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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추석 정취와 치매 혐오

장규열 한동대 교수 하필 올 추석날이 ‘세계알츠하이머의 날(World Alzheimer’s Day)’과 겹쳤다. 노인이 되어 기억력이 사라지고 인식능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질명, 치매(Dementia)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예방과 치료에 인류의 공동노력을 기울이자는 다짐을 담은 날이다. 전세계 노인인구 가운데 5천만 명이 넘게 앓고 있으며, 65세 이상 아홉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치매에 걸린다고 한다. 대통령은 선거공약으로 치매와의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지역의 보건소에는 검사와 대응을 위한 ‘치매안심센터’를 둔다. 치매야말로 인간 노후 삶의 질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병이 아닌가. 생노병사의 노정 위에서 치매에 대해 완벽하게 안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국회의원들은 가히 현수막으로 정치를 한다. 의정성과를 알리며 자랑하거나 명절인사도 길거리 현수막 문구로 건다. 추석이 다가오는 어느 날, 서울 어느 지역에 내걸린 현수막은 ‘축, 실버케어센터 계획, 전면 백지화 확정’이라 적었다. 그가 속한 정당도 ‘우리의 염원, 실버케어센터 백지화 달성!’이라 외치고 있었다. 눈을 의심하였다. 세상에 축하할 일과 염원 삼을 일이 따로 있지, 어르신을 돌보는 장소가 지역의 혐오시설이 되다니! 계획을 백지화시킨 일이 국회의원의 치적이 되고 정당의 자랑거리가 되다니! 어려움을 겪는 어르신들을 가까이 모실 기회일 뿐 아니라, 어린 자녀들에게 공감과 배려를 가르칠 교육기회일 수도 있을 게 아닌가.아니 어쩌면, 센터를 더욱 적절한 곳에 세우기 위해 계획이 무산되었을 수도 있겠다. 보다 안전하고 비용대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일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국회의원과 정당은 그런 사정을 설명하고 새로운 계획을 알리면 된다. 지역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니 ‘축하’하거나 계획무산이 ‘우리의 염원’이었다고 치하할 일을 없었을 게 아닌가. 지역에 혹 실제로 아파트 가격하락을 걱정하는 민원이 있었다면, 더욱 세심하게 공간의 필요와 지역의 상황을 폭넓게 살펴 최선의 대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았을까. 새털처럼 가벼운 혐오 정서에 편승하여 저런 현수막을 높이 거는 일은 없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세상이 거꾸로 흘러가도 국회의원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추석은 물론 가족의 시간이다. 가족 구성원 사이의 정을 확인하고 나누는 좋은 명절이 아닌가. 우리 가족 안에 나타날 수 있는 질병, 치매가 내게 닥칠 때에만 무서울 것인가. 사회가 함께 겪는 어려움으로 바라보고 공동체적 배려와 공감을 발휘할 수는 없을까. 혹 아직껏 그같은 공동체적 인식에 달하지 못하였다 해도 치매를 ‘혐오’로 바라보는 일은 지나친 게 아닐까. 누구나 나이가 들고 쇠약해 간다. 인생의 황혼길에 나의 존재가 누군가의 혐오의 대상이 된다면 그만큼 서글픈 일이 다시 있을까. 인생의 선배로 앞서 세월을 지내오신 어르신들을 보다 따뜻한 눈길로 섬겨야 하지 않을까. 추석의 아름다운 정취가 치매를 멀리하는 밉상스런 정서에 떠내려 가지 않기를 바란다. 어른들이 계셔서 당신이 있다.

2021-09-22

펫캉스

반려동물 양육 인구 1천500만명 시대를 맞아 ‘펫캉스’가 대중화하고 있다. ‘펫캉스’는 반려동물과 함께 동반 여행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신조어로, 코로나19로 소규모 여행이 주목받으면서 반려동물이 최고의 여행 메이트로 인식돼 펫캉스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반려동물 동반 가능 여부, 동물 편의 시설 제공 등이 여행에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숙박업계는 발 빠르게 움직여 반려동물 동반이 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실제로 최근 숙박·액티비티 플랫폼 여기어때에 따르면, 지난달 반려동물이 함께 방문하는 숙소의 수요(거래액 기준)가 전년 동기 대비 118%가 폭증했다. 여기어때의 전체 거래의 10%를 차지하는 규모로, 여행객 10명 중 1명은 올여름 성수기 반려동물 동반 숙소를 이용한 것으로 분석된다.지난해 농림식품사업부 등이 집계한 반려동물 양육 가구는 638만으로, 인구로 환산하면 약 1천500만명, 국민 4분의 1이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얘기다. 여기어때에 등록된 반려동물 동반 가능 숙소는 8월 기준 980곳으로 반 년 사이에 9% 증가했다. 특히, 최근 특급 호텔과 리조트도 펫캉스 열풍에 동참해 펫캉스 열풍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반려동물 전용 운동장과 카페레스토랑 등의 부대시설을 갖춘 소노캄 고양은 반려동물과 함께 즐기고 휴식하며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주 Dog특한 하루’ 패키지 상품을 선보였다. 여기어때는 펫캉스를 준비하는 여행자들을 위해 ‘반려견이랑’ 카테고리를 운영 중이다. 호텔부터 펜션까지 반려동물 동반 가능 숙소를 추천하고, 액티비티와 맛집도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펫캉스 열풍은 코로나19가 우리의 여가문화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를 방증하는 지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9-22

하물숭배(荷物崇拜)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1890년대 유럽이 남태평양 도서(島嶼)를 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원주민들에 하물숭배(荷物崇拜)라는 종교가 생겼다. 생전 처음 보는 화물선에서 필요한 모든 물건을 내려 쓰는 것을 보고 화물선을 모든 것을 내려 주는 신으로 생각하여 하물숭배의 제의를 드렸다. 1999년 이를 취재하러 간 토론토스타의 기자가 “어찌하여 어리석게도 하물숭배를 하느냐?”고 묻자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우리는 불과 60년을 숭배하고 있지만 그러는 당신들은 어찌하여 2천년 동안이나 하물숭배를 하느냐?”고 되물었다.베드로는 밤새 그물질을 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다. 날이 새고 해가 중천에 떠 그물질을 그만둘 시간에 예수님이 오셔서 뜬금없이 다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한다. 고기가 활동하지 않은 시간이라 허탕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서 그물을 던졌더니 두 배 가득 고기를 잡았다. 역사학자 플루타르크가 쓴 책에 의하면 생선 한 수레 가격이 양 백마리와 맞먹는다고 했으니 놀랍게도 그때 잡은 고기의 값은 지금의 돈으로 3억 정도가 된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면 큰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예수를 하물신으로 추앙했다. 이들은 나중에 예수에게 책망을 듣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표적이란 무엇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보여주는 사인(sign)이다. 그들은 그 사건을 깨우침을 위한 표적으로 보지 않고 예수를 하물신으로 여겨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경험을 한 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면서 예수를 떠나겠다고 한다. 예수를 섬기면 엄청난 하물이 따르는데 떠나겠다는 것은 더이상 예수를 하물신으로는 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가 말한다. “이제 너는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 어부가 되리라.” 더 이상 떡을 먹고 배를 채우기 위한 하물신 숭배자가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제자가 되라는 것이다.도강불고선(渡江不顧船·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고), 득어경망전(得魚更忘筌·고기를 잡은 후엔 그물을 버리라)이라 했다. 베드로는 하물숭배의 배와 그물을 버리고 사람을 구원하는 어부로서의 새로운 길을 갔다. 기독교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기독교가 하물숭배의 번영과 축복의 신앙에 빠져있다고 한다. 어디 기독교뿐이랴. 우리 모두가 떡을 먹고 배를 채우기 위한 하물숭배에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2021-09-22

20대 대선의 달라진 풍경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내년 대선 6개월 전의 풍경은 과거 대선과는 다른 모습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여야를 가릴 것 없이 후보들이 대거 난립하여 출마한 점이다. 여당은 후보 8명이 출마를 선언했다가 5명으로 압축되어 있다. 2명은 컷오프, 1명은 자진 사퇴한 결과이다. 야당 역시 12명의 후보 중 3명이 컷오프, 1명이 사퇴하여 8명이 남아 있다. 여기에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 외 3명이 당내 경선중이며 무소속의 김동연이 정치 교체를 외치며 출마를 선언하였다. 국민의당 안철수, 단골 후보 허경영을 포함하면 30명이상이 대선 출사표를 던진 셈이다.이번 대선전의 다른 특징은 관료들의 대선 출마이다. 전 검찰총장 윤석열, 전 감사원장 최재형, 전 부총리 김동연이 출마를 선언하였다. 특히 정치 경력이 전무한 윤석열 전 총장이 유력 야당후보로 부상한 점은 과거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정치 경륜과 서열을 중시하는 이 나라 정치 풍토에서는 파격적인 변모이다. 과거 이회창 총리, 고건 총리와 반기문 총장 역시 대권 도전에는 실패 했다. 윤 전 총장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이번 대선에서는 후보 간의 당내 예비 경선이 어느 때 보다 치열하다. 과거에도 당내 후보 간의 갈등과 대립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흑색선전과 네거티브가 난무한 적은 없었다. 여권의 선두 이재명과 이낙연 후보 간의 대립은 연일 인신공격으로 이어지고 있다. 야당 역시 윤석열과 홍준표 후보 간에는 상대를 향한 흠집 내기 네거티브가 전개되고 있다. 이들 간의 치열한 갈등이 유권자들의 관심을 끄는 측면도 있지만 대선 판의 혼란을 초래하고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을 초래한다. 모두가 후보의 검증과정이라고 하고 있지만 그 도가 지나치고 있다.이번 선거의 또 다른 특색은 여론조사의 등락의 폭이 너무 커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낙연 후보는 총리시절부터 타 후보의 추종을 불허하는 50% 이상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연 초 ‘전직 대통령 사면’ 발언 후 그의 인기는 급락하여 현재 이재명 후보에 20%정도 밀리고 있다. 윤석열 후보 역시 총장 재직 시부터 50%대의 지지율을 보이다 홍준표 후보에게 추월당하는 추세이다. 이러한 여론의 등락은 이번 대선의 결과를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과거 6개월 전의 판세가 이번 선거에는 작동하기 어려운 정황이다.이번 대선전의 경선과정의 과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그러나 대선 전야의 이러한 경향과 추세가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그 하나는 정치신인의 대선 출마로 과거와 달리 대선후보의 두터운 정치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당내에서부터 치열한 후보 검증과 공방이 당내 민주주의의 소생 가능성을 보여준 점이다. 이제 우리는 해방 후 20번째의 대통령을 뽑게 된 시점이다. 이번 선거가 지역 연고주의 정치, 좌우 정치 이념의 장벽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최소한 우리의 정치가 허구적 이념이 아닌 실용의 정치로 변할 때 이 나라 정치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기 때문이다.

