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합스부르크제국 최전선이 크로아티아라면, 오스만트루크제국 최전선은 세르비아가 된다. 이때부터 가공할 폭력의 역사적 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세르비아인들이 합스부르크 지배지역인 크로아티아와 보이보디나 지방으로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왔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알바니아와 보스니아로 이동했고, 북동쪽의 살기 좋은 달마티아로 들어가기도 했다. 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터키제국 국경선의 경우 세르비아인이 거주민의 3분의 1에 달했다. 세르비아 사람들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로 터전을 옮겨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목숨을 건 국경탈출은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타국 내 세르비아인들이 흩어져 살게 되고, 훗날 대세르비아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 이들의 후손들은 자진에서 혼란을 부추기다 폭력의 선봉에 선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하층민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 친 헝가리 인사들에 의해 선진문물 헝가리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자칭 정치 지식인의 외침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가련한 짝사랑은 차별을 가져왔다. 헝가리인은 크로아티아인을 미개인 취급을 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영웅 토미슬라브는 물론 민족의 기원을 찾아내 역사를 기록했고, 중세 왕국 발전과정과 찬란한 문화의 향기를 덧입혀 자존감까지 충족했다.
오스만과 마지막 전투 ‘피의 평원’도 새롭게 조명했다. 그들만의 성경이 발간되는가 하면, 크로아티아 전설이나 설화 등 사연을 들춰내 아픔을 노래하면서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리고 고고학적, 인류사 연구가 이루어지며 그 뿌리를 더 멀리 더 깊숙하게 박아 놓았다. 종교의 정통성과 민족성을 결부해 하느님으로부터 일방적 동의를 얻는다.
더불어 유럽에 불어 닥친 르네상스를 경험한 해외파들이 조국 크로아티아를 찾으면서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 민족 자주성과 민족성에 대한 의식, 즉 ‘우리(We)’와 ‘그들(They)’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크로아티아 민족 정체성 형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세르비아처럼 오스만트루크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면 단절과 암흑의 시대를 보내야 했을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에 들게 됨으로써 사회경제적 분야는 물론 문화발전과 국민의식이 함께 상승일로를 걸었다고 봐야 한다. 이에 힘입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민족주의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단어에 의기만 충만해지게 된다.
실상은 크로아티아 토미슬라브가 세운 최초의 중세 왕국은 후손들이 헝가리에 복속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들이 선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대별, 지역별로 각기 다른 대국의 그늘에서 숨 쉬며 살았기 때문이다. 아드리아해 도시들은 베네치아 영향 아래, 북부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지역은 헝가리 지배하에, 크로아티아 서쪽 아드리아해로 불쑥 튀어나간 이스트라반도는 오스트리아 영향 아래, 그리고 두브로브니크는 중세 해양국가 라구사공국으로 진화(?)되면서 19세기를 맞는다. 결과적으로 크로아티아는 주위로부터 억압 받으면서 성장했고, 그 영향으로 가톨릭국가가 생겨났다.
과정과 결과가 말하듯 이때부터 세르비아와 여타 발칸의 여러 지역과 갈라지면서 문화적 이질감이 형성된다. 민족성과 가치관마저 차이를 보이며 누가 보더라도 도무지 합쳐질 수 없는 일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하나의 남슬라브 나라를 기세 좋게 추진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포함해 살육과 내전의 씨를 뿌리고 있었던 셈이다.
각설, 민족주의 탄생에서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예술과 문화와 문학과 언어로 찬란하게 옷을 입힐 스토리텔링만 남았다. 민족이동부터 발칸정착, 주위세력들로부터 침략 받으면서 나름의 문화로 승화시킨 자신들만의 종교와 문화적 자존, 그리고 민족 정체성에 완성을 이루어 내고야 만다. 민족 정체성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인들은 토착세력 토대 위에서 비잔티움제국 문화와 프랑크, 로마교회, 합스부르크제국, 게르만 문화뿐만이 아니라 헝가리 전통적인 문화까지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면서 접목됐다. 그야말로 다양성의 짬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는 고유한 문화와 동일한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는 아이러니를 가감 없이 내보였다. 우리만의 고유한 언어의 통일과 주변국들 견제를 위해 만들어낸 절박한 민족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니까.
그런데 크로아티아 역사에서 전혀 의도치 않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을 꺾으며 기세를 이어갔다. 비록 해군이 넬슨 제독에게 패해 영국 입성에는 실패했지만, 프랑스 육군은 전 유럽에 악명을 떨쳤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805년 아드리아해의 북쪽 이탈리아와 경계를 이루는 이스트라반도와 달마티아 해안지역을 접수해버렸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