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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몬티 홀 문제

몬티 홀 문제(Monty Hall problem)는 최근 인기를 끌고있는 국산영화 ‘D.P’에 나오는 퍼즐 문제로, 미국의 TV 게임 쇼 ‘거래를 합시다(Let‘s Make a Deal)’에서 유래한 퍼즐이다. 퍼즐의 이름은 이 게임 쇼의 진행자 몬티 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퍼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 개의 문 중에 하나를 선택해 문 뒤에 있는 선물을 가질 수 있는 게임쇼에 참가했다. 한 문 뒤에는 자동차가 있고, 나머지 두 문 뒤에는 염소가 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 1번 문을 선택했을 때, 게임쇼 진행자는 3번 문을 열어 문 뒤에 염소가 있음을 보여주면서 1번 대신 2번을 선택하겠냐고 물었다. 참가자가 자동차를 가지려할 때 원래 선택했던 번호를 바꾸는 것이 유리할까 바꾸지 않는 것이 유리할까?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않는다. 사회자가 염소가 있는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정답을 맞출 확률이 3분의 1에서 2분의 1로 늘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옳지 않다. 참가자는 선택을 바꾸는 것이 유리하다. 처음 선택한 번호를 바꾸지 않을 때 자동차가 있는 문을 선택할 확률은 1/3이지만, 처음 선택한 번호를 바꾸면 확률은 2/3으로 증가한다. 처음에는 자동차를 고를 확률이 1/3이지만 사회자가 문을 열어주면 1/3 확률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문에 확률이 옮겨져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문에 자동차가 있을 확률은 2/3가 되기 때문이다.몬티 홀 딜레마는 인간이 합리적 선택을 한다는 전통 경제학 가정의 허를 찌르는 사례로 유명하다. 대선 후보를 뽑는 경선에서 후보를 고르는 것도 몬티홀 문제에 비견되지는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9-06

아프간의 비극이 한국에 주는 교훈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아프간의 수도 카불이 탈레반에 함락됐다. 시민들은 패닉에 빠져 공항으로 달려갔고, 아수라장이 된 군중 속에서 두 살 아기는 압사하고, 미군 수송기에 매달렸던 청년들은 모두 추락사했다. “아기라도 살려 달라”고 철조망 위로 자식을 건네는 엄마의 모습이 눈물겹다. 게다가 IS의 자폭테러로 수백 명이 사상했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된 카불의 비극이다.누구를 탓하랴.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허울뿐인 30만 정부군이 6만 탈레반에게 백기 투항했다. 결사 항전하겠다던 대통령은 국민을 버리고 참모들과 함께 해외로 도주했고, 그의 동생은 탈레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대통령부터 콩가루 집안인데 누가 나라를 지킬 수 있겠는가? 바이든 대통령이 “아프간 정부가 미래를 결정할 기회를 줬는데도 그들은 스스로 포기했다.”고 한 이유다.아프간 사태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확고한 현실주의 안보전략이다. 국제정치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국가안보의 최선은 ‘자신의 힘’이며, 차선은 ‘동맹의 힘’이다. 하지만 동맹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줄 뿐이다. 바이든은 “아프간정부가 포기한 전쟁에서 미군이 희생돼선 안 된다.”고 하면서 “국익이 없는 곳에 계속 머무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했다. 비록 동맹이라도 스스로 지키려는 의지가 없거나, 동맹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철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따라서 한미동맹도 ‘미국우선주의’와 충돌되지 않도록 잘 관리되어야 한다.나아가 정치지도자에게는 ‘솔선수범’의 교훈을 준다. 전시에 영국은 지도층이 제일 먼저 전장으로 달려갔지만, 아프간은 대통령이 제일 먼저 도망갔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어떤가?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이 ‘내로남불’과 ‘흑백논리’로 국민을 분열시키는 것은 망국의 길이 아닌가? 무엇이 잘못되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이 지도자 자격이 있는가? 여당의 전 대표가 “윗물은 맑은데 아랫물이 흐리다.”고 한 궤변을 보면 ‘솔선수범’이 무엇인지를 알 리가 없다.국민에게 주는 교훈도 적지 않다. 민주공화국의 흥망은 권력 주체인 국민에게 달려있다. 도산 안창호는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일본도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요, 바로 나 자신”이라고 했다. 확고한 주인의식의 발로다. 국민이 항상 깨어 있어야 아프간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은 자유의 향유에 수반하는 국민의 책임과 희생을 일깨워 준다.아프간의 비극은 1975년 베트남 비극과 판박이다. 두 나라는 똑 같이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 미군이 철수하자 붕괴했다. 6·25때 흥남철수와 카불의 난민철수도 다르지 않다. 북한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평화협정과 미군철수의 의도가 이제 명백해졌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가? 오늘의 비극은 어제의 역사를 망각한 대가다. 우리의 내일을 위해 아프간의 비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2021-09-06

성냥의 추억

지금은 라이터에 밀려 추억의 물건이 됐지만 성냥에 얽힌 소소하고 재밌는 이야기는 많다. 성냥은 1880년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 약 100년 가까이 서민의 사랑을 받아 왔다.부싯돌을 금속에 마찰하거나 나뭇가지를 서로 맞비벼서 불을 일으켰던 시절을 생각하면 성냥의 발명은 서민생활을 일깨우는 혁신적 역사다. 19C 말 개화승 이동인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가져온 것이 한국에 들어온 계기다. 당시 성냥은 한통 값이 쌀 한되 값과 막먹을 만큼 비쌌다. 그래서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1910년 이후 일본인에 의해 인천과 부산 등지에 성냥공장이 설립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됐다.6·25 전쟁 이후 전기가 귀하고 정전이 잦았던 시절, 성냥은 가정의 필수품이다. 서울에서 정전이 한 번 일어나면 갑성냥 3만갑이 팔렸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성냥은 가정마다 필요해 집들이 선물로도 잘 팔렸다. 성냥 불처럼 살림이 확 일어나라는 뜻이다. 성냥값이 오르면 요즘 석유값 인상처럼 신문에 가격 인상이 늘 보도되곤 했다.라이터가 나오고 성냥의 효용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던 1970년대 말까지도 전국에는 300여 개의 성냥공장이 있었다. 경북 의성에는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남은 성냥공장이 하나 있었다. 성광성냥 공장으로 1954년 공장이 설립돼 2013년에 문을 닫았다. 한 때 160명의 종업원이 이곳에서 일을 해 의성을 대표하는 기업이기도 했다.이 공장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한 경영인의 뜻에 따라 지금은 이 공장이 의성군에 기증됐다. 의성군은 역사문화 자산으로 잘 보존해 관광자원으로 삼겠다고 했다. 문화유산이 꼭 거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냥공장도 우리의 삶의 흔적을 더듬어 볼 문화로서 가치는 충분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1-09-05

권력이 신문사에 재갈을 물리면…

심충택 논설위원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판사가 자의적으로 판결할 수 있는 ‘가짜뉴스’에 대해 5배 징벌할 수 있는 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확정되면 기자들의 취재 자세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특히 청와대, 국회, 지방의회를 주로 출입하는 정치부기자나 행정기관, 검찰, 경찰 등이 주 출입처인 사회부 기자들은 절벽과 같은 취재장벽이 생긴다.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주로 신문사 정치·사회부 기자들이 권력기관의 부패행위나 비리내용을 끈질기게 취재해 사회의 건전성 유지에 공헌해 왔는데, 언론중재법이 개정되면 이러한 근성 있는 기자들을 구경하기가 어렵게 된다.일부 메이저급을 빼고는 우리나라 신문사 재무구조는 서울, 지방 할 것 없이 취약하다. 대부분 수입을 정부나 지자체, 대기업, 건설사 광고에 의존하고 있다.최근 들어 광고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신문사 광고 파이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을 뻔히 알고 있는 기자들이 만약 자신이 쓰고 있는 기사가 가짜뉴스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과연 기사를 쓸 수 있을까. 혹시 판사를 잘못 만날 경우 자칫 패가망신은 물론, 소속 신문사 존폐문제까지 걸려 있는데, 기사 한 건 때문에 이러한 모험을 할 수 있는 기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언론중재법이 개정돼 기자들이 권력비리에 대한 폭로 기사를 쓰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에 더 순기능적일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이 오듯, 신문사가 권력비리 행위에 대해 침묵을 지켜도 현실은 그대로 존재한다. 오히려 악화된다.신문사가 조국 전 법무장관의 가족비리를 끈질기게 파헤치는 기사를 쓰지 않았을 경우, 어둠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특정계층의 의전원 입학 비리 행위는 국민들이 까마득히 모를 것이다.권력을 견제하는 신문들이 생존을 위해 침묵을 선택하면, 우리나라는 하루아침에 친여권 매체들이 만들어 내는 ‘가상세계’가 실재(實在)를 압도해 버리는 사회가 된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는 이러현 현상을 ‘하이퍼 리얼리티’라고 했다. 하이퍼 리얼리티는 대중이 가상세계를 더 실재인 것처럼 인식하고 사는 것을 말한다.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대중매체가 만들어 낸 카피(모사)된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현실을 모사(模寫)된 이미지의 세계, 즉 허구 혹은 환상일 뿐이며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는 세계라고 보는 것이다.그는 대표적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언론이 만들어낸 모사된 이미지라고 설명했다. 실재하고 있는 현실은 권력에 의한 부정부패, 부도덕, 비리 행위로 가득 차 있는데, 언론은 빙산의 일각 같은 사건을 들춰내 마치 우리 현실 속에 이러한 병리현상이 특정 정치인에게만 국한된 것처럼 다뤘다는 것이다.대중이 현실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창문인 언론은 사회의 병리현상을 밝혀내고 치유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다. 권력에 도취된 일부 정치인들이 신문사에 재갈을 물려 침묵을 강요하면, 우리 국민은 ‘문(文)비어천가’를 부르는 친여권 매체에 둘러싸여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가상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다.