2021-09-22

감사 교육부터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 “하루에 열 번은 행복해요. 눈을 뜨면서부터 행복해요. 모든 게 감사해요.” 모 방송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을 한 출연자의 얼굴에는 어둠이나 슬픔, 걱정 따위의 표정은 없었다. 얼굴에는 늘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웃음에서 억지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웃음은 얼굴에만 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비를 맞고 일을 하는 그의 몸 어느 곳 하나 웃음이 피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비도 웃고 있었다. 당연히 그가 웃음으로 가꾸는 작물도 모두 웃고 있었다.행복은 마음을 비우는 순간에 저절로 온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임으로 답을 했다. 그런 그에게 진행자가 앞으로 목표가 무엇인지 물었다. 필자는 마음을 비운 사람은 과연 어떤 목표가 있을지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참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며 그분들께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하며 살고 싶다고 하였다.필자는 그의 말에서 삶의 의미를 알았다. 삶이란 은혜(恩惠)와 보답(報答)의 연속이라는 것도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우리가 사는 일 중에 은혜 아닌 것이 무엇이 있을지를! 은혜 앞에 오는 말들을 떠올렸다. 부모님의 은혜. 자연의 은혜, 친구의 은혜, 절대자의 은혜 등! 분명 세상 모든 일은 은혜 안에 있었다.은혜를 생각하다 은혜와 가장 이웃한 말을 찾았다. 그것은 감사(感謝)다. 감사함은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다. 감사함을 아는 사람은 마음의 문이 열린 사람이오, 그 반대인 사람은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이다. 마음이 닫힌 사람에게 은혜와 보답이 있을 리 없다. 감사함을 아는 사람은 은혜를 알고, 은혜를 아는 사람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는 보답의 삶을 산다. 이것이 우리가 숱한 힘듦을 이겨내며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정식이다.그런데 이것이 무너졌다. 사회 많은 곳에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연결 고리인 감사함이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감사함조차 형식적으로 변질하고 있다.감사함은 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기도 하지만, 학생들에게 있어 감사함은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대상이다. 지독한 입시 덫에 갇히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교육의 최고 목표는 학습자가 감사함을 내면화하고,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런 교육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학교와 가정과 사회는 합심하였다. 그리고 서로가 모범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학교도, 사회도, 가정도, 종교도, 심지어 사랑도 모두가 맹목적으로 변질하고 있다. 맹목적인 학교, 맹목적인 사회, 맹목적인 가정 등 학생들이 감사함의 의미와 자세를 배울 곳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니 학생들도 맹목적으로 변하고 있다. 맹목적인 삶에 참 행복은 없다. 학생이 행복해야 가정도 행복하고, 가정이 행복해야 우리 사회도 행복하다. 이를 위해 어른들의 맹목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학교와 가정에서 학생들에게 감사와 은혜의 참 의미를 가르치면 어떨까! 그리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함께 실천하면….!

2021-09-22

쉿! 자나 깨나 말조심

백후자수필가 이팝과 아카시아가 다투어 속살을 드러낼 무렵, 봄바람이 차일구름을 밀어낸다. 하늘이 말개지자 봄빛이 더욱 화사하다. 이팝나무, 아카시아에도 햇살이 들어 뽀얀 쌀알 같은 꽃잎이 톡톡 향기를 내뿜는다. 꿀벌들이 꽃잎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엉덩이를 한껏 추켜둔다. 저 봄날의 밀어(密語)가 달콤하다.예천 지보면 대죽리로 간다. 언총(言塚) 즉 말무덤을 만나기 위해서다. 시골길을 한참 따라갔지만 안내판이 없다. 돌고 돌아 마을 입구에 닿았을 쯤, 저만치 조그마한 표지석이 보인다. 표지석 옆으로 갈라진 작은 들길로 가란다. 들길을 따라가다가 솔숲이 우거진 곳으로 방향을 튼다. 길이 승용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다. 길옆으로 말(言)과 관련된 격언·속담이 새겨진 돌비석이 띄엄띄엄 줄지어 있다. 그것을 읽어가며 올라가니 평평한 등성이다.등성이 아래로 논밭이 펼쳐져 있고 마을이 길게 자리 잡았다. 마을을 등지고 돌아서니 말무덤이 보였다. 길을 건너 대여섯 칸쯤 되는 계단으로 올라섰다. 말무덤이라 표시된 둥그런 무덤 위에 풀이 자욱하게 덮였다. 이곳에 죽음의 형체도 없는 말(言)을 묻었다니, 말부터 기이했다.말무덤을 가운데 두고 노란 민들레가 지천이다. 민들레 꽃무리를 무심히 바라보다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방시레 웃는 민들레에게 말을 걸었다.“너는 아니, 이 무덤이 생긴 이유를?”“알지. 내가 이래봬도 이곳 토박이거든.”“한 번 들어볼까?”“사오백 년 전이었어, 이 마을에 각성바지들이 모여 살았거든. 그런데 사소한 말 한마디가 불씨처럼 틔더니 문중 간에 싸움이 일어난 거야. 그 싸움은 쉬이 끝나지 않았어. 그들은 얼굴만 마주치면 불을 뿜는 거야.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었어.”“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각 문중 대표들이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모였어. 그런데 대표들도 자기 말만 옳다고 우기며 다른 사람들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았어. 갈수록 언성이 높아지고 결국엔 또 싸움으로 이어졌지.”“그럼 다른 문중과는 왕래를 안 하고 살면 되지 않았을까?”“한 마을에 살면서 그럴 수 없잖아. 골목만 나서면 마주치게 되는 걸. 또 이웃 이야기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다 들리잖아. 안 좋은 소문은 더 빠르게 퍼지고 말이야.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아다니니까 사람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거야. 툭 건들기만 하면 펑 터져버렸지.”“다들 엄청 예민했나 보네.”“어느 매미소리 요란한 오후였어. 마을 가운데 정자에서 또다시 해결책을 논의하려 문중 대표들이 모였거든. 옥신각신 또 시끄러웠어. 그때 마침 지나가던 나그네가 왜들 그러느냐고 물었어. 자초지종을 다 들은 나그네가 처방을 내려줬어.”“어떻게?”“각 문중에서 뚜껑 있는 항아리 하나씩을 준비하시오. 그리고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항아리에 다 쏟아 담으시오. 그런 후 뚜껑을 꼭꼭 닫아서 무덤을 판 후 함께 묻으시오. 그러면 이 마을이 조용해질 것이오. 그러고 사라졌대.”“그렇게 해서 묻은 것이 말무덤이구나.”“그렇지. 참 희한하게도 말무덤을 만든 이후론 마을이 조용해지면서 평화를 되찾았다는 거야.”말무덤을 둘러본다. 저 안에 말이 묻혀 있다. 수백 년 전 그들이 뱉어낸 말들이다. 어쩌면 화근이 되어 마을을 혼란에 빠뜨렸을 말들이 항아리 안에 갇힌 채 잠들어 있다. 문득, 말들이 깨어나면 어쩌나 끔찍한 생각이 스친다. 내 모습을 본 듯 무덤 위의 민들레가 히죽 웃는다.말무덤에서 내려오는 길, 돌비석에 새겨진 ‘귀는 크게 열고 입은 작게 열어라.’는 말에 눈길이 간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험담하던 지난날의 한 순간이 머리에 스친다. 귓불이 훅 달아오른다.쉿! 자나 깨나 말조심.

2021-09-22

고생대로 가는 길

“아빠, 오늘도 무사히!”갱도 입구에 안전을 기원하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갱도로 한참 들어가면 탄맥을 따라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갈래마다 더는 들어갈 수 없이 막힌 곳이 있는데, 바로 막장이었다. 광부들은 삽과 곡괭이로 석탄을 캐며 더 깊이 길을 냈다.덕대 - 남의 광산에서 계약을 맺고 채굴권을 얻어 광물을 캐는 사람.간드레 - 광산의 갱 안에서 불을 켜서 들고 다니는 카바이드를 연료로 하는 등.선산부 - 막장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후산부 - 석탄을 갱 밖으로 운반하는 광부.동바리 - 갱도를 떠받치는 통나무.쫄딱구덩이 - ‘작은 구멍’이란 뜻으로 영세탄광 또는 하청탄광을 일컫는 은어. ‘쫄딱’은 규모가 작고 망하기 쉽다는 의미.개청부 - 하청탄광 광부들을 비하해 부르는 표현.스데바 - 난장 잡부.햇돼지 - 신입 광부.열갱이 - 일에 능하지 못하고 둔한 광부.선탄장 - 석탄 더미에서 돌을 골라내는 작업장.“검은 황금을 찾아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던 시대, 탄광촌에는 들도 길도 온통 까맸다. 송사리, 버들치가 유유히 노니는 강은 그림책에나 나오는 풍경이며, 금모래가 반짝이는 강은 동요로나 부르는 노래였다. 개울도 까맣게 흘러 아이들이 풍경화를 그릴 때면 검정 크레파스도 초록만큼 닳았다. 산하를 뒤덮은 석탄이 해맑은 동심까지 까맣게 물들였던 것이다.”- 김이랑 수필 ‘검은 강’ 중석탄이 있는 곳은 고생대 지층이다. 광부들은 하루에 한 번 고생대와 현생대를 오갔다. 고생대 지층 막장에서 갱 바깥 현생대로 나오면 광부들은 먼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연기 한 모금 길게 뿜어낼 때, 살아서 나왔다고 안도했다. 그래서 광산촌 사람에게는 하지 말아야 할 금기도 많았다.- 출근할 때 다녀오겠다고 인사하지 않는다.- 출근하려고 집을 떠날 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꿈자리가 사나우면 출근하지 않는다.- 탄광일 나가기 전 까지는 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여자가 그릇을 깨면 출근하지 않는다.- 출근할 때 머리 위로 까마귀가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 부부싸움 후 갱내에 들어가지 않는다.- 아침을 먹을 때 밥그릇이 엎어지면 출근하지 않는다.- 광부가 출근할 때 여자가 앞길을 가로지르지 않는다.출근할 때 인사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고 믿었다. 집을 나선 뒤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두려움을 이겨냈다. 흉몽을 꾼 날이면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일당을 주었는데, 이를 ‘마른공수’라고 했다. 나쁜 꿈자리도 공식 결근 사유로 인정했다.금기를 잘 지켜도 사고는 자주 터졌다. 갱내 곳곳에 목숨을 위협하는 요소가 도사리고 있어 언제 어디서 누가 다치고 목숨을 잃을지 몰랐다. 발파하거나 갱도가 붕괴되거나 지하수가 터지거나 유독가스가 폭발해 많은 광부가 갱내에 갇혔다. 바깥 동료들은 며칠 밤을 새면서 구조작업을 했고 동료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럴 때면 온 동네가 한꺼번에 초상을 치렀다.갱내가 정비되면 다시 채굴에 들어갔는데, 광부들은 갱내에 죽은 동료의 영혼이 떠돈다는 것을 느꼈다. 발파할 때, “○○야, ○○야, ○○야, 나가자, 발파다, 나가자”며 망자의 이름을 세 번 부른 뒤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렸다. 이는 자신이 죽은지 모르고 갱내를 떠도는 영혼을 갱 밖으로 인도하는 진혼의식이었다.순직한 광부의 아내는 보상금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딱히 갈 곳이 없는 여성은 그대로 남았는데, 어린 새끼들 데리고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고 해서 탄광에서 특별히 배려했다. 갱에서 올라온 석탄 더미에서 석탄과 잡석을 가려내는 일을 주었다. 이러한 여성 광부를 ‘선탄부(選炭婦)’라고 불렀다.개발독재 시절, 국가는 광부들을 국가의 동력을 캐는 ‘산업전사’라며 한껏 치켜올렸다. 하지만 그 말로는 좋지 않았다. 늙은 광부에게 남는 것은 폐 속에 탄광 한 구덩이었다. 숱한 광부가 진폐로 가쁜 숨을 쉬다가 삶을 마감했고, 석탄밥을 먹고 자란 아들딸이 검은 기억을 잊지 못하고 지금 우리 사회에 살고 있다.그 자리는 이제 흔적만 남았다, 갱도가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던 자리에 지금은 카지노와 위락시설이 밤이면 불야성을 이룬다. 카지노가 문을 열면 일확천금 눈먼 돈을 캐려는 광부들이 줄지어 들어간다. 또 다른 막장이다./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9-22

대의(大義)

대의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적 도리나 양심, 교양 등을 뜻한다. 집단으로 말하면 그 집단이 추구하는 최고선의 공동 목표다. 그래서 목표의 정당성을 내세울 때 대의명분(大義名分)이란 말을 잘 쓴다.삼국지에 나오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은 권력의 공정성과 엄격한 법 집행을 위해 사사로운 정을 포기할 때 쓰는 사자성어다. 제갈량이 공정한 법집행을 위해 자신의 친구 동생의 목을 직접 베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다.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대의에 밝고 소인은 잇속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고 했다. 군자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그것이 의리에 맞는 것인지 또 정의로운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의멸친(大義滅親)이란 말도 있는데, 이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부모나 친척도 돌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부터 대의는 이처럼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적 도리나 질서로 존중돼 왔다.그러나 현실적으로 대의를 지키며 살기란 쉽지가 않다. 온갖 유혹이 난무하는 복잡한 세상살이에 한번씩 공공의 질서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보통 시민의 삶이다.그럼에도 적어도 정치인이라면 대의를 지키는 정도의 양식은 있어야 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책임정치를 실천하는 기본적 자세이기 때문이다.국민의힘 정홍원 선거관리위원장이 위원장직을 맡을 때부터 줄곧 주장하는 당부의 말이 하나 있다. 선거에 출마하는 대선주자들이 “대의를 위해 뭉쳐 달라”는 말이다. 15일 컷오프 결과를 발표하면서도 그는 또 “대의를 위해 소의를 버리는 자세를 보여 달라” 주문했다. 여기서 대의는 본선에서의 승리다. 대의를 위한 후보 각자의 선택을 지켜봐야겠다./우정구(논설위원)

