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입술이 한 입술과 겹쳐진다, 물뱀처럼 캄캄하다, 한 남자의 입술이 한 여자의 캄캄한 사랑을 누르고 있다(….)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갔을 때 아름다운 여자는 조금씩 사라졌다사랑이란 누군가를 위해 눈과 코를 지우고형용사처럼 혀를 버리는 것사라지는 여자의 눈썹이 서늘하다어느 쪽이 슬픔의 정면인지하루가 백년 같은 뜨거운 이마당신과 내가 삼켜버린 낡은 입술들,한 입술과 한 입술이 쌓인다,고요하다 입술들은,울음과 울음이 겹쳐진다,캄캄하다사랑 이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삶의 파괴를 가져올 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사랑. 이러한 사랑을 시인은 개기 일식으로 비유한다. 달의 그림자가 세계를 캄캄하게 만들듯이 여자의 입술을 누르는 남자의 입술은 여자의 사랑을 ‘캄캄하’게 만들고, 하여 그 입술의 겹침은 “울음과 울음”의 겹침으로 전화한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불붙는” 이 사랑은 “하루가 백년 같은 뜨거운” 격정을 고요하게 품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1-10-05
햇볕 졸은 창가에다 선인장을 길렀겠다(….)물도 어쩌다가 생각나면 주면 되는 것이어서이 게으른 시인에게는 행복한 정물이 아닐 수 없다어라 시인, 오늘은 웬일인가 물을 다 주고왜 당장이라도 모랫길 허허한 사막으로 떠나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세수하고 얼굴 닦는 타올 갖고는 그 멋들어진 터번이 만들어질 리가 없지히히잉 히이힝 낙타울음 흉내까지 내보는 것이지만그래가지고서야 모래폭풍에 단숨에 먹혀버리고 말지다소 굴욕적이긴 해도온 몸을 가시 같은 그 무엇으로 덮어 보렸다.시인이 창가에 선인장을 두어 때때로 물을 주는 이유는, 이 세계가 삶을 삼키는 사막과 같은 곳이라는 진실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또한 이 세계를 견디며 살기 위해 선인장처럼 가시를 온 몸에 덮는 윤리적 결단을 계속하기 위해서이다. 선인장은 이러한 인식과 윤리의 삶으로 일상에 매몰된 삶을 자석처럼 끌어당길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강렬한 삶의 자세를 무심한 어조로, 유머와 장난기를 잃지 않고 진술한다. 문학평론가
2021-10-04
(….)사막에서 굶주린 소녀가 죽기만을기다리는 독수리 사진을 보라이 소녀는 가난 때문에,이미 하나의 예술 소재에 불과하다소녀를 먹고 독수리가 사는 것 역시자연의 법칙이다(….)베토벤의 교향곡은 허구여서 전파를 타고소녀의 귀에 들리기도 했으리라(….)많은 사람들은 남을 돕기 전에자신의 먹이를 주고 예술이라는 허구를 산다우리들은 독수리의 상징 혹은 동업자인 것이다그런데, 이 사진 작가는 소녀를 구하지 않았다는비판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했다고 전해진다(….)이 시는 독수리와 소녀, 사진을 찍는 사진가, 쥐와 뱀과 빵과 베토벤 등을 여러 겹으로 겹쳐놓으면서 우리를 숙고하게 만든다. 시인은 사진가에게 휴머니즘적 비난을 하지 않는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은 시각에서, 소녀를 먹잇감으로 보는 독수리와 먹이를 주고 독수리를 상징화 한 예술을 만드는 인간을 대조하면서, ‘싶체’가 아닌 상징을 추구하는 인류 문화 자체의 ‘의미’와 현대 문화 전반의 정당성을 묻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1-09-30
