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은 나도 몰래 죽은 나무를 만지고 있었다죽은 나무는 여인의 몸처럼 부드러웠으나내 손이 닿자마자 앗 소롯해지는 것이었다그녀의 몸속에서는 예쁜 벌레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나는 나도 모르게 은밀한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죽은 나무가 죽은 채로 서 있어야 하는 이유는사랑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이파리와 꽃과 열매와 헤어졌다 해도죽은 나무는 온종일 서서 기다리다 죽은 나무는기다림이 벌레로 태어나 나비가 될 때까지내가 죽어도 당신을 잊을 수 없음을 알 때까지죽은 나무는 죽은 나무가 아니었다 (….)불꽃이란 무엇인가. 솟아오르는 생명이 지글거리고 있는 것, 그것이 불꽃일 것이다. 시인은 저 부드럽게 죽어 있은 나무속에 마치 불꽃처럼 ‘예쁜 벌레들이 꼬물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태초의 식물인 이끼처럼 나비로 되는 새로운 삶을 기다리고 있다. 그 신생의 잠재성이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누군가를 향한 ‘기다림’-사랑-이 “나무의 살 속에서” 꼬물거리는 벌레를 낳았으므로. 문학평론가
2021-12-29
나무는 연주를 마칠 때마다 몸 속에하나씩 나이테를 그린다나무 몸 속에 매미와 뻐꾸기태양과 별의 숙명이 머물고나무는 명상한다. 정적과 혼돈 뒤섞인끝없는 생명에 대하여 한 알 과일을 먹은 뒤 오래도록우리 입 속에 남는 과일의 향연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과즙이여나무 악기의 음률이여오래도록 행복해지는 우리여나무 악기의 빛, 나무 악기의 어둠허공과 영혼을 소진하고, 시간을 금빛으로 소진하고이 세계의 생명으로 스며드는 침묵의 탄주여대지로부터 하늘로 치솟는 악기의 소용돌이여나무가 자기의 온몸으로 일하여 맺은 한 알 과일 안에는 온 우주의 드라마가 들어가 있다. 그 과일이 선사하는 감미로운 미각은 나무가 “허공과 영혼을 소진”하면서 온몸으로 연주하는 음악의 음률이다. 그 달디 단 음악에 ‘우리’는 “오래도록 행복해”진다.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별의 숙명”이 바로 그 우주의 음악일 터, 우리는 과즙을 먹으며 그 음악에 참여하면서 하늘로 상승하고 별과 태양을 맛본다. 문학평론가
2021-12-28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아닐진대그것은 경이로운 것단단한 보습으로 파낼 수 없는날카로운 환도로도 자를 수 없는아, 불이(不二)의 운명바람이 지나가면서 시인의 몸과 맞닿은 ‘바람의 옷깃’은 “파낼 수 없”고 “자를 수 없는” ‘불이의 운명’을 시인으로 하여금 깨닫게 만든다. 모든 존재자들이 운명적으로 둘이 아니라는 진리는 경이롭다. 이러한 경이로운 깨달음은 만물에 대해 마음을 쏟고 세심하게 바라보며 그 만물의 생명력이 펼치는 장 속에 자신을 놓을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만물 하나하나의 생명이 모두 자신의 생명과 공존하고 있으며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1-12-27
호박꽃도 밤에는 잠을 잔다.한 번도 옷 벗지 않고 깊은 잠을 잔다.어둠을 이불 삼아 별들의 자장가를 듣는다.그 잠 속으로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지.세상의 어떤 유혹으로도 그 방문 열지 못하고두드리다가 흔들다가 제 풀에 지치고 말지.어떤 나비도 어떤 벌도 밤에는 제 집을 지킨다.어떤 바람도 깊은 밤에는 문패를 읽지 못하지.쓸쓸히 거리를 떠돌다가 존재도 없이 사라지고 말지.호박꽃은 밤이 되어야 꿈을 꾼다.밤새도록 꿈을 꾸어야 아침의 사랑이 시작된다.눈부신 사랑을 위하여 그 밤의 깊은 꿈은 아름답지.시에 따르면 밤의 호박꽃은 절대로 자신의 방을 열지 않는다. 꿈을 잘 꾸기 위해서. 호박꽃이 잠을 방해받지 않고 꿈꾸고자 하는 것은 “아침의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하여, 눈부신 사랑을 위해 꾸는 꿈이니, “그 밤의 깊은 꿈은 아름답”다. 위의 시의 호박꽃은 사물에 내재한 아름다움을 붙잡으려는 시인의 투시에 의해 얻게 된 시적 형상이다. 그 형상은 사랑의 꿈이 지닌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발산한다. 문학평론가