2021-09-16

승리의 비결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최근 인기를 끄는 스포츠가 바로 골프다. 골프는 흔히 멘탈게임이라고 한다. 마음과 육체가 혼연일체가 돼야 승리할 수 있는 경기라는 점에서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큰 상금이 걸린 메이저 골프대회가 끝난 뒤 실시간 중계방송을 하던 앵커가 그날의 승자에게 묻는다. “오늘의 승리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마음을 비우고 제 경기에만 집중하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경기가 저절로 풀리더군요.” 그렇다. 최후의 승자를 상대로 한 인터뷰에서는 항상 비슷한 내용의 인터뷰가 반복되는 데자뷰현상을 보게 된다. 무슨 경기든 승부에 연연하는 순간 힘이 들어가게 되고, 그 순간 스윙템포가 무너져 게임을 망치게 되는 게 골프다. 최후의 순간에도 자신의 평정심을 잃지않고, 자신의 골프를 하는 사람이 승리를 한다. 그게 승리의 비결이다.하늘과 땅을 걸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야당인 국민의힘 후보로서 선두를 달리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홍준표 의원과 선두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고발사주 의혹에 휘말렸다.‘고발사주’ 의혹 사건의 요지는 지난해 4·15총선을 앞두고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자신의 처, 장모 비리를 고발하고 언론에 알린다는 이유로 범여권 정치인인 최강욱,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황희석 당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후보 등에 대한 형사고발을 사주했다는 것이다. 고발장은 손준성 검사에게 사주해서 그 서류를 당시 미래통합당 송파 갑 국회의원 후보이던 김웅 의원에게, 김 의원은 정점식 의원에게 전달했다는 게 골자다.손 검사는 고발장을 작성한 적도, 전달한 적도 없다고 부인했고, 김 의원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윤 전 총장 측은 이 사건을 제보한 조성은씨가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 만난 데에 초점을 맞춰 박 원장이 고발사주 의혹을 보도하도록 한 몸통이 아니냐는 역공에 나섰고, 조씨와 박 원장이 만난 자리에 홍준표 캠프 인사가 함께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홍준표 의원 측과도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윤 캠프의 좌충우돌 역공이 왠지 평정심을 잃은 듯 보인다.여당의 경선 선두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 역시 경선 막바지에 대장동 개발의혹에 휩싸여 위기를 맞고 있다. 이번 논란은 이 지사가 성남시장 재선 후인 2015년부터 공영개발로 추진했던 성남시 대장동 일대 92만여 m²녹지 개발 사업에 신생 업체인 화천대유자산관리(화천대유)가 참여해 3년간 수백억 원대의 배당금을 받아갔다는 의혹이 핵심이다.당시 개발사업 시행 컨소시엄으로 선정된 ‘성남의뜰’에 공모 절차 불과 일주일 전 출자금 5천만 원으로 설립된 화천대유가 보통주 지분 14.28%를 가진 주주로 참여했다는 점이 의혹을 키웠다. 이 지사는 “민간 개발 특혜사업을 막고 5천500여억 원을 시민 이익으로 환수한 모범적 공익사업”이라고 반박하고 나섰지만 파문이 어디까지 번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더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페이스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승부는 지금부터다.

2021-09-16

포스텍의 인문사회학 역할 확대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제3회 현은 강좌가 15일 포스텍에서 온라인으로 열렸다. 이번 강연은 김성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강사로 초청돼 ‘한반도의 평화 정착 방안’이라는 제목으로 펼쳐졌다. 36년간 외교통으로 경험한 김 장관의 식견은 이공계 학생들에게 적잖은 반향을 안겨줬다.현은 강좌는 이공계 학생들에게 인문사회학적 소양을 키우고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기 위해 산업경영공학과의 세미나의 일환으로 시작됐으며 3년 전 도입했다.2018년 1회는 최근 상지대 총장으로 임명된 전 홍석우 지경부 장관, 2019년 2회는 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이 맡았고 작년에는 코로나로 열리지 못했다.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소크라테스와 오후를 보낼 수 있다면 나의 모든 기술을 넘길 수 있다.”고 말하며 이공계의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했다. 그는 늘 애플 제품은 인문학과 기술의 융복합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애플 제품은 상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발전시키고 싶어했다.취업을 중요시하는 전공선택에서 인문학의 인기 추락이 최근 다시 부각되고 있다. 인문학 부침은 문학이나 역사, 철학을 전공해서는 취업이 안 된다는 게 문제였다. 대학평가에서 취업률이 중요 잣대가 된다고 하니 대학들은 앞다퉈 관련 학과를 통폐합하고 정원을 감축하고 있다.그런 측면에서 몇 년 전 포스텍의 인문사회학부 확대 발전은 주목된다. 포스텍은 인문사회학부 과정에 융합문명, 과학기술, 경제금융 3가지 정도 부전공을 만들고 대학원도 만들어 문화 데이터, 사회조사 데이터, 인터넷 데이터 이런 것을 분석해 사회적 추세나 인식구조를 잡아낼 수 있는 데이터 사이언스라는 전공 과정을 두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발표했고 실천해 가고 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인문사회학에서 포스텍의 역할을 확대하고 과학도 등의 현실감각을 키우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이다.대학생이라면 자아와 세계를 보는 안목이 뚜렷해야 한다. 그들은 최고 학부를 다니는 지성인이며 미래 사회의 역군이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은 전공에 관계없이 사회를 이끄는 통합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 인문사회계 학생들도 이공계의 기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며 이공계 전공자도 마찬가지이다. 이공계 전공자들이 전문 지식만 갖춘 기술자로 도식화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 문과, 이과 구분을 없애는 분위기도 이런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필자도 이공계 대학을 나와 산업공학과 경영학으로 대학원을 다니면서 이공, 인문사회계의 통합적 사고에 크게 공감하고 있다.20년 전부터 포스텍에서는 김영걸 명예교수께서 설치한 항오 강좌가 이러한 역할을 해왔다. 그동안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 이석채 KT회장 등 주로 경제, 정치 전공자들의 강좌를 제공했다.현은 강좌가 기존의 항오 강좌와 함께 포스텍 학생뿐만 아니라 전국의 이공계 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 배양에 크게 기여하길 기대해 본다.

2021-09-16

달 따러 가자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으로/ 뒷동산에 올라가 무동을 타고/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자”윤석중의 동시에 박태현이 곡을 붙인 동요‘달 따러 가자’의 일절이다. 노래를 불러보면 한 아름 달을 껴안은 듯 가슴이 환해지는 동요다. 중천에 높이 떠 있는 달이 아니라 장대로 따서 망태에 담을 수 있는,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는 달이다. 천진무구한 동심 앞에 달은 신비의 대상이거나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초가지붕 위에 얹힌 박덩이처럼 가깝고도 친숙한 사물일 뿐이다.달을 따려면 뒷동산에 달이 떠오를 때 서둘러 가야 한다.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동무들을 불러내어,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니라 장대 들고 망태 메고 가야 한다. 달이 높아 장대가 닿지 않으면 동무의 어깨에 무동을 타고 따면 된다. 착실하게 계획과 준비까지 하였으니 달을 따는 일에 조금의 차질이나 망설임이 있을 수가 없다. 실로 엄청난 천문학적 사건이 될 일을 아이들 몇이서 놀이처럼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달을 따오려는 이유도 소박하고 기특하다. “옆집에 순이네는 불을 못 켜서/ 밤이면 바느질도 못한다더라/ 얘들아 나오너라 달을 따다가/ 순이 엄마 방에다 달아드리자”아마도 이 동시는 루이 암스트롱이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갔다 오기 전에 씌어졌을 것이다. 우주복을 입은 암스트롱이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달은 우리의 달이 아니었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 같은 달의 사진은 수십만 년 인류가 우러러보며 한숨짓고 눈물짓던 그 달이 아니었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 달음박질하고 숨바꼭질하던 달도 아니었다.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다니, 영악한 요즘 아이들에게는 ‘코끼리 냉장고에 넣기’와 같은 난센스쯤으로나 들릴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아폴로 우주선 이전에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들에겐 그것이 애틋한 그리움의 정경으로 떠오르는 것은.추석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연중 가장 크고 밝은 보름달을 맞는 명절이다. 수천 년 농경사회에서 가장 풍요로운 명절이었던 추석이지만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그 의미와 활기가 차츰 시들해져가는 형편이다. 더구나 코로나19 때문에 올해도 더 한층 쪼그라든 명절이 될 것이다. 물론 한가위 달도 옛날의 그 달이 아니다. 불야성을 이루는 인공의 불빛 때문에 달빛이 생기를 잃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옛날과는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다. 생활의 리듬과 생체리듬까지 차고 기우는 달에 맞추었던 농경사회에서 멀리 떠나온 오늘에는 매연 낀 도시의 밤하늘에 없는 듯 걸려 있는 게 달이다.휘황찬란한 불빛과 넘쳐나는 영상매체의 볼거리들을 얻은 대신 우리는 달을 잃었다. 누리를 환하게 비추던 보름달의 그윽하고 아늑하고 신비롭던 정경이 퇴색해버렸다. 아이들도 이제는 달을 노래하지 않는다. 달밤에 모여서 술래잡기나 그림자밟기를 하지 않고, 뒷동산으로 달을 따러갈 생각 따윈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는 아이들에게 달을 찾아주는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동산에 달이 뜨면 아이들을 불러내자.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

2021-09-16

원 플러스 원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벌써부터 모든 뉴스의 관심이 대선에 있는 듯하다. 각 당의 대선 후보가 된 사람이 어떤 구호를 들고 나올지 궁금하다. 잊혀지지 않는 대선구호의 고전이 있다면 3대 대통령선거 때인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못 살겠다 갈아보자’이다. 이에 맞서 당시 여당인 자유당은 ‘갈아봤자 소용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로 대응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국민은 정권을 바꾸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약간의 바뀐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갈아봐도 별 소용없었다’는 느낌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적폐청산을 외치지만 그 적폐청산이 정치 보복이라는 의구심을 받기도 했다. 정치보복이 반복되는 것은 “너희들이 그렇게 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한다”는 1:1의 보상 또는 보복원리가 작용되고 있다. 철학자 세네카는 “정복한 자들은 정복당한 자들에게 율법을 배운다”고 했고 마틴 루터 킹 2세는 “승자는 패자와 똑 같은 것을 생산해낸다”고 했다. 조지 윌리엄 러셀도 “승자는 패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재창조 한다”고 했고 히틀러의 홍보장관 괴벨스까지도 “우리가 패배해도 저들은 우리의 것을 배우게 될 것이기에 결국은 우리가 승자이다”고 했다.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이 없이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이유는 패자의 것을 답습하면서 1:1의 보복적 원리로 살기 때문이다.예수이전의 유대인의 삶은 1:1의 원리였다. 함무라비법전에도 나오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다”는 동태보상법은 범죄를 막고자 했던 1:1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보복의 반복을 불러 왔다. 이런 동태보상법의 정치로는 국민을 감동케 하는 정치가 되지 못한다. 예수는 1:1의 동태보상법을 깨고 원 플러스 원(1+1)의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왼편 뺨을 치거든 오른편 뺨도 대어주라. 속옷을 뺏어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도 주어라.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리동행을 하여라” 하나를 달라 하면 하나에 하나를 더하여 원 플러스 원으로 살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갈아봤자 소용없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진정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면 1:1의 원리로는 안 된다. 1+1의 제3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 이를 비현실적이고 실천불가한 가르침이라 했지만 간디는 이를 실천함으로 제3의 길을 보여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차치하더라도 신앙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만이라도 이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받은대로 보복하는 1:1의 삶을 버리고 1+1원리로 살아간다면 모두가 행복해 지리라.

