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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격동의 계절 그리스 근현대

1차 세계대전 종식 후 유럽이 요동쳤다. 오스트리아제국 합스부르크왕가와 러시아 로마노프 왕정이 역사에서 사라졌고, 발칸반도에 슬라브족의 독립국이 불사조 정신으로 세워지면서 긴장 국면에 접어들었다. 전쟁 후유증으로 유럽경제가 몰락하면서 반대로 미국이 세계 강자로 급부상했다. 1930년대 세계는 긴박한 리듬을 타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라마다 휘청대기는 엇비슷했다. 대공황으로 인해 대량으로 실업자를 양산했고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벗어날 기미조차 없었다. 이탈리아에는 무솔리니가 등장하면서 파시즘 체제가 수립되어 국제질서를 위협했다. 배타적 민족주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자, 공산주의가 파시즘의 대항마로 설득력을 얻었다. 패전국 독일은 더욱 심각했다. 막대한 전쟁배상금으로 독일은 위기에 몰렸다. 그런데 그 여파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때 등장한 나치당 히틀러는 어려운 국민의 심경을 정확하게 읽었고, 독일 국민은 태양을 등지고 열변을 토하는 그의 연설에 열광했다. 히틀러가 독일 정권을 탈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독일 국민이 히틀러를 선택했던 것이다. 1935년 베르사유조약에 불만을 품었던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급습하고 동아프리카제국을 세우는 데 성공한다. 1938년 패전 이후 굴욕감에 치를 떨던 독일은 에스파냐 내전에 개입하면서 뮌헨협정을 이끌어 내 보헤미아 지방을 자국 영토로 만들었다. 그해 3월 1차 세계대전 동맹국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베르사유조약의 무효화를 선언했다. 뒤이어 체코를 침략해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탈리아 역시 발칸반도로 진격해 알바니아를 식민국가로 만들었다. 독일은 국제사회 눈치만 보던 소련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재갈을 물렸다. 공산당을 기피하는 파시즘이 공산주의 원조국과 손잡는 아이러니가 연출되었던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이념적 대립이었다. 그동안 그리스는 내부로부터 곪아갔다. 1924년 3월 25일 터키와 전쟁 패전의 책임을 물어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웠지만 혼란을 거듭하다가 1936년 군부 내 실권자인 이오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했다. 전제군주 타도와 평등을 외치는 공산주의 바람은 발칸반도 신생 독립국에 의외로 거셌다. 국민은 그리스를 공산주의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메탁사스 군부를 지지했다. 왕당파였던 메탁사스가 왕정 복귀에 성공하면서 망명 중이던 게오르기오스 2세를 불러들여 국왕에 앉혔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의회와 정당을 함께 해산시켰으며, 헌법상 권리를 모두 백지화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메탁사스는 자국민 통제에 맞는 체제를 위해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을 모방했던 것이다.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는 허수아비일 뿐 메탁사스는 1941년 후두암에 걸려 죽기까지 절대 권력을 차지했다. 그 와중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0년 10월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그리스가 영국에 기우는 것을 염려해 그리스를 침략했다. 알바니아를 점령했던 무솔리니가 발칸반도 욕심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의외였다. 그리스 군의 대항 능력은 기대 이상, 이탈리아는 히틀러가 혀를 찰 정도로 전투력이 형편없었고, 알바니아에서 패한 후 도망치듯 물러나고 말았다. 나치는 소련 침공을 계획하고 쿠데타로 정신없는 유고를 10일 만에 점령하고 괴뢰정부를 세운 후 그리스에 영국군 비행장을 파괴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하늘에서 폭탄을 퍼붓고, 해변으로 전차와 독일군을 상륙시켰다. 영국이 개입했으나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후퇴했다. 그리스 총사령관 파파고스는 조상이 남긴 문화유산만이라도 지킬 마음으로 독일에 항복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라면 그리스도 대한민국 못지않았다. 독재 치하 그리스 사람들은 터키독립전쟁에서 그랬듯 지하무장투쟁을 펼쳤다. 점령국 독일군에 의한 그리스 내 유대인 학살도 이어졌다. 워낙 어마어마한 사건이라 희생자에 누가 될까 언급하지 않겠다. 1944년 11월 마침내 그리스는 연합군의 노력으로 독일 손아귀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발칸반도에 유일하게 공산화되지 않은 그리스를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애지중지 했다. 만약 그리스마저 공산화가 된다면 지중해가 소련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선지 전쟁이 끝난 후, 나치에 저항했던 그리스 레지스탕스가 소련을 견제하려는 처칠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대조적으로, 나치에 부역한 우파 민병대를 지원하면서 1946년 3월 30일부터 3년 7개월간 그리스 내전이라는 복선이 깔리고 만다. 어쩌면 이토록 한국전쟁 전 상황과 닮았을까. 프랑스가 나치 괴뢰정부에 조금이라도 가담한 인사들을 그냥 두지 않았던 것과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김일성이 남침하자 가장 먼저 돕기로 나선 국가가 그리스란 사실이 놀랍지 않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5-20

격동의 계절 그리스 근현대 ①발칸전쟁과 1차 세계대전

발칸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로서는 러시아의 발칸침략에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영국에서 배타적 민족주의, 광신적 애국을 주창하는 징고이즘(JINGOISM)이 분위기를 타면서 러시아 타도 운동이 불길처럼 번졌다. 기세에 눌린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요구하는 대로 협상 테이블에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고, 산스테파노조약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유럽 정세는 또 다시 먹구름 속에 들었다. 그리스 독립정부도 시류에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예견했듯 초대국왕 오토가 그리스 국민 정변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뒤이어 강대국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왕위를 이어받은 덴마크 출신의 게오르기오스 1세가 입헌군주정과 흡사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게오르기오스 1세는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려 대그리스주의라는 향수에 젖은 국민 신뢰를 얻는다. 1897년 국민 지지 속에 오스만터키와의 전쟁을 불렀다. 게오르기오스 1세는 아들 콘스탄티노스 1세에게 군대를 주어 출전시켰다. 그러나 의기만 충만했지 전쟁준비는 부족했다. 1897년 4월 그리스는 터키에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터진 후에야 패배를 인정했다. 크레타를 국제자치령으로 인정해야 했고, 영토 일부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00만 터키 파운드를 전쟁 배상금으로 물어야 했다. 그리스 본토는 온전했으니 그만하길 다행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오스트리아가 신생강국 도이칠란트의 뒷배를 믿고 발칸반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이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발칸의 나라들, 즉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등은 1912년 힘을 합치기 위해 발칸동맹을 맺으면서 터키와 오스트리아 이 둘을 동시에 견제했다. 드디어 발칸동맹과 터키와의 한 판 승부, 1차 발칸전쟁이 벌어졌다. 처음 터키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나라는 스스로 전사의 나라 몬테네그로였다. 이에 발칸동맹국이 하나 둘씩 합세하자 예상을 뒤엎다. 대제국 오스만터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유럽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기실 터키 주력부대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한 판 전투가 벌어지던 중이라 잔여 병력을 상대로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터키로서는 뼈아픈 패전이었다. 이로 인해 현재 터키 국경이 된 이스탄불을 비롯해 인근지역만 남기고 500년을 호령했던 대제국은 영광의 이름만 남게 된다. 제2차 발칸전쟁은 욕심이 부른 난타전이었다. 1913년 6월 29일 불가리아는 발칸의 맹주라는 장대한 꿈을 품고 전쟁을 일으킨다. 불가리아는 기습적으로 마케도니아를 선점해 넓은 영토를 수중에 넣는데 성공했다. 불가리아와 경쟁관계에 있던 루마니아도 관망 자세에서 승리가 빤해 보이는 곳을 숟가락을 걸쳤다. 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의 영원한 맞수로 생각했던 터키까지 발칸 동맹군에 가담했고, 전사군단 몬테네그로도 빠질세라 거들었다. 그러자 사면초가에 몰린 불가리아는 개전 두 달 만에 두 손발 다 들고 말았다. 말 그대로 엄청난 상처만 남긴 전쟁이었다. 그리스를 비롯해 세르비아 등 승전국은 다투어 전리품을 챙겼다. 덕분에 불가리아 영토만 쪼그라들었다. 그리스 게오르기오스 1세가 불가리아 비밀조직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때를 같이하여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출신 19세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한 발의 총성이 유럽 전역을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넣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이 철없는 청년이 쏜 총에 희생되었다. 대세르비아주의는 보스니아를 합병함으로써 가능하지만, 점령국 오스트리아가 걸림돌이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차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로선 발칸반도를 지배의 구실로선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열아홉 살 청년에 의해 시작된 전쟁에서 그리스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는 응당 발칸반도였다. 그리스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세르비아 등 연합군에 가담해 루마니아와 손잡고 불가리아를 공격해 승전국이 된다. 불가리아는 오스트리아와 도이치제국으로 줄을 잘못 선 탓에 또다시 패전국 신세로 전락하면서 발칸반도 승전국, 특히 세르비아와 루마니아에 땅덩어리를 내주어야 했다. 오스트리아도 역사에서 제국이란 깃발을 내려야 했다. 러시아 또한 볼셰비키혁명으로 공산화가 되면서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된다. 다행일까. 그리스는 승전국이 되면서 기세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세를 몰아 대그리스주의 꿈을 앞당기려 했다. 하지만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웠다. 세계대전의 포화가 채 가라앉기도 전인 1919년 그리스는 또다시 터키제국을 막무가내로 공격했다. 아무리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 종이호랑이라 할지라도 제국의 에너지를 얕보았다. 1922년에 끝난 이 전쟁에서 그리스가 대패하면서 드디어 대그리스주의는 꼬리를 감추어야 했다.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던 것이다. /스토리텔링 작가

2025-05-06

오스만제국 치하 그리스 독립

그리스는 1814년에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가 ‘헤타이리아 필리케’가 조직되고 1821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이 펼쳐진다. 그리스 독립은 유럽인들의 관심도 지대했다.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이슬람 압제에 신음하는 그리스는 유럽 역사와 문화, 더 나아가 정신적 뿌리로써 반드시 독립시켜야 할 땅이었다. 그 이면에는 오래전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비잔티움 천도를 계기로 그리스어가 표준어가 되면서 동로마가 오스만제국에 멸망하기까지 1100년 넘게 그리스어를 사용한 것도 한몫했다. 서구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그리스를 최초의 유럽으로 여기듯 그리스와 로마는 자신들 문화와 태생적 정신적 뿌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1822년 1월, 그리스는 독립을 선언하고 공화국 헌법을 제정했으나, 오스만제국이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이때 서구사회는 예술과 문학은 물론, 과학기술 발전에 진일보하면서 전쟁 무기까지 상상을 초월했고,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오스트리아와 오스만트루크 두 제국의 넓은 영토가 식욕을 자극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신성 강국으로 떠오르는 프로이센까지 두 제국에 압박을 가해왔다. 기세에 밀린 오스만제국은 점점 쪼그라들었으며, 넓은 영토를 차지한 오스만제국으로서는 서아시아 나라들과 페르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지중해 곳곳에서 터지는 전쟁도 모른척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실신 일보직전에 그리스가 독립을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리스 독립에 더욱 힘이 실린 것은 때마침 18세기 말부터 유럽에는 낭만주의란 광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고전적 엄격함과 사회 규범을 중시한 신고전주의에 대항해 떠오른 낭만주의였다. 일파만파, 유럽에 미치는 낭만주의 사조는 ‘그리스 사랑 운동’으로 이식되면서 그리스 독립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화두가 됐다. 그리스 독립이라는 이 영웅적인 명제에 자발적으로 전쟁 비용을 쾌척하는가 하면,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 등 스스로 전쟁에 참여하려는 젊은이들이 발칸으로 몰려들었다. 독립전쟁의 횃불을 높이 든 그리스는 ‘자유냐 죽음이냐(Eleutheria e Thanatos)’구호 아래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스 독립에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연합했고, 자발적 용사들이 그리스로 몰려들자 탄력을 받으면서 1827년 독립의 꿈을 이룬다. 그해 10월 20일 지중해를 접한 그리스 나바리노(필로스) 전투에서 오스만군대가 궤멸당하다시피 하면서다. 그리고 1829년 그리스가 국제사회에 정식국가로 인정받으면서 여타 민족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용기를 안겨준다. 1832년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참석한 런던회의에서 비잔티움제국 핏줄이면서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 출신 왕자 오톤(Othon)을 그리스 초대 국왕에 앉혔다. 전제군주국가가 된 그리스로서는 좋다 싫다 할 여유가 없었다. 비잔티움 핏줄로 왕위 계보를 이었으니 정통성을 강조한 진골 중의 진골을 환영했다. 17세 젊은 왕자는 바이에른 출신 조력자와 3천5백여 명 군인을 배에 태워서 그리스에 입성했다. 이후 영국 차관은행의 높은 이자율은 그리스 국민의 허리를 휘청거리게 했다. 더구나 그리스 정교를 믿는 나라 국왕의 종교가 로마 가톨릭이었다. 이렇게 되자 국민들로부터 위엄은커녕 군부 지지도 받지 못했고, 어느 한 구석이라도 존경받을만한 요소라곤 없었다. 덧붙이자면, 1836년 발칸반도에서 민족주의가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던 때 프랑스인이 그리스를 여행한 후에 한 말이다. “투르크족의 노예로 살아가던 그리스 사람들 모습은 실로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독립 후의 그리스는 끔찍하기만 했다. 절도와 폭력, 방화와 암살이 그리스인 삶이자 취미가 되어 있었다.” 한편 오스만터키와 오스트리아 역시 식민국가에서 불길처럼 번지는 독립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와는 반대로 유럽 각국이 두 제국의 기운을 꺾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부동항 확보라는 러시아의 오래된 꿈이 서진으로 이어지며 발칸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러시아가 흑해를 둘러싼 발칸지역을 기습적으로 침략하자 깜짝 놀란 프랑스와 영국이 오스만제국을 돕기 위해 나섰다. 잠시 적의 적은 아군이었다. 프랑스는 물론 영국으로선 인도로 가는 무역길이 막혀버리기 때문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1853년 러시아가 두 강대국에 의해 주춤주춤 발칸반도에서 후퇴를 거듭하자 이에 만족하지 않은 프랑스와 영국은 크림반도까지 따라가 세바스토폴 해군기지를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내 땅에서 남의 군대끼리 치고 박는 모습을 지켜만 보던 오스만제국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허울뿐인 존재로 국제사회에 낙인찍힌다. 조선 구한말 당시 청나라와 일본이,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에서 벌인 두 전쟁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그 심정이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박필우스토리텔링 작가