2021-09-05

새로운 먹거리, 대체육 시장의 성장

김도영포항테크노파크 첨단바이오융합센터장 롯데리아의 미라클 버거, 맥도날드의 맥플랜트, 버거킹의 플랜트 와퍼 등 이미 우리 주변에는 대체육을 사용한 버거가 출시되어 판매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체육은 대부분 콩, 밀, 버섯 등의 식물에서 추출한 단백질로 만든 식물성 대체육이며, 최근에는 동물의 줄기세포를 배양하여 3D 바이오프린팅으로 모양을 만드는 배양육이나 식용곤충의 단백질을 가공하여 만든 대체육 등이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다.식물성 대체육은 이미 선진국에서 대중화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비욘드미트, 임파서블푸드 등 글로벌 기업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2009년 창업한 비욘드미트는 2019년에 기업가치가 150억 달러로 평가되는 회사로 급성장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와 팝 가수 케이트 페리가 투자를 한 것으로 유명한 임파서블푸드는 2020년 말까지 1조 5천800억 원의 투자유치를 하는 등 기업가치는 약 4조5천억 원으로 추정되고 있다.국내에서는 풀무원이 식물성 단백질로 고기의 유사한 식감과 맛을 구현한 식물성 고기식품 5종(올가홀푸드), 신세계푸드는 대체육 브랜드 ‘베러미트(Better Meat)’를 출범하고, 대체육 햄(콜드 컷)과 대체육 너겟(노치킨 너겟) 제품을 출시했다. 특히 노치킨 너겟은 출시 한 달 만에 10만 개가 완판 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농심, 롯데푸드 등의 기업에서 식물성 고기를 활용한 다양한 대체육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이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대체육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배경으로는 식량안보, 건강, 환경문제 등의 이유를 들 수 있다. 인류는 고기를 먹기 위해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면서 가축을 도축해 식량으로 섭취하는 데 1년에 닭 500억 마리, 소 10억 마리 정도로 알려져 있다. 세계 인구수는 2021년 78.7억 명에서 2030년 84.3억 명, 2060년 99.6억 명, 2100년 112억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의하면 연간 1인당 육류 소비량은 약43.4㎏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2050년까지 96억 명으로 인구가 증가하면 육류 소비량은 매년 1.3% 증가해 2018년 304만t에서 2050년에는 455만t으로 늘어나게 되고, 결국 고기 수요를 축산업이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또한 1㎏의 소고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곡물 7㎏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현재 세계에서 생산된 곡물의 33%가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여파로 식량생산과 공급이 줄면서 세계 기아인구는 당초 전망보다 2배 늘어난 2억7천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식량안보 외에도 좁은 사육장에서 많은 가축을 사육하면서 발생하는 각종 가축질병이나 항생제 사용 등으로 인한 건강문제 뿐만 아니라 가축에서 나오는 메탄가스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얘기되고 있다. FAO에 의하면 소고기 225g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양이 자동차 55대가 1.6㎞를 주행할 때 배출되는 양과 맞먹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16.5%를 차지하는 온실가스 양 중에서 고기와 관련한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61%가 넘고 있어 고기 소비를 줄여 온실가스 배출을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최근 국내에서도 미래 식량이나 건강, 환경문제 등에 대응하여 대체육을 미래 주요 유망 산업 중 하나로 선정하고 대체육 산업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발표했다. 제3차 농림식품과학기술 육성 종합계획(2020~2024)(안)과 제3차 혁신성장전략회의 안건인 ‘그린바이오 융합형 신산업 육성방안(관계부처 합동, 2020)’에서 중점 연구개발 분야 중 배양육, 식물성 고기, 식용곤충 등의 핵심기술을 선정하여 기술개발을 중점 지원할 계획이다.현재 세계시장에 출시되고 있는 식물성 대체육과 달리 배양육은 동물의 근육줄기세포 또는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하여 배양하고 이를 3D 바이오프린팅으로 모양을 만들어 사람들이 먹는 육류 제품과 흡사하게 만드는 제품으로 작년 12월 세계 최초로 싱가포르에서 배양육 닭고기(너겟)가 식품으로 승인받는 등 전 세계에서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다.배양육은 첨단과학기술이 집적된 제품으로 우리 경북 포항에는 포스텍, 한동대학교 등 줄기세포와 바이오프린팅 기술을 보유한 우수한 연구진과 벤처기업이 다수 포진해 있어 전 세계 미래 먹거리로 부각되고 있는 배양육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특히 내년부터 3D 바이오프린팅 기술을 활용한 인공장기를 시생산할 수 있는 cGMP(current GMP) 및 기업지원시설을 구축할 예정으로 인공장기나 배양육 산업과 같은 바이오프린팅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미래 유망 바이오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이 시설은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에 구축된 포항지식산업센터 내에 조성될 예정으로 바이오프린팅, 줄기세포 및 대체육 관련 유망 기업 유치와 함께 기술사업화 지원과 제품개발 지원에 이르기까지 전주기적 기업육성을 통해 일자리 창출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2021-09-05

가정 내 폐의약품은 약국으로!

이재혁대구경북녹색연합 대표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상비약, 개봉하고 투약했다가 남은 연고 및 안약, 증상이 호전되어 남은 약 등 다양한 이유로 가정에서 약이 방치되어 있는 것을 대부분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그때마다 폐의약품 처리방법을 알고 올바르게 배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2018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병·의원에서 의약품을 처방받아 구입한 경험이 있는 만 19세 이상 성인 1천48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와 청구 자료를 종합해 산출한 추정치에 따르면 버려진 의약품 규모가 2천180억원에 달했다. 또한 55.2%가 쓰레기통·하수구·변기통에 처리한다고 답했으며 심지어 36.1%는 그냥 보관하고 있다고 답했다. 올바르게 약국·의사·보건소에 반환한다는 답변은 고작 8.0%에 불과했다. 사실상 90%가 버려진다고 보인다.우리나라에서는 무분별하게 폐의약품이 버려지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 미국, 벨기에 등의 국가들은 폐의약품 처리에 관한 법령 및 기준을 마련하고 중앙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2017년 관할 지자체에 처리의무를 부여하고 있어 자체적으로 처리계획을 수립·수거·처리 하도록 하고 있을 뿐이다.폐의약품은 현행 ‘폐기물관리법’ 제14조 4에 따라 생활폐기물 중 질병 유발 및 신체 손상 등 인간의 건강과 주변 환경에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폐기물로 정의 된다. 각 지자체에서는 의약품의 안전한 사용 환경조성과 지역주민의 건강보호 및 환경보호를 위해 조례를 마련하고 있지만 현재 228개 지자체 중 83개(36.4%)만이 조례를 제정한 상태이다.폐의약품은 다양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가정에서 하수구를 통해 버려진 폐의약품은 수중 생태계에 쉽게 노출되며 종량제 봉투로 배출된 폐의약품의 일부는 매립되어 유해성분이 침출수를 통해 토양으로 직접 유입되거나 지하수를 통해 하천으로 유입된다.우리가 흔히 산업단지에서 나오는 오염물질이 상당 부분 차지 할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현실은 하천오염물질 중 50%가 의약 물질이다. 항생제는 해조류의 군락구조와 먹이사슬에 변화를 줄 수 있고 기형 어류의 원인이 되며, 내성을 가진 슈퍼박테리아의 확산을 초래할 수 있다. 또 에스트로겐과 같은 내분비계 물질은 어류의 성을 바뀌게 하여 번식능력을 잃게 한다. 소염진통제인 디클로페낙은 무척추동물과 해조류에 독성효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실제 프랑스 베르툴레 지역에서는 2012년에 스테로이드 생산 공장에서 나온 약물로 인해 주변 하류의 물고기 60%가 중성으로 변한 사례가 있다. 우리나라 하천에서도 아스피린으로 불리는 아세틸살리실산과 진통해열제 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 소염진통제로 쓰이는 나프록센, 디클로페낙이 높은 농도로 검출되었다. 또 낙동강 상류 안동호에서 하류 물금·매리취수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22개 지점에서 뇌졸증 치료제 주성분인 가바펜틴이 광범위하게 검출되었으며 의약품이 수처리 과정에서 변질될 수 있어 먹는 물에 영향을 충분히 미칠 수 있다.환경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약물 오남용의 위험도 매우 크다. 향정신성 의약품인 큐시미아·디에타민 등 일부 마약류는 버려지지 않고 식욕억제제 등 다른 용도로 온라인 중고사이트에서 거래되고 있으며 불법유통까지 조장되고 있다.그러니 국민들은 올바른 폐의약품 배출방법을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물약, 시럽형으로된 액체류는 한 병에 모아 새지 않도록 뚜껑을 꼭 잠그고 알약은 포장된 종이, 비닐은 따로 분리해서 알약만 한곳으로 모아 수거함에 버려야 한다. 가루약의 경우 공기 중으로 퍼질 수 있으니 봉투에 담긴 그대로 버리면 되고 연고, 안약, 코스프레이 등 특수용기에 보관된 약은 무리하게 내용물 비우지 말고 그대로 수거함에 버리면 된다.지자체별로 폐의약품 수거방식이 다 달라 주민들에게 혼란을 주고 폐의약품 처리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다. 또한 아직까지 수거 처리체계가 미비하고 홍보도 부족하다. 또한 올바른 폐의약품 수거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다반사이며 알더라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시민단체인 대구경북녹색연합은 라디오캠페인을 통해 가정 내 폐의약품 안전수거를 알리는 캠페인을 가져 시민들에게 알렸고 아파트에도 폐의약품수거함을 비치해 효과를 보았다. 또 대구시 약사회와는 시범약국(60개소) 운영하며 가정 내 폐의약품 안전수거에 앞장서고 있다.하지만 정부에서는 환경부와 보건복지부가 서로 책임소재를 떠넘기고 있고 지자체에서는 환경관련과(자원순환과, 청소과)와 보건과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정부와 지자체가 더 이상 손 놓고만 있지 말고 하루빨리 관련 법을 개정해 이 문제를 개선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2021-09-05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것

조현태​​​​​​​수필가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언어를 가만히 들어보면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못 들은 척하기도 그렇고 그냥 묵과하기도 꺼림칙하다.‘허걱’, ‘가삼’ 같이 사전에도 없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하면서도 불편하거나 의사전달에 전혀 거부감이 없어 보인다.또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단무지’(단순하고 무식하고 지랄 같다)처럼 문장을 이루는 단어 첫 글자만 모아서 말 줄임 형 용언을 마구 만들어 사용한다. 나로서는 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어휘들이지만 저희들끼리는 잘 소통하는가보다.한 술 더 떠서 이러한 말들을 쉽게 알아듣고 다양하게 사용할수록 재치 있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대화라고 착각하는 듯하다.뿐만 아니라 각종 간판이나 유명한 기업체 이름 대부분이 외국어 또는 영문 약자를 버젓이 걸어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어색해 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더 기가 차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 대중매체라고 하는 텔레비전에서조차 토크쇼 프로그램에 ‘이만갑’(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라고 표기한다.뿐만 아니라 외래어로 버블현상, 콘서트, 컨셉, 아이템 같은 단어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을 만큼 토착화하여 우리말처럼 쓰인다.청소년 교육을 맡은 사설학원이나 학교에서조차 은어나 비속어가 난무하여도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도 그런 대화에 동참하고 있다. 오히려 은,비속어를 섞어가며 유창하게 대화하는 현장이 더 친근한 분위기인 것처럼 부추기고 있다.이것이 나 혼자만의 착각에 불과하단 말인가. 언젠가 이 문제를 지인들과 토론하다가 ‘세계화 추세’라는 반격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적도 있다. 한국 상품이나 문화가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려면 영어권 상품이나 문화에 당당히 도전해야 할 일이다. 슬며시 영어를 뒤집어쓰고 영어권 흉내나 내면서 내놓는 상품이라면 이미 반은 굴복하고 들어가는 기분이다.세계화에 대응할수록 품질이 우수해야 승산이 있지 않은가. 품질로 치면 한글만큼 빼어난 언어가 어디 있는가. 이 좋은 글자를 주인인 우리가 변형하고 잘못 사용하여 푸대접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미 수십 년 세월을 두고 이런 현상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이쯤에서 진단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글로벌시대에 지구촌 인류로 살아가는 지금, 외국인에게 정확한 우리말을 해야 마땅하다.어쭙잖게 머리글자만 모아 괴상한 신조어를 만들어 말한다면 어떤 외국인이 알아들을까. 아무리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복잡하지 않기를 바라는 생활이라 할지라도 정확한 표현과 의사전달이어야 올바른 대화라 할 수 있다.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한글이 다른 외국어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지 않으니 반드시 고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어에 조금씩 정복당하여 우리말의 주인이 되지 못할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든다.

2021-09-05

우편 요금이 올랐다

윤영대수필가 지난 9월 1일부터 우편요금이 인상됐다. 2019년 5월 이후 2년 4개월 만에 일반우편료가 380원이던 것이 430원으로 50원이나 오른 것이다. 2001년에 엽서 140원과 규격봉투 170원이었던 것이 매 2~3년마다 20~30원씩 올라 이제 그때 요금의 2.5배가 넘는다.우정사업본부는 ‘소포사업 내실화와 국제물류 활성화 등 수익성 제고와 물류체계 개편, 인력 운영 및 우체국망 효율화 등을 통한 원가절감 노력을 했으나 부득이 요금조정을 하게 됐다’고 밝히며 깊은 이해를 당부했다. 그 요인으로는 모바일 전자 고지 전환에 따른 우편수요 감소와 인건비의 지속적인 상승을 문제로 꼽는다.IT시대의 정보교환과 전달방식의 비대면·디지털 전환 가속화로 우편물량이 크게 감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그에 따른 우편 영업손실이 지난해 기준 1천239억 원이었으며, 우편량은 2002년 55억 통으로 최고치를 보였다가 매년 점차 감소하여 2020년엔 31억 통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우리집만 보더라도 은행카드, 보험, 전화, 전기 등 자동납부 내역과 세금 및 각종 공과금, 회비 납부 고지서가 매달 10개 정도로 우편함을 채우고 있었지만 전자 우편으로 바꾸어 달라는 권고를 따라주어 현재는 배달되는 우편물이 반 정도이다. 이는 종이 사용줄이기 등의 환경문제 해결을 실천하려는 것으로 맑은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이다.우편요금은 우편물 종류에 따른 31개 구간에 50원씩 인상되어 일반우편의 경우 우편엽서는 350원에서 400원으로, 규격봉투는 380원에서 430원으로 올랐다. 이는 25g까지로 A4용지 4매 기준이며 일반 등기는 여기에다 등기수수료 2천100원을 추가하면 되는데, 이 수수료는 이미 작년 7월 1일 1천800원에서 300원 인상되었었다. 미국 일본 중국 등 10여 개 국가에서도 인상하고 있다니 디지털 시대를 맞은 세계적 추세인 모양이다. 개인이 한 통 부치는데 50원 인상은 큰 금액은 아닐지 몰라도 납부 내용을 일일이 고객에게 고지해야 하는 은행이나 단체는 부담될 것이지만 환경보호 차원의 경비를 분담한다는 생각을 하면 어떨까?우편요금이 바뀌면 새 우표가 발행되는데 이번에도 430원 520원 2천530원짜리 세 종류가 발행되었다. 520원 우표는 규격 외 봉투에 편지를 넣어 보낼 때 붙이려는 것이다. 일반 우표 도안은 태극기와 무궁화이고 등기우편용에는 청자 주전자가 디자인되어 우표수집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솔솔한 재미도 주고 있다. 또 우편요금 변동과 무관하게 규격 우편에 영원히 사용할 수 있는 ‘영원 우표’도 있다. 2013년에 처음 발행된 후 2015년에는 50여 종에 가까운 영원 우표를 계속 발행한 적이 있다.나도 우표수집을 즐기고 있어 새 우표가 나올 때마다 우체국에 가서 손편지를 보내는데 침 발라서 부치던 옛 시절을 생각하며 한 장씩 우표를 정성껏 풀로 붙여 보낸다. 요즘 이메일, 카톡 등으로 얘기를 주고받지만 하얀 봉투에 예쁜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어 보내는 일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430원으로 나의 마음을 3~4일 내로 배달해 주는 우편은 가성비도 최고다.