저것들은 내가 잃어버린 별이 아니지내가 잃어버린 별의 파편들이 아니지내가 갈아버린 금 부치는 더더욱 아니지해가 떨어지는 서해에서 보는 물결모서리마다 일렁이는 부스러기 빛내 몸으로는 더 이상 들어올 곳이 없지일렁이다 반짝이다 물결이 되는 부스러기 빛아이는 차돌을 집어던지지 차돌더미에차돌을 집어던지지 깨어진 차돌 속에서새로운 금속이 태어나 빛나지내 몸 속에 들어온 빛기억을 찾아 떠나가지어둠 속 차돌더미에꼬리를 감추고 스미는 빛현재 시인은 세계에서 시를 발견할 수 없으며, 그의 몸은 굳어버려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아이가 나타나면서 그는 단숨에 세계와의 관계를 회복한다. 아이가 차돌을 집어던지자 시인의 마음 안의 “어둠 속 차돌더미”에 “꼬리를 감추”며 빛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그럼으로써 시인은 시 쓰는 능력-연금술사의 능력-을 회복하고 시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09-29
비가 내린다 늘 흐리거나 비가 내린다나무에선 열매 대신 눈물 구슬만한 빗방울이 맺힌다(….)따사로운 햇살의 추억을 간직했던 이주민은 곧바로 치매에 걸리고그렇게 시름시름 앓다 영안실에 안치되고선 구름 속에 묻힌다(….)갈 길이 막막해질 때면탑처럼 쌓인 적운(積雲)을 향해 기도를 올리거나굴뚝으로 인공 구름을 만들어 공양을 올린다그러나 새들은 언제나 낮게 날고저 출구의 소실점을 향해 치달리는 영혼은 너무나 축축하다아무도 터널을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발밑에서 경적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은 환청일거라고 비웃었지만다들 구름에 갇힌 나무처럼 하얗게 질린 지 오래다‘터널’은 굴뚝으로 상징되는 문명의 힘을 숭배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내면을 상징한다. 이 시는 불모의 문명 속에서 내면마저 물신화되어 축축하게 부패해가는 우리의 삶을 고발한다. 이 ‘고발’엔 어떤 긍정적인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이 축축하게 젖어들며 죽어가는 삶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현대가 가공할만한 죽음을 빚어내는 세계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주력한다. 문학평론가
2021-09-28
잠 속에서도 바다소리를 들었다눈 감은 동공 안으로 파도가 밀려왔다돌아누울 때 마다 지구 저 편도 뒤척이고 있었다가슴속에 바다가 넘실거리고내 몸은 해초처럼 너풀거렸다푸른 날개를 들고 헤엄을 쳤다소금기 절은 갯바람이흥건히 젖어있는 머리맡에수평선 하나를 그었다시인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밀려오는 파도를 눈 감은 동공 안으로 받아들이며, 가슴 속에 들여온 바다에서 “푸른 날개를 들고 헤엄을” 친다. 이러한 몽상을 단순히 현실 도피라고만 볼 수는 없다. 시인이 꿈을 꾸는 이유는 현실에 꿈을 틈입시키기 위해서, 즉 현실 세계의 머리맡에 “수평선 하나를” 긋기 위해서, 그리하여 현실을 꿈으로 “흥건히 젖”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1-09-27
벌레가 내 요즘 화두다나는 원래 죽으면 흙 속에 묻히고 싶었다남의 살 많이 먹어둔 살덩어리벌레들에게 다 도로 돌려주고 싶었다한동안, 몸속의 욕심덩어리, 죄덩어리를벌레들에게 옮길까 봐 저어했으나 다 핑계거니마음을 굳혔다그런데 아내가 먼저 죽었다죽기 전에 매장할까, 화장할까차마 물어보지 못해서 황망 중에 화장을 했다요즘 그게 걱정이다나도 아내 따라 살덩어리를 불에 태우자니벌레들에게 미안하다내심으로는 벌레들에게 살덩어리 내어주기 싫어서서둘러 화장했다는 혐의도 없지 않다(….)인간중심주의 안에서의 반성은 철저한 반성이 아니다. 삶을 정말 반성하기 위해선 인간의 삶이 아닌 생명 전체의 관점에서 반성해야 한다. 자신의 죽음 이후를 벌레의 생명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박제천의 위의 시는 그러한 반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반성은 아내에 대한 사랑과 겹치면서 심적 갈등을 낳는다. 생태 사상에 기반한 반성과 아내에 대한 드러나지 않은 정이 얽히고 있어서 또 다른 감동을 준다. 문학평론가
