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를 찹쌀고추장에 찍어 몇 잔 사발을 들이키니 도라지 냄새가 간밤을 지나 새벽까지 왔다. 닭 울음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나는 산속에 외따로 떨어져 피어 있는 한 송이 도라지꽃! 이럴 때면 으레 바닷가 고향 마을에서 먹던 간간한 우럭젓국이 생각났다.(중략)깊은 바닷속 그 맛의 진국이 펼쳐진 검은 늪에 노랑부리저어새처럼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을. 시원하면서도 뒤끝이 개운한 맛인, 억센 우럭 뼈가 내뱉은 해탈의 맛이 새벽 꽃밭에서 서늘하게 나를 불러 세웠다. 비리지 않은 목소리로 허공에 담백하게 외칠까. 진미 났다!하재일 시인의 감각과 그 감각을 표현하는 상상력은 섬세하면서도 스케일이 크다. ‘우럭젓국’에서 진한 ‘바닷속 맛’으로 비월하는 상상력! 우럭젓국은 우럭의 ‘살-삶’을 지탱해주었던 뼈에서 우러나왔기에 그 맛이 진하면서도 우럭의 ‘해탈’로부터 우러나온 것이기도 하기에 그 맛은 시원하고 개운하다. 시에 따르면, 삶의 ‘진미’는 죽음에 의해 다다르게 될 삶의 뿌리로부터 해탈되어 우러나올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1-09-01
지상의 모든 나무들은흙 속에 뿌리를 내리지만습지의 맹그로브 나무들은진흙 위에 뿌리를 내린다지상의 모든 나무들은제 뿌리로 제 한 몸 겨우 지탱하지만습지의 맹그로브 나무들은서로의 뿌리로 서로의 몸을 지탱해 준다(중략)모두 모여 함께 뿌리를 내려서로의 뿌리에 서로의 뿌리를 엮어간다한 그루 두 그루 열 그루 백 그루서로의 뿌리에 서로의 뿌리를 심어간다세세연년 맹그로브 숲을 우거지게 한다
2021-08-31
태초에하느님이 의자를 만들 때그 곁을 달려가던말의 영혼을 불어 넣었다목뼈를 곧게 펴고먼 곳을 바라보는 자세에안장을 얹은 것도하느님의 전직인 목수였다사람들이목뼈에 등을 기대고 돌아앉을 때의자는혼이 떠난 사물에 지나지 않았다아이들이가끔씩 거꾸로 앉아 소리칠 때온 몸을 부르르 떨며의자에 깃든 말의 영혼은 눈을 뜬다그때마다어디선가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 들려온다아이들은 사물을 그 사물의 기능으로 판단하지 않고 자유로운 놀이의 대상으로 전환시킨다. 나아가 아이들은 놀이 속에서 발동되는 상상력에 따라 그 사물과 자유로이 즐거우면서도 내밀한 관계를 맺는다. 시인은 이러한 아이의 상상력을 이어 받아 사물들이 살아 있는 동물-위의 시에서는 말-로 변신할 수 있음을 포착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물의 영혼 속에 스며들어 있는 생생한 신성을 불러내는 데 성공한다. 문학평론가
2021-08-30
가까운 이의 부고를 받고 돌아서는데죽음의 얼굴이 보였다엄마를 데리고 갔던 자여서안부라도 물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중략)엄마는 파란만장,전생의 빗장을 꼭꼭 걸어 잠갔을지도모르는 엄마를 불문율에 부쳐주고 싶은 것이다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는 만날 수도 없는엄마는 비행기,엄마는 여객선,엄마는 기차….기차만 보면 맹목적으로 손을 흔들며 달려가는 아이처럼이런 날은 아무한테나 마음이 달려간다(중략)엄마를 떠올린다는 것은폭설을 맞으며 소실점 밖까지 배웅을 가는 일만 같아서여름 한낮이 문득 춥다죽음이 데려간 ‘엄마’를 떠올린다는 일은 “만날 수 없는” 존재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일이다. ‘엄마’를 붙잡으려고 하면, ‘엄마’는 이미 “소실점 밖”에 있는 비행기나 여객선, 기차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엄마’를 떠올리면서 시인은 아이의 마음으로 되돌아간다. 시인은 아이가 되어 그리운 ‘엄마’를 떠올리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그 떠올림은 “여름 한낮”도 춥게 보내야 하는 시간을 가져오지만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1-08-29