2025-04-22

오스만제국 치하 그리스 독립 ①식민시대와 그리스 정교

1453년 5월, 비잔티움이 오스만투르크 메메트 2세에 의해 함락되면서 그리스는 물론 발칸반도에 오스만투르크 통치시대가 도래했다. 그리스는 로마 500년에 이어 400년 가까이 침묵의 역사를 경험해야 했다. 오스만투르크는 합스부르크왕가 지배에 들어 있던 발칸반도 북쪽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기독교 교권에서 이슬람 교권으로 탈바꿈시켰다. 발칸반도 내 이슬람 압제하의 기독교는 대내외적으로 몸을 사리거나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만, 몸은 통제할 수 있어도 믿음과 사상만은 어쩔 수 없었다. 식민지인 마지막 자존심이 종교였고, 목숨을 건 신앙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은 여느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민족 종교를 인정하면서 관대함을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슬람화 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식민지 백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이상은 무거운 세금과 신분차별은 감수해야 했다. 제국 내 교회 건물 역시 이슬람 사원보다 더 크게 지을 수 없었다. 이교도에 대해 굴욕감을 주기 위해 교회 출입문은 지상에서 높이 1m이상 만들 수 없다는 조항까지 달았다. 식민지배 종교인만큼 기어서 들어가고 기어서 나오란 뜻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면을 1m 낮춰 교회를 올리면서 드나드는 문을 2m 높이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오스만제국은 군인이라면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공평하게 땅으로 보상을 해주었다. 그렇게 되자 시간이 지날수록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리스는 물론 세르비아 명문가들조차 개종에 동참한다. 토착종교와 뒤섞인 느슨한 기독교였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특히 이슬람으로 개종이 많이 이루어졌다. 같은 민족이지만 종교가 달랐고, 이웃 간에도 종교가 달랐으며, 같은 핏줄을 가진 친족 간에도 종교가 뒤엉키는 상황으로 변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훗날 가공할만한 아비규환의 판이 깔리고 있었다. 발칸반도 오스만투르크 식민지 중 이슬람으로 개종하든 안하든 병역의 의무는 공평하게 졌다. 침략전쟁에는 식민지 백성이라도 피해갈 수 없었다. 어쩌면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자원이었을 법했다. 오스만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변모시킨 여세를 몰아 동쪽 페르시아와 아랍세계를, 남쪽으로는 북부 아프리카와 이집트를 평정한 후 본격적으로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유럽은 합스부르크왕가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가 크고 작게 치고받으며 유럽세계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진실, ‘영원한 제국’은 없다. 오스만제국은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과 계속된 전쟁에서 귀족의 힘이 막강해지자 반대로 술탄 권력은 초라해져갔다. 더구나 러시아마저 오스만제국 등에 칼을 들이대는 형국으로 변하고, 1571년 스페인 함대를 중심으로 베네치아공국-신성로마제국의 연합군과 ‘레판토 해전’에서 맞붙어 궤멸되면서 오스만제국은 종이호랑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귀족들은 손에 쥔 권력을 유지하는데 정신이 팔려 르네상스를 경험한 서유럽의 경제발전과 가공할 무기에는 애써 눈을 감았다. 특히 오스만 직업군인 에니체리 횡포가 날로 심해지는 와중에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개신교도들 반란을 돕기 위해 오스트리아 공격에 나선 것이 결정적 패착이었다. 난공불락 빈을 포위했지만, 위기를 느낀 인근 폴란드를 중심으로 가톨릭국가 연합군 8만 명이 빈을 돕기 위해 출정했다. 1683년 칼렌베르크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오스만제국은 결정타를 맞고 말았다. 이 승리를 계기로 연합세력은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대 이슬람전선을 펼치게 된다. 오스만제국은 안간힘을 썼지만, 뒤이어 1798년 나폴레옹과 한 판 전투에서 단 일주일 만에 이집트를 통째로 내줘야 했으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됐다. 그리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스 정교 전통을 지켜가며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더구나 부동항 확보라는 목표에 국운을 건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은 툭하면 치고받았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이러한 틈새를 공략하며 국제정세 흐름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18세기 말이 되면서 불길처럼 번진 민족주의가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고, 19세기 초가 되자 그리스 사람들은 경제력이 높아지는 동시에 미국의 독립선언과 프랑스 혁명이라는 큰 물줄기에 합류하면서 독립에 대한 욕구가 더욱 물밀듯 밀려왔다. 민족이란 깃발 아래 종교와 언어, 문화를 앞세워 흩어지고 새롭게 뭉치면서 비장미 넘치는 기운이 샘솟았다. 민족이라는 의기 앞에 헤쳐 모여의 동기가 부여되면서 독립 열망이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는 초승달(사실 그믐달이지만)제국 오스만이 지배하고 있는 땅덩어리를 더 많이 가지려 불쏘시게 역할을 자처한 제국주의 소산이었다. 대제국을 유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도 위협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발칸반도 나라들 역시 독립 대열에 빠지지 않았다. 그 선두에 그리스가 있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3-25

‘악마의 채찍’ 아틸라 ②유럽의 지도를 바꾼 영웅의 최후

비잔티움제국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틸라가 강요했던 상거래 기준을 지키지 않았고, 훈에서 도망친 자들을 받아들이면서 아틸라를 또 한 번 자극했다. 아틸라로선 용서할 수 없었다. 447년, 제2차 발칸원정을 일으킨 아틸라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비잔틴을 공격해 들어갔다. 소피아와 마르키아노 폴리스 등 성채를 정복하고, 도시를 약탈하면서 진군을 이어갔다. 그리스 중북부의 테살로니키를 지나 이스탄불 외곽에 군사를 주둔해 비잔티움을 포위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그때서야 자신의 성급함을 깨달았다. 급하게 정무관을 아틸라에게 보내 협상하게 했다. 아틸라는 이들의 휴전 제의를 받아들인다. 대신 ‘아나톨리아 협정’을 보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다. ‘비잔티움은 전쟁 배상금으로 금 6000리브레(약 2700kg)를 물리는 것은 물론, 매년 연공을 3배 인상하여 2100리브레(약 945kg)로 올려 바칠 것.’ 테오도시우스 2세는 경악했다. 이대로라면 비잔티움제국의 허리는 휘어질 대로 휘어져 신권마저 날아갈 판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아틸라의 암살을 계획한다. 그러나 이도 내부 배신자에 의해 실패로 끝나자 치욕적인 결과만 가져왔다. 해결책이라곤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는 수밖에 없었다. 아틸라가 이처럼 관대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비잔티움을 둘러싼 견고한 테오도시우스 성벽 난공불락의 요새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제국을 장악하는 황제와 신민들과의 탄탄한 결속력, 목숨을 불사할 비잔티움 군과 시민의 항전의지를 읽었다. 자신들의 군대도 얼마간 피해를 보아야 할 것은 자명했다. 아틸라는 비잔티움을 넘어 서로마로 향했다. 내분과 이민족의 침략으로 허약한 로마였다고는 하지만, 한 때 유럽을 호령했던 도시였다. 서로마는 아틸라에게 조공을 바치면서도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총사령관 아에티우스가 있었고, 주변 민족들과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용병을 충원했다. 훈족의 군사체제를 모방해 기병을 양성하면서 새로운 전술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451년 헝가리에서 서쪽을 향해 진군을 시작한 것은 훈제국의 군대만이 아니었다.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등 훈제국의 복속민 군대가 연합해 무려 20만 대군을 형성했다. 3월 중순이 되면서 세 곳으로 나눠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향했다. 서로마 역시 아에티우스를 필두로 프랑크족과 서고트족 등이 합세해 연합군을 형성했다. 그들 역시 20만 대군이 조직되면서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451년 4월 초순, 결전의 날이 밝았다.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두 진영이 마주했다. 40만 명의 병사가 어우러진 싸움은 막상막하, 승패가 쉽게 나지 않았다. 아틸라도 놀랐다. 그해 6월 중순이 되면서 양 진영은 더 물러서지 않았다. 더위에 질병, 군량미마저 바닥을 보였다. 마지막 전투는 꼬박 하루 동안 계속되었다. 아비규환과 하늘을 울리는 비명이 뒤섞이고,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함성,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요동쳤다. 결국 로마 아에티우스는 훈제국의 군대에 포위당해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고, 서고트 테오도리크 1세가 전사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흘러 강이 되면서 쌍방 16만 5천 명이 죽고 나서야 싸움을 멈췄다. 결과는 무승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서유럽 사가들은 이 전쟁을 서로마의 대승으로 본다. 로마군대가 궤멸을 면했고, 아틸라 스스로 물러났다는 이유였다. 아틸라는 지친 몸을 이끌고 남은 병사들을 독려해 한 달 가까운 긴 여정 끝에 제국의 수도 헝가리로 돌아갔다. 아틸라가 이를 갈며 인내하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훈제국의 병사들은 사기를 되찾았다. 일 년 전의 전투를 잊지 않았다. 452년 봄이 되면서 아틸라는 정예 기병 10만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드리아해 연안 이탈리아 북부를 정복하면서 서로마 황제에 오른 호노리우스가 수도로 정한 라벤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요동치는 민중을 달래기 위해 교황 레오 1세의 건의를 받아들인 황제는 사절단을 급조했다. 사절단 대표 레오 1세 교황이 아틸라를 만나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아틸라는 철군을 결심했다. 군에 질병이 돌았고, 식량도 바닥을 드러냈다. 제국으로 돌아온 아틸라의 다음 정복 대상은 사산조 페르시아였다. 그러나 그 꿈은 요원해졌다. 서로마원정에서 돌아온 후 일 년을 채 넘기기도 전인 453년 봄, 새로운 여인을 맞은 결혼식 날 밤에 피를 쏟으며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신의 채찍 아틸라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만약 훈족이 유럽을 침략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어쩌면 유럽은 이슬람의 천국으로 변해 있지 않을까. 역사를 토대로 상상을 발휘해 스토리를 꾸며보시길 바란다. 보는 방향에 따라 무척 재미있는 역사가 전개될지 누가 아는가? ‘History If!’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3-11

