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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으로 얼룩진 세르비아 명가 ②바람 잘날 없는 세르비아공국

등록일 2025-10-21 15:59 게재일 2025-10-2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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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사드 시청사. 오스만제국이 발칸 맹주로 떠오르자 베오그라드 주민이 그들을 피해 헝가리 땅이었던 노비사드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요새취락이 형성되었다. 세르비아어로 ‘새로운 정원’을 뜻하는 노비사드는 현재에도 헝가리인이 많이 살고 있다. /박필우 작가 제공

독립투사 블랙조지 목을 잘라 오스만제국 술탄에게 바친 후 세르비아 권력을 독차지했던 밀로쉬는 경제가 바닥을 치자, 불랙조지 추종자들과 러시아는 물론 오스만 술탄에 의해 1839년 6월 루마니아의 왈라키아로 망명길을 떠났다.

이후의 세르비아는 왕위 계승문제로 바람 잘날 없이 9개월을 보내야 했다. 결국 17인의 귀족위원회, 즉 섭정단은 이제 막 열여섯 살이던 밀란의 동생인 미하일 오브레노비치를 허수아비로 앉혀 쥐락펴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이마저도 오래 누리지 못했다. 이들은 지난날 반란군의 선두에서 에니체리와의 싸움을 벌이던 블랙조지의 향수를 잊지 못했고, 결국 미하일을 쫓아내고 블랙조지 가문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첫째가 블랙조지 후손 알렉산더 카라조르제비치(카라조르지예)란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밀로시 아들이나 동생처럼 의복만 번지르르 했지 실권이라곤 없었다. 그래도 세르비아 왕가의 반열에 당당히 오르면서 일약 대대로 왕족 칭호를 받으며, 더 밀로시 가문과 쌍벽을 이루며 경쟁관계에 돌입하게 된다. 그가 16년 동안 왕좌에 있으면서 잘 먹고 잘 살았을 뿐 스스로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었다. 그 역시 17명의 대리인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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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조지 후손 알렉산더 카라조르제비치(카라조르지예), 그는 세르비아 공국 크네즈에 있었지만, 17인 귀족위원회의 대리인일 뿐 그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축출당하고 만다. /퍼블릭, 나무위키 제공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를 보다 못한 세르비아 민중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승자는 역시 17인의 위원회였다. 이 일로 조르지예는 크네즈에서 물러나야 했다. 웃긴 것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이 17인 위원회에 의해 루마니아로 도망친 밀로쉬 오브레노비치였기 때문이다. 블랙조지 후손들은 또다시 절치부심 타국 땅을 전전하면서 와신상담, 재기의 기회를 노리며 풍찬노숙을 이어가야 했다.

1860년 밀로쉬는 아들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츠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물러난다. 아들 미하일로도 권력 맛을 보게 되지만, 권력의 중심에는 여전히 위원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도 오래가지 못했다. 1868년 세르비아니즘 이상을 위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츠가 암살당한다. 이제 세르비아 권좌는 그의 사촌인 열네 살 밀란 오브레노비치가 크네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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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가 마신. /퍼블릭 제공

그러나 어린아이였던 밀란은 10년 뒤 의외의 업적을 남긴다. 1878년 3월 산 스테파노 조약에 의해 믿었던 러시아가 친 불가리아로 돌아서자 친 오스트리아로 급선회한다. 그해 6월 베를린조약에 의해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 영향 하에서 온전히 독립국의 대열에 낄 수 있었다.

1878년 6월과 7월에 있었던 베를린조약은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를 겁박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도이칠란트, 터키가 참가한 베를린회의에서 맺은 조약이었다. 이때를 기회로 헝가리를 병합해 이름도 이상한 이중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터키제국 영향에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스부르크왕가 아래 편입해 버린 후, 1908년이 되면서 완전한 합병에 성공한다.

세르비아 국민은 지난날 스테판 듀산에 의해 만들어진 세르비아 영원한 국경선이 허물어져가고 있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세르비아는 조국독립의 길목에서 강대국들과 어깨들 당당하게 혹은 대등하게 하리란 대망의 꿈은 한낱 물거품으로 변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자신들 땅으로 만들지 않고선 대세르비아주의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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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야 오브레노비치. /퍼블릭 제공

보스니아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항쟁이 간간히 일어났지만, 돌아오는 것은 매질 뿐이었다. 오스트리아로선 세르비아니즘이든, 유고슬라비즘이든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세르비아 정권을 잡고 있던 밀란은 친오스트리아를 향했고, 경제 역시 오스트리아에 의존했다.

이후 밀란을 치욕적이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밀란은 장가를 아주 잘(?)들었다. 사사건건 왕비 나탈리야 간섭은 왕으로 하여금 진저리치게 했음직하다. 왕비는 기세등등하게 일국의 왕인 남편을 우습게 알았다. 급기야 참다못한 왕이 왕비를 나무랐고, 가정폭력이 일어났다. 나탈리야는 어린 아들 알렉산드를 데리고 왕궁을 훌쩍 빠져나가 친정으로 가버린다. 일국의 왕이 가정 하나도 건사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기는 세르비아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들 수 없었던 밀란은 그럭저럭 왕좌는 유지했지만, 대인공포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잖아도 비실대던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눈치만 살피던 그는 아들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 몰라라 뒷방 늙은이로 들어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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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우 작가

1889년 13세 아들을 대신해 어머니 나탈리야의 대리청정이 이어지자 아들은 권력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마치 고려 7대 목종을 떠올리는 사건이었다. 어머니 천추태후의 기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다가 결국 동성애에 빠져버린, 대장군 강조에 의해 목이 달아난 불우한 왕처럼 말이다.

풍족한 궁궐생활에 시간이 남아돌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스캔들이다.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는 파티에서 자신보다 열한 살이나 연상인 콜걸 출신 드라가 마신을 만나 결혼한다. 그러자 이제는 드라가 마신 가족들이 왕궁을 드나들며 온갖 부조리를 저지르기에 이른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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