이 찾는다. 제주도 귤도 제철 과일로 각광을 받는다. 비타민C가 풍부하여 감기 예방과 기침에도 효능이 있기 때문이다.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안영(?~BC 500)은 5척도 안된 키에 응구첩대(應口輒對)와 외교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안영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다. 접견 의식이 끝나자, 초영왕이 귀한 합환귤(合歡橘)을 안영에게 내놓았다. 안영이 껍질째 귤을 먹었다. 초영왕은 제나라 사람들은 귤을 먹어보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껍질도 벗기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안영은 왕께서 벗겨 먹으라는 분부가 없는데 어찌 맘대로 껍질을 벗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외교에서는 단순히 높은 지식뿐 아니라, 뛰어난 임기응변과 순발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 일화다.또한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귤은 회수 이남에는 귤이지만, 회수 이북에서는 탱자(枳)가 된다. 그것은 토질과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란 환경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중국 명대 말기 풍몽룡(1574∼1646)이 지은 연의소설 ‘동주열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다.전한(前漢)의 회남왕 유안(劉安·기원전 179~122)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 권5 ‘시칙(時則)’에 보면 계동(季冬), 즉 12월이 되면 초요(招搖·북두칠성 자루 끝에 있는 별)가 축(丑)의 방향(동북쪽)을 가리킨다. 축(丑)은 한자로 풀이하면 ‘묶여 있다(끈 뉴紐)’는 뜻도 있다. 양기가 위에 머무르면서 아직 내려오지 않고, 만물은 묶여 아직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이달의 수는 6이고, 맛은 짠맛이며, 냄새는 썩은 내다. 우물에 제사를 지내고, 제물로는 신장(腎臟)을 먼저 올린다. 이달에는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아가고, 까치가 집을 지으며, 장끼가 까투리를 찾아 울어 재끼고, 닭이 꼬꼬댁거리며 알을 낳는다. 색은 검은색이다. 천자는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탄다. 계절에 합당한 행위가 자연재해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 또는 동기상응설(同氣相應說)이 그 시대의 지배적 사상이었다.명리에서는 축토(丑土)는 ‘서리가 내린 땅’이며, 물상으로는 ‘묵묵히 전진하는 소’의 형상이다. 소한은 겨울 중 가장 추울 때다. 겨울에 출생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강한 물 수(水)의 음기운을 타고났기에 대체로 거두고 수렴하는 기운이 강한 편이다. 물의 속성처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를 한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축(丑)은 동물로는 누런 소다.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의 땅이므로 소가 휴식하는 기간이다. 동토지만 생명의 씨앗을 품고 길러내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 기다림에 탁월한 특성을 갖추고 있기에 대기만성형이다. 그 힘을 발산할 때는 혁명적인 저력이 있어 개혁가의 기질도 있다. 그렇지만 부지런하고 여유 있는 동물이기에 묵묵히 노력하는 끈기가 있는 것이 장점이다.이달은 축월(丑月)에 접어드는 시기다. 과거에는 ‘썩은 달’이라 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달이기 때문이다. 축월에는 정리해야 하는 일이 많다. 왜냐하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기이기에 마무리해야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축월이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마디에 위치하기 때문이다.소한은 축월(丑月)의 시작이며, 겨울 터널의 끝을 향한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이 있고, 추위가 극에 달하면 따뜻함이 멀지 않는 것이다. 명리학에서 역(易)의 의미는 극(極)에 이르면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아무리 곤란을 당하여도 절처봉생(絶處逢生)하는 마음으로 긍정과 희망을 가져본다.

2023-12-06

기다림의 시간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다.‘암기’가 아니라 ‘사고(Thinking)’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편이기에, 질문을 통해 학생들의 생각을 알고 싶은 까닭이다. 2010년대 초반 초보 강사 시절에는 엉뚱한 답이라도 당당한 목소리로 말하는 학생이 많았고, 얼마쯤 시간이 지나서는 모르겠다거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학생이 많아졌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이후에는 질문을 하면 시선을 피하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학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나와 눈이 마주치면 혹시라도 질문을 받을까 두려워 고개를 숙이거나, 질문을 받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학생들을 혼내기도 달래기도 했지만, 그런 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좋지 못하다. 그래서 더 이상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학기가 학생들에게 질문하지 않기로 한 첫 학기였다. 처음에는 괜한 신경전을 벌이지 않고 정해진 시간만큼 강의만 하고 나오니 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불편했다. 선생으로서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깊어진 까닭이다.지난주 수업 시간에 소설 분석이란 줄거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단어로 서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란 설명을 했다. 지난주 소설의 서사를 잘 보여주는 ‘침묵의 카르텔’을 소개하다가, 문득 강의실 상황이 적절한 예시인 것을 알았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으면서 누군가의 말하기를 막고 있는 상황을 ‘침묵의 카르텔’로 설명하자, 순간 학생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학생들이 왜 웃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모두가 알면서 말하지 못했던 사실을 선생이 말했기 때문에 터진 웃음이라고 짐작할 뿐이다.흥미롭게도 그 잠깐의 웃음 이후 작은 변화가 생겼다. 여전히 많은 학생이 입을 열지 않았지만, 평상시 주위의 눈치를 보던 몇 명의 학생이 자기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발언하는 학생이 하나, 둘 더 늘었다. 그들은 다소 서툴렀지만, 천천히 자기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이후 소극적인 학생이 늘고 학생들의 학력 저하가 눈에 보인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고등학교 시절 좋지 못한 성적은 자신감 부족으로 이어졌고 여기에 코로나 사태가 만든 단절은 타인과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어느 학생의 말처럼, 이제 대학에서 타인과 소통하고 자기의 의견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할지도 모른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가르치는 일은 이전부터 대학 교육의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라는 점에서 다르다.중요한 일은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이전에 억눌려 있는 학생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들도 자기의 의견을 당당히 말하고 싶다. 다만 어떤 상황들이 켜켜이 쌓여서 말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작은 웃음이 반복되고, 조급하지 않게 학생들의 말을 기다려 줄 때 어떤 변화가 생길 수 있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2023-12-05