아마 동쪽에서 왔을 것이다저 울음은무릎을 꺾어 가면서까지 온전하게제 등을 내어주는 늙은 낙타의 순종은걷고 걸어도 사막꿈속에서도 사막자고 나도 사막일 것이다일찍이 깃들지 못한 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현기증 나는 증발이 사방에 펼쳐져 있고아직 도착되지 않은 내일이성긴 가루가 되어 발가락 사이를 더 넓게 벌려 놓았다움푹 팬 기억을 더욱 구부려 울음을 새겨 넣는 일은바람이 시키는 일일까(중략)위의 시에 따르면 삶은 “걷고 걸어도”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막이다. 사막의 삶에서 펼쳐지는 “현기증 나는 증발”로 “일찍이 깃들지 못한 나무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 시시각각 나타나고 사라지는 사막의 시간에서 시인은 “움푹 팬 기억을 더욱 구부려 울음을 새겨 넣는”다. 이 새겨 넣기 작업이 바로 시 쓰기일 터, 이에 따르면 시란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허공에 새긴 울음이다. 문학평론가
2021-08-26
소식이 깜깜해 달에게로 향한다(….)달에 기댄 날들이 닫힌 맨홀처럼 될까그 달에서 다른 달이 뜨는데,살지도 죽지도 않을 거라던 달 하나 사라진다사막을 괴는 푸른 달 그늘에 누각을 지었다는돈황 월아천먼 곳을 동경하는 나무가 새를 날리던 그곳모래에 묻힌 삼 층 누각에서 내려다본 월아천은그믐달,잘려 나간 손톱이다후미진 방을 전설이 비추고훗날 모래무덤을 파면 작고 환한 달들이 있을까참빗 닮은 그믐달이 흙먼지 빗어 내리는부분월식(….)사막 한 가운데 기적적으로 생겨난 ‘그믐달’ 모양의 호수, ‘월아천’. ‘월아천’은 시인의 사무치는 그리움이 모여 사막 위에 새로이 탄생한 달이다. 그것은 당신을 잃어 사막이 되어버린 삶에서 기적 같이 탄생한 사랑이다. 시인은 그 ‘월아천’ 밑에 “작과 환한 달들이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위의 시는 지상의 삶이 사막으로 변하고 있는 현실에서 사랑이 돋아나는 마음을 지상의 달인 ‘월아천’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1-08-25
밤은 단단하다 낮부터 숨겨둔 이야기들 입안에서 깔깔하다 분명 자신의 그림자를 그림으로 남겨둔 고대의 풍습이 남아 있을 법도 하건만 말랑한 뉠 자리가 나온 이후로, 자리는 온갖 허물들의 지층만 쌓아 올린다 (….) 누워 있던 자리, 잊었던 것은 종종 피 묻은 몸으로 나타난다 모든 화석은 욕창을 앓는다 요컨대 뼈저림의 시작, 끄덕대며 기웃하며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내 성체(成體)는 석탄기나 데본기의 어느 지층에서 발굴될 듯하다 (….) 훌훌 불며 검붉은 물을 마시는 시간, 詩는 그때쯤 혀끝에 달라붙는 것 같다우혁 시인에게 꿈꾸기란 피투성이 몸이 되는 것, 그 몸으로 얼룩진 며칠을 보내면서 “욕창을 앓는” 화석이 되는 일이다. 그 화석에 “오래 붙어 있던 허물들”을 털어낼 때 피투성이 몸의 속살이 드러나고, 그 살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물을 마시는 시간”을 갖게 되면 시가 그의 “혀끝에 달라붙”기 시작한다. 위의 시는 상처의 시간이 새겨진 내면의 화석을 발굴할 때 비로소 시가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1-08-24
