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정치에서 공천의 중요성은 상상 이상이다. 원로 정치인들은 ‘헌법을 고치는 일보다 선거법을 고치는 게 어렵다’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렵고, 중요한 게 공천이다. 한국 같은 양당제 구조에서는 양대 정당 공천 없이는 당선이 어렵다. 그만큼 유권자는 정당의 공천을 믿는다. 정당은 주민이 원하는 후보를 선별해 내고, 유권자는 좋은 후보를 추천해 주는 정당을 믿고, 지지한다.
이런 유권자의 신뢰를 개인적, 정파적 이익을 위해 팔아먹는 일이 빈번하다. 선거제도나 공천제도의 공정성을 높이는 기술보다 유권자의 신뢰를 악용하는 정치 술수가 더 빠르고 교묘하게 진화했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이 그랬다. 그래도 방향성은 분명했다. ‘이재명의 민주당’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노골적이었다. 그런데 요즘 국민의힘은 이도 저도 아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욕심은 많은데, 미련하다.
지난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당 지지율은 46%인데, 국민의힘 지지율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19%다. 탄핵 직후 정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국민의힘 지지율이 가장 높은 대구·경북에서조차 27%로 민주당 지지율과 같다. 부산·울산·경남의 경우 국민의힘 지지율이 26%로 민주당(35%)에 한참 뒤처진다.
이런 상태로는 두 달 뒤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이 당선을 기대할 곳이 거의 없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주 여러 방송 인터뷰에서 “서울과 부산에서 승리하는 것이···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선거를 잘 치러냈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기준”이라고 말했다. 적절한 평론이다. 하지만 당 지도부가 여유롭게 평론이나 할 시점인가. 선거 패배의 책임을 미리 회피한다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다른 지역 국민의힘 후보들은 이유도 모르고 일격을 당한 꼴이다.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나. 이재명 정부가 잘해서 이 지경인가. 아니면 국민의힘이 자책골을 넣고 있는 건가. 장 대표가 꼽은 서울과 부산은 겨룰 만한가. 한국갤럽 조사에서 서울은 민주당(45%)이 국민의힘(18%)을 압도한다. 가장 유력한 후보인 오세훈 현 서울시장은 “18% 지지율로 어떻게 선거하느냐”라면서 “빨간색 입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부산·충북 등 전국이 명백한 기준도 없는 컷오프 논란, 공천 잡음으로 난장판이다.
경기도는 후보가 없어서 쩔쩔맨다. 빨간 옷이 아니라 흰옷을 입고 선거운동 하겠다고 한다. 부산도 여론조사에서 무너졌다.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전재수 후보가 20.3%, 국민의힘 박형준 현 시장은 15.9%였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대구는 후보가 너무 넘쳐서 문제다. 만만해 보인 모양이다. 그런데도 리얼미터 조사에서 김부겸 전 총리(민주당)가 어떤 국민의힘 후보도 이긴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나마 표 차가 가장 적었던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주호영 의원만 콕 찍어 컷오프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시장을 선택하는 건 시민인데, 시민의 뜻과는 거꾸로 간다.
장 대표는 지지율 하락을 오히려 ‘절윤(絶尹)’ 탓이라고 한다. “왜 우리 당은 저를 중심으로 뭉치지를 못하나”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정당 내 세력 간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민주당도 ABC론을 놓고 시끌시끌하다. 쉽게 말해 명분과 실리로 갈랐다. 그렇지만 국민의힘 균열에는 명분도 없고, 실리도 없다.
이명박·박근혜 갈등은 오죽했나. 그런데도 2012년 이명박 정부 말 한나라당 지지율이 폭락했을 때,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총선을 진두지휘해 승리했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 상징색도 빨간색으로 바꿨다. 민주당 압승이 예상되던 총선에서 과반을 차지했다. 박 전 대통령의 2004년 ‘천막당사’, 2012년대통령 선거의 ‘경제민주화’ 아젠다 선점도 국민이 믿도록 진심을 보여줘 성공한 사례다.
극단적인 감정풀이는 당장 속이 후련할지 모른다. 그러나 선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권자는 ‘하고 싶은 말’을 해도, 정치 지도자는 ‘해야 할 말’을 한다. 정치인이 극단 주장으로 선동하는 건 결국 선거보다 당권에 욕심이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