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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바예지드 1세와 희대의 살육자 티무르

발칸반도는 동으로 서쪽으로 끊임없는 수백, 수천 번 외적의 침략으로 전쟁에 시달린 반도이자, 지금도 수많은 민족이 뒤섞인 까닭이요, 끈질긴 생명력을 잃지 않는 강인한 민족들의 땅이다. 우리네 한반도와 비슷한 슬픔을 지닌 땅이다.코소보전투에서 승리한 바예지드 1세가 술탄의 자리에 오른다.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이때 헝가리와 스위스 연합, 제노바공국,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베네치아까지 합세해 마지막 대규모 십자군, ‘니코폴리스 십자군’이 결성된다.1396년 9월, 드디어 헝가리 도나우강가 니코폴리스에서 두 군사가 맞붙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바예지드 1세가 승리를 거두면서 세계를 향해 성전의 선봉임을 과시했고, 하늘에 자랑했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 성공이 실패를 초래하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알바니아를 버스로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오금을 저릴 만큼 험준한 산악지형에 아연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알바니아 모레아 같은 험준한 산악지대가 넓게 형성된 곳은 이슬람의 힘이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바예지드 1세는 그냥 두지 않았다. 무리한 군사적 행동은 역풍을 감당해야 했다. 발칸반도에 술탄의 신하로서 복종하고 고개 숙이는 에니체리가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도거나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군인이었다. 비(非) 무슬림으로 구성된 기독교계 직업군인을 이용해 무슬림과 투르크 인을 상대로 살육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는 토후국은 물론, 백성의 분노를 샀다. 성전, 전사의 원정대로선 이상과 신앙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 일은 훗날 오스만제국으로서도 재앙으로 작용한다.이때였다. 1402년이 되자 세계사에 가혹한 정복자로 알려진 티무르가 등장한다. 현재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서정(西征)한 티무르와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티무르, 위대한 약탈자, 폭력의 화신,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하지 않은 무적의 사나이였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비옥한 땅일지라도 풀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평야는 불모지로 변했다. 남녀노소 죽이는 것을 파리 목숨과 같이 여겼다. 사람의 머리로 탑을 쌓았다니 그저 할 말을 잊는다. 진정 악의 화신이라 해도 좋았다.“…. 화려했던 바그다드는 폐허로 남았다. 사원도, 기도하는 신자도 볼 수 없다. 나무들은 메마르고 수로는 막혀 기능하지 못했다. 도시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가혹한 모습이다.”티무르에 침략당한 지 35년이 지난 후 이집트의 모 역사가가 기록한 바그다드 모습이다. 티무르는 오아시스를 주변으로 독자적인 이슬람이 번지면서 자연적으로 스며든 이슬람을 받아들인 경우다. 14세기 후반, 사마르칸트 등 중앙아시아의 비옥한 땅을 평정하고 30여 년에 걸친 정복 사업은 살육을 동반한 가공할 만한 업적을 이룬다. 북쪽의 러시아국경에 걸쳐있고, 남쪽으로는 인도, 동쪽으로는 중국변방까지, 서쪽으로 타슈켄트, 테헤란, 앙카라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리고 서진을 이어가 소아시아에 도착해 오스만제국과 대치한다.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있던 바예지드 1세는 급하게 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무적의 이슬람군도 티무르에게는 어림없었다.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예지드 1세가 지배한 토후국 지도자 중 일부가 오스만제국을 배신하고 티무르에게 붙었던 것이다. 비(非) 이슬람군으로 이슬람교도, 혹은 튀르크족을 죽이는 전쟁에 성전이란 이름으로 동조할 수 없었다. 그러자 승패는 불 보듯 뻔했다. 세기의 패자 오스만제국도 티무르 앞에선 맥을 추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번개왕’ 바예지드 1세가 포로로 잡힌다. 수치심에 분노를 감출 수 없었던 1402년, 그는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뒀다. 그리고 화려한 문화를 향유했던 바그다드는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 세르비아 출신 에니체리들이 바예지드 1세를 위해 결사 항전했다고 전한다. 충성심을 잘만 심어 놓으면 이처럼 엄청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각설, 오스만제국을 점령한 티무르는 욕망에 불탄 나머지 역사적 오판을 범한다. 오스만제국으로서는 이만한 다행히 없었지만, 제국을 완전히 무너트리지 않았다. 오스만 군사를 유럽 침략에 선봉을 세우려는 티무르의 욕심이었다. 서구인으로선 천만다행한 일이 또 벌어졌다. 1402년 티무르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치기 위해 사마르칸트로 향했다. 세계의 패자가 두 명이 될 수는 없다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는 티무르와 일전을 준비했으나 다행(?)히도 무위에 그쳤다. 티무르가 진군 도중 졸지에 열병에 걸려 죽었기 때문이다. 그이 나이 69세였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명나라에 대한 원정을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여기서 역사적 가정, 즉 히스토리 이프(History if)란 말이 있다. 만약 영락제와 티무르의 한판 대결이 성사되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스토리텔링 작가

2024-07-01

‘검은 새의 들녘’ 세르비아 민족 성지 코소보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세기의 화약고라 불리던 발칸반도다. 그만큼 민족과 종교와 역사가 뒤엉킨 땅이란 뜻이다. 그 중심에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있다. 특히 세르비아의 성지 코소보에 이민족이 나라를 세운다니? 세르비아로서는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중세의 걸출한 영웅이자, 세르비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스테판 듀산, 그는 지금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는 물론 코소보까지 넓은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1331년에는 발칸을 넘어 유럽 전역의 강자로 거듭났다. 후세 역사가들은 스테판 듀산 앞에 ‘강자(强者)’라는 별칭을 붙여 이미지를 상승시켰다.듀산의 공포에 동로마 비잔티움제국은 호시탐탐 발칸반도를 노리고 있던 오스만제국에 SOS를 타전하고 말았다. 이 잘못된 판단이 세르비아 네만야 왕조의 멸망과 함께 천년을 이어오던 비잔티움제국의 종말을 앞당기게 된다. 오스만으로선 기다렸던 바였다.1386년에 불가리아를 함락한 이슬람은 1389년 6월 28일, 오늘날 세르비아 민족 성지인 ‘검은 새의 들녘’으로 불리는 코소보 대평원에서 세르비아 군대와 마주했다. 세르비아 수호신이자 성자 성 비투스의 날,(1914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그날도 성 비투스의 날이었다) 운명을 건 결전이 시작된다.세르비아 군을 중심으로 자칭 십자연합군 10만, 오스만 6만이 진을 쳤다. 세르비아 농민들까지 동원된, 그야말로 세르비아인의 신화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날이 시작된 것이다.세르비아에서는 라자르가 선두에서 지휘를 맡았다. 오스만은 중앙군에 무라트 1세가 지휘봉을 휘둘렀고, 오른쪽에는 큰아들이자 ‘번개왕’으로 등극하는 바예지드가, 왼쪽 날개는 작은아들 야쿠브가 지휘했다.라자르 신호와 함께 세르비아군 선공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전투는 밀고 밀리기를 반복하며 꼬박 하루를 넘기며 이어졌다. 세르비아 역사상 이토록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는 일찍이 없었다. 점차 세르비아 왼쪽 진영이 무너지면서 전세가 이슬람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세르비아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세르비아군 최후의 한 명까지 영웅적인 죽음을 맞았고 오스만튀르크제국이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오스만 무라트 1세도 목숨을 잃어야 했다. 후세에 와서 이 전투가 세르비아 민족주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세르비아인 가슴에 화석처럼 각인된다. 누구의 도움 없이 발칸반도에서 이슬람 제국에 마지막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항전했던 역사적 사실은 전무후무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의 영원한 영웅 밀로슈 오빌리치의 신화가 탄생되면서 세르비아인 가슴을 덥혔다. 세르비아 선봉대장 오빌리치는 짐짓 거짓 항복을 해 무라트 1세의 환심을 산다. 그리고 품속에 무기를 숨기고 들어가 무라트 1세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는데 성공하고, 그 역시 오스만 군사들에 의해 장렬하게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진실은 무라트 1세가 전장을 돌아보다 전사자 속에 누워있던 오빌리치가 일어나 심장에 칼을 꽂았다는 것이 팩트다.아들 바예지드는 군사를 물리기는커녕 슬픔을 뒤로 한 채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고 전술을 가다듬었다. 결국 농민군까지 끌어모아 항전했던 라자르는 바예지드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만다. 바예지드는 라자르의 목을 자르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그리고 1453년 메메트 2세에 의해 비잔티움제국마저 멸망하면서 발칸반도는 무려 400년 동안 오스만트루크제국 압제 아래 들어가야 했다. ‘검은 새의 들녘-코소보 전투’는 ‘코소보의 처녀’라는 또 하나의 사연을 탄생시켰다.“오 불쌍한 이여, 악마가 그대의 운명이구려! 불쌍한 당신이 푸른 소나무를 잡는다면 그 마저 시들어 버릴 것이니!”세르비아 사람들은 오스만제국의 압제 아래서 이 노래를 부르며 살았다. 가슴에는 의기가 충만하고, 민족혼이 가슴을 쿵쿵 쳤다. 그렇게 코소보는 세르비아인 민족의 성지로 굳어지고 있었다.훗날 세르비아 희대의 살인마 밀로셰비치가 길들인 민간 무장단체 ‘아르칸의 호랑이’에 의해 코소보는 20세기 가장 추악한 전쟁터로 변했다. 자신들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민족의 성지 ‘검은새의 들녘’에 알바니아 무슬림들이 몰려와 살면서 나라를 세우겠다니? 어쩌면 세르비아로서는 도무지 묵과할 수 없는 사연인지도 모른다.그러나 6세기 이전 로마제국의 발칸반도 진출에 끝까지 애를 먹였던 민족, 마지막까지 로마제국과 발칸반도에서 전쟁을 이어갔던 민족이 알바니아 조상 격인 일리리안이었다.돌고 도는 것이 역사다. 어느 한 부분을 뚝 잘라 내 것이라 주장한다면, 폭력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호령했던 땅이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면 중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스토리텔링 작가

