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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벤트 정치는 실용정부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은 15일 “국정 운영의 철학과 비전의 중심에 언제나 국력의 원천인 국민을 두겠다”라고 강조했다. ‘국민 임명식’이라는 행사에서 발표한 ‘국민께 드리는 편지’에 담은 내용이다. 너무 당연하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형식과 의미가 무엇인지 뜨악하다. 이 대통령의 이날 광복절 기념사는 공감이 가는 대목이 많다. 그는 “증오와 혐오, 대립과 대결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국민의 삶과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할 뿐”이라고 말했다. 사실 지금 우리 정치가 꼭 그 상태다. 그는 이어서 “분열과 배제의 어두운 에너지를 포용과 통합, 연대의 밝은 에너지로 바꿀 때 우리 사회는 더 나은 미래로 더 크게 도약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낡은 이념과 진영에 기초한 분열의 정치에서 탈피해 대화와 양보에 기초한 연대와 상생의 정치를 함께 만들어갈 것을 이 자리를 빌려 거듭 제안하고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꼭 필요한 일이다. 이 대통령은 매우 실용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대통령이다. 그가 정치적으로 성장한 배경도 이념적 동지의 틀에 묶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그의 이 제안이 제대로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날 그가 남북 관계에 대해 지적한 말대로 “신뢰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만들어진다.” 그의 ‘행동’을 믿기에는 아직 신뢰가 부족하다. 특히 취임 초기 그의 인사는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날 국민임명식도 실용과는 거리가 있다.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한다. 어디에도 그것을 뛰어넘을 의미는 없다. 그런 점에서도 이날 행사를 왜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먼저 떠오르는 게 나폴레옹의 대관식이다. 그는 자칭 황제가 됐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비오 7세 교황까지 참석시켰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왕관을 머리에 쓰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국민투표라는 형식을 빌렸고, 대관식을 통해 교회와 귀족들의 복종을 받아내려 했다. 황제는 이미 절대자지만, 정통성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절대권력에 대한 찬가를 듣고 싶었던 셈이다. 이 대통령도 선거를 통해 정당하게 대통령이 되었다. 과반에는 미치지 못해도 49.42%, 1728만7513표를 얻었다. 그 표보다 엄중한 임명장이 어디 있겠나. 선거 과정을 통해 공약으로 국민에게 약속도 했다. 그런데 굳이 왜 ‘국민임명식’이라는 이벤트를 벌인 걸까. 문재인 정부야말로 이벤트에 익숙했다. 그러다 보니 ‘말 따로, 행동 따로’가 많았다. 재임 중에만 그런 게 아니다. 퇴임 후엔 “자연으로 돌아가 잊힌 삶을 살겠다”라던 그는 정반대 행보를 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정의로운 통합 정부, 유연한 실용정부”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이벤트는 ‘실용’과 거리가 멀다. 그는 “그 모든 미래의 중심에 국민을 두겠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벤트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이 대통령이다. 모든 것이 그를 위한 행사다. 임명장을 80장씩 받은 것도 이 대통령이다. 80명의 ‘국민 대표’는 나폴레옹 대관식에 참석한 교황과 귀족들처럼 들러리일 뿐이다. 유신독재 시절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선출한 적이 있다. 국회의원처럼 선거했지만, 국회의원이 아니다. 소속 정당도 없다. 대통령을 반대하는 대의원 후보는 나설 수도 없었다. 미국의 대의원과 비슷하지만, 성격이 전혀 다르다. 무효표 몇 표를 제외하면 대부분 한 사람에게 찬성표를 던졌다. 15일 참석한 국민의 대표는 다양하게 선발했다. 그렇지만 정색하고 국민 대표라고 할 것도 아니고, 거창하게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줄 대표성도 없다. 결국 이벤트, 보여주기 쇼에 불과하다. 정치적으로 국민의 대표는 국회의원이다. 아무리 민주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국회라도 국민의 대표는 국회다. 흔히 독재자는 정치적 파트너인 국회를 무시하고, 국민을 직접 상대한다. 국회의 대표성을 무시하고, 정치적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정치적 권위,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정통성을 나누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이런 이벤트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좋겠다. 실용을 강조하는 이 대통령답지 않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8-17

한 톨의 쌀에서 미래를 보다-농업대전환의 길

지난 4월 일본 니가타현을 찾았다. 세계적인 브랜드 쌀 ‘고시히카리’를 직접 마주한 순간, 나는 농업이 단순한 재배를 넘어 철학과 문화가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쌀 한 톨이 시장에 나오기까지 네 차례의 검사를 거친다. 정성 어린 포장을 통해 소비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농부는 장인으로 존중받는다. 그 현장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칠곡의 농업도 이제 그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선명해졌다. 현실은 냉혹하다. 기후는 달라지고, 농촌은 늙어가며, 젊은이들은 떠난다. “이대로는 버티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희망은 방향에서 온다. 그래서 우리는 농업대전환의 길을 차근차근 열어가려 한다. 먼저 쌀부터 바꾸려 한다. 왜관·북삼·동명에 프리미엄 쌀 단지를 조성하고, 생산에서 포장까지 전 과정을 새롭게 설계할 계획이다. 1인 가구 시대에 맞춘 소포장과 진공포장을 도입해 신선도를 오래 지켜낼 것이다. 직거래 접점도 넓혀 농산물에 ‘칠곡’이라는 이름값을 더해 갈 것이다. 목표는 쌀을 단순한 먹거리에서 신뢰할 수 있는 지역 브랜드로 키우는 일이다. 대전환은 쌀에만 머물지 않는다. 참외·고추·딸기 등 주요 품목 전반을 함께 끌어올릴 계획이다. 값싼 물량 경쟁의 시대에서 벗어나, 고품질과 특화로 승부해야 한다. 많이가 아니라 잘하는 농업, 흔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농업, 값싼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농업이 우리가 지향할 길이다. 생산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고령화된 현장에서 노동력만으로 버티기는 어렵다. 수경재배와 수직재배를 도입해 서서 일하는 환경을 만들겠다.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 드론 방제를 확대해 작업의 정확도를 높이고 농약 사용량을 줄이겠다. 땀과 근력만이 아니라 기술과 데이터가 함께하는 농업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농민의 삶을 지키는 길이고,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전하는 길이다. 가공과 유통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저급과 참외를 활용한 비건가죽은 ‘버리는 것을 벌이가 되게 하자’는 생각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공유주방을 통해 농민의 소규모 식품 창업을 돕고, ‘퍼뜩시장’ 같은 판로를 넓혀 소비자와 더 가깝게 만나겠다. 아파트 단지, 고속도로 휴게소, 도심 광장에서 만나는 직판장은 신선함과 신뢰를 동시에 전하는 창구가 될 것이다. 농업은 이제 재배를 넘어 체험과 문화가 결합한 6차 산업으로 확장될 것이다. 안전은 농업의 뿌리다. 농업인이 직접 참여한 안전교육 뮤지컬 ‘농터맨’ 같은 시도를 더 발전시켜, 교육이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보완해 나가겠다. 안전이 확보될 때 지속 가능성도 단단해진다. 환경 역시 미래를 가르는 과제다. 유용미생물배양센터를 통해 친환경 농법 보급을 넓히겠다. 영농부산물은 파쇄·재활용해 미세먼지와 산불 위험을 낮추겠다. 농약과 소각에 의존해 온 관행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가는 농업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것이 곧 우리 아이들에게 깨끗한 미래를 물려주는 길이다. 농업대전환은 곧 농민의 삶의 대전환이기도 하다. 기술이 들어오면 허리는 덜 굽히고도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다. 판로가 넓어지면 농민의 소득이 안정되고, 자부심도 커진다. 변화는 결국 사람에게서 완성된다. 농민이 존중받을 때 농업도 지속된다. 앞으로는 청년들이 다시 농촌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기반도 만들어야 한다. 스마트팜과 데이터 농업은 젊은 세대가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될 것이다. 농업이 힘들고 낡은 산업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산업으로 자리매김할 때, 농촌은 다시 활력을 찾게 될 것이다. 이 모든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다. 농업이 흔들리면 농촌이 무너지고, 농촌이 사라지면 우리의 삶터도 함께 위태로워진다. 지금이 변화의 적기다. 앞으로의 농업은 데이터와 기술로 정밀하게 관리되고, 가공과 유통으로 가치가 확장되며, 문화와 체험이 더해지는 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는 그 방향을 분명히 바라보고, 현실적인 걸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 것이다. 그 길을 군민과 함께 열어가겠다. /김재욱 칠곡군수

2025-08-17

강릉가는 열차에서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태화강 역에서 강릉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서울과 세종, 천안 등 각지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이 강릉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4시간 이상 가야하는 것보다 친구들을 만난다는 기쁨과 해변을 끼고 달릴 기차의 운치에 대한 기대가 마음을 흔들었다. 작년 12월부터 운행을 시작한 이 기차는 좌석 간의 거리도 넓고 쾌적했다. 여행의 기대치가 올라가고 있었다. 서너 명의 중년 남녀가 열차에 올랐다. 친숙한 사이인지 서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오전 10시 경 출발해 오후 2시 넘어 도착하니 다들 점심이 걱정인가 보다. 서로 음식을 갖고 왔냐고 물으며 커피와 과일을 나눈다. 정겹다. SRT와 KTX의 도입은 시간의 단축과 함께 열차 안의 풍경을 바꾸었다. 거기에 코로나는 그 모습을 더욱 빠르게 정착시켰다. 그 시기에는 기차 안에서 마스크를 써야 했고 음식을 먹을 수 없었기에 숨죽인 침묵이 자리했었다. 자거나 휴대폰을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열차에서 음식을 섭취해도 된다고 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새로운 문화에 젖어들었다. 기차 안에서 소리내지 않고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가는 것을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조용히 앉아 옆의 사람과는 눈길조차 주고 받지 않은 채 휴대폰에만 눈길을 주거나 눈감고 자는 것이 편하게 느껴졌었다. 타인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가는 것이 상대에 대한 배려이며 문화인이라 생각해왔다. 그래서 바뀐 풍속도가 그 때까지 마음에 든 것도 사실이었다. 강릉 가는 열차도 ktx-이음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긴 시간의 여행이어선지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승무원도 조용히 하라고 제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옆의 모르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권하는 소리도 들렸다. 어린 시절 가끔 탔던 열차의 풍경과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김밥을 싸오고 삶은 달걀과 사이다, 과일을 먹으며 가족들, 친구들과 담화를 나누던 그 시절의 기차 안 풍경을 조금 나이 든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긴 시간의 여행에 그런 것은 즐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열차는 계속 푸른 풍경을 뒤로 보내며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아쉬움에 생각은 과거로 흘러간다. 아이들과 함께 공부했던 ‘배우며 생각하며’라는 책이 생각났다. 사고의 확장을 위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어서 초등학생들과 토론하기에 좋은 교재였다. 그 중에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문명인들이 먼 오지의 원주민들을 찾아갔다. 그들의 열악한 환경과 시설을 보며 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한 각종 문명의 이기들을 가져다주었다. 의무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원주민들의 생각은 중요치 않았다. 기계를 사용하면 원주민들이 더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문명의 발달이 문화의 발달과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며 문명인들의 삶이 더 낫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강릉 가는 차안에서 서로 이야기와 음식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저런 모습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품앗이와 두레로 서로의 품을 나누고 정을 쌓던 것이 우리였는데···. 조금은 수선스러워도 그 안에 넘치는 정이 담겨 있는 그 모습이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잃어가고 있는 것에 대한 동경일지도 모르겠다. 정담을 나누며 가는 것이 비문화인의 모습은 아니니까.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의 옆모습을 처음으로 가만히 쳐다본다. 점심을 전혀 먹지 않던데. 가지고 있던 샌드위치라도 나눌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쑥스러움이 손길을 눌렀다. 정동진이 가까워오니 이야기를 나누던 일행들과 옆자리의 아저씨가 내릴 준비를 한다. 그들의 여행이 따뜻하고 즐겁기를 바란다. 다음엔 샌드위치를 나눌 수 있는 용기가 솟아나기를 또한 바라본다. 정동진을 지난 열차 차창 밖으로 동해의 바다가 비로소 시원하게 가슴을 파고 든다. 이번 역이 이 열차의 마지막 종착지입니다라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도착해서 강릉역에서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 생각에 마음이 부푼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5-08-17

