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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치 팬덤은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김진국 고문 정치인이 고약한 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이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의 고향이라는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는 어디로 갔나. 민주주의의 전범처럼 들먹이는 미국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에서 선거가 가짜뉴스에 휘둘리고, 선거 결과에 불복(不服)하고, 극렬 지지자들이 의회를 난입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한국도 뒤지지 않는다. ‘개딸’이니, ‘문빠’니, ‘태극기’니 하는 극단 세력들이 정치판을 휘젓는다. 비타협적인 ‘탈레반’ 세력이다. 무조건 자기편만 드니 지지자들은 환호한다. 그러나 대화와 타협이 빠지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건 원시 시대부터 작동해온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원리다. 힘이 센 자가 이기고, 이기면 무조건 다 갖는 게임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사기다. 합의해놓고 뒤집고, 규칙에 따른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것 역시 민주주의라고 하기 어렵다.근본적인 대변혁이 필요하다.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당장 가능한 것 하나라도 고쳐나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여야 원내대표들이 국회 회의장에 비난 팻말을 붙이지 않기로 합의한 것은 작지만 칭찬할 만하다.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주 월요일(23일) 먼저 제안해,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적극적으로 찬성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우선 “국회가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지나치게 정쟁에 매몰된 모습을 보인다”라며 국회 회의장 분위기부터 개선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윤 대표는 의원총회에서 “본회의장과 상임위 회의장에서 팻말을 부착하거나 고성·야유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라고 공개했다.그동안 국회를 보면 기가 찼다. 국회 본회의나 상임위 모두 말이 열려 있는 공간이다. 헌법 제45조는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관하여 국회 외에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라고 규정돼 있다. 소위 면책특권이다.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모든 회의가 생중계된다.그런데도 회의장 책상 앞에 피켓을 줄줄이 세워놨다. 국회 참관하는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한국을 선진국으로 아는 외국인에게도 창피하다. 본회의장, 상임위 회의장을 놔두고, 국회 본관 계단에 서서 학생들처럼 팔을 흔들며 구호를 외친다. 피켓이나 집단 시위는 자기 목소리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특권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국회의원 몫이 아니다.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이 떠오른다.상대를 비난하는 팻말을 붙여놓고, 무슨 대화가 되겠는가. 처음부터 국회를 싸움판으로 만드는 짓이다. 복잡한 현안을 단순한 구호로 압축해 공영 방송에 지속해서 노출하는 것은 여론을 왜곡한다. 일부 의견을 과다 대표하고, 국정현안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헷갈리게 한다. 더구나 겨우 팻말이나 들고, 구호나 외치라고 국회로 보내준 게 아니다. 유권자에 대한 모욕이다.일부 과격파 의원은 이를 무시한다. 박주민 민주당 원내 수석 부대표는 방송인터뷰에서 “솔직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절대 없을 겁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 참 어려울 것 같다”라고 말했다. “과거에도 이런 시도가 있었지만 조금 지나서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았다”라는 것이다. 이에 앞서 국민의힘은 보궐선거에서 참패한 뒤 야당을 과도하게 비난하는 정쟁(政爭)성 현수막을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전국적으로 문제 현수막들을 철거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여기에 호응하지 않았다.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경선 때 비난성 문자 폭탄을 “민주주의를 위한 양념 같은 것”이라고 두둔한 일이 있다. 당장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민주주의 파괴를 선동해서는 안 된다. 아이돌의 열성 팬 문화에서는 지지하는 가수 외에 다른 가수는 없다. 우호 세력은 물론 반대 진영의 정치적 경쟁자마저 인정하고 의견을 조정해야 하는 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역사적으로 정치에서 가장 적극적인 팬덤은 나치였다. 팻말과 고성, 야유 등 돌출행동은 카메라의 주목을 받는다. 나쁜 짓을 즐기는 이유다. 적어도 책임 있는 언론만이라도 이런 행동을 외면하면 안 될까.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0-29

맨발걷기, 제대로 알고 해야하는 이유

박성률 트레이닝과학연구소장동국대 의과대학 연구초빙교수 요즘 산과 바다, 공원 등 어딜 가도 맨발로 걷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열풍에 힘입어 각 지방자치단체는 앞다퉈 조례를 만들어 맨발걷기 장소를 조성하는 등 활성화에 나서고 있다. 맨발로 흙을 밟으면 혈액순환과 관절 건강에 도움이 되고, 운동 효과도 크다는 게 맨발걷기 애호가들의 주장이다. 발바닥이 땅바닥과 접지되면 활성산소를 없앨 수 있고, 병도 이겨낼 수 있다는 동영상과 책도 많다. 하지만 맨발걷기의 효과가 의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다수의 전문의나 스포츠과학자들은 건강하거나 운동기능이 뛰어난 사람의 경우 큰 문제가 없겠지만 당뇨병이 있거나 노인의 경우 감염 및 낙상과 부상 등의 위험 요소가 많다고 지적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 맨발로 다니지 않는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부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발가락이 뭉개질 수도 있고, 피부를 자르거나 구멍을 내는 날카로운 것을 밟을 수도 있다. 게다가 맨발걷기는 뼈와 근육에 부담을 줄 수 있다. 단단한 표면을 맨발로 걸으면 발뿐만 아니라 신체의 나머지 부분에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 미국의 한 족부 전문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뒤꿈치 또는 아치 통증, 정강이 부목 및 건염으로 이어질 수 있어 보행의 생체역학이 적용되어야 이 같은 부상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맨발걷기는 운동의 원칙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 올바른 방법으로 맨발걷기를 해야 부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맨발걷기를 하기 전에 준비운동은 필수다. 각 관절을 돌려주고 근육을 늘려주는 체조와 스트레칭 등으로 준비운동을 충분히 해야 부상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또 맨발걷기를 할 때는 시선이 중요하다. 땅에는 돌, 유리조각, 가시 등 발바닥에 상처를 줄만한 위험요소가 많이 존재한다. 따라서 아무 곳에서나 맨발을 노출시키면 안 되고 전용공원이나 위험요소가 적은 곳에서 해야 한다.맨발걷기는 지나치게 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맨발걷기를 신발을 신고 걸을 때처럼 걷다가는 관절과 인대 및 힘줄에 무리가 갈 수 있다. 맨발걷기를 산에서 하면 내려올 때 체중의 5~7배 정도의 하중이 발에 실리게 된다. 이 경우 아킬레스힘줄염이나 족저근막염이 생길 수 있고, 기존의 병증이 악화할 수도 있다. 특히 근골격계 노화가 진행된 노인들은 잘못된 방법으로 무리하게 걸으면 무릎이나 발목 관절에 하중이 집중되면서 관절염 등 퇴행성 질환이 급속도로 진행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맨발걷기 도중 발에 상처가 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당뇨병 환자의 경우 작은 상처나 물집도 궤양으로 번질 수 있어 맨발걷기 후에는 상처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특히 발에 진물이 나고 갈라진다면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어 당뇨병 환자는 맨발걷기를 자제하는 게 좋다. 다발신경병증과 같은 신경계 질환이 있는 사람은 부상 위험이 없는 곳에서만 맨발로 걸어야 한다. 관절에 문제가 있거나 발의 정렬이 어긋나면 사전에 정형외과의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다.50대 중년 이상이나 체형의 불균형이 있다면 맨발걷기의 득과 실을 따져봐야 한다. 체형의 불균형은 신발을 신든 맨발이든 많이 걸을수록 발에 무리를 줄 수 있다. 체형 불균형 상태에서는 걸을 때마다 발바닥의 일부분에만 지나친 압력이 가해지게 되어 굳은살이 더 단단해지거나 족저근막염과 같은 발 부위 염증이 생기기 쉽다. 발바닥에는 지방 패드가 있어 발을 보호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지방 패드가 딱딱해지고 얇아져 통증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중년 이상의 연령층은 모든 종류의 걷기 운동에서 준비 단계를 거치는 게 안전하다.특히 노인의 경우 맨발은 낙상 등 부상 위험이 훨씬 크다. 최근 Shoe Science 저널에 발표된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765명의 노인 참가자를 대상으로 집에서 넘어진 것과 하루 종일 신발, 양말을 신었는지 또는 맨발로 다녔는지 여부를 분석했는데, 집에서 넘어진 경우 참가자의 절반 이상(51.9%)이 당시 맨발이거나 양말이나 슬리퍼만 신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노인들은 낙상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능할 때마다 신발을 신는 것이 바람직하다.더구나 맨땅에는 수많은 병원균들이 존재하여 십이지장충, 포도상구균 등의 질병 감염 위험에 노출될 수 있고, 습한 장소에서 맨발로 걷는 것은 무좀과 같은 곰팡이균 감염의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맨발걷기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근거가 부족한 면도 많다. 잘못된 맨발걷기는 오히려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다. 맨발걷기를 만병통치라고 맹신하는 것도 위험하다. 전문가와 사전 의논도 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유행하는 건강법을 무작정 따라하다가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맨발걷기가 자신에게 맞는 운동인지 전문의나 스포츠과학자에 확인한 뒤, 자신의 건강 및 체력 수준에 맞는 걷는 자세와 속도 및 시간을 정하고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23-10-29

국정기조의 변화는 탈이념정치에서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의 처절한 패배 이후 윤석열 정부의 국정기조는 변화 조짐이 약간 보인다. 대통령은 강서구 패배 후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정치에서 이념보다는 민생을 위해 정친인들이 현장으로 달려가길 촉구했다.정치 혁신을 위해 파란 눈의 인요한씨를 혁신 위원회의 책임자로 맡겼다. 윤석열 정부 출범 1년 6개월 동안 이념을 앞세운 정치가 국정의 기조가 되고 혼란을 자초한 것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정치 경험이 전무한 대통령의 보수권 확대 코스프레 정도로 알았지만 그 강도는 점차 세었다. 정당 간 두 번의 정권 교체로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진 이 나라 정치에서 이념 전쟁은 시대에 뒤진 정치행태이다. 자유주의 명분의 강경우익적인 갈라치기 정치는 극한 대결의 정치, 정치 실종시대를 자초하였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30% 대를 탈피하지 못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번 강서구 보선의 참패는 이를 잘 입증한다. 대통령의 탈이념 정치야말로 국정 기조 변화의 첫 단추이다.대통령은 지난 8·15 경축사에서 공산 전체주의 세력과 이를 따르는 기회주의적 세력과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이 같은 발언은 윤 대통령이 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국회뿐 아니라 장외에서도 정치 현안에 대한 정쟁이 날로 증폭되었다. 대통령은 야당 이재명 대표의 대화 제의를 피의자 신분이라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은 언론과의 원만한 소통마저 거부하고 있다. 후보 시절 공약했던 출근길 도어 스테핑도 공식적인 기자회견도 사라져 대통령의 불통과 독선의 이미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정부나 집권당의 인사들은 대통령의 심기만을 살피는 수직적 관계만 형성되었다는 비판이 따랐다. 독립운동 영웅 홍범도 장군의 이미지는 여지없이 실추되었다. 정부의 협치는 사라지고 진영 정치, 패거리 정치로 살벌한 전투장이 되고 말았다. 물론 야당의 책임도 면할 수 없다. 민생 정치는 사라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되고 있다.대통령은 내치뿐 아니라 외교에서도 이념성을 강조하고 있다.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프리드만의 자유주의를 수차례 강조할 때도 보편적 ‘자유’ 확산으로 이해하였다. 자유주의 진영의 철통같은 단결을 통해 공산전체주의를 막자는 것은 냉전시대에 자주 들었던 귀에 익은 소리이다. 자유진영에 바탕한 한미 안보 동맹은 역사적인 전통이며 우리의 불가피한 현실이다. 한·미·일의 외교적 결속은 북·중·러의 역 삼각 동맹 결속으로 다시 냉전 체제를 초래하는데 문제가 있다. 한·미·일 가치 동맹은 안보불안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고 경제적 실용외교에도 상충될 수 있다. 윤석열 정부는 한일 간 졸속, 굴욕 외교라는 비난 속에서도 한일관계를 급박하게 정상화하였다. 정부의 강제 징용 보상, 후쿠시마 오염 수의 해결 방식은 일본 정부를 옹호한다는 비판이 따른다. 그러함에도 일본정부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각료의 신사참배는 늘어나고 있다. 정부의 이념외교는 현대의 실용외교 다원외교에도 역행한다.정부의 이념 정치에는 뉴라이트 식 사고와 논리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일제의 조선반도 식민화계획은 요시다 쇼인의 명치유신의 결과이다. 그러나 한국의 뉴라이트 인사들은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까지 옹호하고 있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가 한국의 근대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당치 않는 주장까지 동조한다. 이들은 일제의 조선 침범은 당시 왕권의 무능, 조선인들의 미개성에 기인한다는 주장에까지 동조한다. 정부의 어느 각료는 매국노 이완용의 친일적 입장까지 이해한다는 입장이다. 이 연장선에서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진 쿠데타의 불가피성까지 옹호한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발전 집념과 그 성과는 인정할지라도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함은 역사 인식의 엄청난 오류이다. 대통령이 일부 뉴라이트 계열의 시대착오적 역사 인식을 국정 기조로 삼는다면 불행은 계속될 것이다.결론적으로 국정 기조를 바꾸려면 대통령부터 이념 정치에서 탈피해야 한다. 문제는 집권당과 대통령실이 이러한 시대에 뒤진 이념정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데 있다. 집권세력의 독선과 오만은 대통령의 지지율 상승을 가로막는 기제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는 국정의 중간평가인 내년 4월 총선 결과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현 정부의 국정동력은 추동력을 잃고 대통령의 네임덕 현상은 가속화 될 것이다. 대통령과 정부는 강경 보수 우익의 국정기조를 민생정치로 탈바꿈해야 한다. 새로이 출범한 당 혁신기구는 이러한 제안을 과감히 할 수 있을까. 혁신기구 구성원들의 성향으로 볼 때 이를 기대하긴 어렵다. 양당 대표 회담이든 대통령과의 3자회담이든 대통령은 조건 없이 수용해야 한다. 대통령의 이재명 대표와의 회담이 사법 리스크 해소용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는 안 된다. 여야 정치권은 이념보다는 민생 정치를 위한 대화를 복원할 시점이다.