2024-06-17

인류 문명 발상지 해 뜨는 동방의 나라 오리엔트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동경으로 실크로드를 열었던 서아시아다. 서구 유럽의 시각으론 역사의 카메오라며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지만 인류문명 교류에 위대한 공헌은 변치 않은 사실이다.서아시아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이름도 생소하기 짝이 없는 ‘차탈휘유크’와 ‘예리코로’라는 인류 최초의 도시가 형성된 곳이 서아시아와 나일강 유역의 오리엔트 지역이다. 물론 처음에는 주민이라고 해봐야 5000에서 1만 명 정도였겠지만 가축의 사육이라는 선진 삶의 방식으로 윤택한 터전을 닦았던 곳이며, 농법과 가축사육, 생산물의 이동 등을 유럽에 전해준다.기원전 4000년경부터 인류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곳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두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었다. 3500년 전, 농경과 관련해 관개농업이 발달했던 이 지역에서 농업생산량이 늘어나고 농촌은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청동기가 제작되고 점성술과 더불어 문자와 태음력이 발명된다.이집트 역시 나일강 유역의 범람을 대비한 대규모 치수 사업을 통해 도시국가가 형성된다. 이로써 고대문명의 태동, 즉 메소포타미아 수메르를 중심으로 히타이트, 아시리아, 헤브라이, 바빌로니아, 페니키아 등 수많은 오리엔트 고대국가가 태어났고, 또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인류문명 창달에 앞장섰다. 이 중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훗날 5000년 역사의 굳건한 모태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문명이란, 자생적이든 모방에 의한 것이든 일단 탄생과 동시에 이동과 전파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동 과정이 곧 문명의 교류다. 문화교류를 통해 서양문명의 뿌리라 일컫는 그리스·로마 문명이 꽃피는 토양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서양 기독교 중심사상이 절대적 보편가치로 인식되고, 유럽인의 인식 세계에 들어앉은 이교도에 대한 배타적 권리는 오리엔트문명의 영향을 축소하거나 부정하고 있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으로 인한 살상 무기의 발전으로 절대강자의 자만이 넘쳐 인류침탈에 이바지한 제국주의만 없었어도 자랑할 만한 요소는 그리 많지 않다.오리엔트란 용어 역시 서구의 시각이다. 오리엔트란 지중해 동쪽 여러 나라, 아시아를 가리키는 경우다. 어원은 라틴어의 오리엔스(Orient)에서 나왔다. ‘해가 뜨는 곳’ 동방(東方)을 뜻하며, 특히 로마인들은 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으로 한 지중해 동쪽을 통틀어 오리엔트라고 불렀다. 라틴의 속담 ‘빛은 동방으로부터’에서 동방이란, 당시 그리스를 가리킨다. 이때 빛이란 선진문화를 일컫는다.‘페르시아’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남서부 해안가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인 파르스(Fars)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이란의 고대국가 엘란 왕국에 이어 기원전 815년경 이란의 북서부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거주하던 민족이 남쪽으로 내려와 파르수마슈에 정착해 세웠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다.막강 페르시아가 등장하면서 기원전 6세기 나일강 유역에서 30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자연재해 한번 없이 풍요를 누리던 이집트를 평정하고, 갈등을 일으키던 오리엔트를 하나로 묶는다.페르시아는 지중해로 진출해 소아시아 그리스 식민지를 야금야금 삼켰다. 이는 필연적으로 그리스와의 한 판 세기의 대결을 불렀다. 결국 다리우스 3세를 마지막으로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기원전 331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제국이지만, 당시 화려했던 그들의 문화는 상상 속에서 여전히 찬란하다. 6세기에 폐허가 된 페르시아 고대도시 페르세폴리스를 방문했던 여행자들은 적지 않은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 기록 중 하나이다.“황량한 들판에 초라한 기단과 무너진 원형 석주만이 남아 있을 뿐 화려했던 과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훗날 1931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그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이 생존한 이상 인류는 진화를 거듭할 것이고, 문화는 느리게 빠르게, 혹은 발효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신라인 혜초, 이븐바투타, 마르코폴로는 기록의 사나이였던 까닭에 역사 인물로 기억되지만,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름을 남기지 않은 무수히 많은 사람이 오갔을 것이고, 그 길에 족적을 남겼다.초기 페르시아제국에는 수백만의 이민족이 살았고, 거대한 주를 통치하는 지방 총독들 역시 왕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제국에 대항하는 자는 피의 응징을 당해야 했지만,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점령하면서 그곳에 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해방했으며, 그들의 신앙과 종교의례도 허락했다. 훗날, 이 일로 인해 제국에 다양한 종교가 섞이면서 복잡한 문화적 양상을 띠게 되지만 말이다.역사란 제국이 힘을 다하면 새로운 제국이 태어나면서 이어진다. 고대 제국은 토지와 노동력 확대 및 군사력의 기본적 확장에 목적을 두고 정벌이란 이름으로 정복 전쟁을 일으키곤 하였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6-03

