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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르비아주의 독립투쟁사 ①반복되는 탐욕, 역사의 시작

등록일 2025-08-26 19:02 게재일 2025-08-2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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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시청 광장. 이른 아침이라 한산하기만 하다. 시민들 표정에서 불과 몇 십 년 전에 폭력을 자행했던 사람들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온화한 표정들이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제공

서구 문명에서 소외된 채 오스만트루크제국 지배를 받아오던 세르비아인들은 무슬림 생활양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동화되어 갔다. 일부이긴 하나 초창기 에니체리 모집의 방식 초심에서 벗어나 무작위 선발로 인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청춘들은 주체할 수 없는 폭력의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편 정교회로부터 민족정신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정교회에 스테판 듀산을 비롯해 성인의 반열에 든 18명의 왕족들은 대 트루크제국에 항쟁의 의기로 작용하면서 더욱 탄탄하게 결속해가고 있었다.

대부분 무슬림으로 개종을 택하기보다 세금과 신분 등 약간의 차별을 참아내면서 자신들이 오랫동안 믿어온 세르비아정교의 기로에서 굳건하게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종교 지도자는 현실안주에 만족하고 스스로 무슬림과 자민족 사이에 방패가 되어 무슬림 대변자 역할도 해내는 인물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향교 조직의 타락과 불교, 기독교 등 친일행각의 종교인, 스스로 일본인인 양 행동한 조선인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믿음과는 다르게 종교 지도자 타락은 정신적 타락을 부추겼고, 이는 하층민끼리 응집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들(주로 농민이었지만) 스스로 뭉치기 시작하면서 슬금슬금 항쟁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크네세스라는 농민자치조직이 생겼고, 이들 중 크네즈라 부르는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종교 지도자 힘을 능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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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구시가지. 동서양이 혼재한 듯한 건축물에서 그간 아픈 역사의 흔적을 느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작가 제공

세르비아는 농민 항쟁으로 촉발된 에니체리와 대결에서 파생된 일련의 사건들이 오스만터키제국으로서는 골치만 아픈 땅일 뿐이었다. 오스만터키제국은 비엔나 공략 두 번의 실패 이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와 일정 국경만 놓고 이어가는 불안한 평화의 시대에 만족하면서 고인 물이 썩어가듯 지방호족들의 부패가 몰락을 앞당기고 있었다. 민중의 고혈을 짜냈고, 이는 곧바로 민중항쟁, 즉 두 차례에 걸쳐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제국이 넓어질수록 오스만제국 술탄은 지방호족의 반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 말기로 갈수록 지방분권형 권력이 강성해지면서 중앙정부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독자적인 권력이 등장한다. 지방에 파견된 총독 파샤 아래 오스만 용병 시파히(Sipahi)라는 900여 명의 군인 계급이 존재했다. 주로 전쟁에 승리하면 재물보다 땅을 하사받는 중세 봉건기사와 성격이 비슷했다. 시파히 아래 소작농민들은 일정 세금만 내면 대를 이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시파히 역시 농토를 후손에게 대물림하기 위해 소작농 고혈을 짜내는 일은 없었다.

문제는 이들 시파히와 에니체리 갈등이었다. 발칸반도 지배자 무라트 1세(코소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는 툭 하면 반란을 일으키는 귀족 출신 친위대 대신 오로지 술탄, 즉 자신만을 위한 맹목적 충성과 술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술탄 외에는 그 어떤 명령도 듣지 않는 용감하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막강 부대를 창설했다. 이들이 바로 누구의 표현대로 가혹하고도 슬픈 피해자 에니체리다. 이들은 그리스와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천애고아를 만든 후 어릴 때부터 맞춤교육을 시켜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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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발칸반도 지도. 붉은 점선이 1918년부터 2006년 각 나라가 분리 독립이 되기까지 유고 국경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제국의 기운이 소멸되기 시작한 것도 이들 에니체리로부터였다.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에니체리들이 시파히 땅을 우격다짐으로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이 감당해야 했다.

18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에니체리에 대한 불만이 농민 항쟁으로 촉발된다. 제1차 혁명은 기사 계급 시파히와 농민지도자 크네세스를 중심으로 세르비아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부터다. 분노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결국 막강 에니체리들은 베오그라드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에니체리에 대항하다 잡혀 온 농민들을 사면하면서 에니체리의 분노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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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우 작가

도망친 에니체리들은 그동안 누렸던 권력의 달콤함 맛을 잊지 못했다. 결국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베오그라드를 재점령하고, 지방정부 파샤를 뒤엎은데 성공하면서 1801년 베오그라드에는 무인 정권 시대가 도래 했다. 이들이 내건 슬로건 역시 개혁이었다. 가해자가 마치 피해자인 양 코스프레 행위는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민중을 향한 폭력과 압제일 뿐이었다.

이들 에니체리는 최고위급 지도부 네 명의 다이스(Dayis)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한 번 일어난 농민 항쟁은 옥죈다고 해도 반등하기 마련이다. 이를 염려한 다이스들은 기세를 꺾기 위해 죄 없는 세르비아 농민 지도자를 체포해 처형하기에 이른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1866년(고종 3) 권력을 쥔 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병인박해(丙寅迫害)를 시작으로 6년간 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처럼, 다이스들 역시 먼저 처벌하고 나중에 보고하도록 하면서 반체제인사는 체포와 동시에 죽여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세르비아인 최초 공식적인 피의 학살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세르비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민중의 생활을 더욱 피폐해졌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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