매듭달의 길목에서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벌써 12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매듭달이다.앞만 보고 달려온 듯한 올해도 이제 마지막 달력 한 장만 남긴 채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숱한 사연과 애환의 편린이 아스라히 부침하며 또 한 세월의 매듭을 짓고 있다. 이맘때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온 한 해를 되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연초에 계획하고 목표로 했던 일들의 성취 여부와 공과를 가늠하며 안도하거나 착잡함에 젖어 들게 된다. 또한 다가오는 새해를 맞을 준비와 새로운 희망, 기대 따위로 다소 설레여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연말은 이래저래 분주하면서도 차분한 나날들이다.한 해를 짐짓 돌아보면, 쇠털같이 많은 나날 속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숱한 일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밀물처럼 다가왔다가 썰물처럼 사라지면서 일상이 굴러온 것 같다. 그러면서 잊힐 것은 잊히고 거를 것은 거르며 밀어낼 것은 밀어내 겹겹이 매듭을 지으면서 저마다의 삶의 내면을 채워왔을 것이다.사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物有本末), 일에는 처음과 끝맺음이 있듯이(事有終始) 무엇이든지 시작과 마무리가 있어야 하나의 매듭이 지어지게 된다. 즉, 작게는 대나무의 마디처럼 잘록하거나 도드라진 형상으로 매듭이 생기기도 하고, 하루나 한 달, 일년처럼 시간의 흐름을 마디처럼 구분해 매듭짓기도 한다. 그렇기에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을 매듭달이라고도 한다.매듭은 어쩌면 처음 시작이나 첫 만남보다도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시도하고 벌여 놓고는 마무리를 못한다거나 흐지부지 유야무야 돼버리고 만다면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기가 힘들어 질 것이다. 또한 인연에서 비롯되는 만남의 매듭을 소홀히 하거나 건성으로 대하게 된다면 관계의 지속이나 친분의 유지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일에 대한 결말과 만남의 끝매듭이 중요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하여 끝맺음이 좋아진다는 유종지미(有終之美)를 강조하고 되새기는 것 아닐까.한 해의 좋은 매듭을 맺기 위해서는 초지일관의 마음으로 꾸준히 실천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사람들을 두루 만나 교류하며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다독이고 존중하여 원만한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격의없이 우호적인 사이로 지내다가도 사소한 의견대립이나 다툼으로 서로 얼굴을 붉히며 평생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돌아서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삶이란 예측 불가능한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따스함을 찾게 되는 계절, 일에 대한 적절한 매듭과 만남의 끝맺음에 대한 적실성으로 믿음과 반가움의 온기를 나누는 연말이었으면 한다. 주변을 살피고 챙기며 상처 받고 소외되는 사람 사이의 섬을 만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3-12-05

헝가리식 저출산 정책

우정구 논설위원 헝가리식 저출산 정책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2000년대초까지 저출산국으로 알려진 헝가리는 공격적이며 과감한 출산 정책을 펴면서 출산율을 크게 끌어올린 나라로 알려져 있다.우리나라에서도 나경원 전 의원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시절에 헝가리식 모델을 제안했지만 정부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헝가리식 저출산 정책은 40세 이하 부부가 아이를 낳기로 약속하면 정부가 약 4천만원을 대출해준다. 5년 내 자녀 1명을 출산하면 이자를 면제해주고 2명을 낳으면 대출액의 3분의 1을 감액해준다.또 3명을 낳으면 전액을 탕감해주고 4명 이상 출산한 여성에게는 평생 세금을 면제해 주는 방식이다.최근 정부 여당이 발표한 청년 내집마련 1.2.3 정책이 이와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주택 청년이 6억원 이하 아파트를 분양받으면 연2%대 낮은 금리로 장기대출해 주고, 결혼, 출산, 추가출산 때마다 금리를 낮춰주는 방식이다. 결혼과 출산 등 생애주기에 맞는 금융지원을 확대하는 것이 헝가리식 모델과 비슷하다는 것이다.미국의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 다우섯은 “한국의 저출산 인구감소세가 흑사병이 창궐했던 14세기 중세 유럽 시기보다 더 빨라 국가의 존망을 위협한다”는 경고를 했다.2006년 이후 국가는 저출산 대책으로 무려 380조원의 돈을 쏟아냈다. 천문학적 예산에도 그 결과는 합계출산율 세계 꼴찌다.국제 뉴스가 된 우리의 출산 문제가 왜 이 지경에 도달했는지 반성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저출산을 멈출 헝가리식보다 더 강력한 정책을 이제라도 내놓아야 할 것 아닌가./우정구(논설위원)