한 손에 칼, 한 손에 쿠란

이슬람의 탄생은 동방 오리엔트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다. 최근 세계 갈등의 불씨를 끊임없이 일으키는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는 주지하다시피 하나의 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슬람이란 말 뜻 역시 ‘아살라마’(asalama), 즉 ‘복종하겠나이다’이다. 불교에서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 즉 ‘귀의하겠나이다’와 비슷한 의미다.7세기 초, 비잔티움과 사산조 페르시아는 끊임없는 전쟁으로 육로와 해로의 실크로드가 사실상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문화란 물과 같아서 막히면 돌아가고, 팬 곳은 채운 후 흐르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전쟁터를 피해 아라비아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로가 개발되자 메카와 메디나가 중심도시로 주목받는다.이때 무함마드가 등장했다. 570년 그는 메카의 명문가 꾸레이시 가문에서 태어나 623년까지 62년을 살았다. 유복자로 태어나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곁을 떠났고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지를 다니며 힘겹게 대상 활동을 했다. 당시 혼란한 사회와 처한 삶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이때 기독교와 유대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늘 명상에 잠겼다. 붓다가 그랬듯 고집멸도(苦集滅道), 생로병사(生老病死), 괴로움과 번뇌 등 인간 사회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에 몰두했을 법하다. 나이 40세가 되던 해인 610년 하느님(알라)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다. 메카의 히라 동굴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을 만나면서, 이후 예언자가 된다. 예언자, 즉 유대교 전통에서 나온 개념으로 신의 뜻을 전달하는 대변인, ‘신의 입’을 뜻한다. 이로써 하늘, 즉 절대적인 신을 인간 세상의 잣대로 표현하는 우상숭배 타파, 평등과 평화를 강조하는 이슬람교를 완성한다. 어느 종교든 태생기에는 시대에서 파생된 의붓자식이자 이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이 순식간에 퍼진 것은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비잔티움과 사산조 페르시아제국 영향이 컸다. 622년 무함마드는 이들을 피해 추종자들과 함께 메디나로 이주해 절치부심 초석을 다진다. 이때를 헤지라(Hegira-이동), 즉 ‘이주의 날’로 정해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한다.부족 간 분쟁을 평정하고 이슬람 공동체로 결속을 다진 무함마드는 메카를 정복해 교세 확장에 획기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전쟁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첨가해 이슬람을 형성하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 즉 지하드로 인식하게 했고, 결국 지금까지 그 정신이 내려오고 있다.무함마드도 인간인지라, 632년 메카로 순례하러 가던 도중 열사병에 걸려 객사했다. 그러나 예수처럼 3일이 지나도 부활하지 않았다.‘한 손에 칼, 한 손에 쿠란’, 많이 들어본 소리다. 결론적으로 이 말은 서구 시각에서 조작한 것이다. 이슬람은 정복지라 해도 결코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포용 정책을 폈다. 무엇보다 무함마드는 용기와 더불어 공평하게 정책을 펼치면서 점령지 사람들로부터 무한한 존경을 받았다. 그는 특히 입상진의(立像盡意), 즉 형상을 만들어 뜻을 강조해 전달하는 로마 가톨릭과는 경계를 분명히 했다. 포교를 위해 아이콘을 만들 수 없었다. 따라서 무함마드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경이다.이렇게 기독교 사촌 이슬람은 전성기를 맞는다. 사촌이라 함은 이슬람 역시 히브리 성서에 근거한 종교란 뜻이다. 같은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심판, 종말론 등 기본적 종교관의 골격을 공유하고 있어서다.이슬람은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가톨릭의 아리우스파와 맥을 같이하면서, 더 나아가 철저한 일원론적 유일신 사상을 확립했다. 삼위일체가 가톨릭, 정교, 개신교의 기본 교리라면 이슬람은 아담에서 아브라함, 다윗, 모세, 예수로 이어지는 성경의 선지자는 신이 보낸 인간 예언자일 뿐이며, 무함마드는 ‘봉인’ 곧 마지막 예언자라고 한다. 그 때문에 복음을 완성하는 사명을 지녔다고 보는 시각이다. 현세에서 선악의 행위에 따라 최후의 날 신의 심판을 받는다는 정명사상(正名思想)처럼 구원과 응징으로 나누는 내세관은 천국의 법에 따라 움직인다. 성서 종교(아브라함)의 개념 자체가 유대교의 야훼, 기독교의 하느님, 이슬람의 알라는 같은 창조주를 지칭한다. 하나의 창조주라는 개념과 종말론, 메시아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다음에 올 메시아가 누구냐 하는 데 대한 해석에 따라서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나뉜다.현세에 일어나는 종교 갈등은 인류 욕망의 찌꺼기다. 인간과 민족, 국가의 이해에 따라 폭력을 생산하고, 스스로 희생당하기도 한다. 그때의 잣대로 오늘을 재단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예수가 30세에 세례를 받아 가르침을 시작했고(누가복음 3장), 부처는 35세에 정각(正覺), 즉 깨달음을 얻었다면, 무함마드는 40세에 계시를 받았다. 이 일련의 간격, 5는 어떤 의미일까. 세속에서 풀 수 없는 형이상(形而上) 의미가 담겨 있을 법하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대사다.“인간은 생을 살려고 태어난 것이지 다음 생을 준비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미뤄야 할 행복은 없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5-20

지중해 새로운 패자, 오스만튀르크 세계사 등장

영어의 표현은 오토만, 이슬람 언어인 아랍어로 오스만이다. 우마이야 왕조 이후 750년부터 1258년에 걸쳐 이슬람을 지배한 압바시야 제국이 막을 내리고 이슬람 주도권은 튀르크인 중심의 오스만제국으로 이동된다.13세기 말, 소아시아와 그 주변은 튀르크족의 소부족 군웅할거 시대를 맞는다. 셀주크 튀르크는 당시 이즈니크(니케아)에서 남쪽 소아시아 작은 도시 수구트 등 하나의 공국을 거느리고 있던 오스만 베이(Osman Bey)로부터 시작된다. 1299년부터 비잔틴 영토 잠식으로 시작된 정복 사업은 아들 오르한 시대에 와서 유럽의 발칸반도까지 진출했다. 1361년 발칸의 아드리아노플의 정복,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발칸반도의 공략이 마무리된다.이들은 지리적 여건상 아나톨리아 부르사와 마르마라해로 진출할 수 있었고, 과거 유목민 피를 이어받은 튀르크 전사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셀주크 시대 술탄의 기병으로 활약할 만큼 강한 기동력을 보유했던 이들이다. 정확하게 623년이란 역사를 자랑할 수 있었던 오스만제국은 우연이 아니다. 튀르크족이 몽골군의 침탈을 피해 아나톨리아로 밀려들던 때다. 이때 오스만은 피난민을 성심으로 품어 튀르크족을 규합해 세력을 불리기 시작하면서 영토를 서쪽으로 넓히는 데 성공하자, 응당 유럽의 관문 비잔티움과의 한판 대결을 가져왔다.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제4차 십자군에 의해 풍비박산 나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채였다. 더구나 제국의 말기적 현상인 민심 이반이 심각했다. 허리를 졸라야 맞출 수 있는 세금과 부역은 늘 하층민을 괴롭혔다. 이때 오스만이 나타나 세금을 대폭 줄여주었고, 점령지 주민에게도 이슬람의 형제로 취급해 똑같이 대접했다. 이슬람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종교의 자유는 물론, 사유재산을 인정했고, 언어와 문화 역시 관대했다. 오스만을 지지하는 소리가 하늘에 퍼졌고 백성의 찬사가 이어지며 더 광대한 영토가 흡수되기 시작했다.다양한 민족이 혼재된 상태에서 무리한 포교와 강요는 역효과를 낼 수 있었다. 믿음을 인정함으로써 세수 확보와 징병 등 제국의 안정을 꾀했다. 즉 파괴와 살육보다 회유와 평화 정책을 펼치면서 민심을 얻었다.물론 타 종교에 관대했다곤 하나 세금은 더 내야 했고, 교회도 화려하게 짓지 못하게 했다. 출입구도 지상에서 1m를 넘지 못했다. 개처럼 기어서 드나들게 한 것은 이들 최소한 폭력의 도출이었다. 그리스 아테네의 초라한 정교회 건물이 지면에서 1m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어서 드나들 수 없어서 땅을 아래로 낮춰 교회를 올렸던 까닭이다. 오스만제국을 본 주변 토후국들은 스스로 오스만 깃발 아래 몰려들었다. 여기에 죽음을 두려워 않는 튀르크 전사들의 집결도 이어졌다. 급작스레 소아시아 세력균형이 무너지면서 튀르크족은 자신들의 이상인 무슬림의 의무 ‘지하드’를 성취할 조건을 갖춘 나라를 선호했다. 물질적 보상은 덤이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국은 1인 지배체제보다 가족 지배체제에 의존했다. 남을 믿기보다 형제간의 믿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래로 이어온 체제 방식이다. 단점도 있었다. 왕이 죽으면 아들들에게 똑같은 영토를 분배했는데, 이는 가족 간 내분으로 이어져 형제간 피 흘리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그러나 오스만 1세는 유언으로 장자상속을 정해버렸고, 남은 아들들은 죽거나 혹은 감금 상태로 살아야 했으며, 일체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다. 태생적 불행은 어린 시절부터 포기라는 절망의 멍에를 짊어진 채 살아야 했다. 이나마도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했다. 비정한 선택, 이슬람의 교리 뒤에 감추어진 번영을 위한 살기(殺氣)를 보는 듯하다.오스만 1세는 장자상속과 함께 미래를 위한 나름 지혜로운 유언을 남겼다.“종교를 가장 중심에 두고 조심해 다루라. 지혜롭지 못한 자에게 권력을 나누지 말라. 학자와 기술자, 예술가, 문필가들이 힘의 원천이니 명예롭게 대하라!” 박필우 작가 20대 초반의 나이에 부족장이 된 이래 30여 년을 정복 전쟁으로 날밤을 지새웠던 인물다운 유언이다. 학자와 기술자, 예술가들이 힘의 원천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이 제국을 존재케 하는 에너지원이었다.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가지스(Ghazis)’, 즉 튀르크 말로 전사의 원정대이자 약탈원정대가 발전해 주군을 모시는 구성원으로 탄탄한 결속력을 자랑했다. 전쟁이 곧 생업인 이들에게 종교적 동기가 작용하면서 더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가지스는 비잔티움 제국은 물론 발칸반도와 지중해 기독교도와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종교적 의무를 다한다는 초기 정신으로 무장해 흔들림이 없이 전쟁을 수행했다. ‘성전’을 수행하는 데 있어 생계와 생활공간이 따로 없었다. 밥 먹다가 싸우고, 싸우다가 잠들곤 했던 당시의 청춘들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2대 오르한(Orhan) 1세(1281~1362)에 이르러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그의 발아래 두고, 발칸반도를 침략해 유럽으로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 세력을 완성한다. /스토리텔링 작가 박필우

