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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영농철 영농 준비 멈추게 하는 나프타 쇼크

쓰레기 봉투 대란으로 시작된 나프타 쇼크가 일파만파다.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로 비롯한 나프타 쇼크는 원료수급 중단에 가격 폭등까지 겹치면서 산업 전반에 파장을 키우고 있다. 나프타는 원유를 정유할 때 나오는 물질이다. 플라스틱, 고무, 합성섬유, 반도체 등 주요 산업 소재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필수 원료다. 사용 범위가 넓어 산업의 쌀이라 부른다. 우리나라는 나프타 수요의 45%를 수입에 의존한다. 이중 77%가 중동산이다. 중동전쟁 이후 가격이 폭등했다. 1월 초 배럴당 50달러이던 나프타가 이달 중순에는 120달러를 돌파했다. 최근 국내 수급부족 상황이 발생하자 정부가 나서 수출을 통제하고, 내수 우선 배분체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수출을 막는다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나프타 분해시설을 운영하는 주요 석유화학업체들은 공장 가동률을 종전의 절반 수준으로 낮췄다. 원유공급이 이뤄지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별로 없는 게 문제다. 쓰레기 봉투 대란처럼 페트병, 포장지, 라면봉지, 각종 식품용기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한 제품들이 시중에서 부족하거나 품귀를 빚을까 봐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영농철을 앞두고 있는 농가에서는 농업용 비닐, 부직포, 플라스틱 육모 상자 등 농업용 자재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리고 있다고 한다. 매년 작목반을 통해 공동 구매하던 비닐이 올해는 물량부족으로 개별 구매에 나서야 하나 도매상에조차 물건이 없어 속이 타들어 간다고 한다. 나프타 수급 사정이 해소되지 못하면 올해 농사는 망칠 수 있다는 비관적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중동사태로 인한 에너지 수급위기가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언급했다. 시중에도 에너지 위기로 인한 4월 위기설이 나돌고 있다. 정부의 실효적인 대책이 나와야 하나 중동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묘안을 찾기가 어렵다. 전쟁이 끝나도 기름값이 당장 안정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매점매석 자제, 대체제개발 등 소비절약을 생활화하는 소비자들의 행동양식이 필요한 때다.

2026-03-31

'공천파동'으로 맥빠진 국힘 대구시장 토론회

국민의힘 대구시장 경선에 나선 유영하·윤재옥·이재만·추경호·최은석·홍석준(가나다순) 후보가 30일 TBC 대구방송에서 첫 번째 토론회를 열었다. 2차 토론회는 오는 13일 열리며, 이후 당원 투표(70%), 일반국민 여론조사(30%) 결과를 합산해 본경선 진출 후보자 2명을 압축한다. 최종 후보는 토론회(19일)를 한 번 더 거친 뒤 당원 투표(50%)·일반국민 여론조사(50%)로 선출(26일)한다. 첫 토론회는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대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는 질문에 최은석 후보는 “CJ 제일제당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뤄온 경영 DNA를 시정에 접목하겠다”고 했고, 홍석준 후보는 “대기업을 유치하겠다”고 했다. 유영하 후보는 “삼성 반도체 팹 2기 유치”를, 이재만 후보는 “라스베이거스 공연장인 ‘스피어’를 유치하겠다”고 공약했다. 추경호 후보는 “대구를 첨단산업 1등 도시로 만들겠다”고 했고, 윤재옥 후보는 “대구산업 구조를 대전환하겠다”고 했다. 이어진 주도권 토론에서는 후보 간 공방이 격화되기도 했다.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는 추경호 후보에게 공격이 집중되는 모습이었다. 각 후보들은 토론회에서 공약 발표와 함께, 날카롭게 서로를 검증하는 시간도 가져 비교적 성숙한 토론문화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최근 발표되는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힘에 대한 대구 민심이 예전 같지 않다. 정당지지율이 민주당과 오차범위 내 접전을 벌이는 경우도 더러 나온다. 당내 극우세력 목소리가 너무 거칠고, 장동혁 대표가 당권장악을 위해 오히려 이들 편에 서기 때문에 합리적 보수 민심이 등을 돌리는 것이다. 특히 대구시장 공천 과정에서 당 공관위가 자의적으로 주호영 의원과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컷오프시킨 것은 악재 중의 악재다. 주 의원과 이 전 위원장 모두 법원에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한 상태라 지금 진행되는 예비경선이 일정대로 진행될지도 불투명하다. 아마 토론회에 참가하는 후보들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 같다.

2026-03-31

노킹스 시위

작년 6월 14일 미국 워싱턴에서는 유례없는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진행돼 국민들 간에 논란이 벌어졌다. 이날 군사 퍼레이드에 동원된 병력만 6600명에 달했고, 전차부대, 블랙호크 헬기, 자주포 등 최신 군사장비와 폭격기 등이 등장했다. 전례가 없던 행사가 치러진 배경은 미육군 창설 2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날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79번째 생일과 겹쳐 행사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반대측은 북한식 군사 과시, 권위주의 상징, 트럼프의 생일파티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미국의 반트럼프 정치단체인 50501은 이날 전국에 걸쳐 트럼프의 권위적 행동을 비판하는 시위를 펼쳤다. 50501은 50개 주에서 50개 시위를 하는 하나의 운동이란 뜻을 담고 있다. 이들이 내건 슬로건은 노킹스(N0 Kings)다. “왕이 없다”는 뜻이다. 미국이 군주제 국가가 아니고 민주주의 국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미국은 건국 당시 영국 왕정에 맞서 독립한 공화국으로 구호 자체가 역사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다. 작년 10월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트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의 모형을 선물했다. 이를 두고 반트럼프 시위대는 “왕이 되고 싶어 하는 트럼프에게 진짜 왕관을 주면 어쩌나” 하며 볼멘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중동전쟁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 전역에서 또다시 대규모 노킹스 시위가 벌어졌다. 주최측은 3300여 곳에서 800만명 이상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라 했다. 지지율 36%로 떨어진 트럼프가 최악의 궁지로 몰리는 것은 아닐까. 이후가 궁금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3-31

어린 왕들과 왕관의 무게

역사는 종종 왕의 이름이 아니라, 그가 쓰기에는 너무 버거웠던 왕관의 무게를 기억한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고려 말 비운의 군주 창왕(昌王)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비극의 대명사로 각인된 조선 제6대 왕 단종과 비교되면서, ‘단종보다 더 가혹한 운명을 맞이한 어린 왕이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창왕은 고려 제33대 국왕으로, 우왕이 위화도 회군 직후 폐위된 뒤 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성계 세력이 내세운 ‘폐가입진(廢假立眞)’ 논리에 휘말리며 명나라의 공식 승인을 받지 못한 채 재위 1년 만에 폐위되는 운명을 맞았다. 사망 당시 단종은 16세로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고등학교 1학년 또래였다. 창왕은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나이인 9세에 생을 마감했다. 두 왕 모두 왕좌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두 어린 왕의 비극은 그들이 죽음에 이를 만한 실책이나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다. 재위 기간 역시 단종은 약 3년, 창왕은 1년에 불과했다.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하거나 국정을 어지럽힐 물리적 시간조차 사실상 없었던 셈이다. 창왕 역시 고려 말 격변기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했다. 아버지 우왕이 강제 폐위된 뒤 신진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왕실의 정통성이 약하다’는 정치적 공격 속에서 결국 아버지와 함께 강화도에서 참수됐다. 어리고 정치적 기반이 약한 단종이나 창왕보다, 강력한 권력과 개혁 의지를 가진 수양대군이나 이성계가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 데 더 적합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서양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어린 군주들의 비극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의 존 1세(1316년)는 태어나자마자 국왕이 되었지만 불과 4일 만에 사망했다. 역사상 가장 짧은 재위 기간으로 기록된다. 영국에서는 이른바 ‘탑 속의 왕자(Princes in the Tower)’ 사건(1483년)이 대표적이다. 에드워드 5세는 12세에 즉위했지만 숙부 리처드 3세에게 권력을 빼앗긴 뒤 동생과 함께 런던탑에 갇혔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숙부가 왕권 안정을 위해 조카들을 제거했다는 가설이 지배적이지만, 후대 왕인 헨리 7세의 배후설 등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되며 지금까지도 영국사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 왕자들 역시 15세기 영국 왕실의 권력 암투 속에서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희생된 사례다. 이처럼 단명한 어린 국왕들의 죽음은 개인의 자질이나 과오와 무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력 투쟁이 격화될수록 정통성은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되고, 보호자나 후견 세력이 없는 어린 왕은 가장 먼저 무너지는 취약한 고리가 되기 쉽다. 하이에나는 무리에서 벗어난 사자, 호랑이 새끼를 가차 없이 물어 죽인다. 자연계의 이런 모습은 ‘힘의 논리 앞에서 정통성과 정의가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냉혹하게 보여준다. 보호막이 걷힌 사자 새끼들이 들개의 먹잇감이 되듯, 정치적 풍랑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존재 역시 결국 왕관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너무 어렸던 어린 왕들이었다. /한상갑 경북부 에디터

2026-03-31

제조업의 미래와 Cell 리더십

제조업의 경쟁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많은 기업이 자동화 설비, 스마트 공장, 데이터, 시스템에 막대한 투자를 한다. 물론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현장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진짜 성과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사람’, 그 중에서도 ‘리더’임을 알 수 있다. 제조업은 다른 산업과 다르게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만든다. 작업자의 작은 실수 하나, 설비의 미세한 이상 하나가 곧바로 품질 불량과 원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작은 조직(Cell)의 리더 역할은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라, 현장을 이해하고 문제를 즉시 해결하는 ‘실행 책임자’에 가깝다. 현장에는 늘 답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개념이 바로 ‘겐바(現場)’다. 일본 제조 혁신의 핵심 철학으로 알려진 이 개념은 ‘문제는 현장에 있고, 해답도 현장에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장을 직접 보고 듣고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만 진짜 문제가 드러난다. Cell 리더는 ‘현장의 CEO’ 역할이고 의사결정, 개선, 성과 책임을 스스로 수행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표준’이다. 제조업은 표준 위에서 움직이는 산업이다. 표준이 무너지면 품질은 흔들리고, 품질이 흔들리면 고객은 떠난다. 리더는 표준을 만드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켜지도록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표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능력 또한 필수다. 이때 필요한 것이 ‘지속적 개선’이다. 흔히 말하는 PDCA 사이클은 계획(Plan), 실행(Do), 점검(Check), 조치(Action)의 반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문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개선은 일부 전문가의 몫이 아니라, 현장 구성원 모두가 참여할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결국 제조업 리더십의 핵심은 사람이다. 설비는 투자로 확보할 수 있지만, 사람의 참여와 몰입은 리더십만으로 만들어 진다. 현장의 작업자가 문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스스로 개선에 나서는 라인과 공정 조직 단위의 Cell 리더십은 강한 현장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반대로 문제를 감추고 지시만 기다리는 조직은 아무리 좋은 설비를 갖추어도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는 ‘현장중심’과 ‘지속적 개선’을 기반으로 최고 수준의 품질을 유지해왔다. 그들의 경쟁력은 설비가 아니라, 현장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개선하는 문화에 있다. 이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리더들이 오랜 시간 쌓아온 결과다. 혁신의 정체를 경험하고 있는 기업은 공장의 라인 단위 리더와 리더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산 라인, 공정 단위 지시와 통제보다 자율과 책임의 현장을 보고, 생산, 품질, 원가 등 문제를 들어내고, 사람을 참여시키는 Cell 리더십이 혁신의 출발점이다. 제조업의 미래는 거창한 전략이 아니라, 오늘 현장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달려 있다. 그 중에는 언제나 리더가 있다. 결국 좋은 설비가 아니라, Cell의 현장 리더가 기업 경쟁력을 만든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

