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정오를 지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 세상은 더 이상 ‘채움‘의 공간이 아니라 정갈한 ‘비움’의 전시장으로 변모한다. 그간 내 삶을 지탱해 온 무수한 탐닉과 안일, 그리고 소중했던 인연들이 하나둘씩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비로소 ‘안녕’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다시 읽는다.
한때 나의 밤을 위로했던 것은 자극적인 음식들이었다. 늦은 밤 수업을 마치고 마주하던 라면의 매콤한 증기, 바삭한 튀김 옷 속에 숨겨진 고소한 육즙, 치즈의 녹진함이 주는 안온함. 그것들은 고단한 나의 하루를 보상받고자 했던 치기 어린 보상 심리였다.
그러나 이제 내 몸은 정직한 가계부처럼 쌓아온 세월의 청구서를 내민다. 혈관 속을 흐르는 엄중한 경고등 앞에서 나는 이 매혹적인 ‘독’들과 작별을 선포한다. 혀끝의 찰나적 쾌락을 위해 생의 총량을 갉아먹던 미련함을 거두고 이제는 덤덤한 채소의 식감과 맑은 물의 투명함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것은 금욕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빈둥거리며 소파에 파묻혀 책장을 넘기거나 스크린의 잔상에 몰입하던 시간은 달콤한 늪이었다. 게으름은 영혼의 휴식이라는 미명 하에 나를 침잠시켰고 움직이지 않는 육체는 서서히 활력을 잃어갔다.
그 활력의 부재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내 몸의 영토를 잠식해 온 소리 없는 퇴조였다. 거울 앞에 서면 낯선 중년의 여인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때는 가볍고 활기찬 보폭을 자랑했던 육신은 중력의 법칙을 이겨내지 못하고 처져 있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관절은 세월의 마모를 하소연했다. 내면의 의지는 육체의 한계에 굴복해 가는 타협이 필요한 시기라 절실히 말하고 있다. 내 몸이 보내는 비명을‘편안함’이라는 기만적인 단어로 덮어두고 있었음을 이제야 시인한다. 나를 지탱하던 기둥들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찰나, 내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절박함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엘리베이터의 편리함 대신 계단의 가파른 정직함을 택했다. 한 계단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차오르는 숨 가쁨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원초적인 박동이다. 식후의 나른함을 뿌리치고 길 위로 나서는 행위는 관성대로 살아가던 어제의 나를 부정하고 매일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수행이기도 하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흐를 때마다 나는 내 몸 안에 고여있던 나태의 앙금들을 씻어낸다.
가장 아픈 안녕은 사람에게서 온다. 내 생의 전부였던 아이들은 어느새 제 깃털을 고르고 스스로의 하늘을 찾아 비상한다. 아이들이 떠난 빈방에 고이는 적막은 처음엔 서늘한 통증이었으나 이제는 그 고요를, 나와 아이들을 향한 성장의 향기로 읽어내려 노력한다.
또한, 삶의 한 페이지를 함께 써 내려갔던 아버지의 예고 없는 작별을 경험하며 나는 만남보다 이별이 더 본질적인 삶의 태도임을 깨닫는다. 떠나보내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아버지가 내 삶에 남긴 무늬를 오롯이 간직하겠다는 다짐이다. 이제 나는 부재의 시간 속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걸어온 긴 궤적을 삶을 지탱하는 옹이로 바꾸어 나가는 중이다.
안녕은 본래 ‘안부’를 묻는 인사이자 ‘평안’을 기원하는 기도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 사랑하는 이들이 남기고 간 여백은 처음엔 메울 길 없는 허공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깨닫는다. 그 빈자리가 있기에 비로소 바람이 통하고 빛이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빽빽하게 들어찬 인연의 숲에서는 보이지 않던 나 자신의 민낯이 관계의 낙엽이 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선명해진다. 중년의 안녕은 결핍이 아니라 정교한 조각이다. 불필요한 인연의 잔가지들을 쳐내고 남은 옹이 진 나무처럼, 나는 이제 홀로 서는 법을 배우며 그 고독의 여백 속에 나만의 사유를 채워 넣는다.
/김경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