2021-09-15

달아, 내 마음이 보이니

양태순수필가 추석이 코앞이다. 차례상에 올릴 제수용품을 메모지에 적은 후 식탁 구석으로 던져둔다. 모레쯤 시장을 한 바퀴 돌아야지, 혼잣말을 해본다.한때는 설레는 추석이었다. 선물을 들고 오는 언니 오빠들 기다리느라 꼬맹이들은 골목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해가 진 후에도 누군가의 집에 멀리 떠났던 식구가 돌아왔다. 저녁 늦도록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가득한 마을을 둥그런 달님이 반겨주었다.집집마다 고된 손에서 기쁨이 피어났다. 안팎으로 나뉘어 그릇 닦고 전을 부치고 청소하느라 마당을 도리뱅뱅이질 했다. 밤에는 멍석을 펴고 두레상에 둘러앉아 송편을 빚었다. 누가 예쁘게 빚는지, 누구 개수가 많은지 내기도 하면서 서로 놀리고 깔깔대느라 팔월의 밤은 깊어 갔다. 그렇게 날이 이울도록 어린 마음에는 분홍 물이 남실댔다. 우리 집은 인절미도 했다. 안반에 찰밥을 올리고 꿍떡꿍떡 떡메를 쳤다. 아버지와 오빠는 떡메를 치고 엄마는 밥을 욱여넣었다, 세 사람의 손이 장단에 맞춰 엽렵했다. 밥알이 떡이 되기까지 흥겨운 리듬은 귀로 듣는 춤사위였다. 초록 고물을 입은 인절미는 색이 고와서 자태가 우아했다. 씹으면 말랑하고 고소해서 입맛이 당겼다. 맛이 절미라고 인절미가 되었다는 말이 딱 맞았다.추석을 맞이하는 마음은 처지에 따라 변했다. 어릴 적에는 선물꾸러미와 인절미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무슨 선물을 사야 할까 고민했다. 결혼해서는 어떤 음식을 차릴지에 신경 쓰였고, 종일 지지고 볶을 일거리에 괜히 명절이 있다고 투덜대는 마음이 컸다.올 추석 마중은 마음이 무겁다. 유례가 없는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으로 모임의 자유가 없어졌다. 또한 지역 간의 왕래가 조심스러워 동기간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대신 목소리로 안부를 전하고 건강해야 다음을 기약한다며 아쉬움 꾹꾹 담아 길게 늘여 보낸다. 추신으로 몸은 멀어도 마음만은 가까이 하자 덧붙인다. 더욱이 어머님의 갑작스런 투병으로 경황이 없다.어머님은 집안의 중심축이다. 결정권을 가져서가 아니고 경제적인 물주여서도 아니다. 형제들 사이에 기름칠을 하여 어머님을 중심으로 관람차처럼 적당한 거리를 벗어나지 않게 하는 축이었다. 추어탕 끓였다 불러모으고, 곰국 끓였다 나눠 주고, 오곡밥 먹으러 오라 기별을 했다. 명절을 비롯하여 기념일은 물론 이런저런 이유로 서로 정을 쌓고 마음을 나눌 기회를 만들었다. 덕분에 시댁이 낯설던 내가 얼굴을 못 보면 궁금하고 보고 싶은 사이가 되었다. 어머님과 명절을 같이 보낸 지 삼십여 년이 되었다.어머님은 손이 컸다. 무엇이든 많이 해서 조상님께 올리고 자식들 먹이려고 일을 크게 벌였다. 그래서 음식 장만할 때 불퉁거릴 때가 있었다. 돌아보니 어머님을 돕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속 좁게 꿍얼거렸다는 후회가 든다. 아이들이 품을 떠난 지금은 투덜댔던 그 추석이 삼삼하다. 기름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어른과 아이들 서로 무탈하게 웃고 떠들었던 날들이 어제처럼 선명하다. 수시로 설거지통에 손 담그며 앞치마 마를 새 없이 부산했던 옛 추석이 좋았다 싶다.사라져가는 추석 풍경이 아쉽다. 가족을 웃고 울리던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예전과 달라졌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인사차 들고나는 손님들로 들썩거렸던 분위기와 정겨운 말들도 건조해졌다. 아예 추석 인사말이라는 글귀가 정해져서 나온다. 그 시절 학교에는 운동회를 열었고 운동회는 학생들만의 놀이가 아니었다. 마을마다 어른들이 학교로 모였다. 줄다리기와 손님찾기 게임, 계주 달리기에 참여할 선수를 뽑아 열심히 응원하고 막걸리잔 기울이며 마음껏 즐기는 날이었다. 더이상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아련하다.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보다. 일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고 싶었던 명절이었다. 요즘은 가족끼리 송편을 빚었으면 싶고, 전도 푸짐하게 지져서 이웃과의 정을 수북하게 쌓았으면 싶다. 주고받는 인사에도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은근하게 마음을 전했던 옛 추석이 되기를 꿈꾼다. 지나간 것을 손으로 당겨 와 마당귀에 붙박아 놓을 수 없는 법인데 알면서도 꿈을 꾸는 내 마음을 모르겠다.달아, 내 마음이 보이니?

2021-09-15

영웅을 기억하는 은행나무

하늘 구름 몇 점 지상을 내려다보며 떠간다. 잠자리가 투명한 날개를 휘저으며 한낮을 유영한다. 잘 가꾼 들판에 바람이 벼들을 쓰다듬고, 노릇노릇 알곡이 익어간다. 세간리 은행나무에도 때맞춰 가을바람이 머문다.아름드리 은행나무는 몇 아름이나 될까, 홍의장군 곽재우 생가의 은행나무는 두 팔을 벌려도 다 안아 볼 수도 없다. 600년 살아있는 혼을 느꼈다는 것만으로 왜소했던 내 품이 넉넉해지는 것 같다. 잠시 너른 품에 안겨 살포시 눈을 감는다.은행나무를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부른다. 나이가 수백 년에서 천 년이 넘는 고목이 많다. 그동안 몇 번의 혹독한 빙하시대를 지나면서 살아남았다. 은행나무는 덥거나 춥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살아갈 수 있다. 아무리 오래된 나무라도 줄기 밑에서 새싹이 돋아날 수 있게 한다. 또한, 잎과 열매에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어 외부에서 공격하는 물질을 느끼면 악취를 내뿜어 적을 물리친다.은행나무를 돌아본다. 외침을 이겨내느라 둥치가 움푹 파여도 여전히 하늘을 떠받들고 섰다. 몸은 노쇠해도 잎은 무성하고 열매가 주렁주렁 열었다. 남쪽 가지에는 여인의 젖가슴을 닮은 유주가 볼록하게 돋았다. 저 유주에 빌면 아기를 준다는데, 은행나무의 영험을 믿은 까닭이다.외침에 강하다고 해서 다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모진 삭풍이 휘몰아쳐도 꿋꿋이 견뎌야 한다. 대지를 태울 것 같은 가뭄이 들면 땅 밑으로 뿌리를 뻗고 또 뻗어 물길을 찾는다. 태풍에 가지가 부러져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자신을 치유한다. 묵묵히, 오롯이, 은행나무는 그렇게 조금씩 높이와 둘레를 키워 오늘의 아름드리가 되었을 것이다.역사의 나이테를 읽다 보면 민초의 삶이 있고 한가운데 걸출한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이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민초를 위한 희망의 푯대를 세웠을 때,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은행나무 나이테에 기록된 장군의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다. 동무들과 고샅길을 뛰어다니는 것을 보았겠고,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것을 보고 이 나라를 지킬 장수가 되리라 생각했겠지.곽재우 장군은 마흔이 넘은 고령이었지만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고 홍의를 입었다. 창이 없으면 죽창을 들고 총이 없으면 활을 들고 왜병에게 저항했다. 은행나무 아래서 발화해 온 고을로 번진 함성은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에 울렸으리라. 마을마다 아귀찬 백성들은 조상이 물려준 우리 땅을 지키려 뜻을 모았다. 그 승전고가 팔도로 울려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웠을 것이다.은행나무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며 오래 산다. 오늘처럼 쏟아지는 여름 볕을 어서 피하라고 넉넉하게 그늘을 내준다. 뜨거운 햇볕을 다 토해내고 선선한 바람이 불면 노오란 색으로 갈아입고 쉼터를 마련한다. 노랗고 화사한 이파리들은 책 속에 납작이 엎드려 추억으로 남는다. 늦가을 은행나무를 보면 노란 성전(聖殿)같이 보인다.영웅은 가도 정신은 살아있는 화석처럼 남는다. 장군을 위해 힘이 되고 그늘이 된 나무는 아직도 정정하다. 오랜 역사의 목격자는 곽재우 장군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충의(忠義)의 인물로 말년에는 초야로 돌아간 선인(仙人)이라고 전설한다.贈李完平元翼 완평군 이원익에게 드림心同何害跡相殊 마음만 같다면 행실 다름이 무슨 상관 있으리오城市喧囂山靜孤 시중은 시끄럽기만 하고 산중은 고요하기만 하네此心湛然無彼此 이 마음은 담담하여 시중과 산중의 구별이 없으니一天明月照氷壺 온 하늘의 밝은 달이 깨끗한 마음을 비추리 이순혜수필가 생가에 들러 장군의 자취를 느끼다가 한시 한 수 받아 적는다. 시끄러운 세상을 벗어난 장군이 완평군에게 보낸 글이다. 초야로 돌아가 청빈하게 사는 선인(仙人)의 마음이 달빛처럼 비치는 것 같다.생가를 떠나 충익사로 향한다. 마을을 나와 뒤를 돌아본다. 사백 년 전, 홍의장군의 호령 아래 의병들의 함성과 우렁우렁 충의의 북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충-의 충-의 충-의….”아름드리 은행나무의 정신을 품고 오는 길, 장군이 남긴 위대한 흔적들이, 은행처럼 마음속에 알알이 맺힌다. 가을 곳간처럼 마음이 꽉 차는 느낌이다.

2021-09-15

눈에 보이는 대로 배운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사람은 어떻게 배울까? 책보면서 깨우치고 학교에서 습득하며 살아가면서 여러 모양으로 배운다. 생각보다 우리는 ‘보면서’ 배운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목격하고 흉내내면서 내 것을 만들고 인성을 형성한다. 책이나 학교보다 눈으로 보면서 실제로 경험한 일들로부터 훨씬 많이 배운다.대선정국. 담론 주제가 위중하고 정치에는 모두 관심이 높은지라 국민의 흥미를 사로잡는다. 언론의 눈을 통해 ‘보이는’ 정치인들의 행태는 필자에게 깊은 우려를 가지게 한다. 정치의 현실이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게 숙명이라지만 정도(正道)가 있고 금도(禁道)도 있는 게 아닌가. 원칙도 없고 소신도 바르지 못한 모습을 흔하게 목격하는 국민은 지치다 못해 나라의 앞길을 걱정하게 된다. 그리고 국민이 특히 다음 세대가 무엇을 배울까 우려가 앞선다.거짓말. 돌아서서 살피면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당당하게 한다. 실수로 발설한 거짓말도 끝까지 진실이라 우긴다. 처음부터 진실을 말하길 원하지만, 혹 실수였다면 바로 사과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눈덩이처럼 불어난 산더미 거짓된 모습이 정치의 현실이라면 국민은 또 얼마나 가여운 처지가 되고 마는가. 개인이 아니라 특정 집단이었다면 당연히 나라와 국민 앞에 거짓을 고하고 속속들이 살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세상이 바뀌었다. 숨겨서 될 일이 아니다. 디지털과 온라인, 4차산업혁명은 거짓을 드러내는 데에도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뿌리채 드러나 형편없는 창피를 당하기 전에 국민 앞에 정직해야 한다.말을 바꾸는 일. 평균적으로 지능이 높아져서 그럴까, 했던 말을 교묘히 바꾸며 빠져나간다. ‘법적으로는 모르지만 도의적인 책임은 지고’ 미끄덩거리며 꼬리를 뺀다. 실질적인 책임과 분명한 사리판단은 언제나 남의 몫이고 자신은 어느 틈에 그 자리에 없다. 유체이탈.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떠안지 않으려 말을 바꾸고 사라져 버린다. 거짓과 악행의 증거와 자취는 감쪽같이 없애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으로 행동한다. 국민은 무엇을 배울까. 거짓과 위선을, 말과 훈계로 경계하기 보다 저렇듯 뉴스 속에서 목격하고 경험하며 실증적으로 체득하게 되지 않을까. 궂은 일에 걸리면 핸드폰들은 파쇄되거나 사라질 터이다. 거짓말을 하면서 태연히 눈을 부릅뜨지 않을까.공정과 상식, 정의와 올바름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 국민의 눈에 목격되어야 하고 경험과 기억 속에 들어와 박혀야 한다. 보고 듣는 것은 늘 거짓과 위선인데 어떻게 공정과 정의로 세상을 물들일 것인가. 공의가 물같이 흐르려면 거짓없는 사람을 흔하게 만나야 한다. 상식이 가득한 세상을 만나려면 내가 먼저 상식에 맞게 살아내야 한다.남들은 몰라도 나는 나를 안다. 거짓을 저지른 당신은 그것이 거짓인 줄 스스로 안다. 필요한 건 용기. 나라가 선진국으로 우뚝 서기 위하여, 거짓을 떨치는 당신의 용기를 ‘보고’ 싶다. 사람은 본 대로 배운다.