2021-09-05

이사 후기

나루끝을 지키고 선 느티나무. 보금자리를 옮겼다. 나는 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좀처럼 거처를 옮기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살던 집이 하천 확장 공사로 잠기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 주변에 살던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같은 동네로 함께 가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조용한 시골 동네에 살다가 도시로 나왔다. 이사 할 집의 위치가 기찻길 옆이란 소문을 듣고 왔는데, 와보니 숲이었다. 도시숲이라 산속 깊은 곳처럼 새소리 물소리 가득한 곳은 아니지만, 가까운 산에서 산비둘기가 날아와 가지에 앉아 울어 주니 조금은 위로받는다.새로 자리 잡은 동네는 나루끝이다. 포항여고 입구이며 수도산으로 가려고 길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는 신호등이 내 발치에 있다. 새벽엔 아침잠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느린 걸음으로 지나가고, 해가 뜨기 시작하면 머리도 덜 마른 여고생들이 조잘거리며 발걸음을 서두른다. 이 길로 걸어서 출근하는 부지런한 직장인들의 바쁜 걸음걸이와 달리 포항초등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은 발밑에 개미집을 보느라 느즈락 거리다 신호가 바뀌려 하면 후다닥 뛰어간다. 조용한 시골의 아침보다는 시끄럽지만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시간이 잘 간다는 장점도 있다.이곳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동빈내항 근처의 학산역까지 철로가 놓여 있어서 기적 소리로 아침을 시작한 곳이다. 북쪽으로는 우현동에 유류 저장고가 있어서 포항역을 지나서도 철도가 이어져 있다가 걷어내고 그 부지에 숲이 만들어졌다. 유성여고 앞까지 이어진 산책로 곳곳에 마련한 벤치는 사람들이 시간의 여유를 부리는 곳이다. 수런거리는 입김이 내가 선 자리까지 달려와 내 겨드랑이에 쉬던 매미가 떨림을 멈추기도 한다.포항시가 노선폐지로 없어진 철도 구간을 걷기 좋은 숲 공간으로 만든 것은 2009년부터라 한다. 우현동 유류 저장고에서 서산터널을 지나 신흥동 안포 건널목까지 나무를 심고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를 만들었다. 그 길가에 나도 한 자리 꿰찼다. 특히 옛날 우현동 철길 일대는 연탄공장까지 있어 도시의 후미진 곳이었는데, 우리 친구 스물일곱 그루가 철길숲에 이사 오면서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그리고 2015년 KTX 신역사로 포항역을 이전해 기존의 포항역에서 효자역까지도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도가 되니, 이 구간에서 역시 레일을 걷어내 장미를 심고 조형물을 설치해, 기차가 걷던 길이 시민들이 산책하는 숲이 됐다.나와 친구들이 나루끝으로 이사 하는데 힘을 보태 준 이들은 기계면 봉계1리 선래 마을 사람들이다. 그 동네 입구에서 300년이나 마을 지킴이를 했던 내 경력을 인정해서 하천 확장 공사에 휩쓸려 가는 것을 안타까이 여겼다. 내 어깨에 올라 미끄럼을 타며 어른이 되고, 여름이면 내 그늘에 와서 더위를 잊던 어르신들이 앞장서서 살려냈다. 이 뜻깊은 사연을 내 발 앞에 동그란 비석에 새겨넣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키 큰 우리가 언제 불쑥 솟아난 것인지 궁금하지 않도록 말이다.2010년 5월 3일 이사를 왔으니 벌써 십 년이 훅 지났다. 친구들도 근처에 띄엄띄엄 자리를 잡아 뿌리를 내렸다. 십 년이란 시간 동안 메타세쿼이아 친구들이 수북하니 이사와 줄지어 서 있어 열병식하는 군인들처럼 늠름하다. 덕분에 동네가 든든하다. 안심하고 노랗게 둘레에 금계국이 피었다. 데크에는 수로가 있고 사이사이 둥그런 연못도 있어서 연꽃 화분이 차지하고 앉았다. 언제 피었다 지는지 보려고 길게 그림자를 그쪽으로 드리운다.남한에는 1천년 이상 살아있는 화석인 노거수가 64그루 있다고 한다. 그중 25그루가 나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 그중 13건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삼척 도계읍에는 1천년을 사신 할아버지가 살고,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에는 800살인 당숙이 사신다. 모든 노거수 어르신들이 내가 살았던 기계면처럼 시골에 사신다. 멀리서도 그 풍채를 알아볼 수 있게 품이 넓다. 그 모습만으로 이 동네가 유서 깊은 곳이라는 설명을 대신하는 안내장이다.나는 나루끝 도시숲의 팸플릿인 느티나무다. /김순희(수필가)

2021-09-05

울진의 미래 100년을 설계하다

전찬걸울진군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펜데믹 상황이다. 그동안 안전지대로 여겨졌던 울진군도 예외는 없었다.지난 8월 20일부터 확진자가 이어져 나왔다.군은 지역확산과 감염고리를 끊기 위한 선제적 선별검사 등 적극적이고 신속한 조치를 취하며 차근차근 위기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뒤돌아보면 민선7기 시작과 함께 지난 시간은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기간이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지역경제는 끝없이 추락하는 상황에서, 태풍 미탁, 연이은 코로나19사태, 그리고 지난해 두차례의 태풍까지 수많은 위기의 순간들을 맞닥뜨려야 했다.하지만 비온 뒤 땅이 굳어지듯이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며 군민들의 단합된 힘을 새삼 깨달았고, 위기의 순간순간을 견디며 앞으로 울진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갔다. 긴 고민의 결과, 지금 울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원전에 의존하던 지역경제가 자립할 수 있는 기반 마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울진이 가지고 있는 환경과 시설을 활용한 3가지 테마로 미래 100년 울진의 청사진을 그렸다.첫 번째 테마는 울진의 청정한 자연과 잘 갖추어진 스포츠 인프라, 치유 시설들을 활용한 치유, 힐링, 스포츠 관광 활성화이다.현재 운영 중인 금강송에코리움과 함께 백암치유의 숲, 해양치유센터 조성 등으로 치유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고, 지역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우리나라 상위 6% 자연생태계 우수지역인 왕피천과 불영계곡 일원의 국립공원 신규지정을 추진 중에 있다.여기에 울진마린CC, 남울진스포츠센터, 울진실내체육관 등 관내 체육시설 사업 등을 마무리해 스포츠와 관광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인프라를 확충하고, 각종 스포츠대회 개최와 전진 훈련팀 유치로 치유와 힐링 그리고 스포츠가 하나의 테마로 연결돼 울진 관광산업에 새로운 길을 마련해 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미래 울진 100년을 위한 두 번째 테마는 원자력을 이용한 수소산업의 선점이다.오래전부터 수소생산 국가산단(수출실증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온 결과, 지난 2일 경북도 ‘K-원자력 추진전략’에 울진의 그린수소 특화 국가산단과 경주의 SMR특화 국가산단 조정을 핵심전략으로 낙점했다.울진군은 미래 에너지산업을 선도하고, 지역에는 경제적 효과와 고용창출의 기회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되는 그린수소 생산실증단지 조성을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해 나갈 예정이다.마지막 세 번째 테마는 112km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울진 바다를 활용한 해양관련 연구센터 유치 및 신산업 육성이다.수중글라이더 핵심장비 기술개발 운영센터 구축은 지난해 4월 해양수산부 공모에 최종 선정돼 국비를 확보하고, 2024년까지 기술개발과 운용센터 구축을 완료할 계획이다.환동해 심해 연구센터는 기본계획 수립 및 타당성 분석을 위한 용역을 추진 중에 있다.이외에도 해양 디지털 i4.0 재해·안전 감측망 구축, 왕돌초 국가 해중공원 벨트 조성 등의 사업을 진행 해 나갈 예정이다.울진군은 이러한 해양관련 신산업 육성을 통해, 대한민국 해양과학 중심도시로 거듭날 수 있는 주춧돌로 삼고자 한다. 울진은 지금 차별화된 관광산업으로, 미래 에너지산업으로, 그리고 해양과학의 중심지로 미래 100년을 설계하고 있다.희망을 품고 뿌린 울진 미래를 위한 씨앗들이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초록잎을 내밀기 시작했다.앞으로 차근차근 준비하고, 하나하나 착실하게 키워, 든든한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열매 맺기를 바란다.그 길에 끝까지 함께 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2021-09-05

멍하니 앉아서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14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멍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멍때리기’는 ‘멍하게 있기’란 의미의 신조어다. 매년 이어지다가 지금은 코로나19로 중단되었단다. 대회를 기획한 비주얼 아티스트 웁쓰(예명) 양은 이렇게 취지를 설명한다. “어느 날 갑자기 번아웃이 왔어요. 작업을 해도 아무런 능률도 오르지 않고 그렇다고 일을 놓으면 죄책감 때문에 잠을 못 이뤘죠. 그러다 하루는 철저히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제야 일이 손에 잡혔죠. 다른 사람들도 잠깐 자신의 삶을 멈추고 돌아보는 기회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대회는 90분 동안 진행되는데, 평가 항목은 기술점수와 예술점수 두 가지다. 기술점수는 10∼15분마다 심박수를 재는 것으로, 안정적이고 편안한 심박수를 가진 참가자가 고득점을 얻을 수 있다. 예술점수는 대회를 지켜보는 시민들이 ‘멍 때리기’를 가장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스티커를 붙여 평가한다.“멍때리는 걸 시간 낭비로 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래서 대회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어요.”옵쓰 양의 이 말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미국의 뇌과학자 마커스 라이컬은 ‘아무런 인지활동을 하지 않을 때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 된다’는 걸 알아냈다. 뇌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을 때 작동하는 이 영역을 DMN(default mode network)이라 명명하고, 이는 마치 컴퓨터를 리셋(reset)하게 되면 초기설정으로 돌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DMN은 잠을 자는 동안이나 몽상을 즐길 때처럼 외부의 자극이 없을 때 활발한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 의사이자 뇌 영상 전문가인 스리니 필레이 박사도 그의 저서 ‘Thinker Dabble Doodle Try’에서 멍하게 있는 것이 인지적 평온을 가져오고,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창의성을 키워주고, 기억력을 강화시키고, 목표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돕는다고 설명한다. 더욱 효율적인 아이디어와 생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스트레스를 덜 받는 멍하게 있는 시간, 즉 ‘비 집중 모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날마다 들판으로 나가 한참씩 멍하니 앉아 있곤 한다.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벼논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이나 풀꽃이 피어있는 것, 잠자리가 나는 것을 보기도 한다. 일부러 보려고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오관을 열어놓고 앉아 있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몸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이나 떠오르는 생각도 그대로 내버려둔다. 명상이나 좌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잡념을 떨치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아무런 목적이나 의지가 없는 휴식일 뿐이다. 어떤 경지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두뇌의 휴식을 바라는 것도 아닌, 굳이 말하자면 생명의 충일감 같은 걸 누린다고나 할까.그렇게 멍하니 있다 보면 어느새 세계에 대한 왜곡이나 편견이 없어진다. 그 어떤 것과도 이해관계로 얽히지 않고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속하지도 않는다. 부질없는 욕심이나 망집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와 평온을 가질 수 있다.