2023-12-05

경주지진 후 왜 긴급대책 하나 나오지 않나

심충택 논설위원 국토 정중앙인 충북 괴산에서 4.1규모 지진(2022년 10월)이 발생할 정도로 우리나라 전역은 지진안전지대가 아니다. 지진에 영향을 주는 활성 단층지대와 지구대가 한반도 곳곳에 동서남북으로 펼쳐져 있다.다만, 지난달 30일 새벽 발생한 경주지진도 마찬가지지만 지진 대부분이 ‘주향이동단층(땅이 수평으로 찢어지는 현상)’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강도가 그렇게 크지는 않다. 그렇지만 2016년 경주 내남에서 발생한 진도 5.8규모 지진도 주향이동 단층에서 발생한 만큼, 약한지진이라고 해서 절대 얕봐선 안 된다.이번 경주지진은 2016년 진원지인 ‘내남단층’과는 또 다른 단층에서 발생한 것으로 분석됐다. 행정안전부가 올해 초 공개한 한반도 동남권(경북, 경남, 부산, 울산) 단층조사 결과를 보면, 이 권역에는 규모 6.5 이상 지진 발생 가능성이 있는 활성단층이 14개나 존재한다.경주지역은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크고 작은 지진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서기 64년 12월 지진이 있었다고 처음 기록된 후, 주기적으로 지진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기록되고 있다. 김천욱 연세대 공대 명예교수는 “국보인 불국사 다보탑, 석굴암, 첨성대 등이 무너지지 않고 1천300년이상 견디어내는 것을 보면, 신라인들이 지진에 대비하여 축조물을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1405년(태종 5년) 2월 3일자 ‘태종실록’기사에는 “경상도 계림(경주), 안동 등 15개 고을과 강원도 강릉, 평창 등지에 지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지진은 막을 수 없지만, 잘 대비하면 인명과 재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이번 경주지진 이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언론에 종합적인 대책 하나 발표되지 않은 것은 문제가 많다. 만약 4.0 강도의 지진이 도심지에서 발생했으면, 대형재해로 이어질 수 있다.정부나 지자체가 지진 발생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원전이나 지진대에 있는 구조물의 안전성에 대해 긴급점검을 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 아닌가. 그리고 경북 동해안 일대 활성단층에 대해 면밀한 지질조사도 해야 한다. 다만, 이번 경주지진 진앙과 가까운 월성원전을 비롯해 우리나라 원자로는 진도 6.0이상의 지진일 경우 자동으로 셧다운 되도록 설계돼 있다고 하니 큰 불안감은 해소된다. 김천욱 명예교수는 “만일 6.0이상의 지진이 일어나면 원전은 즉시 가동중단되고 여진이 계속된다면, 비상냉각장치로 원자로의 여열을 모두 제거하기 때문에 일본과 같은 참사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밝혔다.문제는 지진때마다 제기되는 ‘필로티 방식(기둥을 제외한 벽을 제거하여 개방적으로 만든 것)’건축물이다. 건축전문가들은 지진이 잦은 지역은 지금부터라도 필로티 건축을 규제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 모든 건축물은 지자체에서 허가하는 만큼 규제가 가능할 것이다. 전기·통신 등 사회기반시설의 안전성도 철저히 점검하고, 부실한 축조물(가스관, 교량, 터널, 송유관 등)에 대해서는 빨리 보강조처를 해야 한다.

2023-12-05

누구를 위해

2030 엑스포 유치에 실패했다. 2030 엑스포는 경쟁 초기부터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로 꼽혔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국제적 행사인 엑스포를 유치하는 데 실패하였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엑스포 관련 주식으로 꼽히던 건설주, 항공주, 숙박 및 유통 관련 주식들이 일제히 하락세에 빠졌다는 소식마저 전해진다. 유치 실패의 파장이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작용하리라는 예측이 들려온다.그런데 궁금하다. 우리는 왜 엑스포를 유치해야 했던 걸까. 물론 전 세계적인 행사라는 점에서 엑스포 유치가 갖는 장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내외의 보도 자료를 살펴보자면 단순히 많은 관광객이 방문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추상적인 전망 외에는 별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다. 부산광역시는 엑스포 유치가 지역 개발 및 성장 동력이 되어줄 것이라 판단했다고 하지만, 그 또한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는 매한가지이다. 오히려 지역 개발이 장기적인 발전 계획 없이 국제적 행사 유치 여부에만 달려있는 것이라면, 이 또한 이상한 이야기이다.그래서일까. 이번 2030 엑스포의 부산 유치와 관련된 PT 및 영상에서는 어떤 구체적인 설명을 찾기 어려웠다. 왜 엑스포를 부산에서 해야 하는지, 부산은 어떤 곳이고 어떤 강점이 있는지 등의 구체적인 정보 대신, 유명 배우와 아이돌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만 가득 차있을 뿐이었다. 배경음악으로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사용된 것도 의아하다. 미래를 지향하는 엑스포의 가치가 무색하게, 구태여 10년 전의 유행가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어야만 하는 걸까? 그것도 부산에 대한 노래도 아닌 서울 ‘강남’에 대한 노래를? 대체 왜?이처럼 부산 엑스포의 PT 영상에는 부산에 대한 로컬리티 대신 조악한 국뽕만이 가득하다. 그래서일까, 영상을 보고 있자면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영상인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 세계 각국의 투표자를 시청자로 가정하고 만들었다기에 이 영상은 너무나도 조악하다. 어떠한 설명도 서사도 없이 단지 유명 인사들이 ‘부산!’하고 외칠 뿐인 이 영상을 보고, 어느 누가 부산에 투표하겠는가.이것이 비단 PT 영상만의 문제는 아닐 듯 싶다. 관련 보도 또한 한심하긴 매한가지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유력 신문에서는 이번 엑스포 유치 실패를 오일 머니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 평가하며, 아쉬운 석패처럼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아니다. 엑스포 유치 투표에서 부산은 2차 투표도 치르지 못했다. 리야드가 119표, 부산이 29표, 로마가 17표를 얻음에 따라, 전체 2/3의 득표를 얻은 리야드의 유치가 1차 투표만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걸 과연 아쉬운 패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런 구차한 워딩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유치 시도는 엑스포라는 행사에 대한 몰이해와 우리가 가진 역량과 장점에 대한 몰이해가 빚어낸 해프닝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엑스포의 취지에 걸맞는 홍보를 하지도 않았고, 부산이라는 도시의 강점을 세계에 알리지도 못했다. 필수적인 정보가 담겼어야 할 자리에는 유명 인사들의 해맑은 웃음만이 가득 찼을 따름이다. 하기사, 정작 같은 나라의 국민들마저 부산 엑스포 유치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세계의 어느 누가 그 당위성과 필요성을 알아준단 말인가.문제는 또 있다. 과연 우리나라에 지금 엑스포와 같은 국제적 행사를 유치할 역량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엑스포와 같은 국제적 행사는 단지 유치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가진 미래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다양한 행사 및 전시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는 국제적 행사인 세계 잼버리 축제를 파행으로 마무리 지은 경력이 있지 않은가? 과연 우리가 세계 엑스포를 유치했더라도, 그런 국제적 행사를 잘 개최하고 마무리 지을 수 있었을까? 차라리 유치에 실패한 것이 다행인 것은 아닌지 하는 안 좋은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토록 엑스포 유치에 사활을 걸었던 이유는 뭘까. 어쩌면 세계 잼버리 축제 때와 마찬가지로, 국제 행사 유치라는 치적 쌓기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건 누구를 위한 치적 쌓기였던 걸까. 누구를 시청자로 가정한 것인지 모호했던 PT 영상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2023-12-05

