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쭉 보내기 싫은가, 산 그득 푸른 눈물
산문(山門)이 열린다. 지리산 산문이다. 등산을 하다보면 산 한곳을 다녀와서 산행기를 쓰는데 인연이 있어 그런지 몰라도 한 군데 산을 두 세 번씩 오르는 경우가 있다. 지리산이 그 중 하나인데, 워낙 지역이 방대하고 산자락이 많아서 그 주변을 크게 보면 지리산으로 여겨진다.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한 이후 2012년 겨울 한해를 마지막 정리하면서 지리산 바래봉 눈꽃 축제에 다녀왔다. 또 2014년 5월에 바래봉 철쭉제에 다녀왔는데, 올해는 또 지리산 바래봉을 다녀왔다. 지인이 지리산 바래봉 철쭉을 보러가자고 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어 동행하기로 했다.
지난해는 전북학생교육원에서 산행을 시작해 세동치, 팔랑치, 바래봉으로 해서 용산마을로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정령치고개에서 고리봉, 세걸산으로 해서 세동치로 갔고, 세동치부터 바래봉까지는 지난해 다녀온 길과 같지만 고리봉, 세걸산 등산 코스는 처음 가는 산길이다.
같은 산이고, 철쭉이 피어있는 길이지만 산행 길에 나서는 마음의 상태나 날씨 등에 의해서도 느껴지는 감정이 다르니 같은 산을 타지만 와닿는 마음은 천차만별이다. 3년 전 겨울 등산에서 팔랑치나 바래봉을 산행하는 기분과 지난해 봄철 철쭉이 만개했을 때와 또 이번 등산에서처럼 철쭉이 절정기를 지나 이미 시들고 있는 상태에서 느껴지는 것은 다른데, 그래도 공통적인 것은 산이 좋다는 것이고 자연이 멋지다는 생각이다.
일행을 태운 차는 88올림픽고속도로 지리산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남원 인월로 해서 737번 지방도를 달리다가 정령치 휴게소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차량들이 많고 등산온 사람들로 휴게소가 붐빈다. 대개가 여기서 세걸산을 거쳐 바래봉으로 꽃구경 가는 등산객이다.
정령치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중간에 위치한 고개다. 행정구역으로 치자면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에 걸쳐 있다. 해발 1천172m 높이로 지리산에서 차량이 넘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다.
서산대사의`황령암기`에 의하면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장군(鄭將軍)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는 데서 이름이 정령치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정령치 지명 유래는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니 오래된 지명이다.
고개 이름에서 치(峙)라고 하면 우뚝하다는 것인데 세동치, 부운치 모두 마찬가지로 높은 고개를 의미하는데, 정령치는 인근 세걸산이나 팔랑치, 바래봉으로 가는 들머리가 된다. 바래봉 코스를 운봉 용산마을에서 시작한다면 여기가 날머리가 될 수 있다.
잠시 등산 준비를 하면서 멀리 지리산을 조망하니 산세가 웅장하다. 기준점을 잡아 천황봉을 보면서 좌우의 산들을 둘러보고서는 천천히 산행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정령치에서 출발해 세걸산, 세동치, 팔랑치 능선을 타고서 바래봉에 올랐다가 다시 바래봉 삼거리를 거쳐 용산마을 주차장으로 하산할 계획이다.
산행을 시작해 바로 능선을 타고서 바래봉으로 향한다. 800m 앞이 큰 고리봉(1천304m)이다. 산행 시작점이 해발 1천172m이고 바래봉이 1천165m이니 1천100m~1천200m 높이의 능선을 타고 계속 걸어가니 높은 산이긴 하지만 이 길은 산 정상과도 고도차가 없고 또 험한 길 없어 등산의 재미도 제법 쏠쏠한 편이다.
어느덧 큰고리봉에 도착했다. 고리봉은 아득한 옛날, 천지가 개벽할 때나 대홍수 때에 산과 들이 물에 다 잠겼는데, 높은 산인 고리봉의 꼭대기만 물에 잠기지 않아 배에 탄 사람이 고리를 달아 배를 매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큰고리봉에서 바래봉까지 가는 코스는 거의 비슷한 높이의 산 능선을 타고서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면서 직진해 가는 길이다. 철쭉꽃 군락지가 나타나지 않는 부운치까지는 멀리 지리산이나 그 주변의 산들을 바라보면서 자연을 벗 삼아 걸어갈 뿐이다.
그렇게 자연을 보면서 걸어 세걸산에 도착했다. 세걸산((1천207m)은 지리산 원줄기의 서부지역에 차지하고 있으며, 북으로 덕두산·바래봉, 남으로 고리봉·만복대와 가지런히 하나의 산줄기 위에 늘어서 있는 산으로 행정구역으로는 남원시 운봉읍과 산내면의 분수령이 되는 곳이다.
세걸산은 산세가 호걸이 나올만한 웅장함을 지니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이 산의 계곡물은 아주 맑아서 소문나 있다. 그래서 삼한시대부터 이 계곡물로 쇠붙이를 다루어 솥을 만들었고 거기에서 유래한 지명이 바로 수철리라고 부르는 인근 마을이다.