2021-09-02

한국 PC의 선구자들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코로나 사태로 온라인 회의가 일상화 되고 있다. 강의도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TV로 중계되는 연예행사들도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다.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삶에 필수적인 것이 PC(개인용 컴퓨터)이다.필자가 PC를 처음 본 것은 미국 유학 초창기인 80년대 초반이다. 사실 애플은 1978년에 애플2라는 PC를 내놓기는 했으나 IBM이 1981년 PC를 만들어 빌 게이츠가 만든 MS-DOS라는 운용체제를 내놓은 것을 최초로 여긴다.유학생들은 80년대 중반 PC를 구입하여 숙제나 프로젝트에 사용했다. 당시 PC는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하는 방식이고 속도도 느렸지만 집에서 컴퓨터를 쓴다는 신기함으로 호기심의 상징이었다.사실 PC에 앞서서 1945년 미국에서 개발된 인류 최초의 컴퓨터 애니악(ENIAC)에서 진화된 IBM 대형컴퓨터를 도입한 건 1967년 경제기획원이다. 당시 컴퓨터를 옮기는 데에만 여러 대의 트럭이 동원될 만큼 대형 컴퓨터 시절이다. 한국에 이런 PC와 컴퓨터를 도입하고 정착한 선구자들이 있다.80년대 우리나라 최초로 PC 회사를 설립한 이용태 회장, 70년대 컴퓨터를 도입한 이주용 회장, 정보기술(IT) 서비스 회사를 창립한 김영태 이사장, 정보담당중역(CIO) 롤모델 이강태 명예회장이 그 주인공들이다.정부는 이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4월 과학정보통신의 날에 IT 산업 분야에서 처음으로 특별공로상을 수여했다.필자가 30년 넘게 활동해온 한국경영정보학회(KMIS)에서 이들은 감동적인 기조연설, IT 서비스 비전 특강 등을 통해 우리 IT 산업 역사를 반추하는 계기를 주었다.IT 산업 태동기 때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으로 역경을 헤쳐나간 이런 선구자들은 지금과 같이 한국이 IT 글로벌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 되었다.특히 이용태 회장에 주목한다. 얼마전 포스텍에서 강연하던 이 회장은 꼿꼿이 서서 내내 강연하면서 팔순의 노익장을 과시했다. 대한민국 벤처기업인 1호, 한국 PC의 아버지, 초고속인터넷의 선구자 등 이용태 회장에게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그럼에도 최근에는 ‘인성교육 전문가’이자 유학문화 연구단체인 박약회(博約會) 회장으로 활동을 하면서 구순(九旬)이 가까운 나이에도 직접 현장 강의를 위해 전국을 다니고 있다.정보기술 분야의 선구자였던 그가 인성교육에 빠진 이유는 “인성교육은 흔히 입에 올리면서도 누구 하나 제대로 실천하기 어렵다”며 “훌륭한 기술도 좋지만, 훌륭한 사람을 만든다는 일도 중요하다”고 거침없이 대답했다.사실 이 네분의 IT 선구자들은 은퇴 후에도 개발도상국의 IT 발전, 청소년 대상 무료 소프트웨어(SW) 교육 및 장학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또한 정보화 확산 및 IT 산업 발전을 위해 후학 양성과 저술 활동에 열중하면서 이 회장처럼 인성교육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IT 산업에서는 처음으로 특별공로상을 받은 이들 네 명의 선구자들에게 존경을 보내며 은퇴 후에도 사회에 보람있게 봉사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2021-09-02

정치판의 역선택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역선택(adverse selection)은 시장에서 거래를 할 때 경제주체 간 정보 비대칭으로 인해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쪽이 불리한 선택을 하게 돼 경제적 비효율이 발생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경제적인 분야에서 일어난다.예를 들어 중고차 구매자들이 중고차의 평균적인 품질 수준만 알고 있을 뿐 개별 차량의 품질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가정한다. 반면, 중고차 판매자들은 개별 차량에 대한 품질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구매자와 판매자 간 정보비대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구매자들은 하자가 있는 중고차를 높은 가격에 구매하게 될 것을 우려해 평균 이상의 가격을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반대로 상태가 좋은 중고차를 보유한 판매자들은 평균보다 높은 가격에 중고차를 판매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고품질의 중고차들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품질이 떨어지는 중고차들만 시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제적 비효율이 발생한다. 보험회사도 마찬가지다. 보험회사가 개인에 대해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고 정보를 얻는 데 큰 비용이 든다고 하자. 이 때 보험회사는 일률적인 평균보험료율로 계약을 맺으려 한다. 그러나 위험도가 낮은 보험가입자는 보험회사에 자신을 사고율이 낮은 주체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보험회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결국 사고율이 낮은 ‘양질’의 보험가입자는 시장으로부터 제외되고, 사고율이 높은 ‘불량’한 보험가입자만 보험에 가입하는 역선택이 이루어진다. 정보 비대칭 때문에 일어나는 역선택은 세상 어디에서나 쉽게 목격할 수 있다.현재 대선 정치판에서 회자되는 역선택 논란은 제1야당인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를 뽑는 경선에 상대당인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를 포함시킬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 벌어진 논란이다. 선두주자인 윤석열 전 총장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역선택 방지조항을 넣은 여론조사로 경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홍준표·유승민 등 나머지 후보들은 “유권자들의 교차투표 의지를 무시한다”며 역선택 방지조항 도입을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어느 쪽 주장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릴까.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국민들은 자신의 여론조사상 이해득실에 따라 경선룰에 대해 찬반논란을 펼치는 행태가 마뜩잖을 뿐이다. 어떻든 국민의힘 당헌당규에 대선 경선룰을 수정할 권한이 있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역선택 방지조항을 채택하든 아니든, 또는 중재안을 채택해 시행하면 될 일이다. 중요한 것은 각 후보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무너져가는 나라 경제를 살리고, 집없는 서민의 눈물을 닦아줄, ‘사이다’같이 속시원한 정책·공약을 밝히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다시 심어주는 일이다.삼성그룹이 지난 2012년부터 국내 교육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진행중인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드림클래스’라고 명명한 이유도 미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꿈’이 소중하기 때문일게다. 과연 누가 우리 국민들이 꿈꾸는 나라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내년 3월 대선에서의 선택이 역선택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2021-09-02

조손가정의 비극

최근 이혼이 늘면서 65세 이상 조부모와 만 18세 이하 손자녀들이 함께 사는 이른바 조손가정이 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8년 기준 우리나라 조손가정의 아동 및 청소년 수는 무려 5만9천여 명에 달하고 있다.여성가족부가 10년 전 조사한 자료에는 조손가정 형성의 53.2%가 부모의 이혼이나 재혼으로 조사됐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요즘 세태를 반영한다면 조손가정은 앞으로 더 급격히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조손가정은 경제활동이 떨어지는 노령의 조부모와 살고 있어 경제력이 일반가구에 비해 매우 취약한 특징이 있다. 연소득 1천만 원 미만의 조손가구가 6.9%라는 통계청 자료가 있으나 경제적으로 보면 대다수가 최하위층 수준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면 된다.부모와 떨어져 양육되기 때문에 아동들이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고 사회적 박탈감도 크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불신도 많이 잠재돼 있다. 경제적 곤란까지 겪으니 성장기 아동이나 청소년이 받을 스트레스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게다가 노령인 조부모의 건강 악화와 세대차에 따른 손자녀와의 갈등도 조손가정의 불화 원인이 된다. 대구에서 발생한 고교생 형제의 친할머니 살해사건은 매우 충격적이다. “할머니의 잔소리와 심부름에 짜증이 났다”는 말에 그저 말문이 막혀 멍할 뿐이다.비좁은 공간에서 마주보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지내는 조손가정 내의 갈등이 이번과 같은 비극을 부를 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특히 이번 사건은 코로나19 이후 갈 곳이 없어 갇혀 지내는 우리의 일상적 패턴이 더 자극제가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멍하다.조손가정의 문제, 우리 사회의 관심만이 이런 비극을 줄일 수 있다./우정구(논설위원)

2021-09-02

인연

배문경수필가 창밖에는 장맛비가 내린다. 나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을 엘렌 그리모의 피아노로 듣고 있다. 귀에 익숙한 선율에 조금의 슬픔과 고요히 차오르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단순하고 아름다운 선율 때문일 수도 있고 아련한 시칠리아노 리듬 때문이거나 누군가를 떠나보낸 추억 때문일지도 모른다.작가 최인호를 본 적이 있다. 2011년 말께 동리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해 경주를 방문했을 때였다. 작은 체구의 그가 위트가 섞인 대화를 하며 식장으로 들어설 때의 모습을 기억한다. 더더욱 침샘암을 앓고 있을 때였다. 그는 연단에 서서 수상소감을 밝히며 글 잘 쓰는 작가인 자신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 또한 한 사람의 독자로 그를 위해 기도했다. 오년의 투병이 그를 기다렸고 이후 힘든 시간을 보내고 평화로워졌을 사후에 책으로만 그의 문학세계를 읽을 수 있었다.십여 년이 지난 어제, 지인 몇몇이 모여 그의 에세이집 ‘인연’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암 진단 후 인생이란 길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을 통해 얻고 기억해낸 추억을 가감 없이 혹은 이야기 형식으로 남겨 둔 내용이었다. 한 사람의 생애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연이 만들어지고 흩어지는지를 보았다. 역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천재작가답게 편안하고 솔직담백한 글들이 길고도 짧은 내용들로 가득 차있었다.이름만 대면 알만 한 사람들로 빼곡했다. ‘고래사냥’으로 의기투합했던 배창호 감독과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안성기 배우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다시 떠올리게 하며 다양한 감성을 전달했다. ‘바보들의 행진’, ‘깊고 푸른 밤’과 함께 그 시대를 대변할 아이콘들이 된 영화들을 만나보니 역시 작가의 끼와 입담이 느껴진다. 청바지와 장발의 그 시대가 실로 그립기까지 하다.인연만큼 인생 전반을 휘어잡을 단어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타로 나뉜 인연으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정자와 난자인 부모를 통해 이 땅에 삶의 의무를 띠고 태어난 이후부터 나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만들어지는 혈연관계와 태어난 땅에 의해 국가가 결정되니 인연이란 얼마나 큰 범위며 나를 규정짓는 잣대일까. 침략과 전쟁을 치르며 고통 받던 대한민국이 가난을 벗고 발전해가는 나라로 거듭남에 이 또한 감사한 인연이다.며칠 전, 오년을 함께 근무하던 동료가 직장을 관두게 되었다. 나간다고 할 때는 붙잡으려고 했지만 일이 힘들어 몸피가 반쪽이 된 모습에 잡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붙잡는 손에 힘이 풀렸다. 그래도 빈자리에서 불어오는 찬바람과 곳곳에서 함께 했던 추억들이 떠오르자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람 불고 비 오는 시간들을 함께 견딘 날들이었다. 잠시 공원을 거닐며 지난 시간을 회상해보니 인연이 준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느끼게 했다. 인연은 어둡고 캄캄한 바다라는 인생을 항해할 때 어둠속에서 길을 제시해 주는 등대인지도 모른다. 그 등대를 벗 삼아 힘든 자갈길이며 진흙길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걸을 수 있었다.최인호는 전찻길을 건너다 철로에 떨어진 동생의 벗겨진 꽃신을 집어 들다 전차에 무참히 밟힌 어린 누이를 ‘죄가 있다면 이 가엾은 누이는 이 추악하지만 그래도 아름답고, 이 야비하지만 그래도 거룩한 생을 스스로 포기했다’라고 표현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쓴 작가의 깊은 마음속의 아픔이 아련하게 통점을 자극한다.결국 우리는 삶의 고리를 풀고 자유를 찾아 한 마리 새로 날아오를 때까지 얽히고설킨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더러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잡거나 더러 빈손에 좌절하지 않는 생애를 만든다. 하늘 높이 날던 조나단도 혼자 높이 멀리를 향해 날갯짓을 했을 때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래서 함께 할 때 더 많은 힘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나와 당신의 행보이기도 하다.나른한 봄날의 하루, 한 여름의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음악 속에서 느껴진다.아름다운 삶을 함께 나누어보지 않으시렵니까?

