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가브릴로와 블랙핸드 몰락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25-11-18 16:17 게재일 2025-11-19 17면
스크랩버튼
Second alt text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세르비아 비밀조직(기실 비밀도 아니었지만) ‘블랙핸드’가 추진했던 대세르비아주의가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살해하면서 1차 세계대전의 빌미가 된다.

Second alt text
보스니아 출신 세르비아계 가브릴로 프린치프. 1894년 7월 13일, 사라예보 서쪽 오블랴이 마을의 한 소작농 일곱 번째로 태어난 그날이 마침 성 가브리엘의 날이었으므로 신부는 그의 이름을 가브릴로로 지어주었다. /박필우 작가 제공

배후에는 세르비아 블랜핸드가 있었다. 블랙핸드 소속 탄코시치 소령은 가브릴로 일행에게 세르비아 산 수제폭탄 여섯 발, 브라우닝 리볼버 권총 네 자루를 건넨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한 오스트리아에 경종을 울려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대세르비아주의 기상을 드높여 잠든 세르비아민족을 깨우기 위한 목표였다.

보스니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계 가브릴로는 가난한 고향을 떠나 형이 사는 도시 사라예보로 왔다. 상업학교에 다니던 가브릴로는 우연한 기회에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무정부주의자들 시위를 구경하게 된다. 이때 가슴에는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조국이라는 원대한 이상이 요동쳤다. 블랙핸드에 몸을 담으며 본격적으로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폭탄 발포와 사격술을 연마한 그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로 옮겨 생활한다.

Second alt text
1914년 6월, 사라예보 라틴 브리지 앞. 기차역에서 저격에 실패한 가브릴로는 이곳에서 음식을 주문한 후 기다리다 우연히 황태자 부부를 발견하고 총을 쏘았다. 지금은 사라예보 박물관으로 이 사진을 포함해 가브릴로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관련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필우 작가 제공

한편 강성일로를 걷는 블랙핸드는 세르비아 정부와도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던 터였다. 이때 세르비아는 페타르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둘째 아들 알렉산다르가 이어받았다. 대세르비아주의의 실현을 위해 블랙핸드는 오스트리아 요인 암살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하지만 어수룩한 계획, 미숙한 폭탄 투척과 총질로 매번 실패로 끝났다.

가브릴로가 시도했던 일곱 번째 암살 시도 역시 어수룩하기 짝이 없었다. 1914년 6월 28일 때마침 세르비아의 수호신이자 성자 성 비투스의 날,(525년 전 1389년 6월 28일 세르비아가 코소보 ‘검은 새의 들녘’에서 오스만터키제국에게 최후의 일인까지 마지막으로 항전했던 같은 날이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암살 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오스트리아는 국경수비를 강화하면서 검문검색을 시도했다.

그러나 블랙핸드는 국경수비대 소속 장교와 세관원을 매수해 가브릴로 암살단 일행을 사라예보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한다. 가브릴로 일행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기차역에 도착했다. 가브릴로의 동료 네델코가 던진 폭탄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타고 있던 차량 밑에 떨어지면서 경호원을 포함해 오스트리아인 16명이 중상을 입었지만, 황태자 부부는 멀쩡했다.

Second alt text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중심에 있는 깔레 메그단 공원 내 ‘승리의 상’ 발칸 전쟁(1912~1913)과 제1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박필우 작가 제공

도망친 가브릴로는 사라예보 시내를 흐르는 밀랴츠카강의 라틴 브리지 인근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다. 운명은 장난치기를 좋아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돌연 예정된 길을 벗어나 중경상을 입은 호위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던 가브릴로가 황태자가 탄 차량을 발견하고 뛰쳐나가 총을 쏘았다.

부부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이를 확인한 가브릴로는 사이안화물 성분의 캡슐을 삼켜 자살을 시도했으나, 캡슐마저도 불량품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결박당한 가브릴로는 미성년자란 이유로 사형은 면했으나, 법원은 20년 형을 선고한다. 일이 이렇게 커질지 어찌 알았을까. 감옥에서 자신이 벌린 일로 인해 세계대전이 일어난 사실에 무척 괴로워했다. 결국 가브릴로는 감옥에서 결핵을 앓던 중 25세의 나이로 죽는다.

영원할 것 같았던 블랙핸드, 즉 검은손 조직도 위기를 맞는다. 세르비아 왕 알렉산다르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블랙핸드와 갈등 관계를 이어갔다. 알렉산다르는 반전을 위해 은밀히 움직였다. 먼저 국민 여론을 자신 편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블랙핸드 폭정에 언젠가 세르비아가 국제사회로부터 공공의 적으로 변할 것이라며 여론을 환기했다. 당장 세계대전이 블랙핸드에 의해 발발하자 그의 설득력에 힘이 실렸다.

Second alt text
오스트리아 프란츠 페르디난트 카를 루트비히 요제프 마리아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퍼블릭 제공

블랙핸드와 맞설 대안으로 친위대 ‘화이트핸드’를 창설한다. 우리말로 ‘흰손’, 혹은 ‘백수단’ 쯤 되겠다만, 어쨌거나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의 강경노선은 군부 내 반대파를 양산했고, 진급이나 요직에서 소외된 군인들이 공공연히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알렉산다르는 이를 간과하지 않았다. 이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면서 조직을 탄탄히 했고, 또한 대령이 수장인 블랙핸드는 언젠가 왕의 친위대인 화이트핸드에게 밀릴 것이라며 ‘왕정 대세론’을 퍼트렸다.

세계 1차 대전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 1917년 초,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군부 내 일부 세력들은 화이트핸드로 갈아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왕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배후에 블랙핸드가 있다는 빌미를 씌워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을 전격적으로 체포했다.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을 중심으로 블랙핸드 핵심인물 공개재판이 1917년 4월 초순부터 두 달간 열렸다. 핵심은 민족 반역자 처단이었다. 알랙산다르는 오스트리아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 암살은 이들이 배후에 있다고 만천하에 알렸다. 6월 26일, 디미트리예비치가 죽으면서 외친 말은 여전히 세르비아인의 가슴에 살아서 요동쳤다.

“대세르비아여 영원하라!”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박필우의 맛보기 세계사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