2026-03-31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③유고슬라비즘의 확산

1848년 파리혁명의 영향으로 독일혁명이 연이어 일어나자 중부유럽과 발칸반도 내 민족들의 홀로서기 위한 몸부림이 본격화된다. 이때 헝가리에서 반 합스부르크제국에 대항하는 대규모 무력시위가 발생한다.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합스부르크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크로아티아를 부추겨 헝가리를 치도록 치밀한 계획을 짰다. 크로아티아에 슬라보니아와 달마티아는 물론 자그레브까지 헝가리로부터 독립을 미끼로 군사를 동원해 헝가리를 치도록 종용했다. 크로아티아로선 목이 빠지도록 바라던 바였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합스부르크제국 육군대령 요시프 옐라취치를 크로아티아 왕인 반에 올려 계획을 실행하고자 했다. 이때 세르비아인들까지 합세하면서 두 정치지도자가 처음으로 함께 군사행동을 개시하게 된다. 실로 역사적인 일이었다. 1848년 7월 옐라취치는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진격했다. 이때 세르비아 군대가 후방에서 크로아티아를 지원하면서 헝가리를 압박했다. 러시아마저 제국 내 중소 민족의 반란을 우려해 오스트리아를 돕겠다고 나서면서 졸지에 헝가리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결국 1849년 5월 헝가리의 이유 있는 반항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강대국과의 약속은 휴지에 불과했다. 합스부르크제국은 크로아티아의 소신 있는 노력에도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렸다. 헝가리 지배에서는 벗어났다곤 하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 속국으로 존재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배신감을 느끼기도 전에 당장 민족의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떨어졌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로이센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등장하면서 1862년에는 독일제국은 게르만민족만의 단합을 부르짖는다. 동시에 합스부르크제국의 영토 일부 공국들을 흡수해버린다. 오스트리아의 항전도 독일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면서 오스트리아는 오스만터키와 함께 점차 제국의 기력을 잃어갔다. 오스트리아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러시아의 도전을 받아 또 망신창이가 되면서 긴 세월 동안 유럽을 호령하면서 해가지지 않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다. 19세기 후반,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헝가리로서도 만만하게 변해버린 오스트리아에 도전장을 내밀고 왕실은 하나로 하되, 공동의 군대와 평등한 외교와 경제정책에 합의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이중제국이 탄생한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독립의 꿈에 부풀어 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또 다시 해안도시와 내륙이 갈라지는 아픔을 겪으며 이들의 지배 속으로 들고 말았다. 지겹도록 피지배자의 역사가 이어졌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편입된 슬로베니아와 달마티아를 제외하고 크로아티아와 보이보디나는 헝가리에 끈질기게 괴롭힘 당했다. 이때 강력한 리더십으로 대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주창한 안테 스타르췌비치가 크로아티아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극우 ‘권리당’을 창당해 스스로 당수에 오른다. 그리고 훗날 크로아티아 극우민족주의의 ‘우스타샤’(크로아티아어로 반란이란 뜻의 ‘우스타샤’란 단체가 자주 등장한다)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이제 크로아티아민족주의는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즘까지 확산하면서 세르비아는 물론, 심지어 역사적으로 늘 치고 박았던 불가리아 청년들까지 합세했다.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려 만만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넘보았다.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곳은 모두 세르비아국가라는 대세르비아주의처럼, 이곳 보스니아에 가톨릭인구 18%를 크로아티아 사람으로 분류하면서 이미 오스만트루크 이전 크로아티아 중세왕국이 차지했던 보스니아 브르바스강 서남지역을 장악했던 사실을 상기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도 상황이 바뀌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주의 열정은 탄력받았다. 헝가리는 크로아티아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재정 독립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낀 헝가리는 두 민족을 갈라놓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짰다. 그해 10월 가장 염려하던 보스니아지역을 오스트리아가 완전히 자신들의 영역으로 집어삼키면서 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서가 극에 달했다. 하지만 헝가리의 선택은 소수민족의 탄압, 즉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에 대한 압제였다. 이는 두 민족 사이에 차별화를 가함으로써 갈라놓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헝가리는 이들에게 독립 국가를 세우려 한다는 얼토당토 않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연합정당 내의 세르비아인 지도자들을 잡아들여 고문했다. 이때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였으니, 밖에서 보았을 때 크로아티아인은 방관자로 낙인 찍혀 누명을 쓰게 된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최일선 방어선(세르비아인들이 자치행정을 구성하면서 자신들 의지로 살아가던) 보이나 그라니짜 지역을 크로아티아 행정구역으로 넘기면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정착한 세르비아인 반감이 극에 달했다. 헝가리 계획대로 두 민족 간 첨예한 갈등이 이어지면서 20세기 민족 간 폭력에 당위성이 쌓여가고 있었다. 훗날 또 한 편의 가공할 폭력의 새판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6-03-31

중년의 안녕

생의 정오를 지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 세상은 더 이상 ‘채움‘의 공간이 아니라 정갈한 ‘비움’의 전시장으로 변모한다. 그간 내 삶을 지탱해 온 무수한 탐닉과 안일, 그리고 소중했던 인연들이 하나둘씩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비로소 ‘안녕’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다시 읽는다. 한때 나의 밤을 위로했던 것은 자극적인 음식들이었다. 늦은 밤 수업을 마치고 마주하던 라면의 매콤한 증기, 바삭한 튀김 옷 속에 숨겨진 고소한 육즙, 치즈의 녹진함이 주는 안온함. 그것들은 고단한 나의 하루를 보상받고자 했던 치기 어린 보상 심리였다. 그러나 이제 내 몸은 정직한 가계부처럼 쌓아온 세월의 청구서를 내민다. 혈관 속을 흐르는 엄중한 경고등 앞에서 나는 이 매혹적인 ‘독’들과 작별을 선포한다. 혀끝의 찰나적 쾌락을 위해 생의 총량을 갉아먹던 미련함을 거두고 이제는 덤덤한 채소의 식감과 맑은 물의 투명함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것은 금욕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빈둥거리며 소파에 파묻혀 책장을 넘기거나 스크린의 잔상에 몰입하던 시간은 달콤한 늪이었다. 게으름은 영혼의 휴식이라는 미명 하에 나를 침잠시켰고 움직이지 않는 육체는 서서히 활력을 잃어갔다. 그 활력의 부재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내 몸의 영토를 잠식해 온 소리 없는 퇴조였다. 거울 앞에 서면 낯선 중년의 여인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때는 가볍고 활기찬 보폭을 자랑했던 육신은 중력의 법칙을 이겨내지 못하고 처져 있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관절은 세월의 마모를 하소연했다. 내면의 의지는 육체의 한계에 굴복해 가는 타협이 필요한 시기라 절실히 말하고 있다. 내 몸이 보내는 비명을‘편안함’이라는 기만적인 단어로 덮어두고 있었음을 이제야 시인한다. 나를 지탱하던 기둥들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찰나, 내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절박함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엘리베이터의 편리함 대신 계단의 가파른 정직함을 택했다. 한 계단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차오르는 숨 가쁨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원초적인 박동이다. 식후의 나른함을 뿌리치고 길 위로 나서는 행위는 관성대로 살아가던 어제의 나를 부정하고 매일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수행이기도 하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흐를 때마다 나는 내 몸 안에 고여있던 나태의 앙금들을 씻어낸다. 가장 아픈 안녕은 사람에게서 온다. 내 생의 전부였던 아이들은 어느새 제 깃털을 고르고 스스로의 하늘을 찾아 비상한다. 아이들이 떠난 빈방에 고이는 적막은 처음엔 서늘한 통증이었으나 이제는 그 고요를, 나와 아이들을 향한 성장의 향기로 읽어내려 노력한다. 또한, 삶의 한 페이지를 함께 써 내려갔던 아버지의 예고 없는 작별을 경험하며 나는 만남보다 이별이 더 본질적인 삶의 태도임을 깨닫는다. 떠나보내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아버지가 내 삶에 남긴 무늬를 오롯이 간직하겠다는 다짐이다. 이제 나는 부재의 시간 속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걸어온 긴 궤적을 삶을 지탱하는 옹이로 바꾸어 나가는 중이다. 안녕은 본래 ‘안부’를 묻는 인사이자 ‘평안’을 기원하는 기도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 사랑하는 이들이 남기고 간 여백은 처음엔 메울 길 없는 허공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깨닫는다. 그 빈자리가 있기에 비로소 바람이 통하고 빛이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빽빽하게 들어찬 인연의 숲에서는 보이지 않던 나 자신의 민낯이 관계의 낙엽이 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선명해진다. 중년의 안녕은 결핍이 아니라 정교한 조각이다. 불필요한 인연의 잔가지들을 쳐내고 남은 옹이 진 나무처럼, 나는 이제 홀로 서는 법을 배우며 그 고독의 여백 속에 나만의 사유를 채워 넣는다. /김경아 작가

2026-03-31

공황발작은 병이 아니라 경보다

공황장애라는 말은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러나 공황, 공황발작, 공황장애를 정확히 구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막연한 두려움은 구체적인 이해로 바뀌고 치료의 출발점이 만들어진다. 먼저 공황은 정상적인 반응이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급성 공포와 불안의 반응이다. 밤길을 혼자 걷다가 갑자기 맹수를 마주쳤다고 상상해 보자. 심장이 거칠게 뛰고 숨이 가빠지며 진땀이 흐른다. 순간적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강한 공포가 밀려온다. 이 반응은 병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정상적인 작동이다. 불안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감정이 아니라 지키는 감정이다. 반면 공황발작은 실제 위험이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반응이 과도하게 나타나는 경우다. 불이 나지 않았는데도 경보기가 울리는 것과 같다. 이때 ‘발작’은 증상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사라진다는 뜻이다. 공황발작은 지속되지 않는다. 밀려오지만 결국 지나간다.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공포는 줄어든다. 흥미로운 점은 공황발작의 증상이 ‘죽을 것 같다’는 생각 같은 마음의 반응보다,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가쁘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등 몸의 증상으로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처음에는 심장이나 폐의 문제로 생각하고 병원을 찾는다. 때로는 응급실까지 가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환자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장면이 있다. 병원에 도착해 안정을 취하는 순간, 그토록 심하던 증상이 거짓말처럼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다. 몸이 갑자기 좋아져서가 아니다. ‘이제 괜찮을 것 같다’는 안도감이 신경계를 잠시 진정시키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공황의 본질이 신체의 이상이 아니라, 과도하게 활성화된 경보 반응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공황발작이 한 번 있었다고 모두 공황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이후다. “또 오면 어쩌지”라는 예기불안이 생기고, 몸의 감각을 위험 신호로 해석하며, 상황을 피하기 시작할 때 공황발작은 반복되고 굳어진다. 증상 자체보다 두려움의 해석과 회피가 이어질 때 공황발작은 공황장애가 된다. 결국 공황장애를 키우는 것은 공황발작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공황장애에서 말하는 disorder(장애)는 신체나 정신 기능에 지속적인 결함이 있어 일상 기능으로의 회복이 어려운 상태를 뜻하는 disability(장애)와 다르다. disorder(장애)는 질서가 잠시 흐트러진 상태를 뜻한다. 균형이 깨졌다는 의미이지, 기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즉, 핵심은 기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균형이 흔들린 상태다. 치료는 증상을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흔들린 균형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다. 공황장애를 정확히 이해하면 공황발작은 더 이상 재앙이 아니다. 그것은 뇌의 경보 체계가 과도하게 작동한 결과다. 경보는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읽어야 할 신호다. 신호는 삶을 망가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상태를 돌아보게 만드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지금 당신의 마음에 울리고 있는 경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 신호를 억누르기보다 차분히 이해하려는 순간, 두려움은 줄어들고 삶은 다시 넓어진다. 공황장애는 끝이 아니라, 삶을 다시 세우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사공정규 동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학박사 …………………… 사공정규 33년 차 공황·불안 전문의이자 ‘힐링닥터’로 알려진 그는 증상 호전을 넘어 삶의 근본적 회복을 위한 치료에 주력한다. 동국대 의대에서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진료·연구·교육에 힘썼고,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 메사추세츠 종합병원(MGH)에서 방문교수와 임상연구원으로 활동했다.