2023-10-29

체크무늬의 기억법

평생 그 속에 갇혀 있었다잔잔한 떨림으로 번져오던 칸 칸이어지는 직선 무늬를 타고계단들이 자라 올랐고그 직선을 타고 떠나왔다 때로는찌그러지는 체크무늬를 만들고 껴입기도 하면서세상의 빈칸에 파고들곤 했다 따스하기도 하고꽉 찬 칸에서 튕겨 나세상의 끝자리에 매달려 대롱거리기도 하면서젖은 현수막으로 걸려 있기도 했다늑골에 소복한 보푸라기들을 찌르며마분지 같은 칸들이 밀려와 매달렸다 저녁 새들이 물고 오는 칸들이 있었다구름 경전이 칸 가득 쌓이기도 하고다시 그 질긴 교직(交織)에 갇히고풀리기도 하면서헐거덩거리며 왔다 ―김만수,'체크무늬’ 전문 (나의 수많은 근처들·2023) 바야흐로 체크의 계절을 맞는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디자인계의 명언이 있다. 디자인의 기능이 결과물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시각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조형은 점, 선, 면으로 치환할 수 있다. 20세기 추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이들의 특성을 활용한 조형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찍이 주목했다. 여기 1987년 등단 이후 김만수(1955~) 시인의 긴 시력이 내장된 시선집에 담긴 체크 라인을 따라 그가 직조한 삶의 무늬를 들여다보자.체크란 무엇인가? 체크가 주는 속성은 중의적이다. 직선이 주는 단호함과 따스하고 포용적인 질감이 혼재한다. 선과 면이 공존하는 네모난 공간이기에 삶의 무늬는 체크의 칸 속에 갇혀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하여 시인은 체크 밖에서 체크를 보는 방식으로 “평생 그 속에 갇혀 있었다”며 체크 속 지나온 여정을 기억하고 있다.우리가 “체스판 모양의 격자무늬”를 “체크무늬”라고 부르는데 “체크무늬”에서 “체크(check)”란 서양식 장기(將棋)인 “체스(chess)” 즉 왕(King)을 의미한다. 시인은 그 자신이 직조한 체스판 안에서 왕이 되었을까.체크에 내장된 시인의 시간은 횡과 열이 교직하기에 수직이거나 수평이거나 때로는 역방향이다. “직선 무늬를 타고//계단들이 자라 올랐고” 에서 상승기의 방향을 드러낸다면, “찌그러지는 체크무늬를 만들고 껴입기도 하면서//세상의 빈칸에 파고들곤 했다”는 대목에서는 삶의 한 공간에 자리 잡기 위한 치열한 분투기의 격정을 보여준다. 그렇다, 체크의 이중적 속성은 늘 교차한다. “따스하기도 하고” “세상의 끝자리에 매달려 대롱거리기도 하면서” 온기와 냉기를 벼리고 있다. 사람의 생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늑골에 소복한 보푸라기들을 찌르며” 칸과 칸 사이 “마분지 같은 칸들이 밀려와 매달” 리는 삶의 진경이 체크무늬 공간과 겹치기에. 이희정 시인 어떤 공간은 잊고 있었던 현재의 공간을 통해 과거의 감수성을 불러오는 데 일조한다. 누구나 저마다의 장소애(topophilia)를 갖고 있다. 김만수 시인은 포항이라는 공간에서 나고 자랐다. 장소를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가 몸, 가족, 공동체라고 한다면 시인의 체크무늬 속 공간은 포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져 있다.“저녁 새들이 물고 오는 칸”에는 “구름 경전이 가득 쌓이기도 하”듯 체크무늬 칸, 칸에는 과거와 현재의 공간이 만나 갈등하고 회상하는 장면이 그 경험을 은유하고 있다.이처럼 점으로 시작한 한 시인의 역할은 시작과 끝을 ‘선’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선은 우리의 삶의 공간인 면과 맞닿아 있다. 켜켜이 직조된 선은 종내에는 하나의 ‘면’이라는 개인의 삶의 공간을 이룬다. 그 면을 이루고 있는 선은 끝없이 변화하며 무한한 가능으로 가고 있다. 시인이 직조한 체크무늬는 시작점과 마무리 점을 잇는 체크의 선들로 사람과 사람을 이으며 평행하게 이어지고 있다.“그 질긴 교직에 갇히고 풀리기도 하면서 헐거덩기리며”

2023-10-29

인류사는 현대까지 어떻게 진행 돼 왔을까?

박진홍 부국장 인류사는 현대까지 어떻게 진행 돼 왔을까 ?인류사는 선사와 역사로 구분된다.역사 이전을 선사(先史)시대, ‘문자 탄생’으로 기록 수단이 생긴 역사(歷史)시대로 나눈다.역사(歷史)란 무엇을 뜻할까?역(歷)은 과거에 있었던 일, 사(史)는 사람이 말을 하는 것으로 ‘사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을 말한다. 동양에서 ‘역사’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대략 400여년전, 명나라 애황이 쓴‘역사강감보’란 저서에서 시작됐다. 그전에는 중국 춘추시대 공자의 노나라 역사서 ‘춘추(春秋)’가 ‘역사’란 단어를 400여년간 대신 하고 있었다. 그러다 기원전 2세기 전후 한나라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史記)가 향후 1천700여년간 ‘역사’란 단어로 사용 됐었다. 서양에서는 BC 5세기경 그리스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전쟁 등에 관해 쓴 책 ‘Historia’에서 ‘역사’란 단어가 시작됐다.역사는 자주 바뀐다.역사적 대사건의 팩트는 불변이지만 ‘역사를 보는 관점’ 즉 사람들의 사관(史觀) 따라 역사 해석이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역사를 공부할 때 정말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인류 역사는 1만년전쯤 메소포타미아에서 농업혁명으로 시작된 촌락들이 도시 문명으로 발전하면서 시작한다. 5천500년전 수메르인들이 메소포타미아문명을, 뒤이어 5천300년전 이집트문명이 각각 수많은 도시국가들의 치열한 생존 경쟁 가운데 생겨난다. 아시아에서는 인도 인더스 문명이 5천년전, 중국 황하문명은 4천년전 시작됐다. 이 대목에서도 ‘우리 사피엔스종을 지구의 절대자로 만든 문명사가, 1만년에 불과하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인류는 600만년전 유인원 분기 이후 무려 599만년 동안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살아 왔다. 특히 공룡이 2억3천만년전 출현해 무려 1억6천500만년 동안 지구를 지배한 점과 비교할 때 인류의 역사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현대 학계는 인류 문명사를 ‘소규모 집단·문화가 대규모로 통합·협력하는 방향을 지향해 왔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화폐와 제국, 종교가 주된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보고 있다. 과거 수렵채집인들은 물물교환을 했으나 이후 도시와 왕국의 등장으로 물물교환의 효율성을 위해 화폐가 생겨난다.돈은 교환과 이동, 부의 축적에 용이했다.하지만 돈은 ‘상상 속에 존재 하는 상호신뢰시스템’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예를 들어 현대 전세계의 화폐량은 60조 달러지만 실제 유통되는 주화·지폐 총액은 6억 달러 미만에 불과하다. 화폐의 90% 이상이 컴퓨터 서버에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로마시대 화폐인 주화는 이미 인도에서 유통될 정도로 세계 경제를 연결시켰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화폐는 전세계를 단일 경제권으로 묶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에서 수탈한 금·은으로 동아시아에서 비단과 도자기, 향신료 등을 구입했다. 세계적 통합 경제권이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향후 전세계는 다른 종교와 언어, 통치를 받았으나 돈은 인류 공통의 기준이 됐다.제국주의를 거론하면 먼저 정복과 폭압, 학살, 노예 등 부정적 면이 강하게 제기 된다.하지만 역사를 둘러 보면 제국주의에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예를 들어 기원전 134년 이베리아 반도 캘트족 국가 ‘누만시아’는 로마군에 의해 정복됐다.하지만 21C 현재 스페인은 로마제국에 근간을 둔 로망어와 로마카톨릭교, 법, 정치체계, 건축법 등을 사용하고 있다.2천여년전 로마에 정복됐던 스페인이 현재 내용적으로 로마의 후신이 돼 있는 것이다.중국 역시 지난 수천년 동안 수많은 민족들이 정복과 피정복을 거듭한 후 현재 ‘하나의 통일 제국’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 중국을 비롯한 모든 제국주의 동화현상은, 전세계 많은 민족·국가의 이질성을 아울러 온 것이 사실이다.또 현대인들이 누리는 문명 대부분도 과거 제국 착취물의 결과라는 점도 부정하기 힘들다.다만 제국에 정복된 민족들의, 수십년에 걸친 동화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다.기독교와 이슬람, 불교 등 종교의 경우 분열의 근원이기도 했지만 인류를 통합하는 매개체 역할도 강력하게 수행해 왔다.앞으로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인류가 자본과 노동, 정보시장이 통합된 하나의 글로벌 제국에서 살게 되지 없을까?

2023-10-29

인요한 혁신위원장에게 바란다

유영희 작가 지난 23일, 국민의힘이 혁신위원회를 꾸렸다. 서울 강서구 선거 패배 이후 내년 총선의 승기를 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일이다.12월 24일까지 60일간 활동하는 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뜻밖에도 인요한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장이 지명되었다. 외국인이기는 하지만, 할아버지가 1912년 한국에 선교 활동하러 와서 아버지도 군산에서 태어났고, 인요한 역시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자라 스스로 순천 촌놈이라고 소개한다고 하니 토종 한국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할아버지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점, 아버지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는 점들로 인요한 가족의 한국사랑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존 린튼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국적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한 공으로 2012년 정부로부터 순천 인 씨라는 성을 받고 특수 귀화를 통해 한국 국적도 갖게 되었다.인요한 혁신위원장은 광주 시민군을 위해 통역도 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존경했다니, 일반 국민의힘 기조와는 많이 다르다. 이번에도 인요한은 첫 대외 행선지를 광주로 정하고, 개인자격이지만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식에도 가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정도라면 진정한 통합을 위해 그가 적격이라는 생각이 든다.이제 그가 혁신위원장이 된 지 3일 만에 내놓은 12명의 혁신위원 명단을 보니, 여성이 7명으로 남성보다 1명 많고, 청년층의 참여도 두드러진다. 70년대생 3명을 제외하고라도, 80년대 4명, 90년대, 2000년대가 각 1명이다. 사업가로 이름을 올린 여성은 나이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중장년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정치인 6명 외에 교수 2명, 의사 2명, 앵커, 학생회장, 사업가 등이라 전문 정치인에게 휘둘리지 않을까 의문이 든다. 인요한 위원장도 그 점을 의식했는지 혼자서라도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겠다고 약속한다.그러나 인요한 혁신위원장의 지난 행적이나 현재의 정치 이상이 아무리 통합 지향적이라고 해도 현실 정치에서 그 뜻이 관철되게 하려면 다른 능력이 필요하다. 이태원 참사 추모식에 가는 이유에 대해 우리 모두 죄인이니 추모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뭉뚱그리며 책임소재를 흐리고, 홍준표 이준석에 대한 대사면 제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떡하겠느냐는 질문에 바뀌지 않으면 죽는다는 원론적인 대답만 하면 곤란하다. 혁신위원회의 권한 범위를 모르겠다면서 와이프와 아이만 남기고 바꾸겠다는 말을 어떻게 실천할지도 의문이다. 인요한은 박근혜 정부 때도 참여했지만 자기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자 후회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물러난다면 개인에게나 우리 사회에 손실이다.누가 정권을 잡든 국민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정부의 존재 이유이다. 인요한 혁신위원장이 여러 의구심과 불안 요소를 잘 극복하고 평소 가진 통합의 지향을 잘 관철해서 국민의힘이 이념 논쟁 그만두고 민생 정치를 펼치는 데 기여해주기를 바란다.

