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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으로 얼룩진 세르비아 명가 ①블랙조지와 밀로쉬

등록일 2025-10-12 14:25 게재일 2025-09-2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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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화가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1801년에 그린 그림이다. 1815년 유럽세계는 변화의 급류에 휘말렸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실패한 후 몰락하고 엘바섬에 유폐된 뒤, 섬을 탈출해 프랑스를 재점령하면서 100일 천하를 이루었다. 하지만 워털루에서 웰링턴 공작에게 패해 대서양 세인트헬레나에 재차 유폐되면서 종지부를 찍는다.

19세기 초, 세르비아는 이때부터 블랙조지 가문과 밀로쉬 가문으로 나눠지면서 새로운 폭력 양상을 띠게 된다. 1815년 유럽 세계 역시 변화의 급류에 휘말렸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실패한 후 몰락하고 엘바섬에 유폐된 뒤, 섬을 탈출해 프랑스를 재점령하면서 100일 천하를 이루었다. 하지만 워털루에서 웰링턴 공작에게 패해 대서양 세인트헬레나에 재차 유폐되면서 종지부를 찍는다.

1815년 11월, 세르비아민족회의는 최고지도자에 밀로쉬를 추대한다. 1817년 초 오스만은 골치만 아픈 세르비아에 자치권을 인정하면서 착하게 말 잘 듣는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세르비아공국 왕좌(공작)에 앉혀 한숨을 돌렸다.

이때를 기회로 러시아 차르는 부동항의 확보를 위해 재차 발칸반도로 진출하자 이에 놀란 것은 터키뿐만이 아니었다. 서구 열강들이 이를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오스만터키 술탄은 넓은 제국을 안간힘으로 지켜내느라 동서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이틈을 노린 러시아는 이란의 카자르조와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면서 그루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을 얻어 기세를 올린다. 영국과 프랑스는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오스만터키로부터 신뢰를 한 몸에 받던 밀로쉬는 문제가 많았다. 1814년 9월 블랙조지, 즉 카라조르지예 추종세력들이 새로운 혁명봉기를 위해 모임을 결성하고 밀로쉬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자금지원은커녕 오스만터키에게 이를 고해바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해외운송 독점권에 이어 운송장비까지 독점했다. 이후 블랙조지를 따르는 해외파와 밀로쉬를 추종하는 국내파로 세르비아는 툭하면 싸움판이 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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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 6월 24일 키오스 전투(제이콥 필립 하케르트 /1737~1807 作, 위키백과),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라는 꿈의 명제 하에 아드니아노플 전투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오스만제국을 수시로 침략하며 괴롭혔다. /퍼블릭 제공

이슬람에 몸을 비벼 자치권만 획득한 밀로쉬에 세르비아인 불만이 증폭된다. 세르비아인들은 밀로쉬와 카라조르지예(블랙조지)를 비교하며 블랙조지에 대한 향수를 못 잊어 했다. 그러자 밀로쉬로서는 블랙조지가 세상에 없어져야 온전한 자기의 세상이 도래할 것으로 생각을 굳힌다.

1817년 7월 블랙조지가 해외에서 움직임이 포착됐다. 그리스 혁명지도자들과 연합해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혁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밀로쉬는 암살자를 보내 머리를 잘라 술탄에게 선물로 바친다. 밀로쉬는 정적 제거는 물론 술탄에게 충성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무한 신뢰를 얻는다. 블랙조지를 추종하던 세력들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세르비아 하층민에게 있었다. 가난과 핍박 등 혼란한 정국 속, 이전과 다를 것 하나 없는 세르비아농민의 불만은 증폭되어 갔다. 그러나 왕권을 유지하려는 밀로쉬는 농민을 달래기는커녕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가두곤 했다. 이전의 에니체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러시아는 이를 간파했다. 1821년 3월 6일 그리스 독립투쟁이 본격화되고, 러시아가 오스만 턱밑에 대포를 포진하면서 세르비아 완전한 자치권을 요구했다. 이에 오스만은 세르비아인에 대해 압박을 가했다. 1828년 러시아는 오스만터키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듬해 8월 러시아군대가 아드니아노플을 점령한 후 불가리아로 진격했다. 오스만제국은 그제야 두 손을 들었다. 아드리아노플조약이 이렇게 해서 생겼다.

뒤이어 1830년 2월 6일 밀로쉬는 세르비아 중부도시 크라구예바츠에서 세르비아자치를 공식적으로 대내‧외에 선포한다. 오스만제국이 만든 왕이자, 세르비아 자치국 왕위를 획득한 밀로쉬는 날개를 다는 듯했다. 여세를 몰아 밀로쉬가 강력한 중앙집권형 권력을 추진하자 군사반란을 불러왔다. 밀로쉬가 간과하는 게 있었다. 예부터 세르비아는 지방 고유 자치권이 강했다. 이때 세르비아인들이 밀로쉬 민낯을 속속들이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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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오브레노비치 초상(작자 미상). 아버지 밀로쉬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루마니아로 망명하자, 세르비아 귀족위원회는 19세의 그의 맏아들 밀란 오브레노비치가 뒤를 잇게 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퍼블릭 제공

이는 곧 통치권 약화로 이어졌고, 블랙조지 추종세력들은 밀로쉬 제거를 목표로 삼았다. 그 와중에 경제정책 실패로 세르비아 경제적 뿌리인 농업정책마저 바닥을 쳤다. 배가 기울면 쥐들이 가장 먼저 뛰어내리는 법, 세르비아 귀족들이 밀로쉬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더구나 내정간섭을 이어가던 러시아는 물론, 오스만터키 역시 밀로쉬 독선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러시아는 밀로쉬 권력을 분산하기 위해 마치 요즘의 국회처럼 위원회를 만들어 왕권을 견제했다. 결국 1839년 6월 위기를 느낀 밀로시는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루마니아의 왈라키아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의 폭정은 아주 작은 권력이라도 그 맛에 취하면 어떻게 변하는가를 아주 잘 보여준 예라 할 것이다.

토마 부취치를 중심으로 세르비아의 17인으로 구성된 귀족위원회가 본격 가동하면서 이들은 열아홉 살인 밀로쉬 아들 밀란 오브레노비치를 왕위에 올렸다. 그런데 귀족위원회의 입장에서 보면 고맙게도 왕위에 오른 지 채 한 달도 못 되 죽어버렸다. 말 그대로 세르비아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안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가정이든 나라든 속에서 곪아 터진 뒤에 외부의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동서고금의 이치다. (계속)

/박필우 스토리텔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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