2021-09-15

무인자동결제 점포, 언커먼스토어

무인자동결제 점포, 언커먼스토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세계 최초의 무인매장은 2018년부터 문을 연 미국의 아마존 고로, 주로 식료품을 구매할 수 있다.우리나라에서는 서울 여의도 더 현대 서울 6층에 들어선 약 10평 규모(33㎡)의 언커먼스토어가 최초다. 주로 소매 패션잡화와 생활용품, 자체 개발한 굿즈와 식음료 등 200여 개의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스마트폰에 해당 앱(현대식품관 to home 앱)을 깔고 입장하기 버튼을 눌러 QR코드를 생성한 고객에 한해 스피드게이트에 스캔 후 입장이 가능하다. 미리 깔아놓은 앱에는 결제카드를 사전 등록해야 하며, 원하는 제품을 선택한 후 들고 나가면 사전 등록한 카드로 자동 결제되는 시스템이다.서울 삼성동 코엑스 언커먼스토어도 마찬가지 방식이다. 매장 입구에서 사용자 인증 후 QR코드를 발급받은 뒤 원하는 상품을 골라 나가면 결제가 자동으로 이뤄지는 방식이다. 편의점 곳곳에 달린 라이다 센서와 인공지능 카메라가 고객의 위치와 상품의 종류를 파악한 뒤 매대에 내장된 무게 감지 센서를 통해 고객이 실제로 상품을 실제로 집어갔는지 알아내는 원리가 적용됐다. 고객이 어떤 물건을 몇개 집어갔는 지 정확히 파악해 결제되고, 매대에 있는 음료수를 몰래 마시고 다시 넣어놓을 경우에도 매대 상품의 무게 변화를 감지해 결제가 된다.유통 사업에 정보통신기술(ICT)이 결합한 것을 리테일테크(Retail-tech)라고 하는 데, 머신러닝, 로보틱스, 안면인식, RFID, 인공지능(AI), 3D 프린팅, 사물인터넷(IoT),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 빅데이터 등이 적용돼 있다.우리 사회가 4차산업혁명의 핵심기술로 하나 둘 채워지고 있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9-15

이재명 대세론은 굳어질 것인가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민주당 대선 후보 예비 경선에서 이재명 후보가 과반이상을 확보해 가고 있다. 대선의 향방을 가늠한다는 충청 세종 경선에 이어 대구경북, 강원 경선에서도 그의 대세는 유지되고 있다. 관심의 초점인 46만명의 1차 선거인단 선거에서도 이재명의 지지율은 과반을 넘었다. 현재 경선의 누적 집계도 이재명 51.41%, 이낙연 31.08%, 추미애 11.35로 나타났다. 다급한 이낙연 후보가 국회의원직 전격 사퇴라는 배수진을 쳤지만 전세를 바꾸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현재로서는 이재명의 대세론은 이낙연의 결선 투표론을 누를 가능성이 높다.우선 이재명의 선거 슬로건이나 공약이 선명성에서 이낙연 후보를 앞서고 있다. 어느 대선에서나 후보의 슬로건은 당시의 시대정신에 부합해야 한다. 이재명의 공정사회 건설을 위한 ‘이재명은 합니다.’는 이낙연의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보다 메시지의 호소력이 강해 보인다. 이재명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분명하지만 이낙연은 이론적이고 논리적이다. 대중의 설득력은 이재명이 강하고 이낙연이 약하다. 갑자기 등장한 검찰의 ‘고발 사주’의혹은 윤석열의 ‘공정’프레임을 뒤흔들었으며 그 덕은 홍준표와 이재명이 차지할 수밖에 없다.후보의 인물 평가는 그의 공약이 아니라 그 실천력이 담보에 있다. 이재명의 기본소득론과 이낙연의 신복지론은 사실상 차이가 없고 대동소이하다. 그렇지만 그간의 정책 토론과정에서 보여준 이재명의 간단명료한 답변과 임기응변력은 그의 과단성을 잘 보여주었다. 이낙연은 부드럽고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했을 뿐이다. 이러한 코로나 위기 상황이 지속될수록 유권자들은 결단력과 실천력이 담보된 사람을 선호한다. 이재명은 코로나 초기부터 신천지 본부를 찾아가고, 유흥업소까지 직접 찾아가 단속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후보의 도덕성 보다는 그의 결단력이나 실천의지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선거의 대립 구도 면에서도 이재명이 이낙연 후보 보다 유리하다. 경선 초반부터 당내의 세력판도는 친문이 비문을 압도했다. 이낙연은 친문 적자를 내세우고, 이재명 후보는 이제 비주류임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야권이 정권 교체를 강력히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여권의 비문 비주류가 유리할 수 있다. 또한 지역구도 면에서도 경북 출신 경기 지사 이재명이 유리하다. 이낙연은 결국 광주 전남의 절대적 지지로 열세인 국면을 전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호남인들은 선거 때마다 본선 경쟁력 우선이라는 전략적 선택을 하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10월 10일 민주당 최종 경선일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다.25일의 광주 전남선거에서 이낙연 후보가 이재명 후보를 압도하기는 어렵다. 이재명 후보가 호남선거에서도 우세하거나 대등할 경우 이재명의 대세론은 완전히 굳어질 것이다. 부산 경남에 이어 경기 서울 등 수도권 선거에서는 이재명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위기 상황의 경쟁에서 유권자들은 후보의 정책이나 경륜, 도덕성보다는 본선 경쟁력과 실천 능력을 더욱 중시할 것이다.

2021-09-15

주문을 외워보자!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 지금 사람들은 주문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 가장 풍성한 한가위이지만, 세상은 악몽 같은 일들로만 가득하다. 깨고 싶어도 좀처럼 깰 수 없는 악몽. 악몽이 가장 힘든 것은 꿈의 주체가 비록 나이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명절을 앞두고 좋은 말만 하고 싶지만, 도저히 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선거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정치를 제외하고 악몽 아닌 곳이 과연 어디 있을까! 손님이 실종된 가게, 멈춰버린 공장, 문을 닫은 대학교, 사람이 사라진 거리, 친구와 웃음을 잃은 학생 등 우리 사회는 분명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다. 그 악몽은 마치 개미지옥과도 같다.명절 또한 악몽 속에 갇혔다. 사람으로, 정으로 가득해야 할 명절이 비어 간다. 이대로 가다간 명절은 다큐멘터리에서나 나오는 먼 과거 유산이 되고 말 것이 뻔하다. 비어 가는 고향이 그나마 잠시 고향다움을 찾던 때가 명절이었다. 그런데 고향에도 이젠 명절이 없다.우리나라 명절에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명절에 고향에 갈 생각으로 힘듦을 견뎠다. 그러면 고향과 명절은 어김없이 사람들에게 행복과 희망을 충전해주었다. 우리 사회가 그나마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명절과 고향의 희망 순환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 고향과 명절이 사라지면서 같이 사라진 것이 정(情)이다. 정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가장 기본이다. 사랑, 이해, 배려, 나눔 등의 출발점은 정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절대 잊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이 정인데, 지금은 어떤가!정이 없어지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탐욕심, 사악함, 이기주의 등이다. 과연 지금 우리 사회가 공포 영화 속 장면과 다른 것이 뭐가 있을까!영화 속 내용이 현실이 되기 전에 우리가 하루빨리 되찾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어른이다. 흔들리는 우리 사회를 바로 잡아줄 모범이 되는 어른! 정이 없어진 것도 바로 어른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정이 가득하던 시절엔 우리에게도 늘 삶의 귀감(龜鑑)이 되어주던 어른이 있었다. 그 어른을 본받기 위해, 그리고 그들처럼 살기 위해 사람들은 최선을 다했다.그것이 곧 공부였다. 학교는 그것을 가르치는 곳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모범으로 삼을 어른이 없는 시대에 학교도 가르쳐야 할 내용을 잃어버렸다.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는 어른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자라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어떨까!우리 사회가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어른보다 더 어른다운 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을 잃어버린 우리 사회에 다시 정이 부활하기를 마음으로 그 아이들이 외치는 주문을 전한다.“우리는 하나입니다. 모두 하나 되어 높이 날아봅시다. 외칩시다.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이 주문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우리 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1-09-15

끓인 라면, 삶은 라면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물을 데운다 / 라면을 끓일 요량으로 / 봉지를 뜯고 /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 이 한때 / 허기진 오후, / 외출 중인 아내의 빈자리가 / 공복처럼 쓰리다. // 멀리 낮기차 지나가는 소리에 맞춰 / 냄비엔 물이 끓고 / 가지런히 누운 대파를 / 숭숭 썰어 넣는다. / 잘 익은 김치를 / 밥상 위에 올리면 / 더 이상 부러울 것 없는 시간”정구찬 시인의 시집 ‘글씨가 사는 집’(뿌리, 2015)에 실린 시 ‘라면을 끓이면서’의 일부이다. 시인의 말처럼 허기진 오후를 때우는 손쉬운 방법의 하나가 라면 끓여 먹기일 게다. 대파 숭숭 썰어 넣고, 달걀 하나 탁! 깨어 풀면 성찬은 못되어도 일용할 한 끼 양식이 된다. 거기에다 ‘잘 익은 김치’(신 김치도 좋겠다) 한 접시를 더한다면 미각과 후각과 시각까지 만족시킬 만한 꽤 괜찮은 식사가 되지 않을까?1963년 9월 15일은 우리나라에서 라면이 처음 판매된 날이다. 어느덧 한국 라면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아마도 ‘한국인’으로서 라면을 안 먹어 본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듯하고, 라면에 얽힌 이야기 한두 개쯤은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다.한국 라면이 스무살 되던 해인 1983년 2월에 나는 군에 입대했다. 논산훈련소의 토요일 점심 메뉴는 라면이었다. 꼬들꼬들한 네모꼴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찐 라면 2개가 군용 식판에 겹쳐 올려져 있었고, 그 위에 스프국물이 부어졌다. 참 낯선 라면이었다. 배가 한창 고플 때니 입안에 욱여넣기는 했으나 이 생각지도 못한 꼴의 라면 먹기가 처음부터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한 주 한 주 지나갈수록 적응이 되었고 제법 맛을 느낄 만해지자, 논산에서의 6주 신병 훈련 과정은 끝이 났다. 40년 가까이 지났지만 이따금 그 라면맛이 그립다.용기에 담겨 끓는 물만 부으면 간편히 먹을 수 있게도 되었고 다양한 종류와 조리법으로 라면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부대찌개에도 들어가고 양푼 돼지고기 김치찌개에도 들어가서 부담 없는 값에 푸짐하게 배를 불려주기도 한다. 달걀 하나로도 감지덕지했던 라면이 영화 기생충의 ‘짜빠구리’처럼 한우고기 채끝살을 살포시 얹은 고급진 요리가 되기도 하고, 떡과 만두 몇 점 들어간 라면에서 커다란 홍게에 랍스터가 들어간 값비싼 해물라면까지, 실로 라면의 변신은 무궁무진하다. 감자와 고구마가 조선 말 춘궁기의 구황식물이었다면 라면은 우리 시대의 구황식물이자 비상식량이면서 많은 사람들의 선호 음식이 되었다.삶은 라면과 같다. 구불구불 말리고 켜켜이 쌓인 면발은 우리네 인생의 질곡을 보여주는 듯하다. 설익으면 밀가루 씹히는 맛에 떨떠름하고, 잘 삶아 제대로 풀어지면 쫄깃한 면발에 군침이 절로 돌고, 오래 놔두면 붇고 퍼져 먹기 싫어지는 라면처럼 우리 삶의 여정은 라면을 참 닮아 있다.시인은 시의 마지막 연에서 “산다는 것은 / 허기를 다스리는 일 / 권력도 富도 / 라면 한 개의 포만감보다 / 못한 것을”이라고 삶을 풀이한다. 대선의 계절이다. 정치가 우리네 삶의 허기를 달래주고, 라면 한 그릇의 포만감만큼이라도 느끼게 해 주면 좋겠다.