세걸산 정상에서 잠시 쉰다. 정령치를 출발한 지 2시간 반이나 됐고, 점심시간이 지난지라 간단히 점심을 때우기 위해서다. 휴식을 취하면서 느껴지는 것은 아직까지는 지나오면서 본 모습들은 비슷했다. 다시 그 같은 풍경들을 느끼며 세동치로 왔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내려서면 전북학생교육원이 있다. 여기서부터는 작년 5월에 바래봉 철쭉축제가 열렸을 때 지난 길이기에 눈에 익은 길이다. 1140봉을 지나 능선을 오려내려 부운치에 도착했는데, 출발지점에서 6.4km를 산행했고, 이제 바래봉까지는 3km가 남았다.
부운치 옆 헬기장에서 5분정도 능선길을 올라서자 봉이 나타나는데 1123봉이다. 그 정상을 내려서자 철쭉군락지가 보이고 1123봉에서 다시 5분 쯤 걸어가니 본격적으로 철쭉군락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시기적으로 지난주에 보았던 보성 초암산 철쭉보다는 선명한 빛이 바래지고 있다. 그래도 철쭉명산지 바래봉이니 그 이름값이 어디 가겠는가. 부운치에서 팔랑치 일대까지 무려 1km 정도 길고긴 철쭉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그 길을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철쭉 군락지에서 천천히 걷는다. 긴 철쭉 터널을 지나 파랑치 정상 밑에도 넓은 초지가 펼쳐진다. 초지 가득 펼쳐지는 곳에서 초여름의 신록을 보며 필자는 주변의 절경을 만끽한다.
능선과 등로를 따라 1.5km를 걸어 나무계단을 타고 팔랑치 정상에 올랐다. 팔랑치는 여덟 명의 병사가 이 산을 지켰다고 하여 팔랑치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정상에서 아래쪽을 보니 철쭉 군락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팔랑치에서 바래봉 가는 1.5km 구간은 서북능선이 품고 있는 비경 중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라 한다. 그만큼 자연풍경이 빼어나다는 말일 것이다.
임도의 넓고 편안한 길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가니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바래봉이고, 왼편으로 직진해서 가면 등산 날머리인 용산마을이다.
바래봉 삼거리에서 바래봉으로 향하면서 앞으로 전개되는 철쭉군락지 전경을 보며 걷는다. 조금 더 내려서니 바래봉 능선길이 나오는데, 등산객들이 서서 소나무를 보고 있다. 이곳의 명물, 이상하게 생긴 소나무이다. 이 소나무는 산악회 카페나 바래봉 소개가 나올 때 가끔씩 등장하고 있다. 필자는 사진을 찍고 나서 바래봉을 오른다.
오르고 내리는 등산객들이 길가에서 바래봉 철쭉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쉬고 있다. 이야기 하며 웃는다. 이제 지는 시기의 꽃이지만 여기저기에 피어난 예쁜 꽃들을 보며 마지막 능선을 타고 올라 바래봉 정상에 도착했다.
데크 위에 바래봉 정상 표지목을 배경으로 필자는 사진을 찍고서는 멀리 천왕봉을 조망하면서 대단한 경치에 몰입한다. 산이 겹겹이 쌓여져있어 초여름의 햇볕을 받아 빛나고 있으니 신비감마저 묻어나는 명산이 지리산 산자락인 것이다.
바래봉 철쭉은 4월 하순에 해발 500m에서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 5월 초순~중순경에는 해발 1천100 여m 정상의 철쭉이 만개할 때까지 약 한 달간 능선을 따라 지속적으로 피어 장관을 이루고, 이 시기가 되면 진분홍 철쭉이 활짝 피어난 절경을 보러오러 성시를 이룬다.
바래봉에서 내려설 채비를 하며 저 멀리에 있는 세걸산과 팔랑치 쪽을 바라보니 능선 인근에서 붉게 피어 있는 철쭉꽃 군락지를 신록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아직도 능선을 타고 있는 등산객들의 무리지은 모습들을 보며 시상에 잠긴다.
“정상에 서서/ 철쭉꽃에 흠뻑 취해/ 지리산 천황봉을 바라보다가/ 바래봉을 내려선다./ 절정기가 지나 꽃들은/ 색이 엷어지고 있었지만/ 자연 절경은 그대로였다.// 한 달간이나 피어나/ 팔랑치에서 바래봉까지/ 능선을 진분홍 물결로/ 붉게 달구었던/ 철쭉꽃자락의 끝물을 보며/ 바래봉을 내려서는 길엔/ 초여름 햇살이 가득하다”(자작시`바래봉을 내려서면서`전문)
하산 길에 나서서 올라왔던 바래봉 삼거리로 나가니 아직도 많은 등산객들이 팔랑치쪽에서 건너오고 있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용산 마을로 내려가는데 바닥에 돌을 깔아 정비한 내리막길이라 다소 불편한 길을 걸어 주차장까지 걸어와서 일정을 마쳤다.
필자는 늦봄과 초여름이 오는 시기에 전국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진달래와 철쭉꽃 군락지를 다니면서 즐겁게 등산했다. 지리산 바래봉은 세 번째 올랐으니 산풍경이 마음에 선연히 남을 테고, 검붉게 피어 이제는 지고 있는 철쭉꽃 낙화의 모습도 마음 깊숙이 파고든다.
글·사진= 손경찬/수필가·예술소비운동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