바가지요금, 이제는 그만

여수와 울릉도에서 관광객에 대한 불친절과 바가지요금 문제가 일어났다. 그전부터 언론에 바가지요금 문제가 오르더니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휴가철이 되니 뉴스에 단골 메뉴처럼 오른다. 물건을 파는 사람도 바가지요금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 건데, 왜 이런 문제는 고쳐지지 않고 계속 일어날까. 속초에서도 오징어 두 마리를 5만6000원에 사고, 식당에서 추가 주문에 시달려야 했다는 게시글이 속초시청 자유게시판에 올라왔다. 이것은 어디 야수나 울릉도, 속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가지요금을 주고도 속으로만 삭이고 넘어간 관광객이 더 많을 것이다. 일 년을 별러 온 여름휴가인데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국인이 이러한 데 외국인은 어떠할까. 한국관광공사가 받은 2024년 관광 불편 신고를 보면 1위는 쇼핑(306건)이었고 2위는 택시(158건)였다. 택시 관련 불편 사항은 부당요금 징수와 운전사 불친절 등이 문제였다. 유명 유튜버 빠니보틀이 어느 나라건 택시 기사는 믿지 않는다는 말이 공연히 나온 말이 아니다. 서울역 인근 쉐라톤 호텔에서 크라운 파크 서울까지 택시를 이용한 한 외국인 관광객이 1.5km 구간을 이동한 요금으로 2만4000원을 지불했다. 택시 기사는 바가지요금을 받을 생각을 했는지 미터기도 켜지 않은 채 운행하며 8100원 정도의 정상적인 요금보다 세 배 정도의 바가지요금을 받았다. 지자체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캠페인을 한다. 대전시는 ‘2025 대전 0시 축제’ 개막에 맞추어 바가지요금을 없애기 위한 민관합동 캠페인을 펼쳤다. 이는 대전시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전국의 지자체마다 행사를 앞두고 사전에 지역민을 상대로 바가지요금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행안부는 바가지요금으로 인한 국민 불편을 없애기 위해 ‘휴가철 물가안정 특별대책 기간‘을 정하고, 민관 합동점검을 실시했다. 정부나 지자체의 이러한 노력에도 바가지요금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한 철 장사라는 생각에 눈이 멀어 관광객과 불편한 마음을 감수하며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다. ’백 명의 사람이 한번 오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 번 오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요즈음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손님이 당한 억울한 마음은 금방 인터넷을 타고 국내뿐 아니라 세계로 퍼져나간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눈앞의 이득보다 적정한 이윤을 보며 오래도록 유지하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인터넷에서 선행을 베풀어 뜻하지 않은 대박을 낸 사장님들의 기사가 오른다. 서비스를 받는 사람도 사장도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행복한 이런 길을 왜 마다할까.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하고 남들에게도 욕을 먹는 일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한 대가로 돈을 벌고 밥을 먹는데 그 입속으로 다른 사람의 원망이 섞여 들어간다면 기분이 어떨까. 자신과 자식의 입에 들어가는 밥이 손님들의 고마움이 함께하면 좋겠다. 인터넷을 달구진 않더라도 선한 영향력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장님이 되는 건 어떨까. 누구에게나 당당한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은가. /김규인 수필가

2025-08-17

누가 배터리를 바꿔줄까?

10년 전 아버지가 혼자 사실 때 가장 힘들어한 것이 대화 상대가 없는 것이었다. 파킨슨 병으로 14년 간 투병하시는 엄마 간병의 고통보다 대화 상대가 없는 외로움의 고통이 더 힘들다고 호소하셨다. 자식들이 자주 가고 요양보호사도 세 시간씩 방문하지만 24시간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도 자식들과 같이 사는 것은 한사코 거부하시다가 결국 엄마가 돌아가신 후 7개월만에 아버지도 엄마를 따라가셨다. 외로움은 노인의 심신 건강에 이렇게 치명적이다. 만약 그때 돌봄 로봇이 있었다면 아버지의 외로움은 줄어들었을까? 2024년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에서 아기처럼 생긴 AI 로봇을 개발했다. 영상을 보니, 이 로봇이 독거노인과 함께 살면서노인들의 건강이 좋아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어떤 할머니는 효돌이 로봇에게 옷도 만들어 입히거나 장신구도 달아주고 안아준다. 효돌이는 할머니에게 약 먹을 시간도 알려주고 애교 있는 말도 해준다. 어떤 할머니는 민희라고 이름 붙인 AI 로봇 덕에 두 달 만에 우울증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에서 2013년 제작된 ‘체인징 배터리’라는 5분짜리 애니메이션에도 돌봄 로봇이 나온다. 이 영상은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 아들이 로봇 선물을 보내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할머니가 무언으로 로봇과 교감하면서 기쁨을 되찾았다. 그러던 어느날 로봇이 작동을 멈추자 배터리를 갈아주어 살린다. 시간이 지나 할머니가 눈을 뜨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로봇은 자기처럼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배터리를 가져오지만 소용이 없다. 그렇게 할머니가 먼저 죽고 로봇도 결국 배터리를 갈아줄 사람이 없어서 정지한다. 그때 할머니 영혼이 와서 로봇의 손을 잡고 하늘로 같이 간다. 슬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AI 로봇의 유용성과 필요성을 설득하는 영상이다. 그러나 효돌이든 애니메이션의 로봇이든 이들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외로움 극복에 실제 도움 될지 아직은 실감 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6월에 나온 뉴스를 보니 2029년이 되면 전 세계 돌봄 로봇 시장은 8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1999년에 처음 개발된 돌봄 로봇이 2010년대까지만 해도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돌봄 로봇의 수요가 급성장한 것이다. 일본은 올해 3월 와세다대 연구진이 요양 환자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욕창을 예방하는 등 실제 돌봄 인력의 업무를 대신할 수 있는 돌봄 로봇 ‘AIREC’를 개발했고 보험 지원도 해준다고 한다. 우리나라 효돌이 판매를 검색해보니, 현재 90만 원에서 150만 원 정도이고 복지 혜택을 받으면 28만 원 정도다. 이렇게 돌봄이 기계로 대체되는 추세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일지는 의문이 든다. 올해 말 삼성전자와 LG전자에서 출시될 가정용 로봇 ‘볼리’와 ‘Q9’는 기계처럼 생겨서 효돌이만큼 교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든다. 아버지가 생전에 효돌이가 있었다 해도 외로움은 해소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사람에게는 여러 사람과의 관계도 필요하고 약간의 갈등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8-17

무궁화 꽃의 품격

국민 대다수가 무궁화 꽃을 우리나라의 국화인 줄로 알고 있지만 이것이 법적으로 공인된 근거는 없다. 국민정서상 무궁화를 국민 모두가 국화(國花)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무궁화가 우리나라에서 자생해온 것은 기록상으로 2000년이 넘는다. 옛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 시대 이전부터 하늘의 꽃으로 불리며 귀하게 여겨져 왔으며, 신라 때는 무궁화 나라라는 뜻의 근화향(槿花鄕)이라 불렀다고 한다. 무궁화를 국화로 하기 위한 법 제정 작업은 19대 국회부터 20대, 21대에 걸쳐 여러 번 시도가 있었지만 법 제정에는 이르지 못했다.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정해 부르고 있지만 이는 민간단체에 의해 제정된 날이지 국가 지정 기념일은 아니다. 무궁화가 널리 보급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공식적인 국화 지정이 안 된 때문이라는 분석도 한다. 애국가는 안익태 선생님이 작곡했다. 그러나 애국가 가사 말의 작사자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안익태는 일제 강점기 때 애국가 가사 말이 스코틀랜드 민요 곡에 붙여 불려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작곡을 했다고 한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노랫말이 곡에 붙여 널리 불리게 되자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꽃으로 더욱 공고히 자리를 잡게 됐다. 무궁화 꽃은 법적 지위가 없음에도 공무원의 임명장과 국회의원 배지, 사법부의 법복, 우리나라 최고훈장(무궁화대훈장)에도 쓰이는 등 국가 업무와 관련된 분야에 많이 활용되고 있다. 민족의 꽃이란 상징성만으로도 충분히 우리 민족의 꽃인 줄 알지만 늦었지만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후속조치가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올해가 딱 어울린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8-17

균형성장 대응 TK팀, 현안 해결 마중물 되길

대구시와 경북도가 이재명 정부의 국가균형성장 기조에 발맞춰 공동협력 TF팀을 가동하기로 결정해 귀추가 주목된다. 이재명 정부가 5극 3특의 국가균형성장 전략을 발표한 가운데 대구와 경북이 공동으로 대응하는 협력기구를 만든 것은 시의적절한 결정으로 보인다. 대구시 별도, 경북도 별도 보다는 두 지역의 현안이나 특성으로 보아 공동협력팀 구성이 바람직해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5극 3특 전략은 5개의 메가시티(5극)와 3개의 특별자치도(3특)를 중심으로 국가 운영시스템을 바꾸자는 것이다. 국가 운영 시스템을 다극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치분권을 강화하는데 목적이 있다. 정부의 구상안에 포함된 대구와 경북(대경권)은 오히려 원팀 구성이 더 적절한 측면이 있다. 이재명 정부는 국정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수도권 집중 완화와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5극 3특을 핵심전략으로 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지금은 권역마다 지역에 유리한 전략안 마련에 모두가 고심하고 있다. 지역의 생존을 다투는 문제라는 생각으로 정부 정책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데구시와 경북도의 공동협력팀도 첫 모임에서 초광역 SOC, 미래전략산업, 문화.관광권 개발, 사회·환경분야의 핵심 과제를 우선 과제로 논의했다. 대구경북신공항 건설, 대구경북 순환철도와 AI·반도체, 이차전지, 바이오, 포스트 APEC 등 모두 21개 과제가 우선 과제로 선택됐다고 한다. 지역 발전에 필수적인 현안들을 정부 상대로 설득해 국정과제에 포함되게 하거나 국가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이 공동협력팀에서 논의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다. 쉽지 않겠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전략팀이란 자부심으로 더 많은 노력이 있길 바란다. 당장 풀어야 할 현안인 TK신공항 사업은 정부의 명쾌한 대답이 없어 시도민 모두가 답답해 하고 있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이나 대통령의 가덕도 신공항 유지 발언 등과 비교하면 대구경북민에게는 실망스런 일이다. 새 정부의 균형발전 정책에 선제 대응하기 위해 대구시와 경북도가 모처럼 한팀이 된 만큼 현안 해결의 마중물 역할에 진력해 주었으면 한다.