2026-03-31

흔들리는 세계의 닻, SDGs와 지정학적 격랑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보름째 계속되고 있다. 압도적 무력을 내세운 미국과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이 당초의 예상과 달리 장기전으로 확전될 기세이다.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지구촌 전체의 안보와 경제 지형을 흔들고 있다. 역사상 모든 전쟁이 그렇듯 전쟁은 언제나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에서 시작되지만 전쟁의 당사국뿐 아니라 인접국과 여러 나라들에도 전쟁의 영향이 미치게 된다. 이 전쟁 또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본토 공격이라는 국경에서 시작되었지만 전쟁의 대가는 결국 세계 전체가 치르게 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과 함께 시작된‘예측불허’와‘일방주의’로 대표되는 트럼피즘에 따른 이란에 대한 전쟁은 인류가 합의한 미래의 이정표인 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지금 전례 없는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우리에게 SDGs는 단순히 환경 보호나 사회적 책임을 넘어, 국가와 기업이 생존을 위해 공유해야 할 ‘세계 질서의 닻’이었다. 그러나 최근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격랑과 그 배후에서 힘을 얻고 있는 ‘트럼피즘(Trumpism)’이라는 거대한 파도는 이 닻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현재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은 단순히 특정 지역의 국지전을 넘어섰다. 세계 경제의 핵심 에너지원인 석유 유통을 옥죄는 전략적 선택으로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현실화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단순히 국경선으로 나뉘지 않는다. 경제 블록의 재편, 기후 위기라는 공동의 숙제, 그리고 급변하는 기술 패권 경쟁까지 마치 거대한 체스판처럼 모든 행보가 서로 얽혀 있다. 즉, 특정 국가 또는 지역에서의 분쟁이 그 국가와 지역의 국경을 넘어 연쇄적으로 여러 나라들에 미치고 세계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국제유가는 이스라엘의 이란 핵시설 공격 이후 이미 10% 넘게 급등했는데, 호르무즈 해협의 유조선 항로 차단이 현실이 될 경우 유가가 더욱 가파르게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다. 이는 세계 경제 전체에 엄청난 악재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와 이로 인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마비는 세계 경제를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가혹한 충격으로 몰아넣고 있다. 에너지 안보는 국가 생존의 문제이며, 당장 눈앞의 유가 급등과 물류 대란 앞에 ‘기후 위기 대응’이나 ‘탄소 중립’이라는 거창한 담론은 사치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의 핵심은 ‘예측 가능성’에 기반한 장기 투자다. 하지만 지금의 지정학적 불안은 모든 예측 모델을 무력화하고 있다. 자원 민족주의가 득세하고, 안보가 경제를 집어삼키는 상황에서 국가와 기업들은 ESG 투자보다는 당장의 생존을 위한 ‘전시 경영’ 체제로 회귀하고 있다.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우리가 쌓아온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탑이 전쟁이라는 현실의 화염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 기조는 단순히 자국 우선주의를 넘어, 전후 세계 질서를 유지해 온 다자주의와 국제 규범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로 나타나고 있다. 전쟁의 명분조차 모호한 이란에 대한 전쟁의 시작은 미국 우선주의와 자국 우월주의 ‘트럼피즘(Trumpism)’의 결과일 뿐이다. 국제기구에 대한 자금 지원 중단, 파리기후협약 탈퇴 시도, SDGs 이행을 위한 데이터 수집의 중단, 그리고 힘에 의한 일방주의적 이란 침공은 글로벌 거버넌스의 붕괴를 예고한다. 트럼피즘의 본질은 ‘글로벌 공공재(Global Public Goods)’에 대한 투자 비용을 기회비용으로 간주하고, 이를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ESG가 기업의 선택을 넘어 시장의 규범으로 자리 잡던 흐름에 강력한 제동을 걸고 있다. “가치보다 이익”이라는 전쟁의 메시지는 규제와 제도를 통해 사회적 책임을 이끌어내려던 기존의 ESG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평화라는 함대를 이끌던 ‘규범의 닻’이 뽑히는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격적인 이란 침공(Operation Epic Fury)과 거침없이 몰아치는 ‘트럼피즘’의 광풍은 국제사회가 지난 수십 년간 쌓아 올린 ‘규범 기반의 질서(Rule-based Order)’라는 닻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작금의 사태는 우리에게 냉혹한 질문을 던진다. “규범이 사라진 정글에서 우리는 안전할 수 있는가?” 세계 질서의 닻이 흔들리면 가장 먼저 침몰하는 것은 한국과 같은 대외 의존형 중견 국가들이다. 우리는 전쟁의 위기 속에서 무너지고 있는 인류 공통의 규범인 SDGs를 다시 세우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지속가능성’이라는 규범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해야 한다. 지금의 혼란은 낡은 질서가 저물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진통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진통의 끝이 황폐화가 될지, 아니면 더 견고한 질서의 재편이 될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닻이 흔들린다고 배를 버릴 수는 없다. 폭풍우가 거셀수록 우리는 더 깊이 닻을 내려야 한다. ESG는 여전히 인류가 가야 할 유일한 생존의 좌표이기 때문이다. /서득수 지속가능ESG연구소장

2026-03-31

TK까지 넘보는 민주당, ‘東進 전략’ 성공할까

민주당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부산·울산·경남(PK)을 넘어 대구·경북(TK)까지 공략하는 ‘동진(東進)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30일에는 그동안 영호남 지역주의의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해온 김부겸 전 국무총리가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하면서 민주당의 ‘동진 전략’ 성공 여부가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김 전 총리는 이날 국회 소통관에 이어 대구 2·28 기념 공원에서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2·28 기념 공원은 1960년 2월 28일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대구시내 8개 고교생들이 일으킨 ‘민주운동’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그가 이곳에서 출사표를 던진 것은 대구시민의 ‘민주정신’을 일깨우면서 ‘지역주의 타파’ 메시지를 함께 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2·28 민주운동은 김 전 총리가 행정안전부 장관 재임 시절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그는 지난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에 출마해 당선되며 지역주의를 깬 상징적인 인물로 꼽힌다. 민주당은 김 전 총리를 당선시키기 위해 ‘대구 맞춤형’ 정책을 지원하는 등 당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정청래 대표는 최근 서울에서 김 전 총리를 만난 뒤 “대구에 필요한 것, 총리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제가 ‘무엇이든 다해드림’ 센터장이 되고 싶은 심정”이라면서 로봇 수도 조성과 신공항 추진 등 이 지역 현안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선거 때마다 민주당이 가장 어려움을 겪은 곳은 TK지역이다. 이로인해 지금까지 이 지역 대부분 선거를 사실상 ‘무전략 기조’로 치렀다. 당연히 결과는 초라했다. 민주당은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서 ‘동진정책’이라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다. 이 전략의 핵심은 PK와 TK지역 현안을 해결하며 지역주의 벽을 허물겠다는 것이다. 최근엔 TK지역 민주당 지지율은 국민의힘과 동률을 기록할 정도로 정치지형이 급변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TK지역 경제발전에 올인할 경우 의외의 선거 결과가 나올 수 있다.

2026-03-30

중동사태 장기화 징후, 비상한 대책 준비해야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전쟁이 한 달을 넘겼다. 이란 수뇌부 제거 등 강력한 진압으로 조기에 종전을 이끌겠다던 트럼프 미 대통령의 공언과는 달리 전쟁은 혼미상태다. 28일 예멘의 친이란 이슬람 무장단체인 후티가 이스라엘을 공습하고, 이란전쟁에 참전을 선언해 전쟁의 조기 종식 가능성은 점차 멀어지는 분위기다. 전문가들도 전쟁 당사국 간 입장 차이가 너무 커 종전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을 한다. 특히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길어지면서 국제유가는 이미 100달러선을 훨씬 넘어섰다. 게다가 후티가 홍해와 아델만을 연결하는 중동의 원유 수송로 바브엘만데브 해협 봉쇄를 검토 중이라는 얘기가 나돌면서 세계 경제가 긴장하고 있다.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세계 해상 원유물동량의 10%가 통과하는 지역이다. 호르무즈에 이어 바브엘만데브마저 봉쇄된다면 원유 수송을 비롯해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 재앙적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번 중동사태는 1970년대 오일쇼크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합친 것보다 더 충격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중동전쟁이 장기화한다면 원유 수입의 60% 이상을 중동지역에 의존하는 우리나라가 받을 충격은 상상 이상이 될 수 있다. 국제유가 폭등에 따라 정부는 석유최고가격제를 도입했으며 최근에는 공공기관 차량 5부제도 시행에 들어갔다. 원유 수입이 막히면서 석유화학계의 나프타 부족으로 식품포장재, 쓰레기 봉투, 비닐, 의료용 플라스틱 등 소비재 시장 전반에 불안 조짐이 감돌고 있다. 4월 위기설 속에 일부 지역서는 종량제 봉투 품귀현상도 보인다고 한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방송에 나와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130달러선으로 오를 경우 차량 5부제를 민간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했다. 자동차 운행을 제한하는 차량 5부제는 1991년 걸프전 이후 한 번도 국민이 경험해보지 못한 제도다. 전쟁의 장기전이 불러올 국민 불편과 시장의 불안감을 최소화할 정부의 치밀한 비상 대책이 필요하다. 에너지 절약에 동참할 국민의 협조는 필수다.

2026-03-30

청계천 답사길

일요일 오후 두 시. 서울문학기행 수업 답사를 두 번에 나누어 치른다. 학생 숫자가 아주 많다, 가 아니다. 답사는 스무 명 넘으면 여러 가지 곤란하다. 날은 흐리다. 비는 오지 않는다고 했다. 보신각 앞. 두 시 정각에 거의 다 모였다. 이곳은 종로 네 거리.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심장’이다. 종로 1가와 2가 사이, 그리고 조계사 방향과 롯데 백화점 방향 교차로다. 이곳에 예전에 화신상회가 있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아무 용무도 없이 ‘구보’는 백화점 앞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승강기에는 발을 들이지 않고 나왔었다. 지금 화신상회 자리에는 종로타워 33층 빌딩이 서 있다. 앞에, 길가에, 작은 표지석 하나만 남아 있다. 박길룡이 설계했다고. 박흥식이 설립했다고. 그 앞에 ‘바르게 살자’고 커다란 돌비가 섰다. 둘이 바뀌어야 할 것 같다. 거기서 대각선, 영풍문고 쪽에는 녹두장군 전봉준 좌상이 서 있다. 여기가 옛날 전옥서 자리다. 전봉준이 여기 수감되어 있다 1895년 4월 24일 서소문 형장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전봉준보다 열여섯 살 아래였던 같은 고장 강일순은 무장봉기 대신 ‘해원상생’을 추구했다. 두 사람의 길이 그렇게 달랐다. 광교 다리 앞에서 구보의 또 다른 소설 ‘천변풍경’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우리는 덮개를 벗어버린 새 청계천을 걷는다. 청계천을 복개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에서 1961년 사이라는데 더 찾아봐야 하겠고, 1970년대 중반에 완료되었다 한다. 이 위로 도로를 냈고, 또 그 위로 고가도로도 냈다. 제2차 ‘청계천 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나갔다 전경에 쫓겨 청계고가도로 위로 뛰던 생각이 난다. 2005년 10월 1일, 이명박 시장 때 복원이 완료된다. 잉어가 몇 마리 한가롭게 헤엄친다. 수표교 위로 올라와 ‘전태일기념관’으로 간다.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을 참 잘 쓰셨다. 학생들은 지난 번 팀과 달리 활기찬 데도 기념관을 돌아보고는 표정들이 어둡다. 이 세대들에게도 전태일은 의미 있는 존재일까?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그날’은 1970년 11월 13일이었다. 갈증의 표정들을 한 학생들을 재개발지구 안에 뜻밖에 멋진 카페로 모신다. 꼬르꼬바두. 사전을 찾아본다. 포르투갈어라 한다. ‘등이 굽은, 혹이 있는, 구부러진’ 등의 뜻. 지명이기도 하다는데, 브라질 브라질리우를 상징하는 산이란다. 산이 등이 솟은 듯 둥글게 굽어 있어 생긴 이름이란다. 근처에 또 카페 ‘420’이 좋았다. ‘4’밑에 ‘2’와 ‘0’을 써 놓은 것이 꼭 ‘삶’이라고 읽으라는 뜻 같은 곳. 도시 재생 프로그램이 필요한 곳에 박혀 있는 카페들이 나그네들 휴식에 안성맞춤이다. 이제 나는 학생들을 세운상가까지 이어진 좁은 ‘마찌꼬바’ 골목으로 데려간다. 김기덕 영화 '피에타‘의 배경일 것 같은 곳. 청계천·을지로 일대, 세운상가 뒤편에 이 철공장 골목이 많다. 지금은 웬 상패 가게가 이렇게 많은지. 사람들은 상을 주고받는 걸 좋아한다. 세운상가 올라서 종묘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우리는 종묘 뒤편으로 아스라이 펼쳐진 산(山) 세상을 본다. 우리는 세속에 살고 저 먼 산에는 산사람, 선인(仙人)들이 산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6-03-30