2023-10-29

완벽한 조직을 만드는 혁신리더십

엄주선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포스코의 현장 혁신활동 중에는 개선리더 활동이 있다. 말 그대로 개선 역량이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과정으로 공장 별로 평균 3~4명의 인원을 선발해 개선팀을 구성, 현업에서 4개월간 빠지게 하여 현장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한다. 약 1주일간 일과 낭비 개념 낭비발굴 방법과 개선기법에 대한 기본교육을 이수하고 이를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면서 일하는 법을 배우고 성공 체험을 통해 현업에 복귀해서도 개선을 이어 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활동이다.일반적으로 리더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 등에서 목표 달성이나 방향을 이끌어 가는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래서 카리스마가 있거나 소통을 잘 하는 사람이 리더십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리더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조직 내 다른 사람을 이끄는 책임을 갖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즉 현재의 위치에서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조직의 긍정적인 성과를 만들어가면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그래서 개선리더도 현장의 고질적인 문제에 대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해결하여 성과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는 리더이며 4개월이 완료되는 시점에 사람의 변화와 성과 측면에서 어떤 결과를 내야하는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사람의 역량 향상은 물론 개선 결과가 좋은 성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체크와 피드백을 해 주면서 과정을 관리하는 것이 개선활동에 있어 리더의 역할이다.혁신활동에서 공장이나 그룹과 같은 리더의 또 하나의 역할은 본인이 맡고 있는 일의 본질을 파악하고 현재 상태를 분석하여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한 후 현상과 목표의 차인 문제를 정의하여 조직원이 역량을 발휘하여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다.그러기 위해 문제를 유발하는 요인인 문제점들을 빠짐없이 도출하고 적임자를 선정하여 언제까지 어디까지를 정해주고 지속적으로 피드 백 해주어 좋은 성과가 나도록 과정을 체크하고 지원해주는 역할이 곧 혁신리더십이다.여기서 일의 본질이란 본인의 업무가 고객의 관점에서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가를 기준으로 보면 된다. 제조업은 좋은 제품을 싸게 만들어 고객이 필요한 때 공급하는 것으로 즉 Q.C.D(Quality Cost Delivery)를 말한다. 설비를 정비하는 업은 고장이 나지 않도록 예방하거나 고장이 나면 신속 정확하게 수리하는 것이며, 제품의 품질이나 정도를 분석하는 업은 정확하고 신속하게 고객이 필요한 정보D를 제공하는 것이다.사람은 제품이 아님에도 가끔 불량이라는 단어를 쓰는 때가 있다.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모르거나 엉뚱한 행동을 할 때 태도나 자세 불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제 역할을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완벽한 개인은 없어도 완벽한 조직은 있다는 말이 있다. 완벽한 조직은 각자가 서로 다른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 하면서 맡은 역할을 다하는 리더가 될 때 가능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2023-10-29

시간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2023년이 두 달 정도 남아서 그런지 얼마 전부터 ‘시간’이란 어휘가 주위를 맴돈다. 몸도 생각도 자꾸 시간을 둘러싸고 돌아간다. 그러던 차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영화관에 도착한다. 무려 10년 만에 신작을 가지고 돌아온 스튜디오 지브리의 영원한 얼굴이자 노장(老壯) 미야자키 하야오의 투혼에 경의를 표한다.‘그대들은….’에서 다뤄지는 시간은 2차 대전 혹은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말기(末期)다. 당시 중학생 마히토가 겪는 신비로운 사건이 영화의 고갱이다. 마히토는 물론 하야오의 분신이다. 전화(戰禍)인지 또는 자연적인 발화(發火)인지 모르지만, 마히토는 불길 속에서 사라지는 엄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나이 어린 마히토가 거대한 불길 앞에서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예민하고 감수성 풍부한 마히토의 내면에는 무기력한 자아를 향한 원망이 자리 잡는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시골로 이사하면서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된다. 신비롭고 수수께끼 같은 사건과 장면이 이어진다. 독자 여러분이 몸소 ‘그대들은….’을 감상하시기 바란다.영화에서 흘러간 2년 동안의 시간이 의미심장하다는 사실은 덧붙이고 싶다. 마히토는 그 시간에 내면과 육신의 성장, 자신과 가족 그리고 현실 세계와 저승 세계 같은 복합적이고 추상적이며 비논리적인 것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마히토는 사람이 놓치고 살아가는 수많은 빛과 그림자, 그림자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새로운 1년이 시작하고, 그 1년이 우리와 작별함으로써 또 다른 1년이 얼굴을 내밀면서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새해 전날 많은 사람이 승용차에 몸을 싣고 마치 전장(戰場)에라도 나가는 전사(戰士)처럼 비장한 얼굴로 해맞이를 하러 장도에 오른다. 왜 그러는지, 물어도 신통한 답변을 들은 적은 없다. 남들이 하니까, 뭔가 새로운 의지를 다지러,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는 군색한 대답 일색이다.하지만 거기에는 분명 특별한 의미가 들어있을 것이다. 사라진 1년에 조의를 표하고, 새로운 1년을 향한 굳은 각오와 결의를 다지기 위함이 해맞이 행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론에 보도되는 수많은 차량 행렬이 똑같은 목표와 방향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놀랍고 경이로울 따름이다.요즘엔 시간 흐름이 예전과 달리 완만하고 여유로우며 넉넉하다는 느낌이 날로 강해진다. 평생 한 번도 감촉하지 못한 푸근하고 자유로운 감상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언제나 쫓기듯 열렬하게 살았던 지난날의 나와 그것을 조용히 반추하는 거울 바깥의 내가 서로 어색하여 남산만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그래서 아주 좋다. 서둘지 않아서 좋고, 작은 일에도 진심이어서 좋고, 강연 준비도 차분하고 내실 있게 할 수 있어 좋다. 그래서 나직하게 속삭인다. ‘시간아, 정말 고맙구나!’

2023-10-29

미국도 김치의 날

우정구 논설위원 식품업체의 위생관리 리스크는 기업의 존폐를 가를 만할 위중한 문제다. 최근 글로벌 맥주브랜드 칭다오가 오줌맥주 논란에 휩싸이면서 하루아침에 주식시장에서 시총 1조2천억원을 날려버린 사실은 식품업체의 리스크를 보여준 좋은 예시다.중국은 지난 2021년 중국의 한 김치공장에서 알몸으로 배추를 절이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중국산 식품에 대한 불신이 커진 바 있다. 이번 칭다오 오줌맥주 사건은 중국식품 전반에 또한번 불신을 초래했고, 국가적으로도 망신살이 뻗친 일이 됐다.미국 연방정부가 매년 11월 22일을 김치의 날로 지정 운영한다는 소식이다. 김치에는 유산균과 비타민 등 각종 영양분이 풍부하고 최근 미국에서 다양한 소비자들이 찾는 식품으로 등장한 때문이라 한다.한국산 김치가 미국을 비롯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다. 특히 중국 식품이 국제적 불신을 초래한데 반해 한국은 김치를 통해 국가 브랜드를 높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국민으로서는 자긍심도 느낄만하다.우리나라는 김치문화 계승과 김치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2020년부터 11월 22일을 법정 기념일인 김치의 날로 정하고 있다. 이 날은 김치페스티벌과 요리경연대회 등과 같은 기념행사를 전국에서 펼친다.미국의 건강전문지 헬스는 우리나라 김치를 세계 5대 건강식품의 하나로 일찌감치 선정한 바 있다. 프랑스 몽펠리에대학 장 부스케 교수는 김치 재료에 함유된 영양성분이 코로나19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아 한국김치의 효능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미국의 김치의 날 지정은 K-푸드의 세계화를 입증한 하나의 사례일 뿐아니라 한국음식 세계화의 전망을 밝게 한 쾌거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0-29

10월의 어떤 기억들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천고마비의 10월도 이제 다 지나간다. 단풍 고운 마지막 주에 들면 낙엽 지면 꿈도 따라가는 줄 몰랐던 아련한 추억을 되돌아보기도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는 낙엽 따라가버린 사랑의 노래가 아닌 쓰라린 가슴을 안아야 할 하나의 아픈 기억이 살아 오른다.작년 이맘때 ‘핼로윈 축제’의 흥청거림 속에 서울 이태원 골목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폭 4m의 좁은 언덕길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서로 뒤엉켜 압사당했던 159명의 젊은 영혼들의 기억이 슬프다. 아직도 그 사건의 진상규명이 되지 않고 특별법 제정과 분향소 설치를 다투는 가운데 1주기 추모행사가 열린다. 매년 호황을 누리던 대형 백화점의 마케팅 행사는 사라지고 핼로윈 축제는 물론이고 2주 전에 열려던 ‘지구촌 축제’도 취소됐다.10월 26일이면 생각나는 10·26사태는 1979년 현직 대통령이 살해된 기막힌 역사적인 날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을 통하여 장기 집권의 틀을 마련하고 1972년 10월 유신체제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낙후한 조국을 구하겠다는 선언으로 국민의 정신 개혁과 경제개발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으나 신임하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회식 자리에서 권총으로 살해당했다. 올해가 44주년이 된다.그리고 또 26일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일본 총독 이토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역에서 저격하였고 우리에게는 독립에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한 사건이다. 그가 목숨 바쳐 구국 투쟁을 벌이겠다고 동지 11명과 맹세하면서 자른 손가락은, 여순감옥에서 쓴 많은 글씨와 함께 찍은 장인(掌印)의 자국으로 보여주며 그의 구국 열의를 되새겨 보게 한다.또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46년에 일어난 ‘대구10월항쟁’은 올해로 77주년이다. 당시 미군정의 식량 정책에 불만을 품은 대구시민들이 항의 시위를 하자 경찰이 총격을 가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였는데, 이를 참지 못한 민중봉기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해방 후 최초 민중항쟁이었다. 이 사고의 진상규명과 희생된 수천 명의 명예 회복은 최근까지 계속되었다.역사는 흐른다. 낙엽 지는 가을의 정취 속에 마음을 정리해 보노라면 지나온 세월 동안에 일어났던 숱한 사건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25일은 ‘독도의 날’이었다. 1900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명시한 것을 기념하며 2010년 한국교원 총연합회와 몇몇 유관 단체가 ‘독도의 날’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있는데도 일본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지만 우리 독도의용수비대가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이제 곧 11월. 그 많았던 축제들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포항문화재단의 ‘우리동네 일상예감 프로젝트’로 떠나본 두 번째 ‘세계가곡여행’은 26일 끝났다. 매주 목요일 오전 오후 2개 팀이 대잠홀에서 이탈리아 오페라 공부와 함께 우리 가곡을 감성 있게 불러본 두 달 반의 노래 여행은 이제 나의 뇌리에 행복한 꿈으로 남는다.“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10월의 어느 멋진 날’을 불러본다.