목욕탕이라는 세계

평소처럼 하릴없이 동네를 배회하던 중이었다. 익숙한 카페와 음식점이 늘어진 구역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가슴을 뛰게 하는 문장 하나가 보였다. ‘목욕 됩니다.’ 세상에, 우리 동네에 목욕탕이 남아 있었잖아?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 이후로 대중목욕탕은 운영되는 곳보다 폐업한 곳이 더 많았으니까. 참 어려운 시기를 굳건하게 버텨주었구나.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그럴 수밖에. 나와 목욕탕 사이에는 오랜 시간 쌓아온 유대감이 있었다. 우리의 진득한 재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어린 시절, 주말이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집 앞에 있는 허름한 목욕탕은 물론이고 번화가에 들어선 신식 찜질방, 지리산 암반수가 흐른다는 온천까지. 그야말로 목욕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탕 포장지처럼 부스럭대는 옷은 벗어 던지고 얕은 탕에서 찰박찰박 물장구를 치면 얼마나 재미있던지. 목욕탕에서 만난 아주머니들이 귀여워해 주는 것도, 또래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노는 것도 마냥 즐거웠다. 몸을 오래 담그고 있으면 손끝이 쪼글쪼글해지는 것도 신기하고, 목욕이 다 끝나고 먹는 바나나 우유의 단맛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입안에 오래오래 머금고 있기도 했다.즐거움이 있으면 괴로움도 있는 법. 엄마의 손 위로 때타월이 씌워지면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공포의 때밀이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젊은 시절 엄마의 손은 맵기로 유명했으니, 나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엄마는 내 몸을 한 손으로 고정하고 다른 손으로는 팔다리가 벌게지도록 박박 때를 밀어주었다. 국수 가닥처럼 줄줄 밀려 나오는 때를 보면서 잘 좀 씻고 다니라고 등을 찰싹찰싹 때리기도 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다. 어린 나는 ‘시원하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목욕탕을 오기 위해 견뎌야만 하는 고행이라고 여기며 이를 꽉 깨물었다. 엄마가 때타월을 집어 들면 나를 찾지 못하도록 구석진 곳으로 후닥닥 도망가기도 했다.언제부터였을까. 목욕탕에 가는 게 꺼려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의 육체가 타인에게 보인다는 게 부끄럽다 못해 끔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옷을 벗은 여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도 껄끄러웠다. 그곳은 더 이상 재미있는 장소가 아니라 불편한 공간이 되어버렸다.그런데 이제 와서 목욕탕에 가고 싶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유난히 머리가 아프고 속이 시끄럽던 날, 나는 산책 중 우연히 발견한 목욕탕을 떠올렸다. 주택가 골목의 지하에 비밀스럽게 자리한 그 대중탕을. 카운터에서 수건 두 장을 받아 들고 여탕 문을 열기까지는 꽤 용기가 필요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 사람이 제법 있었다. 자리를 잡고 샤워기로 몸을 적시면서도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샤워를 마치고 열탕에 들어가자마자 불편한 기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휘발되었다. 온몸이 계란프라이처럼 주욱 퍼지는 것만 같았다. 내친김에 냉커피도 한 잔 시켰다. 투박한 물통에 담아 나온 커피를 한 입 들이키는 순간 여기가 극락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빨갛게 달아오른 양 볼을 하고 목욕탕 밖으로 나오는데 공기가 어찌나 상쾌하게 느껴지던지. 그때 알았다.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내 손을 잡아끌고 목욕탕으로 향하던 엄마의 기분을. 몸도 마음도 날아갈 것 같이 가볍다는 말의 의미를.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나는 한 달에 두 번, 꼬박꼬박 목욕탕에 출석 도장을 찍는다. 자연스럽게 목욕탕 아주머니들과 안면을 텄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왜 남들 출근하는 시간에 목욕탕에 와?’라고 물어보면 뭐라 대답하지. 혼자 고민했는데 그녀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말이지 경쾌한 것이었다. 동네에 숨은 맛집이 어디인지, 강아지 미용은 어디에서 시키는지, 아들보다 딸이 좋은 이유는 무엇인지. 뭔가를 질문하면 곧바로 답이 돌아온다. 어떤 고민거리도 순식간에 해결 가능한 마성의 사우나! 쭈뼛대는 내게 애정 어린 인사를 건네는 아주머니들을 보고 있노라면 동네 목욕탕을 누비던 꼬마가 된 기분이다.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고 돌아 다시 이 자리다.목욕탕에 가는 날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다. 욕장은 금방 사람들로 채워진다. 분주하게 자기 몸을 씻는 손짓. 사우나에 앉아 있으면 들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선풍기 앞에서 머리카락을 말리며 깔깔대는 여자들. 역시 나는 이런 세상이 좋다.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복잡해지는 때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목욕 바구니를 집어 든다. 수증기가 부옇게 피어오른 목욕탕에 입장하는 순간, 나를 한 겹 벗겨내는 신비한 세계로 발을 디딘 것만 같다.