2025-08-17

정국 급랭… 李가 직접 협치 리더십 보여주길

특검의 국민의힘 중앙당사 압수수색과 조국·윤미향 전 의원 특별사면을 계기로 여야 대치정국이 더욱 격화하고 있다. 지난 15일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양옆에 나란히 앉은 정청래 민주당 대표와 송언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서로 “사람이 아니다”라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할 때 국민의힘 당권주자인 안철수 의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국·윤미향 사면 반대’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했다. 안 의원은 행사 담당자의 제지에도 이 대통령이 연설을 마칠 때까지 서 있었다. 광복절 행사 후 오후에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이 대통령의 ‘국민 임명식’에는 국민의힘 소속 의원과 광역단체장, 보수 야당 출신 전직 대통령들도 모두 불참했다. 당연히 민주당의 독설이 이어졌다. 백승아 원내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아직도 윤석열·김건희의 꼭두각시로 ‘윤 어게인’ 외치기에 바쁜 국민의힘의 행태는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의 발버둥이나 마찬가지로 보일 지경”이라고 비난했다. 살얼음판 정국을 예고하는 장면들이다. 8월 임시국회에는 여야 합의가 불가능한 쟁점 법안들이 무더기로 상정된다. 이달 본회의에서 민주당은 방송3법 중 아직 처리되지 못한 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벼르고 있다. 노란봉투법과 집중투표제 도입을 핵심으로 하는 상법 개정안도 경영계의 반발에도 강행 처리할 방침이다. 여기에다 야당과의 협의 없이 ‘검찰·사법·언론 개혁’을 추석 전까지 속도전으로 밀어붙일 기세다. 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이제 정치 문화를 바꿔야 한다. 분열의 정치에서 탈피해 대화와 양보에 기초한 상생의 정치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대통령 연설내용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행동하고 있다. 국민의힘과는 악수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정청래 대표는 여전히 야당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민주당의 이러한 강성 캐릭터가 바뀌려면 이 대통령이 먼저 야당과 대화하는 ‘협치의 리더십’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2025-08-17

‘광복 80주년’을 맞으며

찌는 듯한 무더위와 날 선 칼날처럼 쏟아지는 폭우가 반복되는 대단한 여름이 이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장마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 같다. 이런 여름이 앞으로도 계속되고 심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형편이다. 살아있는 거대 유기체 지구가 내지르는 고통의 소리를 더욱 확대하는 최악의 생명체가 인류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하기 어렵다. 2025년 8월 15일 아침도 매우 무덥고 습하다. 하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태극기를 들고 나가 대문에 게양한다. 산들바람에 가볍게 날리는 태극기가 산뜻한 얼굴로 나를 보며 웃는다. 나는 태극기 게양에 인색하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대참사’와 1980년 5월 18일 ‘광주 학살’을 기억하면서 아픈 마음의 조기(弔旗)를 다는 것에 한정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금요일 오전 빛나는 태양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내걸린 태극기는 얼마나 아름답고 당당한가?! 국기에 담긴 함의는 크게 두 가지다. 국가의 경사스러운 날과 가슴 아픈 날을 온 국민이 함께 돌아보고 같이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소중한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 운명체의 구성원이란 명징한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현대사에는 행복한 기억보다는 불행과 슬픔과 절망으로 점철된 사건이 훨씬 많았다. 해마다 4월과 5월이면 교정을 물들이던 최루탄의 하얀 비말(飛沫)과 눈물로 범벅된 선후배들의 얼굴이 오늘도 삼삼하게 떠오른다. 유난히 행복하고 건강해야 할 20대의 10년 세월을 한숨과 탄식, 절망과 우울로 보내야 했던 세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직도 내게 남아있다. 이런 정황은 최근 몇 년 동안 달라진다. 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한 한국 문화의 힘이 바탕이 되어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새로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와 춤, 드라마와 노래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의 정점을 찍은 것은 2024년 12월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다. 이거야말로 우리가 진정 축하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대 사변(事變)이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언제부턴가 나는 ‘국뽕’에 취하기 시작했다. 나이 서른에 서독일로 유학 나갔다가 경험한 쓰라린 통증이 시나브로 해소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명시적이고 암묵적인 혐오와 멸시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셈이다. 무엇인가 많이 부족하고, 창피하고, 당당하지 못한 한국 사회가 어느 날 문득 선진 사회로 진입했다는 뿌듯한 감동! 나의 ‘국뽕’을 완전히 날려버린 참혹한 비상계엄과 엄중한 내란 사태가 조금씩 진정되면서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80주년 광복절을 맞이하고 있다. 내란 세력의 근본적이고 조속한 척결과 건강하고 행복한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국민의 열망이 합쳐지고 있다. 하나둘씩 밝혀지는 계엄과 내란의 본질을 확인하면서 우리가 가야 할 미래를 생각한다. 이승만의 부당한 ‘반민특위’ 해체로 흐려진 민족정기를 이참에 완벽하게 다시 세움으로써 우리와 우리 어린것들의 미래를 광명으로 빛나게 해야 할 일이다. 이 땅에 더는 계엄과 내란이 없는, 자유-평등-형제애가 넘치는 대한민국 건설이 광복 80주년의 가슴 벅찬 교훈일 것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8-17

나는 두 항구 사이를 걸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물 위에 줄지어 앉아 있는 수많은 요트와 어선이 차가운 지중해 바람을 따라 출렁거렸다. 마르세유는 그리스인이 세운 도시로 그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로의 관문이었다고 한다. 나는 새 지평을 열고자 희망에 부풀었을 누군가를 상상하며 마르세유 구 항구(Vieux-Port)를 걸었다. 부두를 걷다 보니, 마르세유의 대표적 상징 조형물인 파빌리온이 나왔다. 거대한 거울 지붕 구조로, 도시의 하늘을 반사하고 사람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움직이는 풍경화’로 유명한 공간이었다. 나는 주변 풍경이 빛과 어우러져 거울에 아름답게 반사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건너편 마르세유 광장에서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음악 소리가 흘러와 눈송이처럼 내 어깨 위로 내려앉고 사람들의 노래가 축복처럼 광장을 맴돌았다. 나는 화려한 조명 불빛이 도시를 감싸 안은 그 순간을 가슴속에 고이 간직했다. 해마다 겨울이 돌아오면 마르세유 광장에서의 추억이 떠오를 것이다. 언덕 위로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이 보였다. 어부들의 수호성인에게 바치는 기도처였다. 거센 파도 앞에서 두 손 모아 기원하는 것은 어느 나라든 같았으리라. 뱃사람들은 고깃배의 안전과 만선의 꿈, 무사히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한다. 그것은 바다를 향한 간절한 기도이자, 가족과의 약속이다. 내가 살고 있는 포항을 떠올렸다. 동빈내항에 정박해 있는 어선과 갈매기 울음, 생선 비린내에 묻은 소금기, 죽도시장 상인들의 입담이 들려오는 듯해 마르세유 구 항구가 낯설지 않았다. 나는 분명 처음으로 프랑스 땅을 걷고 있는데, 동빈내항의 시간과 냄새가 뒤따라오고 있어 정겨웠다. 이 도시는 오래전부터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들을 받아들였다. 북아프리카 지역과 유럽의 피난민들이 건너와 발자국을 겹겹이 남겼다. 그래서인지 골목길에 머무르고 있으니, 어디선가 북아프리카 사람들이 즐겨먹는 쿠스쿠스 냄새가 풍기고 아랍어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항구는 이방인들에게 처음은 낯선 곳이었지만, 결국에는 삶의 터전이 되었다. 생활의 뿌리를 내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지만, 세월이 흐르고 언어가 섞이면서 문화적 다양성이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마르세유는 하나의 얼굴이 아닌 다채로운 얼굴로 살아가는 도시가 되었다. 포항과 마르세유는 닮은 듯했다. 동빈내항은 한국전쟁 직후 바다를 의지해 살아야 했던 이들의 출발점이었다. 그때는 항구가 곧 생존이었다. 마르세유처럼 동빈내항도 고단한 삶의 이주자들을 받아들였다. 시간이 흘러 포항종합제철을 중심으로 생계를 찾아 전국에서 모여든 이들이 정착했다. 용광로는 노동자를 불러 모았고 그의 가족들은 동빈내항 주변에서 생활했다. 고향 사람과 타 도시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의 서로 다른 억양과 습관이 모여 지금의 포항이 형성되었다. 본토박이들은 타지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모두 끌어안으며 제 몸처럼 품었다. 사물의 이치는 한결같으리라. 바다는 경계를 가르지 않고 흘러들어온 강물과 뒤섞여 움직인다. 이처럼 항구 도시는 항해자들을 수용하고 포용하며 마음을 연다. 마르세유와 포항이 외지인들과의 상생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온 것처럼, 앞으로도 도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삶의 결을 어루만지는 노력이 끊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공동체란 벽을 두는 것이 아니다. 도시에서 함께 살아갈 집의 새로운 지붕을 같이 짓는 일이다. 지역에서 오래 뿌리내린 현지인과 이주민이 각자 개성이 넘치는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어우렁더우렁 공존하는 길을 모색한다면 더욱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성싶다. 그것이 항구를 품은 도시의 진정한 삶일 것이다. 바다는 항해하는 자들을 데려가고 다시 데려온다. 마르세유의 짙푸른 바닷바람을 느끼며 동빈내항으로 돌아올 날을 생각했다. 두 항구는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 둘 사이를 걸었다. 내 발걸음마다 그리움의 흔적을 남겼다. /정미영 수필가

