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끝자락에 마지막 선물인 양 펼쳐진 눈꽃 세상
산을 오르내리면 계절이 오고 가는 기미가 서서히 느껴진다. 산속은 눈이 쌓여 있고 산상이나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서운 겨울 맛을 보여주지만 하산하는 오후 쯤 양지쪽에서 잠시 쉬어갈 때 따뜻이 내리쬐는 햇볕은 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이젠 겨울도 지나가는구나” 생각하면서 그간 고생했던 겨울 등산을 한 번 더 떠올리는데 힘은 들었지만 겨울이 지나간다고 생각하니 아쉬움도 든다. 그렇지만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봄옷으로 갈아입을 산과 들의 풍경들을 상상해보니 가슴이 뛴다.
이번 등산은 원주의 치악산으로 오르기로 했다. 평소 가고 싶은 산이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는데 눈꽃이 아직 피어있다고 하니 겨울이 가기 전에 꼭 오르고 싶은 산이기도 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보니 국립공원관리공단 2월 1일자 정기인사에서 공단 설립이후 27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소장이 탄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마침 필자가 등산하기로 한 치악산의 관리소장으로 발령했다는 내용인지라 자세히 봤는데, 1987년 7월 1일 공단 설립 이후 첫 여성 국립공원소장이라고 하니 뒤늦은 감이 없지는 않다.
산세 거칠고 험난해 눈꽃 경관에 정신 팔리다간 실족, 발길 조심해야계단·비탈길 오르면 비로봉 정상… 하나둘씩 쌓아올린 돌탑 인상적
치악산은 유명산이다. 치악산을 악산이라고 하는데, 악산이란 산세가 거칠고 험한 산을 일컫는다. 산악인들은 우리나라 3대 악산이니 5대 악산이니 부르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지정된 것은 없다. 그렇지만 치악산은 설악산, 월악산과 함께 빠짐없이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여하간 치악산은 수려한 경관을 보유하고 있고, 수도권으로부터 근거리에 위치한 교통요지 원주시에 인접해 있어 1일 탐방이 가능한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 중 하나다.
차는 중앙고속도로를 달려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 원주시 서초면 흥양리에 자리잡은 황골에 도착했다. 이번 산행은 황골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해 치악산 정상인 비로봉에 올랐다가 구룡사 쪽으로 내려와 구룡탐방지원센터에서 산행을 마칠 계획이다.
치악산 등산 코스는 비교적 간단하다. 가장 쉬운 코스는 구룡사가 있는 구룡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해 비로봉에 올랐다가 입석사를 통해 황골로 하산하거나, 아니면 비로봉 정상에서 구룡사 쪽으로 원점 회귀하는 코스다.
우리 일행들은 차에서 내려 각자 준비를 마치고 산행을 시작한다.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길을 걸어 탐방지원센터 방향으로 가면서 산을 올려다보니 아직 눈들이 쌓여 마음껏 눈꽃구경을 하겠거니 생각하니 기분이 상쾌해진다.
황골탐방지원센터를 지나 한 10분쯤 걸어가니 치악산 산악구조대가 나온다. 이 산은 계단이 많고 비로봉 밑 사다리병창길이 위험해 행여 사고에 대비해 구조대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산길을 따라 입석사 방향으로 행보해 10분 걸어 들어가서 입석사에 도착했다. 사찰 뒤편 산에 입석이 육중한 자세로 홀로 서 있다. 그 입석 이름을 본 따서 입석사라 이름 지은 것 같다.
입석사 지나니 거칠고 가빠른 길이 나타난다. 깔닥고개가 500m 쯤 이어지는데, 입석사에서 비로봉 삼거리까지는 다소 어려운 코스로 특히 겨울 등산에서는 조심을 해야 한다.
일행들은 등산로 안쪽 숲 사이로 눈이 쌓여있는 풍경들을 보면서 조심조심 걸어 능선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완만한 등산로를 따라 걸으니 다소 가벼워진 발걸음이다. 눈꽃들이 피어난 숲 사이 길을 한참 오르다보니 조망이 터지고 저 너머에서 비로봉 정상이 보인다.
전망대에서 잠시 쉬면서 비로봉 쪽과 지나온 입석사 방향을 본다. 설경이 아직은 볼만하다. 멀리 원주 시가지를 내려다보다가 등산길 전망대를 빠져나온다.
우리 일행들은 걸음을 옮겨 계단을 타고 내려와서 비로봉삼거리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온 길은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있어 쉬엄쉬엄 쉬면서 자연경관을 살피고 왔지만 이제 계단길과 비탈길을 올라 비로봉 정상으로 올라야하니 긴장을 하며 조심한다.
쌓인 눈에 등산객들이 지나다니고 또 날씨가 추워 그런지 미끄럽다. 그렇지만 아이젠을 착용하고 걸으니 별 문제는 없다.
이렇듯 겨울 등산은 장비를 준비하고서 주의하면서 올라야 한다.
계단 길과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10분쯤 올라가서 우리 일행들은 치악산의 최고봉인 비로봉 정상에 도착했다. 벌써 앞서 출발한 많은 등산객들이 산 정상에서 풍경을 즐기고 있다. 앞에서도 치악산에 대해 개략적으로 설명했지만 높이 1천288m로 차령산맥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이다.