2024-05-06

도미노게임-민족의 대이동

‘인간은 너머의 세상을 동경한다. 그러나 방향 잃은 패자의 역습이 더 큰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기원전 2세기 초, 흉노의 이동은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국과 인도의 역사까지 바꾼다. 거대 국가를 이룩한 흉노는 한나라 고조 유방을 포로로 잡는 쾌거를 올리고, 파미르고원에서 발원해 장장 2,500여 ㎞를 흐르다 아랄해로 스며드는 아무다리야강 근처 대월지를 점령한다. 흉노로부터 남쪽으로 쫓겨난 대월지 사람들은 그곳의 ‘대하’, 즉 박트리아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인도로 쳐들어가 ‘쿠샨왕조’를 세운다. 도미노 게임의 시작이다.기원전 141년, 흉노족은 한무제로부터 시작해 후한에 이르기까지 몇백 년에 걸쳐 서서히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대략 200년이 흐르고, 카스피해 북쪽에 훈족이 나타났다. 모습이 흉노와 똑 닮았고, 흉노와 발음도 비슷한 이들이 유럽에 입성하자 유럽은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강력한 훈의 침략은 게르만족 일파들을 유럽 각지로 흩어지게 했다. 이탈리아 서로마 멸망을 앞당겼으며 프랑크왕국을 탄생시키고, 훗날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라는 나라로 발전하는 초석을 다진다.9세기 말, 우리가 흔히들 바이킹이라고 부르는 노르만족의 유럽 유린은 또 한 번 판도를 뒤집는다. 유럽의 북쪽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살던 북방민족 노르만족이 여름이 짧고 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추위와 척박한 땅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따뜻한 남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그들이 남으로 이동해 노르망디공국을 세우고, 아이슬란드에 정착하는가 하면, 영국의 서북쪽 아일랜드에 노르만 왕조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지중해를 뚫고 들어가 시칠리아, 나폴리왕국을 건설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동유럽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 중 한 무리는 러시아에 도착해 그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던 슬라브족을 몰아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간 무리는 현재 러시아의 기원인 키예프를 점령하고, 블라디미르 공국까지 손에 넣는다.노르만족으로부터 쫓기듯 밀려난 슬라브족은 남하해 발칸반도에 자리 잡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를 세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가톨릭에 흡수된다. 그 당시 발칸반도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을까? 이들 역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대번에 뽑아버리거나 오랜 세월에 걸쳐 폭력과 희생의 토대 위에 나라를 세웠다. 민족 이동은 순차적이거나 평화적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폭력과 약탈이 동반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쫓기듯 도망치면서도 그 와중에 저지른 살인과 약탈과 방화는 또 다른 민족의 이동을 불렀다.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정당화한 패자의 역습! 아니, 패자의 화풀이다.고등학교 역사부도 머리글에 ‘민족 대이동의 영향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다’가 쓰여 있다. 얼핏 읽으면 매우 평화롭고 한가로운 민족의 이동으로 환희에 찬 신세계를 연상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살육과 방화, 약탈은 기본이었다. 머리를 돌에 부딪쳐 죽이고, 살아남은 자들은 끌고 가 노리개나 노예로 삼았던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되짚어야 할 의무가 있다.몽골의 칭기즈칸과 14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해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희대의 살육자 티무르와 유럽의 영웅 알렉산드로스와는 질이 다르다. 이 셋은 단순한 이유가 바로 목적이 되는 그들의 공통된 용어, ‘정벌’을 앞세운 살육자였다. 항복 아니면 도륙이라는 무시무시한 몽골군은 유럽인 눈에는 그저 하늘에서 보낸 악의 군대이자, 신의 채찍이었다. 사회 질서와 도덕이 땅에 떨어지자 하느님이 보낸 응징을 위한 군대였다. 사람의 머리로 탑을 쌓기를 즐겼다는 티무르는 그냥 할 말을 잊는다. 알렉산드로스 역시 페르세폴리스에서 보듯 그가 지나는 자리에 불타고 허물어진 건물잔해, 하늘에 울리는 인간들의 절규만이 남았다.세계를 자신의 발아래 놓고자 벌이는 욕망의 화신을 영웅이라고 불렀다. 유럽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영웅이고, 유럽을 짓이겼던 티무르는 왜 죽음을 부르는 악인가? 훈족 희대의 영웅 아틸라는 왜 ‘신의 재앙’으로 불려야 하는가.마치 도미노 게임처럼 벌어졌던 인류 이동의 역사가 되풀이되면서 지금의 세계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약탈자 그 이상도 아닌 폭력적인 인간을 영웅으로 미화하는 것은 마치 후대의 성스러운 의무가 되었다. 이를 넘어 어떤 민족에게는 저항의 힘으로 작용하고, 또 어떤 민족에게는 이웃에 대한 침략의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단언컨대 통치제도는 통치자를 위한 것이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국가에도 질서와 통제를 위한 세력은 어떻게든 존재하기 때문이다.스스로 선진문명인들이 살아가는 서구 유럽이라는 개념 역시 이 과정을 거치며 생겨났다. (기실 폭력의 역사만 두고 보았을 때 문명보다 야만에 가깝지만) 일찍이 유럽이라 하는 지역 개념은 아시아를 타자화하면서, 유럽과의 대비를 통해서 형성되었으며, 그 기조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4-22