2021-09-01

어우렁더우렁 저 등나무

옛날 아주 먼 옛날, 신라 시대 현곡면 오류리에 열일곱, 열아홉 자매가 살았습니다. 청등·홍등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자매였습니다. 자매는 마음씨도 고와서 온 마을에 칭찬이 자자했습니다.옆집에 씩씩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매는 전쟁터로 떠나는 청년을 담장 너머로 훔쳐보았습니다. 언니는 장독 뒤에 숨어서, 동생은 담 밑에 숨어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습니다. 자매 둘 다 청년을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얼마 뒤,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자매는 너무나 슬퍼 ‘용림’이라는 연못으로 갔습니다. 연못가에서 목 놓아 울던 자매는 꼭 껴안은 채 연못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듬해 봄, 연못가에 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는 한 나무처럼 서로 뒤엉켜 자랐습니다. 나무는 봄이면 청등·홍등 같은 예쁜 꽃을 피웠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자매가 죽어서도 짝사랑한 청년을 위해 ‘등불’을 달았다고 믿었습니다. 그 꽃을 ‘등꽃’이라 이름 짓고 얼키설키 자라는 나무를 ‘등나무’라고 불렀습니다.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청년이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청년은 자매의 슬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숨을 바칠 정도로 자신을 사랑했던 자매를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시렸습니다. 청년은 하루하루 죄인의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결국, 청년도 용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바친 사랑에 목숨으로 보답했습니다.청년이 죽은 뒤 연못가에 팽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청년의 화신이라 믿었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등나무가 청꽃·홍꽃을 피웠습니다. 두 등나무는 힘껏 껴안듯이 팽나무를 감고 올라갔습니다. 세상의 어느 사랑이 저리 지순하며 죽어서도 껴안을 만큼 간절할까요.희붐한 새벽빛을 물리고 등나무·팽나무 아래 서 있습니다. 해가 천 번이나 뜨고 졌는데, 두 나무는 줄기를 줄기차게 뻗었습니다. 팽나무는 몸통 껍질을 떨어내며 가지를 쑥쑥 밀어내고 있습니다. 팽나무가 제 가지에 얼마나 많은 마음을 쏟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굵은 가지와 작은 가지가 얼키설키 어울립니다. 자매와 함께 현생에서 어우렁더우렁 살았다면 얼마나 보기 좋았을까요.이제는 등나무를 봅니다. 등나무는 팽나무보다 줄기가 가느다랗습니다. 그런데 줄기는 작지만 옹골차 보입니다. 등나무 줄기를 만져 보았습니다. 간절함일까요, 절박함일까요, 등나무 줄기는 꼿꼿하면서도 부드럽게 팽나무를 힘껏 타고 올라갑니다.전설의 자매는 한 남자를 놓고 갈등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하며 애달픈 사랑을 안으로 삭히려 애를 썼습니다. 갈등의 한자어는 葛(칡)과 藤(등나무)입니다. 칡과 등나무 줄기는 감아올리는 방향이 다릅니다. 칡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등나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습니다. 갈등은 서로 얽히듯이 뒤엉켜 있는 상태를 말하지요.등나무의 꽃말은 ‘사랑에 취하다’입니다. 알고 나니 사랑에 취한 자매 청등·홍등이 떠오릅니다. 서로의 사랑을 지켜가며 한 발 한 발씩 자랐지요. 그렇게 등나무는 약한 부분을 이끌어주며 곱고 아름다운 꽃을 주저리주저리 피워냈습니다. 자매는 어느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서로가 나누는 사랑을 지금도 온몸으로 보여줍니다.우리는 가끔 후회합니다. 내 감정에 너무 솔직하여 옆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상처를 주는 말은 한쪽에서 한쪽으로 내뱉는 화살과 같습니다. 툭 내뱉지만 맞은 사람은 몹시 아픕니다. 피를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사랑해서 솔직하다고 말합니다. 이순혜수필가 나 또한 그렇습니다. 굽은 나무가 마지막까지 산을 지키고, 고향 하늘 아래 산다는 이유로 많은 말을 거침없이 뱉었습니다. 한 가지에 나고 자랐다는 것만으로 상처를 주었습니다. 사랑하니까, 그럴 수 있다는 구실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습니다. 때로는 밉고 때로는 보기 싫었다는 게 솔직한 말입니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습니다. 갈등하지만 한데 어울려 끊임없이 서로를 타고 등나무 같은 사람.등나무는 등지고 살지는 않습니다. 나무 지지대에 등을 대고 살아갑니다. 어느 시인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그대의 등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등 돌리는 아픈 사연이 있었나 봅니다. 어린 시절부터 추억을 쌓은 벗들이 어깨동무한 등, 아버지의 든든한 등, 우당탕했던 형제들의 등을 생각해 봅니다.등신(藤身)처럼 줄기와 가지가 뒤엉켜 살더라도 등지지 말고. 등을 대면서. 그렇게 어우렁더우렁 살아야겠습니다.

2021-09-01

대안 학교 학생의 간절한 편지와 답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 “선생님, 학생 앞으로 책이 도착했습니다.”처음에는 주말 동안 학생이 집에 두고 온 학습 교재 등을 집에서 보냈구나고 생각했다.“지난주에는 8권이, 이번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74권을 보내왔습니다.”8권, 74권, 출판사라는 말에 필자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이 있는 곳을 보았다. 필자 눈이 닿은 곳에는 책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책을 정리하는 선생님의 모습이 행복했다. 의아해하는 필자에게 선생님은 책이 도착한 사연을 이야기해 주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올해 1학기 초에 실시한 학생회 선거에서 전교 부학생회장에 출마한 ○○○ 학생이 학교 도서관에 신간 도서를 채우겠다는 공약을 발표하였다. 평소 이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고민하던 학생은 방학 때 청소년 도서 출판사에 책 기부를 부탁하는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너무 감사하게도 학생의 간절한 소리를 들은 출판사에서 학생의 부탁에 화답한 것이다.이야기를 다 듣고 필자는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낸 학생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나아가 학생의 외침에 답을 해준, 또 학생에게 아직도 이 나라에는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 출판사들이 존경스러웠다.지난주 몇몇 출판사는 학교로 직접 전화를 해서 학교로 보낼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학생의 요청에 기꺼이 화답해준 출판사는 ‘특별한 서재’와 ‘사계절 출판사’다. 절망과 불신만 가득한 사회에 희망과 믿음의 불을 쏘아 올린 학생이 보낸 메일 전문을 인용한다.“산자연중학교에 책 기부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산자연중학교 전교 부회장 ○○○입니다. 저는 귀사에서 출판한 책들을 즐겨 읽는 학생입니다. 귀사의 책을 기부받고 싶어 메일을 드립니다. 저희는 대안 학교이기에 정부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지 못하고 학교에 도서들을 살 예산이 없어 도서관에 새로운 책이 채워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번 같은 책을 읽어 책이 너덜너덜해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귀사의 도서를 ‘산자연중학교’에 기부해 주신다면 보다 다양한 책을 접하고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앙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물론 신간 도서를 무작정 기부해주십사 요청하는 것은 아닙니다. 출판 과정에서 생기는 파쇄본 또는 폐간 도서를 기부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파쇄본 또는 폐간 도서를 기부해 주신다면, 환경오염도 줄일 수 있고, 귀사가 파쇄본 또는 폐간 도서를 처리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버려지는 파쇄본 또는 폐간 도서로 저희의 지식을 채울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생각합니다. 메일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학생들은 새로운 책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기부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고민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우리 교육은 언제 학생의 외침에 화답할 수 있을까?

2021-09-01

탈레반과 빨치산, 같은 점과 다른 점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미군이 철수한 뒤 4개월 후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점령하였다. 카불 공항에는 아프칸의 정부군이나 미군, 여러 외국기관에 협력했던 아프칸인들의 탈출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탈레반 정권의 무자비한 학살 장면을 떠올리며 필사적인 탈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미군 비행기 바퀴라도 잡고 탈출하려던 난민 행렬 앞에 눈앞이 멍멍해졌다. 이러한 환란 중 IS의 자살폭탄에 의해 미군을 포함한 90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 백명이 부상당했다. 아프칸 탈레반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을 듯하다.탈레반은 1994년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서 결성된 이슬람 수니파 무장 반군 조직이다. 아프칸에는 같은 이슬람이지만 성격이 다른 여러 반군 조직이 혼재한다. 이번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은 2001년 실권한 후 20여 년간 미군과 정부군에 대항해온 반군조직이다. 이들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신봉하지만 겉으로 온건 노선을 표방한다. 이에 비해 알카에다 반군은 지도자 빈 라덴 사망 후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국제 연대를 주장하는 조직이다. 이번 폭탄 테러를 자행한 IS는 자폭, 참수 등 가장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하는 조직이다. 이처럼 모두 같은 이슬람 반군이지만 전략전술의 차이가 커 하나로 통일하기는 어렵다.아프칸의 탈레반 정권은 6·25 전후이 땅의 빨치산을 회상케 한다. 빨치산은 친공 성향의 소수 게릴라 무장조직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우리도 8·15 해방공간과 6·25 전쟁 시 소수의 젊은이들이 빨치산 활동에 가담하였다. 남쪽의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 험악한 산악은 이들의 활동 거점이 되었다. 6·25 전후 빨치산은 정부군과 경찰에 대항하여 산악 전투를 전개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 시기에도 이 땅에는 항일 독립운동 무장 조직이 많았다. 국내의 무장단체 광복회는 친일 세력을 처단하였고, 만주의 의열단과 상해의 한인애국단은 국내외를 넘나들며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좌우익을 가릴 것 없이 일제에서 해방하려는 민족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일제는 이들을 반군으로 간주하였다. 6·25 전후 한반도의 빨치산은 공산주의적 무장 조직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이태의 ‘남부군’은 당시 빨치산의 실상을 그리고 있으며 차범석의 ‘산불’은 빨치산의 비극을 극화한 우수한 작품이다.우리 주변에는 아프칸 탈레반의 참극을 보면서 우리의 안보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나라가 극도로 혼란하며 아프칸의 비극이 우리에게도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베트남의 빨치산 격인 베트콩은 월맹군과 합세하여 베트남을 공산화 시켰다. 다행히 우리는 6·25 전후의 빨치산은 소탕했다. 탈레반, 빨치산, 베트콩의 공통점은 외세의 지배, 정치적 혼란과 부정부패의 공간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프칸의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차량 4대에 실은 돈과 함께 국외로 탈출해 버렸다. 핵심 지도층의 비리가 반정부 세력의 온상이 된 것이다. 우리의 정치 경제의 발전 수준은 이제 탈레반 같은 무장 세력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

2021-09-01

겉옷도 줘 버리라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예수 시대에 어떤 사람이 속옷을 담보로 하여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여 속옷을 빼앗기게 되었다. 유대인은 두 가지 옷을 입고 다녔는데 속옷은 알몸을 가리기 위한 옷이고 겉옷은 덮고 자는 이불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옷이 흔하지만 당시에 옷도 담보물이 되거나 전당물이 되는 품목 중에 하나였다. 이에 대한 율법의 규정은 극빈자의 옷이 전당물이면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그 옷을 돌려주라고 되어 있다. 알몸을 가리고 덮고 자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의한 자들은 옷을 돌려주지 않았고 오히려 벌금으로 농산물 중에 포도주를 받아갔다. 정의사회를 구현하려 했던 아모스는 당시 사회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불의한 자들은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워자고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신다.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지 말고 공의를 쓴 쑥으로 바꾸지 말며,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했다. 극빈자에 대한 담보물을 돌려주는 것이 사회통합을 위한 일이기에 율법으로 까지 규정하였는데 그들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이런 일은 예수 시대에 까지 지속되었다. 속옷을 전당 잡았다가 갚지 못해 고발당하고 속옷을 빼앗기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당연히 율법대로라면 해가 지기 전에 그 옷을 돌려받아야 할 것인데 예수는 채무자에게 황당한 말을 한다. “겉옷도 줘 버려라” 예수의 말대로 겉옷을 줘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채권자는 한 손에 속옷을, 한 손엔 겉옷을 들고 멋적게 서 있을 것이다. 채무자는 알몸을 가리지 못한 수치스런 몸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면서 이제 남은 것은 벌거벗은 몸뚱아리 뿐이니 다음에는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하는 표정으로 서 있다. 이런 장면에서 방청객들은 뭐라고 말할까? “아무리 그래도 옷까지 가져가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율법에는 저당물을 돌려주며 심지어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라고 했는데.”유대인들의 전통에는 벌거벗은 자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벌거벗게 한 자가 부끄럽다고 했다. 앗수르의 공격으로 아스돗 사람이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고 피난 갔는데 애굽은 오히려 이들을 벌거벗겨 엉덩이를 드러내게 하여 앗수르로 돌려보냈다. 성경에는 벌거벗은 아스돗 사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이들을 벌거벗겨 사지로 몰아내는 애굽이 수치스럽고 부끄럽다고 기록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 일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삼년동안 벌거벗은 몸으로 정의를 외치며 다녔다. 겉옷도 줘 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서 있으라고 한 예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만하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정말 부끄러워 해야 할 사람이 누구일까?

