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황혼의 제국
합스부르크 적통이자 오스트리아와 이베리아반도를 오롯이 손 안에 넣은 억세게 운 좋은 카를 5세지만 그는 전쟁으로 일생을 보내야 했다.
신대륙에서 끊임없이 들여오는 황금도 바닥을 드러내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석양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합스부르크와 에스파냐 제국은 지독한 가톨릭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예수회를 만들어 반개혁을 단행하면서 원론적 신앙에 깊게 파고들어 개신교에 대항하는 수단을 병행했다.
로마교황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매형이다. 어린 시절 카를과 폴로 경기를 함께한 친구이기도 했다. 카를 5세의 가톨릭 교권이 강성해지자 이를 우려한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프랑스를 지지하면서 카를 5세가 적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카를은 그를 지원하는 자들의 부(富)를 마음껏 활용했다. 아우크스부르크 금융가 큰손들과 고모 마르가레테의 힘을 이용해 제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카를 5세는 1520년 10월 22일, 그들의 지원을 받아 도이칠란트 황제 카를 5세로 아헨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마친다.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를 방어했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았다. 누나의 남편을 차마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적 프랑스를 도와준 로마는 그냥 둘 수 없었다. 오랜 전쟁으로 불만이 가득했던 3만명의 가톨릭 군사는 격렬한 기세로 로마로 진격했다. 스위스 교황 근위대 5000명이 하늘을 믿고 목숨을 건 방어에 임했으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때 일부 근위병만이 교황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가톨릭 점령군은 3일간 로마를 약탈했다. 남자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으며, 금은보화를 찾아 고문하고, 여자들은 강간했으며, 건물은 불태웠다.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하는 인간에 의해 로마가 폐허가 되는, 가톨릭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세계는 카를 5세의 기세를 꺾을 자가 없었다. 그는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튀니지를 함락하고 서부 지중해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이슬람이 서구 유럽으로의 진출을 차단한다.
프랑수아 1세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선 역부족임을 실감해야 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면서 두 앙숙 간의 오랜 갈등은 막을 내린다. 감수성이 남달랐던 프랑수아 1세는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찬사를 받는다. 그에 의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를 세상에 선보이게 했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작품들을 모아 지금의 프랑스 루브르 재산으로 만든, 문예부흥에 앞장선 왕으로 찬사가 따른다.
카를 5세는 유럽을 호령하는 전대미문의 제왕이 되었지만, 또 다른 도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한 두 제국의 황제답게 종교개혁의 물살을 타는 개신교의 확산을 막아야 하는 신성한 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톨릭이 신교를 탄압하면서 이에 맞서는 전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농민반란 등 크고 작은 전쟁이 수십 년 지속되면서 제국의 에너지는 소진되고 있었다. 긴 병에 효자 없듯, 오랜 전쟁에 애국자 없다. 결국 1555년 개신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휴전을 맺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해’로 구교는 신교를 인정하면서 타협했다.
카를 5세, 매부리코에 길쭉한 턱과 아래턱이 튀어나온 합죽이인 까닭에 사람들로부터 그리 좋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입을 온전히 다물 수 없어 파리가 입속으로 들락거리자 콧수염을 길러야 했고, 턱으로 인해 늘 침을 흘려 소화기에 문제가 많았으며, 말년엔 통풍마저 찾아왔다. 그도 인간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삶에 회의가 일었고, 결국 56세가 되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한 여생을 택한다.
아들 펠리페 2세(당시 식민지 필리핀은 펠리페에서 붙인 이름이다)에게 플랑드르 부르군트 공국과 에스파냐, 그리고 식민지 통치권을 넘기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를 넘겨준다. 그리고 2년 뒤 억세게 운이 좋은 카를 5세도 1558년 9월에 말라리아에 걸려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1세는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서쪽으로 끊임없이 진출을 노리는 오스만제국의 쉴레이만 1세와 치열하게 전쟁을 해야 했다. 헝가리로 진군하는 오스만제국군을 맞아 패하면서 도나우강 동쪽을 넘겨주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를 온전하게 가톨릭 국가로 만드는 데는 성공한다. 이로써 중부유럽의 기독교세계 수호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지역에 그들의 정통 가톨릭을 굳건하게 뿌리내림으로써 훗날 갈등의 씨를 뿌려놓았다.
악을 행하면서 질서를 파괴하고, 스스로 파탄에 빠지면서 새로운 질서로 회복하는 악순환은 역사 이래 이어져왔다. 영혼의 부작용으로 태어나는 ‘악으로부터 도덕’이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스토리텔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