2025-08-13

명상과 침치료 뇌파를 바꾼다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인한 불면, 불안, 두근거림, 소화 장애 같은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몸이 보내는 신호는 분명히 이상하다. 병원 검사를 해도 별다른 문제가 안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증상들 대부분은 자율신경계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나타난다. 한의학에서는 이 자율신경의 흐름과 장부의 기능 정서의 상태까지 함께 고려해서 접근하고 큰 효과를 보고 있다. 자율신경계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나뉜다. 교감신경은 긴장, 각성, 활동을 담당하고 부교감신경은 이완, 회복, 수면, 소화 등을 담당한다. 이 둘이 균형을 이룰 때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현대인들은 일상에서 계속되는 자극과 정보 속에 살기 때문에 교감신경이 늘 흥분된 상태에 놓이기 쉽다. 이 상태가 길어지면 수면의 질이 떨어지고 만성 피로, 소화불량, 가슴 두근거림, 불안, 집중력 저하 같은 다양한 문제가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단순히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뇌파를 긴장 상태인 베타파에서 이완 상태인 알파파나 세타파로 유도해주는 강력한 도구다. 호흡을 천천히 고르게 하면서 감각을 내면으로 돌리는 것만으로도 신경계는 반응하기 시작한다. 심박수와 혈압이 낮아지고 몸 전체가 회복 모드로 전환된다. 뇌에서는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변연계의 흥분이 줄어들고 전두엽의 조절 기능이 살아나면서 감정이 안정된다. 하지만 명상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몸에 긴장이 가득한 상태에서는 명상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렵다. 앉아 있으려 해도 초조하고, 잡념이 끊이지 않는다. 이럴 때 한방치료 특히 자율신경에 직접 자극을 하는 약침치료가 자율신경 조절에 큰 도움이 된다. 성상신경이나 미주신경 익구개 신경절에 있는 혈자리를 약침으로 자극하면 뇌와 장기 사이의 긴장된 신경 회로가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한다. 약침을 맞고 나면 정신이 맑아지거나 긴장된 게 풀리면서 잠이 스르륵 오기도 한다. 이건 부교감신경이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여기에 더해 자율신경을 안정시키는 한약을 병행하면 치료의 지속성과 깊이가 달라진다. 대표적인 처방들에 들어가는 약재들은 복령, 시호, 치자, 황련 등이 있고, 이들 한약은 심장과 간 신장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몸 안의 기혈 흐름을 부드럽게 하며 정서적인 안정감을 높여준다. 단순히 불안함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원인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명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훌륭한 자기치유법이지만 몸과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오히려 명상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땐 억지로 혼자 해보려 애쓰기보다 우선 간단한 걷기나 운동 혹은 스트레칭을 통해 몸을 이완시킨 후 명상에 드는 것이 좋다. 5분 10분 천천히 명상의 시간을 늘려 나가면 된다. 만약 안정이 안된다면 한약과 약침으로 몸의 긴장을 먼저 풀어주는 게 빠른 길이 될 수 있다. 명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깊은 이완과 집중의 상태는 한방치료와 함께할 때 더 안정적으로 더 깊게 접근할 수 있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8-13

방학을 방학답게!

평소 손주들의 하교를 친외할머니가 번갈아 가면서 도왔다. 정한 시간에 학교 돌봄교실에 가서 애들을 마중하고, 약간의 간식을 먹이며 학원에 데려다주었다. 방학이 되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누군가는 종일 집에서 돌봐주고 애들은 방학 내내 학원 뺑뺑이를 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 돌봄교실에 보낼 수밖에 없다. 3학년인 손자는 그렇게 2년, 4번의 방학을 보냈다. 방학이 되어도 학교엘 가야 하니 이게 무슨 방학이야 툴툴 볼멘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안쓰러워 영화관엘 데려가는 일탈을 감행하면 그렇게나 좋아했다. 7월,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며느리는 아이들의 방학 중 스케줄을 짜느라 몇 날 며칠 골머리를 앓는 것 같았다. 도리없이 돌봄교실과 방과 후 수업을 선택할 것이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학원 순례. 손주들은 올 여름방학을 또 그렇게 보낼 게 뻔했다. 이번엔 내가 며칠을 고민한 후 통 큰 결단을 해 아들 내외에게 알렸다. 이번 방학엔 애들에게 방학을 방학답게 누리게 해주자. 돌봄교실도 방과 후 수업도 신청하지 말고 다니던 학원도 최소화해라. 예전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 시골 외갓집, 이모집에 가서 한여름을 보냈듯이, 아예 할머니집에서 방학을 지내도록 해보자. 꼭 다녀야 할 학원은 직접 데려다줄게. 의외로 선선히 내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평소 세 군데 학원을 한 곳으로 줄이는 용단도 내렸다. 난 나대로 애들과 함께 할 방학 버킷리스트를 열심히 짰다. ‘동굴 탐험’, ‘고양이 카페가기’, ‘선비체험’, ‘미술관 가기’, ‘마술 배우기’, ‘대구시티투어버스 타기’ 등등.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어느 날 밤 두 아이가 짐을 잔뜩 챙겨들고 예고없이 들이닥쳤다. 그렇게 아이들의 할머니집 방학살이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에게도 방학 중 버킷리스트를 메모해보라고 했다. 손자는 ‘시내 가서 놀기’, ‘음식 만들어 먹기’, ‘그냥 책읽기’, ‘매미잡기’, ‘할머니와 글씨연습’, ‘놀기 놀기 놀기’. 손녀는 ‘바다에 가서 해뜨는 모습 보며 높이뛰기’, ‘아지트 만들기’, ‘딱 하루 뒹굴거리기’. 방학 중 하루 일과표도 셋이 머리 맞대고 같이 짰다. 7시 반에 일어나고, 8시에 아침 먹고, 11시에 EBS 보기, 9시 반에 자기. 그리고 하루 한 시간 정도 공부 시간을 상의하고 정했다. 그 이외의 시간은 맘대로 하라고 했더니 ‘놀기 놀기 놀기’로 도배를 했다. 그래 그래 그러자. 방학이잖아... 크게 프린트해서 벽에 붙여두었다. 방학이 두 주나 지났다. 그 사이 스파게티와 또띠야피자를 만들어 먹었고, 뒷방은 아지트로 내줬다. 고양이카페에도 가봤다. 지난 토요일엔 벌레잡기를 대신해 예천곤충체험관엘 다녀왔다. 예전부터 알고 지낸 마술사와 약속을 잡아, 오늘 카페에서 두 시간 남짓 마술을 보고 배웠다. 집에 오자마자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마술쇼를 펼치고, 손녀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기부터 썼다. 이렇게 버킷리스트는 하나씩 체크되는데, 하루일과표는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아침엔 늦잠이 일쑤고, 놀기 시간이 아니어도 놀고 공부시간에도 논다. 뭐 어때 봐 준다. 방학이니까…. 손자는 할아버지와 한 침대에서, 손녀는 내 품에 안겨서 잠드는 행복은 덤이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8-13

조국의 사면과 무너진 공정

상식을 가진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조국 전 법무장관의 사면이 최근 결정됐다. 이재명 대통령에 의해서다. 실망스럽다. 조국 전 장관은 의사가 될 역량을 가지지 못한 딸을 각종 편법과 불법을 동원해 의사가 될 자격을 갖춰주려 했고, 아내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와 함께 아들 시험의 답안을 대신 써주는 부정한 행위를 저질렀다. 과거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입버릇처럼 자신이 통치하는 동안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 했다. 조국 씨는 문재인 정권에서 청와대 민정수석과 내각 법무장관을 지냈다. ‘공정’이란 공평하고 올바름을 의미하는 단어란 걸 초등학생도 안다. 조국 씨의 행위가 공정했나? 대답은 뻔하다. 그럼에도 문재인 씨는 자신을 찾아온 이재명 대통령실 정무수석에게 “조국을 사면해 달라” 요청했다. 한심하다. 오죽했으면 민청학련 출신의 노정객 유인태 씨가 “참으로 염치없다”며 핀잔했을까. 조국 전 장관의 사면에 찬성하는 이들은 말한다. “수사와 기소 과정에서 검찰권이 남용됐고, 전수 조사를 하면 조국 정도의 편법과 불법을 사용해 자식을 조력한 장관과 국회의원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맞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렇다면 기간을 한정하지 않고, 의심 가는 행적을 보인 전·현직 장관과 국회의원을 모두 조사한 후 재판에 넘겨 저지른 죄만큼 벌을 주면 될 일이다. 그런 걸 하라고 검사가 있고, 경찰이 있는 것 아닌가. 갖가지 이유를 들이대고 이런저런 사정까지 봐줘가며 죄 지은 자를 대통령 맘대로 풀어주는 것. 잘못 사용된 사면권은 시민의 피로 애써 만들어낸 ‘법에 의한 통치’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행위가 아닐까?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8-13

여야가 당론화한 K스틸법, 신속 처리하길

송언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지난 12일 “50% 고율 관세를 부과받게 된 철강산업의 저탄소 연구개발과 생산설비 확충에 따른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명 ‘K스틸법’을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K스틸법은 국회철강포럼 멤버들을 중심으로 106명의 의원(민주당 66명, 국민의힘 37명, 조국혁신당 1명, 무소속 2명)이 지난달 공동 발의했다. 지난주에는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도 “K스틸법을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했었다. 미국발 ‘관세 폭탄’으로 직격탄을 맞은 철강산업계로선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국회철강포럼 공동대표인 어기구 민주당 의원과 이상휘(포항남·울릉)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K스틸법은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특위’ 설치를 비롯해서 녹색철강특구 지정·규제 특례 부여, 인프라 확충·세제 지원, 녹색철강기술 개발·사업재편 지원, 불공정무역 대응·수입규제 강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세계 각국은 올들어 미국의 자국보호주의 정책과 중국의 저가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철강산업 보호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철강현대화 법안’을 추진하며 철강업 부흥을 노리고 있고, 유럽연합(EU)은 올해 초 ‘철강·금속 액션 플랜’을 발표하고 철강산업 탈탄소화와 글로벌 경쟁력 강화책을 추진 중이다. 국회가 여야 할 것 없이 K스틸법 마련에 나선 것도 이런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야 한다는 인식을 했기 때문이다. 국내 철강업계는 현재 미국의 고율 관세(50%)와 중국산 저가 물량 공세로 사실상 수출길이 막힌 상태다. 미국은 우리나라 철강업계의 가장 큰 수출시장이다. 포스코의 미국 수출액은 전체 수출액의 10% 정도를 차지한다. 앞으로 포스코의 주요 수출처가 흔들리게 되면 중소 협력사들도 위기에 처하고, 제철소가 있는 포항과 광양지역 상권마저 급격하게 악화할 수 있다. 여야 정치권은 오랜만에 정파를 초월해 발의한 K스틸법을 신속하게 처리해 우리 철강업계에 힘을 실어주길 바란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백약이 무효다.