2021-09-26
발바닥에 묻은 먼지를 턴다. 발등에는 마른털이 누웠고 무릎에다 받쳐준 긴 뼈는 휘었다.아직 걷고 있는 사람은 오래 걸을 것이다. 며칠이 저물도록 느리게 걸어서 어둑한 들녘을 지나간 다음에는 어느덧 종적이 깜깜할 것이다.올해에 죽은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소식이 끊겼다. 없는 이의 안부를 묻고 간 사람이 있다.나는 남아서 어금니와 손톱을 씻는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였다. 종잇장인 듯 바삭대는 손바닥과 부러질 듯 야윈 손가락 몇 개를 여러 해째 움켜쥐고 있다.찬비 내리고 (중략)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는 죽음을 살아가는 모순을 견뎌내야 한다. 위의 시의 화자는 “야윈 손가락 몇 개를 여러 해째 움켜쥐고” 있으면서, 아직 어떤 이의 삶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비가 죽음으로 채워지고 있는 죽은 이의 삶을 장엄하게 승화시킨다. 이와 함께 비는 비탄을 대신하여 울음을 이 세상에 뿌리면서, 운명을 견디어내는 강인함으로 살아 있는 이의 삶 역시 끌어올린다. 문학평론가
2021-09-23
햇살 가득한 대낮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네가 물었을 때꽃처럼 피어난나의 문자“응”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오직 심장으로나란히 당도한신의 방너와 내가 만든아름다운 완성해와 달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시인은 “꽃처럼 피어난” “응”이란 문자에서 해와 달이 위아래에 누워 있는 “눈부신 언어의 체위”를 상상해낸다. 또한 ‘응’이라는 대답의 음성 속에서 사랑은 부드럽고 따스하게 완성된다. ‘응’을 반복해서 속으로 소리내보면, 이 ‘응’이 평온하고 에로틱하게 마음을 감싸면서 점차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해와 달이 ‘응’이란 대답을 서로 나누며 살며시 포옹할 때처럼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1-09-22
인간의 길은 모두 바다로 가서 빠져 죽는다, 라고 쓴 엽서를 전해주고 우체부가 오후의 오솔길로 사라진다오솔길이 하늘을 향해 기어오른다 아직 어린 구렁이 새끼 한 마리 제 아름다운 몸을 오솔길처럼 구부렸다 폈다 황천행,수련중이다美行이다오솔길로 사라진 우체부, 그는 어디로 갔을까? 바다로 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가 전해준 엽서는 우체부 자신의 죽음으로 쓴 것이다. 그리고 그가 걸어간 오솔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하늘로 상승하는 듯한 오솔길은 ‘황천행’을 ‘수련’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 모습은 구렁이의 몸과 같은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죽음과 삶이 꼬여 있는 회로를 이해하게 된다면, 역설적으로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현현하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위의 시는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1-09-16