로마제국 발칸반도 완전 정복-그리스, 서구 문명의 선봉이 되다

‘세계의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로마는 정복지라 해도 도로와 수로를 만들어 시민의 일상적인 삶에 혜택을 골고루 부여했던 그들만의 지배 방식이었다.도로란 반란에 대비해 정벌을 위한 것일 수도 있었고, 변방 민족이 침략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기반이기도 했다. 우리 조선시대 당시 ‘무도안전(無道安全)’이란 말이 있었다. 도로가 없어야 오랑캐와 왜구의 침략을 늦출 수 있다는 사고와 비교하면 들숨 날숨이 가빠진다. 약탈에 무방비로 노출된 변방의 하층민을 구해 줄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알렉산드로스가 죽자 휘하 장수들이 그리스 본토를 비롯해 각 점령지역을 나누어 통치하게 된다. 흩어지면 반목과 갈등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힘이 고갈되어 가던 중 로마라는 거대한 쓰나미를 만났다. 로마는 기원전 3세기 중엽부터 대략 1세기 동안 포에니전쟁을 치르면서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지중해와 오리엔트 지역에까지 위세를 떨쳤다. 남프랑스를 점령하면서 이탈리아반도 깊숙하게 쳐들어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명성도 로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을 만나면서 막을 내렸다. 그는 ‘나의 허락 없이는 바닷물에 손도 담글 수 없다’며 서쪽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한니발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린다.로마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충분한 자원이 필요했다. 이때 로마가 눈을 돌린 것이 발칸반도다. 발칸반도에는 일리리언이 로마 상선을 털고 노략질을 일삼았다. 일리리언인 눈에 로마상선은 우리 바다를 휘젓는 침략자일 뿐이었다.로마는 이들을 소탕코자 본격적으로 발칸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지금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등 해상무역으로 살아가던 발칸반도 원주민 격인 일리리언인의 저항에 부딪혔다. 하지만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로마군을 막을 수 없었다. 로마는 아드리아해 서쪽 해상로를 쉽게 장악했다. 마케도니아마저 굴복시킨 로마는 기원전 146년, 비실대는 스파르타를 마지막으로 그리스를 완전히 정복하고 도나우강 남쪽 영역 발칸반도는 로마 우산 속에 들게 된다.기원전 28년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잡으면서 제정시대가 열리고, 서기 9년 드디어 발칸 전 지역이 로마 제국에 완전히 무릎을 꿇는다. 이로부터 5백여 년간 로마의 철권통치를 받아야 했다.시간이 흐르자,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 스스로 로마와 그리스 역사가 뒤섞이는 경험을 이상하게 받아들였다. 신들의 땅 그리스가 곧 로마고 로마가 곧 그리스였다. 그리고 정령숭배, 즉 숲과 나무, 주피터, 태양신 등 다양한 신이 판치던 로마종교가 그리스신화를 만나면서 일취월장(?) 재창조된다. 시기와 질투, 폭력, 사랑 등 인성을 갖춘, 인간보다 조금 더 크고 잘생기고 아름다운 그리스 신들에게 로마인으로서는 감히 신을 인간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서기 3세기 말이 되자 드디어 발칸반도에서 황제가 나온다. 첫 번째 인물이 디오클레티아누스(244~311, 재위 285~305)다. 지금의 달마티아 땅에서 태어난 그는 태생적 하층민 자손이었다. 황제 친위대를 이끌던 그는 누메리아누스 황제가 암살되면서 군인들 추대로 황제에 등극한다. 그리고 발칸반도 판노니아 출신 동료 막시미아누스를 또 한 명의 황제에 올려 로마를 동서로 구분해 서쪽을 맡긴다.황제는 각각의 정부에 부제를 두어 통치에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4두 정치(4분치제도·四分治制度)에 돌입한다. 이때 막시미아누스 부제 중 한 명이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였다. 그는 에스파냐에서 프랑스 지방인 갈리아와 오늘날 영국의 브리타니아를 맡았다.‘4두 정치체제’는 군인황제를 종식하는 토대로 작용했다. 이러한 정치적 결단이 또 한 명의 발칸반도 출신 황제에게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 제국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긴, 기독교 공인 등 로마 역사에서 황제 중 큰 획을 그은 콘스탄티누스대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콘스탄티누스대제는 발칸반도 세르비아 동남부 지금의 니슈 지방에서 태어났다. 니슈는 동쪽 변방 국경을 노략질하는 고트족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고트족을 물리치기 위해 이곳을 지나다 여관집 딸이었던 헬레나와 사랑을 나눠서 태어난 아들이다. 황제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칙령’을 반포해 기독교를 정식으로 공인했다.330년, 발칸반도 서쪽 끝자락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로마의 신권과 왕권을 모두 가져왔다. 궁극적으로는 진일보된 부활을 꿈꾸었지만, 이때부터 60여 년간 버려진 듯 남겨진 서로마 사람들과 갈등의 불씨를 묻어두게 된다.정치권력이 비잔티움으로 이동하면서 로마에는 교황이라는, 교권을 시민 위에 두는 권위적이면서 신과 인간세계 구분이 확연하게 진화, 혹은 퇴화한 가톨릭이 자리잡게 된다. 반면 그리스와 발칸반도에는 신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 없는 원리주의적인 동방정교가 뿌리내리면서 또 하나 종교 갈등이라는 뇌관이 작동한다./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4-08

마라톤 전투 - 서세동점의 기원

기원전 550년경 지금의 이란 땅에 아케메네스왕조가 번성한다. 이후 기원전 529년이 되면서 페르시아 키루스 대왕에 의해 통일제국이 탄생하였다. 페르시아는 나일강 유역의 3천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기간 자연재해 한번 없이 풍요를 누리던 이집트를 평정하고, 오리엔트를 하나로 묶는다.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는 막강 군사력으로 기원전 513년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나선다.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수중에 넣으면서, 해상무역에 사활이 건 그리스와 한판 세기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를 진압한 후 아테네 원정에 나섰다. 현대 서양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사에서 처음 동서양 전투가 개시된다. 페르시아 군이 아테네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늘은 신들의 나라 편이었다. 바다에서 폭풍과 파도가 몰아치는 바람에 300여 척의 배가 침몰하면서 다리우스 1세는 분을 삭이며 회군해야 했다.다리우스는 절치부심,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는 제2차 정벌에 돌입한다. 당시 페르시아는 군함 600여 척의 막강 해군을 중심으로 보병 2만 5천 명과 기병 1천 명을 비롯해 군사들 사기마저 높아 거칠 것이 없었다.그리스 낙소스를 점령한 페르시아는 아테네의 굳건한 동맹 에레트리아 공격에 나섰다. 페르시아는 자신들의 성역 사르디스를 불태운 데 대한 복수로 시민 모두 페르시아로 데려가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창끝을 아테네로 향했다. 이때 아테네는 수성전을 펼쳐 스파르타군이 오기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나가서 맞서 싸울 것인가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이때 아테네에는 밀티아데스(Miltiades)라는 출중한 장군이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아테네 군사는 그리스 동북부 마라톤 평원에서 막 상륙한 페르시아 주력부대를 맞았다. 그리스는 시민군 1만 명이 전부였지만,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자신들이 승리 하리라는 신탁을 듣자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 1만 5천 명만이 해안에 진을 쳤고, 나머지 1만 명은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항해를 이어갔다. 이를 확인한 밀티아데스는 급박해졌다. 아테네에 페르시아 공격을 막을 군사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했다.이때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마치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처럼 양익포위 전술이었다. 적은 수의 아테네 군사를 페르시아 군과 대등하게 맞서게 한 후 중앙을 얇게 양쪽은 두텁게 포진했다. 페르시아군은 종대로 대열을 맞춰 포진했다. 앞을 향해 나아가던 아테네 군사는 페르시아 군과 거리가 좁혀지자, 진군 속도를 높였다. 상대적으로 중앙군은 속도를 늦춘다.페르시아 군은 궁수도, 기병도 없는 그리스 군을 오합지졸로 얕보았다. 화살 사정거리에 들자, 페르시아 궁수들이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아테네 군사들은 진격 속도를 높여 사정권을 벗어나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리고 양측의 뛰어난 군인들이 페르시아 옆구리를 쳤다. 적진 뒤를 돌아 포위에 성공하면서 전열이 흐트러진 페르시아 군을 부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군대는 양측을 뚫고 들어오는 아테네군의 전광석화 같은 공격에 기가 꺾이고 말았다. 불과 15분여 만에 거둔 아테네 승리였다.아테네군 피해는 192명으로 미미한 반면에 페르시아는 6천400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서양 역사가들 주장처럼 동서양 간 최초로 벌어진 전투에서 그리스 승리로 끝났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승리라며 동양 지배, 즉 서세동점의 당위성에 무게를 실었다.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마라톤 전투는 유럽이라는 아기가 탄생하면서 낸 첫 외침이라고 감동한다. 고대에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동서양 대립이라는 시각 자체도 웃기는 일이다. 더구나 당시 그리스 문명이 유럽이 아니라 지중해, 즉 오늘날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을 아우르는 곳에서 일어났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문명 역시 아테네보다 페르시아가 더 발달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군국주의적인 스파르타보다는 훨씬 민주적이었다. 스파르타는 노예가 해주는 밥을 먹고, 함께 훈련에 동참했으며, 기형이 태어나면 죽였고, 여자는 원로원 출입도 할 수 없었다. 이 예를 든 것은 문명의 반대가 야만이기 때문이다.마라톤 전투 승리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전령이 전력 질주해 아테네에 도착한 후 “승리했노라!” 외치고는 쓰러져 죽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 해군이 아테네를 침략하는 것을 서둘러 돌아가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마라톤이 되고 올림픽 공식 종목에 채택되었다. 이때 진군 거리가 42㎞다. 뒤에 195m가 추가된 것은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에서 영국 여왕이 있는 윈저궁까지 거리가 추가되면서 공식화된다. 여왕이 골인 지점으로 들어오는 선수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는 게 정설이다./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3-25