2021-12-26
접두어 ‘첫’은번번이 나를 명중시켜 왔지.과녁을 맞힌 화살의 깃이 그러하듯‘첫’ 것들은 떨림을 매달았고그들이 일으킨 소용돌이를키우거나 소멸시키는 것이성숙의 궤적이었네.얼굴 흐려진 어느 연령에선가더 이상 오지 않던 녀석들,주검인 양 존재 없더니긴 세월을 돌아 다시 날 흔드네.중년의 손가락이 다독이는경련의 눈두덩, 나를 관통한수많은 ‘첫’것들이 묻힌시인에게 중년이 오면서 새로운 ‘첫’것들은 ‘나’를 방문하지 않게 되었고 그의 마음에서 키워졌던 것들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하나 마음의 무덤 속에 묻힌 그것들은 어느 날 “긴 세월을 돌아 다시” 살아나고 젊은 시절의 ‘나’의 심장을 명중했던 ‘첫’것들처럼 ‘나’를 뒤흔든다. 무덤 속에서 ‘첫’것들이 부활하고자 들썩거리고 있음을 감지하면서 이 시인의 시작(詩作)은 이렇듯 새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2-23
대나무는 날지 못하는 새들의 영혼대숲은 날지 못하는 새 떼들의 망명지나라 없는 영혼처럼 대나무가 운다이미 뼛속을 다 비웠으니 곧 날아가리라지난여름에도 기대하였으나올해도 대숲에 와서 다시 새소리를 듣는다날지 못하는 새,망명지의 영혼,피리처럼,슬픈 피리 소리처럼,이미 뼛속을 다 비웠으나 날아가지 못한새소리를 듣는다. 대숲에 와서.대나무는 “날지 못하는 새”의 뼈이자 영혼이다. 그래서 대숲은 “날지 못하는 새 떼들의 망명지”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들이 내고 있는, “슬픈 피리 소리”와 같은 울음소리는 올해도 날지 못해 우는 ‘새소리’와 같다. 시인은 그 새소리가 바로 자신의 울음소리와 같다고 여긴다. 시인 역시 날고 싶어서 뼛속을 비웠으나, 저 대나무처럼 여전히 날지 못하고 있다. 하여, 그는 시를 쓰며 울고 있는 ‘대나무-새’다. 문학평론가
2021-12-22
늙은 아이가 소풍을 왔다땅에 엎드려 지문을 찍을 때마다둥글게 자라는 무덤다시 품어보겠다는 양다시 들어가겠다는 양엄마는 다시 배가 부르다위의 시에서 ‘엄마’의 무덤은 새로운 생명을 품는 엄마의 자궁이 된다. 즉 죽음의 공간이 새로운 탄생의 씨앗을 품는 것이다. 바로 “늙은 아이”인 시인 자신이 그 씨앗이다. ‘늙은 아이-시인’은 지문을 통해 엄마의 무덤에 연결되면서 무덤의 품에 안긴다. 그리하여 죽음의 방은 재생의 뱃속으로 변모한다. 다시 죽은 엄마의 “배가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시는 무덤에서도 존재할 모성의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 세상을 견뎌내려는 시인의 희구를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1-12-21
재건축 현장흙을 파헤치는 곳마다도난당했던 내 기억의 늑골이 발굴된다매립되었던 꿈의 모서리가 노출되고뾰족한 기억으로부터 물길이 치솟는다공사에 동원된 인부의 이름이 기록된 수첩과낱장의 설계도, 바람 섞인 햇살부러진 손톱과 핏방울이 말라있는 기초의 순장거대한 뿌리가 햇빛에 조명되는 시간은 짧다시인은 자신의 ‘기억’이 중장비에 의해 파헤쳐지는 현장에 서 있다. 그 현장을 보고 있는 시인은, 동시에 자신의 기억 역시도 파헤쳐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시인 내면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던 “거대한 뿌리가” 지상에 드러나는데, 그렇게 드러난 ‘기초’들이 조명되는 시간은 짧다. 하지만 시인은 그 다시 매립될 시인의 꿈과 기억으로 이루어진 삶의 뿌리들, 그 ‘기초들’을 포착하여 시화(詩化)하고자 한다. 문학평론가
2021-12-20