2025-08-13

정권따라 바뀌는 교육정책 피해는 학생 몫

교육이 백년대계라는 명제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 교육현장에서는 정권에 따라 정책이 오락가락하다 보니 교육이 일년소계가 돼 버렸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자주 나온다. 2022년 출범한 대통령 직속의 국가교육위원회는 우리 교육의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설립된 조직이다. 국가교육위는 정권에 관계없이 앞으로 10년 단위로 중장기교육정책을 수립하겠다고 밝힌 바 있지만 지금 봐선 달라질 것 같지가 않다. 이재명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여당은 윤석열 정부의 핵심 교육정책인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를 교육자료로 격하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미 수천억원을 투입한 관련 인프라가 소용없게 됐고, 교육현장도 혼란에 빠졌다. 교과서가 아닌 교육자료로 격하되면 정부 지원이 줄고 줄어든 예산은 학교나 학부모가 부담할 몫이니 이 과정은 없어질 가능성도 있다. 올해부터 전면 시행된 고교학점제도 교사나 학생들의 피로감을 이유로 시행 초기부터 폐지나 보류 목소리가 나온다. 교육부도 제도 개선을 위한 여론 수렴에 나서겠다고 밝히고 있다. 새 정부의 의지 여부에 따라 향방이 정해질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외고, 국제고, 자사고를 폐지하는 법을 개정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 법의 시행령을 고쳐 다시 복원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와 관련한 정책을 공약에 담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의 교육정책을 담당하는 미래교육자치위원회는 자사고, 외고의 일괄 폐지를 제안한 바 있다. 또다시 정책이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민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뒤집어지는 교육정책을 많이 경험했다. 바뀐 정책이 더 나아진 것도 아니다. 학생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이념으로 바뀐 교육정책은 일선 학교에 혼란 안겨주었을 뿐이었다. 교육은 예측 가능성이나 일관성이 있을 때 정책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교육정책은 의견 수렴과 심사숙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은 사교육 의존도를 높이는 결과를 만든다. 정책을 바꾸며 생기는 폐해는 학생들 몫이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

2025-08-13

갑을문화 소멸선언

모두 ‘갑을관계’에 익숙하다. 모든 업무에서 갑은 언제나 상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을은 그에 종속된다. 위계적 구조는 민간기업 사이에서 그치지 않고, 공공영역과 나아가 조직 내부의 관계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직위, 연령, 경력, 출신 배경 등 외형적인 요소가 갑과 을을 규정하며 그에 따라 업무 관계가 형성된다. 갑을 구분은 전문성이나 성실성 등 본질적 기준보다 앞서 작동한다. 파면된 전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특검의 수사 과정에서도 한 장면이 포착됐다. 피의자 측이 경찰의 신문은 거부하고 특별검사가 직접 신문하길 요구했다. ‘검찰은 갑, 경찰은 을’이라는 인식이 작동했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공권력 조직 안에서 상하관계로 계급화된 문화는 기관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훼손한다. 갑을관계가 작동하는 조직에서 의사결정의 흐름은 비논리적으로 흐른다. 갑이 내리는 지시나 요구는 을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기대하고 업무구조는 비판적 사고와 창의성을 억압한다. 을이 실질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가졌더라도 감히 갑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정책이든 사업이든 수준높은 전문적 논의와 협력이 이뤄지기 어렵고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이 반복된다. 결과적으로 구성원의 역량과 전문성을 경시하게 만든다.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면서 조직 전체의 사기는 자연히 떨어진다. 상사의 말 한마디가 절대적 기준이 되는 환경에서는 역량보다 눈치와 충성이 더 중요하다. 실적과 성과보다는 줄을 잘 서는 것이 생존의 방식이 된다. 유능한 사람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관성과 위계에 길들여진 조직의 풍경만 남는다. 갑을위계는 스트레스의 원인이기도 하다. 상호 신뢰보다는 억압과 불신이 조직을 지배한다.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눈치를 보며 경쟁하게 되며 건강한 조직문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내부의 역학은 갈등으로 점차 무거워지고 고스란히 조직전체의 비효율로 되돌아온다. 갑을문화가 업무적 관계를 규정하면 누구의 기여가 어떻게 평가되는지도 모호해진다. 공정한 보상과 인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정한 리더십도 자리잡지 못한다. 갑을풍토에서 유능한 인재가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어 조직은 지속적으로 활력을 잃는다. 사회는 갑을로 돌아가지 않는다. 신속하고 유연한 의사결정, 서로를 존중하는 협력시스템과 전문성을 기초로 하는 효율적 판단이 중요하다. 부당한 권위에 복종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걌다. 그럼에도 우리의 업무환경은 갑을관계를 문화적 기초로 삼는다. 바꿔야 할 것은 사람보다 시스템이다. 직위나 지위, 배경이나 학벌이 아니라 전문성과 성실성에 기반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평가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누구나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역할에 책임을 다하고 적절하게 존중받는 업무환경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정부든 기업이든 업무조직 내외부 어디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당신에게 을이었던 상대방은, 당신은 여러 여건상 할 수 없는 그 일에 최선을 던지는 전문인이 아닌가. 조직의 성격이 무엇이든 조직의 위치와 상관없이 구성원 모두의 자리에서 최상의 역량이 최고의 수준으로 발휘될 때, 관련된 조직들의 역량이 살아나고 전문성이 빛을 발할 터이다. 갑을문화는 사라져야 할 구태 중의 구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8-13

철강 산업을 다시 세우기 위한 정부와 국회의 역할

1970년대 영일만 바닷가에 세워진 포항종합제철(포스코)과 포항철강산업단지는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우리나라 산업화의 산실이다. 특히 포항철강산단은 정부의 공업 입국 정책에 따라 포항제철의 태동과 함께 연관 산업을 유치하고 철강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국내 최초의 지방공업단지로 지정된 이후 국가 경제 도약의 발판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우리 선배들과 동료들의 피땀으로 일군 포항의 철강 산업은 반세기 수많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국가 산업화를 견인한 자부심과 혼이 깃들어 있다. 포항에서 생산된 철강 제품은 건설, 자동차, 조선 등 전후방 산업의 소재로, 오늘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대한민국 제조업의 토대가 됐다. 그러한 포항의 철강 산업이 지금 글로벌 경기 침체, 중국산 저가공세, 산업용 전기료 인상, 미국의 고율 관세 등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다. 지역 내 철강업체 상당수가 가동을 멈췄고, 공장 문을 닫은 기업도 늘고 있다. 대기업조차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중소업체들은 중대한 경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로 인한 고용 감소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으며, 지역 경제는 심각한 침체의 늪에 빠졌다. 산업 일터와 골목상권 등 생계 현장에서는 ‘IMF 때보다도 더욱 힘들다’며 전례 없는 위기로 인해 지역 전체가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국가 기간산업인 철강의 위기는 개별 기업이나 특정 지자체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문제다. 따라서 지역의 산업계와 포항시, 유관 기관단체들은 뜻을 모아 정부 차원의 종합 지원을 담은 철강산업 지원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과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으로 즉각 지정해줄 것을 지속 호소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정부의 보조금과 재정지원, 전기료 인하, 탄소 감축 설비투자 지원,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의 연구개발 지원 등 실효성 있고 폭넓은 지원책 마련도 촉구하고 있다. 다만 정부와 국회는 지금의 위기 상황을 얼마나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철강 산업의 기반 자체가 붕괴할지 모른다는 냉혹한 현실의 경고음이 울리는 사이, 여당은 ‘노란봉투법’ 통과를 외치고, 야당은 이를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로 시간을 끌고자 한다. 법안 하나를 두고 정쟁을 반복하는 동안, 산업을 되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지금 정부와 국회가 해야 할 일은 정쟁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한 입법과 정책 대응이다. 우선 철강품목 고율관세(50%) 유지에 따른 대미수출 철강기업 피해 최소화를 위해 여야가 모처럼 공동 발의한‘K-스틸법(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녹색철강기술 전환을 위한 특별법)’제정이 급박한 상황이다. 동시에 산업용 전기료 인하, 금융·세제 지원, 기업 구조조정의 고용 연계 책임 강화 등 실질적인 방안 또한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기업 역시 책임 있는 경영으로 위기에 처한 지역과 산업 생태계를 함께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철강 산업의 위기는 단순한 포항만의 위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제조업 전체가 무너지는 신호탄이며, 국가 경쟁력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정부와 국회는 현실을 엄중히 직시하고 벼랑 끝에 선 철강 산업을 지킬 책임을 다해야 할 중요한 시기다. 다시 한 번 정부와 국회가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철강 산업을 다시 일으켜 세워 세계적인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특단의 법적‧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해 주실 것을 호소한다. /전익현 포항철강산업단지 관리공단 이사장

2025-08-12

금단

올여름 내 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신호를 보냈다.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밤이면 눈꺼풀이 무거워져도 잠이 오지 않았다. 숨이 가빠지는 순간마다 가슴속 어딘가에서 작은 종이 울렸다. 병원 진료를 받으니 의사는 ‘자율신경계 불균형’이라고 했다. 교감 신경이 필요 이상으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며 마치 경계 태세를 풀지 못하는 병사 같다고 설명했다. 평생 괜찮다며 달려오던 몸이 이제는 더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은밀하지만 단호하게 경고한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내렸던 결정은 커피와의 이별이었다. 아침마다 주방에 들어서면 커피를 내렸다. 뜨거운 물줄기 위로 피어오르는 향기는 하루를 여는 기지개였다. 검은 물결 속에 흩어지는 갈색 거품을 바라보는 그 몇 초는, 나만의 고요한 의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의식을 중단해야 했다. 한 모금만 마셔도 심장이 두 배 속도로 뛰었고 숨이 가빠졌다. 아무리 ‘마임드 콘트롤’을 해 보아도 자의적으로 조절이 되지 않았다. 의사도 커피는 안 되겠다고 했다. 오래된 친구를 문밖으로 내모는 것만큼 서글픔이 밀려왔다. 커피 없는 아침은 텅 비어 있었다. 몸은 불안했고 마음은 허전했다. 마트 진열대에 놓인 원두봉지들이 풍기는 향은 마치 나를 시험하는 유혹 같았다. 텀블러 속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끝이 근질거렸다. 나의 커피 습관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다. 늘 바쁜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기폭제였고 위로였다. 그것이 사라지자 몸뿐 아니라 마음에서도 금단현상이 찾아왔다. 그러다 문뜩 깨달았다. 커피만이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나는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을 놓아왔다. 결혼 후 혼자만의 여행은 먼 꿈이 되었고, 아이를 키우는 동안 책 한권 여유롭게 읽는 시간조차 사치였다. 좋아하던 피아노 건반을 만져본 지는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흐릿하다. 합창단의 단원으로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러본지는 손으로 꼽기도 힘들 정도로 가물하다. 어느날 친구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듣다가 잊고 있었던 손끝의 설렘이 되살아났다. 그 순간 깨달았다. 커피처럼, 삶은 나에게서 많은 것을 조금씩 떼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놓음의 이유는 다양했다. 커피를 놓은 건 건강을 위한 나의 결정이었지만 다른 많은 놓음들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상황이, 책임이, 혹은 나이 듦이 조용히 빼앗아 간 것들이었다. 피아노, 책, 느긋한 저녁 산책···. 그것들은 내 의지가 아닌 삶의 흐름에 휩쓸려 떠나간 것들이었다. 그 부재 앞에서 느끼는 허전함과 초조함은, 커피 금단이 주는 감정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금단은 불편하다. 몸과 마음이 저항하고 자꾸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만 피어나는 가능성도 있다. 커피 대신 나는 허브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맛 같아 밋밋했지만 어느 순간 레몬밤과 케모마일 향이 은근히 스며드는 걸 느꼈다. 피아노 대신 노트북을 펼쳐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오래된 나의 목소리를 다시 찾았다. 몸이 보내온 경고로 나는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빈 자리는 빨리 다른 것으로 채워졌다. 여전히 커피향을 맡으면 가슴이 설레지만 나는 안다. 놓는 것이 반드시 잃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떤 금단은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해주고 오래 잊고 있던 나를 불러낸다. 오늘도 나는 커피 잔 대신 따뜻한 허브차를 손에 쥔다. 향은 옅지만 그 옅음 속에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 창밖을 바라보면 잃어버린 것들이 남긴 빈자리 위로 부드러운 빛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예전의 나는 그 빈자리를 애써 매우려 했고, 매우지 못하면 불안해했다. 하지만 이제는 비워진 자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금단은 우리를 잠시 멈춰 세웠다. 무엇인가를 내려놓고 난 자리에서 우리는 그동안 지나쳐 온 마음의 결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다. 때로는 그것이 상실의 슬픔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커피를 내려놓으며, 놓는다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내 안에서 커피의 자리는 허브차가, 피아노의 자리는 글이, 떠나간 시간의 자리는 다시 나를 만나는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다. 언젠가 이마저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오겠지만 그때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삶은 그렇게 끊임없이 놓고 다시 채우는 과정 속에서 이어진다. /김경아 작가

