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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를 가다 - 인연, 아주 오래된…

등록일 2024-11-18 18:51 게재일 2024-11-19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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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칠채산은 일곱 가지 색을 띄는 무지개산이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 선조가 남긴 유물유적을 사랑했다. 짝사랑이 반복되면 고소 섞인 아내의 눈길을 애써 무시한 채 길을 떠나곤 했다.

“여행은 간절함으로 무수한 삶을 찾아 헤매다 내 안으로 되돌아가는 행위”라고 어느 글쟁이가 말했다. 기회는 우연을 가장해 필연처럼 찾아왔다. 평소 꿈꾸어왔던 실크로드, 앞선 한국인 혜초(慧超)가 눈물을 뿌리며 넘었던 고원과 황량한 사막, 미지의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실크로드를 열었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과 사연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무엇보다 역맛살이 게맛살보다 이토록 맛있고 매력적인 까닭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설렘 때문이었다.

이번 실크로드 중국 길에서 만난 인연은 다양한 형태로 내 가슴에 들어왔다. 수다보다 침묵이 더 잘 번진다고 한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은 탓이지만, 무의식의 저편에 그들이 보는 세상이 침묵으로 전해왔다. 시안(西安) 후이족 거리에서 아이와 주고받은 눈인사는 이국의 낯선 땅 번잡하고 들뜬 이방인 마음에 환영의 꽃다발이었고, 라블랑스에서 받은 소년의 해맑은 인사는 연꽃이 피어날 때 둔탁하면서도 청량한 미성(美聲)이었다. 인연은 그런 것, 서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정이 있다면 우리나라든 중국이든 어떤가. 밤의 한기가 가시지 않은 어둑새벽, 찬 언덕에 걸터앉아 신을 향해 물같이 흐르는 행렬을 보면서 지금까지 걸어왔던 궁색한 사연들을 시간의 저편으로 흘려버렸다.

얼마나 오래된 인연인가. 평안으로 향하던 초원에서 만난 순박한 아가씨 미소를 떠올리면 여전히 설렌다. 전생에 어떤 인연이 닿아 있어 막연한 그리움은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를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은밀한 추억 한 자락 감춰둔 듯 얼굴이 붉어진다. 검게 탄 피부, 갸름한 얼굴 곳곳에 꾸밈없이 핀 점, 다소곳이 숙인 쑥스러운 미소에서 어린 시절 계단 아랫집에 살던 순이가 떠올랐다. 도심의 삶에서 사라진 그리움이었다. 짓궂은 신의 장난인가.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었다면 그리움이 덜했을지 모르지만, 다행히(?) 물리적 저장 공간을 잃어버린 덕에 마음속에 더 깊이 담아두게 되었다.

라블랑스에서 평안으로 향하는 길, 간자초원은 유목민의 땅이다. 야크와 양을 기르는 유목민은 마을에서 겨울을 보내다 날이 풀리면 초원을 이동하며 유목생활을 한다.
라블랑스에서 평안으로 향하는 길, 간자초원은 유목민의 땅이다. 야크와 양을 기르는 유목민은 마을에서 겨울을 보내다 날이 풀리면 초원을 이동하며 유목생활을 한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오랜 시간 길에서 시달린 여행객에게 한 모금 청량제 같은 인연도 있다.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르는 도로에서 과일 파는 아가씨의 수다 섞인 웃음은 잘 익은 과일만큼 맛있다. 덤을 주는 모습은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고, 이 빠진 할아버지의 순한 웃음은 물리적으로 그어놓은 국경을 허물기에 충분했다. 그들에게는 허세도 가식도 없었고, 종교도 정치도 민주화도 중요하지 않았다. 종교는 분열을 획책하지만, 믿음은 화합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그들 마음속에는 믿음뿐인 듯했다.

“아이들에게는 적은 없고 친구만 있다” 뭇 남성의 영원한 연인 오드리 햅번이 한 말이다. 아이들만 사는 세상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피터 팬이 늙지 않고 산다는 ‘네버랜드’ 같을까?

가식 없이 해맑은 아이들을 만났다. 닫혀있던 내 마음을 쉽게 열어버린 위구르 아이들, 막대 아이스크림을 나누며 함께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훌쩍 떠나는 우리를 버스까지 따라온 사슴 같은 눈망울과 마주치자 웃어 준다는 게 슬픈 여운만 남기고 말았다. 아이의 투명한 시선은 내 가슴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건방진 우월적 측은지심이었을까. 불쑥 나타나 공허한 외로움만 안겨 준 것은 아닐까? 어른의 잣대로 주었던 정은 무던했던 아이들에게 파문만 일으킨 꼴이었다. 조선의 반항아 이옥이 한 말처럼 천고에 더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이 회한의 가슴을 여미게 했다.

위구르 아이들 여운이 가시기 전 밤에만 몰래 피는 박꽃 같은 아이를 만났다. 이방인이 소리에 잠에서 깬 듯했다. 흑석같이 짙은 눈동자에 통통한 볼, 어머니 사랑의 증표인 듯 하얀 둥근 귀걸이를 한 아이는 카메라를 피하지 않았다. 자기를 바라보는 나보다 나를 더 궁금해 하는 듯 보였다. 돌아서는 발길, 등 뒤에서 무엇이 툭 친다. 처음으로 내게 주는 엷은 미소였다.

지구촌 어디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정이 넘치고 사랑이 있다. 말과 글이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문화가 생소해도 변하지 않은 진실이다. 폭력이 난무하고, 분배의 정의가 사라진 혼탁한 세상에서 화려하거나 빛나지는 않지만, 강물이 흐려지지 않게 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다.

실크로드 중국 길에서 만난 인연들이 시시때때로 떠올라 가슴을 적신다. 사람의 꿈을 들여다보면 그 내면을 알 수 있다는데 ‘긍정의 힘’과 현실에 감사하는 ‘신의 은총’을 읽을 수 있었다. 명분 따위나 욕심에 집착한 나머지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과거의 내 가난한 삶은 이제 그 의미를 잃었다.

이번 실크로드 여행에서 맹목적인 순종자에 불과했던 내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오롯이 내 삶의 길과 마주했던 소중한 시간이자, 삶 자체가 풍요로워진 참 맛있는 여행이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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