2021-09-01

답이 없다는데 웃음이 나오나

장규열 한동대 교수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언론중재법)’이 겨우 파국은 면하였다. 개정안을 다루던 국회가 그 통과 여부를 놓고 대치하던 중, 의장의 중재로 논의를 한 달간 계속하기로 하였다.다툼이 멎어 다행이라지만,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아 바라보는 국민은 답답할 뿐이다. 문제는 어디에 있었을까. 언론을 개혁하겠다는 국민의 의지와 변화를 부정하는 언론의 입장 사이에 국회가 끼인 게 아닌가. 개혁 대상으로 지목된 언론이 목소리를 높이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이왕 확보된 한 달 동안 우리 언론을 개선하여 ‘시민의 눈초리이자 목소리’로서 언론이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생각을 다듬어야 한다.미확인보도와 허위정보, 가짜뉴스와 왜곡보도 등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면서 언론을 향한 시민의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고 독자 대중의 신뢰를 잃어오지 않았는가. 일차적인 책임은 언론 스스로에게 있다. 매체환경이 급격히 바뀌면서 취재와 보도에 있어 속도경쟁이 가속화된 사정을 이해하고 남는다. 그렇다 해도, ‘사실확인’에 충실해야 함은 저널리즘의 양보할 수 없는 본질이 아닌가. 언론지상에서 이따금씩 목격되는 확인없이 또는 취재없이 적혀내린 기사는 기자 스스로 자존감을 훼손하는 결과를 빚게 마련이다. ‘따옴표’ 언론도 사라져야 하고 미확인보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언론기관 내외부로부터 전달되는 유무형의 압력으로부터도 기자는 자유로와야 한다.대선상황을 취재하는 현장의 모습이 전달되곤 하지만, 기자정신은 아직 저널리즘의 핵심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선후보의 기자회견에 준비한 질문을 던진 일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답하기 곤란하다’는 후보의 답변에 기자들은 ‘와’하고 웃음으로 양보하며 물러선다. 이게 말이 되는가. 기자라면 ‘가파른 질문으로 맞서야 하고, 적절한 답을 듣기 전에는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기자는 누구에게라도 겁 없이 맞설 줄 알아야 하며, 또 기자라면 누구라도 겁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눈치를 보며 대강대강 얼버무리는 일은 누구는 못하는가. 당신이 기자인 까닭은 물러설 수 없는 등 뒤의 낭떠러지를 분명히 인식함이 아닌가. 당신의 등 뒤엔 독자가 기다리고 있다. 답을 구하며 물었으면서, 답이 없다는 답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처사는 누구를 위한 언론행위인가.한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바뀌어 갔으면 하는 방향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언론이 먼저 자성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국민은 사실확인에 충실하고 기자정신으로 충만한 저널리즘을 기대한다. 우리 사회에 완벽한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하여 까닭없이 남에게 입힌 피해에는 당연히 중재도 해야하고 구제도 필요하다. 이 한 달을 생산적으로 활용하여 우리 언론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그런 결과, 시민의 알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고 힘있는 자들을 매섭게 견제하는 책임있는 언론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언론이 살아야 나라가 선다.

2021-09-01

남극에서 키운 수박

최저기온 영하 25.6도의 혹독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남극세종과학기지에서 여름과일의 대표격인 수박이 재배됐다. 극지연구소와 농촌진흥청은 남극세종과학기지 실내농장이 본격 가동되면서 기지 대원들에게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고 있다고 1일 밝혔다.수박 같은 열매채소를 수확한 것은 우리나라가 남극에 진출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현재 남극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29개 나라가 83개 기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일부만 신선 채소 공급을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잎채소와 열매채소를 동시에 재배할 수 있는 실내농장을 구축한 연구기지는 미국에 이어 우리나라 남극세종과학기지가 두 번째다.극지연구소와 농촌진흥청은 남극세종과학기지 대원들에게 신선 채소를 공급하기 위한 ‘남극에 실내농장 보내기’프로젝트를 추진해 2010년에 이어 지난해 성능이 대폭 향상된 두 번째 실내농장을 보내게 됐다. 실내농장은 쇄빙연구선 아라온호를 타고 지난해 10월 말 국내를 출발해 올해 1월 기지에 도착했으며, 5월 7일 첫 파종 후 6월부터 매주 1~2kg의 잎채소를 생산하고 있다. 7월 중순부터는 오이와 애호박, 고추가, 8월 중순에는 토마토와 수박이 처음으로 수확됐다.남극세종과학기지에는 현재 17명의 월동연구대원이 체류하며 실내농장에서 기른 신선 채소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먹고 있다. 실내농장에는 발광다이오드(LED)를 인공광으로 이용해 에너지 소모를 최대한 줄이면서 빛의 주기와 세기를 농작물의 종류와 생육단계에 따라 조절하는 기술이 사용됐다.우리나라가 인간에게 극한환경인 극지에서 잎채소와 열매채소를 키워 먹을 수 있는 실내농장을 갖춘 것은 자부심을 가질만한 쾌거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9-01

어떤 인연

김규종 경북대 교수 철없던 시절 피천득 선생의 글 ‘인연’을 읽다가 아쉬움에 잠기곤 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에 나온다는 초록색이 고왔던 우산의 주인 아사코. 왜 선생은 아사코와 작별해야 했을까. 아사코와 이뤄진 세 번의 만남은 각기 다른 색깔과 향기로 다가온다. 소녀에서 처녀로 다시 가정주부로 선생을 만난 아사코. 그들의 마지막은 너무도 적막했다.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인사만 해대는 아사코의 비애 같은 것이 여과 없이 전해지는 것이다. 차라리 마지막 만남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선생은 회고한다. 왜 선생은 굳이 아사코를 마지막까지 만나야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남의 아내가 된 여자를 굳이 만날 필연의 까닭이 있었던가!얼마 전 졸업생이 ‘파안재’를 찾았다. 그는 1년에 두어 번 내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간다. 언젠가 우리가 만난 세월을 돌이키니 30년에 이르는 시간이었다. 우리를 묶어주는 인연의 끈이 무엇인가,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한두 번만으로 인연이 다하는데, 누구는 장구한 세월, 인연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차이가 생겨나는 인연의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내게는 50년 된 친구도 있고, 30년 넘게 이어오는 벗들도 적잖다. 어느 때는 가족보다 더 깊고 편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일도 있다. 무엇이 우리를 오래도록 이어주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인연’을 생각하는 것이다. 붓다는 연기설(緣起說)을 설파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 이른바 인과율로도 해석 가능한 논리가 연기설이다.내가 있으므로 그대가 있고, 내가 소멸하므로 그대 또한 소멸한다. 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고, 그대가 소멸하기에 나 역시 소멸한다. 나와 제삼자의 관계에서 출발은 언제나 ‘나’다. 내가 진정한 자아, 참된 자아일 경우에만 나와 제삼자의 관계, 인연이 시작된다. 30년 세월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나와 졸업생 사이의 관계는 그런 것이리라.만남의 사이가 조금 뜨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를 주고받는다. 짧은 안부 인사로 안녕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는 내게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사제’ 관계라 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나는 스승과 제자라는 말을 아주 싫어한다. 스승 자격도 없는 자가 스승을 참칭(僭稱)함은 정신적 범죄와 다르지 않다.붓다가 설한 인연의 시간에서 사제 관계가 가장 긴 것은 그런 연유다. 붓다에 따르면, 부부가 7천 겁, 부모 자식이 8천 겁, 형제가 9천 겁, 사제가 1만 겁이다. 신생(新生)의 불교가 우뚝 서도록 갖은 노력을 기울인 제자들을 향한 붓다의 사랑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런 제자를 둔 붓다와 저잣거리의 비속한 인간인 나를 동렬에 둘 수는 없는 일이다.가을장마 사이에 찾아온 졸업생과 늦도록 술잔 주고받으며 인생의 장면 하나를 만드는 즐거움을 맛본 유쾌한 하루였다. 신이여, 그를 축복하소서!

2021-08-31

망각

류영재​​​​​​​포항예총 회장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실 것만 같았던 어머님이 멀리 떠나가신 지도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팔월의 마지막 날이 기일인데 당신의 유언을 핑계로 아버님 제사와 함께 모시고 있으니 정작 어머님 떠나신 날에는 막걸리 한 병 들고 휘적휘적 산소에 다녀올 뿐이다. 결국 효나 불효도 생전의 일인가보다. 사느라 바빠서 잊고 지내다가 문득 어머님 생각을 하면 기억을 놓으시던 그날의 충격이 떠오른다. 초저녁에 설핏 주무신 후 깨어나시더니 갑자기 일평생 그토록 애지중지 하던 당신의 아들을 보고 “아저씨!”라 하셨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되는, 지금도 가끔씩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망각이다’라는 줄거리다. 어린이에 불과하던 그 당시에 망각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했을 리 만무인데 어찌하여 아직도 문득문득 그 이야기가 떠오르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거친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호랑이도 아니고 깜깜한 밤길에 마주친 백발 귀신도 아닌 망각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흐르는 세월 따라 소중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 두렵다는 의미일 텐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늪에 빠지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더러는 훌훌 털고 건너야 할 망각의 강도 있는 법이다.망각은 경험했던 일이나 사람, 약속, 물건 등을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버리는 정신적 현상이다. 자신이 한 일도 기억하지 못하면 몹시 당황스럽지만, 정신과 의사들은 인간에게 망각의 기능이 없다면 두뇌의 용량초과로 정신병자가 될 것이라 한다. 마치 잔을 비워야 채울 수 있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으니 기록이 필요하다. 문화유적을 답사하던 중 삼례문화예술촌 모퉁이에서 ‘기록하지 않은 삶은 사라진다.’라는 현수막을 보았다. 진하게 공감되는 말이다. 지역미술사 자료를 알뜰히 모으고 있는 후배가 ‘80년대 포항의 미술’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낸 책을 출간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때의 자료가 내게는 거의 없다. 세를 얻어 살던 작업실을 형편에 따라 여러 번 이사하다보니 끌고 다니기 힘들어 몽땅 불태워버렸다. 자료가 없으니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데, 청춘을 함께 했던 그 소중한 기억들이 가물가물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망각은 우리 삶의 소중한 부분까지도 몽땅 삼켜버리는 악마이던가.사람이니 더러 잊어지기도 하고 잊을 필요도 있지만 잊혀지는 입장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프랑스의 화가 마리 로랑생은 그의 시 ‘잊혀진 여인’에서 “죽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다.”라고 했다.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이 잊혀지는 것이라는 얘기다. 잊고 싶은 기억을 지우려 휴대전화 주소록에서 어떤 이름을 삭제했다. 번호 삭제와 함께 그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면 좋으련만 잊지 말아야 할 기억들은 자꾸 흐려지고, 잊고 싶은 기억은 선명하게 되살아나니 아이러니다. 기억하고 잊어버리는 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잊혀진 여인’은 되지 말아야 한다.