개와 강아지는나쁜 놈과 착한 놈만큼의 거리다낮과 밤만큼이나 멀고도 가까운 사이욕과 칭찬만큼이나 적대적인 관계개는 부정어의 접두사강아지는 사랑의 대명사천한 것은 개자식이나 손주처럼 귀한 것은 강아지세상의 모든 강아지는개를 빌려 세상에 나왔고세상의 모든 개들도강아지를 거쳐서 왔다밤이 낮을 품고 낮이 밤을 품듯우리는 하나다비틀비틀 취객 하나가 내 옆을 스치며“개새끼”하고 지나간다불교의 ‘불이론’에 따르면 낮이 밤을 품고 밤이 낮을 품고 있듯이 상반되어 보이는 두 사물이나 상태는 ‘불이(不二)’다. 강아지는 개를 통해 태어났고 개는 “강아지를 거쳐서 왔다.” 그러니 취객이 시인에게 던진 ‘개새끼’라는 욕에 대해 시인은 개의치 않는다. ‘개새끼’는 욕이지만 사실 강아지를 지칭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개새끼’라는 말 자체가 ‘불이론’을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문학평론가
2021-08-23
푸르디푸른 종이는 구겨지지 않는다구겨지지 않으면 종이가 아니다구겨지지도 않고 접혀지지도 않는 것이하늘에 펼쳐져 있다새들은 시간을 가로질러 나는 법을 모른다아무도 새들에게 천문을 가르치지 않는다아는 것이 없으므로 나는 것도 자유롭다(….)누가 하늘 끝에 별들을 식자(植字)해 놓았나최고의 천문서는 점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가장 멀고 깊은 것은 마음 밖에 있는 것나는 어둠을 더듬어 당신을 읽는다당신의 푸르디푸른 눈빛을 뚫어야만구김살 없는 죽음에 도달하리라이 무람한 천기를 아는 듯 모르는 듯새들은 밤에도 점자를 남기며 날아간다저 하늘에 새겨진 ‘천문-당신’을 사랑하는 애인이라고 읽어본다면, 당신은 천문이 써진 푸르디푸른 하늘을 아득하게 펼쳐내고 있는 우주다. 애인의 영혼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을 우주. 그렇다면 위의 시는 당신의 영혼 속 멀고 깊은 지점에 도달하고 죽고자 한다는, 당신을 향한 기막힌 사랑을 펼치고 있는 일종의 연애시다. 위의 시에서 느끼게 되는 아득한 아름다움은 그러한 사랑의 절절함과 관련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08-22
연안으로 가 봅시다 연안으로 밀려오는 너를 보러 나는 연안으로 건너가 봅니다 너를 마주한 나를 만나러 연안으로 나를 흘러가 봅니다 네게 잠들기 직전이라고 말해 주러그런 내게 너는 물을 밀고 땅을 밀었다고 합니다 밀다가 놓쳤다고 합니다 밀려오는 중에 갈 곳을 잃었다고 합니다 나는 그런 네게 사이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멀어져서너무 멀어져 버렸다고 그러나 나를 흘러가라고 말합니다 너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가 잠들어 있다고 말합니다‘연안’은 실제적인 공간이 아니라 마음 속 공간일 터, 물과 땅이 맞닿은 경계지점인 연안에서 강물을 통해 “나를 흘러가”고 너는 밀려온다. “나를 흘러”간다는 말은 비문이지만, 시인은 이 비문을 통해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는 어떤 어긋남, 사랑의 실패를 감지하게 되는데, 이 정체를 포착하기 힘든 슬픔을 느끼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위의 시의 매력이겠다. 문학평론가
2021-08-19
세계의 분주한 노동이 시작되었는데 당신은 잠을 자고 있네. 아이들이 겁먹은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지하도의 행인들이 발로 툭툭 차고 가네눈을 떴다 감아요, 아가씨여그것은 오래된 시인의 주문 같네(….)두꺼운 잠의 녹색 담요 귀까지 덮어쓰고눈을 감았다 떠요고집 센 침묵의 아가씨여그것은 어떤 세계의 한숨일까, 어떤 순간의 향기일까. 영원히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당신은 눈을 뜨고,허공의 음부에서태어나는 최초의 비명처럼당신의 완고한 그림자가 벌떡 일어나미친 듯 춤추며 모퉁이 저편으로 달려갈 때김수영은 ‘사랑의 변주곡’에서 역사적인 혁명들이 창출했던 기술이 한국의 일상에 스며들면서 일상의 삶을 사랑으로 변화시키기를 요청했다. 이기성 시인은 다시 혁명의 기술이 창출되기를 원한다. 마지막 연은 혁명이 일어나는 순간을 이미지화 한다. 이에 따르면 혁명은 허공에서 최초로 벌떡 일어나는 것, 광기를 머금은 강렬한 순간이자 예측할 수 없는 축제의 춤과 같은 순간이 혁명이 도래할 때의 특성이다. 문학평론가