‘악마의 채찍’ 아틸라 ① 훈족 유럽을 유린하다

“전쟁의 신 아레스(Ares)의 검이 아틸라에게 주어지다” 앞선 ‘도미노게임 민족의 대이동’에 대해 살짝 간만 보고 넘긴 탓에 미련이 남아 역사를 거슬러 잠시 돌아가기로 한다. 4세기 중반, 카스피해 북쪽에 훈족이 나타났다. 이들의 생김은 흉노족을 똑 닮았고, 흉노와 발음도 비슷했다. 러시아에서 카스피해로 흐르는 볼가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아시아, 서쪽은 유럽으로 나뉜다. 유럽인들 눈에는 흉포하게 생긴 사람들이 말을 휘몰아 괴성을 지르며 불쑥불쑥 나타나자 그야말로 공포에 질렸다. 이들은 그 옛날 중국 한나라에 밀려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한 후 종적이 묘연해진 흉노의 후예들이었다. 훈족이 카스피해 북쪽에서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나라와 힘을 합친 남흉노에 패한 서흉노 잔존 세력은 고배의 쓴 잔을 삼키며 서진을 이어갔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넓은 평원이 펼쳐진 곳을 찾아 이동을 계속했다. 이들은 대략 2세기 동안 이동하면서 힘을 길렀다. 투르키스탄 서쪽 일대에 도착한 이들은 그동안 사라져가던 문화와 민족의 동질성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서진 과정에 여러 잡다한 주변의 종족들과 합병하거나 정복하면서 힘을 키웠다. 특히 서아시아와 동유럽에 살던 게르만족과도 피가 섞인다. 그러다 기후변화와 목축 등 그 장애가 나타나자 재차 서쪽으로 이동해 카스피해 북쪽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훈족은 4세기 중반이 되면서 가장 먼저 볼가강과 돈강 유역에서 한가롭게 살아가던 ‘알란(Alan)’을 침략했다. 뒤이어 도나우강 동쪽, 즉 동유럽의 동고트를 정복한다. 서쪽으로 서진을 계속한 훈족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남서부와 몰도바 북부를 흐르는 드네스트르강을 건너 서고트족마저 짓 뭉겨버린다. 이 소식은 바람처럼 전해지면서 전 유럽에 확산되고, 공포는 동쪽으로부터 밀려들고 있었다. 게르만민족 대이동의 서막이 열리며 로마의 앞날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훈족은 장장 80여 년간 유럽의 판도를 뒤흔들며 역사를 주물렀다. 375년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된 해다. 즉 동고트족, 서고트족, 프랑크족, 반달족, 앵글족, 색슨족, 부르군트족, 유트족 등 유럽에 이동의 역사가 시작됨과 동시에 일대 피바람이 불면서 폭력과 약탈의 역사가 이어진다. 훈족은 오늘날 발칸반도의 루마니아 중서부 지역인 트란실바니아에 훈왕국을 세운다. 378년 봄, 훈 군대는 게르만족을 몰아내면서 서진을 이어갔다. 쫓겨난 게르만족들이 로마제국의 영토로 몰려들었다. 헝가리 티사 강변에 살고 있던, 나름 야만족이면서 용맹하다고 소문난 반달족이었지만, 훈 군사에 의해 서쪽으로 쫓겨 가면서 멀고도 먼 이베리아반도까지 이동해 그곳에 반달왕국을 세워 훗날 서로마 유린에 앞장서기도 한다. 당시 로마는 사실상 동서로 분열되어 갈등으로 치닫고 있었을 때였다. 395년 무렵,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고 본격적으로 동·서 분열의 수순을 밟기 시작했던 로마에 훈족의 침략이라는 악재가 닥쳤다. 400년경이 되어서도 훈족의 원정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부터 명실공히 훈왕국에 욕망의 상징 ‘제국’이란 이름을 붙인다. 트리키아 총독이 훈족과의 평화를 구걸하러 찾아왔을 때다. 훈제국의 황제 울드즈는 이렇게 말했다. “태양이 뜨는 곳에서 태양이 지는 곳까지 우리의 영토로 만들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폭력의 자만이 가득 찬 인간의 본능이 이어졌다. 그랬던 야망 덩어리, 훈제국의 걸출한 인물 울드즈가 410년에 죽었다. 그렇지만 유럽의 패권은 여전히 훈제국의 손에 있었다. 아레스가 파괴와 살상을 일삼고, 피를 보기를 즐기는 전쟁의 신이라는 점에서 아틸라를 그에 대입시켰다는 것은 그만큼 광폭한 존재로 여겼다는 뜻이다. 433년, 28세에 왕위에 등극한 아틸라는 거침없었다. 아틸라는 어린 시절부터 숙부 루아를 따라다니며 숱한 전쟁을 치렀으며, 각 도시의 지리와 통치방식까지 익혔다. 아틸라의 지도력 아래 이민족으로는 유럽 가장 깊은 곳까지 밀고 온 훈족을 사람들은 ‘신의 응징’으로 불렀다. 유럽 전역과 로마제국을 벌벌 떨게 만든 아틸라는 걸출한 지도력과 그를 따르는 부하들, 부족장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 등 단기간에 세계를 장악한 그의 능력은 탁월했다. 밀려드는 게르만족으로부터 굳건하게 걸어 잠그는데 성공한 비잔티움제국과는 달리, 서로마는 도미노처럼 일어나는 민족의 대이동에 의해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서로마 영내를 마음대로 들락거리는 이민족은 약탈을 일삼으며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침략에 노출된 농민들은 급기야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로마의 명장이자 서로마 총사령관이었던 아에티우스는 급하게 훈제국의 아틸라에게 SOS를 타전했고, 아틸라는 불감청고소원이라, 이에 응하면서 농민반란을 진압하였다. 유럽은 이제 아틸라의 공포에 숨을 죽여야 했다. 하지만 비잔티움제국의 테오도시우스 2세는 달랐다. (계속)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2-24

발칸반도 민족주의 ③민족주의 파괴력

연이어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은 또 한 번 발칸반도를 아귀지옥으로 변하게 했다. 인류전쟁사에 정점(?)을 찍는 폭력이 일어나면서 발칸은 또 피투성이가 되어야 했다. 히틀러는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부른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이어서 살육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형이라며 ‘지구 화약고’란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따른다. “보스니아 분쟁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조직적이자, 힘과 힘이 충돌한 필연적 사건이었다.” 1993년 영국 수상 존 메이저가 한 말이다. 하긴 발칸반도와 인류전체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를 두고 비교해보았을 때 발칸반도 학살은 그다지 특별하지도, 별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벌어진 타인종, 타민족에 대한 적개심과 우리민족이라는 우월성이 빚어낸 학살, 무고한 사람을 대상으로 자행한 고도화된 폭력이었다. 한 나라에 다양한 민족이 뒤섞여 살아가는 곳에서는 내 뜻에 반하는 세력이 있는 이상 필연적으로 폭력이 동반된다. 국제질서는 말보다 주먹이 앞선다는 말이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일단은 두들겨 패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발칸반도에서 상대적으로 인구 비율이 높은 민족은 전 지역에 걸쳐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서 자신의 뿌리인 본국(예를 들어 세르비아 같은)의 지원을 얻어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예를 들어 보스니아)에서 독립을 외치며 분쟁을 일삼는다면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한 민족이 각기 다른 나라에 갈려 살면서 그곳에서 독립을 요구해보라. 기막힌 노릇이 아닐까. 우리나라 인천, 혹은 제주도에 일본인들, 혹은 중국인들이 떼로 몰려 살면서 스스로 독립국가를 만든다고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것도 본국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말이다. 발칸반도에는 가능하다고 믿은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러자 그들 스스로 발칸반도 맹주를 자처하면서 타 인종에 대한 살육과 폭력이 정의로 포장되는 악의 고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들만의 민족은 광기에 휩싸인 지도자를 중심으로 자가발전해 자긍심을 불어넣기에 여념이 없었다. 타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상승기류에 대항하는 자는 민족의 반역자로 일순간에 내몰리고 자연적으로 배타적,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판이 짜인다. 더구나 같은 민족이면서 본적도 만져본 일도 없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방법도 없는 종교가 다른 경우에는 할 말을 잊게 한다. 21세기에도 다르지 않다. 로마인의 후손이라는 대루마니아주의와 슬라브족 첫 제국을 건설했다는 대불가리아주의는 오랜 갈등으로 늘 반대편에서 총칼을 들이댄 맞수이자 관객의 입장에선 폭력의 세트다. 발칸반도 동남부를 대표하는 대세르비아주의야 말할 것도 없다. 코소보 인종청소 주역들이니 말이다. 나토의 코소보 공습으로 해결된 듯하지만, 세르비아에 의해 저질러진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학살은 여전히 살얼음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불안한 산맥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는 스스로 발칸반도에서 가장 위대하고도 부유한 나라이자, 그만큼 뛰어난 민족이라는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다. 나라 이름에서 보듯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말이 한 국가이지 한 지붕 세 가족이 험악한 인상으로 으르렁거리는 형국이다. 이 외에도 동방정교와 로마가톨릭, 이슬람 등의 종교 갈등은 또 어떻게 봉합할 것인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글쎄…. 민족과 종교와 영토분쟁에 문화적 자존심이 걸린 이들의 조각보 같은 반도의 미래를 신인들 알까? 안다면 1천 년 전에 해결했겠지만 말이다. 민족이란 유기체는 어떤 사건과 역사를 체험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개념이 포괄적으로 변할 수 있다. 사상은 물론 생각의 공유에 따라 민족을 구분할 수도 있다. 한반도 한민족이라는 우리가 느끼는 자부심처럼 민족주의가 마치 고대국가 혹은 중세 때부터 시작되어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라는 무지막지한 착각은 배타적 민족주의의 시발점이다. 울릉도에서 태어나 한 번도 섬을 벗어난 적 없는 할아버지와 흑산도 할머니 대화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것 같지만, 사투리로 무장되었다면 소통에 애를 먹을 것이 자명한 일이다. 박필우 작가 하긴 북한과 일본이 전쟁이 나면 어딜 도울 것이냐의 물음에 일본이라고 답하는 이들이 필자의 주위에 태반이 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민족이 빨갱이보다 하수가 분명하다. 비약하면 아래로부터 단 한 번도 민중항쟁이 일어나지 않은, 말 잘 듣는 착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민족 일본이란 나라도 있다. 단언컨대 착한 백성, 그것이 바로 사무라이 정신이다. 죽음에 떠밀려도 감동의 눈물로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 순종의 미학 말이다. 나는 정치에 관심도 없지만, 작금의 대한민국 상황을 보며 떠오르는 말이 있어 끝으로 맺는다. “어떤 이는 가는 곳마다 행복을 만들지만, 어떤 이들은 떠날 때마다 행복을 만들어낸다” - 오스카 와일드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2-10

