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향림
역사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다 낡은 환상만 내다놓은 나무 의자들
공허가 주인공처럼 앉아 있다.
그 발치엔 먼 데서 온 파도의 시린 발자국들
햇살 아래 쏟아낸 낱말들이
실연처럼 쌓이고
우우우 모래바람 우는 소리,
먼저 도착한 누군가 휩쓸고 갔나 보다.
바닷새들이 그들만의 기호로
모래알마다에 발자국들 암호처럼 숨겨놓고 난다.
낯선 기호의 문장들이 일파만파 책장처럼
파도 소리로 펄럭이면
일몰이 연신 그 기호를 시뻘겋게 염색한다.
나무 의자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정동진역은 백지처럼 ‘공허’하다. 그 ‘공허-백지’ 위에는 낯선 기호로 엮인 문장들이 있다. 이 허허로운 풍경과 저 ‘흔적들-발자국들’로 이루어진 문장들이 서로 어울리면서 하나의 책이 만들어진다. 책장 펄럭이듯이 “일파만파” “파도 소리”를 내며 낯선 누군가가 여기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저 책의 ‘문장들’은, ‘일몰’에 의해 “시뻘겋게 염색”되는 농도 짙은 쓸쓸함을 불러일으킨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