2023-12-05

여야 혁신경쟁, 무엇이 문제인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화두는 또 다시 ‘혁신’이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상투적인 구호다. 그 동안 여야가 경쟁적으로 내세웠던 수많은 혁신위원회와 비상대책위원회는 도대체 무엇을 했기에 또 혁신하겠다는 것인가? 아마도 진정성 없는 ‘혁신 쇼’를 반복해왔기 때문일 것이다.권력정치에서 혁신은 혁명보다 어렵다. 마키아벨리(N. Machiav elli)는 “강력한 적과 미온적인 동지, 그것이 바로 혁신이 성공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라고 했다. 혁신에 저항하는 기득권세력은 강력한 반면, 그들의 저항을 돌파해야할 혁신파의 힘은 약하고 그 태도는 소극적이다. 권력은 달콤하지만 혁신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정치혁신이 성공하려면 ‘왜’ 그리고 ‘무엇을’ 혁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혁신의 출발점은 진정성 있는 반성과 성찰인데, 합리적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반성은 거짓이고 혁신은 위장일 뿐이다. ‘비윤’의 비판을 ‘내부총질’로 매도하는 ‘친윤’, 그리고 ‘비명’의 비판을 ‘수박’으로 폄훼하는 ‘친명’이 바로 혁신의 걸림돌이다.이러한 점에서 혁신에는 성역이 없어야 한다. 여야 혁신의 키(key)는 누가 쥐고 있는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 야당대표의 사법리스크와 ‘개딸정치’가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 여야의 혁신경쟁을 대통령과 야당대표의 반성·성찰·의지의 경쟁으로 보는 까닭이다. 대통령이나 당대표에게 쓴 소리, 바른 소리를 못하는 정치인들도 문제지만, 혁신을 요구하는 ‘비윤’과 ‘비명’의 고언을 수용하지 못하는 권력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혁신의 또 다른 장애요인은 기득권세력의 인적·제도적 저항이다. 인적 차원에서 볼 때 야당의 김은경 혁신위원회는 당내 주류의 눈치를 보다가 제대로 혁신하지 못했고, 여당의 인요한 혁신위원회 역시 당 지도부·윤핵관·TK중진 등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유명무실하다. 권력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는 자기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한 정치혁신은 말장난에 불과하다.제도적 차원에서는 ‘거대 양당’의 기득권 집착이 선거혁신의 최대 걸림돌이다. 양당은 ‘적대적 공생관계’ 속에서 기득권 유지를 위해 야합해왔다. 그 대표적 사례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이다. 지난 총선에서 여야가 꼼수를 쓴 위성정당들이 비판받자, 여당은 퇴행적인 ‘병립형 비례대표제’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고, 야당은 위성정당 방지를 주장하지만 기득권 상실을 우려하여 선거법 혁신에는 소극적이다. 이러한 양당의 행태는 국민의 다양한 선택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반민주적인 정치적 야합이다.이처럼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몰염치한 정치인들에게 혁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혁신을 주도해야 할 거대 양당이 ‘이권 카르텔’에 안주함으로써 오히려 혁신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권자인 국민이 선거와 투표를 통해 정치인들의 잘잘못을 심판함으로써 지속적인 혁신을 추동(推動)할 수밖에 없다.

2023-12-04

미세플라스틱의 습격

홍석봉 대구지사장 지름 5mm 이하의 작은 플라스틱 입자인 미세플라스틱은 기존의 플라스틱 쓰레기와 더불어 해양 환경과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미세 플라스틱은 해양오염뿐만 아니라 우리의 식탁과 건강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시중에 판매되는 생수와 식음료 전반에서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된다. 바다와 강 등 지표수에 이어 지하수까지 미세플라스틱에 오염됐다는 조사결과가 2019년 나왔다.강 하구에 있는 어패류 등 모든 수생 생물이 미세플라스틱에 오염됐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낙동강 하구와 인천·경기 해안은 세계에서 미세플라스틱 농도가 2, 3번째로 높은 곳이라고 한다. 이젠 어패류도 마음놓고 먹기 어려운 상황이다. 실제 사람의 대변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돼 인체 유입의 공포가 확산되기도 했다. 먹을거리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커지게 만들었다.독도와 울릉도에 서식하는 괭이갈매기 깃털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처음 검출됐다고 한다. 경희대 한국조류연구소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지난해 독도와 울릉도에서 포획한 괭이갈매기 17마리의 깃털에서 미세플라스틱이 발견됐다. 깃털에 붙은 미세플라스틱은 유기오염물질과 독성화학물질을 흡착해 괭이갈매기의 방수성과 보온성을 해쳐 갈매기의 생존력을 떨어트릴 수 있다고 한다. 독도와 울릉도는 세계적으로 가장 오염된 해류로 평가받는 구로시오 해류의 영향을 받는다.플라스틱 폐기물은 1940년대 이래 63억t에 이른다. 이중 79%가 매립되고 나머지는 자연환경에 배출된 것으로 추산된다. 잘 분해되지 않는 플라스틱은 매립된 것은 매립된 대로 문제가 되고, 버려진 것은 버려진 대로 문제다.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플라스틱이 되레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2-04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을 넘어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s)는 농인(聾人·청각장애인)의 자녀를 일컫는 말이다.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부모에게서 자란 코다는 자연스럽게 수어와 청어(음성 언어)를 함께 익히게 된다. 이때 청어가 제1언어가 되고 수어는 외국어처럼 제2언어가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재일조선인의 모어가 조선어이듯, 농문화에 안겨 자라난 코다의 제1언어이자 모어는 수어다.포스텍 소통과 공론 연구소는 지난 12월 1일, 농인 부모님의 이야기와 자신의 코다 정체성을 다큐멘터리 영화 ‘반짝이는 박수소리’(2015)에 담아낸 이길보라 감독을 초청해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청해 들었다. 이길보라 감독은 국가와 사회가 장애와 장애인을 정상성의 기준으로 구별 짓고 차별하고 격리해 온 역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인식적 전환과 실천의 방법들을 들려주었다.이길보라 감독은 청문화(음성 문화)와는 또 다른 ‘농문화’라는 고유의 문화를 지닌 존재로서의 농인, 그리고 농문화와 청문화 양쪽을 오가며 잇는 존재로서의 코다를 부각시켰다. 수어는 소리와 청각에 기반한 청어와는 달리 시각에 기반한 새로운 언어이므로, 두 언어를 모두 사용하는 코다는 세계를 두 배로 넓고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농인이 ‘결핍된 존재’로서의 청각장애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하고 행복한 존재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장애에 대한 나의 편협한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이었다.솔직히 말해 아직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내게는 장애를 비정상으로 구별 짓지 않는 것과 장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해 나가기 위한 싸움이 목적은 같을지언정 방법론적으로 일치될 수 없는 한 쌍의 대척점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에는 장애에 대한 차별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차별이 존재하는 곳에는 변화와 투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장애인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 즉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그 착각 때문에 공감을 선행으로 되돌려주는 ‘착한 장애인’을 폭력적으로 요구하게 되거나, 그토록 공감 능력이 넘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도취에 그칠 수도 있다. 필요한 것은 ‘공감’이 아니라 장애인 또한 그저 장애를 가진 인간일 뿐임을 인식하고, 인간이 누려야 마땅한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살피는 일이다.예컨대, 우리가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생각하는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이동권)와 원하는 곳에서 살 권리(거주·이동의 권리)는 장애인을 대할 때 너무 쉽게 무시된다. 휠체어가 출입할 수 없는 공간들은 장애인의 권리를 넘어 인간의 이동권을 제약한다. 격리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들은 거주·이동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는 셈이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과 시혜적 관점을 넘어, 장애와 장애인 인권을 보편적 인권의 차원에서 사고하고 보장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3-12-04