발칸반도 민족주의 ② 우리(We)와 그들(They)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각 민족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전후 처리를 위해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가 그것이다. 한 민족이 그들 국가의 독립 문제를 스스로 결정짓게 한다는 이 말은 소수민족, 그리고 압제에 시달리는 약소민족에게 독립의 열정과 불가능은 없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우리나라 3·1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민족이라면 어느 누구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고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를 실현한다’는 외침이 억압에 길들여진 약소민족 가슴을 막무가내로 울려댔다. 우리나라는 물론 독립투사들이 민족주의자로 불리게 된 때도 이때부터다. 민족주의에 대한 성공은 평등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말이다. 우리민족 역시 실체에 대한 믿음은 일제강점기 식민시대 속 저항을 통해서 생겼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발칸반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새롭게 생긴 패러다임, 즉 민족 방어를 위해 배타적 민족주의의 네이셜리즘(Nationalism)과 언어, 종교 등 문화적 요소에 따라 구분 짓는 문화적민족주의(Cultural Nationalism)가 본격적으로 기세를 울리며 불씨로 자라났다. 민족과 국가를 동일선상에 놓는 서유럽 민족주의는 경제 범위와 영토가 대부분 일치하면서 국적을 따지는 ‘정치적 민족주의’로 정의한다. 이는 민족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며 충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발칸반도는 달랐다. 혈통이 중요시 되면서 언어는 물론이고, 역사와 체험의 공유, 더불어 종교 역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문화적 민족주의’였다. 민족과 국가는 별개이며 국가에 충성하기보다 민족이 우선이었다. 그런 까닭에 신화가 떠받들어지고, 우리 민족끼리 독립이라는 희망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꿈으로 연결된다. 발칸반도는 혼란한 역사를 거치면서 거듭된 이합집산을 경험했다. 여러 민족이 뒤섞여 있었으며, 민족의 경계와 영토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 따라서 발칸반도 민족주의는 폭력을 품고 태어난 ‘이질적 민족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발칸반도를 비롯한 동유럽 나라들은 제국의 그늘에서 막 벗어나면서 민족주의자들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그들의 민족주의는 민족결집에 의미가 궁색했던 까닭에 미래를 과거에서 찾았다. 과거를 이 잡듯이 뒤져 가느다란 실마리라도 발견하면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민족영웅으로 스토리텔링했다. 신화는 물론, 역사적으로 가장 화려했던 시기만을 잘라 민족정기를 일반화 하면서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민족 우상화 작업으로 민족 태생적 우월주의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집권세력은 민중을 길들이고자 이를 교묘하게 정치에 적용하면서 폭력마저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민족내부의 이질적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발칸반도 모든 나라가 독립투쟁과 저항의 역사 속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네 독립운동사에서 보듯 발칸반도 나라 역시 의기에 혈기까지, 풍찬노숙을 당연하게 여기며 독립투쟁에 매진했던 투사들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큰 그림을 놓고 보았을 때 아쉽게도 스스로 힘으로 광복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 힘의 논리에 의해 독립을 이룬 나라가 대부분이다. 주권은 있되 자주는 없는 이상한 체질, 강대국 품을 벗어나면 금방이라도 뇌정지에 빠질 허약한 나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민족은 자신의 나라를 가질 권리가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공인되었으니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었을까.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강대국의 섬세하고도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승전국끼리 패전국을 조각조각 갈라놓아야 했다. 후발 제국 도이칠란트로부터 벌어진 전쟁의 뼈아픈 경험을 잊지 않았다. 승전국은 작은 나라와 소수민족을 부추겨 착하고 말잘 듣는, 사람과 땅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갈등을 부추기고 조장하면서,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게 새판을 짰다. 그 중심에는 영웅놀이에 재미가 든 지도자를 뽑고 가슴이 요동치는 장엄함을 맛보면서 정신까지 발기해버리는 자칭 민족지도자가 있었다. 서구유럽 입장에서 보면 말잘 듣는 지도자이자, 고매한 인품을 지닌 인간이었다. 발칸반도의 무기력은 마치 우리 해방정국과 흡사했다. 보릿고개 넘기기조차 힘에 겨웠건만, 친일청산은커녕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정당과 자칭 애국지사 등장, 반공이라는 구호로 무지한 백성의 부추김, 그리고 연이어 터진 한국전쟁은 기사불능 상태로 몰아갔다. 그러나 극동 아시아에 공산정권의 마지막 저지선으로 강대국의 지원과 태생적 부지런한 배달민족 희생 속, 선 성장 후 분배의 기치에 묵묵히 순응하면서(분배의 정의가 혼탁해지긴 했지만) 기적과도 같이 세계 속 대한민국이 우뚝 설 수 있었다. (계속)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1-13

발칸반도 민족주의 ① 우리(We)와 그들(They)

유발 하라리는 그의 역작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가‘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것은 본능이라고 하였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와 너로 구분하는 민족, 즉 네이션(nation)이란 19세기 이전에는 없던 말(단어)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 국민인가라는 의식이 지금처럼 개인의 정체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말하는 ‘민족(民族)’이란 단어도 일본에서 군국주의 망령이 기승을 부릴 때 nation을 ‘민족’으로 번역하면서부터다. 민족이란 말은 라틴어 ‘이방인 집단(Natio)’에서 기원한다. 단순하게 ‘무리’에서 사람간의 계급이 생기면서 ‘평민(Pleb)’이라는 단어로 연결되고, 16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에서 대중들을 뜻하게 되었다. 나중에 ‘그들’이 추가되면서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이 생기고 배타적 개념으로 변했다. 18세기의 유럽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더구나 미국의 독립전쟁이 일어나면서 세계는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연이어 프랑스혁명이 촉발되며 자유와 평등, 우애(박애)의 이념을 표방한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봉건적 구체제와 절대왕정에 대항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어쨌거나 이로 인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탄생이라는 터전을 닦은 셈이다. 급격한 산업의 발달로 중산층이 확산되고, 금권(金權)이라는 경제권을 쥔 새로운 계급층이 형성되면서 봉건제 속 타고난 운명을 깨트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기존의 사회질서와 정치체제에 도전의식이 심어지면서 대중은 지배계급에 반등의 기회를 찾았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수백 년 동안 제국 압제 속에 주변인으로 받아낸 박해와 국경이랄 것도 없는 힘없는 부족으로 살아온 사람들 최후의 선택이었다. 외세의 지배에서 받은 고통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소산일지도 모른다. 이들의 속성을 간파한 자칭 민족주의자 등장은 우리끼리라는 닫힌 민족주의로 역사를 되살려 스토리텔링을 가미했다. 즉 대중에서 탄생된 지도자 의도에 따라 변질되거나 타락적 속성인 민족주의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과거 피지배계급을 향한 강압적인 명령과 수직계통에서,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충성스러움이 저절로 우러나오게끔 하는 데에는 우리라는, 우리끼리 공유라는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만큼 좋은 소재가 없었다. 이때 발칸반도에는 이질적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미래 폭력의 판이 짜이고 있었다. 발칸반도는 예부터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접목되면서 이것이 역발효 과정을 겪으면서 피와 살육으로 변해버린 아픔의 땅이다. 에게문명을 필두로, 그리스 민주주의,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로 인한 헬레니즘, 로마 지배하의 기독교권, 동방정교와 로마가톨릭 분열을 거친 후 오스만 이슬람에 이어 두 차례 세계대전 중심에 서는 등 인류 긴긴 폭력의 역사와 그 맥을 함께 한다. 그리고 마지막 과정인 제국주의에 발버둥 치면서 탄생한 것이 저항민의 승리이자, 질긴 민족주의다. 발칸반도 각 나라들은 미국 독립선언과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을 시작으로 촉발된 이래 1923년 오스만터키제국이 붕괴되고 19세기를 지나면서 그 정체가 드러났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종족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하면서 민족주의는 비온 뒤에 땅이 굳는 것처럼 더욱 탄탄하게 다져졌다. 거슬러 오르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발칸반도를 술탄의 무슬림 지배에서 기독교를 앞세운 자신들 전제왕조의 발아래 놓으려는 야심찬 계획은 유럽 각국 반발을 불러왔고, 크림전쟁을 비롯해, 끊임없이 계속되는 터키와 러시아가 치고 박는 것을 구경하면서 영국, 프랑스는 물론이고, 서유럽 나라들 계산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고만고만한 여러 부족과 민족이 통일국가로 거듭났다. 그리스도 이때를 놓치지 않았으며, 남아메리카의 대부분 나라도 줄줄이 독립에 동참하며 새로운 민족국가로 탄생하면서 국제질서에 새로운 판이 짜이고 있었다. 광대한 영토를 거느리고 있는 전제군주국에 대한 해체작업의 일환으로 서구 강대국에 의한 펌프질도 있었다. 즉 오스만터키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 치하에 있던 나라, 여러 부족에게 독립이라는 새싹위에 희망의 물줄기를 뿌려대는 서유럽국가들 노력이었다. 긴박한 국제정세는 말보다 발길질이 빠르다. 서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시작으로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에 이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까지 기습적으로 점령해버렸다. 이때 대세르비아주의가 급부상하면서 기다렸다는 듯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그리고 파괴와 죽음, 살육 등 발칸반도에 상처만 남긴 채 끝났다. 승자의 막강한 끗발을 이용한 서유럽 강대국은 그동안 오스만터키와 오스트리아의 영토에 들어 있던 발칸반도와 중부유럽은 물론 중동까지 도토리 같은 나라 탄생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형에게 말 잘 듣는 고만고만한 아우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계속)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12-30

발칸반도 폭력의 뇌관, 한반도와 닮은 침략의 땅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의 땅으로 알려진 발칸반도는 이름만큼 수많은 침략자에 의해 짓밟힌 사연을 품고 있다. 마치 3천 번 이상 이민족 침략에 시달린 한반도와 매우 흡사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진정 하늘이 내린 경이의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신화가 살아 숨 쉬는 발칸반도다. 유럽문화의 모태이자 신들이 지배했던 땅 그리스, 작지만 자존과 감성이 충만한 나라 슬로베니아, 선남선녀들이 에너지를 발산하는 크로아티아, 힘과 저력이 넘치는 잠재적 강국 세르비아, 세 민족이 한 나라로 살아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자칭 로마인 영광을 간직한 루마니아, 늘 힘이 넘쳐 주체할 수 없었던 불가리아, 이탈리아어로 ‘검은 산’을 불리는 험난한 산악지형의 몬테네그로, 발칸반도에 슬라브족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터전을 닦았던 알바니아, 그리고 필자의 가슴에 감동과 분노를 동시에 심어주었던 코소보도 있다. 그 이면에는 ‘세계의 화약고’란 수식어가 붙은 팽팽한 긴장이 서린 지역이란 사실이 슬프게 했다. 천몇백 년을 이어온 폭력의 과거가 씨앗이 되어 또 다른 폭력의 줄기로 굳건하게 자라고, 끝나지 않는 분쟁의 촉수가 꿈틀거리며, 종교와 민족, 역사를 따라나선 질긴 인연, 문화와 인물이 뒤섞여 도무지 풀리지 않은 엉킨 실타래 같은 반도다. 일곱 개의 국경과 맞댄 채, 여섯의 공화국이, 다섯의 민족으로, 네 개의 언어와, 셋의 종교, 그리고 두 개의 문자로 뒤섞인 채 하나의 국가를 이룩했던 구유고슬라비아 휴면계좌가 폭력의 미련을 유혹하는 땅이다. 길 잃은 역사를 따라 과거를 잊지 말자고 사람 저마다의 가슴에 붉은 기운이 요동치는 기운서린 터다. 한반도 땅 2.5배, 산이 많은 녹색의 땅,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교차점, 고대 로마제국의 첫 침략의 대상이 되었던 땅, 달마티아, 일리리아, 트라키아, 불가리아, 헬라스 등 각각의 지역에 흩어져 살던 터전이다. 더 있다. 불안한 평화를 이어가는 현재 진행형의 분쟁지역, 너무 많은 억척의 사연을 생산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품은 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제국의 포화를 고스란히 견딘 질긴 민족들이 뒤엉킨 한을 품은 땅,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 작은 산줄기 좁은 물줄기에도 슬픔과 기쁨, 환희와 아픔이 교차하는 애환의 터전, 건물 외벽의 포탄 자국이 가슴에 납덩어리처럼 붙어버린 현실, 폭력을 좋아하진 않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민족, 순진한 사람을 선동해 민족이란 이름으로 살육을 정당화하게 만든 영웅이 누워있는 땅, 그런 까닭에 그 누구도 쉬이 해결의 열쇠를 쥘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이 뿐일까? 가톨릭과 이슬람 종교분쟁의 뇌관이 여전히 작동하는 땅, 나락으로 떨어진 인격이 애국이란 이름으로 재포장 되는 곳, 이웃과의 갈등은 물론 같은 나라임에도 성격을 달리해 불운한 동거를 이어가는 이상한 나라가 있는 반도, 나의 신은 절대자요, 너의 신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정당한 사회, 복수가 정의와 미덕으로 포장된 나라,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절대자의 말을 당당하게 무시하면서도 천국에 가려는 인간이 북적대는 곳, 그래도 희망이란 기름으로 번들번들 칠한 십자가가 도서관보다 많은 세상, 비장감이 억눌러 슬프면서 비통함을 상대방 응징의 꿈으로 대체시킨 사람이 살아가는 땅이다. 동방 페르시아제국의 질긴 욕망으로 인해 입은 상처, 알렉산드로스로 시작되는 폭력 미화는 비잔티움제국으로 이어지고, 로마의 땅이 되었다가, 같은 기독교도인 십자군의 약탈, 질풍노도 훈족의 발칸 유린에 이어 이슬람 제국의 침탈, 몽골군 파죽지세의 잔혹사, 전대미문 사마르칸트 티무르의 이유 없는 살육전, 노르만족의 민족이동에는 필연적으로 따르는 폭력, 나폴레옹도 이 대열에 빠질 수 없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같은 하늘 아래서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원수로 돌변하는 상황은 이들 표현대로 진정 신의 뜻이었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대세르비아주의, 대슬라브주의,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소수와 인간의 욕망이 부추긴 폭거는 정의와 부정의가 아니라 피아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20세기에 일어난 인종청소, 민족주의 이름으로 행해진 살육의 드라마는 21세기에 와서도 그 징후는 잠들 기미조차 없다. “집에 불이 나기 전에 굴뚝을 수리하고 아궁이를 고친 사람의 공로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지만, 불 난 뒤에 수염을 거슬려가며 옷섶을 태우면서 뛰어다닌 사람의 공로만을 널리 인정하지 말라” 묵자의 말이다. 전쟁으로 공을 세운 사람만 떠받들지 말고, 평화의 시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도 가슴에 새기란 뜻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12-16