2021-09-14

청년의 날

미래학자들은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로 인구를 꼽는다. 그 나라 인구의 수적우세와 확장성이 국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국력을 비교하는 중요한 잣대로 보통 군사력과 경제력을 드는데,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울 수 있는 핵심적 요소는 역시 인구다. 일찍이 프리드리히 대왕은 “백성의 숫자가 국력을 만든다”했다.한 나라 인구 중 청년층의 구성비가 중요한 것은 왕성한 생산력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청년을 위한 기본법을 만들고 청년의 날도 정했다. 때늦은 감 있으나 그나마 청년에 대한 권리보장과 청년문제에 대한 관심을 국가가 가진 것은 다행이다.우리나라에 청년이란 개념은 겨우 100여년 전에 도입됐다. 그 이전까지는 소년과 장년으로 구분했다. 구한말 한국사회는 소년으로 있다가 장가를 들면 장년이 되는 사회다. 개화기 시절, 청년이란 단어가 생겨나자 시중에는 청년이란 이름의 단체가 우후죽순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청년 개념이 어느덧 우리사회에 정착했지만 청년의 연령적 영역은 모호하다. 보통 20대와 30대를 청년층이라 했다. 그러나 요즘은 40대까지도 청년으로 본다는 견해도 있다. 작년 제정된 청년기본법에는 19세 이상 34세 이하를 청년으로 규정해 청년의 영역이 조금은 뚜렷해졌다.18일은 두 번째 맞는 청년의 날이다. 경제난과 실업난 등으로 결혼을 포기하고 사는 청년이 늘고 있으나 정부의 뾰족한 대책이 안 보인다. 한 여론조사에서 청년의 70%가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기 어렵고 열심히 일해도 부자가 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암울한 미래에 절망을 느낀 청년의 자포자기적 대답같아 가슴이 아프다.우리의 미래를 밝힐 청년에게 용기를 북돋울 획기적 정책과 사회적 관심이 시급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1-09-14

진정한 강함에 대하여

오낙률 시인·국악인 인간 본성에 해당하는 인심은 세상이 변한다고 따라 변하는 게 아니다. 다만, 세상인심이 어쩌고 하는 것은, 물질문명의 무게증가로 인해 상대적으로 나약해진 인간들이 그 무게를 감당치 못해 발생하는 약간씩의 일그러진 모습일 뿐이다. 언제나 사회적 불안은 인심의 부재로부터 시작됐다. 상대적으로 많이 가진 자이거나 사회적으로 강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늘 인심의 도마에 오르곤 해왔다. 사회적 강자의 위치에 서려면 상대적으로 주위 사람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도움에서 얻어진 힘과 지위를 이용해 도리어 그들 위에 서서 군림하고 지배하려 한다면, 또 반대로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보은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강자가 있다면 적어도 작금의 현대사회에서는 그 결과가 극과 극으로 나타나 세상인심의 불변함을 절실히 체험하게 될 것이다. 현대인에게 적용되는 강자와 약자의 구분은 권력이 세다거나 힘이 센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또는 건강한 사람과 나약한 사람 등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게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짓누르는 물질의 무게를 잘 극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하여야 함이 마땅하다. 조그만 물질 앞에서 쉬 무릎이 구부려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질과 연관된 갖가지 유혹을 잘 이기고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인간 그 본성에 충실하려는 사람, 드물지만 이 사회엔 분명히 있다. 해서 오늘날의 진정한 강자는 그 후자의 예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며, 그 후자의 예에 해당하는 사람을 진정한 강자라고 예우함이 마땅하다.사람의 모습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현재의 나타난 모습이 가식이고 그 내면이 진실인 사람, 또 다른 하나는 보이는 현재와 내면이 모두 진실한 사람이다. 십 원 앞에 바들바들 떠는 사람은 그 십 원의 무게만큼, 몇 억의 금전 앞에서 지금껏 잘 지켜오던 양심을 저버리고 마는 사람은 또 그 몇 억의 무게만큼, 그들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그 무게에 깔리고 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누가 세상이라는 갤러리를 경영하고 누가 그 고객이더냐/진정한 강자들이 많은 사회 그런 사회가 이뤄지는 그때쯤이면/푸른 하늘 위를 마음껏 날아다니는 은천저수지 잉어떼들의 귀에도/향내 나는 피리소리가 들릴 것이다/단 한 점의 티도 없는 호수의 맑은 물과/구름도 미세먼지도 없는 더없이 푸른 하늘이/어우러져 살맛나는 세상풍경이/늙은 화가의 화폭에도 그려지고/젖먹이 송아지를 부르는 어미소의 울음짓에도/희망의 기운이 넘치고 생일을 맞은/늙지도 젊지도 않은 아낙들의 시 읽는 맑은 음성은/태고와 미래를 있는 둘레길 가에/코스모스 꽃으로도 피어날게다’ -졸시 오낙률 ‘누가 세상이라는 갤러리를 경영 하는가’ 전문작금의 사회는 강자와 약자의 구분을 많이 게을리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으로 생겨나는 갖가지 사회적 문제가 부메랑이 되어 우리의 삶에 갖가지 위해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진정한 강자와 약자를 올바로 구분해내는 것이 미래로 가는 오늘날의 사회가 당면한 최대 과제가 아닐까 싶다.

2021-09-14

예술 소비 운동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얼마 전에 대구 문화방송 ‘시인의 저녁’에 출연한 문무학 시인이 예술 소비 운동을 전개하자는 말을 남겼다. 한 달에 한 권의 시집이나 소설책을 구입하고, 극장이나 미술관, 음악회를 한번은 가보자는 얘기였다. 만일 시민들이 그렇게 한다면, 대구에서 활동하는 가난한 시인과 소설가, 배우와 화가, 음악가의 생계가 해결될 것이라는 확언도 덧붙였다.참 좋은 말씀이란 생각이 든다. 한 달에 5만 원쯤 소비하여 얻어지는 이득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을 위해 지출하는 시민은 시와 소설을 읽고, 연극을 보거나 그림을 감상하고,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리하여 예술적 취향과 문화적 소양을 함양하여 시대에 필요한 교양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갖추게 된다.시인과 소설가, 배우와 화가, 음악가들은 생계로 인한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젊은 세대의 청춘남녀 가운데 예술과 문학에 투신할 인재들도 나올 것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유쾌한 일인가. 시와 소설, 희곡 같은 문학을 구하지 않고, 예술작품과 대면할 기회를 찾지 않는 인생은 좁고 누추할 수밖에 없다.요즘 ‘케이(K)’라는 글자가 문화-예술 영역에서 대단한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케이팝과 케이드라마, 케이푸드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음악과 드라마, 영화 그리고 음식이 세계적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는 얘기다. 좋은 일이다. 그렇다 해서 대한민국이 문화와 예술 그리고 문학 강국이 된 것은 아니다.‘케이’와 연관된 영역은 대중성을 확보한 특정 영역과 집단에 힘입어 제한적인 인기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바람은 언제나 부지불식간에 불고, 인기도 뜬구름처럼 허망한 것이다. 일시적인 관심과 열기는 생명이 짧기 마련이다. 강하고 든든한 밑거름을 부여해줄 수 있는 너르고 단단한 저변이 필요하다.깊고도 넓은 문화와 예술, 문학에 기초하는 대중예술이야말로 오랜 세월 강고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임은 자명하다. 젊은이들이 즐겨 보는 영화나 드라마, 유튜브 같은 매체를 살찌울 수 있는 문학과 예술의 대양을 준비하자는 얘기다. 모든 예술에는 서사(敍事)가 필요하다. 전후 맥락이 통하고, 시대에 적절한 설득력과 미래기획이 담긴 서사. 건강하고 힘 있는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첫걸음이 예술 소비 운동이다.우리가 한 달에 소비하는 커피 10잔의 비용이 대구와 경북, 나아가 대한민국 전체의 예술과 문학을 살찌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시민들이 카페나 도서관, 거리나 광장에서 문학과 예술, 문화를 토론하며 대화하는 장면은 얼마나 기막힌 것인가! 그것이 주식과 부동산, 먹을 것과 입을 것,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대신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어느새 원로가 되어버린 문무학 시인의 백발과 주름살을 보면서, 열렬히 사셨음에도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구나, 생각한다. 그의 아름답고 절실한 바람이 조속한 시일 안에 꼭 실현되었으면 한다.

2021-09-14

예민함이라는 능력

“넌 참 예민하고 피곤하다.” 어렸을 때부터 듣던 말이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친구들에게도 자주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보고 있다는 사실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 말을 들으면 발끈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한참 동안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한 행동이 내가 예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었다는 건 나중에야 깨달은 일이다.본인이 예민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타인의 사소한 언행이 일순간 날카롭게 바뀌어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경험을 말이다. 어떤 순간은 가시처럼 박혀서 꽤 오랫동안 깊은 상처로 남는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일이 굉장히 언짢고 불편하다. 이러한 성정에 공감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쁘다. 그래,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던 거야. 뿌옇던 유리창이 맑아지는 것처럼 선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정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불합리한 것들을 발견해냈다. 그건 아주 미세한 지점이었다. 식탁 위의 맛있는 반찬은 항상 오빠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던가, 텔레비전의 리모컨을 쥔 사람은 늘 엄마라는 식의 일들. 나에게 레이스가 달린 불편한 옷을 선물하는 아빠는 어째서 활동성 좋은 옷을 입고 명절에 음식을 만들고 치우는 식구들은 왜 여자들뿐인가. “이건 불공정하다”라고 소리치면 “예민하고 유난이다”라는 답만 돌아왔다.왜 남자애들은 학교 운동장을 누비면서 축구를 하고 제멋대로 웃통을 벗어젖히는 동안에 여자애들은 구석에 그려진 좁은 선에 갇혀 서로를 향해 공을 던져야 하는가. 같은 반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걔들은 원래 그렇다고, 착한 네가 참으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가.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에 교복 셔츠 위로 브래지어 자국이 비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 겹의 옷을 더 껴입는 일, 선생님의 폭언에도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일, 우등생의 실적을 위해 내가 하고 싶은 활동을 포기하는 일은 여린 마음을 무자비하게 찌르기에 충분했다.나는 끊임없이 분노했다. 그러한 태도로는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부당하다는 말을 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불편해했다. 예민하고 피곤한 사람이라는 판단은 어린 나를 주눅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한 비난으로부터 나를 방어해야 했다. 나는 주문처럼 외쳤다. ‘이 세계는 원래 그렇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어찌 보면 간편한 일이었다. 그저 내 성격을 탓하면 끝나는 일이었으니까. 무던해지려고 애썼다. 다양한 삶의 지점에서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끼던 물건이 마모되어 돌아와도 무례한 언사를 들어도 참아냈다. 그리고 그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러면 많은 일이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니까 나의 사춘기는 나 자신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인정하는 과정이었다. 나 자신과 그를 둘러싼 세계를 명명백백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었다. 나의 비뚤어진 부분을 발견하고 온 힘을 다해서 거부하지만 결국 그런 인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 나는 어른이 되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의 예민함을 받아들였다. 글을 쓰게 되면서 예민함은 귀한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예민하다는 것은 삶에서는 불행일지 모르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힘이 된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균열의 지점을 포착하는 능력이 이 예민함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때때로 길가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골똘히 쳐다본다. 그들의 고단한 걸음걸이를, 해를 등지고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응시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분명 내게 보이지 않는 서사가 있을 것이라고. 머리맡에 다양한 이야기가 잔뜩 운집해 있기에 언제 쏟아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가시 돋친 서사에 기꺼이 손을 댄다. 따갑고 아프지만 내 안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기민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그러니 자신의 예민한 성정으로 괴로워하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아주 귀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숨겨진 경계를 발견하여 아낌없이 꺼내어 놓는 일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고. 그리하여 확장되는 시야는 분명 유의미하다고. 어쩌면 그토록 불편한 우리가 이토록 부당한 세계를 바꿀 수도 있다고 말이다.