2025-08-12

대세르비아주의의 탄생:암흑기 세르비아의 빛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민족의 정체성과 세르비아 민족에 대한 단초가 될 만한 요소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만트루크제국의 압제 4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자의든 타의든 세르비아가 독립을 맞이하면서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아왕국을 거쳐 민족이라는 장대한 용어가 사건과 역사와 인물이 조화를 이루어 화려한 부활을 맞는다. 19세기 중엽 수도사인 부크 카라지치(1787~1864)는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출발하는가?’ 등 자문자답하며 세르비아인에 대한 미래에 해답을 찾았다. 그는 언어학에 몰두하면서 발칸반도에 한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원대한 꿈을 꾼 인물이다. 그 뒤를 이어 정치가 가라샤닌(1812년~1874년)의 노력으로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른다. 그는 오랫동안 대세르비아주의 이념에 몰두했다. 그리고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위대한 인물과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세계가 우리(We)와 그들(They)로 규정될 때 가라샤닌을 비롯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역사에서 코소보 전투를 살려냈다. 정의를 내걸었지만, 편향된 애국심이 가슴에 요동쳤고, 권력자 구미를 당겼다. ‘이교도와의 최후의 성전’은 민족주의 발흥에 있어 완벽한 조건을 두루 갖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때부터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이 있다면 세르비아인에게 코소보가 성지로 거듭났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중세 발칸을 호령했던 듀산황제가 거느렸던 영토적 개념이 세르비아뿐이라면 별 문제가 없었다. 타 공화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세르비아인의 국가를 향한 군사적 저항을 정당화해버린다. 이제 더 필요한 것은 없었다. ‘검은 새의 들녘’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 성지로 거듭났고, 20여 년 남짓 제국을 구축했던 듀산황제는 세르비아인 영원한 황제로, 코소보전투가 벌어졌던 1389년 6월 28일은 성 비투스의 날이자, 영원히 기록되어야 하는 성전의 날로 탄생했다. ‘강자 스테판 듀산!’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에 민족이라는 의기에 요동쳤고, 민족 이상에 상처를 내는 일에는 자동적 분기탱천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잊지 못하듯 세르비아인으로서는 민족주의라는 의기가 가슴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역사적 인물들을 세르비아민족주의의 영원히 빛나는 별로 새겨 넣었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살육의 싹이 자라났다. 스테판 듀산이 거느렸던 영역은 세뇌당한 국민 머리에도 반드시 차지해야 할 상징적인 국경선이 되어 버렸다. 20세기에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2차 세계대전에 이어 유고슬라비아 학살전쟁, 더 나아가 20세기 가장 더러운 보스니아전쟁과 코소보 살육전 신념으로 거듭나게 된다. 대세르비아주의라는 망령은 이렇게 해서 창조된 후 도미노처럼 연이은 사건으로 세상을 경악시켰다. 물론 세르비아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극우민족주의 우스타샤 정권이 나치 지원 아래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 살던 세르비아인 35만 명을 학살했던 상처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자신들만 핍박해대니 억울하고 원통할 지경이다. 성지라고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코소보에 이방인들이 들어와 진을 치고 나라를 세웠다며 국제사회에 선언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바가지로 물을 퍼내면 금세 다른 물이 채워지듯 네마냐 왕조가 이슬람제국에 멸망한 후 코소보에 살던 일부 세르비아인은 압제를 피해 지금이 수도 베오그라드를 비롯해 노비사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지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떠나고 난 빈집에 오스만제국이 평정한 알바니아계 이슬람이 몰려들어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코소보 땅에 알바니아인이 80% 이상을 차지하면서 자신감이 붙는다. 나아가 자주적 독립 국가를 선언하며 국경을 긋고 세르비아를 자극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국제사회 동의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냉혹하기만 한 국제사회는 먹을 것 없는 코소보에 독립국가가 세워지든 말든, 폭력이 자행되던 말든 관심 두지 않았다. 그러자 알바니아계 민족주의자들은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자민족 희생을 미끼로 걸었다.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 경찰을 살해해 의도적인 폭력을 부추겼다. 울고 싶은 놈 뺨을 갈겨준 대가는 혹독했다. 알바니아계 민족주의자가 원하는 대로 세르비아는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를 향한 제노사이드를 감행했다. 알바니아계가 의도한 대로 자민족을 희생양으로 삼아 국제사회 관심을 끄는 것에 성공한다. 나토의 개입이 본격화 되자, 세르비아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민족을 위해서라면 역사를 위조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선동과 폭력이 확산되고, 결국 처참한 상처로만 남는다. 알바니아 내 세르비아인 학대가 일어나며, 몬테네그로 내 알바니아계에 대한 핍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게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에서 살아가는 세르비아인 역시 바늘방석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인간이 얼마나 멍청한지를, 또한 악랄해질 수 있는지를 실험 중일 것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8-12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

‘레몬이 생기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라는 영어 속담이 있다. ‘인생이 당신에게 레몬(신맛, 불쾌한 것)을 주면, 그것을 달콤한 레모네이드로 만들어라’라는 의미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생으로부터 레몬을 건네 받으면 단념하고, “어쩔 수 없어, 운명이다. 기회가 없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주위 상황을 탓한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레몬을 건네 받고 ‘이 불행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레몬을 어떻게 레모네이드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예상치 못한 불운, 역경, 실패와 마주했을 때 그 상황을 활용해 긍정적이고 유익한 결과로 바꾸라는 뜻이다. 기업에서 보면,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은 여러 분야에서 다르게 불리지만, 본질적으로는 ‘역경 전환 능력’ 또는 ‘전환력(轉換力)’, ‘회복 탄력성’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불리한 상황, 손실, 실패를 오히려 유리한 기회나 성과로 바꾸는 힘이다.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꾼 한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뉴욕시 모닝사이드 거리 100번지에 살고 있는 ‘델마 톰슨’이라는 여인은 “세계전쟁 당시 제 남편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모하비 사막 근처의 육군으로 배치되었고, 남편과 함께 지내기 위해 그곳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군사작전으로 출동하여 혼자 남았고, 모래 사막과 선인장만 보이고 50도가 넘는 모하비 사막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삶이 너무도 힘들고 차라리 감옥에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부모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는 두 줄로 된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 창살 밖을 내다보았다. 한 사람은 땅의 진흙탕을 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하늘의 별을 보았다.” 이 단 두 줄의 글이 여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하늘의 별을 보기로 마음 먹고, 현재 처한 상황에서 좋은 면을 찾기로 한 것이다. 모하비 사막에 사는 인디언과 멕시코계 사람들과 사귀게 되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돈을 주고 산다고 해도 팔지 않았던 모하비 사막의 매력적인 형태의 선인장과 북미 원산의 다년생 관목인 유카(Yucca)를 선물 받았다. 후에 관상용, 조경 식물산업으로 수익 창출이 되었고, 수 만 년 전에 해저였던 사막 모래에 감춰진 조개의 비밀을 연구하고, 그 연구 결과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여인은 유명인이 되었다. 무엇이 이토록 상황을 변화시켰을까? 모하비 사막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인디언도 그대로였다. 단지, 그 여인이 마음의 태도를 바꾼 것뿐이다. 우리는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고자 하는 단순한 시도를 통해 뒤가 아닌 앞을 보게 된다. 주어진 상황을 탓하며 부정적이던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이것은 창조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고, 바빠지도록 자극하여 지나간 일, 끝난 일 때문에 슬퍼할 시간과 마음이 없도록 할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얻은 것을 활용하는 것보다 손해를 이익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레몬을 레모네이드로 바꾸는 지혜가 필요하고, 그것이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8-12

넘치는 복을 주시는 박필근 할머니

“복 많이 받으세이~ 젊을 때 마이 노소~ 나도 젊을 때는 날아 댕겼니더.” 오랜만에 뵌 박필근 할머니는 여전히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을 나눠주셨다. 짧은 만남 동안에도 계속해서 “복 받으라”라는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이미 박필근 할머니로부터 너무도 많은 복을 받아왔다는 것을. 할머니는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늘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복된 말씀을 건네시는 분. 내가 알고 있는 박필근 할머니는 그런 분이다. 8월 초, 숨 막히는 더위 속에 할머니를 다시 찾은 이유는, 싱가포르 매체 스트레이츠 타임즈(The Straits Times) 에서 202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과 8월 14일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을 맞아 일본군 전시 성노예 피해자분들을 기획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다른 생존자분을 인터뷰한 웬디 테오 특파원은 “오늘 할머니 컨디션은 어떠세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부분 생존자분이 백 세에 가까운 고령이시고, 더위도 심해 나 역시 오늘 할머니의 상태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할머니는 긴 평상 끝에 놓인 의자에 앉아, 마치 세월을 낚듯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디서 왔노?”라고 반가워하시며, “서울서 나 보러 왔단 말이가”라며 연신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동행한 기자님도 할머니의 환대에 감동해 몸 둘 바를 몰라 했고, 우리는 함께 칼국수도 먹고, 마트에 들러 장도 보며 소소하지만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 기자님은 피해 사실을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 아픈 기억을 굳이 꺼내지 않으려는 그 배려에 나도 고마움을 느꼈다. 대신, 일본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이 아직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 소용없니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뉴스를 꼬박꼬박 챙겨보시며 “나는 일본에 사과도 받고 싶고, 배상도 받고 싶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던 그 할머니셨다. 그런 할머니가 이젠 “다 소용없다”라고, “이제 곧 죽는다”라고 되풀이하시는 모습에 우리는 말 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오는 8월 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이다. 올해 포항여성회에서는 환호공원에 세운 평화의 소녀상 건립 10주기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10년 전, 포항에서는 많은 시민들께서 마음을 모아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며, 참으로 뜻깊은 순간을 함께했다. 하지만 지금, 서울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은 바리케이드에 갇혀 보호받고 있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하염없이 기다리시던 수많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고, 이제 박필근 할머니를 포함해 생존해 계신 피해자는 단 여섯 분만이 남아 계신다. 다가오는 8월 14일, 다시금 혐오와 조롱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우리 모두 따뜻한 관심과 존중으로 할머니들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분들이 살아 계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연대와 기억을 다 할 수 있기를. /김은주 포항시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2025-08-12