가난을 움켜쥐고 살았다(….)빈 박스와 폐지 따위가노파의 굽은 키를 기분 좋게 넘길 때나터무니없이 모자라 텅 빈 리어카조차 무거울 때면저울 눈금이 노파의 근심을 조절해왔다노파가 평생을 져 나른 궁핍그러나 궁핍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적은 없어 보였다리어카의 걸음을 힘들게 했던 궁핍의 무게 또한 얼마나 될까몸져눕게 된 노파는 리어카를 떠올리며, 서로가 실컷 끌어주고도서로에게 짐이 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신앙심이 한풀 꺾인 텅 빈 리어카마저맥없이 주저앉아혼자 일어서지 못한다“가난을 움켜쥐고” “궁핍을 평생 져” 날랐을 뿐인 저 노파에게는 자신의 노동과 항상 같이 했던 리어카가 삶의 유일한 동반자다. 그래서 리어카가 의인화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노파는 무거운 짐만 지게 했던 리어카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반면 리어카는 노파가 몸져눕게 되어 텅 빈 상태로 있게 되자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 신앙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맥없이 주저앉아” 버린다. 슬픈 엇갈림이다. 문학평론가
2021-12-19
저녁노을이/ 제 몸을 홀라당 태우고/ 사라져가듯이/ 죽을 때까지/ 뜨겁게 사랑하고 싶다황소바람 부는 겨울에도/ 가슴 한켠에/ 꽃망울 밀어 올리고/ 오래오래 속닥이고 싶다떠나야 할 때 오거든/망망대해에 배 한 척 띄우듯이/ 꽃잎 같은 목숨/ 가만히 가만히/ 허공 속에 뿌리게 하리라/ 그리하여/ 허공 속에서 노를 젓는 나비가 되어/ 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리라죽을 때까지 사랑하면서 사는 것, 그것은 노을처럼 “제 몸을 홀라당 태우고 사라”지면서 사는 삶이다. 그렇게 사랑으로 삶을 태우기 위한 불쏘시개가 시 아닐까. 시인은 시의 힘으로 중력을 이기고 꽃망울처럼 자신의 삶을 하늘로 밀어 올리게 될 것이다. 그의 삶이 사랑으로 다 소진되어 지상을 떠나게 될 때, 그는 비로소 중력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는 나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2021-12-16
겨우내 춥고 어두웠던 골방 창틈으로 누군가인기척도 없이 따스한 선물 밀어 넣고 간다햇살 택배다감사의 마음이 종일토록 눈부시다인기척도 없이 햇살을 선물하고 있는 세계. 햇살로 인해 그 방은 따스하고 밝게 변할 것이다. 춥고 어두웠던 골방은 시인의 마음이기도 할 터, 그러니 감사의 마음이 종일토록 눈부시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선물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세계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즉 시심(詩心)이 있어야 세계를 공짜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2-15
공짜였던 죽음이 언제부터 선불로 바뀌었나요?선불이 아니라, 아버님, 가족에 대한 사랑이에요.보장성과 수익성이 풍부한 사랑이요.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 견적 뽑으면 다 나와요.죽음에다 돈과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투자를 하고 나면어서 죽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해질 거예요.죽음은 ‘보장성’이 ‘풍부’하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죽기 때문이다. 삶을 선사받은 이라면 죽음 역시 공짜로 주어진다. 그런데 생명보험은 그 “공짜였던 죽음”을 선불로 바꾼다. 그가 죽었을 때 가족이 많은 돈-“보장성과 수익성이 풍부한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죽음에 미리 돈을 투자하는 생명보험. 위의 시는 사랑과 죽음까지 수치화하여 돈으로 환산하는 현대사회의 지독함을 통렬하게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1-12-14