인공지능을 어떻게 하나

김규인 수필가 세계는 지금 인공지능 열풍이 분다. 어린아이에서 전문가까지 직간접적으로 매일 인공지능을 만난다. 기업에서는 상품의 개발과 매일 쏟아지는 자료 분석과 판단에 이용하고 인공지능 관련 주가는 날마다 오르고 인터넷에서는 기사가 빠지는 날이 없다. 심지어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가짜 뉴스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모은다.인공지능은 산업의 판도를 바꾸는 큰 흐름임을 기업체는 안다. 그러기에 수많은 인력을 투입하여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에 적용하느라 바쁘다. 기업의 명운이 달려있기에 기술의 발전은 하루가 다르다. 개발하는 회사는 주로 자연어처리, 딥러닝, 음성인식, 영상인식 등의 기술을 연구하고 이를 활용하는 기업은 빅데이터, 게임, 우주개발, 콘텐츠, 로봇, 보안, 클라우드, 건강 관리 등에 활용한다.인공지능 개발회사 지코어는 세계의 인공지능 개발 및 연구자들을 위한 기회를 만들고 최첨단 인프라를 용이하게 제공하여 인공지능 개발 혁신을 촉진하려고 ‘생성형 AI 클러스터’를 개발한다. 지코어의 인프라로 인해 대기업뿐만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회사와 개인 기업가에게도 도움을 준다.인공지능의 개발이 마냥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한국은행은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 한의사, 회계사, 변호사 등이 앞으로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 가능성이 높은 직업이라고 분석했다. 반면에 대체 가능성이 낮은 직업으로 종교 관련 종사자, 운송 서비스 종사자, 대학교수 및 강사, 학교 교사, 음식 관련 단순 종사자, 식음료 서비스 종사자 등이다.오픈AI가 샘 올트먼을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해임한 것은 인공지능의 개발 속도를 조절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챗GPT의 아버지’라 불리며 개발에 앞장선 샘 올트먼은 빨리 개발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에 다시 복귀했다. 돈이 되는 인공지능 사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AI 대부라 불리는 제프리 힌턴은 스스로 구글을 퇴사했다. 퇴사하며 수십 년간 수행한 인공지능 연구를 후회하고, 그 위험성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고 걱정한다. 그 위험성을 자유롭게 알리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그의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미 기본 데이터까지 조작하며 가짜 뉴스를 생산하여 진짜와 가짜 뉴스를 구별하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사람들은 인공지능과의 소통을 더 원활히 하기 위해 감정을 이식하는 문제를 말한다. 인공지능을 더 잘 부려 먹기 위해 감정을 심어주자는 말이 이제는 그렇게 반갑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 어쩌면 눈물을 흘리며 가짜를 말하는 인공지능에 모든 지구인이 속을까 봐 겁이 나는 것은 아닐까.이것은 모두 사람들의 문제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편해지려 하고 더, 더, 더를 외치며 욕심을 채우려는 것 때문은 아닌지. 욕심으로 엄청난 힘을 가진 괴물을 키우는 일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사람들의 지나친 욕심은 인공지능 로봇이 언제든지 사람을 향해 달려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을 위한 일에만 활용한다는 대전제가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언제나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이다.

2023-12-04

최적의 은거지, 묘골 마을과 육신사

대구에서 북서쪽 끝자락에는 순천박씨의 종택과 육신사·도곡재·태고정 등 유교문화재를 품은 묘골이라 불리는 전통 마을이 있다. 이곳은 길게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도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 마을 입구가 겨우 보이는 곳으로, 밖에서는 마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을 막기에 적당히 높은 산자락이 마을을 둥글게 감싸고 그 옴폭하게 들어간 땅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묘골 마을은 남동쪽의 입구만이 열려있어 은거지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묘골 마을은 사육신 중 유일하게 혈육을 남긴 박팽년(1417~1456)의 후손들이 은거하여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박팽년은 단종 복위를 꾀해 세조에 의해 멸문당한 집현전 출신 학자다.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경회루에 뛰어들어 항거했으며,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공문서에 ‘신(臣)’이란 글자를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단종에 대한 신념을 지켰다. 세조는 지조를 잃지 않은 박팽년의 정신을 높이 보고, 그를 형조참판으로 곁에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박팽년은 1456년 6월, 세조를 주살하려 성삼문·하위지·유응부·이개·김질·유성원 등과 같이 역모를 모의한다. 역모가 김질의 배신으로 새어 나가면서 사육신들은 긴급 체포되었다. 역모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능지처사되고, 삼대가 극형을 받았으며, 그들의 부인들은 공신들의 노비나 관비가 되었다. 박팽년의 가문도 멸문지화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다행히도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이씨는 친정아버지 이철근이 현감으로 있는 인근의 관비로 올 수 있었다. 당시 성주이씨는 박순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이에 세조는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삼으라”고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해 늦가을 아들을 낳았으나 다행히 여종도 딸을 낳았고, 둘은 비밀리에 자식을 바꿔 키웠다. 그가 천행으로 태어난 유복자, 박비(朴婢)였다. 성종 3년, 이모부 이극균(1437~1504)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묘골 마을에 왔다가 박비의 사연을 알게 된다. 이극균의 권유로 박비는 자수하게 되고, 성종은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옥구슬’이란 뜻을 담은 이름 ‘일산(壹珊)’을 지어주며, 정3품 당하관 벼슬을 내려준다. 이렇게 박팽년은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혈통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박일산은 후손이 없었던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99칸의 종택을 짓고 현재의 묘골 마을에 정착하여 순천박씨 충정공파의 입향조가 된다. 이때가 성종 10년경(1479년)이다. 이후 성종 때 정계에 형성된 사림들이 사육신의 신원을 회복시키려 노력했고, 숙종 17년(1691년)에는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의 관직이 모두 회복된다. 박팽년은 영조 때 자헌대부의 품계를 받고, 정조 17년(1791년)에 어정배식록에 오르면서 충신의 명문가로 알려진다. 달성의 낙빈서원에서 배향되다가 1982년 육신사가 건립되면서 숭정사에서 사육신과 함께 배향된다.묘골 마을에는 순천박씨의 종택은 물론 사육신을 모시는 육신사와 여러 전통 가옥이 남아 전통 마을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육신사는 단종복위운동으로 멸문된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처음에는 박팽년만 배향했는데, 그의 제삿날 후손 박계창이 사당 앞에서 서성이는 6명 어른들의 꿈을 꾼 후 사육신 모두를 제사 지냈다고 한다. 이후 낙빈사를 세워 사육신을 모셔 오다 고종 3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낙빈서원과 함께 철폐되었다.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다시 봉안하고, 충효 위인들의 유적 정화사업(1974~5)으로 육신사를 건축하게 되었다. 1981년 육신사는 관리사·외삼문·삼충각·숭절당 등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도곡재는 정조 2년(1778)에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웠으나 정조 24년(1800)경에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도곡재라 불렸다. 삼가헌은 박광석이 1783년 이주해 와서 초가를 지은 곳이다. 삼가(三可)란 중용의 9장에 나오는 선비가 갖춰야 할 덕목을 말하는데,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문칸채·사랑채·안채·연못·별당이 소속되어 있다. 태고정은 순천박씨 종택이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재건되면서 세워진 정자이다. 대청쪽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방이 있는 부분은 확장된 박공지붕이다. 방 앞에는 태고정(太古亭), 대청 앞에는 일시루(一是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달성군 하빈면 묘골 마을은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후대가 이어진 박팽년의 후손 박일산이 터를 잡은 곳이다. 노비의 신분으로 숨어 살다 순천박씨의 입향조가 되기까지 최적의 은거지가 되었던 이곳은 지금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찾아가야 볼 수 있는 숨겨진 마을이다. 박팽년과 그의 후손을 찾아가는 길이 그들의 지난했던 이야기만큼 구불구불 산세를 따라 길게도 이어져 있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2-04