종교개혁과 부르주아-인쇄술이 일궈낸 격변

“회개하고 회개하라! 누구나 회개하고자 기부금만 내면 모든 죄를 사할 수 있도다. 이곳 상자 속에 돈이 들어가는 순간에 들리는 ‘짤랑!’ 이 소리는 지옥의 불길에서 영혼이 솟아나게 하는 힘이도다!” 교황 레오 10세가 산피에트로대성당을 건축하는 데 든 빚을 갚지 못하자 면죄부를 팔면서 부르짖는 소리다. 당시 사제들은 오랜 종교 권력에 취해 하느님의 중재자로서, 내세관의 선도자로 자처하면서 기득권에 정신이 팔려 세태를 바로 읽지 못했다. 때마침 인쇄술의 발달과 동방으로부터 제지술이 이입되면서 성서가 인쇄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경의 교리를 독점하던 성직자의 엇나가고 왜곡된 해석은, 일반인에게도 읽히면서 편견과 오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상이 발전하면 민심도 눈을 뜨게 된다. 이때 세계사에 짠! 하고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정문에 라틴어로 된 ‘95개조 의견서’를 내걸었다. 일종의 대자보인 이 글은 상상 이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글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마침내 인쇄가 되어 15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고, 16세기 구텐베르크의 혁신적 인쇄기술이 뒷받침되면서 유럽 전체로 불길처럼 번져갔다. 그는 하느님과 시민 사이에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배제되고, 단지 기도와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혁신적인 종교 교리가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다. 루터가 기존 성직자들을 향해 도덕적 타락이라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던 것이다. ‘교회는 지상의 질서와 하느님 사이에 있고, 사제는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기존 가톨릭 성직자의 입장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반면 루터는 만인사제설(萬人司祭說),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사제란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할 때 구원의 가능성이 커진다고 주장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쳐졌던 장막이 거둬졌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사제나, 신부, 목사가 되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지금까지 독점했던 성직자의 행태를 지적하고 나섰다. 당시 루터의 종교개혁을 비약하자면 또 하나의 인간 해방이었다. 종교개혁 불길은 독일지역 제후들의 바람과도 맞아떨어졌다. 로마교회의 영향 아래 세금을 바치는 데 대한 불만이 팽배했던 이들은 독자적인 권력을 추구하고자 했다. 루터는 기세를 몰아 ‘독일의 귀족들에게 고함’이라는 서간문을 발간한다. 게르만의 귀족과 왕권 보호를 확립고자 하는 세력들이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종교개혁의 성공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그가 혁명적인 교리를 주장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 사상을 당대의 역사적 사회사적 상황에 맞추어 새롭게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종교에 관한한 개개인의 독립성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근대주의의 영향이었다. 마르틴 루터와 더불어 종교개혁에 앞장선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의 노력도 있었다. 그는 내세보다 현세의 실생활 존재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아담의 원죄를 대신해 울며 흐느끼는 것이 다가 아닌, 프로테스탄티즘, 대중적인 복음주의의 가치를 강조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지하세계를 약탈해 하와와 아담을 구해온 것으로 원죄에서 벗어났다는, 현실 세계에서의 삶에서 하느님을 위한 성찰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칼뱅주의는 전통적인 가톨릭 사상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근대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칼뱅이 주장했던 ‘예정설’은 하느님 나라에 갈 사람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부(富)는 성실한 삶에서 자연히 따라오는 후속적인 것, 자신을 위해 부를 사용하기보다, 사회와 교회를 위해 축적한다. 신이 내린 재능을 증명하기 위해 돈을 번다. 부가 쌓여갈수록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명서가 되고, 자신의 가치를 하늘에 드러내는 일종의 종교의식에 의한 사업추진이었다.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가 부와 도덕 간의 대립을 부정하면서 부자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준 것과도 통한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파이를 늘려 골고루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부자가 사회에 가장 쓸모 있고 인정 많은 사람이란 의미다. 이러한 종교적 생활관은 이윤추구 자본주의 사회에 활력을 제공했다. 기업이 비대해지고, 중산층 권력의 부르주아가 나타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심이 사라지고 부의 권력화 세습화, 남에게 군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지만, 초기 자본주의는 이렇게 생겨났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12-02

실크로드를 가다 - 인연, 아주 오래된…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 선조가 남긴 유물유적을 사랑했다. 짝사랑이 반복되면 고소 섞인 아내의 눈길을 애써 무시한 채 길을 떠나곤 했다. “여행은 간절함으로 무수한 삶을 찾아 헤매다 내 안으로 되돌아가는 행위”라고 어느 글쟁이가 말했다. 기회는 우연을 가장해 필연처럼 찾아왔다. 평소 꿈꾸어왔던 실크로드, 앞선 한국인 혜초(慧超)가 눈물을 뿌리며 넘었던 고원과 황량한 사막, 미지의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실크로드를 열었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과 사연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무엇보다 역맛살이 게맛살보다 이토록 맛있고 매력적인 까닭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설렘 때문이었다. 이번 실크로드 중국 길에서 만난 인연은 다양한 형태로 내 가슴에 들어왔다. 수다보다 침묵이 더 잘 번진다고 한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은 탓이지만, 무의식의 저편에 그들이 보는 세상이 침묵으로 전해왔다. 시안(西安) 후이족 거리에서 아이와 주고받은 눈인사는 이국의 낯선 땅 번잡하고 들뜬 이방인 마음에 환영의 꽃다발이었고, 라블랑스에서 받은 소년의 해맑은 인사는 연꽃이 피어날 때 둔탁하면서도 청량한 미성(美聲)이었다. 인연은 그런 것, 서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정이 있다면 우리나라든 중국이든 어떤가. 밤의 한기가 가시지 않은 어둑새벽, 찬 언덕에 걸터앉아 신을 향해 물같이 흐르는 행렬을 보면서 지금까지 걸어왔던 궁색한 사연들을 시간의 저편으로 흘려버렸다. 얼마나 오래된 인연인가. 평안으로 향하던 초원에서 만난 순박한 아가씨 미소를 떠올리면 여전히 설렌다. 전생에 어떤 인연이 닿아 있어 막연한 그리움은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를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은밀한 추억 한 자락 감춰둔 듯 얼굴이 붉어진다. 검게 탄 피부, 갸름한 얼굴 곳곳에 꾸밈없이 핀 점, 다소곳이 숙인 쑥스러운 미소에서 어린 시절 계단 아랫집에 살던 순이가 떠올랐다. 도심의 삶에서 사라진 그리움이었다. 짓궂은 신의 장난인가.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었다면 그리움이 덜했을지 모르지만, 다행히(?) 물리적 저장 공간을 잃어버린 덕에 마음속에 더 깊이 담아두게 되었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오랜 시간 길에서 시달린 여행객에게 한 모금 청량제 같은 인연도 있다.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르는 도로에서 과일 파는 아가씨의 수다 섞인 웃음은 잘 익은 과일만큼 맛있다. 덤을 주는 모습은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고, 이 빠진 할아버지의 순한 웃음은 물리적으로 그어놓은 국경을 허물기에 충분했다. 그들에게는 허세도 가식도 없었고, 종교도 정치도 민주화도 중요하지 않았다. 종교는 분열을 획책하지만, 믿음은 화합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그들 마음속에는 믿음뿐인 듯했다. “아이들에게는 적은 없고 친구만 있다” 뭇 남성의 영원한 연인 오드리 햅번이 한 말이다. 아이들만 사는 세상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피터 팬이 늙지 않고 산다는 ‘네버랜드’ 같을까? 가식 없이 해맑은 아이들을 만났다. 닫혀있던 내 마음을 쉽게 열어버린 위구르 아이들, 막대 아이스크림을 나누며 함께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훌쩍 떠나는 우리를 버스까지 따라온 사슴 같은 눈망울과 마주치자 웃어 준다는 게 슬픈 여운만 남기고 말았다. 아이의 투명한 시선은 내 가슴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건방진 우월적 측은지심이었을까. 불쑥 나타나 공허한 외로움만 안겨 준 것은 아닐까? 어른의 잣대로 주었던 정은 무던했던 아이들에게 파문만 일으킨 꼴이었다. 조선의 반항아 이옥이 한 말처럼 천고에 더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이 회한의 가슴을 여미게 했다. 위구르 아이들 여운이 가시기 전 밤에만 몰래 피는 박꽃 같은 아이를 만났다. 이방인이 소리에 잠에서 깬 듯했다. 흑석같이 짙은 눈동자에 통통한 볼, 어머니 사랑의 증표인 듯 하얀 둥근 귀걸이를 한 아이는 카메라를 피하지 않았다. 자기를 바라보는 나보다 나를 더 궁금해 하는 듯 보였다. 돌아서는 발길, 등 뒤에서 무엇이 툭 친다. 처음으로 내게 주는 엷은 미소였다. 지구촌 어디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정이 넘치고 사랑이 있다. 말과 글이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문화가 생소해도 변하지 않은 진실이다. 폭력이 난무하고, 분배의 정의가 사라진 혼탁한 세상에서 화려하거나 빛나지는 않지만, 강물이 흐려지지 않게 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다. 실크로드 중국 길에서 만난 인연들이 시시때때로 떠올라 가슴을 적신다. 사람의 꿈을 들여다보면 그 내면을 알 수 있다는데 ‘긍정의 힘’과 현실에 감사하는 ‘신의 은총’을 읽을 수 있었다. 명분 따위나 욕심에 집착한 나머지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과거의 내 가난한 삶은 이제 그 의미를 잃었다. 이번 실크로드 여행에서 맹목적인 순종자에 불과했던 내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오롯이 내 삶의 길과 마주했던 소중한 시간이자, 삶 자체가 풍요로워진 참 맛있는 여행이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11-18