역사는 처음부터 없었다고다 낡은 환상만 내다놓은 나무 의자들공허가 주인공처럼 앉아 있다.그 발치엔 먼 데서 온 파도의 시린 발자국들햇살 아래 쏟아낸 낱말들이실연처럼 쌓이고우우우 모래바람 우는 소리,먼저 도착한 누군가 휩쓸고 갔나 보다.바닷새들이 그들만의 기호로모래알마다에 발자국들 암호처럼 숨겨놓고 난다.낯선 기호의 문장들이 일파만파 책장처럼파도 소리로 펄럭이면일몰이 연신 그 기호를 시뻘겋게 염색한다.나무 의자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정동진역은 백지처럼 ‘공허’하다. 그 ‘공허-백지’ 위에는 낯선 기호로 엮인 문장들이 있다. 이 허허로운 풍경과 저 ‘흔적들-발자국들’로 이루어진 문장들이 서로 어울리면서 하나의 책이 만들어진다. 책장 펄럭이듯이 “일파만파” “파도 소리”를 내며 낯선 누군가가 여기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저 책의 ‘문장들’은, ‘일몰’에 의해 “시뻘겋게 염색”되는 농도 짙은 쓸쓸함을 불러일으킨다. 문학평론가
2021-12-13
모든 것은 한순간이다, 저 찰나를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도시의 지붕마다 물결 문양이 찍힌다 격자 창틀에햇살이 갇혀 격자로 쪼개진다 눈 없는 새들이 날아와모서리를 부리로 찍는다모든 건 환상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실이다- ‘기몽’ 2∼4연도시의 지붕마다 찍히는 ‘물결 문양’은 꿈의 파도가 이루어낸 형상들이다. 이 꿈의 파도 속에서 환상은 “격자로 쪼개”지는 햇살로, “모서리를 부리로 찍는” “눈 없는 새들”로 나타난다. 물결이 휩쓸며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이 꿈의 도시에서는 한순간인 찰나가 역사이며, 그 찰나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환상이 진실이다. 꿈의 물결이 출렁이는 이 세계를 기록하는 일이 바로 ‘기몽’이며, 이경교 시인의 시 쓰기다. 문학평론가
2021-12-12
동지를 나눠 먹고 밀린 월세만큼 키가 줄었습니다꺼낼 것 없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빼도 작은방 불빛은 커지지 않았습니다달팽이 껍질로 들어간 누이는 고드름처럼 느리게 울었습니다몸을 구부리는 게 익숙해져 얼굴도 무릎만큼 단단해졌습니다어둠이 길어 숨어있기 좋은 절기입니다일 년에 하루쯤은 갓 끓인 팥죽처럼 미워할 수 없는 맛으로 살고 싶었습니다새알심만큼 웃었던 동지가 지났습니다- ‘아픈 사람들’ 전문셋집에 살면서 긴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이 가난한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이 몸을 둥글게 말고 슬픔과 아픔, 그리고 서로에 대한 어떤 ‘미움’으로 단단해져간다. 하지만 이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같이 음식을 먹을 때가 있으니, 그때가 동지다. 이들은 이날엔 동그란 ‘새알심’이 들어 있을 동지 팥죽을 둘러앉아 먹으며 화해를 한다. 그래서 팥죽은 “미워할 수 없는 맛”을 가졌다. 문학평론가
2021-12-09
저마다 검은 속내를 감추고 있는 순대같이권선시장 어디쯤 한길로 닳아진 골목 있지숨이 끊어질 때까지 목줄을 잡고 있던입과 항문이 뱉어 낸 구부러진 거리마다비워 내고도 충만한 생애 입김이 서려 있네다만 터져 나오는 전생의 입구를 막고시작과 끝을 둥글게 포개는 몸피손발 없이 내장으로만 피어났다오래 만져 왔거나 많이 걸어온 것들의 식사휘청거리는 전·생·애를 건너가는고단했던 오장육부가 담긴 욕계 한 그릇꽉 찬 창자로 텅 빈 창자에 머물다 가네피가 내장이 되고 내장이 피가 되어삶은 삶이 한길에서 환생하는여기는 도솔천국민 간식인 순대에 대한 시적 인식을 보여주는 이 시는 “삶은 삶이 한길에서 환생하는”과 같은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언어유희를 통한 유머를 보여준다. 순대로부터 “손발 없이 내장으로만 피어났다”는 진술 역시 발랄한 시인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순대의 “시작과 끝을 둥글게 포개는 몸피”와 같이 삶이란 끝과 시작, 바깥과 안이 엉켜 있다는 역설적인 시적 인식이 돋보인다.문학평론가
2021-12-08