‘고문기술자’가 받은 표창장

지난 25일 군사독재 시절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이근안이 사망했다. 그는 경찰관 재직 때 공안 부문에서 일했고, 비공개 요원으로 방첩업무에 참여하면서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가들을 고문한 것으로 유명했다. 불법 체포와 고문 혐의로 수배된 이근안은 10여 년을 숨어 지내다가 1999년 10월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자수했다. 이후 재판을 거쳐 징역 7년과 자격 정지 7년형을 선고받았다. 인간의 육체를 물리적으로 압박함으로써 정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행위인 고문은 현대사회로 들어서며 명백한 범죄로 지목된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한 다수의 인물은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피폐를 오랜 시간 호소했고, 죽기 전까지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1970~1980년대 이근안은 청룡봉사상과 내무부장관 표창 등을 받았다. 정통성 부재한 독재자의 입맛에 맞는 짓을 부끄러움 없이 행했기 때문이다. 참담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SNS를 통해 ‘국가폭력 범죄자에게 준 훈·포장 박탈은 당연한 조치’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생전에 이근안이 16개의 상훈을 받았다는 내용의 기사를 공유하면서다. “국가가 국민이 맡긴 권력으로 국민의 생명과 자유, 인권을 침해한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배제해 행위자가 살아있는 한 반드시 처벌받게 한다”는 건 이 대통령의 변함없는 의지이기도 하다. 반성 없는 역사는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온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경찰이 이근안을 포함해 독재정권 시절 고문 등으로 불합리하게 받은 수사관들의 서훈 취소를 위한 전수조사에 착수했다고 한다.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3-30

포스코 수소환원 전환, 철강 혁신시대 연다

포항제철소가 추진해왔던 수소환원제철소(HyREX) 부지 조성사업에 대해 정부의 허가가 떨어짐에 따라 포스코의 친환경전환 사업이 본궤도에 오를 전망이다. 국토교통부는 지난주 포항국가산업단지 계획 변경 및 지형도면을 고시하고, 산단계획 변경안을 승인했다. 이번 승인으로 포스코는 제철소 인근 공유수면을 매립해 수소환원제철소 설비 부지를 확보하는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다. 수소환원제철소는 기존의 고로방식에서 탈피해 수소를 환원제로 활용해 탄소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친환경 기술이다. 포스코의 친환경설비 전환은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탄소 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필수 생존전략이다. 앞으로는 자동차, 조선, 건설 등 전 분야에서 저탄소 요구가 강화될 것으로 보여 저탄소 경제로의 전환은 불가피한 시대적 요구다. 포스코는 이번 결정으로 포항시 남구 송정동 북측 해상 일대 135만㎡(약 41만평)을 매립할 수 있게 된다. 빠르면 상반기 중 매립공사 발주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산업시설 용지가 새롭게 조성됨에 따라 포항국가산단의 개발기간도 기존 2030년에서 2041년으로 연기 변경된다. 특히 포스코의 HyREX를 통한 친환경 기술 도입은 국내 철강산업의 저탄소 전환을 선도한다는 측면과 더불어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서도 포스코의 역할이 매우 클 것으로 보여 관련 업계의 기대도 크다. 포항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클 것으로 예상이 된다. 공유수면이 매립되면서 늘어난 산업시설 용지를 활용할 수 있는데다 수십조 원의 대규모 투자로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이바지할 것이란 전망이다. 앞으로 모든 산업이 탄소를 얼마나 줄이느냐에 따라 기업의 생존이 갈라질 수 있다.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소 조성은 철강산업의 구조적 혁신의 신호탄일뿐더러 국가 제조업의 경쟁력을 지키는 버팀목 역할도 기대가 되는 부분이다. 철강산업의 새로운 혁신 시대를 이끌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소 조성에 대해 지역사회도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2026-03-29

주호영 변수···국민의힘 대구시장 선거 비상

주호영(대구 수성갑) 의원이 지난 27일 법원에 낸 '대구시장 후보경선 공천배제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이 기각되면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는 결심을 굳혀, 국민의힘 대구시장 선거가 격랑 속에 휘말렸다. 가처분 신청에 대한 재판부 판단은 이르면 이번 주 안에 나온다. 국민의힘 예비후보 6명의 합동토론회가 30일부터 시작되는데, 만약 법원이 주 의원의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게 되면 대구시장 후보 선출 일정도 모두 뒤틀리게 된다. 주 의원은 지난 2016년 총선에서도 당이 경선 기회를 주지 않자 무소속으로 대구 수성을에 출마해 당선된 뒤 복당했다. 주 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려면 5월 4일(지방선거 30일 전)까지 국회의원을 사퇴하면 된다. 만약 그가 4월 30일까지 사퇴할 땐 이번 지방선거에서 대구 수성갑 국회의원 보궐선거도 함께 치러진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주호영·한동훈 연대’ 가능성도 거론된다. 주 의원이 대구시장에 출마하면, 보궐선거 자리에 한 전 대표가 나온다는 시나리오다. 주 의원은 이와 관련 “무소속들끼리 서로 협력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주 의원이 무소속 출마를 하게 되면, 대구시장 선거는 3파전(민주당 김부겸 전 국무총리, 국민의힘 후보) 구도가 된다. 김 전 총리는 30일 대구에서 출마 선언을 한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대구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돕는 ‘다해드림 센터장’이 되겠다”고 할 정도로, 대구시장 선거에 당력을 집중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힌 상태다. 현재로선 국민의힘은 누굴 후보로 내든 어려운 선거를 치르게 됐다. 한국갤럽이 지난 27일 발표한 정당 지지율 조사를 보면 국민의힘은 19%로 민주당(46%)에 한참 뒤진다. 대구·경북도 27%로 동률을 이뤄 대혼전 상태다.(한국갤럽 홈페이지 참조) 대구 민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여론조사다. 만약 주 의원이 실제로 무소속으로 출마해 3파전 구도가 되면, 이번 대구시장 선거에서 처음으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2026-03-29

물을 생각하며

지난 3월 22일은 ‘세계 물의 날’이다. 나날이 중요도가 커지는 물의 가치와 소중함을 돌이켜봄으로써 생명의 원천인 물을 생각해보자는 취지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이란 공격으로 석유의 가치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석유가 2차 산업혁명 이후 현대문명 발전과 유지에 필수적이지만,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물보다 더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노자는 ‘도덕경’ 8장에서 물의 속성과 가치를 강조한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아니하며, 많은 사람이 꺼리는 곳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물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다.” 태양계 유일의 물의 항성 지구별의 70%는 물로 이뤄져 있다. 이 가운데 고작 2% 정도만 우리가 음용수(飮用水)로 쓸 수 있다고 한다. 그 2% 물은 대부분 지하수, 빙하, 만년설 등지에 분포하며, 강과 호수처럼 직접 사용 가능한 범주에 속하는 물은 많지 않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물 확보를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이 한창이다. 티베트에서 발원하는 동남아 최대의 메콩강 상류 남창강(南昌江)에 중국 정부는 12개의 댐을 건설하여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5개국의 생명줄을 위협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 인구의 18%를 차지하지만, 가용(可用) 담수 자원은 세계의 6%에 불과하여 대표적인 물 부족 국가로 분류된다. 그리하여 중국의 669개 도시 가운데 440개 도시가 물 부족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각한 물 부족 현상을 극복하려고 중국 정부는 곳곳에 대규모 댐을 건설하고 있으며, 그 일환이 메콩강 상류에 건설된 12개의 댐인 것이다. 문제는 메콩강에 의지해 살아가는 6000만 이상의 인구가 나날이 말라가는 메콩강을 바라보며 한숨짓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규모 댐이 건설됨으로써 어족자원과 어획량이 급감하고, 퇴적물 공급 중단에 따른 토양 생태계가 파괴되며, 생활용수 부족과 지반 침하 및 염해(鹽害)까지 발생하고 있다 한다. 이로써 피해 5개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해결책 모색이 시급한 실정이다. 다행한 일은 우리나라의 경우 한반도 최북단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비롯한 모든 하천이 우리 강역(疆域)의 역내(域內)에 자리하기에 국제적인 분쟁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여름철에 강우(降雨)가 집중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는 국가가 전혀 아니다. 석유는 나지 않지만, 물 하나만큼은 그야말로 복 받은 나라인 셈이다. 그런데 어떤 정신 나간 전직 대통령이 불과 2년 만에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에 십수 개의 댐을 만드는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200만 년 이상 흐르면서 현재의 수계(水界)를 이룩한 대자연의 소중한 네 개의 강에 시멘트 철근 콘크리트를 무지막지하게 처넣은 것이다. 우리나라가 만성적인 물 부족 국가라는 거짓말을 진리인 양 호도(糊塗)하면서 말이다. 지난 23일 기후에너지환경부가 4대강 재자연화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반가운 일이다. 정부는 구체적인 재자연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기구에 대해서도 시민사회와 긴밀히 협의해 구성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우리 강이 다시 살아나는 경사(慶事)가 있으면 한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3-29

건강증진 부담금

국민건강증진법에 따라 우리나라도 담배에 건강증진부담금을 부과한다. 궐련형 담배는 20개비당 841원, 전자담배는 1ml당 525원 부담금이 붙는다. 담배는 폐암 발병의 주된 원인이다.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건강 유해제품이며, 세계보건기구는 매년 약 600만명이 흡연으로 사망한다고 한다. 정부가 담배에 건강증진부담금을 부과하는 것은 이러한 인체 유해성을 인정하고 국민건강을 돌보자 하는데 근본 목적이 있다. 같은 논리로 설탕에 건강증진부과금을 부과하자는 논의가 과거부터 있어왔다. 당류가 과도하게 들어간 음료와 가공식품에 대해 건강증진부담금을 부과하자는 것인데, 지나친 과당 섭취는 비만, 당뇨병, 심혈관질환 등의 위험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도 설탕세 도입을 권고한다. 실제로 노르웨이, 핀란드, 헝가리, 영국 등 세계 50여 개국이 설탕세를 도입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21년 국회에 가당음료부담금을 부과하는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이 발의가 됐으나 폐기된 바 있다. 설탕에 부담금을 부과하는 일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음료에만 한정할 것인지 과자, 빵 등 다른 가공식품까지 확대할 것인지 부과 대상 범위부터 혼란스럽다. 세금이 부과되면 가격을 올려야 하니 식품업계나 자영업자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또 국민들이 얼마나 공감해 줄지도 의문이다. 최근 정부가 담배에 부과하던 건강증진부담금을 OECD 평균 수준(9869원)으로 올리는 것과 담배에만 국한된 건강증진부담금을 주류로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국민건강을 위한 정책임에는 틀림없으나 국민 정서와의 괴리를 좁히는 게 문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3-29

철강 전환 시대, 도시의 역할

포항국가산업단지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27일 ‘포항국가산업단지 산업단지계획 변경’을 고시했다. 기존계획의 변경이지만, 내용이 주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지금까지 포항국가산업단지는 대단위 철강공업 육성과 연관 산업 유치를 통한 중화학 공업단지 조성이 목적이었다면, 이번 변경에는 ‘수소환원제철 설비 도입을 통한 탄소 저감’이라는 문구가 별도로 명기됐다. 산업단지의 존재 이유 자체가 바뀐 것이다. 특히 북측 공유수면 일대에 약 135만㎡ 규모의 수소환원제철 용지가 신규 조성된다. 개발기간도 2041년까지로 연장됐다. 종전과 같은 설비 확장이 아니라, 철강 생산 방식의 근본적 전환을 전제로 한 장기 프로젝트라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수소환원제철은 석탄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철을 생산한다. 고로 방식이 이산화탄소를 대량 배출하는 것과 달리, 수소환원제철은 물이 생성되기에 탄소 배출량은 거의 제로로 수렴한다. 철강산업이 ‘친환경 산업’으로 전환되는 상징적인 기술이다. 다만 이 기술이 성공하려면 막대한 투자, 대량의 수소 공급망 구축, 전력 인프라 확충, 안전 문제 해결까지 복합적인 조건이 동시에 충족돼야 한다. 그런데도 세계 각국이 주목하는 것은 이 또한 다른 모습의 ‘경제전쟁’이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중인 여러 전쟁처럼 에너지와 자원은 국가 경쟁력으로 직결된다. 탄소 규제라는 새로운 세계질서로 인해 철강은 많은 산업 가운데 하나가 아닌 유일무이한 ‘경제안보 산업’으로 재편되고 있다. 미국이 철강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일본제철의 US스틸 매수에 민감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철은 여전히 자동차, 조선, 건설, 인프라 등 거의 모든 산업의 기초소재이면서 그 나라 제조업 근원 경쟁력의 뿌리다. 이런 흐름 속에서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 전환은 일개 기업의 투자가 아니라 포항의 미래를 결정짓는 방향 전환이다. 지금의 고로들은 언젠가는 멈출 수밖에 없다. 이런 중대한 기로에 선 시점에서, 새로운 생산이나 투자가 이어지지 못하면 포항경제에 미래는 없다. 다행히 이번 국토부 고시로 시작될 전환사업이 안착된다면 포항은 친환경 철강의 중심지로 재도약할 수 있다. 관건은 기술이 아닌 ‘환경’이다. 기업이 투자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동안, 시민과 행정이 어떤 환경을 줄 것인지가 문제다. 수소환원제철은 기업 홀로 완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인허가, 부지 조성, 전력 공급, 규제 정비, 지역 수용성까지 모두 한 방향으로 맞물려 돌아가야만 한다. 이 부분에 포항은 많은 실패를 겪어왔다. 이제 포항에 필요한 것은 군림이 아닌 지원하는 행정이다. 산업 전환기에는 속도가 생명이다. 기업이 계획한 투자와 활동할 길을 조금만 앞서 열어 주면 된다. 포항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재선, 삼선을 위한 겉모습의 성과에 집착할 것인지, 구조 전환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뒷받침할 것인지. 차기 시장을 꿈꾸는 정치인들 역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 행정은 앉아서 통제나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과 기업이 원하는 것을 서서 돕는 ‘플랫폼’이다. 공무원을 ‘퍼블릭 서번트(public servant)’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철강이 바뀌고 있다. 당연히 포항도 바뀔 때가 왔다. /김진홍 경제에디터