2021-08-18
(….)내 오래된 침대 위에 고인 흉한 냄새들이여 너에게 입 맞추는 동안 검은 잇몸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사람의 반대편에서 괴사한 공중이 온통 얼룩져내리고(….)죽은 성기들을 밟고 흰 계절이 온다 너의 입술이 열려 이 밤 가득 썩은 목련들로 낭자해질 때 갓 태어난 시체 위로 내려앉는 눈송이가 자신의 온도를 모르듯이순간들 사이에 거처를 마련하고 사라지는 방들을 내어주면 상한 달 무리들 일제히 쏟아져 들어와 도사리는 저 검고 깊은 아가리 속위의 시의 화자는 관능적인 접촉을 통해 타인과 자신의 싱싱한 생명을 느껴보고 싶지만, 그가 감지하게 되는 것은 죽음이다. ‘너’와의 관능적인 사랑은 죽음의 풍경을 펼쳐놓는다. 그 풍경의 아름다움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현란하고, 가없이 처연하기도 하다. 시인은 관능적인 사랑의 불가능성에서 빚어진 슬픔 속에서, ‘너’와의 접촉을 통해 떠올리게 된 이미지들을 섬세하고 치밀한 상상력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1-08-17
(….)불을 끄고 눈마저 감아야대낮에 잃은 길도 찾아낼 수 있다지기나긴 깜깜 어둠 깊고 깊은 캄캄 밑바닥에서나만이 나의 길인 것을나만이 나의 미래인 것을어둠만이 촛불을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을찾은 길을 잃지 않으려면여름도 겨울보다 추워야 한다는 것을눈발이 그쳤다밤중도 늙으면 새벽이 되지만만년을 늙어도 터럭 한 올 휠 수 없다섣달 그믐밤 언 가지를 체온으로 녹이는 도래까마귀목청 한 번 떨치면 반경 600리까지 몸서리치는 고독영험과 고독과 숭고함의 길을 가는 사제로서 전령사로서밤과 겨울의 검은 치마 시인으로서선사 이래 백설보다 순결한 검은 세계를 살며.이 시에 따르면 시인은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자신이 살아갈 삶의 장소로 선택하고 내면의 비밀을 까마귀처럼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유안진 시인은 이러한 시인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도래까마귀’에서 찾아내면서, 그 이미지를 “영험과 고독과 숭고함의 길을 가는 사제”라는 이미지로 승화시킨다. 그럼으로써 시인의 길은 “백설보다 순결한 검은 세계를” 사는 길이라는 역설적인 진실을 표명한다. 이성혁 문학평론가
2021-08-16
다른 곳을 마다하고저 소나무는 왜 벼랑 끝에 서 있을까뿌리 절반을 아예허공에 박아두고 있다절벽으로부터한 걸음 더절벽,가지 위에 커다란 둥지가 걸려 있다저곳에 사는 낭떠러지 새는격랑의 허공에두근거리는 나무의 오랜심장을 올려놓고누구도 꺼내가지 못할 알을추락하면서 낳는다저 “벼랑 끝에 서 있”는 소나무는 “격랑의 허공”에 “뿌리 절반을 아예 박아두고” 아슬아슬하게 추락의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 이 소나무 가지 위-“격랑의 허공”-에 둥지를 만들어 사는 낭떠러지 새는 허공을 가로질러 추락하면서 알을 낳는다. 이 알은 추락의 위험을 감내하며 격정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이가 남겨 놓게 될 삶의 어떤 핵심을 이미지화 한다. 그 “누구도 꺼내가지 못할” 삶의 핵심을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1-08-12