2021-08-31

나는 나를 사랑할 줄 몰랐습니다

1년에 한 번씩은 그런 시기가 온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나 싶은 기분이 몰려드는 시기가. 10대 때에는 공부가 아닌 무언가가,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대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남들과 똑같은 길을 가야만 하는 건지, 내 삶이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타인에 대해 우월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당신들처럼 되는 대로 인생을 살지 않는다는, 진지하게 내 삶을 바라보고 있는 거라는 우월감. 어째서 사람들은 질문을 품지 않는지, 스스로의 인생에 회의하지 않는지…. 그건 그들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20대가 되어서도 그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진짜를 갖고 싶었다. 술에서 깨어났을 때 찾아오는 허무감 같은 행복이 아니라, 나를 충만하게 해줄 그런 기분 말이다. 하지만 30대가 되어서도 그런 건 찾지 못했다. 지금은 또 왜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기분이 몰려들 때면 극심한 회의감에 아무것도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마음은 움츠러들 뿐이고, 단지 초조한 기분에 마음을 갉아 먹힐 뿐이다. 나는 정말 진정한 내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내가 생각해온 삶은, 정말 이런 거였나? 고작?한 때는 이런 질문들이 정말 쓸모없는 질문이라고, 단지 내 삶을 갉아먹을 뿐인 질문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그건 모두 내가 스스로의 나약함을, 나의 무능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드는 생각일 뿐이라고.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내 앞에 있는 할 수 있는 일들과 해야 하는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이면 나는 다시금 10대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극심한 회의감과 우울감, 무기력감이 나를 엄습해오고, 어딘가에 나의 진짜 삶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시달린다. 그래. 나는 결국 버리지 못한 것이다. 어딘가에 진짜 내가, 진정한 나의 삶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말이다. 그렇다보니 나의 다짐들은 늘 쉽사리 무너졌고, 술을 마실 때면 늘 이런 푸념을 쏟아내곤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런 삶을 살 사람이 아니다. 누구 때문에, 혹은 어떤 사건 때문에, 하다못해 어떤 이유 때문에, 나는 나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고…. 누군가를 쉽사리 원망하곤 했다. 어머니를, 아버지를, 할머니를, 나의 누나를, 나의 친구를, 나의 연인을, 그 모든 당신을.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미워했던 것이 아니다. 내가 정말로 미워했던 건, 이런 내 자신이었다.내가 당신에게 쏟아냈던 모든 말들…. 미움과 증오와 욕설로 가득했던 그 말들은, 사실 당신을 향한 게 아니었다. 그 말들은, 모두 나 자신을 향해 했던 말이었다. 무능하고, 무력하며, 화내야 할 사람을 향해서는 화내지 못한 채, 스스로 삭히는 게 버릇이 되어버린 멍청한 나를 향해서 했던 말들이었을 뿐이다. 나는 늘 남들이 세상에 굴복하고, 세상에 휘말려 떠내려갈 뿐이라고 비난하곤 했지만, 그러는 나 또한 그랬을 뿐이었다. 정말로 세상에 굴복한 건 나였고, 휘말려 떠내려갈 뿐이었던 것도 나였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욕하고, 당신을 증오해야만 했다. 모든 것이 당신의 탓이라고 믿어야만 했다. 나는 누구보다 나약한 한 사람이었으므로.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에는 아직 드라마틱한 결말이 없다. 나는 여전히 당신에게 사과하지 못했고,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단지 바뀐 게 있다면, 이제는 내가 당신을 정말로 미워하는 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나의 진심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 이 말을 내가 당신에게 전한다면, 당신은 나의 머리를 한 번쯤은 쓰다듬어 줄까. 아니면 이제는 당신도 나를 미워한 나머지 그런 가증스러운 말 하지 말라고 화를 낼까. 알 수 없다. 이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여전히 저 멀리 있으므로. 나의 생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므로. 그러니, 이 이야기의 결말까지, 나는 무언가를 써나가야만 한다.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단지 살아가고, 살아갈 뿐인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그걸 평범한 삶이라고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의 평범함을 꽤 괜찮은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개인 사정으로 이번 주부터 필자가 강백수씨에서 임지훈씨로 바뀝니다.)

2021-08-31

당신의 가이드 러너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일순 하늘이 흐려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요란한 폭우였다. 고속도로 위에서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애꿎은 핸들만 으스러질 듯 세게 쥐었다.몰아치는 빗물을 와이퍼로 닦아내도 망막에 뿌연 장막을 덧씌운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순간적인 당황과 두려움을 느꼈다. 이토록 궂은 날씨에 운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차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기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었다. ‘이러다 큰일 나면 어떡하지’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그러던 중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비상등을 켜고 서로의 불빛을 의지해서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앞차가 내뿜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았다.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빗길에서 간신히 보이는 비상등은 내게 안도로 다가왔다.거센 빗줄기가 요동치는 희뿌연 세상을 의지해서 헤쳐 나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실로 커다란 위안이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빛을 따라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최근 온라인에서는 패럴림픽 육상 경기가 화제다. 도쿄 패럴림픽의 개막과 더불어 이전 경기에서 선수들이 보여줬던 감동적인 장면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시각 장애인 육상 경기는 시각 장애 등급이 있는 선수와 비장애인 가이드 러너가 한 팀이 되어 경기를 치르게 된다. 가이드 러너는 선수에게 출발선을 알려주고 자세를 잡아준다. 출발 직전 옆에 나란히 선 다음에 손을 끈으로 묶어 서로를 연결한다.가이드 러너는 선수보다 앞서서 달릴 수 없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결승선을 향하여 빠르게 달려 나가는 것은 선수의 역할이며 가이드 러너는 호흡을 맞추고 방향을 지시하며 한 몸과 같은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본디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발맞춰 경기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그간의 노력이 고스란히 눈에 보이는 듯하다. 실제로 가이드 러너는 선수와 생활까지 같이하면서 늘 선수와 함께 호흡을 맞춘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경기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사람들을 더욱 감동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모든 순간을 ‘함께’ 한다는 지점일 것이다. 준비는 물론이거니와 경기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함께 호흡한다. 승리의 단상에도 함께 올라가게 된다. 기쁨을 나누고 격려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환희의 눈물을 닦아주거나 서로를 안아주는 모습을 목도하노라면 서로를 향한 뚜렷한 감정이 느껴지면서 나 역시 가슴 한쪽이 찡해진다.인생의 가이드 러너는 누구에게나 있다. 나는 내가 영원히 젊고 건강할 줄로만 알았고 그것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얻은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 막 태어난 새끼 고라니처럼 나약한 주제에 걷는 법을 스스로 깨우쳤다고 자신한 것이다.그러나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에 나를 나로 만들 수 있게 만들어준 수많은 조력자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 그리고 글을 통해 만난 작가들의 무수한 언어가 지금의 길로 인도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실로 감사하고도 아득해진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가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큰 영향으로 존재하는지에 관하여 쉽게 잊곤 한다. 각자의 세계는 적당히 맞닿아 있을 뿐이며 하나의 끈으로 손을 잇는 것을 거추장스럽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한 삭막함 사이에서 느끼는 균열의 지점 때문에 목적지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 타인을 완전한 타인으로 규정하는 순간 인생이라는 레이스가 외롭고 두렵게만 느껴지게 되기 때문이다.그럴 때면 세찬 비바람 속에서 지치지 않고 깜박이던 자동차 불빛을 떠올린다. 동시에 내 차의 불빛 역시 누군가가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 희미한 빛줄기가 서로의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그러니까 인생의 가이드 러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춘 친구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느 낯선 이가 건네는 다정한 친절 정도로도,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의 진솔한 문장 정도로도, 폭우 속에서 점멸하는 앞차의 비상등 정도로도, 우리는 결승선까지 나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2021-08-31

통곡과 저항, 그리고 용서와 화해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하늘을 우러러 / 울기는 하여도 / 하늘이 그리워 울음이 아니다 / 두 발을 못 뻗는 이 땅이 애달파 / 하늘을 흘기니 / 울음이 터진다. / 해야 웃지 마라. / 달도 뜨지 마라.”‘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시인 이상화가 1926년 4월 『개벽』 68호에 실은 시 ‘통곡(慟哭)’의 전문이다. 이상화는 일본을 거쳐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 위해 1923년 초봄에 동경에 갔다가 그해 9월 관동대지진을 만난다. 지진 발생 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몰려 암살 위협을 겪기도 한 시인은 한동안 일본에 은신해 있다가 인생관이 바뀌면서 프랑스 유학의 뜻을 접고 조선으로 되돌아온다.9월 1일 오늘은 관동대지진 98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본에서는 1923년의 지진으로 인한 피해와 이와 관련된 학살 사건을 통틀어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라고 부르지만, 우리에게는 관동대지진과 관동대학살이 눈과 귀에 더 익다.일본은 지진이 많이 일어나기로 유명한 나라이다. 지질학에서의 판 구조론에 따르면 지각판은 북미판, 남미판, 유라시아판, 태평양판, 아프리카판, 인도-호주판, 남극판 등 커다란 7개의 판과 중간 크기의 6개 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대규모 지진들은 이 지각판의 경계 부분에서 자주 일어나는데, 일본 동쪽 앞바다는 7개의 판 중에 4개의 판이 접하는 곳이어서 빈번한 일본 지진 발생 이유가 설명이 된다.1923년 관동대지진은 20세기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 중에서 9번째로 큰 지진이었지만 해역이 아닌 인구가 많은 동경 가까운 위치에서 발생하였기에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10만5천여 명에 이르고 190만 가구가 집을 잃은, 메이지 시대 이후 현재까지의 일본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끼친 지진으로 기록되고 있다.지진이야 천재(天災)이고 불가항력적이라고 하겠지만, 그 천재를 빌미로 일본은 조선인(그리고 일부 중국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을 대상으로 한 관동대학살 사건이라는 인재(人災)를 벌였다. 지진의 혼란을 틈타 조선인이 강력 범죄와 폭동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떠돌고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불을 지르고 다닌다”와 같은 유언비어가 횡행하자, 일제의 군경과 민간인 자경단은 조선인 대량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로 인한 조선인 사망자의 수는 6천661명(당시 임시정부 발행 독립신문 조사)에서 2만3천58명(2013년 8월 21일자 연합뉴스 기사)에 이른다는 주장까지 있다.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1923년의 재일조선인 숫자가 8만617명이라고 하니 당시 조선인 피학살자 수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이상화 시인이 ‘통곡’을 발표한 1926년 4월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2년 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조선인의 참상을 목격한 시인의 트라우마는 일제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식으로 전환되었을 것이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비롯한 저항시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일본은 지금까지 관동대학살 문제에 대해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해 오고 있다. 시인은 통곡하였지만, 우리는 진상 규명과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은 다음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2021-08-31

밀리테크

미국이 지난달 28일 아프가니스탄 카불공항 폭탄테러 보복으로 이슬람 무장조직인 IS-K의 고위급 표적을 제거한 무기에 특수 개량형 미사일(AGM-114R9X)이 동원됐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미국의 신무기 개발이 또한번 주목을 받았다.이번에 동원된 미사일의 별명은 닌자 미사일이다. 이 미사일은 폭약이 든 탄두가 없고 그 대신 강한 칼날 6개가 장착돼 있다. 표적에 충돌하기 직전 칼날이 펼쳐져 내리꽂히면서 주변 50cm 반경을 모두 파괴한다. 주변 피해를 최소화하고 목표물만 정확히 제거한다. 칼날이 일본의 자객 닌자의 검처럼 생겼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전쟁에서 이기는 자만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남을 수 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이지만 현대전에서는 무기체계의 첨단화가 승패를 가른다. 무기의 우월성이 곧 전쟁의 승자로 이어진다.미국은 9·11테러 후 무인항공기(드론) 시대를 열었다. 무인기와 정밀 유도미사일의 결합을 통해 수천 km밖의 목표물도 아군의 희생없이 정확히 타격할 수 있는 신형무기를 개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세계 군사 강국들의 밀리테크(Militech)가 4차혁명 기술을 기반으로 날로 첨단화하고 있다. 군사(military)와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인 밀리테크는 멀지 않아 상상을 초월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웨어러블 슈트를 입은 인공 로봇이 90kg 군장을 하고 한 손으로 자동소총을 발사하는 모습이 현실화한다는 말이다.첨단화하고 있는 무기개발로 세계 방위산업시장 규모도 급속 증가하고 있다. 인류를 위한 첨단 문명기술의 발달이 전쟁 도구로 전락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어야 겠다. /우정구(논설위원)