우리 삶의 영화같은 순간들

우리는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영화같은 순간을 만났던가. 우리의 삶은 그 영화같은 순간들이 편집된 기억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기쁨과 슬픔, 감동과 후회, 만남과 이별의 순간들이 이어져 있다. 오랜 세월 영화를 만들어 왔던 감독은 그의 삶에 있었던 영화같은 순간들을 모티프로 작품들을 만든다. 물론 선택된 기억만을 보여주고 필름 위에서 윤색되어 관객을 만난다.반세기 동안 영화를 만들어 온 그의 작품을 몇 편쯤은 보았을 것이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기쁨과 놀라움, 슬픔과 감탄을 연발해 왔다. 우리는 영화감독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가 구축한 세계 속에서 전달하고자하는 이미지를 따라가며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 속에 식인 상어가 있었고, 재탄생된 공룡 시대가 있었고, 모험을 떠나는 소년과 외계인 친구가 있었다. 때론 가슴 아픈 역사의 현실이 펼쳐지기도 했다.이제 감독은 그가 우리들에게 하지 못했던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저했었고,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를 ‘영화 같은 순간’을 편집해 한 편의 영화로 만들었다.6살의 어린 새미는 생애 처음 영화관에 간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장면들에 매료된다. 이렇게 새미는 영화라는 매체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감독의 자전적 영화인 만큼 당연히 그가 어떻게 영화와 사랑에 빠졌으며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같았던 순간은 기쁨과 환희의 순간만은 아니었다. 쓰리고 아픈, 마음 속에 깊이 묻어 두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사까지 드러내야하는 순간이 온다.잘라 낼 것인가 이어붙일 것인가. 가족의 캠핑 장면을 찍은 필름을 편집하던 중 새미는 우연히 필름에 포착된 가족의 비밀을 알게된다. 그 장면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사실을 어떻게 감당해야할 것인가의 충격에 휩싸인다. 이 장면을 해소하는 방식은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이용해서 보여주고 있다.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촬영에서부터 편집을 거쳐 완성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는 선택이 반복된다. 그것이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었다면 감독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문제다. 하지만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다면 잘라 낸다고 해서 잊혀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77세의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전적 영화인 ‘파벨만스’에서 감추어 두었던 기억, 혹은 잘라 내었던 필름과도 같은 기억을 편집해 넣는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던 영화에 대한 사랑의 과정을 담는다. 역사적 사실과 환상과 상상의 외부 세계를 만들어왔던 감독이 오늘날의 그를 만들었던 은밀했던 과정을 담담히 이야기한다.‘파벨만스’를 통해 스필버그가 만들어 왔던 영화가 어떻게 개인적인 삶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가 10대 시절에 겪었던 부모의 이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들이 그가 만들어 왔던 영화 속의 상황들을 더욱 더 풍성하게 만든다.인생의 영화같은 순간을 영화적으로 풀어낸 영화다. 잘라 내 감추어두었던 필름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감추어 두었던 필름을 이어붙여 보았을 때, 우리는 그가 만들었던 수많은 영화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목격한다. 처음 시작은 영화 만들기의 즐거움이었지만 이내 필름이 포착한 진실과 그 진실을 마주하는 고통과 용기가 필요함을 알게 된다.영화가 감독의 의도대로 편집되어 만들어진 작품일 때, 관객은 그의 의도에 따라 감정의 리듬을 갖는다. 일흔 중반이 넘은 감독이 인생의 내밀한 이야기를 펼쳐낼 때 잊히지 않는 아픔이 어떻게 “잊히지 않는 꿈”으로 이어지는가를 보여준다. 상처마저 영사기의 아름다운 빛으로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순간을 맛보는 영화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3-12-04

