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인은 부족장을 ‘추판(Župan)’이라고 불렀다. 9세기 중엽 추판 블라스티미르는 자신이 견고하게 다져놓은 나라의 안정을 비잔티움제국과 친교를 통해 획득하려고 했다.
비잔티움제국을 괴롭히던 제1불가리아 제국은 멸망한 틈을 타 세르비아는 12세기에 들어와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맞는다. 지금의 몬테네그로 수도 포도고리차에서 세르비아 부족 중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네마냐가 세르비아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다. 그를 추판 앞에 위대함을 붙여 ‘위대한 추판’이라고 불렀다. 그는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로마 교황에게 일국의 왕으로 인정해 달라며 끊임없이 추인을 시도했다. 나라 안정과 발전을 위해 세르비아인 대부분이 믿고 있던 정교를 중심으로 단합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서기 476년 서쪽 로마가 오도아케르에게 함락당한 이후 기독교권을 이용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권력 중심에 있었다. 그에 의해 왕권을 인정받은 스테판 네마니치는 날개를 단 듯했다. 기실 교황청에 뇌물을 바치고 겨우 추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마와 경쟁 관계였던 비잔티움제국은 12년 전 성지탈환을 빙자한 4차 십자군에 의해(메메트 2세 때보다 더한) 치욕적인 약탈을 당한 후, 프랑크인과 베네치아인에 의해 정략적으로 세운 라틴 황제 시대였다.
이때를 기회로 스테판 동생 사바 네마니치가 전면에 나섰다. 1219년 그는 비잔티움으로 달려가 왕국의 백성 모두 비잔티움제국 영향 아래 동방정교를 믿음으로 가진 하나의 뿌리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동방정교 독립교구로 승인 받는 기염을 토하면서, 세르비아 초대 대주교에 임명된다.
네마냐 왕조가 생산되고 100여 년이 흐른 후 위대한 세르비아민족주의, 대세르비아주의의 상징이자, 세르비아 역사상 최전성기를 구가한 스테판 듀산이 등장한다. 그는 세르비아 역사에 있어 가장 유명한 군주, 세르비아 최초 황제로 등극하는 영웅이다.
국경을 마주한 불가리아제국도 눈치를 보며 숨을 죽여야 했다. 특히 비틀거리는 비잔티움제국 영토를 야금야금 내 것으로 만들었다. 발칸반도 전역, 오늘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비롯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까지 장악해 제국 영역에 포함시켰다.
1331년에는 발칸을 넘어 유럽 전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자로 거듭났다. 그래서 후세 역사가들은 스테판 듀산 앞에 ‘강자(强者)’라는 별칭을 붙여 이미지를 상승시켰다. 그가 승승장구한 데에는 지리적 이점도 작용했다. 동․서로마 사이에서 교역로를 장악함으로써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를 이용한 막강 용병으로 영토 내 반란을 진압하면서 북쪽 마케도니아 전역을 손에 넣는다. 스테판 듀산 스스로 ‘세르비아와 그리스의 왕’이라 부르며 자신이 통치하는 모든 영역에 세르비아 정교회 확산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비잔티움제국은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비잔티움제국은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 하필이면 호시탐탐 발칸반도를 노리고 있던 오스만트루크제국에게 SOS를 타전하고 말았다. 오스만으로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샘이다. 결국 이 잘못된 판단이 세르비아 네마냐 왕조 멸망은 물론 천년을 넘어 이어오던 비잔티움제국 종말을 앞당겼으며, 더 길게 보면 발칸반도 이슬람화의 초석으로 작용했다.
평생 전쟁터를 누비며 국경을 확장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피를 뿌렸던 스테판 듀산, 1355년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해에 콘스탄티노플에 갔다 오던 도중 급작스레 죽어버리고 만다. 세르비아의 걸출한 영웅이 쓰러지자 곧바로 제국은 몰락의 기운이 요동쳤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스테판우로스 앞에 네나먀 왕조 가운데 가장 무능한 인물로 ‘약자(弱者)’라는 별칭을 붙여 ‘약자 우로스 5세’라며 세르비아인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비잔티움제국은 자신들이 불러들인 오스만트루크제국이 압박을 가해오자 급기야 로마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를 비롯해, 불가리아, 보스니아, 헝가리 등 십자군이 꾸려지면서 기독교 연합군이 결성된다. 그러나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오스만트루크제국 적수가 되지 못했다.
1363년과 1371년 두 번에 걸친 마리짜강 전투에서 우로스를 비롯해 그 형제들까지 전사하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르비아 귀족들은 듀산의 후손 라자르를 왕으로 옹립하고, 오스만제국에게 대항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이미 기력이 다한 후라 때는 늦었다. 코소보에서 오스만과의 한 판 대결은 결국 세르비아는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르비아는 코소보에서 오스만제국과 최후의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검은새의 들녘’ 코소보전투다. 역사를 거스르면 세르비아인 가슴에 피로 새겨진 정기와도 같은 땅 코소보에 알바니아인이 정착해 살면서 나라를 세운 작금의 현실이 이들로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을 법하다. ‘지리란 역사가 그려 놓은 화판’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