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은 쉴레이만 1세에 오면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유럽에서조차 쉴레이만을 대제라 부르며 존경했다.‘쉴레이만법전’을 편찬해 그 옛날 로마제국이 누렸던 공존의 혜택을 골고루 부여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입법자란 호칭이 따르기도 했다.
당시에 잉글랜드 헨리 8세가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부상하고 있었고, 에스파냐 카를로스 1세인 동시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호령했다. 또한 프랑스 프랑수아 1세와 더불어 쉴레이만 1세가 합세하면서 앞을 예측할 수 없이 유럽은 역동적이게 돌아갔다.
1526년 초 오스만군대는 도나우강변의 노비사드 페트로바라딘 요새를 지키던 헝가리군을 물리치고 진군을 거듭했다. 그해 8월 헝가리군 외에도 도이칠란트, 체코, 폴란드군까지 합세한 ‘모하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당시 1만5000명의 기독교 군사가 전사하는가 하면, 헝가리 왕 러요시 2세마저 목숨을 잃어야 했다.
헝가리 도나우강을 경계로 서쪽 부다는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가 귀족의 추대로 왕좌에 올랐다. 1529년 봄이 되자 오스만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공략하기 위해 진격했다. 동쪽 헝가리를 지배하던 자폴야가 쉴레이만 1세를 맞이하면서 왕위 상징인 보관(寶冠)을 바쳤다. 이때부터 1687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제국이 패할 때까지 160여 년 간 페스트 지역은 이슬람 지배를 받아야 했다.
쉴레이만의 등장에 놀란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 대공은 형 에스파냐 카를 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카를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로 줄행랑을 쳤지만, 귀족들은 성 슈테판 성당을 지휘부로 하여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운이라고 해야 맞지만, 때마침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이슬람 군사들은 행군 내내 쫄딱 젖고 말았다. 장거리 행군에 비까지 맞은 터라 피곤에 절어 모든 것이 정상이 아니었다. 군사 장비도 대부분 망가지면서 가동이 어려웠다. 그런데도 공격이 개시되었다.
견고한 빈의 성벽은 끄떡도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오스만제국의 막강한 군대도 지쳐갔다. 식량마저 바닥을 보였고, 기병과 포병 등도 기능을 잃어갔다. 천하의 쉴레이만도 알라가 더는 허용치 않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제국 빈 공략의 실패가 주는 의미는 컸다. 제국이 팽창을 거듭하다 멈춘 시점이 바로 제국의 최고점이었다. 더구나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가 등 뒤에서 호시탐탐 제국을 노리고 있었다. 광분한 쉴레이만 1세가 동쪽으로 칼날을 돌렸다. 1533년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실크로드를 완전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여세를 몰아 이란의 북부지역까지 점령해버렸다. 두 손발 다 든 사파비 왕조는 1555년 아마샤조약을 맺음으로써 40년 전쟁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1683년에 다시 빈을 포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제국의 쇠퇴가 가속페달을 밟는 순간이었다.
쉴레이만은 이스라엘 유대민족 중 가장 현명한 왕으로 칭송받는 솔로몬의 투르크식 이름이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아이러니 할 수 있지만, 유대인의 능력을 아끼고 박해를 피해 제국의 품으로 도망쳐 온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공로를 유대인들이 존경했던 까닭이다.
오스만은 쉴레이만이 죽자 예니체리 횡포와 셀림 2세의 난삽한 생활에 의해 하향곡선을 그렸다. 1571년 10월 7일 지중해 패권을 두고 베네치아공국과 신성로마제국이 연합해 오스만제국과 레판토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이 ‘돈키호테’ 저자 세르반테스가 참전해 부상을 입었던 ‘레판토해전’이다. 이때 오스만제국이 궤멸하다시피 했다.
1678년, 때마침 헝가리 개신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켜 신성로마제국 레오폴트 1세에게 대항했다. 개신교는 오스만제국의 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슬람군은 역사에 있어 세 번째 빈을 포위했다. 이때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지휘하는 8만 명의 유럽연합군이 오스만 군사 뒤에 포진했다. 그러나 정작 포위된 성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카푸친 수도사 마르코가 포위망을 뚫고 성으로 잠입하여 협공작전으로 배후 기습 공격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전투가 ‘칼렌베르크 전투’다.
오스만의 상징 초승달을 닮은 빵 크루아상과 함께 카푸친 수도사 소속의 이름을 딴 카푸치노 커피가 이때 생겼다. 커피가 도망친 오스만 군사에 의해 빈에 남겨지고 이를 우유에 타서 마시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카푸치노다.
서세동점의 시각 중 중요한 내용을 첨부한다. 그리스 독립전쟁과 관련된 역사작가이자, 여행 작가의 말이다.
“기독교인이 무슬림을 죽이는 것은 옳은 행위이고,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죽이는 것은 판단 오류이므로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무슬림이 기독교인을 죽일 때 우리 마음은 잔혹하게 변한다.”
오늘날 벌어지는 폭력의 선동 같아 마음이 무거워지는 대사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