실크로드(Silk Road), 동서양을 잇는 장대한 길

이상은 꿈꾸는 자의 몫이다. 인류 이래 인간의 꿈은 단 한 번도 고여 있지 않았다. 이상은 도전을 낳는다. 도전은 새로운 꿈으로 탄생해 너머의 세상에 대한 동경이 인류 문화와 역사를 창조해 왔다. 인류의 역사는 길에서 만들어졌다. 그 길은 역사 속에 묻혀버린 단절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꿈의 길이며, 역사와 문화, 겨레와 겨레,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화합의 메신저다. 실크로드란,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통로다. 문명이란 자생적 혹은 모방적인 탄생과 동시에 이동하며 전파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실크로드는 인류 문명의 선구자적 자취가 담긴 길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세상을 넓혀 나에서 우리로 확장해 민족이라는 뿌리를 내리게 한 길이다. 동방의 불빛을 따라, 혹은 서방의 이상을 갈망하며 허기를 채웠다. 더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메마른 사막을 지나 황량한 벌판을 내달려 지옥의 산맥을 넘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구도자가 묵묵히 법(法)을 구하기 위해 걸었던 길이며, 혹은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 때론 정복이라는 명목으로, 제국주의의 촉수 선교란 핑계로, 값싼 원료를 구하고자 식민지 개척이란 욕망으로, 개화란 미명으로 파괴와 폭력에 이용되기도 했다. 어찌 되었건 문명의 전파를 동반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연결 단초를 제공하는 쾌거로 이루어진 결과다. 실크로드란 말은 대략 140여 년 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 1833~1905)이 1869년에서 1872년까지 중국 각지를 답사하고, 1877년부터 ‘중국’(China)이란 책 5권을 저술하게 된다. 서북인도로 수출되는 주요 물품이 비단(silk)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이 교역로를 독일어로 ‘자이덴 슈트라센’(Seiden Strassen : Seiden 비단, Strassen 길을 영어로 Silk Road)이라고 명명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차츰 그 개념이 확대되면서 하나의 상징적인 명칭으로 변했다. 사실상 초원로나 해로(海路)는 물론, 오아시스로(사막)도 그 길을 따라 비단이 교류품의 주종으로 오고 간 것은 역사상 짧은 기간이었을 뿐, 여러 가지 교역품이나 문물이 오랫동안 교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크로드란 이름이 존속되어 온 것은 상징성 때문이다. 문명의 탄생은 교통의 발달과 불가분 관계에 있다. 교통의 후진은 문명의 후진성을 초래한다. 고대 오리엔트문명, 황허문명, 인더스문명, 그리스·로마, 스키타이, 불교, 페르시아, 이슬람 등 동서고금을 망라한 전 문명이 모두 실크로드를 동맥으로 하여 싹트기 시작했으며, 이 길에서 꽃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무엇보다 실크로드는 한민족의 위상을 드높인 길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인이라 불리는 계림(신라 경주) 출신의 혜초(慧超·704~787)도 빼놓을 수 없다. 신라 승려 혜초는 구법자(求法者)의 길을 걸었다. 죽음의 사막도, 험준한 산맥도 막지 못했다. 동양에서 혜초에 앞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해로와 오아시스로를 거쳐 인도와 페르시아까지 다녀와 현지 견문록인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이 명저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보다 약 550년 앞서 저술된 세계적 여행기로서 인류 공동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고구려의 후예인 당나라 장수 고선지高仙芝란 인물도 있다. 동양의 한니발로 불리는 그가 ‘세계의 지붕’ 파미르고원을 넘나들면서 11년간(740~751년) 5차례나 단행한 서정(西征)은 세계 전쟁사에 전례 없는 기적으로 기록되었다. 그의 원정에 의한 제지술의 세계적 전파와 중앙아시아 보물의 유입은 중세 문명교류사에 불후의 업적이다. 그렇다면 실크로드가 과연 이스탄불, 혹은 로마에서 시작되어 중국 시안(西安)이 종착지라는 통념은 정설일까. 한반도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서역이나 북방계의 유물들, 그리고 내외의 관련 문헌 기록들은 일찍부터 한반도가 외부 세계와 문물을 교류하고 인적 왕래가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여러 가지 유물과 기록에 의해 실크로드 3대 간선인 초원로와 오아시스로, 해로의 동단(東段)은 각각 중국에서 멎은 것이 아니라 한반도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고대에는 우리나라를 무지개가 뜨는 아름다운 나라, 풍족하고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했다. 그들이 동경하는 이상세계 동방의 불빛을 따라 벌판과 사막을 지나 한반도 신라(경주)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풍부한 물산과 앞선 문화의 바탕 위에 서방의 문화를 수용해 우리 민족 특유의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새롭게 서방세계에 전했다. 이렇게 보면 K-pop, K-드라마, 영화, 게임 등 한류문화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되, 우리 것으로 새롭게 창조해 세계로 전파하면서 지구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한류의 위대함은 오랜 시간 축적된 한민족 문화적 동력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11-04

중세 유럽의 풍운아 카를 5세

합스부르크 적통이자 오스트리아와 이베리아반도를 오롯이 손 안에 넣은 억세게 운 좋은 카를 5세지만 그는 전쟁으로 일생을 보내야 했다. 신대륙에서 끊임없이 들여오는 황금도 바닥을 드러내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석양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합스부르크와 에스파냐 제국은 지독한 가톨릭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예수회를 만들어 반개혁을 단행하면서 원론적 신앙에 깊게 파고들어 개신교에 대항하는 수단을 병행했다. 로마교황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매형이다. 어린 시절 카를과 폴로 경기를 함께한 친구이기도 했다. 카를 5세의 가톨릭 교권이 강성해지자 이를 우려한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프랑스를 지지하면서 카를 5세가 적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카를은 그를 지원하는 자들의 부(富)를 마음껏 활용했다. 아우크스부르크 금융가 큰손들과 고모 마르가레테의 힘을 이용해 제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카를 5세는 1520년 10월 22일, 그들의 지원을 받아 도이칠란트 황제 카를 5세로 아헨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마친다.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를 방어했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았다. 누나의 남편을 차마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적 프랑스를 도와준 로마는 그냥 둘 수 없었다. 오랜 전쟁으로 불만이 가득했던 3만명의 가톨릭 군사는 격렬한 기세로 로마로 진격했다. 스위스 교황 근위대 5000명이 하늘을 믿고 목숨을 건 방어에 임했으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때 일부 근위병만이 교황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가톨릭 점령군은 3일간 로마를 약탈했다. 남자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으며, 금은보화를 찾아 고문하고, 여자들은 강간했으며, 건물은 불태웠다.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하는 인간에 의해 로마가 폐허가 되는, 가톨릭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세계는 카를 5세의 기세를 꺾을 자가 없었다. 그는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튀니지를 함락하고 서부 지중해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이슬람이 서구 유럽으로의 진출을 차단한다. 프랑수아 1세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선 역부족임을 실감해야 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면서 두 앙숙 간의 오랜 갈등은 막을 내린다. 감수성이 남달랐던 프랑수아 1세는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찬사를 받는다. 그에 의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를 세상에 선보이게 했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작품들을 모아 지금의 프랑스 루브르 재산으로 만든, 문예부흥에 앞장선 왕으로 찬사가 따른다. 카를 5세는 유럽을 호령하는 전대미문의 제왕이 되었지만, 또 다른 도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한 두 제국의 황제답게 종교개혁의 물살을 타는 개신교의 확산을 막아야 하는 신성한 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톨릭이 신교를 탄압하면서 이에 맞서는 전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농민반란 등 크고 작은 전쟁이 수십 년 지속되면서 제국의 에너지는 소진되고 있었다. 긴 병에 효자 없듯, 오랜 전쟁에 애국자 없다. 결국 1555년 개신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휴전을 맺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해’로 구교는 신교를 인정하면서 타협했다. 카를 5세, 매부리코에 길쭉한 턱과 아래턱이 튀어나온 합죽이인 까닭에 사람들로부터 그리 좋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입을 온전히 다물 수 없어 파리가 입속으로 들락거리자 콧수염을 길러야 했고, 턱으로 인해 늘 침을 흘려 소화기에 문제가 많았으며, 말년엔 통풍마저 찾아왔다. 그도 인간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삶에 회의가 일었고, 결국 56세가 되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한 여생을 택한다. 아들 펠리페 2세(당시 식민지 필리핀은 펠리페에서 붙인 이름이다)에게 플랑드르 부르군트 공국과 에스파냐, 그리고 식민지 통치권을 넘기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를 넘겨준다. 그리고 2년 뒤 억세게 운이 좋은 카를 5세도 1558년 9월에 말라리아에 걸려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1세는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서쪽으로 끊임없이 진출을 노리는 오스만제국의 쉴레이만 1세와 치열하게 전쟁을 해야 했다. 헝가리로 진군하는 오스만제국군을 맞아 패하면서 도나우강 동쪽을 넘겨주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를 온전하게 가톨릭 국가로 만드는 데는 성공한다. 이로써 중부유럽의 기독교세계 수호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지역에 그들의 정통 가톨릭을 굳건하게 뿌리내림으로써 훗날 갈등의 씨를 뿌려놓았다. 악을 행하면서 질서를 파괴하고, 스스로 파탄에 빠지면서 새로운 질서로 회복하는 악순환은 역사 이래 이어져왔다. 영혼의 부작용으로 태어나는 ‘악으로부터 도덕’이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스토리텔링 작가

2024-10-21

중세 유럽의 풍운아 카를 5세

합스부르크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와의 사이에 필리프와 공녀 마르가레테 남매를 두었고, 에스파냐에 페르난도와 이사벨 사이의 장남 후안과 둘째 딸 후아나가 미혼이었다. 이들 두 제국이 겹사돈을 맺으면서 유럽을 동서로 연결하며 세기적 경사를 맞이한다. 에스파냐 후아나는 필리프 1세가 살던 네덜란드로 시집갔고, 오스트리아 마르가레테는 에스파냐의 후안에게 시집갔다. 두 제국의 결속은 동서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효과와 동시에 세계가 두 제국의 눈치를 보는 형국으로 변했다. 그런데 아뿔싸! 세상에 뜻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에스파냐 왕위 계승자 후안이 신방을 차린 지 몇 달 만에 급서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에스파냐는 왕위 계승을 두고 가계도가 얽히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공녀 마르가레테의 뱃속에 후안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절박한 희망에도 아기가 죽은 채 태어나고 말았다. 결국 마르가레테는 친정 네덜란드로 돌아가 재혼에 성공하면서, 훗날 카를 5세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권력에 힘을 실어 준다. 이 와중에 1504년 카스티야이레온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가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결혼으로 이베리아반도를 하나의 가톨릭국가로 묶었고, 아메리카 대륙의 황금을 축적했던 그녀였다. 왕위 계승자 아들 후안이 죽었으니 네덜란드로 시집간 유일한 혈육 후아나가 상속녀가 된다. 이사벨 1세가 죽자 남편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이레온 왕국에 섭정을 펼치면서 그곳 대신들의 불만이 증폭된다. 이때 펠리페 1세가 아내 후아나와 함께 에스파냐로 오면서 장인 페르난도와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카스티야 왕국의 대신들은 강력한 드라이브를 일삼는 페르난도 2세를 무시하고 미남왕 펠리페 1세를 왕좌에 올린다. 이로써 펠리페 1세는 에스파냐에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첫 번째 합스부르크 출신이 된다. 펠리페 1세는 미남왕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사생활이 복잡했다. 곁눈질하는 남편을 두고 질투에 가슴앓이하던 후아나는 가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인박명(美人薄命)인가? 잘생긴 펠리페 1세의 운도 그리 길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권력을 다지기도 전인 1506년 9월, 부르고스에서 열병에 걸려 요절하고 만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이때 네덜란드에서는 미친 후아나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자 펠리페 1세와 후아나 사이에 난 아들 카를에게 모든 권한과 재산이 돌아갔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왕가는 멀리 에스파냐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명가에 날개를 단다. 펠리페 1세가 죽은 뒤에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략결혼 정책은 시들지 않았다. 펠리페와 후아나 사이에서 난 딸 네 명 중 첫째 엘레오노레는 포르투갈 왕비로, 둘째 이사벨라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의 왕비가 되고, 셋째 딸 마리아는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루트비히 2세와 결혼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각 유럽의 왕실과 혼인을 맺어 존재의 가치를 드높였다. 펠리페 1세의 장남 카를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자랐다. 때맞춰 1516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죽자, 왕위 서열 1위는 광녀 후아나를 제치고 열여섯 살이었던 아들 카를(Charles V)에게 모든 권한이 상속된다. 이로써 외할머니 이사벨 1세가 통치했던 카스티야이레온 왕국과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의 아라곤 왕국까지, 이베리아반도가 오롯이 그의 품으로 들어왔다. 훗날 에스파냐 국왕, 도이칠란트 국왕, 신성로마제국 황제, 합스부르크왕가 오스트리아 대공, 시칠리아 군주, 부르고뉴 공작 등 이 외에도 그에 따르는 왕관과 직함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다. 카를 5세가 측근을 대동한 채 에스파냐로 왔다. 1519년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까지 죽으면서 오스트리아 황제에까지 등극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제 그가 지배한 땅은 프랑스만 제외하고 서유럽 전역과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다. 그러나 카를 5세에게 주어진 태생적 임무는 전쟁과 가톨릭이라는 종교뿐이었다. 프랑스와의 전쟁, 또 골수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하는 두 제국의 황제인 터라 강적 이슬람제국의 성전을 막아야 했다. 무엇보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불길처럼 번진 개신교와의 종교전쟁도 끊임없이 치러야 했다. 이모부 헨리 8세가 지배하고 있던 영국과 대결도 기다리고 있었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제국이 그렇듯 내부 불만이 증폭된 폭동과 변방의 반란도 카를 5세를 괴롭혔다. 신대륙에서 끊임없이 들여오던 황금도 에너지가 딸리면서 해가 지지 않던 제국은 서산을 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가톨릭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제국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믿었다. 카를 5세는 하늘이 내린 태생적 행운아로서 신이 선택한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맹신했다. 하느님은 능력을 과신하면서 카를 5세를 창조한 것은 아닐까. 그는 반 지성주의로 기독교의 위기를 자처하였으니 말이다. (계속)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10-07

