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파리혁명의 영향으로 독일혁명이 연이어 일어나자 중부유럽과 발칸반도 내 민족들의 홀로서기 위한 몸부림이 본격화된다. 이때 헝가리에서 반 합스부르크제국에 대항하는 대규모 무력시위가 발생한다.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합스부르크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크로아티아를 부추겨 헝가리를 치도록 치밀한 계획을 짰다.
크로아티아에 슬라보니아와 달마티아는 물론 자그레브까지 헝가리로부터 독립을 미끼로 군사를 동원해 헝가리를 치도록 종용했다. 크로아티아로선 목이 빠지도록 바라던 바였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합스부르크제국 육군대령 요시프 옐라취치를 크로아티아 왕인 반에 올려 계획을 실행하고자 했다. 이때 세르비아인들까지 합세하면서 두 정치지도자가 처음으로 함께 군사행동을 개시하게 된다. 실로 역사적인 일이었다.
1848년 7월 옐라취치는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진격했다. 이때 세르비아 군대가 후방에서 크로아티아를 지원하면서 헝가리를 압박했다. 러시아마저 제국 내 중소 민족의 반란을 우려해 오스트리아를 돕겠다고 나서면서 졸지에 헝가리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결국 1849년 5월 헝가리의 이유 있는 반항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강대국과의 약속은 휴지에 불과했다. 합스부르크제국은 크로아티아의 소신 있는 노력에도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렸다. 헝가리 지배에서는 벗어났다곤 하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 속국으로 존재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배신감을 느끼기도 전에 당장 민족의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떨어졌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로이센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등장하면서 1862년에는 독일제국은 게르만민족만의 단합을 부르짖는다. 동시에 합스부르크제국의 영토 일부 공국들을 흡수해버린다. 오스트리아의 항전도 독일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면서 오스트리아는 오스만터키와 함께 점차 제국의 기력을 잃어갔다.
오스트리아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러시아의 도전을 받아 또 망신창이가 되면서 긴 세월 동안 유럽을 호령하면서 해가지지 않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다.
19세기 후반,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헝가리로서도 만만하게 변해버린 오스트리아에 도전장을 내밀고 왕실은 하나로 하되, 공동의 군대와 평등한 외교와 경제정책에 합의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이중제국이 탄생한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독립의 꿈에 부풀어 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또 다시 해안도시와 내륙이 갈라지는 아픔을 겪으며 이들의 지배 속으로 들고 말았다. 지겹도록 피지배자의 역사가 이어졌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편입된 슬로베니아와 달마티아를 제외하고 크로아티아와 보이보디나는 헝가리에 끈질기게 괴롭힘 당했다.
이때 강력한 리더십으로 대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주창한 안테 스타르췌비치가 크로아티아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극우 ‘권리당’을 창당해 스스로 당수에 오른다. 그리고 훗날 크로아티아 극우민족주의의 ‘우스타샤’(크로아티아어로 반란이란 뜻의 ‘우스타샤’란 단체가 자주 등장한다)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이제 크로아티아민족주의는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즘까지 확산하면서 세르비아는 물론, 심지어 역사적으로 늘 치고 박았던 불가리아 청년들까지 합세했다.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려 만만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넘보았다.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곳은 모두 세르비아국가라는 대세르비아주의처럼, 이곳 보스니아에 가톨릭인구 18%를 크로아티아 사람으로 분류하면서 이미 오스만트루크 이전 크로아티아 중세왕국이 차지했던 보스니아 브르바스강 서남지역을 장악했던 사실을 상기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도 상황이 바뀌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주의 열정은 탄력받았다. 헝가리는 크로아티아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재정 독립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낀 헝가리는 두 민족을 갈라놓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짰다. 그해 10월 가장 염려하던 보스니아지역을 오스트리아가 완전히 자신들의 영역으로 집어삼키면서 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서가 극에 달했다. 하지만 헝가리의 선택은 소수민족의 탄압, 즉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에 대한 압제였다. 이는 두 민족 사이에 차별화를 가함으로써 갈라놓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헝가리는 이들에게 독립 국가를 세우려 한다는 얼토당토 않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연합정당 내의 세르비아인 지도자들을 잡아들여 고문했다. 이때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였으니, 밖에서 보았을 때 크로아티아인은 방관자로 낙인 찍혀 누명을 쓰게 된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최일선 방어선(세르비아인들이 자치행정을 구성하면서 자신들 의지로 살아가던) 보이나 그라니짜 지역을 크로아티아 행정구역으로 넘기면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정착한 세르비아인 반감이 극에 달했다. 헝가리 계획대로 두 민족 간 첨예한 갈등이 이어지면서 20세기 민족 간 폭력에 당위성이 쌓여가고 있었다. 훗날 또 한 편의 가공할 폭력의 새판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