늙은 느티의 다섯 가지는 죽고세 가지는 살았다푸른 잎 푸른 가지에 나고검은 가지는 검은 잎을 뱉어낸다바람이 산천을 넘어 동구로 불어올 때늙은 느티의 산 가지는 뜨거운 손 내밀고죽은 가지, 죽은 줄 까맣게 잊은 식은 손을 흔든다한 사나이는 오래된 그늘에 끌려들어가꼼짝도 않고부서질 듯 생각노니,나에게로 와서 죽은 그대들죽어서도 떠나지 않는 그대들바람神이 산천을 넘어 옛 동구에 불어와느티의 百年 몸속에서 윙윙 울 때그늘 속에서의 삶이란 죽음과 삶이 뒤섞여 있는 백년 가계가 “윙윙” 우는 소리를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다. 그 소리는 죽음과의 동거로 인해 경험하게 되는 숭고함을 표현한다. 죽은 타인과의 동거는 고통스럽긴 하지만 타자와 공존하는 삶을 시작하려는 윤리적인 결단에서 비롯된다. 죽은 자-타자-를 사랑하고자 하는 그 윤리는, 숭고를 체험케 함으로써 기성의 자아를 허물어뜨리는 변화를 주체에게 가져 올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09-15
매달 스무여드렛날이었다할머니는 밭에 씨를 뿌리러 갔다오늘은 땅심이 제일 좋은 날달과 토성이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흙들이 마구 부풀어오르는 날설씨 문중 대대로 내려온 농법대로할머니는 별들의 신호를 알아듣고 씨를 뿌렸다별과 별 사이의 신호를씨앗들도 알아듣고최대의 發芽를 이루었다할머니의 몸속에, 씨앗 속에, 할머니 주름을 닮은 밭고랑 속에별과의 교신을 하는 무슨 우주국이 들어 있었던가매달 스무여드레 별들이 지상에 금빛 씨앗을 뿌리던 날할머니는 온몸에 별빛을 받으며 돌아왔다할머니의 우주에서는 만물이 서로 교신한다. 이 교신은 기호를 통한 정보 공유와 같은 ‘소통’과는 달리 몸과 몸이 서로 공명하면서 이루어진다. 신호로 교감이 이루어지는 이 자연 세계에서 인간인 할머니가 그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세계의 몸-대지-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노동을 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그녀의 노동은 땅과 별과 하늘과 씨앗과 교신하는 과정 자체이기도 하기에 그렇다. 문학평론가
2021-09-14
눈을 뒤집어 쓴 채한 때의 무성했던,마른 풀잎들이제 기억들을 치켜들고 있다바람에 흔들리며마른 줄기 끝 땅 속의 생각들을 간직한 채봄이 되면 푸른 실핏줄에뜨거운 피를 치솟으며붉거나 노란 기억들을 피워올리기 위해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정월 초하루, 폭설 속에서오롯한 정신 하나로지난 해의 낡은 이름표를 달고바람 속에 서 있다“눈을 뒤집어 쓴” 풀잎들이 겨울을 견디며 다시 자신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바로 “제 기억들을 치켜들”면서이다.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오롯한 정신 하나”를 견지해야 한다. 인간 역시 죽은 자를 망각의 강 너머로 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그에 대해 기억하는 오롯한 정신을 가져야 하리라. 그 정신이 바로 자연세계이건 인간 세계이건 죽음을 삶의 세계로 이끌어 올리는 생명력인 것이다.문학평론가
2021-09-13
지하 통로뱀 한 마리 미끄러지듯전율하며 달려가고 있다. 오로지표적을 향해맹목의 정신으로 줄달음치는저일 촉 화살처럼, 불타는 살의는 미친 듯이 씩씩거리며제 얼굴에 부딪치는 암흑의 벽면을깨뜨린다, 무지하게. 뱀이 스쳐간 자리에는 피투성이,피투성이 되어 넘어진 적막의 살점들이 살아 퍼덕인다.위의 시에서 이수익 시인은 삶의 강렬성이 폭발하듯 현현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암흑의 벽면을” “맹목의 정신으로 줄달음”쳐 깨뜨리면서 스스로 파괴되는 뱀의 저 저돌적인 행동을 보라. 뱀은 죽음의 벽과 부딪치면서 주변의 삶을 다시 ‘퍼덕’이게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인 극단의 지점에 돌입함으로써, 저 뱀은 스스로 피투성이가 되는 삶을 살면서 ‘적막’을 파열시키고 삶을 삶답게 만들고 있다.문학평론가