2026-03-29

미술관은 왜 늘 낮에만 열려 있는가

대부분의 미술관은 오전 10시에서 오후 6~7시 사이에 운영된다. 이 시간표는 오랜 기간 유지되어 온 일반적인 형태로, 행정 효율과 시설 관리 측면에서 편리한 구조라 하여 지금까지 운영되어 오고 있다. 특히 공공 미술관은 공무원 근무 체계와 연동되어 있어 보안·안전·시설 인력이 동일한 틀 안에서 움직인다.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운영 시간을 갑자기 바꾸는 일은 쉽지 않을 거라 생각된다. 그러나 도시의 생활 리듬은 과거와 분명히 달라졌다. 직장인, 자영업자, 맞벌이 가정 등에게 평일 낮 시간은 가장 바쁜 시간대다. 미술관은 열려 있지만 실제로 방문하기 어려운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수도권에 비해 예술·문화를 접할 기회가 적은 지방 도시에서는 그 간극이 더욱 크게 체감된다. 한정된 전시와 프로그램마저 낮 시간에 집중된다면, 문화를 즐기는 기회는 특정 시간대에 자유로운 일부 시민에게만 돌아간다. 이 문제는 전면적인 구조 개편이 아니라 점진적 보완의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 1회나 월 2회 평일 야간 개관을 시범 운영하면 기존 체계와 충돌 없이 실현 가능하다. 특정 요일은 오후 9~10시까지 개관하고, 전시 연계 프로그램을 저녁에 배치해 ‘퇴근 후 미술관’이라는 새 선택지를 마련할 수 있다. 국내의 국립현대미술관은 수요일과 토요일 야간 개장을 하고 있고, 해외 사례에서도 이러한 유연한 운영은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주었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금요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과 파리의 퐁피두센터(매일 오전 11시에서 저녁 9시)는 저녁 시간 운영을 통해 관람 문화를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 시켰다. 중요한 점은 단순히 관람 시간을 늘린 것이 아니라, 도시의 저녁 동선 속에 미술관을 자연스럽게 포함시켰다는데 있다. 지방 도시에서도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문화 정책이 아니라 지역 경제와 연결될 수 있다. 저녁 시간대 관람객이 늘어나면 전시 관람 이후 식사, 카페 이용, 서점 방문 등으로 동선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체류형 소비로 확장될 수 있으며, 주변 상권 활성화에도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술 중심의 야간 소비 구조와 달리, 미술관을 중심으로 한 저녁 움직임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세대 혼합이 가능한 문화 흐름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적 의미도 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 의견을 구조적으로 수렴하는 일이다. 생활 패턴별 수요 설문조사와 시범 운영을 병행한다면 행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실효성 있는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 미술관의 운영 시간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다. 그것은 이 도시가 누구의 삶을 기준으로 문화를 설계하는가에 대한 선택이다. 특히 문화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제한된 지방에서, 저녁 시간의 미술관은 시민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낮 중심의 전통을 유지하되, 도시의 하루가 마무리되는 시간까지 함께 숨 쉬는 방향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지역 문화의 저변을 넓히고, 도시의 활력을 되살리는 하나의 현실적인 해법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3-29

수건 개기

친한 친구의 이야기이다. 수건을 걷어 소파 위에 두었다. 털어서 널지 않은 수건이 삐뚤삐뚤하다. 아내는 각을 잡아 빨래를 널거나 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차피 또 꺼내 쓸 것이고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은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평시에 수건을 탁탁 털고 비틀린 부분을 펴 각을 잡아 갠다. 어느 날부터 아내가 빨래를 걷어와 개려고 하면 남편은 그냥 두라고 이야기하며 본인이 한다. 어설프게 개어놓은 수건이 있으면 가져다 다시 접는다. 아내는 잔소리를 하려다가 참는다. 수건에서 슬그머니 겉옷으로 속옷으로. 이제 모든 옷을 개는 것은 남편 몫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슬쩍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행복하냐고. 남편은 당신이 항복하면 된다고 대답했다. 친구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아직도 남편이 왜 그런 답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에 오는 내내 그 두 단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행복과 항복은 획수 하나의 차이지만 의미는 상당히 다른 말이다. 행복은 복된 좋은 운수.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반면 항복은 패배를 인정하고 적이나 상대편의 힘 아래 자신을 두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바라고 또한 행복하냐고 묻기도 잘 한다. 행복에는 늘 쟁취나 비교라는 단어가 뒤따르는 것 같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소유하고 더 건강하고 높은 학업 성취나 지위를 가지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좋은 학교를 들어가고 안정된 직장을 갖고 다른 이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는 것. 주변 사람보다 조금 더 넓은 집에서 살며 안온한 삶을 즐기는 것. 그것이 행복의 잣대였다. 항복은 굴복과 복종의 의미도 있지만 소유의 해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포기를 전제로 해야 한다. 그건 또 수용과 내려놓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움켜쥐고 높아지려고만 하는 내 안의 나 앞에서 항복하기 위해서는 내려놓음은 필수적인 단계이다. 나의 불완전함을 알고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내 안에서 작게 피어나는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삶의 여러 어려움 앞에,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내려놓음을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우리들 속에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함께 앞서고 싶다는 욕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이에서도 우리는 배려나 양보보다는 나를 앞세우곤 한다. 아니 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는 더 이기려고 하고 상처를 주며 나를 각인시키려 한다. 그렇게 쟁취하면 행복한 듯이 말이다. 혹시라도 양보하면 큰 손해를 보는 것 같이 느끼기도 한다. 친구는 빨래를 널 때도 탁탁 털어 널지 않는다고 했다. 그 시간이 의미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란다. 남편이 각을 잡아 수건이나 옷을 개는 모습이 처음엔 시간 낭비처럼 보이기도 했단다. 남자가 뭘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단다.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잔소리하기 보단 받아들이기로 했단다.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남편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만약 그런 문제로 서로 작은 신경전을 벌였다면 그건 무척 피곤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생활 속에서 느끼는 행복은 소소한 것에서 내려놓음이 시작되었을 때 비로소 작은 싹을 틔우는 것 같다. 가까운 사이에서 자기주장을 더 강하게 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본다.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주장만 하는 것은 상처가 되어 상대의 마음에 쌓이게 된다. 그것이 굴복이나 복종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때론 한 발 물러나는 것이 삶에선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굴복이 아닌 나를 내려놓음으로 시작되는 내 안의 작은 항복은 옆의 사람과 타협이나 협상을 할 기회를 주게 된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이며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시발점이다. 하루를 행복함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안의 작은 항복들이 쌓여야 한다. 그렇게 항복이 쌓여갈 때 행복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남편의 빨래 개는 모습이 이제는 때로 귀엽게 여겨진다는 친구의 얼굴 위로 떠올랐던 미소가 생각난다. 당신은 오늘 행복합니까 항복입니까. /전영숙 시조시인