동방정교와 로마 가톨릭-콘스탄티노플 황제와 로마교황

꾸준하게 아래로부터 전파를 탄 가톨릭의 생명력은 줄어드는 법이 없었다. ‘보편적인’의 그리스 말 ‘카톨리케’ 어원인 가톨릭이 로마 종교로 합류했고, 박해 속에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났다. 순교로써 박해에 대항하는 이들에게 집권 세력은 공포심을 느꼈다.종교는 백성을 정신적으로 하나로 묶는 절대적인 요소였다.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종교끼리 느닷없이 동화되는 법은 없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서기 312년에 로마 북부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드넓은 제국을 한곳으로 모을 구심점이 필요했던 그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뒤이어 서기 322년 국가의 보호를 받는 공식 종교로 인정되었다.325년에 로마 상층부로 스며든 가톨릭이 392년에 일취월장 로마의 국교로 등극한다. 이로써 로마는 모든 종족과 동족이 하나의 종교 아래 흡수되는 정신적 통일의 기초를 마련했다. 330년 그는 수도를 발칸반도의 동쪽 끝자락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 했다.이때부터 황제가 곧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교회는 갈등의 링에서 본격적으로 맞붙는다. 기독교 정통성의 자부심이 충만한 로마 교회와 황제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콘스탄티노플 간의 대결 구도는 필연이었다. 콘스탄티노플로서 로마 교구는 안티오키아교구, 예루살렘교구, 알렉산드리아교구 등 하나의 교구에 지나지 않았다. 제정일치 시대 황제가 수도를 이전함으로써 교권도 함께 옮겨왔다는 뜻이다.수도가 옮겨간 뒤의 이탈리아반도는 폐허에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476년 게르만 장수 오도아케르가 서쪽 로마를 점령하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서로마 교권이 차츰 높아지는 선순환을 낳았다. 굳이 콘스탄티노플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을, 기독교가 서유럽으로 전파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경제와 교권마저 동방으로 옮겨간 뒤의 이탈리아 사람들 경쟁심리가 발동하면서 새로운 지도자를 찾게 되고, 당시 그리스도교 수장 로마 주교를 옹립하여 그에게 영적, 세속적 권위까지 안겨버린다. 막바지에 몰린 도시에 향수를 불러내 증오심을 자극했던 것이다.그러나 518년, 유스티아누스 1세가 황제에 오르면서 이탈리아 로마를 되찾는다. 그는 ‘신이 하나, 교회도 제국도 하나, 황제도 하나’란 구호를 내걸고 교회 분열을 봉합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 또한 임시봉합에 그쳤고, 그가 죽자 예수가 그랬듯 3일 만에 갈등이 부활하면서, 때마침 교리논쟁까지 불붙기 시작하였다. 즉, 예수를 신으로 보느냐, 인간으로 보느냐를 두고 죽음도 불사했다.교리논쟁은 조선시대 파벌적 논쟁 이기론(理氣論)과 비슷하다. 이기론, 즉 이(理 스스로)와 기(氣 에너지)의 원리를 통한 세상 만물의 존재와 움직임에 대한 이론이다. 논쟁이 확산되자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으로 정립되면서 유학에 발전을 가져왔다고들 하는데, 두 이론의 차이를 그리 힘들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말을 탄 사람이 길을 가고 있다. 이때 사람이 간다고 생각하면 주리론, 말이 간다고 생각하면 주기론이다. 간단명료하지 않는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중국 주자가례를 두고 예송논쟁을 벌여 얼마나 많은 정적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는가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동·서로마 분열의 결정적인 원인이 또 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4차 십자군이 교회 십자가를 내려 장검으로 사용했다.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주민을 살육하고, 약탈과 도시를 불사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서로마 교황의 부추김이 결정적이었다. 신을 빙자한 경제적, 정치적으로 이용된 침탈이 분명해졌다. 역사적으로 동방의 정교와 로마 가톨릭 두 종교 간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했다. 동방정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274년~337년)가 비잔티움으로 로마의 수도를 옮기면서 시작된 동유럽 중심이 되는 신앙이다. 훗날 발칸반도 사람에겐 신앙을 넘어선 민족의 자존심이자 이민족 지배에 항거하는 절대적인 에너지원이다. 부활, 즉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뜻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상징이다. 부활절을 ‘동방의 날’, 즉 ‘이스트 데이(East Day)’라 부르며 표준, 원래 모습 그대로의 교회 ‘오서독스 처치(Orthodox Church)’라고 한다.로마 가톨릭에 있어서 교회란 구원의 장소다. 성직자는 구원을 실현하는 막강하고도 이상적인 영적 영역을 부여받았다. 교인의 공동체 교회와 그리스도 교리에 의해 성직자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신의 영역과 인간 세계는 엄연히 구별되고, 교회와 성당이 화려한 까닭은 신앙의 원천이기 때문이다.이와는 반대로 수평적 구조의 동방정교 성직자 개인적인 권위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신 앞에서 모두 동등한 지위라는 뜻이다. 생활 속 깊숙이 뿌리박힌 신앙의 실천이 중요했다. 하느님과 인간 세계의 분리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 신이 함께한다는 종교적 개념 때문에 정교일치(政敎一致)는 당연했다. 불교 선종(禪宗)의 견성성불(見性成佛)과 살짝 통하는 맛도 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3-11

민주정 아테네와 군국주의 스파르타-금권정치와 전군 체제

고대 그리스는 아테네를 비롯해 스파르타, 테베, 코린토스, 에레트리아가 폴리스 대표적인 도시국가였다.기원전 431년에서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에 대항해 스파르타를 지원하는 도시국가가 승리했다곤 하지만, 그리스 사회는 에너지 고갈이라는 쓴맛을 보아야 했다. 결국 그들이 바르바로이, 즉 변방의 야만인이라 부르던 마케도니아 발아래 무릎 꿇게 된다.그리스 수도 아테네는 민주정 대표적 역사 도시이자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이름만큼 역사가 깊다. 기원전 8세기 전후로 귀족들이 정치·군사적 권력이 점차 강화되면서 왕정이 약화된다. 그러자 교역과 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과 귀족 간 대결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왕정으로 시작해 군주정에서 민주정으로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발전했다.기원전 6세기에 접어들면서 상공업이 발달하자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부채를 해결하지 못해 노예로 전락하는 시민이 늘어났다. 기원전 594년, 이때 아테네 최초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솔론(Solon)이 등장한다. 재산 정도에 따라 정치적인 권리에 차등을 주는 개혁, 금권정치를 단행한다. 부채노예를 금지하고, 정당하게든 부당하게든 팔려 간 사람들과 빚의 멍에를 피해 이국땅을 방황하는 사람들을 아테네로 돌아오게 했다.그러나 참정권은 아테네에 거주하는 사람 중 여성, 이방인, 미성년자, 노예, 전과자, 빈민 등을 제외하면 10%에 불과했다. 이는 플라톤의 ‘국가론’으로 진화(?)하면서 먼 훗날 존경받는 지식인, 교육받은 귀족에게 권력을 준다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미국 헌법의 토양이 된다.각설, 금권정치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부추겼다. 정치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빈민의 지지를 끌어내며 이들을 기반으로 권력 중심에 선다. 귀족은 귀족대로, 평민은 평민대로 제한된 권력 행사에 만족해야 하는 금권정치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신분 간 극심한 대립을 가져왔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했던 빈민 세력을 등에 업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정권을 탈취하다시피 하여 참주에 오른다. 그가 죽자, 아들 히피아스가 기반을 이어받았으나 독재로 치달으며 폭정을 일삼자 참주 능력에만 의존하는 참주정은 결국 붕괴를 앞당기게 된다. 페르시아로 도망친 히피아스는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를 침공할 당시 길잡이를 자처하며 훗날을 도모하지만, 마라톤 전투에서 죽는다. 이후 그리스는 행정구역 개편과 더불어 평의회를 설치하고 아테네에 참주의 등장을 방지하기 위한 ‘도편추방제’가 생겨났다. 깨진 도자기에 독재의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적어 600표 이상이 나오면 10년 동안 해외로 추방하는 제도다.폴리스 중 아테네처럼 민주정으로 발전한 경우와 달리 귀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표적인 경우가 스파르타다. 스파르타인은 피정복민 노예 헤일로타이(heilotai)와 주변인 페리오이코이(peri-oikoi) 위에 군림했다.스파르타 시민이라면 누구나 군국주의적인 제도에 참여해야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스파르타인 스스로는 매우 합리적인 민주정이라고 생각하였다.스파르타에는 왕이 두 명이 있었다. 이들은 세습 가문에서 선출되는 귀족 대표자였지만, 군사 지휘권만 지녔을 뿐 그 어떠한 정치적인 행위에도 간섭할 수 없었다. 행정은 다섯 명의 집정관이 주도했으며, 관직 감시 역할도 담당했다. 특히 집정관은 노예 헤일로타이 감시와 탄압이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스파르타 신민은 20세부터 60세까지 병역 의무를 졌다. 유사시뿐만 아니라, 단체로 병영생활을 하면서 똑같은 토지를 배분받았다. 이 토지는 피정복민 노예에 의해 경작되면서 신민으로서 균등한 대우를 받았다.헤일로타이에 의해 음식이 만들어지고, 차려지면 시민 모두가 함께 식사를 즐겼다. 사정이 이런 만큼 불쌍하고 가련하기 짝이 없는 헤일로타이 감시가 가장 중요했을 법하다.웃기는 이야기지만, 이 제도는 다양한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인근 그리스인에게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 된다. 똑같이 먹고, 누리며 즐기는 삶은 대를 이어 양산되는 헤일로타이라는 노예가 있어 가능했다. 따라서 헤일로타이는 결혼도 할 수 있었고, 가정을 위해 제한적이나마 재산도 모을 수 있었지만,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국가’를 쓴 플라톤이 가장 이상적인 국가체제라고 한 스파르타였지만, 우리 아니면 모두 적이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보다 배척하였으며, 개인의 성향보다 모든 초점이 체제수호에 맞춰져 있었다. 플라톤이 극찬하였으면서도 스파르타로 옮겨가 살지 않은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사족을 붙이자면 상상의 확장일지 몰라도 스파르타는 민주정의 원조 아테네와 달리, 다양성을 부정하는 파시스트 원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2-26