2021-09-12
삼베는 수의의 옷감이다. 죽음의 색인 삼베빛은 바로 조팝꽃의 빛깔이기도 하다. 조팝꽃 무더기 속에서 시인이 털썩 주저앉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렇듯 죽음 속에 쌓여 있지만, 초록 잎새들은 “들뜬 발자국들”로 “강마을 가득” 일어서고, 이에 더해 붉은 철쭉꽃들이 “싸하게 몸 흔들며 피어오”르고 있다. 이로써 시인은 죽음의 시간 속에서 생명이 생성하는 시간이 싹튼다는 것을 새로이 인식한다. 문학평론가삼베빛 저녁볕, 자꾸 뒷덜미 잡아당긴다 어지럽다 (….) 종아리에 힘 모으고 겨우겨우 버티고 선 채 흐르는 강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산언덕을 덮는 조팝꽃처럼 마음, 몽롱해진다 낡은 철다리조차 꽃무더기 여기저기 토해 놓는 곳 거기 간이매점 대나무 평상 위, 털썩 주저앉는다 (….) 초록 잎새들, 팔랑대는 아기 손바닥들 바람 데리고 와 코끝 문질러댄다 쿨룩쿨룩, 삼베빛 저녁볕 잔기침하는 사이 강마을 가득, 들뜬 발자국들 일어선다 싸하게 몸 흔들며 피어오르는 철쭉꽃들 벌써 물속의 제 그림자, 까맣게 지우고 있다. -‘삼베빛 저녁볕’ 전문
2021-09-09
물금은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이다. 동시에 물금은 강물의 끝선처럼 그리움의 물이 들어갈 수 있는 한계선-금-이기도 하다. ‘물-그리움’이 결국 그녀가 사는 물금에 닿지 못하게 하는 물의 금. 이 ‘금’ “한복판에서” 시인은 물금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제 무게를 못 이겨 ‘맨땅’에 떨어져버린 그리움이 산산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초로’의 시인은 이 ‘물-금’에서 회초리 맞은 듯 아프게 몽상에서 깨어난다. 문학평론가바닷물이 숭어 떼처럼 파닥파닥 밀려 올라오다 허리쯤에서 기진해 멈춘다 (….) 그녀와 나 사이 매일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다 내 그리움도 그곳까지, (….) 그녀가 사는 곳이 곧 물금이다 대추나무 잎에 반짝이는 햇살처럼 영혼에 일렁이는 물결무늬처럼 떠있는,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물금, 물금 한복판에서 찾아 헤매이게 되는 물금, 농익은 감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철퍼덕 맨땅에 떨어져 산산이 흩어지는 곳, 초로의 적막이 물푸레나무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그곳이 물금이다 - ‘물금’ 전문
2021-09-08
느리게 구르던 수차가 덜컹, 깊은 바퀴자국을 남깁니다사랑하는 동안 이곳은 늪지입니다전선에 맺힌 빗방울 하나가 저에게 다가오는 때를 기다리는 동안시간은 수밀도 익어가듯 깊어갑니다 말갛게 바닥을 탐색하던 빗방울이깜박, 저를 놓으며 온몸에 찰나의 광휘를 두릅니다빗방울이 제자릴 찾는 데는 삼천년이 걸린다는데 삼천년 너머,빗방울 하나가 허공에 떨고 있었을 그날에도하늘은 저리 푸르렀을까요?연일 소소한 바람이 많아진 비 갠 오후 흰 종이 위에-종일 나뭇잎이 웅성거린다, 적었습니다 깊어진 여백으로물푸레나무가 들어섭니다 다 셀 수 없는 마음입니다시인은 저 “전선에 맺힌 빗방울 하나”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인 시인은 빗방울이 낙하하는 순간이 삼천년이나 걸려 일어나는 경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 순간은 삼천년이 압축되면서 일어나는 사건의 시간이다. 수밀도 익어가듯 천천히 깊어지는 사랑의 시간은 거대한 세월을 넘나드는 시간이다. 이렇듯 세계에 대한 사랑은 미세한 사물들에서도 익어가는 시간의 질감을 감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09-07