2026-03-29

AI 성적표를 읽는 법-벤치마크의 진실과 AI 기술 지형도

지난 열한 번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공지능(AI)이 어떻게 학습하고, 언어를 이해하며, 눈과 귀를 열고, 그 기술을 누가 공개하고 감추는지를 살펴봤다. 그리고 이번 기사가 1분기의 마지막 순서로 작성된 것이다. 오늘은 AI의 성능을 판단하는 기준인 벤치마크(Benchmark)의 실제 의미를 알아보고, 지금까지 칼럼을 통해 함께 살펴본 내용을 하나의 지형도로 완성해 보고자 한다. ‘AI 성적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학교에서 학생의 실력을 가늠할 때 시험을 치른다. AI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서로 다른 회사가 만든 수십 개의 AI 모델 중 어느 것이 더 우수한지를 객관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연구자들이 설계한 표준화된 시험이 바로 벤치마크다. 대표적인 것이 MMLU(Massive Multitask Language Understanding)인데, 대학 수준의 의학, 법률, 역사, 물리학 등 57개 분야 문제를 풀게 해 모델의 폭넓은 지식을 검증한다고 한다. GPQA Diamond는 한 단계 더 올라가 박사급 수준의 화학·물리·생물 문제로 전문 추론 능력을 시험하고, 코딩 능력은 HumanEval과 LiveCodeBench로 측정하는데, 파이썬(Python) 함수를 실제로 짜게 해 코드가 올바르게 작동하는지 자동으로 채점한다. 수학은 AIME나 MATH 벤치마크가 널리 쓰인다. 이들이 ‘필기시험’이라면, ‘실기시험’에 해당하는 것이 Chatbot Arena(챗봇 아레나)다. 미국 UC버클리 연구진이 창설한 이 플랫폼은 두 개의 익명 AI 모델이 낸 답변을 실제 사용자가 블라인드로 비교하고 투표하는 방식으로, 3월 기준 누적 투표 수가 563만 건을 넘어설 정도로 방대한 실사용 데이터를 바탕으로 순위를 산출한다. 체스에서 쓰는 Elo 레이팅 방식을 도입해 모델의 상대적 서열을 실시간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숫자 중심의 필기 벤치마크보다 실제 사용자 체감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AI를 직접 쓰는 수백만 명의 사용자들이 채점관이 되는 셈이다. 2026년 3월, 지금 성적표는 어떻게 생겼나? 2026년 3월 현재 챗봇 아레나 1위는 Anthropic의 Claude Opus 4.6 Thinking으로, Elo 점수 1504를 기록하며 선두를 지키고 있다. 같은 회사의 Claude Opus 4.6(비사고 모드)이 Elo 1500으로 2위에 바짝 뒤따르고 있어 Anthropic이 1·2위를 동시에 점령한 형국이다. Google의 Gemini 3.1 Pro Preview가 Elo 1493으로 3위, xAI의 Grok 4.20 beta가 4위에 자리 잡았다. 한 달 전 1위가 이달에는 2~3위로 밀리는 일이 반복되는, 그야말로 AI 춘추전국시대인 것이다. 한편, 독립 AI 평가기관 Artificial Analysis가 발표한 Intelligence Index v4.0에서는 Google의 Gemini 3.1 Pro Preview와 OpenAI의 GPT-5.4가 57점으로 공동 1위를 차지했고, Claude Opus 4.6(53점)과 Claude Sonnet 4.6(52점)이 바짝 뒤따라 사실상 통계적 동점을 기록했다. 이 벤치마크는 실제 업무 에이전트(GDPval-AA), 통신 에이전트(τ²-Bench), 코딩, 과학적 추론, 지식 등 10개 항목을 4개 영역으로 묶어 균등 가중치로 평가한 것이다. 그만큼 AI 성능의 격차가 좁혀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용 시 용도별로 보면 결과가 달라진다. 단일 1위보다는 ‘어떤 상황에 어떤 모델을 쓰는가?’가 훨씬 중요한 질문이 된 것이다. 마치 팔방미인 한 명보다 분야별 전문가를 상황에 맞게 기용하는 방식이 더 효율적인 것처럼, AI 모델도 목적에 따라 선택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사용자에게는 적잖은 부담이다. 우리나라도 주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글로벌 AI 성능 평가기관 Artificial Analysis가 공개한 ‘지능 지수 v4.0’에서 네이버클라우드, 모티프테크놀로지스, LG AI 연구원, 업스테이지 등 국내 주요 AI 개발사들의 대형언어모델이 글로벌 비교 순위표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특히 네이버클라우드의 HyperCLOVA X SEED Think는 통신사 고객 지원 시나리오 기반 에이전트 평가(τ²-Bench Telecom)에서 87%를 기록하며 국내 모델 중 최고 점수를 받았다. 글로벌 최상위권과의 격차는 분명하게 있지만 일단, 같은 무대에 올라섰다는 사실 자체가 이전과는 다른 장면이다. 한국 AI의 도전은 이제 막 시작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벤치마크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되는 이유 앞서 말한 다양한 벤치마크 ‘성적표’를 그대로 믿는 것은 위험하다. 학교 시험에도 ‘족보’가 있듯이, AI 벤치마크에도 그와 같은 고질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데이터 오염(Contamination)이다. 인터넷상의 거의 모든 텍스트를 학습 데이터로 사용하는 LLM의 특성상, 벤치마크의 문제와 정답이 훈련 데이터에 포함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부 모델은 벤치마크 테스트 세트를 학습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접해 실제 추론 능력과 무관하게 높은 점수를 기록하는 것으로 연구 결과 확인됐다. 수학적 원리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문제 패턴을 기억해 정답을 뱉어내는 ‘영리한 앵무새’ 현상이다. 두 번째는 벤치마크 게임화(Gaming)다. 모델이 특정 벤치마크에서 높은 점수를 얻는 데만 치중하면 실제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오히려 저하될 수 있다. 실제로 Meta가 LLaMA 4의 성능을 공개할 때 일반에게 공개된 버전이 아닌 대화에 특화된 실험용 버전을 벤치마크에 사용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논란이 됐고, Meta의 수석 AI 과학자였던 얀 르쿤(Yann LeCun)이 훗날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이는 AI 기업이 자사 기술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벤치마크를 활용하는 관행과 무관치 않다. AI 업계에서도 ‘성적 부풀리기’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세 번째는 범위의 협소함이다. 대부분의 추론 벤치마크는 정답이 명확한 수학이나 코딩 과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수 문제를 풀 수 있다고 해서 AI가 실제 세상의 모호한 상황을 헤쳐 나가거나 인과 관계를 추론하거나 사람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완벽한 파이썬 코드를 짜는 모델이 “사직서를 써야 할까요?”라는 질문에는 맥락 없는 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교 연구팀은 NeurIPS 2025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AI 개발자들이 사용하는 수천 개의 벤치마크 중 약 5%가 라벨링 오류·모호한 질문·논리적 불일치 등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AI 산업 전반에 걸쳐 신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제학의 ‘굿하트의 법칙(Goodhart’s Law)‘이 AI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 측정 지표 자체가 목표가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좋은 지표가 아니라는 교훈이다. 벤치마크도 진화하고 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벤치마크 자체도 변화하고 있다. Artificial Analysis v4.0은 MMLU-Pro, AIME 등 기존 벤치마크를 일부 제거하고, 6000문항 42개 주제를 다루는 AA-Omniscience, 실제 지식 노동 과제를 평가하는 GDPval-AA, 박사급 물리 추론을 시험하는 CritPt 등 신규 평가를 도입했다. 실전 업무 능력을 중심으로 재편하는 추세다. 챗봇 아레나는 정적인 데이터셋 기반 벤치마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플랫폼으로, 사용자들의 변칙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질문이 쏟아지기 때문에 암기된 지능만으로는 높은 점수를 유지할 수 없다는 강점이 있다. 단순히 시험 답을 외운 AI는 이 실기시험을 통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벤치마크는 AI를 선택하는 출발점은 되지만 종착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IDC의 AI 전문가는 “조직은 각자 모델 성능 주장을 직접 검증해야 하며, 실제 운영 환경이나 데이터, 프롬프트의 차이만으로도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숫자를 보되, 자신의 업무 환경에서 직접 테스트해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법이다. 포항의 제조기업이라면, 글로벌 1위 모델이 자사의 현장 용어와 공정 데이터를 제대로 이해하는지를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 어떤 벤치마크 순위보다 유용한 판단 기준이 된다. 벤치마크 순위는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일 뿐이며, 나의 상황에 맞는 모델을 직접 써보는 경험이 가장 정확한 판단의 기준이 될 것이다. 1분기 결산- AI 기술 지형도 완성하기 지금까지 12주에 걸쳐 그려온 AI 기술 지형도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점 하나하나가 이제 선으로 이어졌다. AI는 데이터에서 패턴을 찾는 기계다(2주차). 그 핵심은 인간의 뇌를 흉내 낸 신경망이고(3주차), 트랜스포머 구조가 이를 언어에 적용해 ChatGPT를 가능케 했다(4주차). AI는 텍스트를 숫자 덩어리인 토큰과 임베딩으로 변환해 의미를 파악하며(5주차), 같은 AI라도 질문 방식에 따라 답의 질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6주차). AI가 종종 거짓말처럼 보이는 답을 내놓는 것은 악의가 아니라, 확률적으로 그럴듯한 단어를 고르는 구조적 이유 때문이다(7주차). RAG 기술은 AI에 외부 지식을 실시간으로 연결해 이 한계를 보완하고(8주차), 파인튜닝은 모델 자체를 개조하는 것이며 프롬프팅은 기존 모델을 잘 설득하는 기술이다(9주차). AI는 이제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음성·영상을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모달 시대로 진입했고(10주차), AI를 만드는 기업들은 기술을 공개하는 오픈소스와 감추는 클로즈드 두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11주차). 그리고 오늘, 그 성능을 재는 잣대인 벤치마크의 의미와 한계를 이해했다(12주차). 열두 개의 퍼즐 조각이 완성됐다. AI는 ‘생각하는 기계’가 아니라, ‘패턴을 학습한 확률 계산기’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그 계산의 정교함이 이미 인간의 전문 영역을 넘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AI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원리를 알아야 하고, 원리를 아는 사람은 더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더 좋은 질문이 더 좋은 답을 만든다. 1분기 동안 우리가 함께 쌓아온 것이 바로 그 원리다. 숫자는 안내자이지 심판관이 아니다. 지형도를 아는 사람만이 길을 잃지 않는다.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3-29

‘하고 싶은 말’보다 ‘해야 할 말’을 해야

정당 정치에서 공천의 중요성은 상상 이상이다. 원로 정치인들은 ‘헌법을 고치는 일보다 선거법을 고치는 게 어렵다’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렵고, 중요한 게 공천이다. 한국 같은 양당제 구조에서는 양대 정당 공천 없이는 당선이 어렵다. 그만큼 유권자는 정당의 공천을 믿는다. 정당은 주민이 원하는 후보를 선별해 내고, 유권자는 좋은 후보를 추천해 주는 정당을 믿고, 지지한다. 이런 유권자의 신뢰를 개인적, 정파적 이익을 위해 팔아먹는 일이 빈번하다. 선거제도나 공천제도의 공정성을 높이는 기술보다 유권자의 신뢰를 악용하는 정치 술수가 더 빠르고 교묘하게 진화했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이 그랬다. 그래도 방향성은 분명했다. ‘이재명의 민주당’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노골적이었다. 그런데 요즘 국민의힘은 이도 저도 아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욕심은 많은데, 미련하다. 지난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당 지지율은 46%인데, 국민의힘 지지율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19%다. 탄핵 직후 정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국민의힘 지지율이 가장 높은 대구·경북에서조차 27%로 민주당 지지율과 같다. 부산·울산·경남의 경우 국민의힘 지지율이 26%로 민주당(35%)에 한참 뒤처진다. 이런 상태로는 두 달 뒤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이 당선을 기대할 곳이 거의 없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주 여러 방송 인터뷰에서 “서울과 부산에서 승리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선거를 잘 치러냈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기준”이라고 말했다. 적절한 평론이다. 하지만 당 지도부가 여유롭게 평론이나 할 시점인가. 선거 패배의 책임을 미리 회피한다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다른 지역 국민의힘 후보들은 이유도 모르고 일격을 당한 꼴이다.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나. 이재명 정부가 잘해서 이 지경인가. 아니면 국민의힘이 자책골을 넣고 있는 건가. 장 대표가 꼽은 서울과 부산은 겨룰 만한가. 한국갤럽 조사에서 서울은 민주당(45%)이 국민의힘(18%)을 압도한다. 가장 유력한 후보인 오세훈 현 서울시장은 “18% 지지율로 어떻게 선거하느냐”라면서 “빨간색 입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부산·충북 등 전국이 명백한 기준도 없는 컷오프 논란, 공천 잡음으로 난장판이다. 경기도는 후보가 없어서 쩔쩔맨다. 빨간 옷이 아니라 흰옷을 입고 선거운동 하겠다고 한다. 부산도 여론조사에서 무너졌다. 대구는 후보가 너무 넘쳐서 문제다. 만만해 보인 모양이다. 그런데도 리얼미터 조사에서 김부겸 전 총리(민주당)가 어떤 국민의힘 후보도 이긴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나마 표 차가 가장 적었던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주호영 의원만 콕 찍어 컷오프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시장을 선택하는 건 시민인데, 시민의 뜻과는 거꾸로 간다. 장 대표는 지지율 하락을 오히려 ‘절윤(絶尹)’ 탓이라고 한다. “왜 우리 당은 저를 중심으로 뭉치지를 못하나”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정당 내 세력 간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민주당도 ABC론을 놓고 시끌시끌하다. 쉽게 말해 명분과 실리로 갈랐다. 그렇지만 국민의힘 균열에는 명분도 없고, 실리도 없다. 이명박·박근혜 갈등은 오죽했나. 그런데도 2012년 이명박 정부 말 한나라당 지지율이 폭락했을 때,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총선을 진두지휘해 승리했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 상징색도 빨간색으로 바꿨다. 민주당 압승이 예상되던 총선에서 과반을 차지했다. 박 전 대통령의 2004년 ‘천막당사’, 2012년 대통령 선거의 ‘경제민주화’ 어젠다 선점도 국민이 믿도록 진심을 보여줘 성공한 사례다. 극단적인 감정풀이는 당장 속이 후련할지 모른다. 그러나 선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권자는 ‘하고 싶은 말’을 해도, 정치 지도자는 ‘해야 할 말’을 한다. 정치인이 극단 주장으로 선동하는 건 결국 선거보다 당권에 욕심이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6-03-29

혐오의 언어, 무너지는 정치

정치의 위기는 정치인들의 말에서 비롯된다. 말이 거칠어지면 생각과 행동이 과격해진다. 그렇게 정치는 전쟁이 된다. 전쟁의 언어는 정치의 기본 요소인 ‘대화’와 ‘타협’을 ‘나약함’과 ‘배신’으로 평가절하한다. 정치를 잃은 사회는 설득의 방법을 망각한다. 어느 순간 우리 정치는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을 잃었다. 최근 보수 정치인 장예찬 씨가 유튜브 방송에서 보수 논객 조갑제 대표와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 등을 겨냥해 “늙은이들이 제정신인가”라고 비난해 논란을 키웠다. 정치적 입장 차이를 논리적으로 비판한 것이 아닌, 연령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정치인들이 유혹에 빠지기 쉬운 공격 방식은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의 배경을 건드리는 것이다. 세대·성별·국적·지역·학력·직업 등이 그것이다. 정치적 공세의 초점이 논리나 사실이 아니라, 상대의 배경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 말은 혐오의 언어가 된다. 정치인들의 민망한 언어 수준은 특정 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현 정부의 정동영 장관도 과거 노년층을 향해 투표장에 가지 말라는 발언으로 곤욕을 치렀던 적이 있다. 노인을 폄하하고 조롱하는 말은 비단 특정 집단만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늙음’을 모욕의 무기로 쓰는 사회는 결국 모든 시민에게 “당신이 속한 집단도 곧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암묵적 메시지를 보낸다. 이렇게 공동체의 안전장치는 해체되고, 사회적 갈라치기는 확대된다.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정치에 스며들면 정치의 목표가 바뀐다. 상대를 설득해 정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악마로 만들어 제거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악마를 상대할 때는 예의도 팩트체크도 필요 없다. 과장과 조롱, 능멸과 낙인이 오히려 쾌감을 준다. 정치는 논증이 아니라 감정적 비난의 경연장이 된다. 그 결과 물가·일자리·교육·돌봄·지역 소멸 같은 민생 이슈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정치적 진영 논리 뿐이다. 문제는 이 언어가 정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인의 막말이 유튜브와 SNS에서 소위 ‘잘 팔리는 언어’가 되면, 종교인·연예인·지식인들도 여기에 합류한다. 특히 유튜브 쇼츠로 대표되는 미디어 환경에서 영상의 호흡이 짧아질수록 말은 독해지고, 정치는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들을 악마화할수록 조회수는 증가하지만 사회적 신뢰는 고갈된다. 무너진 정치 언어의 품격은 공동체의 가치를 떨어트린다. 오늘날 유튜브를 기반으로 한 팬덤 정치는 종종 막말을 솔직함이나 사이다로 포장한다. 그러나 막말은 가장 값싸고 빠른 동원 기술에 불과하다. 혐오로 얻는 지지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정치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정치인의 말은 공동체의 표준어다. 여야 할 것 없이 공당이라면 말의 품격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 논쟁적 발언이 아니라 인격 모독과 집단 비하적 발언에 대해서는 즉시 책임을 묻고 사과해야 한다. 결국 마지막 책임은 시민에게 있다. 정치인의 막말은 조회수와 표가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혐오의 말로 무너지는 것은 상대 진영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품격이다. 우리 편이라는 이유로 정치인의 막말을 눈감아주면 다음 막말의 대상은 내가 될 수 있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3-26