성과 나오는 경북도 ‘저출생 전쟁’…속도낸다

경북도가 그저께(11일) “올해 시행 중인 ‘저출생과 전쟁 시즌2’ 150개 핵심과제의 상반기 평균 추진율이 54% 수준”이라고 밝혔다. 올해 편성된 국·도비 예산 4485억원 중 58%인 2576억원을 집행한 결과다. 일선 시군에서는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지난 2023년 1월, 저출생과의 전쟁을 선포한 경북도는 매년 100~150여 개의 구체적인 과제를 선정해 이행과정을 타이트하게 점검해 나가고 있다. 이 과제들은 청춘남녀 만남에서부터 출산, 돌봄, 주거, 일‧생활 균형, 양성평등까지 전 생애를 아우르는 정책이다. 대표적인 사업은 ‘K 보듬 6000’이다. 아파트 1층 공간을 비롯해 기존 공동육아 나눔터, 어린이집 등을 유연하게 활용해 자정까지 운영하는 온종일 돌봄 시설을 만드는 사업이다. 현재 도내 12개 시·군에서 58곳을 운영하는 등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올해 처음 138쌍을 지원한 20대 신혼부부 100만원 혼수비용 지원사업도 인기다. 경북도가 주선하는 청춘남녀 만남 프로그램은 남성 경쟁률이 19대 1을 넘을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어르신 일자리와 돌봄을 결합한 조부모 손자녀 돌봄 사업(480명 지원), 아픈 아이 긴급 돌봄센터(13곳), 일자리 편의점(161명 취업) 사업 등도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다. 지난해부터 출생아수에서도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3/4분기 경북도 합계출산율은 0.91명으로 2023년 0.86명보다 크게 상승했다. 경북도의 2024년 출생아 수는 1만467명으로 2023년 1만432명(군위 제외)보다 35명 증가했다. 2015년 이후 9년 연속 감소한 출생아 수가 처음으로 플러스로 전환된 것이다. 올해 들어서도 경북도내 출생아 수는 지난 3월부터 3개월 연속 전년 대비 증가세를 기록하고 있다. 여전히 수도권에 모든 국가자원이 몰리면서 비수도권 소멸 위기가 계속되고 있지만, 경북도의 저출생 극복 정책이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2025-08-12

중대재해 극약처방, 후폭풍 감당할 수 있나

“모든 산재 사망 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직보하라.” 지난 9일 휴가에서 복귀한 이재명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처음으로 내린 지시 사항이다. 전날 경기 의정부 DL건설 아파트 공사장에서 50대 노동자가 추락해 사망한 사건을 보고 받고 나온 주문이다. 건설현장 사망사고가 연이어 발생하자, 대통령이 직접 실시간 챙기겠다는 의미다. 중대 재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는 대통령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고 공감이 간다. 소년공 생활을 겪어본 이 대통령에겐 산재 사고가 남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 중대재해 사고 발생 건수는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는 매일 2명 이상 산재 사고로 사망했다는 통계도 있다. 특히 건설업의 산재 사망률은 다른 업종은 물론 선진국에 비해서도 몇 배 높다. 대통령이 직접 나설 정도로 긴급대책이 필요한 상황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국무회의에서 포스코이앤씨의 잇따른 공사현장 사망사고를 두고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책했다. 그 뒤 이 회사의 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 외국인 근로자 심정지 사고가 또 발생하자 “면허취소 등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 이후 건설업계는 산재 불안감으로 인해 공포 분위기에 휩싸여있다. 대구시내에서도 포스코이앤씨가 시공중인 아파트 건설현장 4곳이 중단된 상태다. 우리나라는 지난 2022년부터 최고 경영자에게도 산재의 형사 책임을 묻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강경한 중대재해처벌법을 시행 중이다. 그렇지만 이 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중대재해가 줄어들지 않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현장의 안전 불감증이 주요 산재 원인이겠지만 건설업계의 하도급 시스템, 외국인 근로자의 소통 문제, 고령 인력 등의 구조적인 이유도 있다. 특히 위험도가 높은 공사장에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외국인 근로자가 주로 배치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건설업계뿐 아니라 지난 2024년 1월 27일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5인이상 모든 사업장에 확대 적용됨에 따라 대구·경북지역 영세기업들도 매일 초비상 상태다. 금형·주물업 등 대구시내 공단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뿌리산업 사장들은 매일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기분으로 근무한다고 한다. 뜨거운 쇳물이나 무거운 금속을 다루는 공정이 있는 업종이 많아 직원들이 잠시만 방심해도 산재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재 발생 가능성이 상존하는 조선·철강·화학업종의 대기업 CEO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중대재해법상 형사처벌 근거가 되는 경영진 과실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의도를 가진 ‘고의 과실’이나 ‘중대한 과실’이 아니더라도 재해만 발생하면 대부분 경영진 과실로 인정될 가능성이 크다. 중소기업 중에는 만약 사고가 나서 사장이 구속되면 그날로 사업을 접어야 하는 업체가 대부분이다. 자연적 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계도 막연해진다. 극약처방만으로 산재사고를 막는 방법은 뿔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08-12

지방교육재정 안정을 위한 근본대책 나와야

지방교육재정은 일선 시도교육청이 교육환경 개선과 교육 프로그램 개발 등 일선학교를 운영하는데 소요되는 교육청의 핵심예산이다. 재원은 내국세의 20.79%에 해당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과 지방자치단체 전입금, 기타 수입으로 이뤄진다. 문제는 지방교육재정이 내국세와 연동돼 있어 나라 살림이 어려우면 교육예산도 같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11일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가 주최한 ‘지방교육재정의 현재와 미래’란 제목의 국회 토론회에 참석한 임태희 경기도 교육감은 “최근 3년간 세수 감소와 정책 변경 등으로 지방교육재정은 최소 20조원 이상 결손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국 교육현장은 필수적인 교육사업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인천의 한 초등학교는 예산 부족으로 하루에 두 번씩 교실 냉방을 중단하는 일도 있다는 사례도 언급이 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 정부 들어 고교 무상교육에 필요한 비용에 대해 국가지원을 연장하는 지방교육재정 교부금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것이다. 지방교육재정 교부금의 계속된 감소 속에 교부금법이 연장된 것은 교육청의 재정난 해소에 다소 숨통을 틔워 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그래도 걱정인 것은 고교 무상교육의 정부 지원을 담은 교부금법의 개정이 2027년 말까지 3년으로 한정됐다는 것이다. 3년 후면 또다시 존폐여부를 논의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는 것. 또 일각에서는 학령인구 감소를 고려해 교부금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지방교육재정을 위한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강은희 전국 교육감협의회회장(대구시 교육감)은 “학령 인구가 줄었다고 해서 교육재정까지 줄이는 단순 논리는 위험하다”며 교육 재정의 안정적 확보와 공교육 본질을 지키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하자고 제의했다. 지방교육재정은 공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투자가 된다. 공교육에 대한 투자는 사교육 수요를 억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또 저출산 문제와도 맞닿아 있는 문제다. 공교육 재정을 갑자기 줄이는 것도 쉽지 않다. 교육재정의 안정을 위해 정부와 교육계 등이 공동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2025-08-12

모병제 시대 올까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보다 병력 수를 늘리는 것이다. 전투원의 손실은 고려치 않고, 많은 전투원을 한곳으로 빠른 시간 안에 집결시켜 적의 방어벽을 무너뜨리는 것을 두고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 부른다. 인구가 많은 중국이 한국전쟁 때 썼던 수법이다. 그러나 이젠 많은 군사를 동원하던 시대는 끝났다. 대량 살상무기의 개발로 인해전술은 오히려 병력 손실을 키울 위험한 전술로 꼽힌다. 현대전에 맞지 않다. 소총이나 칼을 무기로 싸우던 예전에나 통하던 전략이다. 군사 수를 앞세웠던 중국도 지금은 병력보다는 기술전략 중심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우리나라 국군 병력이 급격히 줄고 있다고 한다. 최근 6년 사이 11만 명이 줄었다. 최근 국방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군의 병력 수는 45만명 수준이다. 이는 국방부가 실제 전투 수행 시 필요한 최소 병력 수 50만명보다 5만명이나 모자란다. 군 병력이 급격히 줄어든 것은 저출산과 고령화가 직접적 원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출산율을 보면 군병력은 당분간 늘어나기가 어렵다. 군병력의 급격한 감소는 북한과 대치한 우리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특히 군 병력 감소로 사단급 이상 부대도 59곳(2006년)에서 42곳으로 크게 줄었다. 사단급 부대 한 군데가 줄면 인근 부대가 전력을 분담한다. 현실적으로 병력 배치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돌발 상황에 대응하는 속도도 늦어진다. 전문가들은 군병력 감소에 대응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고 한다. 모병제 도입이 생각보다 빨리 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8-12