2021-09-14

레트로가 지나간 자리에서

영원할 것 같던 레트로 열풍도 이제는 한 풀 꺾인 모양이다. 패션, 음악, 영화, 사진, 음식,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물들이 90년대 감성으로 포장되어 거리를 꾸미던 모습은 우리를 그리웠던 옛 시절로 데려가기 충분했다.듀스를 좋아했던 나에게 ‘여름 안에서’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들은 분명 반가움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걸 뭉클했다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9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레트로가 만든 풍경이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과거를 회상한다는 건 분명 단순한 되새김질이 아니다.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 사라진 장소를 거닐었던 순간을 떠올린다는 건 우리의 마음을 손쉽게 간지럽힌다.자그마한 화단이 가운데 놓인 ㄷ자 모양의 슬레이트집, 매일같이 골목길에 모여 고무공을 차고 놀던 친구들, 도무지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유치원의 연극, 처음으로 교복을 입고 거닐었던 중학교의 운동장, 하릴 없이 쏘다니던 개천변의 풍경 같은 것들.이제는 사라진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기억이나 학교를 땡땡이 치고 패스트푸드에서 시간을 뭉개던 재수시절 같은 것들은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게 남은 시간이 아닐까.하지만 그 기억들이 마냥 기쁨과 환희의 시간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과거가 그러하듯 내가 가진 유년의 기억들에는 늘 한편에 얼룩 같은 것이 묻어있다.하교 길에 성폭행을 당할 뻔 했던 누나에 대한 기억,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던 지긋지긋한 빚쟁이들, 매일같이 친구들과 모여 놀던 골목에서 형들에게 이유 없이 맞았던 기억이나 금품을 갈취당한 기억 같은 것들 말이다.단지 가난이라고 말하기에는 일그러진, 나의 그리운 1990년대. 이런 유년의 시간들을 마냥 행복했다고 말하기엔, 나의 마음은 여전히 성글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이런 말을 할 때면 친구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레트로 문화라는 건, 그냥 그런 느낌을 즐기는 거라고. 하지만 나에겐 그 감성이 ‘그냥’ 즐기기엔 너무 무겁고 힘들었다.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은 각자가 다르다. 레트로가 한 때의 유행으로 지나가버린 지금, 안도감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사실 이건 지나치게 개인적인 이야기로 들리지만, 마냥 개인적인 이야기는 아니다.내가 느낀 이질감의 정체는 이런 게 아니었나 싶다. 90년대에 우리가 함께 겪었던 슬픔과 고통들이, 레트로의 열풍 속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 삼풍백화점에서부터 성수대교, 대구 상인동, 씨랜드, 연천 예비군 훈련장, 서해 훼리호…. 그리고 IMF까지.지금 우리가 선 자리는 그런 크고 작은 사건과 참사들 위에 세워진 것 아니었나. 항상 기억하자고 말하던 우리는,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렇게 슬픔과 고통을 잘라내고 유흥과 부흥을 기워넣고는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웃고 떠드는 모습이 나는 슬펐던 것 같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나의 슬프고 찬란한 기억이 단지 가벼운 농담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레트로라는 유행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웃고 즐기기에 나는 너무 무거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천성이 그런 탓일 게다. 상품이 되어버린 기억을, 나는 조금 버티기 힘들었다.과거가 돌아온다는 건, 지금처럼 웃고 즐기는 형태로 돌아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건 우리가 은연중에 억압해온 무언가, 우리가 지금의 삶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배제하고 은폐했던 그것이 섬광처럼 우리의 삶을 잘게 찢는 순간도 분명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언젠가 우리 앞에 과거가 돌아온다면, 그건 우리가 레트로 열풍 속에서 삭제했던 부분들이 우리 삶의 한복판에 나타나는 일일지도 모른다.그러니 가끔은 그런 일도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걸어온 시간을 기쁨과 환희를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의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 말이다.

2021-09-14

서재라는 공간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는가

문학사회학자 이언 와트(Ian Watt)는 ‘소설의 발생(The Rise of the Novel)’이라는 책에서 독서대중의 형성과 소설의 발생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그에 따르면 지금 우리에게 고전으로 남아 있는 작품들을 쓴 작가들이 등장하게 된 현상에는 산업혁명 이후 대량출판인쇄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18세기에 독서대중이 증가하기 시작한 배경이 존재하고 있다. 과거에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책과 독서가 이 시기에 급격하게 중간계급의 중심문화가 되어, 이후 백 년 이상 이어졌던 것이다. 바야흐로 사치품이자 자기 과시의 상징이었던 책이, 대표적인 여가 활동의 대상이자, 인간이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완전히 같은 내용, 같은 분량의 글자가 고급 종이를 써서 단단하고 꼼꼼하게 제본된 커다란 판형의 하드커버의 책에 담길 수도 있고, 비록 인쇄상태도 조악하고, 종이로 금방 바스러질 듯 약하긴 하지만 언제나 가지고 다니기 좋은 소프트커버, 내지 문고판의 작은 책에 담길 수도 있다. 자기 과시의 사치품에서부터 여행할 때 언제든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일상품까지, 책은 단 하나의 의미로 규정되는 기호가 아니기 때문이야말로 흥미롭다. 내가 무엇을 먹고 마시는가 하는 것 역시 내가 누구인가 하는 취향이나 기호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애초에 책이란 그것의 물성, 즉 물질로서의 성격을 고려하는 순간,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 책을 고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기호로 작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의 가방 안에 흘깃 보이는 책 한 권만큼 그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기호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때로는 타인으로부터 읽히게 되는 것이 싫어 책에 꼼꼼하게 표지를 싸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 역시 소지품으로서 책이 갖는 기호로서의 의미를 말해주는 것이다.당연히, 귀한 책들을 잔뜩 꽂아놓은 서재야말로 과시적 기호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18세기 경제력을 획득한 부유한 상인계급의 사람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서재를 꾸미고 그곳에 2절 정도의 커다란 판형의 책들을 빼곡히 꽂아두고 손님이 방문할 때마다 한 권, 한 권 꺼내 보여주며 이 책을 구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눈을 빛내며 늘어놓는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과시의 마음은 오히려 순수한 것이다. 골동 취미의 일부로서 옛 책의 수집과 그 책 속에 담겨 있는 지식을 빌려 자신이 갖고 있는 교양과 지적 취향을 과시하는 셈이다. 별로 해롭지 않은 자기 자랑이다.이처럼 누군가의 ‘서재’를 보는 일은 즐거운 일 중에 하나였다. 내 어린 시절에는 친구의 집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면서 내 친한 친구의 가족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이른바 서재를 읽는 것이다. 귀한 책들이 많이 모여 있는 서재에서 주인의 자랑이 담긴 설명을 들으며, 눈호강을 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테지만, 책은 소장하는 물건만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어지럽게 쌓인 책들 속에서 그것을 소중히 아끼며 꽂아놓은 주인의 마음을 가늠해보는 것이 오히려 더 즐거운 일이다. 그가 모아둔 책들, 그리고 그 책들이 놓여 있는 순서를 읽어가다 보면, 마치 그 사람의 무의식 내부를 들여다보듯, 책의 행간을 읽어내듯, 그 마음을 이해할 듯한 기분이 든다.최근 사람들이 책을 더이상 많이 사지 않게 되면서, 또한 책의 소비가 전자디지털매체로 옮겨가면서 확실히 집안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고 있는 공간은 서재인 것 같다. 우리들 사고의 저장은 웹페이지 접속 기록처럼 온라인 어딘가에 쌓여 있을 뿐, 이제는 서재처럼 슬쩍 훔쳐보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대로 우리들에게 ‘서재’라는 공간은 사라져버린 걸까./홍익대 교수

2021-09-13

신라 최초 여왕의 염원이 깃든 곳 분황사

분황사(芬皇寺)는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되어 지금까지도 법등(法燈)을 이어온 사찰이며, 오랜기간 유지되었던 사찰인 만큼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통해서도 다양한 기록을 접할 수 있다. 특히 분황사는 신라 칠처가람(七處伽藍·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사천왕사, 담엄사) 중 한 곳이기도 하다.신라는 불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타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등 호국불교의 면모가 강하였다. 칠처가람 역시 신라 전 영토를 불국토로 여기는 것으로 그 가운데 분황사가 포함되었다는 점은 당시 신라 사회에 큰 영향력 있는 사찰이었음을 보여준다. 분황사는 황룡사·황복사 등과 같이 신라 왕실을 의미하는 ‘皇’자를 사용한 왕실사찰이다.또한 문헌기록에는 ‘왕분사(王芬寺)’라고도 하였다. ‘분(芬)’자가 향기롭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분황사는 ‘향기로운 임금의 절’이라는 의미로 풀이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향기로운 임금’은 바로 분황사의 창건주인 선덕여왕을 말하는 것이며, 이를 뒷받침 하듯 1915년 발견된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리함에서 금바늘과 바늘통 그리고 실패와 가위 등 여성들이 주로 사용한 물건들이 사리장엄구에 포함되어 있었다.이렇듯 분황사는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7세기 중엽부터 지금까지도 사찰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분황사는 정문을 지나면 일제강점기(1915년)에 수리된 모전석탑,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 우물, 조선 광해군 원년(1609)년에 건립된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해 석등과 많은 초석,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만이 남아 있다. 고찰(古刹)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람 영역은 불국사, 해인사와 비교하면 좁게만 느껴진다.특히, 사찰의 주요 구조는 부처를 봉안한 금당(金堂)과 사리(舍利)를 모신 탑(塔)이므로, 탑과 금당이 일직선에 놓이도록 배치된다. 그런데 현재 분황사에는 금당인 보광전의 입구가 서쪽으로 향하여 전탑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 특이하다. 그렇다면 이런 구조가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분황사에 대한 궁금증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를 통해 해소할 있었다. 발굴조사는 20년간 이어져 2012년에 마무리되었고, 그 결과 분황사는 창건 당시 품(品)자형의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사찰에서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 세 곳에 법당을 배치하는 방식) 가람(伽藍)으로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일탑삼금당식의 가람구조는 고구려에서 시작되었지만, 분황사의 가람배치는 고구려의 것과 똑같은 구조는 아니었다. 신라만의 품(品)자형 일탑삼금당식이 등장한 것이며, 분황사에 이것이 적용된 것이다. 창건 당시 3금당은 모두 남향으로 탑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이후 통일신라시기에 일탑일금당식으로 변화했고, 조선시대에 들어 현재 모습의 분황사 가람이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또한 분황사 경내 위치한 모전석탑(방형모전석탑·方形模塼石塔)은 신라 유일한 전탑형식의 석탑으로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9층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석탑은 분황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이외에도 분황사 남북 외곽지역에서 당간지주·담장·축대·건물지·배수로 등이 확인되어 분황사 전성기의 사역 범위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학술자료들을 확보하였다. 고소진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분황사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가로 15줄, 세로 15줄의 바둑판전(42×43㎝, 높이7.8㎝)과 동궁과 월지와 황룡사지 등에서 출토되었던 숟가락의 거푸집이 있다. 그리고 1차 중건 중문지에서 출토된 치미를 통해 전성기 분황사 건물 규모를 가늠 할 수 있다. 특히, 분황사에서는 고신라-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연화문, 보상화문, 당초문, 용문, 비천문 등의 다양한 기와가 출토되어 기와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분황사가 위치한 구황동에는 황룡사지, 황복사지, 미탄사지 등 사찰들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황룡사를 제외하고는 그 창건과 존속시기가 명확하게 알져지지 않았으나, 분황사와 공존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찰은 유일하게 분황사뿐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또한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존재가 한국 역사에서 유일무이 하듯이, 분황사 역시 신라 최초의 품자형 일탑삼금식 가람양식과 모전석탑을 가진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9년 경주 분황사지(慶州 芬皇寺址)는 사적 548호로 지정되었다.‘삼국유사’ 권1 기이편 선덕왕지기삼사조(善德王知幾三事)에 나오듯 자신의 죽는 날까지도 미리 예측할 정도인 선덕여왕은 자신의 염원을 담아 분황사를 세웠으며, 그의 염원은 최초의 여왕인 자신이 신라와 이 땅에 오랫동안 기억되길 바란 것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2021-09-13