포스코에 ‘원전전력 직접 공급’ 길 열릴까

국민의힘 박형수(의성·청송·영덕·울진)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전기사업법 개정안’이 지난 24일 국회 소관상임위(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 제안설명을 거쳐 법안심사소위로 회부됐다. 이 법안의 핵심은 ‘수소특화단지’에 인접한 원자력발전사업자가 전력거래소 도매시장을 거치지 않고 개별 전력구매계약(PPA) 방식으로 전력을 직접 공급할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둔 것이다. 현행법상 발전사업자는 의무적으로 한전이 주도하는 전력시장을 통해 전기를 거래해야 한다. 이 법안이 제정되면 지난 2024년 11월 수소특화단지로 지정된 포항지역의 철강·수소 산업계가 최대 혜택을 입게 된다. 특히 ‘탄소제로’ 시대를 열어야 하는 포스코는 이 법안 통과에 사운(社運)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스코가 지금 추진중인 수소환원제철 기법은 기존 고로 대신 전기로로 모든 공정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기 단가가 경제성을 좌우한다. 25일 열린 경북도의회 본회의 질의에서도 포항 출신 이동업 의원이 “수소환원제철 방식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전기 단가가 낮아져야 한다”면서 경북도에 지역별 차등요금제 조기도입과 수소환원제철 가동에 필요한 전력인프라 확충 로드맵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이 의원은 “경북도의 전기자급률은 228.1%인데 자급률 11.6%인 서울과 동일한 전기료를 내는 게 말이 되나”라고 따졌다. 포스코는 오는 2050년까지 포항·광양의 기존 고로 7기를 모두 수소환원제철 방식으로 바꿀 계획이며, 그 전 단계로 2028년까지 수소환원제철 실증 설비를 포항제철소에 준공한다. 현재 포항철강업계는 수소 공급의 전초기지가 될 울진 원자력수소 국가산단(2033년 준공)에 대한 기대가 크다. 이곳에서 생산될 연간 30만t 규모의 청정수소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포항 수소특화단지나 철강산업단지로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제 박 의원이 제출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그동안 비싼 전기료로 인해 어려움을 겪어 온 포항지역 철강업계의 숨통이 트일 날도 올 것이다.

2026-03-26

공공기관 2차 이전, 지역 정치권 역할 크다

대구시가 25일 김정기 대구시장 권한대행 주재로 공공기관 2차 이전 유치위원회를 열고 추진 상황 점검과 함께 향후 전략을 논의했다. 대구시는 지역산업 구조와 연계성이 높은 33개 유치 대상기관을 중심으로 민관이 긴밀히 협력해 희망기관을 유치할 수 있도록 총력을 쏟겠다고 다짐했다. 김윤덕 국토부장관은 공공기관 2차 이전과 관련 “올해 이전 대상기관과 지역을 확정하고 2027년부터는 이전이 바로 시작되도록 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전국 지자체마다 테스크 포스팀을 구성하고 알짜 공공기관 유치에 전력을 쏟고 있다. 대구시도 지역산업구조 및 특화산업과의 연계성, 1차 이전기관과의 시너지, 지역발전효과 등을 면밀히 분석, 유치희망 대상기관을 선정했다. 중소기업 비중이 높은 지역경제 특성을 감안, IBK기업은행 본점과 대구미래신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 적합한 한국산업기술진흥원,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등이 그 대상이다. 공공기관 2차 이전은 1차 이전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지역산업과 지역경제에 직접적인 파급 효과가 일어나도록 추진한다고 정부는 밝힌 바 있다. 특히 공공기관 이전 추진이 지방균형발전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도록 역점을 두겠다고도 했다. 지방자치단체가 준비하는 2차 공공기관 이전은 이런 점에서 유치 전략이 매우 중요하다. 지역산업과의 실질적인 결합이 이뤄지는 기관의 선정과 인구유입 효과까지 면밀히 분석, 중앙정부를 설득해야 한다. 대구는 경북도와의 행정통합이 실패함으로써 공공기관 이전에 있어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도 있다. 행정기관의 치밀한 전략과 함께 지역 정치권의 협력이 절대 필요하다. 공공기관 이전이 행정적 절차를 거치지만 전국 지자체 간 경쟁구도에서는 정치적 결정이 수반될 수 밖에 없다. 행정의 완벽한 준비와 더불어 지역 정치권의 역량이 공공기관 유치의 결정타가 된다는 뜻이다. 대구가 왜 최적지인가하는 명확한 논리를 만들고 이를 중앙정부에 관철시켜야 한다. 앞으로 공공기관 이전은 지역 정치권의 역량을 평가받는 무대가 될 것이다.

2026-03-26

이란의 보물 하르그섬

페르시아만 북쪽에 위치한 이란령의 하르그섬. 이란 본토에서 25km 떨어진 면적 20㎢의 작은 섬이다. 뉴욕 맨해튼의 3분의 1 수준의 이 섬에 지금 세계인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중동전쟁을 벌이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하르그섬 점령을 위해 지상군 투입을 준비한다는 외신이 나오면서 이곳은 지구촌 최대의 긴장감이 나돌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찍이 하르그섬을 ‘이란의 왕관 보석’이라 불렀다. 이란에서 생산된 원유의 90% 이상이 이곳에서 수출되는 등 이란 경제의 심장부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약 3000만 배럴의 원유를 저장할 수 있는 수십 개의 대형 원유저장 탱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하루 약 217만 배럴의 원유가 실려 나가는 등 이란의 석유수출 전략기지다. 중동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이곳은 늘 공격의 대상이었다. 1980~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라크가 쏜 미사일로 이곳 원유저장 시설 상당수가 파괴된 경험이 있다. 미국의 하르그섬 공격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고 있는 이란을 압박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라 할 수 있다. 특히 하르그섬 내 원유시설이 이란의 아킬레스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미국이 띄울 수 있는 승부수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에는 미국의 부담도 만만치 않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하르그섬을 점령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국제유가의 장기간 폭등, 이란 내 반미여론 확산, 세계인의 비난까지 트럼프 대통령은 감당할 것인지가 문제다. 미국의 대규모 지상군 투입설 속에 이 레드라인을 넘어설지 트럼프의 선택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3-26

‘도시자연지수’

대구경북 주민에게 기후위기는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여름이면 폭염이 일상을 흔들고, 한 번 비가 쏟아지면 도시는 금세 침수와 교통 혼란에 휩싸인다. 대기오염과 열섬현상까지 겹치면 도시의 삶은 더 팍팍해진다. 문제는 이런 위기가 단지 날씨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도시의 숲과 하천, 녹지와 토양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열을 식히고, 물을 머금고, 시민의 숨통을 틔우는 생태계 서비스도 함께 약해진다. 그래서 국제사회와 국내 정책 현장에서는 도시의 회복력을 높이는 대안으로 자연기반해법(NbS)을 꾸준히 강조해 왔다. 하지만 아직 국내는 지자체마다 지표가 제각각이라, 어떤 사업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 과학적이고 공통된 기준으로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 짜게 될 ‘광역지자체 기후위기 적응대책’에 이런 빈틈을 메울 공통 언어인 ‘도시자연지수’가 필요하다. ‘도시자연지수’는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단순하다. “우리 도시는 자연과 얼마나 잘 공존하고 있는가”를 숫자로 보여주는 건강검진표에 가깝다. 녹지가 얼마나 있는지 뿐만 아니라, 도시 확산은 어떤지, 시민이 자연에 얼마나 쉽게 접근하는지, 온실가스와 생물다양성은 어떤 흐름인지, 행정은 얼마나 책임 있게 대응하는지까지 함께 본다. 이런 지표가 있으면 도시숲, 하천 복원, 투수성 포장, 옥상녹화 같은 사업이 보여주기식인지, 실제로 폭염과 홍수에 버티는 힘을 키우는지 판단할 수 있다. 다만 지표가 만능은 아니다. 지역별 지형과 산업 구조, 인구 밀도, 데이터 축적 수준이 다른 만큼 현실에 맞는 해석과 보완이 뒤따라야 한다. 숫자를 맞추는 행정이 아니라, 도시의 변화를 제대로 읽는 지표로 써야 한다는 뜻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도시자연지수’를 도시계획과 환경보전 목표를 잇는 도구로 쓰기 시작했다. 독일 베를린 사례는 ‘도시자연지수’를 실제 적용해 도시의 생물다양성 목표와 정책 데이터를 연결해 본 첫 사례로 주목받는다. 국내에서도 국립생태원과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워크숍을 열어 기준선 평가와 시범도시 논의를 시작했다. 시사점은 분명하다. 처음부터 모든 지표를 한꺼번에 완벽하게 적용하려 하기보다, 온실가스·접근성·토지보호·도시확산·식생피복 등 당장 측정 가능한 핵심 지표부터 시작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대구와 경북의 도시지역도 마찬가지다. 폭염 취약성, 하천과 녹지축의 연결성, 산업단지와 생활권의 불투수면, 시민의 녹지 접근성을 먼저 점검하고, 이후 종다양성·형평성·도시 외부 영향 같은 난이도 높은 지표로 넓혀가야 한다. 즉, 단계적 확대가 오히려 가장 빠른 길이다. ‘도시자연지수’의 진짜 가치는 위험을 미리 읽고, 예산을 더 똑똑하게 쓰고, 시민이 체감하는 안전과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다. 대구경북은 폭염, 집중호우, 고령화, 산업도시 구조 전환이라는 복합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그래서 특히 자연을 도시 관리의 변수가 아니라 핵심 인프라로 봐야 한다. 앞으로는 도시생태현황지도, 기후위기 적응대책, 탄소중립 전략을 따로 굴릴 것이 아니라 ‘도시자연지수’라는 공통 틀 안에서 연결해야 한다. 대구경북이 먼저 준비하면 기후위기에 끌려가는 도시가 아니라, 변화를 설계하는 도시가 될 수 있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6-03-26

남성 육아휴직 제도의 문제점

남성 육아휴직 제도가 처음 도입되던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씁쓸하다. 당시만 해도 남자가 육아휴직을 신청한다는 것은 많은 사업장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로 한 남자 직원이 육아휴직을 신청했을 때, 대부분의 소규모 사업주가 느꼈을 감정은 놀라움과 당혹감에 가까웠을 것이다. 제도는 이미 만들어졌지만, 현실의 현장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남성에게까지 육아휴직을 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사회적 분위기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정부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남성 육아휴직 사용을 적극 장려해 왔다. 육아를 여성에게만 맡기던 사회 구조를 바꾸고, 부모가 함께 아이를 돌볼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는 분명 의미 있는 변화였다. 그러나 정책의 취지가 아무리 선하더라도 현실과 맞지 않으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몇 명의 직원이 전부인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직원 한 명의 장기 휴직이 곧바로 운영 부담으로 이어진다. 대체인력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휴직자가 복귀하면 인적 구조가 다시 흔들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임시로 채용한 대체인력을 내보내는 일 또한 간단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한 부담이 제도 설계 과정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육아휴직 기간 발생하는 보험 부담이나 퇴직금 적립 문제, 대체인력 채용 비용 등은 대부분 사업장의 몫으로 남는다. 규모가 큰 기업이라면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지만 영세한 사업장에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 때문에 사업주와 직원 사이에 불필요한 긴장과 불신이 생기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육아휴직 제도의 혜택이 특정 계층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실제 통계를 보면 남성 육아휴직 사용자의 상당수가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종사자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대부분이 중소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역설적인 결과다. 급여 수준이 낮은 근로자일수록 휴직 기간의 소득 감소를 감당하기 어렵고, 복귀 이후 불이익에 대한 우려도 크다. 결국 제도는 존재하지만 정작 필요한 사람들은 사용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저출산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선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다. 정부는 수십조 원의 예산을 투입하며 다양한 출산 장려 정책을 시행해 왔지만, 출생아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는 정책의 규모보다 정책 설계가 현실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육아휴직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제도를 확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소기업과 자영업 현장이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대체인력 지원과 비용 보전 같은 현실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제도가 일부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거창한 구호보다 현실을 세밀하게 살피는 정책이 필요하다. 현장을 고려하지 않은 제도는 종이 위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제는 정책의 숫자보다 정책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돌아봐야 할 때다. 곧 선거철이다. 배부른 사람이 이긴다면 배고픈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노병철 수필가