어화, 벗님네야

“어화, 벗님네야. 우리 소리 들어보소!” 사람 손길 멈춘 두 번째 해 여름날. 우거진 푸른 생명의 노랫가락이 녹지 숲에 여울진다. 도시 한가운데서 진초록 풀들의 노래를 듣다니, 푸진 행운이다. 도심의 S 초등학교 서북쪽에 사람이 만든 녹지가 있다. 그 안엔 다 커 보이는 여러 그루 소나무가 적당한 거리로 살고, 측백나무 몇 주, 사철나무 서너 그루, 느티나무 두어 주도 함께한다. 나무들 사이에 잔디, 쑥, 망초, 바랭이, 강아지풀, 클로버 등 여러 종의 야생 풀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못 보던 외래종도 함께 지낸다. 메마른 시가지에 이런 녹지가 있음은 주민에겐 분명 축복이다. 성경이 가르치듯,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그 안에 살다가 그 품으로 돌아가는 존재니까. 사람들은 녹지 안 의자에서 담소하며 쉬어가고, 훌라후프를 하며, 애완견과 함께 산책도 즐긴다. 이를테면, 녹지는 동네공원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시민 삶의 질을 높이고 있다. 한 주에 대여섯 번 녹지 숲을 걸어서 오간 지가 10년째다. 하니, 나도 이 숲과 교감하는 사람이리라. 녹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지 않다. 그런 게 녹지와 시민에겐 중요치 않으니까. 재작년까지, 한 해 두세 번 사람이 벌초했다. 한데, 작년부터 벌초가 사라졌다. 학교 문 오른쪽 녹지 중간쯤에 내걸린 현수막 하나 때문일 거다. 바람에 살랑이는 현수막엔 이렇게 씌어 있다. “…공원토지는 개인 사유지입니다. 주인의 허락 없이 본 토지를 사용 시 고발될 수 있습니다. -토지 소유자 알림- ” 그랬다. 이 녹지는 공공지가 아니고 사유지였다. 아마도, 지주가 벌초했던 측에 이의를 제기한 결과가 바로 현수막이리라. 바다 쪽으로 1/3 지점에 녹지를 가로질러 학교진입로가 있다. 벌초할 때는 그 왼쪽 녹지에도 산책로가 있었다. 벌초 안 하니 풀이 무성해져 발길도 끊어지고, 산책로도 사라졌다. 벌초는 달리 말하면, ‘풀에 대한 사람의 규제’다. 규제를 푸니 2년 만에 녹지는 풍성한 원래 모습으로 바뀌었다. 넉넉한 자연, 진초록 숲이 부르는 노랫가락을 마음의 귀로 듣는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좀 바라보소···.” 불현듯 ‘인간사회도 자연과 원리는 같구나!’하고 속 소리가 가락에 실려 들린다. 벌초 곧, 규제를 안 하니까 녹지가 자생력으로 싱그런 자연 숲을 이루었듯, 자유민주주의 국가사회도 규제를 줄여야 자생력‧경쟁력이 높아질 게 아닌가. 미국은 자국 경제를 위해 ‘관세 포탄’을 세계에 터뜨렸다. 각국이 전전긍긍 협상에 응하며 세계 경제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관세 협상 같은 국익 챙기기보다 노란봉투법‧방송 3법, 법인세‧주식거래세 인상 등 국가경쟁력을 해칠 수 있는 전체주의적 입법과 규제정책에 넋이 나가 있다. 한심하다. 장기 집권을 위한 표를 의식한 때문인가. 부디 정치인들이 ‘벌초 않기’를 깨달아 개인과 당보다 나라와 국민을 더 헤아려, ‘어화, 벗님네야. 우리나라 앗싸!’라고 노래하는 길로 나서기 바란다. /강길수 수필가

2025-08-11

술꾼에 관한 그럴듯한 수명 계산법

장수는 모든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자 행복의 큰 부분이다. 한때 환갑이 장수의 기준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환갑은 장수마을에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인간의 수명이 날로 길어진다. 오래 살면 장수이지, 다른 장수가 있겠느냐는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에 물음표를 던져 본다. 오래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생물학적 장수가 장수일까? 아니면 진정한 장수가 따로 있을까? 술꾼의 수명에 관한 아래의 계산 방식을 보라. 90을 살아도 70에 죽은 자가 있으며, 70에 죽어도 90을 산 자가 있다. 술꾼의 수명을 언급하기 전에 물리학적 시간 개념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다소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현대물리학에서는 시간은 실재가 아니며,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한다. 전통 물리학에서의 시간은, 존재 하는 것이며, 흐르는 것이며, 과거, 현재, 미래로 나타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대물리학에서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상대적), 흐르지 않으며(심리적 인식),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양자중력이론에서는 기본방정식에 시간 항이 없다. Wheeler-DeWitt 방정식). 요약하자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는 것이다(까를로 로벨리). 현대 물리학적 관점에서 시간은 존재 하지 않는 환상으로 치부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고전 물리학적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한다. 물리학은 그렇다 치고. 시간이라는 게 당연히 존재하고, 세월도 흐른다는 개념을 전제로 술꾼의 수명을 계산하여 보자. 재미 삼아. 주 2회 술을 마시는 술꾼을 예로 들어보자. 이 술꾼은 술을 마실 때마다 과음하는 주당이다. 그는 퇴근 후 저녁 내내 술을 마시고 밤늦게 귀가한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므로 다음 날 오후 정도 되어야 술이 제대로 깬다. 술을 마시는 데 필요한 시간과 술을 깨는 데 필요한 시간이 모두 술로 인하여 소비되는 시간이다. 이 주당은 1회 음주로 사실상 하루를 소비한다. 일주일에 2회 마시면 2일이 소요되므로 한 달에 8일(2일 4주)을 술을 마시는 데 소비한다, 계산의 편의상 하루를 양보하여 일주일(7일)이라 치자. 그러면 이 술꾼은 한 달에 일주일을 술을 마시면서 보내는 셈이다. 일 년으로 계산하면 12주 술을 마시고, 이를 달로 환산하면 3달이다. 20세부터 70세까지 50년을 술을 마시면 150달을 술을 마신 셈이고, 이는 12년의 세월이다. 어디 시간 낭비만 있으랴. 에너지, 인격, 돈, 가정의 화목 등등이 술과 함께 허무하게 소비된다. 술을 끊으면 술로 인하여 소비되는 그 시간에 또 다른 의미 있고 창조적인 것들을 할 수 있다. 술의 노예가 되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기가 힘들다. 수처작주는 그림의 떡이다. 주인이 사람이 아니고, 술이다. 필자도 한때 그런 삶을 살았으나, 일찍이 깨달았다. 오래 살았다고 다 오래 산 것이 아닐지 모른다. 진정한 장수라는 타이틀은, 의미 있는 삶을 산 자에게 붙여져야 할지도 모른다. ‘한 번의 만취는 이틀의 시간을 뺏는다. 술은 마시는 자의 적이요, 인생을 단축시키는 달콤한 독이다. 술은 빌린 기쁨을 높은 이자로 갚게 만든다.’ 술의 지옥에서 탈출하자. 술을 끊으면 새로운 삶이 열릴지니, 천국이 그대의 것이라. /공봉학 변호사

2025-08-11

로봇 선도도시 대구서 열리는 로봇월드컵

전 세계의 인재가 모여 AI·로봇 기술을 겨루는 ‘로봇 월드컵 앤 써밋 2025’가 어제(11일)부터 대구 엑스코에서 열리고 있다. 세계로봇스포츠연맹(FIRA)이 30주년을 맞아 개최하는 이번 행사에는 미국·영국· 중국·독일·캐나다 등 전 세계 17개국에서 900여 명의 로봇 유망주들이 참여한다. 이들은 직접 프로그래밍한 로봇으로 △이족보행 자율로봇경기 △자율주행차·스타트업 경진대회 △드론 활용 재난구조 레이싱 △청소년 창의 과제 리그 등 4개 리그 46개 종목에서 경연을 벌인다. 또 동시에 ‘2025 국제 로봇올림피아드’ 한국대회 본선 경기도 같은 날 열려 전국 초중고 766개팀 1300여 명의 학생들이 AI자율주행 등 10개 종목에서 실력을 겨룬다. 로봇 종주도시를 꿈꾸는 대구에서 로봇 관련한 세계적 축제가 열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홍성주 대구시 경제부시장은 “전 세계 로봇인재들이 모이는 축제로 로봇산업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것”이라 했다. 대구는 10여 년 전부터 섬유와 자동차 부품도시에서 미래첨단산업 도시로 산업구조를 바꾸고 있다. IT·로봇산업은 대구시가 추진하는 미래 신산업 중 하나다. 특히 로봇산업 육성을 위해 3000여 기업이 참여하는 로봇클러스터를 구축해 로봇기업의 해외시장 진출과 비즈니스 기회 확대를 돕고 있다. 로봇의 실증과 사업화 기능을 평가할 로봇테스트필드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확보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AI·로봇 글로벌혁신특구로 지정돼 정부의 지원도 가능하게 됐다. 특히 최근 로봇과 미래차 융합거점이 될 제2국가산단 건설이 확정되면서 대구는 명실공히 로봇산업의 실증과 생산을 담당하는 중추도시로서 위상을 모두 갖추었다. 세계 로봇경연대회가 대구에서 개최된 것은 대구로봇산업과의 연계성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로봇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끌어올리는 좋은 계기가 된다. 또 로봇산업에 대한 학생들의 친화력을 높여줌으로써 인재 확보에도 유리하다. 이번 로봇대회가 대구가 로봇산업의 종주도시임을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2025-08-11

전공의 전원 복귀해 의료공백 해소해 달라

사직 전공의를 대상으로 한 하반기 전공의 모집이 어제(11일)부터 시작됐다. 전국 수련병원들은 자체 일정에 따라 오는 29일까지 인턴과 레지던트를 선발한다. 보건복지부 수련환경평가위원회가 병원별 신청을 받아 공고한 모집인원은 인턴 3006명, 레지던트 1년차 3207명, 레지던트 상급연차(2∼4년차) 7285명 등 총 1만3498명이다. 정부는 사직 전공의가 원래 근무하던 병원과 과목으로 돌아오는 경우엔 정원이 초과되더라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1년 6개월간 수련병원을 떠났던 전공의들이 복귀하게 되면 의대 증원사태로 촉발된 의정 갈등이 해소될 전망이어서 무엇보다 다행이다. 지난해 2월 학교를 떠났던 의대생들은 이미 전원 복귀한 상태다. 다만, 전공의 모집이 전원 복귀 흐름으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입대한 사직 전공의도 있고, 또 일부는 일반 병의원에서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과별로 복귀 분위기가 엇갈린다고 한다. 영상의학과·정형외과·피부과·안과·성형외과 등 인기과 전공의들은 복귀에 적극적이지만, 이른바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응급의학과 등 비인기과 전공의들은 일부 복귀를 주저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지난 6월 수련을 재개한 전공의들도 내·외·산·소 등 필수과목보다는 ‘인기과’에 몰렸다. 전공의들이 복귀하게 되면, 수련병원에 따라서는 다양한 후유증이 발생할 것이다. 교수와 전공의뿐 아니라 먼저 복귀한 전공의와 새로 복귀할 전공의 사이의 갈등, 업무 영역을 둘러싼 전공의와 PA(진료 지원) 간호사의 대립 등등이 예상된다. 잔류 전공의들 사이에서는 “이탈 전공의들이 돌아오면 기존에 일하던 전공의들이 피해를 보는 것 아니냐”는 취지의 얘기가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이 정상화 되려면 응급실·중환자실·분만실 같은 긴급 의료 현장을 지키는 전공의들의 복귀가 필수적이다. 전공의들이 하루빨리 의료현장으로 돌아와 앞으로 ‘응급실 뺑뺑이’ 등으로 인한 국민 불안이 말끔하게 해소되길 기대한다.

2025-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