바람의 페달을 밟나봐아득하게 울리는 풍금소리.당신이 떠나고 더욱 멀어진 골짜기 언덕으로눈은 우리가 알던 모든 것을 파묻고 녹아 흐르네.맹렬하게 사라지는 희디흰 빛 속에갈기를 세우고 내달리는 물줄기의 계절감.떨지 않고 울지 않고침묵으로 닮아가는 돌멩이의 마음가짐으로식탁보에 싸서 흘려보내던 슬픔을 기억해.떨리는 손끝으로 빚어낸 그늘만큼다시 숲을 키우는 꽃 덤불 볼까.(….)사랑하는 당신이 ‘나’를 떠나야만 했을 때,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 당신이 떠난 깊은 밤일수록 당신 눈동자는 ‘마지막’으로 삶을 지탱하는 흰 뼈처럼 빛난다. 슬픔의 거센 물살은 그 뼈마저 부서뜨릴지 모르지만, 그럴 때에도 당신 눈동자는 더욱 빛나며 밤을 지탱할 것이다. 당신이 떠났을 때 사랑은 더욱 단단해진다는 것을, 위의 시는 이렇듯 선명하면서도 아득하게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1-08-11
어느 착한 손이 있어 나에게 이렇게사과 한 쪽을 내놓은 것인가아침 식탁에 한 접시 잘 깎은 사과가 놓여 있다몇 번 오가다 봐둔 식당에 다녀오면서언덕 아래 노점에서 사온 것이었다(중략)국광도 아오리도 아닌아무렇게나 비탈에서 자란 조그만 사과였다그래도 오던 길에 원숭이들에게 빼앗길지도 모르기에품 안에 꼭 싸안고 왔다(중략)아침이 밝기도 전에 원숭이들이 다 가져갔다빼앗기지 않으려고 가슴에 품었던 것들을 밤새 잃었다한갓 보잘것없는 것들만오래도록 붙들고 있었는지 모른다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나에게 말간 사과 한 쪽을 내놓고 있다다 늦은 아침에 어느 착한 손이 있어시인은 저기 말갛게 내놓인 잘 깍은 사과 한쪽에서 “어느 착한 손”을 찾아낸다. ‘원숭이’에게 삶의 진실을 빼앗긴 현실에서도, 사과 한 쪽을 ‘나’에게 내밀면서 기적처럼 어느 순간 나타나는, 어딘가에 숨어 있던 착한 손이 있다. 지금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맞잡을 수 있는 당신의 손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기에, 이렇듯 우리는 타인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08-10
옆집엔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다/ 상관없는 일들이 계속 나의 초인종을 누른다/ 용건도 없는 빈손이 찾아든다궤도를 이탈해 서로를 밀어내지만,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중력에 굴복하는/ 이름도 쓸모도 없는 행성 같은 이웃들이를 테면 옆집 사람의 감정사이사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다정한 말이 될 때/ 거리를 회복할 수 있을만한 몇 종류의 안부도 희박하다/ 지나치게 맑아 할 말이 없는 오늘 날씨처럼(중략)문을 열고 밖에 나서자/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는 옆집/ 고장 난 나침반이 돌아가기 시작한다.위의 시는 이웃이 있긴 있지만, 실상은 부재하는 현실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물론 이는 이웃과 물리적 거리가 멀다는 의미가 아니라 심리적·감정적인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저 이웃 아닌 이웃의 존재가 시인의 의식의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며 자극하면서, 어떤 위기감을 전달하는 동시에 의식의 문을 열 것을 종용한다. 인간관계의 “고장 난 나침반이 돌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1-08-09