중세 유럽의 풍운아 카를 5세

“비나이다! 비나이다! 터줏대감님께 비나이다! 검은 시루 앞다리 선각에, 뒷다리 후각에 태산같이 삼시하고, 아무쪼록 박씨 가문 말끝마다 향내 나고, 웃음마다 꽃이 피고, 낮이면 물을 맑히고, 밤이면 불을 밝혀 앉아서 삼천리, 서서 구만리를 돌보아 주소서!”(하략) 장독대 정화수 바쳐놓고 발복(發福)을 빌던 우리네 어머니들이 즐겨 하던 고삿말이다. 행운이란 기적과도 같은 것, 신에 의지해서라도 잡고 싶은 게다. 핏줄끼리 통혼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들을 아래턱이 몇 센티미터씩 돌출되는, 합죽이로 진화(?)를 거듭하였다. 악과 선 사이를 줄타기하며 600년 이상을 버텼다. 여기에 가톨릭이라는 불멸의 영혼, 희망을 카테고리로 기생하면서 편의에 의해 이용되거나 또 폭력에 정당성을 뿌리내린 채 당당하게 살아날 수 있었다. 1230년대, 에스파냐 카스티야이레온 왕국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베리아반도가 한 국가로 통일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다. 카스티야이레온 왕국의 이사벨 공주와 이베리아 동부와 지중해의 코르시카, 시칠리아, 이탈리아반도 허리까지 차지하던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혼인함으로써 연합 국가의 가톨릭 왕들이 태어났다. 도미니크 수도원을 중심으로 전개된 종교재판만을 합동으로 운영하면서 각기 다른 주권과 정치체제로 국가를 운영했다. 국토 회복 운동 ‘레콘키스타(통일 에스파냐)’, 즉 이슬람교도와 전쟁에 힘이 두 배로 비축된다. 이들은 이베리아반도에 하나 남은, 베르베르인이 지배했던 그라나다 나스르왕국(알람브라 궁전)을 1492년에 멸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다. 오스만제국에 의해 실크로드가 가로막히자, 시선을 바다로 돌리면서 신대륙 발견이라는 대항해시대로 접어든다. 이때 콜럼버스에게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가 바로 카스티야이레온 왕국의 이사벨 여왕이다. 15세기, 유럽대륙 서쪽, 이베리아반도에서 지독한 가톨릭 제국 에스파냐가 식민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황금을 바탕으로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었다. 때를 같이하여 세력균형을 맞추려는 듯 동쪽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력이 충만을 더해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 막시밀리안 1세(1459~1519년)가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의 제위를 물려받기는 했지만, 당시 나라의 제정 상태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제후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했고, 더구나 프랑스의 군주들까지 왕왕 시비를 걸어왔다. 한꺼번에 해결할 대단원의 반전이 필요했다. 군사와 자금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늘은 합스부르크 편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날을 세우던 부르고뉴, 즉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지배하는 왕국의 대공 카를의 무남독녀인 상속녀 마리를 아내로 얻었다. 그녀는 누구나 군침을 삼키는 행운의 여신이었다. 네덜란드 영토를 결혼지참금으로 가져와 남편 막시밀리안 1세에게 안기자 유럽 최고의 상업 중심지를 확보하면서 날개를 단다. 이렇게 되기까지 매우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다. 부르고뉴 공국 카를은 로렌 공작과 벌인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고, 상속녀 마리마저 감금당하고 말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프랑스 루이 11세가 마리를 자기 아들 샤를과 결혼시키기 위해 군사를 몰아왔다. 그러나 카를 대공이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긴다. “마리와 막시밀리안 1세와의 결혼은 반드시 성사시켜라!” 평생의 정적 프랑스에 결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1세는 재원도 부족했을뿐더러 헝가리 왕 마차시 1세가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라 군사를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이때 상속녀 마리는 얼굴도 본 적 없는 미래의 신랑 막시밀리안 1세에게 일생의 도박을 건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보물을 보내 그를 도왔다. 막시밀리안 1세는 그 보물을 이용해 용병을 고용해 마리를 구출하고 프랑스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사랑을 쟁취하면서 동시에 신성 도이칠란트의 왕좌에 오르자, 명실공히 유럽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한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중세란 터널을 지나면서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와도 손잡아 앙숙 프랑스의 기운을 뺏다. 에스파냐와 합스부르크 이 두 제국은 국고를 낭비하고,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전쟁보다는 현명하고 합리적이며 평화적인 방법을 선호했다. 제국의 굳건한 동지는 사촌보다 사돈이 더 좋다.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와의 사이에 남매를 두었다. 황태자 필리프(미남공)과 공녀 마르가레테가 그들이다. 그리고 당시 에스파냐에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장남 후안과 둘째 딸 후아나가 미혼이었다. 이들 두 제국은 겹사돈으로 유럽을 동서로 연결하며 경사를 맞는다. 미남공 필리프와 후아나 사이에 난 아들이 세기의 풍운아 카를 5세다. (계속)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9-09

오스만, 끝나지 않은 제국

오스만 제국은 쉴레이만 1세에 오면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유럽에서조차 쉴레이만을 대제라 부르며 존경했다.‘쉴레이만법전’을 편찬해 그 옛날 로마제국이 누렸던 공존의 혜택을 골고루 부여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입법자란 호칭이 따르기도 했다.당시에 잉글랜드 헨리 8세가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부상하고 있었고, 에스파냐 카를로스 1세인 동시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호령했다. 또한 프랑스 프랑수아 1세와 더불어 쉴레이만 1세가 합세하면서 앞을 예측할 수 없이 유럽은 역동적이게 돌아갔다.1526년 초 오스만군대는 도나우강변의 노비사드 페트로바라딘 요새를 지키던 헝가리군을 물리치고 진군을 거듭했다. 그해 8월 헝가리군 외에도 도이칠란트, 체코, 폴란드군까지 합세한 ‘모하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당시 1만5000명의 기독교 군사가 전사하는가 하면, 헝가리 왕 러요시 2세마저 목숨을 잃어야 했다.헝가리 도나우강을 경계로 서쪽 부다는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가 귀족의 추대로 왕좌에 올랐다. 1529년 봄이 되자 오스만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공략하기 위해 진격했다. 동쪽 헝가리를 지배하던 자폴야가 쉴레이만 1세를 맞이하면서 왕위 상징인 보관(寶冠)을 바쳤다. 이때부터 1687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제국이 패할 때까지 160여 년 간 페스트 지역은 이슬람 지배를 받아야 했다. 쉴레이만의 등장에 놀란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 대공은 형 에스파냐 카를 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카를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로 줄행랑을 쳤지만, 귀족들은 성 슈테판 성당을 지휘부로 하여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운이라고 해야 맞지만, 때마침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이슬람 군사들은 행군 내내 쫄딱 젖고 말았다. 장거리 행군에 비까지 맞은 터라 피곤에 절어 모든 것이 정상이 아니었다. 군사 장비도 대부분 망가지면서 가동이 어려웠다. 그런데도 공격이 개시되었다.견고한 빈의 성벽은 끄떡도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오스만제국의 막강한 군대도 지쳐갔다. 식량마저 바닥을 보였고, 기병과 포병 등도 기능을 잃어갔다. 천하의 쉴레이만도 알라가 더는 허용치 않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오스만제국 빈 공략의 실패가 주는 의미는 컸다. 제국이 팽창을 거듭하다 멈춘 시점이 바로 제국의 최고점이었다. 더구나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가 등 뒤에서 호시탐탐 제국을 노리고 있었다. 광분한 쉴레이만 1세가 동쪽으로 칼날을 돌렸다. 1533년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실크로드를 완전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여세를 몰아 이란의 북부지역까지 점령해버렸다. 두 손발 다 든 사파비 왕조는 1555년 아마샤조약을 맺음으로써 40년 전쟁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1683년에 다시 빈을 포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제국의 쇠퇴가 가속페달을 밟는 순간이었다.쉴레이만은 이스라엘 유대민족 중 가장 현명한 왕으로 칭송받는 솔로몬의 투르크식 이름이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아이러니 할 수 있지만, 유대인의 능력을 아끼고 박해를 피해 제국의 품으로 도망쳐 온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공로를 유대인들이 존경했던 까닭이다.오스만은 쉴레이만이 죽자 예니체리 횡포와 셀림 2세의 난삽한 생활에 의해 하향곡선을 그렸다. 1571년 10월 7일 지중해 패권을 두고 베네치아공국과 신성로마제국이 연합해 오스만제국과 레판토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이 ‘돈키호테’ 저자 세르반테스가 참전해 부상을 입었던 ‘레판토해전’이다. 이때 오스만제국이 궤멸하다시피 했다. 1678년, 때마침 헝가리 개신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켜 신성로마제국 레오폴트 1세에게 대항했다. 개신교는 오스만제국의 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슬람군은 역사에 있어 세 번째 빈을 포위했다. 이때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지휘하는 8만 명의 유럽연합군이 오스만 군사 뒤에 포진했다. 그러나 정작 포위된 성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카푸친 수도사 마르코가 포위망을 뚫고 성으로 잠입하여 협공작전으로 배후 기습 공격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전투가 ‘칼렌베르크 전투’다.오스만의 상징 초승달을 닮은 빵 크루아상과 함께 카푸친 수도사 소속의 이름을 딴 카푸치노 커피가 이때 생겼다. 커피가 도망친 오스만 군사에 의해 빈에 남겨지고 이를 우유에 타서 마시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카푸치노다.서세동점의 시각 중 중요한 내용을 첨부한다. 그리스 독립전쟁과 관련된 역사작가이자, 여행 작가의 말이다.“기독교인이 무슬림을 죽이는 것은 옳은 행위이고,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죽이는 것은 판단 오류이므로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무슬림이 기독교인을 죽일 때 우리 마음은 잔혹하게 변한다.”오늘날 벌어지는 폭력의 선동 같아 마음이 무거워지는 대사다./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8-26

예니체리(Yeniceri)의 탄생과 몰락

오스만트루크, 이슬람제국을 강성하게 만든 원인이자, 제국이 하향곡선을 그리게 한 가장 큰 요인, 폭력의 시대 한가운데를 장식했던 그 이름 ‘예니체리’다. 어느 사학자의 표현처럼 어찌 보면 그들도 가혹하고도 슬픈 피해자이다.예니체리는 오스만제국 3대 군주, 엄밀하게 초대 술탄이었던 무라트 1세에 의해 창설되었다. 1389년 6월, 마지막 십자군과 코소보에서 싸우다 세르비아 영웅 밀로슈 오빌리치 칼에 죽은 무라트 1세는 1363년 발칸반도에 진출한 뒤 예니체리 탄생에 박차를 가했다. 종교와 사상, 시대적 상황이 맞아떨어지면서 술탄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정예부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이슬람제국은 군인징집에 있어 까다로운 규칙이 있었다. 일단 외아들은 제외됐다. 대를 잇는 것이 우리 조선이란 나라만큼 중요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튀르크 인을 비롯해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 역시 징집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한 종교 아래 연결된 같은 형제라는 이유다. 정체성 등 뿌리를 알 수 없는 고아와 떠돌이로 살아간다고 해서 하류 취급을 당했던 집시, 전과자, 그리고 복종을 모르는 유대인 역시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러다 보니 군사 충당요건은 한계에 다다랐다. 때마침 제국이 전쟁에 연승을 거듭하면서 전쟁포로가 많았다. 데브시르메(Devsirme), 즉 전쟁포로 중 소년징발과 공납이란 방식은 고대 로마시대부터 있었다. 무라트 1세는 기독교인 중 건강한 혈통과 건강한 몸, 지혜를 두루 갖춘, 청소년을 뽑아 훈련시켰다.이들은 주로 발칸반도에서 차출했는데 이들이 예니체리다. 이렇게 부모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나온 후 특별한 장소에 흩어져 가장 먼저 이슬람으로 개종 당했다. 그리고 고된 훈련으로 몸과 마음을 담금질 당해야 했다. 튀르크 말을 익히고, 정해진 기간에 무슬림 전사로서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런 후 이스탄불 궁정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마쳐야 온전한 예니체리가 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예니체리는 철저하게 술탄의 노예로 길들어졌다. 술탄에 무한충성, 술탄의 명령에만 절대복종했으며, 황제의 친위대를 겸하며 궁정 수비는 물론 국경의 수비도 이들 임무 중 하나였다. 엄격한 규율 속에 군영에서 독신으로 생활하며 사치는커녕 경제활동 또한 금지됐다. 최정예부대였던 만큼 최신식 무기로 무장했고, 술탄 이외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 궁정반란이 일어나면 술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다 술탄이 죽으면, 곧바로 새로운 술탄에게 충성하는 맹목적이면서도 오로지 술탄을 위한, 술탄으로선 가장 충성스러운 병사들이었다.코소보전투에서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십자군이 무라트 1세의 아들 바예지드에게 전멸당한 후 그곳 출신 전쟁고아들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한 희대의 살육자 티무르가 공격했을 때 술탄 바예지드를 위해 결사항전 했던 예니체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세르비아 출신들이었다. 부모의 원수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것이다. 19세기 중엽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의 열망이 들끓을 때, 반란 지도자를 죽이고, 세르비아 농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던 이들도 예니체리였다.나날이 발전한 예니체리 부대는 16세기 무라트 3세에 이르러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튀르크 출신도 예니체리 신분이 될 수 있었기에 기독교도 청소년은 제외된다.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예니체리는 적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내부적으로는 정치에 깊게 관여하면서 골칫덩이로 떠올랐다. 장군과 재상의 지위에 오를 만큼 막강한 권한을 누리고, 술탄의 약점을 잡아 위협과 공포정치를 일삼기도 했다. 심지어 그들의 뜻에 맞지 않을 경우 황제를 암살하는 등 국정농락에 앞장서면서 제국의 세기말적 현상을 두드러지게 하는 요인이기도 했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이 집중되면 초심은 사라지고 부와 함께 쾌락이 따른다. 이것이 반복되면 이물질이 스며들며 고이게 되고 반드시 부패한다. 1826년 30대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새로운 질서를 위해 일련의 개혁에 성공하면서 수만 명의 예니체리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예니체리는 튀르크 말로 ‘예니센’, 즉 ‘새로운 병사’들은 이렇게 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천애 고아를 만드는 반인륜적인 방법으로 모집해 양육한 전쟁의 소모품이자, 용감한 군인들이었고, 500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폭력의 한 가운데 자발적 희생양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의무라 여겼다.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초심이 사라지자, 욕망이 대신했다. 그리고 그들은 처절한 멍에를 뒤집어쓴 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카루스 패르독스(Icarus Paradox)란 말이 있다. 성공이 실패를 초래하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교만하지 말라.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8-12