2023-10-26

가을걷이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벼논의 가을걷이가 끝나간다. 우리 고장의 올해 쌀농사는 풍년이다. 가뭄도 심하지 않았고 태풍의 피해도 없었다. 하지만 풍년가가 울려 퍼지는 흥겨운 분위기는 아니다. 풍년이 되어 수확량이 늘어나면 쌀값 하락을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가을걷이를 해야 할 농작물은 벼 말고도 콩과 팥, 조, 기장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조와 기장은 요즘 보기 드물어졌다. 쌀, 보리, 콩과 함께 오곡이라 하여 주요 곡물이었으나 보리와 같이 주식의 자리에서 밀려난 것이다. 김장용 무·배추와 감·사과의 수확은 아직 좀 이르다. 농부의 가을걷이는 자연의 추수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가을이면 대부분의 초목들이 결실을 해서 한 해를 마무리한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피자식물만도 4천 종 가까이 된다니 농작물의 수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작디작은 씨앗에서 출발한 들풀의 농사는 실로 엄청난 결실이다. 망초나 쑥 같은 국화과 풀들은 수만 배의 결실을 하는 게 보통이다.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에도 아주 망하는 법이 없이 생태계를 이어갈 가을걷이를 하는 것이다.사계절이 뚜렷한 온대지방에서는 생태계의 모든 종들이 계절에 맞추어 살아간다. 한해살이로 생을 마치는 종들도 상당수 있다. 사람들도 농경사회까지는 부지런히 계절을 쫓아가는 생활을 해왔다. 봄에는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는 거름 주고 김을 매고, 가을에는 추수를 하는 것이 삶의 내용이었다. 그러다보니 가뭄과 홍수, 태풍 같은 기후의 영향을 어느 동식물 못지않게 받고 살았다. 치산치수로 자연재해를 줄이려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불가항력에 대해서는 천지신명에 빌기도 했다. 문명이라는 꾀를 내기도했지만 자연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지금은 농어민이나 관광관련 사업을 하는 인구를 제외하고는 계절과 기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는 삶이다. 그러나 년·월·주 등을 단위로 하는 생활 역시 지구의 공전과 자전의 사이클에 따른 삶이어서 자연의 조건을 아주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생업의 여가시간은 여행이나 야외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다 많이 자연을 가까이 하기를 바란다. 먹이를 구하는 수단을 농경에서 산업으로 바꾸었지만, 삶의 본질적인 생태는 친자연적이라는 얘기다. 의식주의 해결을 넘어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현상에서 보다 근원적이고 생리적인 삶의 동력이나 감성 같은 걸 얻게 되는 것이다.가을은 추수의 계절이다. 농부가 아니라도 그런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봄이면 꽃구경을 가고, 여름에는 바다를 찾고, 가을에 단풍놀이를 하는 것도 계절을 수용하는 삶이지만, 수시로 집 가까운 공원이나 야외로 나가서 계절의 추이에 젖어보는 것도 삶을 한결 깊고 충일하게 하는 일이다. 추수가 끝난 들길을 걸으며 나의 한 해 농사는 어떠했고 무엇을 수확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내 삶의 알곡은 과연 무엇인지, 금싸라기 같은 하루하루를 나는 그저 빈 쭉정이로만 산 것이 아닌지를 돌아보는 계절이다.

2023-10-26

이준석을 어떡하나?

홍석봉 대구지사장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는 25일 페이스북에 “혁신위라는 것이 결국 어떻게 구성될지는 몰라도, 실권은 없으니 그냥 중진들 입막음용으로 쓰일 것”이라고 김기현 대표가 내놓은 혁신위원회를 평가절하했다. 같은 당 안철수 의원은 “가짜뉴스와 내부 총질, 제 얼굴에 침 뱉기로 당을 침몰시키는 응석받이 이준석을 제명해야 민심이 살아나고 당이 살아난다”며 이준석 제명운동을 펴고 있다.국민의힘이 ‘이준석 블랙홀’에 빠졌다.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 및 당 지도부와 연일 대립각을 세우는 이준석 전 대표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 이준석은 최근 좌충우돌하며 당과 지도부를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마땅한 대응을 못 하고 있다. 내치지도, 쓸 수도 없는 ‘계륵’이 됐다.국민의힘은 내년 총선에서 이준석 공천 여부가 주목받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당의 포용성과 건강성을 재는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여기에 유승민 전 의원과 이준석을 묶은 신당론까지 분출하고 있다.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지만 이준석은 여전히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국민의힘 일각에서는 두 사람의 당 퇴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고 있고 중도 확장성이 큰 때문이다. 하지만, 둘 다 지역구에 출마해서는 당선이 어렵다는 관측이 나온다. 두 사람의 여론을 움직이는 힘이 적어도 2, 3%는 된다는 분석도 있다. 국민의힘 후보 당선에 큰 역할은 하지 못하더라도 떨어뜨릴 수 있는 힘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선거판에 ‘고춧가루’를 뿌릴 수는 있다는 시각이다.TK(대구·경북)에서 이준석을 보는 눈도 예전 같지는 않다. 특히 TK 국회의원들은 최근 이준석의 ‘비만 고양이’ 취급에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초·재선 의원들이 주류인 지역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나 대정부 활동에 그다지 존재감을 보이지 못 하는 탓이 크다. 하지만, 이렇게 조롱당해도 마땅히 대응을 못 하고 속앓이만 하고 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큰불을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여당 내부에서는 인요한 혁신위원장 체제 등장으로 변화 조짐도 보인다. ‘통합과 변화’를 내세우는 인 위원장이 혁신위를 통해 이준석 및 비윤(비윤석열)계 끌어안기를 시도하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이 전 대표와 천아람 등 친 이 인사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그 나물에 그 밥’이라며 김기현 2기 체제에 실망한 보수 지지자들이 정부·여당에 등을 돌리는 모양새다. 최근 60, 70대 TK에서 윤석열 대통령 국정지지도가 상당 폭 떨어졌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잘못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국민의힘은 우군 확보가 시급해졌다. 이런 판국에 계륵이 된 이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속만 뒤집힌다. 보수진영에선 서로 양보해 상생을 찾길 바라지만 해법 찾기가 녹록지 않다.본인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이준석의 처신과 행동에 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그의 정치 행로에도 독이 될 수 있다. 한때 기대와 힘을 함께 실어주었던 TK다. 이준석 전 대표는 ‘너무 나댄다’는 비판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2023-10-26

인기인의 마약범죄

우정구 논설위원 영화 배우 이선균의 마약투약 사실이 드러나면서 우리 사회가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영화배우 유아인의 마약투약 혐의가 논란을 일으킨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터져 나온데다 이와 별건으로 유명 연예인의 마약 투약 사실이 또다시 경찰에 포착됐다는 보도가 나와 그 파장이 일파만파다.연예인의 마약 논란은 대중의 인기를 먹고살아야 하는 특성 탓인지 오래전부터 빈발했다. 1975년에는 우리나라 록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신중현 등 당시 인기가수 18명이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한꺼번에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 그 이후에도 연예인의 마약 연루 사건은 심심찮게 벌어졌던 게 사실이다.연예인은 대중의 인기를 관리해야 하는 직업상 정신적 심리적 피로감으로 마약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는 학계의 분석도 있다. 그러나 대중의 인기가 높기 때문에 파급력 또한 크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특히 이들의 범죄가 감수성이 강한 청소년의 모방 욕구를 자극한다는 점은 우리사회가 경각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올들어 국내에서 마약류 사범으로 단속된 사람은 모두 1만2천여명에 이른다. 10년 전 5천명 선과 비교하면 엄청난 증가세다. 더 심각한 것은 마약 사범의 증가세가 청소년층에서 집중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지난 3월 서울 강남구 학원가 일대에서 필로폰 성분이 든 음료를 학생들에게 마시게 하고 부모로부터 돈을 갈취하려는 범죄가 발생해 우리를 경악게 한 바 있다. 마치 냄새없는 독가스를 마시듯 마약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일상 속으로 파고 들고 있다.인기 배우들의 마약범죄가 늘어나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이유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0-26

어느 포스코 직원의 호소..."55년만의 최초 파업이 자랑 될 수 없어"

올해로 포스코에서 만 2년 8개월 근무한 현장 직원입니다. 연봉은 7천만원 정도 받고 있으며, 조합원은 아닙니다.저는 포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여느 포항시민들처럼 포스코는 제게 꿈의 직장이었습니다. 파란색 근무복을 입은 포스코 직원들은 제게 우상이었습니다.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4년제 대학 대신 전문대에서 기술을 열심히 익히며 포스코 입사를 준비했습니다. 부족한 실력 탓에 삼수 끝에 입사했지만 지금은 부모님과 지인들의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꿈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최종 면접 때 “뽑아주시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말이 제 진심이었기에 용기를내어 말씀드립니다.지금 포스코가 많이 아픕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수없는 소용돌이속에 더더욱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기에 직원들의 마음도 점점 지쳐가고 있습니다.설마설마하던 파업이야기가 구체화되면서 현장도 기대반 우려반 분위기 속에 술렁이고있고 몇몇친구들은 파업을 하면 큰 돈을 받을 수 있겠지?하는 막연한 기대에 젖어 파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것처럼 말합니다.임금이 올라간다는데 그걸 마다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주식 100주를 안받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포스코는 제 평생 직장이기 때문입니다.몇년 바짝 벌어서 주식, 코인에 몰빵에서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테고, 저같이 명예롭게 정년퇴직 하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겁니다.회사 곳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매년 파업해서 수천만원씩 연봉을 올릴 수는 있나요? 인건비 부담이 지속되면 다른 IT기업들처럼 구조조정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수개월째 파업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고 직원들도 파업에 거는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제가 그토록 동경했던 이 회사는 점점 투쟁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지금 회사에서는 파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바깥에서는 포스코 파업으로 인해 “지역경제가 나빠진다. 나라가 망한다”고 걱정들 하지만, 솔직히 포스코를 평생직장으로 생각하고 다니는 저 같은 직원들은 그냥 미래의 직장이 없어질까 두려울 따름입니다.파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수십대일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회사를 사랑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고 있습니다.회사 입장에 조금이라도 공감하거나 노조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 사측, '노무새' (노무새X)등 온갖 비난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침묵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진짜 이런분위기가 계속되다보면 저같이 조합원이 아닌 사람들이 받게될 차별은 불보듯 뻔합니다.2만명이나 되는 포스코 직원들의 평균 근속연수가 20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노조말대로 회사가 직원대우를 소홀히 했으면 어떻게 그많은 직원들이 회사에서 20년 30년 근무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55년만의 최초의 파업이 자랑이 아니라 55년간 회사를 아끼고 사랑했던 마음이 더 존중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극심한 대립과 분노는 우리 모두에게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 결국 다함께 살아야 한다면 다투고 적대하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현장에는 저 보다 더 훨씬 회사를 사랑하는 동료, 선배들이 많습니다. 회사나 노조가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직원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 조속히 이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겠습니다.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철강(가명·포스코 직원)

2023-10-26

수면 관리와 건강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피로의 원인은 다양하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힘든 노동, 불규칙한 식사와 과식, 자극적인 음식, 흡연, 음주, 부족한 운동 등의 복합적인 결과는 피로를 유발한다. 그러나 피로하게 만드는 수십 가지의 원인이 있더라도 하나만 제대로 노력을 하면 피로를 확 줄일 수가 있다. 바로 충분한 잠이다. 사람은 잠을 자면서 피로를 회복한다. 그날 받은 스트레스와 많은 복잡한 일들은 수면 중 정리가 되어 다음날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잠의 효능은 다양하나 최근의 한 연구결과는 잠을 잘 때 뇌척수액이 세포 곳곳의 노폐물과 독소를 청소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알아냈다. 잠을 자면 뇌 세포 사이에 척수액이 스며들어 낮에 하는 활동으로 쌓인 노폐물과 독소를 씻어 낸다는 것이다. 이 독소는 치매를 유발한다고 의심되는 물질로 잠을 충분히 자야만이 제거 될 수 있다.즉 잠을 제대로 자야지 뇌에 쌓인 독소가 제거 되고 피로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잠은 자기 싫어서 안자는 것이 아니다. 잠드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잠을 자도 자주 깨고 자더라도 얕은 잠이나 꿈을 꾸는 것이 문제다. 이는 내가 편안히 잠 들고 싶다고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수면제를 먹기도 하고 술의 힘을 빌리기도 하고 운동을 하기도 한다. 충분한 수면을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매일 자는 시간과 기상 시간을 정해놔야 한다. 만약 밤 11시 수면, 아침 7시 기상으로 정해놨다면 무조건 밤 11시엔 침대에 누워야 한다. 모든 불빛은 차단하고 눈을 감는다. 잠이 안온다고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면 안 된다. 그렇게 뒤척거리다 늦게 자더라도 무조건 아침 7시에 일어난다. 일찍 잠이 들어 중간에 깨는 경우는 아침 7시까지 눈을 감고 누워 있어야 한다.운동을 해도 도움이 된다. 너무 심한 운동은 수면을 방해 할 수 있으니 수면 3시간 전에 30분~1시간 정도의 가벼운 운동을 하면 된다. 물론 원래 하던 규칙적인 운동이 있으면 그것을 하면 된다. 수면 시간이 밤 11시라면 저녁 8시에 운동을 마무리 하는 것이 좋고 늦어도 밤 9시엔 마무리 하는 것이 좋다. 운동을 하게 되면 열이 나고 혈액순환이 되어 바로 자는 것이 힘드니 자는 시간 3시간 전에는 끝내는 것이 좋다. 10분이라도 하면 도움이 된다.명상은 그 자체로 피로를 풀고 수면에도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어렵지 않다. TV 보지 말고 불을 끄고 눈을 감는다.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고만 있어도 자연스런 명상이 되고 명상이 되면 자연스레 뇌척수액이 청소를 시작한다. 10분만 해도 도움이 되고 시간이 길어지면 더욱더 도움이 된다.그리고 한의원에 가서 한약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 한약은 가슴의 화를 꺼주고 몸의 불편함을 없애 몸의 상태를 개선해서 수면에 도움을 준다. 중독적이지 않아서 몸의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복용하면 된다. 치자 황련 복령 등의 약재들을 사용하면 아주 심각한 수면 불량이 아니곤 대부분 개선된다. 각자의 방법으로 수면의 질을 높여 피로를 없애고 건강을 잡아보자.