로마제국 침탈의 기록

서기 83년 로마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했을 때다. 브리튼 섬 북부 스코틀랜드 일대의 칼레도니아족은 사활을 걸고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칼레도니아 칼가쿠스 족장은 로마인을 ‘세상의 악당’이라고 비난했다.“약탈과 학살을 하면서 웃기게도 제국이라 칭하고, 세상을 사막으로 만든 후 평화라고 거품 문다”멋진 조상을 둔 민족이다. 그들은 칼레도니아, 즉 ‘강인한 민족’이란 뜻처럼 로마로부터 끝끝내 지켜냈다.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 유스티니아누스 등 이들이 엮어냈던 로마는 ‘세계의 머리(Caput mundi)’, ‘영원한 도시(la Citt00E0 Eterna)’라고 불렸다. 페르시아, 이집트, 잉카, 무굴, 오스만트루크, 몽골 등 무작위로 떠오른 제국 중에서도 로마가 앞서는 것은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세계의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정복지라 해도 도로와 수로를 만들어 시민의 일상적인 삶에 혜택을 골고루 부여했던 그들만의 지배방식에 있었다.도로란 반란에 대비해 정벌을 위한 것일 수도 있었고, 변방 민족이 침략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기반이기도 했다. 로마가 그들이 야만족이라 부르는 민족에게 유린당할 때 이용되기도 하지만 말이다.조선시대 ‘무도안전(無道安全)’이란 말이 있었다. 도로가 없어야 오랑캐와 왜구 침략을 늦출 수 있다는 사고와 비교하면 들숨 날숨이 가빠진다. 약탈에 무방비로 노출된 변방의 하층민을 구해 줄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왜구가 기승을 부릴 때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폈다. 왜구 침략에 노출되지 말라는 뜻이다. 섬에 들어가 살면 죄를 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도가 우리 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민족 질긴 삶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각설하고, 로마제국의 참 매력적인 특징은 인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정 세금을 내면서 군사, 정치, 행정제도에 온전히 따르기만 하면 로마 시민이 될 기회가 제공되었다. 이뿐 아니라 로마 황제까지 오를 수 있는 기회의 제국이었다. 차별이 만연한 현대와 비교했을 때 파격적인 질서다. 기실 차별에 증오심을 느껴본 인간일수록 차별에 앞장선다. 굴욕을 맛본 그들로서는 신분 차별철폐는 너머의 영역인 까닭이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해본 며느리가 지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란 우리네 옛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이랬던 로마였지만, 뼈아픈 침탈의 역사도 있다. 제국이 관리해야할 땅이 비대해질수록 이민족 침략이 기승을 부렸다. 제국의 땅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데 기력이 달리면서 이민족은 살금살금 간 보기로부터 시작해 점점 노골화된다.멀게는 기원전 390년 켈트족에 의해 7개월 동안 탈탈 털린 것을 시작으로, 서기 384년 훈족의 침략으로 서로마 멸망, 뒤이어 406년 동고트족, 반달족, 알란족 등 이민족 침략, 410년 서고트족 로마 침탈, 이후 반달왕국의 알라리크에 의한 로마 완전정복, 439년 반달왕국에 의한 지중해 침탈, 특히 455년 로마는 반달족에 의해 보름간 남김없이 털리기도 했다. ‘반달리즘’이란 이때를 두고 한 말이다. 교황 레오1세는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 고문하지 말고, 불태우지 말고, 죽이지 말라 조건을 걸었다. 반달왕국 알라리크 왕은 약속을 지켰다. 단 약탈 기간에 대해 정해놓지 않았던 탓에 보름간 교회 지붕까지 뜯겼고, 황녀까지 포로로 잡혀가면서 로마는 폐허로 변했다.기독교인에 의한 약탈도 빠질 수 없다. 1204년 교회 십자가를 내려 장검으로 사용했던 약탈의 끝판 4차 십자군이 저지른 동로마 비잔티움에 대한 악행 역시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왔다. 비잔티움 제국이 식물 상태로 놓이면서 로마가 본격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술탄 메메트 2세의 약탈도 기억해야 한다. 그는 3일간 약탈을 허락했다. 그러나 하루 만에 중지 시켰다. 더는 털 곳이 남아 있지 않았고, 죽이고, 강간하고, 노예로 끌고 간 후 남은 것이 없었던 까닭이다.이뿐 만이 아니다. 또 한 번 기독교인에 의한 파괴의 아픔도 겪는다. 1527년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변신(프랑스 프랑수아 1세와 결탁)에 격분해 2만이 넘는 군사를 보내 로마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야만족은 약탈에 만족했지만, 이들은 살인 방화 강간은 물론 도시를 파괴하고, 오랜 서류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지르고서야 멈춘다.기이하게도 침략당하면서 비대해지는 나라도 있다. 자칭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는 중국이다. 황허 문명, 양쯔강 문명을 자랑하지만, 속내는 이민족 침략에 시달리다 대항하고, 정벌을 꾀하다 먹히면서 비대해지는 중화사상, 즉 문화의 자존감을 지켜온 것이 원인이다. 만주족에 의해 청나라가 태어났고, 더 멀리는 원나라, 거란, 말갈, 서융, 북적, 동호 여진도 중국에 땅을 확장하는 데 한몫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2-12

