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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풍운아 카를 5세

등록일 2024-10-07 18:28 게재일 2024-10-0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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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왕관을 쓴 자여, 그 무게를 견뎌라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 카를 5세. 후안 판토하 데 라 크루스(1553∼1608)作. 프라도미술관(Wikipedia)

합스부르크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와의 사이에 필리프와 공녀 마르가레테 남매를 두었고, 에스파냐에 페르난도와 이사벨 사이의 장남 후안과 둘째 딸 후아나가 미혼이었다. 이들 두 제국이 겹사돈을 맺으면서 유럽을 동서로 연결하며 세기적 경사를 맞이한다.

에스파냐 후아나는 필리프 1세가 살던 네덜란드로 시집갔고, 오스트리아 마르가레테는 에스파냐의 후안에게 시집갔다. 두 제국의 결속은 동서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효과와 동시에 세계가 두 제국의 눈치를 보는 형국으로 변했다. 그런데 아뿔싸! 세상에 뜻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에스파냐 왕위 계승자 후안이 신방을 차린 지 몇 달 만에 급서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에스파냐는 왕위 계승을 두고 가계도가 얽히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공녀 마르가레테의 뱃속에 후안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절박한 희망에도 아기가 죽은 채 태어나고 말았다. 결국 마르가레테는 친정 네덜란드로 돌아가 재혼에 성공하면서, 훗날 카를 5세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권력에 힘을 실어 준다. 이 와중에 1504년 카스티야이레온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가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결혼으로 이베리아반도를 하나의 가톨릭국가로 묶었고, 아메리카 대륙의 황금을 축적했던 그녀였다. 왕위 계승자 아들 후안이 죽었으니 네덜란드로 시집간 유일한 혈육 후아나가 상속녀가 된다.

광녀 후아나. 후안 데 플란데스(1450∼1519)作. 빈 미술사박물관(Wikipedia). 곁눈질하는 남편을 두고 질투에 가슴앓이하던 후아나는 가끔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남편 펠리페 1세가 죽자 남편을 살리겠다며 시체를 마차에 싣고 수도원을 찾아다니곤 하였다.
광녀 후아나. 후안 데 플란데스(1450∼1519)作. 빈 미술사박물관(Wikipedia). 곁눈질하는 남편을 두고 질투에 가슴앓이하던 후아나는 가끔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남편 펠리페 1세가 죽자 남편을 살리겠다며 시체를 마차에 싣고 수도원을 찾아다니곤 하였다.

이사벨 1세가 죽자 남편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이레온 왕국에 섭정을 펼치면서 그곳 대신들의 불만이 증폭된다. 이때 펠리페 1세가 아내 후아나와 함께 에스파냐로 오면서 장인 페르난도와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카스티야 왕국의 대신들은 강력한 드라이브를 일삼는 페르난도 2세를 무시하고 미남왕 펠리페 1세를 왕좌에 올린다. 이로써 펠리페 1세는 에스파냐에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첫 번째 합스부르크 출신이 된다.

펠리페 1세는 미남왕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사생활이 복잡했다. 곁눈질하는 남편을 두고 질투에 가슴앓이하던 후아나는 가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인박명(美人薄命)인가? 잘생긴 펠리페 1세의 운도 그리 길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권력을 다지기도 전인 1506년 9월, 부르고스에서 열병에 걸려 요절하고 만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이때 네덜란드에서는 미친 후아나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자 펠리페 1세와 후아나 사이에 난 아들 카를에게 모든 권한과 재산이 돌아갔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왕가는 멀리 에스파냐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명가에 날개를 단다.

펠리페 1세가 죽은 뒤에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략결혼 정책은 시들지 않았다. 펠리페와 후아나 사이에서 난 딸 네 명 중 첫째 엘레오노레는 포르투갈 왕비로, 둘째 이사벨라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의 왕비가 되고, 셋째 딸 마리아는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루트비히 2세와 결혼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각 유럽의 왕실과 혼인을 맺어 존재의 가치를 드높였다.

펠리페 1세의 장남 카를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자랐다. 때맞춰 1516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죽자, 왕위 서열 1위는 광녀 후아나를 제치고 열여섯 살이었던 아들 카를(Charles V)에게 모든 권한이 상속된다. 이로써 외할머니 이사벨 1세가 통치했던 카스티야이레온 왕국과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의 아라곤 왕국까지, 이베리아반도가 오롯이 그의 품으로 들어왔다. 훗날 에스파냐 국왕, 도이칠란트 국왕, 신성로마제국 황제, 합스부르크왕가 오스트리아 대공, 시칠리아 군주, 부르고뉴 공작 등 이 외에도 그에 따르는 왕관과 직함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다.

미남왕 펠리페 1세. 후안 데 플란데스(1450∼1519)作. 빈 미술사박물관(Wikipedia). 에스파냐에서 왕위를 차지한 첫 번째 합스부르크 출신. 잘생긴 얼굴만큼 사생활이 복잡했다.
미남왕 펠리페 1세. 후안 데 플란데스(1450∼1519)作. 빈 미술사박물관(Wikipedia). 에스파냐에서 왕위를 차지한 첫 번째 합스부르크 출신. 잘생긴 얼굴만큼 사생활이 복잡했다.

카를 5세가 측근을 대동한 채 에스파냐로 왔다. 1519년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까지 죽으면서 오스트리아 황제에까지 등극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제 그가 지배한 땅은 프랑스만 제외하고 서유럽 전역과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다. 그러나 카를 5세에게 주어진 태생적 임무는 전쟁과 가톨릭이라는 종교뿐이었다. 프랑스와의 전쟁, 또 골수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하는 두 제국의 황제인 터라 강적 이슬람제국의 성전을 막아야 했다. 무엇보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불길처럼 번진 개신교와의 종교전쟁도 끊임없이 치러야 했다. 이모부 헨리 8세가 지배하고 있던 영국과 대결도 기다리고 있었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제국이 그렇듯 내부 불만이 증폭된 폭동과 변방의 반란도 카를 5세를 괴롭혔다. 신대륙에서 끊임없이 들여오던 황금도 에너지가 딸리면서 해가 지지 않던 제국은 서산을 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가톨릭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제국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믿었다.

카를 5세는 하늘이 내린 태생적 행운아로서 신이 선택한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맹신했다. 하느님은 능력을 과신하면서 카를 5세를 창조한 것은 아닐까. 그는 반 지성주의로 기독교의 위기를 자처하였으니 말이다. (계속)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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