예측 실패가 아니라 리더십 실패다

김진국 고문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실패가 충격을 주었다. 여러 나라가 경쟁하는 일을 놓치는 경우야 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충격’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는 것은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필자는 엑스포를 유치하지 못한 것은 별로 실망하지 않는다. 애초에 유치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기대를 과도하게 부풀린, 그래서 엉뚱한 예측과 외교 활동에 헛심을 쏟은 정부의 행태가 더 걱정이다. 외교적 발언이 횡행하는 국제무대에서 정확한 예측을 하는 건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이번 유치 활동은 역대급 헛발질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정부는 표결 결과가 나오는 순간까지도 박빙이라고 주장했다. 이 바람에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까지 열심히 득표 활동을 했다. 소중한 자산인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도 나섰다. 한국이 자랑할만한 문화예술인도 총동원했다. 지휘자 정명훈과 성악가 조수미, 그리고 아이돌 그룹들이 줄줄이 응원했다. 넷플릭스에서 세계적 반응을 받은 오징어게임도 이용했다. 그야말로 거국적인 캠페인을 벌인 결과는 119 대 29였다.많은 민간 기업인들은 이미 판세를 뒤집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동분서주할 때도 외교력을 낭비한다고 우려했다. 너무 힘을 쏟아 실패했을 때의 낙담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걱정했다. 그런데도 정부 내에서는 1차 투표에서 70표 정도를 얻는다고 예측했다. 이에 따라 ‘2차 투표 전략’을 펼쳤다. 1차 투표에서 우리를 안 찍어도 2차에서는 찍어달라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러나 예측과 전혀 다른 결과였다.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자본으로 국제행사를 오염시켰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미 그런 환경을 알고 도전한 경쟁이다. 그런데도 막판 뒤집기에 의욕을 보인 정부다. 이제 와 ‘석유자본’을 비난하는 건 책임회피밖에 안 된다. 일부 국민의힘 의원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문재인 정부 탓”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반이 훨씬 넘었다. 아직도 전 정부 탓을 하는 건 염치가 없다.올해 초에는 정부도 유치 전망이 밝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그냥 포기할 수는 없으니 최선을 다하자는 정도였다고 한다. 윤 대통령이 이를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힘을 쏟은 거야 칭찬할 대목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국제박람회기구 회원 182개국 정상을 대부분 만날 정도로 유치 노력을 기울이면서 정부 내 전망도 바뀌었다. ‘초접전’, ‘역전’이란 말이 나오고, 2차 투표 전략도 언론에 거론되기 시작했다.유치교섭 일선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경제인들의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이 확보한 표가 훨씬 부족하다고 부정적인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왜 사기를 꺾는 보고를 하느냐”고 질책했다고 한다. 그러니 “2차 투표에서는 한국을 지지하겠다”라는 외교적 발언을 모두 한국 지지 내지 중도로 분류하면서 예측이 한참 어긋났다.엑스포는 2030년에만 열리는 게 아니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만 이기려 할 수는 없다. 엑스포를 못 연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도전하면 된다. 문제는 정부 내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드러난 오류다. 예측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오판했다면 큰 문제다. 엑스포만이 아니라 다른 외교 문제, 다른 국정 현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윤 대통령은 예측이 빗나간 데 대해 “전부 저의 부족”이라고 말했다. 사실 엑스포는 다시 도전하면 된다. 엑스포 유치를 위해 기울인 노력이 어떤 형태로 건 우리 자산이 되어 있을 것이다. 되돌아보며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은 국정 운영 흐름이다.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보고서를 왜곡하는 관리자는 위험하다. 그런 관리자는 쓰는 것도, 자신의 기대와 판단을 과도하게 앞세워 바른말을 못 하게 부담을 주는 리더십도 곤란하다. 이 기회에 그런 부분을 반성하고 바로 잡는다면 엑스포를 유치한 것보다 더 큰 소득일 수 있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2-03

행복한 혁신

엄주선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혁신활동을 하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혁신(革新)을 단순히 단어의 뜻만으로 해석하면 가죽을 벗겨 새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매우 힘들고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에게는 제철소 혁신활동 도입 초기 사외 유명한 강사 분들이 마음가짐 교육을 할 때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어 더욱 그렇다.70년을 사는 ‘솔개의 우화’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보통 솔개의 수명은 40년 정도이지만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벼랑 위에 둥지를 틀고 부리를 쪼아 새로운 부리가 돋게 하고, 발톱과 깃털도 모두 뽑아 새롭게 함으로써 30년을 더 산다는 내용을 전하면서 혁신을 매우 결연한 의지로 사력을 다해야 하는 힘든 활동으로 인식 시켰기 때문이다.지금은 기술의 발달로 모든 것이 자동화 지능화 스마트화되면서 일과 생활의 밸런스가 요구되고 개인의 행복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 사회적 추세이다. 이에 맞추어 혁신도 어렵고 힘들다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개인의 삶까지도 변화를 유발하는 즐겁고 행복한 활동으로 바뀌어야 할 때이다.행복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사람은 어떤 사실이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하는 지적 능력과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 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행복은 개인이 스스로 평가하는 것으로 자신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른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행복은 3단계가 있다고 한다. 1단계는 육체가 느끼는 감정으로 기쁨이나 즐거움 등 기분이 좋은 상태이다. 2단계는 살면서 만족하는 것으로 즐거움과 고통을 비교해 보고 장기적으로 삶이 더 만족스럽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는 전체적인 상태에 대해 종합적인 판단과 다른 가능성과 비교하는 보다 복잡한 인식 과정을 포함한다. 3단계는 감정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실현하는 삶으로 도덕적인 것과 이데올로기를 포함하고 있다.행복한 혁신활동 1단계는 활동한 결과에 대하여 바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는 것으로 청소 정리 정돈과 같은 하기 쉬운 활동을 말하며 결과에 대해서는 격려와 칭찬을 통해 행복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2단계는 장기적으로 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개인의 발전과 성장이 보이도록 하는 활동 방법과 제도의 마련이다. 활동을 하면 할수록 업무능력이나 개선 역량이 향상된다고 느끼며 진급이나 승진이 되는 체계가 필요하다. 3단계는 본인 스스로 일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잠재력을 발휘하여 개선을 통해 삶의 태도가 바뀌는 단계이다.많은 회사가 혁신의 1단계인 단기적인 변화를 통해 분위기를 만들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데 까지는 성공하며 일시적으로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가 식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2단계인 직원이 장기적인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제도나 체계가 부족하여 지속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개선을 통한 행복 3단계인 진정한 일의 의미를 알고 삶을 살아가는 태도까지 변화를 유발할 수 있도록 혁신 활동도 시대에 맞게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2023-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