2023-10-25

베리를 묻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11년을 넘게 같이 살았던 강아지 베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49일 되는 날, 묻었다. 모두의 집에서 가장 아름답고 크고 웅장한 소나무 아래에 묻었다. 원래 남편은 베리 나무라며 울릉도에서 사 온 마가목 아래에 묻으려 했다. 정작 베리를 묻으려 보니 묘목같이 어린 마가목은 작아 볼품이 없어 보였다. 난 보리수 아래 볕 드는 곳을 골랐다. 남편의 선택은 소나무였다. 6그루 소나무 중에 가장 보기 좋고, 우리가 자랑스러워하고, 남들도 보면 경탄해하는 수형 멋진 나무였다. 나도 마음에 들었다. 소나무 남쪽 아래 깊이 땅을 파고 조그만 오동나무관을 넣고 흙을 덮고 묘비명을 써서 꽂았다. “사랑하는 베리 영원한 세상에 잠든 곳.”잦은 병치레로 입원과 수술을 여러 번 경험한 베리였다. 작년 초겨울 암으로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이가 많아 수술은 힘들었다. 괴롭고 힘든 항암 치료는 견딜지 의문이었다. 며칠 고민 끝에 명을 다할 때까지 잘 먹이며 집에서 돌보기로 했다. 14살이면 사람 나이로 90 노인. 노인 모신다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했다. 겨울을 못 넘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쇠약해지긴 했으나 원체 좋은 식성의 베리는 잘 먹어선지 호전하는 듯했다. 그러나 여름 들어 급격히 기운이 떨어지더니 움직임은 굼뜨고 깔끔하던 배변습관도 망가졌다. 살은 빠져 앙상해졌고 처연한 눈망울만 커졌다. 윤기나던 새까만 털도 푸석해지고, 뒷덜미엔 흰 털이 수북히 자랐다. 입가의 수염도 하얘졌다.8월 중순 출장으로 부득이 이틀을 비울 일이 생겼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나. 남편이 전적으로 돌보기엔 무리라 이만저만 걱정도 함께 안고 갔다. 남편은 수시로 사진을 찍어 베리의 동태를 알려주며 날 안심시켰다. 용케도 베리는 견뎌주었다. 돌아온 후엔 안방에서 같이 지내며 며칠 밤을 새웠다. 보통 괴로워하는 게 아니었다. 고통을 견디는 게 힘들어 보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이리저리 바꿔줄 뿐, 고통까지 나눌 순 없어 안타까웠다. 물기 가득한 큰 눈을 보면 눈물만 났다. 물도 혼자 먹지 못하자, 손주 약 먹이는 약통에 물을 넣어 입가에 흘려주면 겨우 삼켰다. 괴로움의 신음을 며칠 들으니 산 자의 고통이 차라리 죽음만 못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새벽 3시. 베리 돌보느라 서로 잠자는 시간을 바꿔가며 쪽잠을 청해 기진맥진 잠들어 있는 남편을 깨웠다. 병원에 연락해 달라고 했다. 남편은 아는 수의사 교수에게 문자를 넣어 베리의 상태를 알렸다. 다음날 오전에 진료 준비할테니 데리고 오라는 문자를 바로 받았다.일 있던 남편은 내게 베리를 맡겼다. 정작 시간이 되자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다. 주차장에 주저앉아 남편을 급히 호출했다. 함께 병원에 갔고, 그리고 베리는 내 품에 안겨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병원에서 소개한 장례식장에서 베리는 한 줌 재로 내게로 와서 집에서 49일을 함께했다. 손주들이 와서 꽃을 놓고 베리 사진을 보며 울먹였다. 손녀는 아직도 가끔 하늘을 보며 베리야 잘있어? 묻는데, 모두의 집에 묻힌 베리의 묘를 보며 뭐라고 할까?

2023-10-25

누구와 겨루는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학교폭력의 그늘이 짙다. 하필이면 권력의 주변에서 자녀들이 가해자로 발견되는 모습은 절망스럽다. 신체적으로 가해지는 폭력도 무섭고 두렵지만, 마음을 병들고 무너지게 하는 게 학교폭력이다. 몸에 입은 상처는 곧 아물겠지만, 마음에 입힌 상흔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가해자는 장난이었기 때문에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일을 피해자는 수십 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떠올리곤 한다. 피해자 본인도 힘들지만, 부모와 가족이 겪는 고통은 또 어떤가. 정상적인 대인관계를 이어가기 힘들어지고 긍정적인 관계형성이 어려워진다. 학교폭력은 반드시 사라져야 하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가해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것일까.남보다 힘이 세다는 걸 증명하려고 그러는 게다. 상대방을 제압하고 올라서는 방법이 폭력이 아닌가. 남들이 무서워하는 게 통쾌해서 그럴 것이고, 힘으로 누구든 무찌르면 세상을 가진 듯하여 그런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남들을 괴롭힌다고 해서 나의 모습이 한 치도 자라지 않는다. 남을 딛고 일어서 내가 성장하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력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지만 폭력은 진정한 우위를 증명하지 않는다. 비겁함과 졸렬함을 드러내면서 가해자의 인성적 가치는 곤두박질친다. 남들과 다투어 이기는 일을 ‘경쟁’이라 가르친 학교가 잘못한 게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겨야 한다는 강박은 폭력까지 동원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진정한 경쟁은 ‘나를 이겨내는’ 일이다. 부단히 실력을 닦아 성장에 이르는 길은 나 자신과 싸움의 연속이다.대한민국 헌법 34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고 적는다.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을 학교폭력이 막아서는 꼴이 아닌가. 학교에서 더는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미국 학교에서는 행복한 가르침과 즐거운 배움을 확보하기 위하여 세 가지를 다짐한다. ‘나는 학폭을 저지르지 않으며, 주변에서 학폭이 눈에 띄면 신고하고, 내가 학폭을 당하면 가만히 있지 않는다.’ 배움의 공동체여야 할 학교가 폭력에 물들게 할 수 없다. 학교폭력도 폭력이다. 발생하는 학교폭력을 보다 엄정히 대처하여 아침마다 등교하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가해자를 처벌하고 선도함은 물론, 피해자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법적인 처리방법도 강구해야 하지만, 학교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고 교육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무한경쟁’이라 부르며 끝없이 남과 다투도록 내몰았던 교육방식의 공허함을 직시해야 한다. 나도 자라면서 남도 행복한 배움의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남을 해치면서 내가 성장하는 길은 없다는 걸 깨우치게 하고, 끊임없이 나를 이겨내며 거뜬히 일어서는 보람을 가르쳐야 한다. 생각으로 겨루고 토론하며 다투지만, 물리적인 폭력은 절대로 부르지 않는 행복한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 학교폭력으로 물든 어두운 교실은 시급히 바꾸어야 한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즐겁게 가르치며 배우는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2023-10-25

가축 ‘집단 살처분’ 괜찮나

홍석봉 대구지사장 소 피부병인 ‘럼피스킨병’이 급속 확산되고 있다. 지난 20일 충남 서산에서 국내 첫 확인된 지 5일 만에 경기, 충북, 강원 등 전국 확산 조짐을 보인다.방역 당국은 발병 소에 대한 살처분 조치와 함께 긴급 백신 접종에 나섰다. 전국 농가에는 일시 이동 중지 명령을 내렸다. 벌써 27곳 농가에서 2천마리 가량이 집단 살처분됐다. 사육농가와 낙농업계는 대규모 살처분 가능성에 불안해하고 있다. 소 86만 마리를 사육, 전국 최대의 한우 사육지인 경북도도 비상 태세다.지난 5월엔 충북 청주·증평에서 구제역이 발생, 소 1천50여 마리를 살처분했다. 2010년 안동에서 시작된 구제역은 전국으로 번져 390만 마리의 가축을 살처분했다. 경제 피해만도 3조4천억원에 달했다. 최근 5년간 발생한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살처분된 돼지는 36만5천마리, 피해액은 2019년에만 1천334억원이다.정부는 집단 살처분으로 인한 가격 상승 등 경제 영향을 고려, 살처분 방식 전환을 꾀하고 있다. 발병농장에 대해 사육 가축들의 백신 항체 형성 정도에 따라 선택적 살처분으로 전환키로 한 것이다. 2011년 백신접종 의무화 후 집단면역이 높아진 점도 작용했다.수의사이자 생명윤리학자인 박종무는 ‘우리는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책에서 ‘예방적 살처분’을 당연시하는 현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2010년 구제역 사태 당시 “방역 당국이 일정에 쫓겨 살아 있는 가축을 생매장하기도 했다”며 당시 작업 근로자와 수의사, 농장주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토양, 지하수, 하천 등 환경 오염 문제도 불거졌다. 결국 인간의 생명을 위협한다. 뿌린 대로 거둔다.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0-25

계해일주(癸亥日柱)

육십갑자 중 육십 번째 마지막 계해(癸亥)다. 천간(天干)의 계수(癸水)는 비와 이슬 또는 생명의 물이다. 지지(地支)의 해수(亥水)는 차가운 음력 10월의 기운이다. 동물로는 검은 돼지다.계해일주는 음의 기운인 수(水)가 왕성하고, 천간과 지지의 마지막 자리이고, 새로운 시작의 발원지라는 점에서 많은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신중한 성격에 다정다감하고 유순하다. 누구에게나 친밀감을 주며, 순수하면서도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성격이다. 아울러 얌전하고 조용한 편이나, 주체성이 강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서슴없이 하는 스타일이다.맑고 깨끗한 용모와 뛰어난 말솜씨를 가졌다. 총명하고 지혜로워 순간 판단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매사에 치밀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 마치 물 흐르듯 논리 전개가 뛰어나다. 거짓이 없고 남을 속일 줄 모르는 정직한 성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기민하게 움직인다. 반드시 상대를 이기기 위해 만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상대를 굴복시키는 특징이 있다.내성적이고 침착하지만 의외로 신경이 예민하고 집념이 있다.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다. 의외로 개방적이고 열린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융통성과 포용력이 있고, 정에 약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지고지순한 인정을 베풀기도 한다. 그로 인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발생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상대에 대한 공감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맹자의 사단(四端) 중 하나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남의 안타까운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어린아이가 우물 안에 빠지려고 한 상황을 목격한다면 사람들은 놀라고 걱정스런 마음을 가진다. 대부분 못 본 채 하지 않고 아이를 구할 것이다. 그들은 어린아이의 부모에게 보상을 바라는 것도 칭찬을 듣거나 원성을 듣기 싫어서가 아닌 것이다. 단지 본능적으로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독일 출신 유대인이며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 무능을 낳고, 또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고 말한다. 즉 ‘악의 평범성’을 말한다. 악(惡)은 의외로 평범하다는 것이다. 그 평범한 악은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마치 조직의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여과 능력도 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사고의 무능이 이성과 보편적인 공감능력을 마비시키고, 말과 행동에서 무능을 낳는다. 그 결과 많은 피해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계해일주 남자는 한 길로 꾸준히 나아가면 성공할 수 있는 운이고, 부인의 덕을 보는 경우가 많다. 반면 한량 기질이 있어 가정에 소홀할 수 있으니 신경을 써야 한다. 여자는 본인의 힘을 가지기 위해 남편을 출세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결혼 후 외간 남자를 만난다거나 야반도주할 가능성도 있다. 성정이 강하여 배우자를 무시하는 성향도 있다. 대체로 남녀 모두 신수가 훤하고 깔끔한 편이다.계해(癸亥)의 해는 동물로 돼지며 다산의 왕이다. 그만큼 생명력이 넘치는 기운을 내포하고 있다. 고사 지내는 날에도 돼지며 제사상에도 산신제에도 법계에 소통하는 것이 돼지다. 그래서 복돼지라고 한다. 주는 것을 좋아하는 계(癸)와 받는 것을 좋아하는 해(亥)는 환상적인 궁합이 된다. 하지만 의도는 착하고 선하지만, 뜻과 야망이 커서 사람들을 다 챙기지 못한다라는 의미도 내포한다.계(癸)는 천간의 마지막이고, 해(亥)도 지지의 끝이다. 천간과 지지가 모두 물 수(水)다. 그래서 깊은 바다처럼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온갖 물을 가리지 않고 다 받아서 정화된 깨끗한 물을 60갑자 중 첫 번째인 갑자(甲子)로 흘러 보내는 역할을 해야 하는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물이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구나’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다. 되돌아오는 경우는 없다. 종착지는 망망대해다. 그래서 인간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남다를지도 모른다.근대 경험론의 선구자인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유토피아 소설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저술했다.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 정신과 신대륙의 발견에 영향을 받아 바다 저편의 새로운 세계를 그리워하며 이상향의 생활을 표현했다. 경험과 관찰을 통해 자연과학을 중시하던 시절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베이컨의 유명한 말이다. 앞서 플라톤이 처음으로 사라진 도시 ‘아틀란티스’를 언급했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주인공은 페루에서 출발해 중국과 일본을 향해 가던 중 폭풍을 만나 표류한다. 그때 우연히 숲이 무성한 섬을 발견한다. 그곳은 ‘벤살렘’이란 나라로 미지의 섬이다. 거기에는 눈부신 과학과 문명으로 백성들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며, 모든 기만과 속임수와 거짓말을 혐오한다. 섬의 등불 역할을 하는 ‘솔로몬 학술원’에서 다뤘던 상상의 과학기술이 상당 부분 현대에 이르러 현실화되었다. 베이컨은 과학적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한 경험을 강조한 철학자였다. 그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벤살렘’을 통해 그려낸 것이다.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환경오염을 야기 시켜 지구가 날로 황폐해지고 있다. 또한 대량살상이 가능한 무기들, 특히 핵과 같은 무기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자하는 욕구가 많아졌다. 그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미래를 예측해 왔다. 그 중 하나가 명리학이다.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통해 인간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것이 유전자라고 말한다. 유전자는 감정과 이성도 없는 생존 그 자체다. 우월한 유전자만이 생존하여 생명을 이어간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존하는 동안 앞날을 예측하고자 유전자는 탁월하게 진화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2023-10-25