비잔티움제국 멸망 그 이후 수도를 이스탄불로 옮기다

1453년 비잔티움, 아니 로마를 멸망시킨 메메트 2세의 침략전쟁은 일단의 막을 내렸다. 그는 제국의 수도를 이스탄불로 옮기고, 세계 최고의 이슬람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사람이 몰려들도록 했다. 소아시아에 살던 사람들과 튀르크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을 대거 이스탄불로 이주시켜 세금혜택과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특히 지독한 기독교 국가로 거듭나던 이베리아반도에서 박해를 피해 유랑하는 유대인들을 받아들여 그야말로 부활의 에너지를 축적한다. 지난날 이슬람제국이 그랬듯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이슬람 특유의 관용과 포용 정책이 통했다. 이스탄불은 명성에 걸맞게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를 두루 아우르며 조화와 공존이 통하는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이때 공동체란 뜻인 집단 거주지 ‘밀레트(Milet)제도’가 생겼다. 기실 통제를 위한 것이긴 하지만 민족과 종교 공동체이자 공동 거주지가 생기면서 제국은 점차 확산일로를 걷는다.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짚고 가야 할 부분이 있다. 저 멀리 이베리아반도의 에스파냐 상황이다. 에스파냐는 지독한 가톨릭 국가다. 9세기경부터 십자군 전쟁 당시 로마교황조차도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는 성전 레콘키스타(Reconquista), 즉 가톨릭교도들이 벌이는 국토 되찾기 ‘국토 회복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까닭에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던 이슬람의 코르도바 왕국은 단합하지 못했던 그리스도교도의 작은 나라들을 공격해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로 명성을 떨쳤다. 그리스도교의 성지 야보고의 무덤이 있던 산티아고 대성당을 파괴했고, 985년 바르셀로나를 불태워버린다. 그러다가 내치의 위기를 대외 전쟁으로 눈을 돌리게 했던 재상 알만수르가 죽자, 기독교도들이 반격에 성공하면서 코르도바 왕국이 멸망한다.이후 이슬람은 여러 작은 나라로 쪼개지고, 이합 집산을 이루면서 그라나다에는 베르베르인이 지배하게 된다. 치열하게 전개된 가톨릭 성전은, 1469년 카스티야레이온왕국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왕국 페르난도 왕자가 세기의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이슬람국가, 무함마드가 세운 그라나다 나르스왕국(1238∼1492년)을 멸망시키며 이베리아반도는 가톨릭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이베리아에 첫 통일국가가 탄생했다. 그와 동시에 그동안 의사, 기술자, 회계사 등의 직업을 가졌던 유대인들을 박해하면서 에스파냐를 온전하고도 완전 무결점의 가톨릭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질주했다. 가톨릭 근본으로 하는 국가를 위해 사회 구성원의 실무를 담당했던 엘리트를 홀대하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 유대인은 물로,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과거 조금이라도 이타적 종교의 색채가 묻었던 예가 있으면 가차 없이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 박해를 피해 발칸반도와 소아시아로 몸을 피한 유대인들을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고 관용 정책을 펼친 메메트 2세가 받아들여 이스탄불에 역동적인 힘을 보탰다.비잔티움까지 손아귀에 넣은 오스만제국은 발칸반도는 물론 지중해 동쪽과 중동 지역, 북아프리카에까지 제국의 영토를 넓혔고, 이 기세를 몰아 16세기 말이 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북쪽으로 헝가리에서 러시아 남쪽 경계,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걸프만까지 그 옛날 이슬람이 지배했던 지역 대부분을 제국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뒷받침하는 예니체리의 강력하고도 충성스러운 전투력과 데브시르메(Devşirme), 즉 지배지에서 전쟁고아들을 강제로 끌어 모아 무장시킨 군사 충원 방식에 있었다. 관전자로서 재미있는 부분은 메메트 2세는 스스로 기독교 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기독교 그리스인 대교구장을 임명했고, 제국의 술탄이자 로마제국의 황제를 자처했다. 그러자 또 하나의 황제를 자칭하는 신성로마제국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이탈리아 원정대를 꾸리고 진격해 들어갔지만, 교황을 중심으로 기독교권 방어에 사활을 건 기독교 국가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때마침 알바니아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급히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이후 1481년 메메트 2세는 이집트 정복에 나섰다가 원정 도중에 죽고 말았다.파티흐, 즉 정복자란 별명이 붙은 풍운아 메메트 2세가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다. 비잔티움을 이스탄불로 바꾸며 제국의 수도로 삼았던 그로 인해 지금의 이스탄불은 그리스인과 로마인, 터키인에 의한 인류 문화사적 정기가 은은하고 진중하게, 그러면서 때론 역동적인 광선을 발산하는 도시로 거듭났다.특히 흑해를 이슬람의 호수로 만들어버린 것은 그의 역작이었다. 발칸반도를 평정하면서 보스니아 귀족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킨 뒤 북방 변경 지역을 방어하는 오스만의 전사로 탈바꿈한 것도 그의 작품이다./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7-29

비잔티움 최후의 날 배를 산으로 옮긴 메흐메트 2세

큰일을 앞둔 날에는 여지없이 재앙이 예견된다. 나관중이 쓴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을 앞두고 조조도 그랬다. “달은 밝고 별은 성글고 까마귀와 까치는 남쪽으로 날아가서 나무에 세 번 둘러싸여 의지할 가지가 없네”라고 시를 읊자, 옆에서 시구절이 불길하다며 유복이 간언하자 조조는 도취된 흥을 깬다며 죽여 버렸다. 정말 유복의 한이 통했는지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완패를 면치 못하고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 채 도망쳐야 했다.1451년 메흐메트 2세(Meh med Ⅱ·1432~1481), 19세의 나이로 제7대 술탄에 등극한 그는 천년 제국 비잔티움에 사활을 걸었다. 로마제국 최후의 날, 아니 콘스탄티노플 마지막 날, 불길한 조짐이 연이어 나타났다. 1453년 5월 22일 밤 월식이 있었다. 다음날 바람이 불어 흙먼지가 날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었다. 황제가 기도를 올리던 중 성상이 떨어지며, 짙은 안개가 성을 감싸고 성 소피아 대성당 돔 지붕에 붉은 기운이 흘러 아래까지 훑고 사라졌다. 비잔티움에는 1123년을 지탱한 제국의 에너지, 5세기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겹겹의 성벽으로 둘러쳐진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었다. 길이 20km, 넓이 대략 70m의 3중 성벽 이름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다. 그리고 바다 골든혼(황금 뿔)쪽에 비록 한 겹의 성벽이었으나 매우 견고했다. 무엇보다 골든혼 어귀에는 굵은 쇠사슬을 물아래 가로로 걸쳐놓아 어떤 배도 드나들 수 없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사공이 많았다. 그는 골든혼에 닿는 도로를 닦고, 쇠로 바퀴를 만들고 철길을 완성했다. 목수를 동원해 중형선박 운반용 거대한 나무 받침대도 제작했다. 5월 22일 아침이 되자 수십 마리 황소와 군사가 이끄는 70척 함선이 언덕을 넘어 골든혼으로 내려왔다. 이를 본 콘스탄티누스 11세와 비잔티움 병사들은 경악했다.1453년 5월 29일 화요일 아침, 드디어 예니체리 부대가 진군하기 시작했다. 나팔과 북소리가 진동하며 죽음의 향연을 펼치려는 군사들의 함성이 저승사자를 불러내는 의식 같았다. 전투가 한창이던 때, 이슬람 병사 몇 명이 반쯤 열린 작은 쪽문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 오스만제국 깃발을 올려버렸다. 이슬람 군사들이 물결치듯 밀려들었다. 아뿔싸! 바늘구멍이 거대한 둑을 무너뜨린 형국이었다.천년의 로마가 막을 내리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메흐메트 2세는 의례 3일 동안 약탈을 허용했다. 살육, 강간, 방화와 파괴가 이어졌고 도시는 죽어갔다. 그러나 당일 약탈을 중지시켰다. 이미 죽은 자가 태반이요, 죽어가는 자가 남은 반이고,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아이들은 머리가 깨어지고, 성당은 무너지고 불에 탔다. 황궁은 빈껍데기만 남았고, 성모상은 조각조각 흩어졌다. 더 약탈할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오후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갈 무렵이었다. 메흐메트 2세는 성소피아 성당으로 갔다. 화려하면서 장중한, 그 어떤 악인도 흡입할 압도적인 공간, 믿음의 방식이 다를 뿐인, 같은 하늘을 모신 성스러운 곳에 들자 파괴가 최선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기도를 올릴 때 가톨릭 아이콘을 천으로 덮은 채 진행했다. 성 소피아 대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선포함으로써 화려했던 성당은 이슬람의 모스크로 변했다. 밤하늘에는 어둠 속에서 그믐달이 패망한 천년 제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의 튀르키예 국기 모습이다. 메흐메트 2세는 황궁으로 향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는 궁이었다. 황궁 입성! 인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궁전 내부를 돌아다니며 감회와 감상에 젖었다. 그러나 옛날 알렉산더가 페르세폴리스를 불 지르며 감상하던 것처럼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문화와 예술이 역사를 품은 채 침묵으로 말을 건네는 도시, 천년을 이어오며 영고성쇠를 거듭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당당했던 황제가 머물던 궁이 초라한 모습을 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고 한다.“궁전에는 거미줄만 무성하고 아프라시아브 탑에서 부엉이만 우는구나!”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제국의 수도로 화려하게 부상했던 비잔티움이, 콘스탄티누스 11세에 멸하게 되니 역사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이를 기점으로 비잔틴 양식에 오리엔트 양식,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첨탑이 어우러져 곡선과 직선의 조화, 아치와 각짐이 마치 공존이 삶의 최선이라고 하느님이자 알라께서 간곡히 전하고 있었다.정복자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제국의 수도를 아드리아노플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도시 이름을 ‘그 도시’, 혹은 ‘큰 도시’라는 뜻을 지닌 ‘이스탄불’로 바꿨다. 주인이 떠나고 없는 오래 버려진 허물어져 가는 빈집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그 옛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탄불에 제국의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