2026-03-26

흥해9경에 ‘흥해농요’를 더해, 10경으로

옛 선비들은 풍광이 빼어난 곳을 유람하거나 머물면서 그곳의 승경을 일정한 수로 묶어 소개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팔경(八景)으로 관동팔경, 단양팔경이 그러한 예이다. 이들 승경은 아름다운 경관의 대명사이자 그 지역 자연경관의 정수를 나타낸다. 팔경의 유래는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 8경이 탄생한 것은 중국 사람들이 ‘팔(八)’이라는 숫자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소상팔경은 송나라 때 중국 명승지 호남성 동정호 남쪽 언덕 양쯔강 중류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합쳐지는 지역의 아름다운 경치 8곳을 말하는 것으로 산시청람[山市晴嵐, 아지랑이에 싸여 있는 산시(山市)], 연사모종[煙寺暮鐘, 연무(煙霧)에 잠긴 절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 소상야우[瀟湘夜雨, 소상강에 밤비 내리는 장면], 원포귀범[遠浦歸帆, 먼 포구로 돌아가는 돛단배], 평사낙안[平沙落雁, 평평한 모래밭에 기러기떼가 내려앉는 장면], 동정추월[洞庭秋月, 동정호에 비친 가을달], 어촌낙조[漁村落照, 저녁놀이 붉게 물든 어촌의 풍경], 강천모설[江天暮雪, 저녁눈이 강과 산을 뒤덮고 있는 풍경]을 말한다. 중국에서 유래된 8경은 우리나라로 건너와 팔경문화를 전국적으로 유행시켰는데, 그에 따라 경북엔 경북팔경, 포항엔 포항팔경이 등장했고, 마을 단위까지 확대되어 지역별로 많은 8경, 9경, 10경을 탄생시켰다. 포항시 흥해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흥해에는 흥해십경(興海十景)이 있었다. 흥해군수 류세무(柳世茂,1524~1588)가 선정한 흥해10경은 동해조돈[東海朝暾, 동해의 아침 일출], 서산모우[西山暮雨, 서산의 저녁나절에 내리는 비], 남산완월[南山翫月, 남산에 떠오르는 달], 북정송객[北亭送客, 북정(北亭)에서 떠나보내는 나그네], 죽헌매악[竹軒梅蕚, 죽헌(竹軒)의 매화], 봉림순채[鳳林蓴菜, 봉림 마을의 순채(蕙菜, 나물 이름)], 위루망진[危樓望辰, 위루(危樓)에서 바라보는 별], 곡강범주[曲江泛舟, 곡강 어구에 뜬 배], 칠포관어[七浦觀魚, 칠포에서 구경하는 물고기], 천곡심승[泉谷尋僧, 천곡사를 찾아가는 스님]이다. 2022년 흥해 사람들은 사방기념공원, 해오름전망대, 곤륜산 활공장, 칠포리 암각화, 천마지 둘레길, 북천수, 이팝나무 군락지, 영일민속박물관, 도음산 천곡사 등 흥해의 승경 아홉 곳을 흥해9경으로 선정하고, 해마다 그에 따른 문화축제를 하고 있다. ‘흥해9경 문화축제’는 흥해의 관광명소인 9경을 소개하는 행사로 참가자들이 버스를 타고 9경을 직접 방문, 명소를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을 즉석에서 인화하는 체험행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흥해9경을 보면서 필자는 흥해의 자랑인 흥해농요가 빠졌다는 데서 아쉬움을 느낀다. 흥해농요는 옛날 동해안 최대의 곡창지대인 흥해의 넓은 들판에서 흥해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함께 동작을 맞추고 지루함을 달래면서 불렀던 노래로 최근 (사)흥해농요보존회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경상북도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흥해의 큰 자랑거리다. 흥해의 아름다운 경치를 논할 때는 흥해농요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농요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경치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인근 청하현의 8곳 승경을 담은 해월루팔경(海月樓八景, 청하읍성 내 해월루에서 바라보는 8경)에는 봉송효월[鳳松曉月, 봉송정(鳳松亭)의 새벽달), 용수만하[龍峀晩霞, 용산의 저녁 안개], 조경노도[釣鯨怒濤, 조경대(釣鯨臺)의 성난 파도], 학봉귀운[鶴峯歸雲, 호학봉(呼鶴峯)으로 돌아가는 구름], 상평목적[上坪牧笛, 상평들 목동들의 피리소리], 개포어요[介浦漁謠, 개포(월포)의 고기잡이 노랫소리], 도산석봉[桃山夕烽, 도리산(桃李山)의 저녁 봉화], 송우촌연[松郵村燃, 송라 역촌의 저녁연기]라 하여 눈에 보이는 경치가 아닌 귀로 듣는 경치인 ‘목동의 피리소리’, ‘고기잡이 노랫소리’도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흥해 학천리(鶴川里) 일원의 9가지 승경인 학천구경(鶴川九景)에 도음석조(禱陰夕照), 아미신월(蛾眉新月), 운대조일(雲臺朝日), 오강청풍(梧岡淸風), 향천정화(香泉井花), 백야농가(白野農歌), 산사고종(山寺孤鐘), 한천모연(寒泉暮煙)이 있는데, 여기에도 오강청풍[梧岡淸風, 오강(梧岡)의 맑은 바람], 백야농가[白野農歌, 백야(白野)의 농사짓는 노래], 산사고종(山寺孤鐘, 천곡사(泉谷寺)의 외로운 종소리]처럼 촉각적, 청각적 요소가 들어 있다. 특히 농가(農歌), 즉 농요(農謠)가 들어 있음이 눈에 띈다. 이러한 요소들은 시각 위주의 경치를 오감(五感)으로 느끼게 만드는, 경치를 낭만적 분위기로 이끄는 멋진 장치가 된다. 그러기에 필자는 이 기회에 기존의 흥해9경에다 ‘흥해 농요’를 더해 ‘흥해10경’으로 선정해 줄 것을 제안한다. 초여름 동해안 최대의 곡창지대인 흥해평야에서 농부들이 논마다 물을 그득 잡아놓고, 그곳에서 “이 논바닥에 모모를 심어~”하면서 ‘모심는소리’를 부르는 풍경이야말로 ‘흥해의 진경(眞景)’이 아닐까? /박창원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2026-03-26

포항은 새로운 산업문명을 향한 도약의 도시다

현재 인류가 사용하는 에너지 체계는 거대한 전환의 끝자락에 와 있다. 이 전환은 단순한 에너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구조가 바뀌는 과정이다. 그 흐름을 단순화하면 두 갈래로 정리된다. 하나는 전기에너지이고, 다른 하나는 수소에너지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분리된 체계가 아니다. 전기는 전기저장장치(ESS)와 2차전지로 저장되고, 다시 수전해(水電解)를 통해 수소로 전환된다. 전기와 수소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하나의 순환 구조다. 이 구조는 앞으로의 산업 질서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과거에는 석탄과 석유가 산업을 움직였다면, 앞으로는 전기와 수소가 산업을 움직이게 된다. 더 중요한 점은, 이 새로운 에너지 체계는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글로벌 시장이 강제하는 새로운 규범이다. 탄소중립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생산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태양광과 풍력 같은 자연 에너지를 전기로 전환하는 시스템이 확대되어야 하고, 축산분뇨와 음식물 등 유기성 폐기물을 활용한 에너지 생산도 병행되어야 한다. 나아가 에너지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 구조에서 벗어나, 지역 내에서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지속가능성이다. 여기서 포항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포항은 더 이상‘철을 만드는 도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는 전기와 수소를 생산하고, 이를 기반으로 산업을 재구성하는 도시로 도약해야 한다. 포항과 그 인근 지역에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 생산과 수소 생산 인프라가 구축된다면, 포항은 대한민국 산업 대전환의 중심 거점이 될 수 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이 추진하고 있는 저탄소철강기술과 수소환원제철은 그 전환의 핵심이다. 철을 만들면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기술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산업 문명의 방향을 바꾸는 사건이다. 이 기술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다면, 포항은 세계 철강 산업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도시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주목해야 할 점은 일자리의 문제다. 산업 전환은 단순히 기존 산업을 대체하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재생에너지 설비 구축, 수소 생산 및 저장 인프라, 전력망 확충, 그리고 수소환원제철과 같은 신기술 산업은 대규모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 단순한 일자리 증가를 넘어, 고부가가치 기술 인력과 청년 인재가 지역에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는 것이다. 특히 포항은 기존의 철강 산업 기반 위에 새로운 에너지 산업을 결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시다. 이는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강점이며, 산업 전환 과정에서‘일자리 감소’가 아니라‘일자리 확대’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산업 전환이 곧 지역 쇠퇴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 재도약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포항이 보여줄 수 있다. 이 과정은 산업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장된다. 에너지 전환은 시민의 삶과 직결되며, 지역경제와 노동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기술과 정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민의 인식 변화와 사회적 합의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ESG의 사회(S)가 작동해야 하는 이유다. ESG는 더 이상 기업의 선택적 전략이 아니다. 환경(Environment)은 탄소 감축과 에너지 전환을 요구하고, 사회(Social)는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불평등을 조정하며, 지배구조(Governance)는 이러한 변화가 책임 있게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기준이 된다. ESG는 산업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며, 동시에 국가 경쟁력의 기준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25년 10월 1일 출범한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환경과 에너지를 분리해서 다루던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며, 국가가 기후와 에너지를 하나의 통합된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선언이다. 그동안 우리는 환경은 규제로, 에너지는 산업으로 분리하여 다루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 둘을 나눌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에너지는 곧 탄소이며, 탄소는 곧 산업 경쟁력이다. 이 변화는 정부 조직에서 시작되어 시장과 산업 구조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국제 질서는 이미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탄소를 기준으로 한 무역 규범이 형성되고 있으며, ESG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기업은 시장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제 기업은 무엇을 생산하느냐보다 어떻게 생산하느냐로 평가받는다. 탄소를 줄이지 못하면 수출이 막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특히 철강 산업은 이 변화의 중심에 있다. 탄소 배출이 많은 산업일수록 더 강한 압력을 받게 되며, 그만큼 빠른 전환이 요구된다. 수소환원제철은 이러한 압력에 대한 대응이자, 동시에 새로운 경쟁력의 원천이다. 하지만 전환에는 비용이 따른다. 그리고 그 비용은 사회 전체가 함께 감당해야 한다. 특정 지역이나 특정 계층이 부담을 떠안는 구조라면 전환은 지속될 수 없다. 이것이‘정의로운 전환’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대한민국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기후위기를 단순한 환경 문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산업과 국가 시스템의 문제로 인식할 것인가. 이 선택에 따라 앞으로 50년의 국가 경쟁력이 결정된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전기는 에너지의 중심이며, 수소는 그 확장이다. 탄소는 비용이 아니라 질서이며, ESG는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다. 이 모든 요소를 하나의 구조로 통합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새로운 산업 문명을 설계할 수 있다. 포항은 그 전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수소환원제철, 재생에너지, 전력 인프라, 그리고 시민의식이 결합될 때 포항은 단순한 산업도시를 넘어 탄소중립 문명의 모델 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정부에서 RE100이라는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RE100을 제도화하기 위한 관련 입법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으며, 산업과 시장은 이미 그 기준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RE100은 아직 하나의 완성된 법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대한민국 산업을 움직이는 사실상의 규범이 되었다. 법보다 먼저 현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K-기후·에너지·환경은 하나의 선언이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 성장할 수 없으며, 새로운 질서 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다. 전기와 수소, ESG와 책임, 그리고 RE100. 이 세 가지 축 위에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포항이 서 있다. /유성찬 포항환경연대 공동대표

2026-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