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이란 단어에 얼른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장님과 길잡이 관계다.
어떤 장님이 길잡이 소년을 데리고 전국을 떠돌며 구걸하고 있었다. 그들이 어느 초가을에 포도밭을 지나는데 포도 농부가 장님 일행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농부는 뭔가 도와주고 싶은데 당장 줄 것이 포도 밖에 없어 포도라도 먹으라고 주었다.
포도를 선물로 받은 두 사람은 적당한 그늘에 앉아서 나누어 먹기로 했다. 그런데 먹기 전에 한 가지 다짐을 했다. 한 번에 한 알씩 서로 번갈아가며 먹자고 말이다. 장님이 어른이니까 먼저 한 알 먹었다. 이어서 소년도 한 알 먹었다.
한동안 그러다가 장님은 약속과 달리 두 알을 먹었다. 소년은 생각했다. 이 사람이 약속을 어기는구나. 그렇다면 나도 두 알을 먹어야지. 소년이 두 알을 따 먹어도 앞을 못 보는 장님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자 소년은 다시 생각을 바꿨다. 장님은 볼 수 없으니까 내가 세 알씩 네 알씩 먹어도 괜찮겠지.
장님이 한 번에 두 알씩 먹는 동안 소년은 마음 놓고 세 알 네 알씩을 먹었다. 금방 포도는 없어졌다. 포도 먹기가 끝나자 장님이 말했다.
“네가 나를 속였구나” 그러나 소년은 가슴이 뜨끔하면서도 아니라고 우겨댔다. 그러자 장님이 말했다.
“내가 약속을 어기고 두 알을 먹었을 때 너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래야 너도 나처럼 할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나를 속인 증거다”
이처럼 상대를 훤히 꿰뚫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지만 더러는 쉽게 생각하고 마구 대해도 괜찮은 존재가 동반자라고 착각하는 수도 있다. 특히 배우자의 경우 실수나 낭패를 꼬집어 해치기보다는 은근슬쩍 덮어주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 부부가 서로의 약점이나 찾아보려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로 묶여졌다면 스파이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대의 부족한 부분은 메우고 흠집은 덮어주는 파트너여야 비로소 한 가정이 온전해진다.
야구 경기에서 목이 쉬도록 응원하고 격려하는 까닭은 ‘내편’이라는 팀이 마운드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듯이 가정에서 내편은 당연히 부부다. 그래서 ‘지아비’와 ‘지어미’로 칭하고 스스로 아비와 어미가 되어야만 한다. 살면서 반쪽의 어깨가 축 쳐질 때 나머지 반쪽이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해야 쓰러지지 않는 가정이 된다.
동반자 관계는 결코 경쟁하는 여야 관계가 아니다. 서로에게 존재의 근거이며 말 그대로 일심동체다. 남편을 깎으면 아내도 깎이고 아내를 높이면 남편도 높아진다. 상대를 울게 하지 말고 웃게 하면 자신도 저절로 웃게 된다. 서로 돕고 응원하며 감싸주는 삶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나아가 자녀의 장래에 표본으로 가르쳐주기도 하지 않겠는가.
가정의 달이 막 지났다. 포도를 더 먹기 위해 동반자를 속일 수도 없거니와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만 이득을 취해도 상대가 눈감아주지 않으면 성사되지 못한다.
우리의 미래는 청소년일 수밖에 없다. 자녀들에게 올바른 인간관을 전해주려면 동반자 관계를 몸으로 배워 익히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