칠푼 고리

윤명희 수필가 눈빛들이 진지하다.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런 웃음기는 사라지고 모두 두 손을 모으고 섰다. 통팥시루떡까지 수북이 쌓아올린 고사 상이 제법 구색을 갖췄다. 두어 시간 전에 급조한 축문을 회장인 金이 맛있게 읽는다. 막걸리를 잔에 붓고 절을 한다. 지갑을 열어 복전까지 내 놓는다. 뻗정다리가 된 남편까지 절을 하자 뭘 저렇게까지 할 게 있나 싶은데, 뒤이어 깁스를 한 鄭까지 목발을 옆에 세워두고 절을 한다. 퇴주잔에 막걸리를 붓고 다시 잔을 채우는 張까지 엄숙하다. 고사를 핑계로 모여 놀자는 취지는 온데간데없다.먼저 사건의 발단이 된 건 남편이다. 화물차에서 밧줄로 물건을 묶다 떨어졌다. 평소의 실력으로 봐서는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격이다. 어이없어 하는 남편을 돌아가며 놀려댔다. 칠푼 고리가 그렇지 뭐. 어느 밤, 鄭에게서 전화가 왔다. 몸놀림이 날렵하기로는 모자람이 없는 그가 한자 남짓한 빈 페인트 통 위에서 넘어져 발뒤꿈치가 어그러졌다는 것이다. 남편의 목발을 하나씩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작은 金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왔다. 낮에 힘들게 일했노라 보여주기 식의 엄살은 사양한다는 우리의 타박에 그는 사다리에서 두 번 떨어지면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법이라 했다. 누구처럼 깁스를 하면 표시라도 날 텐데 겉은 멀쩡하니 억울하기 짝이 없어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회장 金이 칠푼 고리 이름이 아까운 인간들이라며 한심해 했다.큰소리치던 그가 갈비뼈가 두 대나 나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비가 억세게 온 다음날 농장에서 미끄러졌다나. 농사일이 가장 바쁜 철에 일은 고사하고 숨도 크게 못 쉬는 형편이 되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말이 없는 新까지 전립선 치료로 병원을 드나들고 있다.돌아보니 아직 張이 남았다. 나는 그의 아내에게 다친 이들을 위로하는 술자리를 만들자는 말을, 액막이 고사라도 지내야 하지 않겠냐는 말로 대신했다. 그녀는 흔쾌히 통팥시루떡을 두 대 해오겠다고 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날이 잡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기를 삶고 수박을 들고 왔다. 내게 떨어진 건 축문이었다. 한 번도 고사를 지내 본 적이 없는 나는 인터넷을 뒤져 동냥을 했다. 늦게 만난 좋은 인연 100세 후 가는 그날까지 함께 할 수 있게 보살펴달라는 청탁을 천지신명께 고하는 축문을 만들었다.우리는 몇 년 전 귀촌으로 만난 인연들이다. 도시에서 살 때 얼마나 잘 나갔노라는 말은 필요치 않았다. 느지막한 나이에 시작한 농사일에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팔을 걷어붙였다. 내가 가진 농기구가 필요하다면 빌려주고, 내 힘까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나섰다.그들이 칠푼 고리가 된 것은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 남편과 金, 鄭이 경운기 앞에 섰다. 나와 金의 아내는 나무 그늘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녹이 반쯤 얹힌 경운기의 시동이 당체 걸릴 생각이 없다. 밑바닥까지 훑어보는 그들의 표정이 심각했다. 방금 고쳐왔는데 뭐가 또 문제고? 이것저것 다 열어보고 돌려봐도 끄덕도 않는다. 고쳐준 사람을 원망하며 다시 고치러 가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지나던 동네할아버지가 무슨 일이냐며 거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한 번 까딱 하자 경운기가 힘차게 돌아갔다. 나는 세 남자의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경운기 사건으로 그들은 스스로 칠푼 고리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셋이 모이던 비닐하우스에 농사실력이 팔 푼도 안 되는 칠푼오리인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다. 그들도 칠푼 고리라는 이름에 토를 달지 않았다.고사가 끝난 자리, 음복 상을 차리고 막걸리가 한 순배 돌았다. 몇 달 사이에 연이어 이런 사단이 난 것은 칠푼 고리 이름 때문이라며 개명을 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좋은 뜻을 담은 새 이름이 하나 둘 나오더니 잔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남은 생이 칠푼오리로만 끝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버린 것이다.

2023-10-25

울릉해녀문화제의 가치와 전망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울릉도의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천혜의 섬 울릉도 도동항에 간간이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는 도동여객선터미널 옥상 공원에서 시와 음악이 흐르고 해녀들의 삶과 애환이 물결처럼 여울지는 새로운 문화가 피어났다. 바다를 지키고 가꾸며 바다와 함께 적극적인 삶을 살아온 울릉도 독도 해녀해남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나는 해녀랍니다’ 주제의 해녀 문화제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행사는 문화체육관광부 2023년 ‘문화가 있는 날’ 지역특화 프로그램 ‘한 점 섬에 살거나’의 공모사업으로 울릉도에 거주하는 해녀들과 지역 문화예술인·동호인·관계기관 등의 참여와 협조로 이뤄졌다.햇살 좋고 바람 선선한 휴일 늦은 오후, 울릉도 주민들과 관광객 등이 설렘과 기대로 삼삼오오 공원으로 모여들고 갈매기들도 궁금한지 공중을 선회하며 문화제를 반기는 듯했다. 한 켠에 마련된 시식코너에는 해녀들이 직접 잡거나 채취한 문어·전복·소라 등을 맛볼 수 있었고, (사)독도재단에서는 설문지에 따라 독도 배지 등의 기념품을 나눠주는 등 작은 축제마냥 약간 들뜨는 분위기였다.그런 가운데 울릉도 해녀들의 축하 공연을 시작으로 해녀의 삶을 생생하게 들려준 해녀 이야기, 경북문협 울릉지부장의 해녀에게 바치는 자작시 낭독과 포항시낭송회 3명의 회원이 해녀, 해남 차림으로 3편의 시를 시극(詩劇)으로 펼쳐서 의미를 더했다. 또한 제주도에서 활동 중인 현대무용팀 ‘팀오르다’의 해녀 물질을 주제로 한 무용은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으며, ‘유네스코 해녀의 가치’ 강연에서는 울릉도 해녀의 삶과 활동, 역사와 의의를 이야기해 해녀들을 이해하고 가치를 간접적으로 느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축하공연으로 울릉군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단체인 팀포유색소폰, 울릉아리랑, 독도팝스오케스트라, 통기타를 사랑하는 모임 등이 출연하여 행사의 흥을 더하며 인기를 끌었다.경북에서 처음으로 열린 이번 울릉도·독도 해녀 문화제를 통해 해녀의 삶이 재조명되고, 해녀를 주제로 한 다양한 스토리와 울릉도의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발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울릉도에는 9명의 해녀가 살고 있는데 모두 제주 출신이다. 이들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제주해녀문화와 함께 독도주민, 독도의용수비대와 더불어 독도의 바다를 일구고 지켜온 산증인이다. 제주출향해녀들의 물질이 울릉도 독도를 이어주고 일궈왔지만, 고단하고 힘겨운 해녀들의 삶의 가치와 의미가 거론되거나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지난 4월 ‘울릉도독도해녀해남보전회’가 결성되고 해양아카데미가 열리는 등 해녀에 대한 인식변화와 처우개선의 움직임이 보여 다행스럽다. 최근에 경북해녀협회가 창립된 것도 향후 해녀문화 조성과 네트워크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바다의 밥상을 차려주는 해녀들은 바다의 자원이다. 울릉해녀문화제가 제주도에서 매년 열리고 있는 ‘제주해녀축제’와 연계해 세계 유일의 여성공동체 문화인 해녀어업문화의 전승과 보전을 위한 교류와 협력, 육성과 지원 등으로 해녀문화를 선도하고 경북 해녀활동의 활성화를 기대해 본다.

2023-10-24

또, 다른 시간에 대한 성찰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나는 SF(Science Fiction)를 좋아한다. 암울한 기술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현실과 만나는 지점을 생각하는 순간이 무척이나 즐겁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2020년대 한국 문단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SF소설의 위상은 고무적이다. 2010년대 중반까지 소수만의 전유물이었던 SF의 인기는 우리 사회가 기술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시작했다는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이후부터 즐겨 읽는 작품 목록 중에는 미국의 SF작가 할란 엘리슨의 ‘제프티는 다섯 살’이 제일 위에 놓인다.이 소설은 스물두 살이 된 도널드의 시선에서 여전히 몸과 마음이 다섯 살에 머물러 있는 친구 제프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의 말미에 도널드와 제프티는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다. 도널드가 자신의 TV 판매점에 몰려든 손님을 상대하다 극장을 향해 출발할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멍하니 TV를 바라보던 제프티는 공포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결국 제프티는 혼자 극장으로 갔지만, 뒤늦게 도널드가 갔을 때는 동네 아이들에게 맞아서 신음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도널드는 다섯 살에 머물러 있는 제프티를 철저히 외면하는 그의 부모님을 목격하며, 정말 ‘현재’가 ‘과거’보다 진보했는지를 절규하듯 물어본다.지난 토요일은 둘째 아이 유치원의 가족운동회가 있는 날이었다. 운동회를 마치고 첫째 아이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둘째 아이 친구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놀게 했다. 총 여섯 명의 아이는 술래잡기, 얼음 땡 놀이 등을 했다. 아이들과 놀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아이들은 정말 힘껏 논다. 어른이 보기엔 비효율적인 놀이를 즐겁게 반복하며 아이들은 금방 땀을 흘리고 서로 잡기 위해 뛰면서 눈을 마주치면 뭐가 좋은지 큰 소리로 웃었다. 비록 언니들의 세계에 끼어들진 못했지만, 둘째 아이도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온전히 노는 순간에 몰입하고 있었다.어른의 세계는 어떤가? 나는 조금 뛰어다니자 지쳐서 그늘로 들어갔다가, 아이들이 부르면 다시 놀이터로 나가길 반복했다. 한 시간이 넘어가자 시계를 살펴보며 집에 갈 시간을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제프티는 다섯 살’을 떠올리고는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어른의 시각에서 아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본 것은 확실했다.‘제프티는 다섯 살’을 학생들에게 읽히면 흔하게 나오는 반응이 과거를 ‘복고’로 해석하며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가 ‘과거’보다 정말 진보했는가? 라는 도널드의 질문을 우리에게 되묻는다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어린이의 시간은 효율과 능률이란 어른의 논리가 아니라 자기의 본능에 충실한 삶을 만든다. 어린이의 시간을 공유하며 만드는 진보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진보와 어떻게 같고 다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2023-10-24