예전에는 이곳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서 치악산을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치악산 이름의 유래는 어떤 나그네가 뱀에게 잡힌 꿩을 구해주었는데 나그네가 이 산에서 위기에 처해지자 그 꿩의 보은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전설에서 치악산이라 불러졌다고 한다.
주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매화봉(1천84m), 향로봉(1천43m), 남대봉(1천182m) 등 산이 남북으로 14km에 걸쳐 하나의 산맥을 형성하고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오악신앙의 하나로 동악단을 쌓고 원주·횡성·영월·평창·정선 등 인근 5개 고을 수령들이 매년 봄·가을에 제를 올렸다 한다. 우리 일행들은 정상에 있는 3기의 돌탑을 본다. 치악산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비로봉 미륵불탑. 하나둘씩 돌탑을 쌓은 정성에 필자는 감탄하면서 미륵불탑에 대한 홍보판을 살펴본다.
“치악산 비로봉에 세워진 돌탑은 원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용창중이라는 사람이 꿈에 비로봉 정상에 3년안에 3기의 돌탑을 쌓으라는 신의 계시가 있어 혼자서 탑을 쌓았던 것인데, 1962년 9월 처음 쌓기 시작하여 1964년 5층으로 된 돌탑을 모두 쌓았으나 1967년과 1972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너졌던 것을 용창중씨가 각각 그해에 복원하였다. 1994년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벼락을 맞아 무너진 것을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가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미륵불탑 중 남쪽의 탑은 `용왕탑`, 중앙의 탑은 `산신탑`, 그리고 북쪽의 탑을 `칠성탑`이라고 한다.” (용창중씨는 1974년 작고하였음)`
이렇듯 치악산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산인데, 정봉에 세워진 정성이 가득 담긴 3개의 돌탑은 치악산의 상징이 되어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위무하고 있다.
필자는 비로봉 정상에서 미륵불탑과 멀리 또는 가까이에서 펼쳐지는 풍경들을 조망하고 사진을 찍다가 겨울햇볕 쏟아지는 산자락을 바라보면서 시심에 잠겨 치악산을 노래해본다.
“이곳에 올라본 자들은 안다./ 비로봉에서는/ 누구나 경건해지는 것을,/ 정성을 다해/ 하나둘씩 쌓아올린 돌탑은/ 은혜로운 치악산의/ 상징이 된지도 이미 오래다.// 조심스레 지나는 구름/ 숨을 고르는 바람조차도/ 정결한 몸짓이다./ 정상에 올라서보면/ 고요해진 마음 위로 흐르는/ 자연을 향한 무한한 경건함./ 치악산의 정기는 남다르다”(자작시 `치악산 비로봉에 오르면` 전문)
이제 하산길이다. 처음부터 가파른 구간을 만나는데, 사다리병창길로 해서 구룡사를 지나 구룡탐방센터 주차장으로 내려가면 산행이 끝이 나는데, 거리로 치면 아직 5.7km나 남았다. 비로봉을 내려서서 바로 계단길을 타고 조심스럽게 하산을 시작한다. 여기서 세렴폭포로 가기까지 길이 매우 험한데, 절벽과 붙어 있고 협소한 길이다.
사다리와 데크식 길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구룡사 방향에서 비로봉을 오르내리려면 바위절벽을 타고 벼랑길에 사다리 타야하는데 그래서 이름 붙여진 게 `사다리병창길`이다.
이 오르막(내리막)을 `사다리병창길`이라고 했는데, `병창`이란 절벽을 뜻하는 강원도 방언이다. 안내표지판엔 `거대한 암벽군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고 암벽 사이에 자란 나무와 어우러져 독특한 풍광이 병풍처럼 펼쳐진 곳`이라고 적혀 있다.
사다리병창길, 특이한 길을 조심하면서 20분 정도 내려서니 세림폭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곧장 가니 구룡사 자연관찰로다. 대곡 야영장 잣나무 숲길이 길게 이어져 있는 길 끝에서 구룡사가 있다. 비로봉에서 하산한 지 한 시간 정도 걸린 시간이다.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전설에 의하면 대웅전이 있던 자리에 연못이 있었고, 거기에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 한다. 의상대사가 연못자리가 좋아 그곳에 절을 지으려고 용들과 도술시합을 해 용들을 물리치고 절을 짓고는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 하여 구룡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찰이 퇴락기를 맞자 어느 날 한 노인이 절 입구의 거북바위가 절의 기를 약하게 한다고 해 혈을 끊었는데, 한 도승이 나타나 절이 더 쇠락한 것은 혈맥을 끊었기 때문이라고 해 거북바위를 살리는 의미에서 절의 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바꿨다고 한다.
절 인근 산에 우거진 노송들은 특히 조선시대부터 유명하다. 황장목은 임금의 널을 짜거나 대궐을 짓는 데 사용되는 목재로 함부로 베는 것을 금했는데 그 표시로 `황장금표`를 세웠다.
구룡사에서 시간을 보낸 후 구룡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다 됐다. 아침 10시30분경 황골에서 시 작한 산행은 6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시간 동안 치악산의 눈꽃과 비로봉 돌탑이랑 자연의 순수한 풍취를 제대로 맛본 이번 치악산 등산이었으니 매우 흡족한 산행이었다. 글·사진= 손경찬/수필가·예술소비운동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