옆집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왔다. 새로 생긴 대형마트 앞에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사람답게 살기는 어려운 법이다. 창가에 놓인 책들이 바래져간다. 책들 사이에서 벌레들이 기어 나온다. 그는 여전히 울고 있겠지만, 악은 갈수록 평범해져간다. 베란다 한 귀퉁이 수년간 버려둔 화분에서 알 수 없는 잡초들이 올라온다. 잎과 잎 사이에 거미가 집을 만들고 있다. 평범해서는 사람다울 수 없고, 나는 너무 쓰잘 데 없는 것들만 읽고 써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가족들이 내가 쓴 글들 읽을까봐 두렵다. (중략) 이 문장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이 문장만이 내가 등 돌리고 누울 유일한 곳일까.우리는 타인의 슬픔에 전혀 젖지 않는 건조한 삶을 살아가며, 그렇게 우리는 평범해져간다.(악의 평범성) 시인은 “사람다울 수 없”는 평범함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벌레를 키우고 거미집을 만든다.(시 쓰기) 그러나 시인은 이웃이 고통 받는 실재와 자신의 문장과의 거리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시 쓰기의 의미에 대해 의심하고 번민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의 시 쓰기는 저 실재와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08-08
그는 지방 소도시 관현악단의 만년 첼로 객원연주자언제나 주연들 뒤에서 희미한 반주를 하지한번도 자신만의 서치라이트 안에 서본 적 없는 남자아침에 홀로 먹은 토스트 조각이 도진 위장염을 찔러도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한 끼의 빵과 월세와먼 시골에서 시든 사과를 헤아리고 있을 노모를 위해주어진 선로를 왕복하지(중략)그는 오늘 밤 탈선을 꿈꾼다네나비넥타이 대신두 개의 경쾌한 호주머니가 달린 조끼를 걸치고코발트빛 오토바이로 갈아탈 작정이네(중략)2연에서 전개되는 객원연주자의 꿈에서 그는 ‘주어진 선로’로부터 경쾌하게 탈선한다. 1연이 보여주는 꽉 막힌 현실과 대비되는 이 쾌활한 꿈은 다만 꿈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꿈꾸기조차 포기한다면 삶은 메마른 생존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결국은 세상의 폭력에 철저히 굴복하게 될 것이다. 꿈은 사람을 기계의 한 부품으로 취급하여 소외시키는 세상으로부터 적어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다. 문학평론가
2021-08-05
사상 초유의 폭염 속에서도여기저기에서 부고가 날아든다사방이 죽음으로 가동된 장례식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고인을 향해 마지막 절을 올리고고인이 남긴 추억의 외투를 황급히 뿌리치고 부랴부랴 밖으로 삐져나온다사방이 죽음이다오래오래 절친이 되고 싶었던 이도 지난달에 죽었다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늘 흠모했던 분도 어느 날 지상에서 사라졌다스스로 목숨을 끊고, 살해당하고, 강으로, 바다로 뛰어들고지병으로, 교통사고로, 갑자기 심장마비로, 전쟁으로, 기아로이 땅을 떠나고, 떠나가고 있다(중략)시인은 지인의 부고를 들으면서 지금 이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죽음의 범람-또는 폭염처럼 견딜 수 없도록 내리쬐는 죽음들-에 대한 생각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저 죽음들에 대해 속수무책인 삶, 다만 죽음의 폭염 속에서 에어컨만 쉬지 않고 틀어대는 것과 같은 악순환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시에 따르면 그렇게 생존해가는 ‘우리’는 수치스러움을 느끼며 서로를 외면하고 “철가면을 뒤집어 쓴” 채 살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1-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