인요한 혁신위 ‘레드팀’이 돼야한다

심충택 논설위원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3선·대구 달서을)는 지난 대선 때 레드팀으로 불리는 선거대책위 후보전략자문위원장을 맡았다.민주당 입장에서 당시 윤석열 후보의 약점을 파고들며 ‘쓴소리’를 하는 게 주요역할이었다. 윤 원내대표는 자신의 레드팀 경험을 소개하며 “듣기 불편한 내용까지 후보께 가감 없이 전달했다. 대통령실 가교가 돼 제대로 민심을 전했다”고 했다.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슬럼프에 빠진 당을 구하고 레드팀장 역할까지 해야 할 여당 혁신위원장이 그저께(23일) 선임됐다. 국민의힘이 어려운 과정을 거쳐 선택한 혁신위원장은 호남출신 인요한(64) 연세대 의대 교수다. 이미 국민의힘 총선 영입 대상으로도 거론돼 왔다는 점에서 파격적이진 않지만, 스타성과 주도성을 갖췄고 여당의 외연확장에 대한 확고한 지론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인물을 찾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2012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원회에서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경력도 있어 강경 보수지지층에서도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인 위원장의 가문은 구한말부터 4대째 한국에서 선교·의료·교육 활동을 펼쳐 왔고, 이 공로로 2012년 ‘대한민국 1호 특별귀화자’가 됐다.인요한 혁신위는 지금부터 혁신위원을 구성한 후, 활동 기간과 범위, 다룰 과제 등을 결정해야 한다. 혁신위가 당 쇄신과제를 선정할 때는 어떤 식으로든 당원과 국민의 의견수렴절차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혁신위가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 구성됐기 때문에, 혁신과제가 당 지도부 거취나 총선공천문제 등 민감한 현안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당 쇄신과제 하나하나가 폭발성을 지닐 소지가 다분하다. 자칫 혁신위가 당 지도부에 종속됐다는 소리가 나오거나, 실천불가능한 혁신과제를 선정하면 ‘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의 재판(再版)이 될 수 있다.혁신위는 자나깨나 ‘민심’을 반영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국민입장에서 생각하고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대통령실이나 당 지도부를 향해서는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레드팀이 돼야 한다. 인 위원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정치를 하게 된다면 국민의힘에서 전라도 대통령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여당의 지지층 확장이 호남까지 폭넓게 진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말로 해석된다. 한국정치와 관련해서는 “정치가 국가수준에 비해 발전을 못했다”고 평가절하했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싸우더라도 타협해서 절충안을 찾으라는 것인데 소모전만 벌이며 민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비판이다.인 위원장의 과거 발언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지역주의 해소와 국민통합에 대해 깊은 식견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일단 정치이념이 특정정당이나 지역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식의 급진성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여당지도부는 혁신위가 당 쇄신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총선관련 주요정책 입안권한을 혁신위에 대폭 양보해야 한다. 만약 혁신위가 제기능을 못하면, 국민의힘은 내년 총선에서 재기할 확률이 아주 낮아진다.

2023-10-24

제2 중동 붐

우정구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에 대한 국빈방문의 외교 성과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윤 대통령의 외교 세일즈로 만약 제2 중동 붐이 일어난다면 침체된 국내경제에 큰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우디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비전 2030 계획의 핵심사업인 ‘네옴시티’ 건설에 국내기업의 대거 참여가 성사된다면 제2 중동 붐도 가능하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어서 기대감이 여느 때보다 높은 분위기다.네옴시티는 총 5천억달러(약 700조원) 규모의 사업비가 투자되는 사우디의 최첨단 미래형 친환경도시 건설사업이다. 사우디가 석유 의존형 경제구조에서 벗어나고자 계획한 초대형 프로젝트로 100% 신재생 에너지로 운영되는 주거 및 상업도시다. 홍해 인근 사막 2만6천㎢(서울 면적의 44배)에 건설되는 이 도시는 마치 과학소설에나 나올 법한 도시계획이어서 회의적 시각으로 보는 이도 적지 않다.그러나 2030년을 목표로 이미 수조원대 수주가 시작돼 세계 각국의 관심이 집중돼 있다. 윤 대통령은 국내기업의 네옴시티 프로젝트 참여를 사우디 측에 강력 요청해 성사 여부도 관심이다.특히 제2 중동 붐이 인다고 가정하면 1970년대 에너지와 건설 중심의 중동 붐 때와는 다르다. 자동차, 조선, 첨단산업과 문화콘텐츠 등에까지 넓은 영역에서 중동 특수가 일어날 수 있어 분위기는 상당히 고무적이다.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작년 11월 한국을 방문해 40조원 규모의 투자협약을 맺었고 이번에는 윤 대통령의 답방으로 또다시 21조원의 투자가 성사됐다. 이 정도 규모면 침체에 빠진 한국경제에 큰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단단히 준비해 제2 중동 특수를 기대해 보자./우정구(논설위원)

2023-10-24

생존 너머

좀비물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는 의외로 사람에 대한 드라마다. 물론 좀비가 주인공일 수는 없으니(그들은 지성이 없고, 따라서 말을 할 수도 없다) 인간이 주인공인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실 여타의 좀비물과 달리 ‘워킹 데드’는 시즌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흐름이 달라진다. 처음으로 이야기가 달라지는 건 ‘가버너’라는 적대적 인물이 등장할 때이다. 좀비들로부터 살아남고자 사투를 벌이고, 잃어버린 생존자를 수색하고, 궁극적으로는 안전지대를 찾아가는 것이 목표였던 1~2시즌과는 달리, 3~4시즌은 서로 다른 사람의 가치관이 충돌하며 빚어지는 에피소드가 중심에 놓인다.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유형은 시즌 4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종착역의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기차의 종착역에 안전지대를 구축하고, 생존자를 포섭하기 위해 “모든 이를 위한 안식처. 모든 이를 위한 공동체”라는 문구와 함께 자신들의 위치를 새긴 홍보물을 도시 곳곳에 부착하고 다닌다. ‘가버너’와의 싸움 이후로 살 곳을 잃어버린 주인공 일행은 홍보물에 새겨진 경로를 따라 종착역을 향해가지만, 그들이 도착한 종착역이라는 곳은 사람을 위한 안전지대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먹는 식인종들의 캠프였다.작중 짤막하게 스쳐지나가듯 설명되지만, 쉽게 말해 이들은 강도들에 의해 죽을 뻔한 사람들이었고, 그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처럼 변해버린 사람들이다. 타인의 생존물자를 약탈하고,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생명마저 빼앗는 강도들에게서 살아남으려 싸우던 사람들이 이제는 타인의 생명을 잡아먹는 식인종이 되어버렸다는 설정은 ‘워킹 데드’ 세계관의 잔혹함을 보여주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라는 니체의 격언을 떠오르게 만든다.그렇기 때문인지 인간을 잡아먹으려는 좀비들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애쓰던 주인공 일행은 이들과 조우한 이후 완전히 변해버린다. 더는 타인을 믿을 수 없게 되고, 이후엔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을 생각마저 하는 주인공 일행의 모습은 좀비들이 창궐한 세계에 맞는 현실적인 모습이기에 더욱 비참하게 느껴진다. 이제 그들에게는 ‘생존’ 외에 어떠한 가치조차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그래서 시즌 종착역 주민들이 등장하는 시즌 5~6의 이야기는 유독 비참하고 슬프게 느껴진다. 생존에 매몰되어 서로 반목하고 타인을 위협하고, 때로는 자신의 일행을 통솔하기 위해 앞선 적대적 인물의 면모를 고스란히 반복하며 전체주의적인 태도마저 보여주는 주인공의 태도는 이제 더 이상 이 세계가 좀비의 창궐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시즌이 지속됨에 따라 이들은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낸다. 어디에도 그들을 위한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안전지대를 구축하고 지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거듭 인간과 사람의 사이를 오가며 갈등하고 고뇌하며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고민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생존이 최고의 가치가 된 사회에서, 사람은 타인에 대한 개념을 축소시킨다. 타인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제거해야 하는 경쟁자일 뿐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람을 오직 경쟁자로 인식한다는 건 그 사회가 생존 외에 어떠한 가치도 더는 존속할 수 없게 된 위험 상황임을 의미한다. 생존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세계에서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일 수 없다.동물의 한 종으로서의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경쟁 상태. 그건 ‘워킹 데드’의 한 에피소드가 그러했듯 문명이 아닌 야만의 세계에 불과하다. 한 사회가 어떤 수준에 위치하는가는 이처럼 타인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증상적으로 나타난다. ‘워킹 데드’라는 드라마가 현실에서 더욱 씁쓸해지는 건 이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좀비가 없는 세계임에도 오직 타인을 경쟁의 대상으로밖에는 느끼지 않는 현실이 어쩌면 좀비들로 가득한 세계보다 더 무서운 세계인 것 같아서. 그런 세계에서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증오하는 인간들을 거듭 닮아간다. 살기 위해, 인간을 잡아먹는 좀비를 닮아가듯 식인을 하게 된 인간들처럼. 지금 우리는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2023-10-24

유령을 믿을 때

동생이 물었다. 언니는 유령을 믿어? 재밌는 말이었다. ‘유령’이라는 실체 없는 존재보다 ‘믿음’이라는 행위가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유령을 믿든 그렇지 않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동생은 중요하다고 했다. 뭔가를 믿는 순간, 많은 것이 달라질 거라고. 스산한 기분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유령은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찾아온다고 하던데. 뒷덜미가 차가워졌다. 가을을 맞아 한껏 서늘해진 바람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럴 때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다.호프만은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주중에 나는 법률가이며 일요일 낮에는 적어도 음악가이다. 그리고 저녁부터 아주 깊은 밤까지 나는 아주 괴상한 작가로 산다.”그의 말대로다. 호프만의 낮과 밤은 완전히 달랐다. 낮에는 유능한 법관으로서 현실적인 삶을 살았지만, 밤에는 광기에 사로잡힌 예술가로 지냈다. 반듯하고 공명정대했던 낮의 모습을 밤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단골 술집에서 폭음하고 내일 따윈 찾아오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 어떤 작가보다 밤의 세계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모래 사나이’가 수록된 소설집의 제목 역시 ‘밤의 이야기’다.낮은 밝고 가시적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많은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밤은 어둡다. 많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충동적이고 불안하다. 낯선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다. 이렇듯 밤은 우리를 완전히 낯선 세계로 이끈다.호프만의 작품은 이러한 기이함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그를 환상 문학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환상 문학은 전통적인 형식의 동화와는 다르다. 환상 문학에서의 인물들은 모두 현실적인 일상생활을 한다. 그러면서 비현실적인 요소가 일상으로 과감하게 들어온다. 이러한 뒤엉킴을 통해 기이하고 이질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다.그의 대표작인 ‘모래 사나이’는 불길하면서 충격적이다. 주인공 나타나엘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유모에게 모래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모래 사나이는 “자러 가지 않으려는 아이들에게 와서 눈에 모래를 한 줌 뿌리”는 존재다. “눈알이 피투성이가 되어 튀어나오면 모래 사나이는 그 눈알을 자루에 넣어 자기 아이들에게 먹이려고 달나라로 돌아가”고, “그의 아이들은 둥지에서 사는데 올빼미처럼 끝이 구부러진 부리로 말 안 듣는 아이들의 눈을 쪼아 먹는”다. 어린 나타나엘은 모래 사나이를 목격한다. 기억 저변에 묻어두었던 모래 사나이는 그가 어른이 되어서 다시금 등장하게 된다.나타나엘은 괴로워한다. “무언가 끔찍한 것이 내 삶에 들어왔다”다는 것이다. 그런 나타나엘에게 찾아온 청우계 장수는 ‘눈’을 판다며 안경과 망원경을 내어놓는다. 그에게 구입한 망원경은 나타나엘의 눈을 홀린다. 그리하여 인형을 진정한 영혼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신을 믿고 도와주는 연인은 생명 없는 나무 인형으로 보게 된다.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필요한 망원경은 오히려 그의 판단력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나타나엘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눈!”이라고 소리친 채 난간 너머로 뛴다. 머리가 완전히 부서진 주인공과 모래 사나이로 대변되는 인물이 서로 겹치면서 소설은 끝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가 겪은 일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일까? 독자들로선 알 수 없다. 작품 내에서 현실세계와 환상세계가 경계 없이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건 없지만, 작가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화하고 있다. 억눌린 무의식의 발현, 한 인간을 줄기차게 따라다니는 두려움, 우리가 실제라고 믿는 것을 정말 확신할 수 있는지를.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오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꿈과 현실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며 세계를 지탱하고 있으니까. 작품의 주인공은 환상 때문에 현실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환상 없는 현실은 진짜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에겐 현실과 환상, 낮과 밤이 모두 필요하다.깊어져 가는 가을밤, 나는 유령을 믿는 사람들에 관해 생각한다. 으스스하지만 왠지 모르게 즐겁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긴 밤이 지루하지 않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유령을 믿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2023-10-24