신의 피가 흐른다는 알렉산드로스의 최후

기원전 356년 7월 폭풍우가 쏟아지던 날 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는 전쟁터에서 알렉산드로스 출산 소식을 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아내 정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우리 속담에 ‘친아버지 도끼질하는 데 가지 말고, 의붓아버지 떡 치는 데 가라’란 말이 있다. 아버지 눈 밖에 난 알렉산드로스 옆에는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있었다. 그녀는 어린 알렉산드로스에게 신의 피가 흐른다고 믿게 했다.기원전 336년, 향년 46세였던 필리포스 2세가 피살당하자, 알렉산드로스는 군부의 강력한 지지로 왕위에 오른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린 그를 얕본 그리스 도시들의 반란을 잠재운 뒤 동방으로 눈 돌린다.기원전 334년, 22세의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페르시아 원정길에 오른다. 그의 옆에는 동갑내기 명마 부케팔로스가 있었다. 그라니코스강 전투를 시작으로, 미트레스, 판퓨리아, 프리기아, 카파도키아를 점령하면서 손쉽게 아나톨리아를 완전정복한 뒤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해군 본거지 키리키아를 향해 진군하는 도중에도 저항 없이 수도 타르수스에 도착하였다.알렉산드로스는 그곳에서 풍토병 키리키아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여름이 지나면서 회복 기미를 보였다. 이때 다리우스 3세가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 왔다. 알렉산드로스가 이소스로 떠난 뒤였다.기원전 333년, 두 군대가 이소스에서 마주했다. 군사력에선 우위에 선 다리우스 3세였으나 전술 면에서 알렉산드로스가 한 수 위였다. 다리우스는 상처를 입고 도망쳤다. 알렉산드로스는 티루스를 7개월이나 걸려 힘들게 점령하고, 기원전 332년 가을, 남쪽으로 내려가 이집트의 나일강 어구에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세운다. 기원전 331년, 페르시아 옛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로 향했다. 이들은 성문을 활짝 열며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잔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했다. 약탈은 재물, 살육, 강간, 방화를 동반한다. 죽음을 부르는 비명은 검은 연기와 함께 페르세폴리스 하늘을 메웠다.신의 피가 흐른다고 믿었던 알렉산드로스는 100여 년 전, 신성한 아테네가 페르시아에 의해 화마에 휩싸였던 과거를 떠올렸다.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예술의 결정체, 화려하면서 왕권을 드높인 왕궁, 장엄한 도시가 화마에 휩싸인 채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즐기며 자신의 신성성을 확인하였다. 이때 그도 엄청난 금은보화를 손에 넣는다.한편 페르시아 대왕 다리우스는 박트리아 총독 베소스의 배신으로 비장한 죽음을 맞이한다. 다리우스 시체를 확인한 알렉산드로스 분노를 샀다.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힌두쿠시산맥 넘어 베소스를 추격했다. 도망친 베소스 역시 그가 그랬듯 스피타메네스 배신으로 사로잡혔다. 그는 코와 귀가 잘려 나가고, 다리우스 3세가 죽은 장소에서 처형된다.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강행군에 지칠 대로 지친 군사가 문제였다. 전리품도 챙겼겠다, 다리우스 3세가 죽었으므로 고향에 돌아가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의 패자가 되고 싶었다. 기원전 327년, 드디어 카이바르 고개를 넘어 인도 펀자브 지방에 들어서면서 히다스페스강에서 코끼리로 중무장한 포로스 왕과 일전을 치른다.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의 힘을 역이용해 승리를 거둔다. 이때 알렉산드로스의 명마 부케팔로스가 치명상을 입는다. 기원전 326년 6월, 태어난 지 서른 해, 그와 함께한 지 18년이 되던 해다.알렉산드로스는 갠지스강 계곡에 도착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는 데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들은 지쳐 있었다. 더한 것은 그들도 인간이기에 가슴에 벌집처럼 숭숭 구멍을 뚫어버린 향수병이었다.“나를 따르라!” 알렉산드로스의 외로운 외침은 의미를 잃었다. 결국 대단원의 원정을 마쳐야 했다. 선택! 병사들에겐 귀향이란 정곡을 찌르는 판단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발길을 돌렸다. 피를 부르며 질풍노도처럼 밀고 왔던 그 길을 내려 걷는 그의 가슴은 허무 자체였다.정신력이 시들하면 체력도 함께 떨어진다. 그의 신은 신으로서 영역을 딱 거기까지만 허락했다. 회향을 거듭하며 바빌론에 도착했다.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알렉산드로스는 부케팔로스가 죽은 3년 뒤 기원전 323년, 33살의 나이로 말라리아에 걸려 그곳에서 객사한다.메타인지, 즉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가 중요하다. 알렉산드로스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신의 영역에 가둠으로써 기능을 잃었다. 풍토병에 걸렸을 때, 부케팔로스가 죽었을 때, 부하들이 회향을 주장했을 그때 하늘의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후 치세를 쌓든, 악정을 펼쳤든, 33세 젊은 나이로 객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1-29

그리스(Greece) 역사시대 시작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인류 발전과 도약에는 반드시 폭력이 동반되었다. 따라서 역사는 흥미로 접근하나 끝내 기억에 상처를 남기게 마련이다. 인류가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 앞에서 광휘의 찬사만을 보내기보다, 하층민 피땀을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역사, 그동안 잊힌 사연에서 미래를 위한 교훈 한 자락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현대는 치졸한 민족 우월성 보다 상생의 지혜가 필요한 시대니까. /편집자 주기원전 6천 년경 토착민과 소 아시아계 민족이 이동해 어울려 살던 그리스 땅에 지금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밀려오면서 박힌 돌을 뽑아냈다. 제우스 형제들이 크로노스와 티탄족을 물리쳤다는 그리스 신화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낸 과정에서 탄생한 이야기다.그리스는 진정 신성의 땅이다. 이들에게 있어 신화는 성경만큼 진실인 까닭이다. 신들의 제왕 제우스, 가정의 수호신이자 제우스 아내 헤라, 태양 신 아폴론, 지혜와 전쟁의 신 아테나, 미의 신 아프로디테, 바다의 신 포세이돈, 달과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 등 이외에도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다. 신화는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정신세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그리스는 산악지형으로 본토를 비롯해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2000년 동안 에게해를 중심으로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였다. 중기 청동기 크레타섬에 일명 미노아문명과 뒤이어 그리스 본토에서 발현된 미케네문명, 즉 에게해를 둘러싸고 형성된 이 두 문명을 합쳐 ‘에게문명’이라고 부른다.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 크레타는 오리엔트 세계를 비롯해 예술과 과학, 상형문자까지 창제한 이집트 영향을 받으면서 해상왕국으로 번영을 이룬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우 미로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지었다는 ‘크노소스궁전’이 있는 곳이다.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당부를 잊은 채 태양 가까이 올라 밀랍이 녹아 바다에 빠진 이카로스 전설도 이곳에서 시작한다. 이처럼 전설 속에서만 존재했던 이야기가 1900년 영국인 고고학자 아서 존 에번스에게 발견된 후 신화와 역사가 뒤섞이며 사람들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이른다.화려했던 크레타 문명은 BC 1400년경 산토리니 화산 대폭발과 지진, 해일 등 자연재해 앞에 속수무책 식물 상태로 접어든다. 설상가상 그리스 본토에서 기세를 떨치던 미케네 침략으로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크레타 문명에 결정타를 가한 미케네문명은 BC 2000년경 중기 청동기에 발칸반도 북쪽 아카이아인이 남하해,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둥지를 들면서 시작되었다. 앞선 크레타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미케네는 BC 1500년 전부터 강력한 해양기술을 바탕으로 지중해 동부 해상교역권을 장악하며 승승장구한다.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에서 트로이와 전쟁을 일으킨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도 이곳 미케네 왕이다. 이 대서사시는 전설 속 이야기였다. 트로이 원정과 관련된 신화를 소개한다. 아가멤논은 명궁이었다. 그는 사냥 중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도 나보다 못할 것이다”라며 입방정을 떨어 아르테미스 노여움을 샀다. 트로이 정벌을 위해 그리스 바다에 정박했던 배들이 출정하려 했지만, 역풍이 불어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이때 예언자가 아르테미스 노여움으로 인해 그런 것이니 아가멤논 외동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했다. 아가멤논은 딸에게 아킬레우스와 결혼을 시키려 한다고 속여 바닷가로 데리고 온다. 사정을 안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뛰어와 울면서 사정한다.“당신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며 뭐라고 기도할래요? 수치스러운 출발에 걸맞은 비참한 귀향을 빌래요?”아내 절규에도 아가멤논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피게네이아는 제단에서 머리에 화관을 쓰고 예언자 칼을 받았다. 그녀 역시 죽기 전 아버지 앞에 엎드려 살려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때가 되기도 전에 저를 죽이지 마세요. 햇빛을 보는 게 저는 달콤해요. 땅 밑을 보도록 저를 강요하지 마세요.”마치 슬픈 노랫말처럼 오래도록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가멤논이 딸에게 스스로 제물이 되지 않으면 그리스 군사들에 의해 도륙당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전쟁에서 돌아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 역시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최후를 맞는 비극이 벌어진다. 욕망은 부모와 자식, 천륜, 자연이 맺어준 정마저도 더럽히게 되나 보다. 결국은 호메로스가 천재다.각설하고, 이렇게 찬란했던 미케네도 기원전 1100년경 북쪽에서 철기문명으로 무장한 도리아인이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운명에 마침표를 찍는다. 달마티아, 알바니아 지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한 이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섬을 근간으로 스파르타 등 여러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소아시아는 물론 이탈리아 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기염을 토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이들을 일러 헤라클레스 자손의 귀환이라고 했다.도리스인들은 거대한 돌기둥에 세로줄의 홈이 있는 도리아 양식을 발전시켰고, 훗날 로마 건축에 모태로 거듭난다. 실용적이며, 튼튼한 구조로 인정받는 콜로세움 아래층 기둥도 도리아 양식을 비롯해,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로 인정받는 아테네 파르테논신전만 봐도 알 수 있다./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