2021-08-31

불교로 문화 발전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다

김동하 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5세기 신라는 도시 중심에 적석목곽분이라는 큰 무덤을 축조했다. 무덤의 주인공은 최상위 지배층인 마립간(王)과 권력자로 추정한다. 이 무덤에서는 금관과 금 허리띠, 귀걸이, 목걸이 등의 금제품이 다량 발굴되었으며, 각종 마구류와 토기가 출토되었다.신라는 가야를 비롯해 주변의 작은 소국을 병합하고,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다. 경주지역의 대형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금제공예품이 현재의 대구, 경산, 창녕 등에서 발굴되고, 경주 양식 토기가 인근 지역에서도 출토된 사실은 신라의 영향력이 주변지역까지 넓게 미친 것을 알려준다.신라는 국가의 운영과 유지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를 차근차근 갖추어 나갔고, 비로소 법흥왕(재위 514~540) 때 율령을 만들고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명실공히 중앙집권국가로 성장·발전한다. 신라 왕경의 중심부에는 도시계획이 새롭게 수립되어, 흥륜사, 황룡사, 분황사와 같은 왕실의 큰 사찰이 들어선다.이 무렵부터 신라에는 다양한 문화적 변화가 나타난다. 무덤은 앞 시기와 달리 경주 분지 밖에 입지하고, 그 구조는 적석목곽분에서 석실분으로 바뀐다. 무덤의 구조가 교체되면서 규모도 축소되고, 무덤에 들어가는 부장품도 매우 간소화 되는 경향을 보인다.대신 왕경 중심에 축조된 사찰에는 황금의 불상과 화려한 장식의 불교 의례용품이 가득하고, 사찰 내에서는 각종 생활용기가 제작·사용되었을 것이다. 마립간 시기 각종 부장품을 위해 사용했던 황금은 이젠, 불상과 사찰을 장엄하는데 소비되었다. 다양한 문양의 와전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이 와전(瓦塼)은 사찰 건축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조영된 사찰에는 다수의 승려가 생활을 하며, 때로는 나라를 위해 때로는 왕실과 개인을 위해 불사가 이뤄졌다.7세기에 이르러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왕위를 계승했고, 불교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통치체제를 마련한다. 높이 80미터에 달하는 황룡사 구층목탑은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신라 최고의 건축물이자,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신라인의 원대한 꿈을 반영한 것이다.삼국 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였던 신라가 백제(660년 멸망)와 고구려(668년 멸망)를 병합하고,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호국불교를 바탕으로 한 신라인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삼한일통의 위업(676년)을 달성한 신라는 안정된 국가 기반을 바탕으로 최고의 문화적 역량을 발휘하는 황금시기를 맞이한다. 경덕왕(재위 742-765) 때 세워진 불국사와 석굴암은 불교의 이상향과 종교적 숭고함을 담아 완성된 당대 최고의 건축물이다.이는 동아시아 불교 문화권 속에서 신라불교문화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는 걸작이다. 또한 이 시기 신라에서는 비단길과 바닷길 등을 통해 중국, 일본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문화 교류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신라의 독창적인 문화는 발전·성장하게 된다. 178,936호의 왕경인(王京人·왕이 살고 있는 수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살았던 신라 수도 경주는 1,360방과 55리의 행정 단위로 구성된 계획도시였다. 또한 왕경에는 35개의 화려한 금입택(金入宅·귀족이 살던 저택)도 마련되어 있었다.신라 수도 경주는 더 이상 한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당시 세계 문화 교류의 거점이었던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더불어 국제적 도시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아시아 문화의 허브로 충실히 자리 잡았던 것이다.경주는 역사와 문화의 길을 따라 주변 나라와 함께 소통하고 교류하며 발전해 왔다. 신라 천 년, 그리고 또 다시 천 년을 보낸 오늘날의 경주에는 우리의 탁월하고 소중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있다. 경주 분지 내에 위치한 거대한 왕릉, 신라의 왕궁이었던 월성과 동궁, 그리고 황룡사, 감은사, 불국사 등 경주 전역에 위치한 절터와 남산의 불교 유적…. 하지만 경주는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그것은 바로 천 년이 넘도록 면면히 이어온 경주 사람의 문화적 동질성과 역사성이다. 경주 사람에게 언제부터 경주에 살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자연스레 선조 대대로 살아왔다고 답한다. 그 선조는 바로 천 년 전의 신라인이자 왕경인이다.이것은 신라의 역사가 단순히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날의 경주’와 끊임없이 이어져 소통하고 있다는 어엿한 증거이다. 천 년의 세월 동안 한 자리에서 부단히 그 정신과 문물을 지켜온 경주는 오늘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는 공간이며, 유구하고 위대한 역사의 현장이다.

2021-08-30

흑백의 명암으로 그려진 두 갈래 길(道)이 만나는 곳

1800년 영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다.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해 정순왕후 김씨는 수렴청정에 나서고, 정조 재위 시기 성장한 남인 시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노론 벽파는 명분을 구축한다. 순조 즉위 1년인 1801년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라는 하교를 통해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난다.성리학의 해석과 실천에 있어서 이견을 달리하며 펼쳐졌던 조선시대 당쟁사에서 조선 건국의 근본 이념이었던 성리학이 아닌 다른 이념이 당쟁사에 등장한 것이다. 서양의 학문으로 유입되었던 서학(西學)은 자발적인 천주교 신자를 양산하게 되면서 인륜을 위협하고 무너뜨리는 자들이 믿는 사학(邪學)으로 낙인 찍히며 정쟁세력을 제거하는 명분이 된다.“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정순왕후의 하교에 따라 배교(背6559·믿었던 종교를 배신하는 행위)를 약속하고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사형을 면하고 유배의 길에 오른다. 같은 해 정약전의 조카 사위였던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다시 죄의 경중(?)에 따라 형제지간인 정약전과 정약용은 각각 천혜의 고도 흑산도와 땅끝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는 것으로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는 시작된다.“이 영화는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의 서문을 바탕으로 만든 창작물입니다”라는 자막이 영화 첫 장면에 나온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인 정약전과 장창대의 인연을 ‘자산어보’ 서문에 근거했다는 것이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의 뼈대를 기반으로 감독의 생각을 녹여내며 영화를 만들어간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만들고, 자잘한 사건들을 동원하며 행간을 채운다. 그 중심엔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는 정약전의 대사처럼 ‘자산어보’의 편찬과정에서 함께했던 정약전과 장창대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정약용이 유배생활 중에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수백권의 저서를 남길 동안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포함해 딱 세 권의 책 밖에 남기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창대로 인해 묘한 긴장을 일으킨다.‘목민심서’는 조선 후기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담은 책으로 유교적 정치 질서 속에서 청렴과 애민을 통해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담고 있다. 흑산도 주변의 해양 생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산어보’는 실사구시의 탐구적 서적으로 그 결을 달리하고 있다.정약전은 서학을 철학적이면서 실사구시의 과학적 영역으로 인식한 반면, 정약용은 성리학을 보완하는 영역으로 수용하고 있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정약전이 성리학과 서학의 중간에 위치할 때, 정약용은 성리학을 중심에 두고서 서학을 취한다.창대는 정약전과 정약용, ‘자산어보’와 ‘목민심서’ 사이를 오간다. 성리학의 질서 속에서 ‘사람 노릇’을 위해 입신을 갈망하던 창대는 정약전의 유배로 자산어보의 길과 목민심서의 길 사이에 놓인다. 스승과의 인연으로 학문은 깊어지고, 흑산도와 강진을 오가며 성리학의 이념을 세상에 구현해 보고자 하는 포부는 무르익는다.‘자산어보’와 ‘목민심서’ 사이 이상과 현실, 관념과 실사가 충돌한다. 조선시대를 지탱해 왔던 이념이 새로운 시대에 방향을 제시해 주지 못할 때, 다시 성리학으로 들어가 잃어버린 길을 찾는 이와 성리학 바깥에서 또 다른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 속에 펼쳐진다.‘문을 닫고 손님을 사양하며 옛 책을 매우 좋아(‘자산어보’ 서문에서 인용)’했던 실존인물 창대는 감독의 상상력이 더해져 두 갈래의 길(‘자선어보’의 길과 ‘목민심서’의 길) 속으로 던져진다. 흑산도와 강진을 오가던 창대는 마침내 나주로 나가고, 선택했던 길 속에서 다시 흑산도로 돌아 온다.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창대’다. 다산(茶山·정약용의 호)의 길(道)과 손암(巽庵·정약전 호)의 길(道)을 오가는 창대의 여정을 그린, 여백과 흑백의 명암이 수묵화처럼 그려지는 로드무비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1-08-30

죽장 수해복구 현장에서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동동거리면서 시작된 팔월이 건들바람결에 마무리되고 있다. 설마하던 코로나19 감염 4차 유행이 수도권과 지방 전역에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위중증자와 사망자가 갈수록 늘어나니 초조와 불안이 가중된다. 거기에 지난주 12호 태풍이 몰고온 엄청난 폭우로 포항 죽장면 일대의 도로와 주택, 농경지에 많은 피해를 가져와 시름을 더하고 있다. 코로나의 난맥상에 자연재난까지 겹쳐서 여전히 안절부절 동동거리고 있다.다른 지역이나 어디 먼 곳의 일처럼 여길 때가 많았었는데, 막상 우리 지역, 그것도 자주 드나들던 곳이 하루 아침에 수마에 할퀴고 막대한 피해를 입게돼 피해주민들은 얼마나 애가 타고 허탈해할까? 70년을 넘게 입암리에 살면서 이렇게 물난리가 난 적은 처음이라며 한숨을 내쉬는 분이나, 올해 농사는 접는 셈치더라도 사과나무가 뿌리채 뽑히고 농기계마저 떠내려가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다는 분들의 탄식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피해현장은 억장이 무너질 정도지만 복구의 손길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피해지역마다 각계각층의 봉사와 구호물품의 지원이 이어지고 온정을 나누는 모습들이 늘어나고 있다. 포항시와 유관기관은 군인, 공무원, 자원봉사자 등 수천명의 인력과 수백대의 장비 동원으로 서서히 상처를 씻어내고 복구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필자 역시 포항예총 산하단체 수해복구의 일환으로 지난 휴일 방흥리 수해현장에서 포항문인협회 회원 등과 함께 작으나마 도움의 손길을 보탰다. 간간이 비 내리는 중에 장화를 신고 자갈에 휩쓸린 사과나무를 일으켜 세우며 가지에 쌓인 풀잎 등의 이물질을 제거하다 보니 하루가 금세 갔지만, 한결같이 노력과 정성을 다했다.죽장지역의 폭우로 인한 피해 규모는 조사가 진행될수록 눈덩이처럼 계속 커지고 있다. 죽장면은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 마을이 주로 하천 주변에 형성돼 있어서, 이번에 하천 범람과 도로 유실 등으로 북부지역 마을 대부분이 피해를 본 것으로 보인다. 근 3년 전에 발생한 포항촉발지진 피해조사 마감이 8월말인데, 죽장지역에 한정되지만 폭우 피해조사를 해야 하니 포항시가 이래저래 바람 잘날 없는 나날이 돼가는 듯하다.사람사는 세상에는 풍파와 재해가 끊이질 않는다지만, 태풍이나 홍수, 지진 같은 자연재난은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도 있다. 천재지변을 탓할 수야 없겠지만,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재앙과 불행 앞에서는 누구라도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기상이변으로 인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풍수해 예방책이나 효과적인 대응체계로 인명이나 재산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듯싶다.예기치 못한 폭우로 초토화된 수해현장에 그래도 재해 구호와 복구에 온정의 손길이 타지역에서까지 답지해 아름답기만 하다. 어려움 앞에서는 모두 하나된 마음으로 힘을 합해 협력하고 봉사하며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뻗어야 하리라. 그래서 수해복구를 앞당기고 수마의 상흔을 애써 지워 더이상 동동거림 없는 가을을 맞이하길 기대해 본다.

2021-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