바닥에서도 혼자서씩씩하게 한 목숨 살려왔건만이불을 머리꼭대기까지 끌어 덮어도머릿속 구름 일어 잠 못 드는 밤창 밖에는 겁먹은 바람이 덜컹거리고어린 고양이는 울음으로 보채고해소처럼 돌아가는 보일러 소리불면의 수돗물 똑똑 떨어지는 소리여보, 죽으면 끝없이 잠만 자겠지만저것이 다 살아 있다고 가까스로발버둥치는 소리, 오돌오돌 추워서몸 오그라드는 소리고스란히 내리는 눈옷 입고뼈만 남은 어머니 아버지도 생각나서뼈도 없이 소나무 밑에 심어진 아우도자꾸 생각나서 잠 못 드는 밤창밖의 바람과 어린 고양이, 그리고 보일러와 수돗물이 내는 소리들. 그 소리들은 시인의 마음과 뒤섞이면서 죽음을 감지하는 시인의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탈바꿈한다. 시인이 가까스로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그 소리들은 어머니 아버지, 돌연사한 아우의 실제적인 죽음을 생각하게 이끈다. 시인의 삶은 사랑했던 이들의 죽음이 쌓인 ‘지층’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저 소리들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09-06
시인은 차들로 꽉 막힌 팔당대교에서 “여섯 번째 가로등”을 보고 있다. 시인은 이 가로등을 ‘마지막 남자’로 전치(轉置)하면서 불빛으로 전달되는 사랑의 고백을 상상한다. “세상에 구속된 수상한 층운”-안개-을 마음으로 벗겨내면 저 남자의 말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시인은 사랑의 말이 도래할 것을 믿고 기다린다. 기다림, 그것은 사랑의 미래를 이곳으로 당겨 고독한 현재를 견디는 삶이다. 문학평론가팔당대교 전후 모든 차들이 뒤얽혔습니다 그러면 여섯 번째 가로등에 한 남자 기대서서 어딘가 맞이합니다 흐르는 강을 동여맬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겨우 몇 번 입을 열었습니다 (중략) 그는 내게 이야기조차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안개를 풀어냅니다 안개는 세상에 구속된 수상한 층운입니다 그가 가로등에 기댈 이유 있었겠지요 거듭 말하지요 내게 소란 피우지 않는 것 그것이 당신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지요 곧 공사하는 도로 한 귀퉁이에서 사람 대신 야광 불빛을 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나에게 신호를 보낼 것입니다
2021-09-05
밤새 가을비가 내리고 가로수 잎들이 떨어지고 아침이 손바닥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받고 움츠린 사람들이 점멸하는 신호등을 건너 빠르게 흩어지고 다시 우르르 모이고 흩어지고 다시 흩어지고 밤새 앓다가 나간 너는 지금 수서를 지나며 혼자 기침을 하고(중략)나는 청구빌라를 지나 이디아 커피를 지나 성당으로 가고 할 말이 있어서 갔다가 짧은 그림자를 밟으며 되돌아오고 하느님이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나란히 오고 집까지 같이 오고 담장 옆 고인 물속에 구름이 흘러가고 밝게 익는 마가목 열매 옆에서 까치가 갸웃거리고삶과 죽음은 회귀된다. 떨어지는 잎들을 아침이 받는다. 아침의 품속에서, 떨어진 잎들은 새로운 탄생을 준비한다.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사태 역시 회귀되며 고통과 치유도 회귀된다. 일상은 그러한 반복되는 회귀로 이루어지는데, 시인은 이 일상의 영원회귀 옆에 ‘하느님’이 함께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 영원회귀의 흐름(시간) 속에서 세계는 ‘마가목 열매’처럼 힘차게 돋아나고 밝게 익으리라는 것도. 문학평론가
2021-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