가을, 나와 마주하는 거울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가을은 ‘거울’이다. 청명한 하늘, 소슬한 바람, 낙엽 구르는 소리만큼 나를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은 없다. 가을에는 사람의 마음도 거울처럼 맑아진다. 내면의 정신세계로 인도하는 가을은 나와 마주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가을의 고독과 외로움은 고요한 침잠과 사색을 가능하게 한다. 가을은 감상적 상념이 아니라 냉정한 성찰을 요구한다. 위대한 철인들이 품었던 질문을 나도 피해 갈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혁신함으로써 삶의 질적 수준을 높여나간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Hermann K. Hesse)는 “가을은 더 높은 삶으로 들어가는 계절”이라고 했다. 수준 높은 삶은 인간의 내면과 마주한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나와 마주해야하는 이유는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고, 부르제(P. Bourget)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에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의 현실이 보여주듯이 정치꾼들이 만들어놓은 진영프레임에 갇히면 ‘사유의 정치’가 ‘믿음의 정치’로 전락한다. 광신도(狂信徒)가 된 정치팬덤들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고력이 약화되어 자기성찰이 불가능하다. 진영정치의 포로가 되어 화병(火病)에 걸린 사람들은 진영의 족쇄를 벗어던져야 그 병을 고칠 수 있다.가을은 ‘비움의 철학’을 가르쳐준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구르는 소리는 세월이 가는 소리다. 가을은 ‘집착의 계절’이 아니라 ‘버림의 계절’이다. 인간은 탐욕과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소망하는 건강은 몸(육체)과 마음(정신)이 동행해야 하는데, 마음 챙김이 없는 육체의 건강은 공허할 뿐이다. 우리의 삶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온다.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는 가을의 가르침에서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가을은 ‘결실’과 ‘소멸’이라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결실의 풍요로움에 감사하는 것도 가을이며, 다가올 북풍한설을 염려하는 것도 가을이다. 가을은 오색단풍의 환희와 바람에 뒹구는 낙엽의 쓸쓸함이 공존하고 있다. 가을의 양면성은 나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나와 마주한다는 것은 나의 장점만이 아니라 부족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는 단점들까지도 솔직하게 보는 것이다. 가을의 투명한 거울에 비추어 현재의 나를 정확히 볼 수 있어야 미래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가을에는 누구나 생각이 깊어진다. 구도자가 되어 자연의 섭리를 깨달음으로써 참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돈·권력·명예를 쫒아서 진흙탕 싸움에 휘둘리다보면 정작 중요한 내면의 정신세계를 살펴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청명한 가을 하늘에 비추어 맑은 영혼을 찾아내고, 소슬한 바람에 구르는 낙엽의 소리를 들으러 홀연히 떠나야 한다. 나를 만나러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야 한다.

2023-10-23

고교 4학년 시대

홍석봉 대구지사장 고교 4학년이 늘고 있다. 수능시험에 응시하는 반수생을 뜻한다.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응시하는 반수생이 역대 최고로 많은 9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반수생은 대학에 다니다 수능을 새로 보기 위해 2학기 휴학을 하고 입시에 재도전하는 수험생을 일컫는다. 속칭 ‘고교 4학년’이다. 대학을 중도 이탈하는 학생 수도 10만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정부의 ‘킬러(초고난도) 문항 배제’ 방침과 의대 광풍의 결과다.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18년째 연 3천58명으로 묶인 전국 의대 입학 정원의 확대를 공식화했다. 이 소식에 수험생은 물론 2030 직장인들까지 의대 입시에 뛰어들겠다고 하는 등 들썩이고 있다. 의사 면허를 취득, 개원만 하면 정년도 없고 연봉 3억 원이 보장된다. 의대 입시 준비에 따른 기회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을 갖게 마련이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다니던 대학으로 돌아갈 수 있다.의대 쏠림 현상은 우리 사회에 미치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 반수생 및 중도이탈자 증가는 하위권 대학까지 연쇄 이동을 초래, 편입생 충원 등 대학의 정상적인 운영을 어렵게 만든다. 이공계 우수 인력이 의대로 몰려가면서 이공계 인재 양성 시스템도 무너뜨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걱정되는 것은 또 있다. 현재 중2가 응시하는 2028학년도 입시부터 수능 전 과목을 문·이과 구분 없이 치르게 돼 인문계 우등생까지 의대를 가겠다고 할지 모른다.누구나 안정적인 직업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렇게 인재가 편중된 사회는 기형적인 성장을 할 수밖에 없고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모두가 의대에 가겠다고 하면 소는 누가 키우나. 의대 광풍을 잠재울 방안이 절실하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0-23

그때 그 시절,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대구 반월당 인근에는 한국전쟁 후 대구 시내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1988)과 관련된 장소가 여럿 있다. 소설 속 집터와 약령시장·종로·군방각 등 소설 안의 장소가 근대 골목 투어라는 이름으로 현실의 콘텐츠가 되어 존재한다. 지금은 작은 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은 주인공 길남이를 친구삼아 소설 속으로 한 발짝 들어가기에 알맞은 곳이다. 집터 골목 앞 길남이 동상 옆에서 사진 한 컷을 찍고, 캐릭터들이 그려진 벽화를 따라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면 곧 작은 대문이 보인다. 길남이가 처음 가족을 만났을 때를 상상하며 마당 안으로 들어선다.‘마당 깊은 집’은 1954년 대구 장관동 일대에 있는 어느 마당 깊은 한옥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당시 대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주인집이 사는 위채와 피난민 네 가구·길남이네, 상이군인 준호네, 경기네, 평양댁과 아들 정태-가 사는 아래채가 나온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가난과 허물어질 것 같은 도덕심과 신념을 아등바등 지키려는 사람들과 전쟁으로 무너진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는 자본주의 논리와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이런 혼란한 곳에서 길남이는 처음으로 대구에 상경하여 가족과 같이 살게 되며, 엄하기만 한 어머니에 대한 혼란을 겪는다. 당시의 여느 아이들처럼 어린 나이에 내적 성숙을 하며 어른이 되어간다.‘마당 깊은 집’ 위채의 삶에서는 대구의 방직·군수 산업과 연결된 부의 축적과 인맥에 따른 부조리를 엿볼 수 있고, 아래채의 삶에서는 전후에 팽배하던 가난과 결여를 확인할 수 있다. 주인집은 한옥임에도 유리가 끼워진 문이 있고, 전축에서는 영어 노래가 흘러나올 정도로 유행에 민감하다. 대물림받은 가산과 더불어 점점 확장되어가는 방직 공장을 운영하면서 부를 축적한다. 특히 아들 성준을 미국에 유학 보내기 위해 미국식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고, 미군을 포함하여 지역 인사들을 초대하는 등 부를 과시하기도 한다.또한 겨울에 셋방을 빼게 하거나 집수리를 위해 셋집을 쉽게 내보내는 등 오늘날에는 불가능한 갑질의 모습도 그려진다. 이와 대비되게 아래채에 사는 네 가구는 모두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다. 한 평의 가건물을 덧대어 부엌을 만들고, 작은 방에 많은 식구가 모여 지낸다. 다닥다닥 붙은 셋방들은 사생활 보호는 당연히 불가능할 정도다. 옆집 잠꼬대 소리가 들리는 건 물론이고, 하나뿐인 변소에 드나드는 이유와 횟수조차 서로 알고 있다. 하루 벌이가 넉넉하지 못하면 점심 굶기는 일쑤고, 겨울에도 난방은 쉬이 하지 못하다. 상이군인네 준호 엄마는 출산 후 2일 만에 시장 장사를 하러 나가고, 길남이는 신문팔이를 하며 중학교 학비를 모은다. 주인집 눈치 보기 바빠 때로는 서로의 등을 떠밀기도 한다. 아등바등 생을 살아내는 캐릭터가 애잔하면서도 현재가 얼마나 평화로운지 실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여기에 아래채가 수몰될 정도로 비가 내리지만 무심한 위채 사람들, 일주일간 이어진 살인 사건 덕분에 늘어난 신문 판매 부수로 이익을 보는 신문팔이, 정태의 월북 미수 사건으로 휘말릴까 겁내는 아래채 사람들 등 무거운 사건이 스냅북처럼 가볍게 펼쳐진다.또한 피난민이 모여든 방천에서 이산가족을 찾는 사람들과 새 인연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대구역 앞에 모여든 거지와 실업자들 그와 대비되는 귀금속 거리와 영화관 등의 화려한 풍경이 덧그려진다. 이 모든 것은 소설 주인공 길남이가 신문팔이를 하면서 돌아다니던 어릴 적 시선과 성인이 되어 1954년을 추억하는 시선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소설 속 1954년 대구는 전쟁 후유증과 자본주의 성장이 맞물려 공존하던 곳이었다.‘마당 깊은 집’의 길남이와 모친은 여느 모자 사이와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 어머니가 바라보는 아들 길남이는 애잔한 아들과 원망스러운 남편의 중간 어딘가에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길남이는 가족을 버리고 월북한 부친을 대신하여 집안의 장남이란 명목하에 모진 대접을 받는다. 길남이가 바라보던 어머니도 자상한 어머니와 살벌한 마녀의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어머니가 시키는 일을 겉으로는 열심히 하지만 속으로는 반발심을 꽤 표현한다. 둘의 이러한 거리감은 길남이가 스스로 사생아라고 칭하며 가출하고, 그런 길남이를 어머니가 다시 집으로 데려왔을 때 비로소 연결점이 마련된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잘못 인식한 부분을 인정하고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마당 깊은 집’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무언가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가며, 성장과 성숙해지던 당시 대구의 모든 것이 녹아있다. 경제·문화·정치·사회가 있으며,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이 있다. 아직 100년도 지나지 않았고,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일부 살아있으며, 그 직간접적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그때 그 시절은 이후의 빠른 발전에 힘입어 이미 옛 기억이 돼버렸다.지금은 남겨진 자료나 당시를 형상화한 명소만이 이를 대신한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10-23

우리는 모두 아이였던 때가 있다

프랑스의 작가 쥘 르나르. ‘홍당무(Poil de Carotte)’ 가끔씩, 망각하긴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아이였던 때가 있다. 단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 때의 기억은 대부분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했는지 알 수 없는 이해불가의 영역뿐이다. 그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렸고, 그렇기에 어떻게 말하거나 행동하는지 몰랐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묻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까닭일지도 모른다.우리는 흔히 아이들이 이유 없이 어떤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편견일 것이다. 아이는 외부의 자극에 대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합리적인 행동으로 대응한다. 또한 그것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다만, 그 합리가 어른의 그것처럼 규격이나 양식을 따르고 있지 않을 뿐이다. 또한 그것에 대해 설명할 만큼의 말솜씨를 갖지 못한 것이다. 말썽쟁이들이 부리는 말썽은 대부분 이유가 있다. 우리 모두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Jules Renard·1864~1910)의 소설 ‘홍당무’는 바로 그렇게 우리가 모두 아이였던 때가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르나르가 자신의 아들과 딸을 위해 1894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프랑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말썽꾸러기 ‘홍당무’의 일화를 다루고 있다. 르나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해서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종종 르나르가 겪었던 어머니로부터의 학대의 경험이 표현되어 있다고 평가되곤 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이 소설에는 홍당무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섬세한 심리가 너무나도 잘 그려져 있을 뿐이다. 어떤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삶의 양식들이 존재하며, 그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재단하는 것은 소설을 읽을 때 그리 도움이 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이 소설에서 홍당무는 형도 누나도 가지 못하는 밤의 닭장문을 닫는 일을 하러 처음 나서기도 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요강도 찾지 못해 침대 위에서 그대로 대변을 누기도 한다. 또 귀에 펜대를 끼운 채로 잊어버리고 아버지에게 키스하려다가 눈을 찌를 뻔하기도 한다. 어머니, 르픽 부인의 은화를 훔치고서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실수로 낚시 바늘을 어머니의 손가락에 관통하게 해서 큰 소동을 일으키고 눈물을 짜내기도 한다. 홍당무는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골칫거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에게는 아이가 가지게 마련인 나름의 생각이 있다. 이 작품은 아이라는 존재를 막연히 미화하는 동화의 기본적 양식을 따르기보다는 아이란 그렇게 늘 말썽을 부리기 마련인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 작품이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독자에게 큰 인상을 남기고 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시선을 낮춰 아이의 눈 그 자체로 본다면, 아이가 만나는 세계는 선과 악, 어떤 것으로도 재단할 수 없는 순진무구 그 자체라는 사실 말이다. 선악이란 어른의 관점일 뿐으로, 아이의 행동은 선의나 악의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른과는 다른 자기만의 행동 방식으로 행해진다는 메시지를 이 작품은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할 수 있다. 가만히 지켜보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다. 선의와 악의, 성숙과 미숙, 보편과 개성 같은 명확히 굳어진 세계 인식을 갖고 있는 어른에게는 단지 그 섬세한 아이들의 마음이 이해되기 어려운 것뿐이다. 우리는 모두 아이였던 때가 있지만, 지금 우리는 그곳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뿐이다. 쥘 르나르는 바로 그 당연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