기술인의 쾌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한, 두 차례 비가 오고 나니 하늘은 더욱 높아지고 푸르름을 더해간다. 정갈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 결에 들판의 알곡이 여물어 가듯이, 도처에서는 이러저러한 선행과 희소식이 들려온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죽장면의 수해현장을 근 4주째 빠짐없이 찾아 복구와 지원의 일손을 보태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기술인의 최고 영예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명장’ 선정 등의 기쁜 일들이 잠시나마 코로나의 시름을 잊게 해준다.대한민국명장이란 산업현장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기술자로서, ‘숙련기술장려법’에 따라 숙련기술 발전 및 숙련기술자의 지위 향상에 크게 공헌한 사람을 지칭한다.이러한 제도는 1986년부터 시행돼 고용노동부에서 고시한 37개 분야 97개 직종에서 15년 이상의 경력자를 대상으로 기계, 재료, 전기, 통신, 조선, 항공 등의 산업분야와 금속, 도자기, 목칠 등의 공예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서류, 현장심사를 통해 선정한다.국가가 인정한 최고의 장인(匠人)이기에 선정되기까지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 보다 어렵고 경쟁이 치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대한민국명장에 포항지역의 명문사학 출신의 포스코 기술자가 선정돼 화제와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그 뿐만이 아니라 2명의 우수숙련기술자 선정을 비롯하여, 이미 2015년에 대한민국명장에 선정돼 산업과 국가 발전에 공로가 인정되는 자에게 수여하는 ‘산업포장’까지 이번에 함께 받아서 경사를 더했다. 특히 4명 모두 같은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출신의 15회 동기생으로 포항제철소에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이채롭기만 하다.우수숙련기술자와 대한민국명장에 선정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초가 있었을까? 수 없는 학습과 좌절, 부단한 인내와 의지로 현장에서의 기술력과 활용성의 가치를 드높이며 정성과 최선을 다한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력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듯이, 어쩌면 서럽도록 힘겨운 노력과 눈물겨운 정성이 빚은 선물 같은 결실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라 했던가. 포철공고는 어느덧 반세기의 역사를 가지고 국가산업정책에 부응하는 고급인력 양성, 전문성과 인성을 겸비한 철강분야의 융, 복합 전문기술교육으로 4차 혁명시대를 이끌 창의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인재를 육성, 배출하는 명문사학으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 많은 변화와 성장의 50년 역사 속에 전국적으로 1만5천여명의 동문들이 산업현장과 문화예술계 등 각계각층에서 저마다의 재능과 기량을 발휘하며 소임을 다하고 있다. 대한민국명장 선정과 산업포장 수훈은 이러한 맥락에서 포공인(浦工人)의 저력을 만방에 드러낸 명문교육의 소중한 결실이다.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듯이(人無遠慮 難成大業), 특히 교육이나 인재양성은 먼 장래를 내다보며 원대한 계획과 치밀한 준비로 지속적인 창의와 혁신이 있어야 개인의 성취와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021-09-13

정리와 절제, 윤택한 삶

장광일​​​​​​​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산천의 초목이나 들판의 잡풀이 무성하다가 한숨 돌리는 계절, 추석이 다가오는 이맘 때가 되면 의레 하게 되는 것이 벌초(伐草)다. 저마다 부모 또는 선조의 묘소를 찾아 웃자란 풀을 베어내고 산소 주변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자르거나 둥치를 베며 주위가 훤하고 깨끗해지도록 일손을 모으고 정성을 다한다. 자기가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으며 조상을 기리고 섬기는 마음에서 해마다 애써 풀을 내리고 정리하게 되지만, 일단 벌초를 하고 나면 보기에도 그리 시원하고 깔끔하지 않을 수 없다.비단 그와 결부되는 맥락은 아니겠지만, 일상 중에 물건을 정리하거나 청소를 하고 나면 가슴 속까지 후련해지고 마음이 개운해짐을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정리라는 것은 생활공간이나 주변 여건, 업무환경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과 변화를 수반하는 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최근에 필자가 관심있게 시청했었던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나만의 공간인 ‘집’의 물건을 정리하고 공간에 행복을 더하는 노하우를 함께 공유할 수 있어서 기업체 정리 컨설팅에 많은 도움과 요령을 십분 활용하기도 했었다.이른바 ‘정리’란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사용빈도와 기간에 따라 명확히 구분하고 불필요한 것을 과감하게 제거하는 활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10년 전 필자가 컨설팅한 H중공업의 혁신활동 첫 단계로 정리활동 차 공장 내 불필요한 물품에 레드 카드(Red Card)를 부치도록 했었는데, 전체를 다 부착한 후에는 공장 여기저기가 붉게 물들어 마치 가을단풍으로 착각할 정도로 즐비했었다. 정리 활동 후 불필요한 물건이 없어짐에 따라 공장 내부는 넓어졌고, 직원들의 환경관리 수준도 향상되었다.정리활동이 제대로 이뤄지게 되면 혁신의 절반이 완성되는 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기업이 성공적으로 정리활동을 했던 비법이라 한다면, 첫째 아까워도 과감하게 버렸다는 점, 둘째 기간 내에 과잉으로 신청하여 가지고 있던 물건을 꺼내 놓으면 책임을 묻지 않고 상을 주었다는 점, 셋째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경영진부터 현장직원까지 전원이 참여했다는 점 등이라 할 수 있다.정리하는 능력을 일상적으로 반복하게 되면 습관이 되고, 좋은 습관은 그 사람의 인생도 성공하는 인생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본다. 그만큼 버리고 비우며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며, 적당함과 적절함의 균형을 유지하고 관리하기란 생각보다 만만찮은 일이기 때문이다.“아무 것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채울 수 없다”는 말처럼 정리는 단순히 현장의 변화만을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개인의 삶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는데 도움을 준다. 정리하는 습관과 절제하는 노력은 저마다의 일상을 깔끔하게 하고 그 삶을 윤택하게 채워주는 힘이 있기에, 아무쪼록 정리활동을 습관화하여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을 달성하길 기대해 본다.

2021-09-13

너를 찾아가는 길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J는 중학생이다. 진로에 고민이 많다. 지금 원하는 일, 신나는 일이 있지만 마냥 즐길 수만은 없다. 그 일의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다면 나서기 어려울 것이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어느 정도 되어야 시도할 수 있을 텐데, 불확실한 시대라 더 불안할 것이다. J의 고민을 듣다 보니 책 두 권이 생각난다.E.B.화이트의 동화 ‘스튜어트 리틀’은, 그의 대표작 ‘샬롯의 거미줄’보다 마음이 더 가는 작품이다. 주인공 스튜어트 리틀은 마음씨 좋은 스튜어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생쥐다. 인간이 쥐를 낳았다니, 이런 설정에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스튜어트 부부는 생쥐 아들을 아무 편견 없이 아들로 받아들인다. 그 덕분에 생쥐 아들은 큰 불편 없이 밝게 자란다. 부부가 키우는 고양이 때문에 마음을 여러 번 졸이지만, 큰 문제는 없다. 그러다 어느 날 집에 들어온 새에게 반하지만, 새는 계절도 바뀐 데다 이웃집 고양이의 습격 계획을 알게 되자 북쪽으로 떠난다.여기서 끝나면 그래도 평범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스튜어트 리틀은 새를 만나러 떠난다. 생쥐가 도중에 만나 생쥐 여인을 마다하고,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새를 찾아 떠나는 모습이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이면서도 오묘한 감동을 준다.그림책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는 더 해피엔딩이다. 이 책은 ‘스튜어트 리틀’과 비슷하면서도 결말이 다르다. 북쪽에 사는 곰은, 한 계절 같이 지낸 새가 따듯한 남쪽으로 떠나자 새를 찾아 남쪽으로 온다. 그러나 새는 이미 다시 북쪽으로 떠난 후다. 곰이 보낸 편지도 하나도 못 읽었다. 곰은 실망하지만 다른 새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북쪽으로 오고, 드디어 새를 만난다.곰이 새를 찾아 남쪽으로 떠난다는 것도 어리석어 보이고, 가만히 있었어도 다시 새를 만났으리라는 어김없는 사실은 곰의 여행이 의미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새를 찾아 떠난 곰과 가만히 앉아 새를 기다리는 곰이 같은 곰은 아니다.디즈니 버전 ‘스튜어트 리틀’이 뻔한 가족주의로 끝나서 실망했는데, 원작은 전혀 다르다. 사람 부부 사이에서 생쥐가 태어난다는 설정도 너무 이상하고, 그 생쥐가 새를 사랑해서 먼 길을 떠나는 결말은 더 낯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여운이 남는다. ‘세상 끝에 너에게’에 나오는 곰 역시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림도 정말 좋다.문학에서 느끼는 감흥이 금방 힘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은 동시에 불가능성에 대한 싸움이다. 삶 자체의 조건에 쫓기는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유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꿈꿀 수 있다”고 한 문학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사람은 문학을 통해 꿈꿀 힘을 얻는다.‘스튜어트 리틀’이 새를 만나러 내딛는 발걸음이 행복한 것처럼, 지금 내가 원하는 길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그러다 보면, 곰이 만난 새들처럼 뜻밖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게 된다. 이 말을 J에게 건네고 싶다.

2021-09-13

생활형 숙박시설 청약열풍

수도권 아파트 값 폭등이후 생활형 숙박시설(생숙), 오피스텔, 도시형 생활주택 등으로 청약열기가 옮겨가고 있다. 청약·대출·전매의 벽이 높은 아파트와 달리 규제 문턱이 거의 없다 보니 단기 시세차익을 노린 투자자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가장 청약 열기가 뜨거운 생숙만 해도 주택법이 아닌 건축법이 적용돼 법적으로는 ‘주택’이 아니다. 집으로 잡히지 않아 종합부동산세·양도소득세가 중과되지 않는다. 만 19세 이상이라면 청약통장이 없어도, 다주택자여도 거주지역과 관계없이 누구나 청약할 수 있다. 청약 당첨 후 계약금 10%만 내면 바로 전매도 가능하다. 무주택 세대주·부양가족 수·청약통장 가입기간 등 주택 분양시장의 허들은 굉장히 높은 데 반해, 생숙 등의 경우는 규제가 자유롭기 때문에 투자 수요의 유입이 늘어나고 있다.비주택 상품은 무엇보다도 청약에 따른 불이익이 전혀 없다. 당첨 직후 형성되는 웃돈, 이른바 ‘초피’를 노리고 청약한 후 예상대로 웃돈이 형성되지 않으면 당첨을 포기하면 그만이다. 청약 신청금이 있지만, 당첨·계약 여부와 무관하게 100% 환불된다. 그래서 원금 손실 걱정이 전혀 없는 ‘로또’로 불리기도 한다.그러나 전문가들은 투자 접근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비주택 상품은 아파트보다 훨씬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생숙의 경우 일부 중개업소는 “실거주나 임대가 가능하다”고 광고하지만, 주거 목적 이용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아파트에 비해 환금성도 낮고 거래량도 떨어진다. 무엇보다 경기 위축 시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상품이다.특히 수익률을 강조하지만 보장된 확정 수익률은 없는 만큼 투자금액 대비 수익률이 나올 수 있는지 철저하게 따져보고 접근해야 한다.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