1월은 바싹 여위었다아침도 저녁도 아니다누군가 1월의 벌거벗은 미라들을 나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미라의 찬 몸을 두 팔로 안으면 가슴이 뛴다죽은 몸에서 강물 소리가 들린다여윈 몸에 커다란 구멍을 가진 나무와 사귄 적이 있다그의 구멍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으면죽은 별들이 칠흑에 빗금을 그으며 쏜살같이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1월의 찬바람에 떨며 말라가는 존재자들은 ‘벌거벗은’ 삶 그 자체를 드러낸다. 저 “바싹 여”윈, “벌거벗은 미라”와 같은 겨울나무 역시 그렇다. 시인은 이 나무의 죽은 몸을 “두 팔로 안”고는 그 나무 속 커다란 구멍 속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몸으로부터 지나간 강물 소리와 지나간 별들의 행적을 보게 되는 시적 순간을 맞이한다. 벌거벗은 타자를 포옹할 때 가슴 뛰는 신체적 변화와 함께 시는 발현될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1-12-07
마을 앞 개울도 한옥 뒤란의 대숲을 통째로 빼앗아 흐른다 그래도 그 집들은 그걸 돌려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싸운 다음에야 확인할 수 있는 평화, 개울물도 저희들끼리 부딪히고 엉켜 싸울지라도 넘어진 것들을 일으켜 세워 아랫마을로 향한다갑자기 장끼 한 마리가 논두렁 위로 날아간다 백자가 파삭 깨져버린다 깨지는 순간은 언제나 처연하다 아니 찬연하다 누구의 눈부셨던 시절도 나타나 어리둥절해 한다시인은 백자에 새겨진 그림을 보면서 자연과 예술의 경계가 사라진 경지를 발견한다. 대숲과 개울, 집 한 채가 적요하게 놓여 있는 마을이 새겨진 저 백자는 자연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언어를 전달한다. 백자에 새겨진 장끼도 진짜 장끼와 구분되지 않는 경지에 놓여 있다. 그래서 백자 바깥으로까지 날아갈 듯한 백자 속 장끼의 모습은 백자를 “파삭 깨”뜨리는 ‘처연’하면서 ‘찬연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2-06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강가로 나서고 없는 빈집도 한 땀,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이 시의 리듬은 밤에 보는 잔잔한 강물의 흐름처럼 고요히 어딘가에 스며들었다가 나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고요하게 흐르는 음악처럼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리듬을 통해 각각의 사물들은 서로 어우러지고 갈등 없이 공존한다. 강의 베갯머리에 수놓아진, 마을의 이 평온히 공존하는 사물들은 뒤척이는 강물을 편안하게 잠들게 하고, 강가 마을의 밤풍경은 시적인 무엇으로 승화된다. 문학평론가
2021-12-05
촛불도 없이 어떤 기적도 생각할 수 없이나는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그때 난 춥고 가난하였다 연신 파랗게 언 손을 비비느라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었다그런데 얼마나 손을 비비고 있었을까그때 정말 기적처럼 감싸쥔 촛불이 켜졌다주위에서 누가 그걸 보았다면, 여전히 내 손은 비어 있고 어둡게 보였겠지만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 있었다나는 무릎을 끓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시인은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서 촛불도 없는 제단에 나아가 기도를 올렸다. 기도는 시인도 놀랄 만큼 ‘기적처럼’ 이루어졌다. 시인 자신이 촛불이 되어버림으로써 그 기도는 달성되었던 것이다. 절실한 갈망은 시인 자신을 존재 변이시켜 갈망을 이루게 한다. 물론 그것은 ‘사실적’이지 않다. 팔이 양초로 변한다는 거짓말. 하지만 시의 세계에선 그 거짓말이 진실이 된다. 문학평론가
2021-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