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실금으로 갈라지고 있다구근이 사나워지고 있다바람에서 태어난 부리의 짓이다하나의 지평에서너머의 지평으로작년에 죽은 새들묘혈을 뚫어 다리를 세우고 있다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손을 향해팔색조 깃털이 날았다꽃의 허밍이 시작되었다“작년에 죽은 새들”이 봄에 재생하는 꽃처럼 묘혈 안에서 다시 “다리를 세우고 있”다. 새는 불사조처럼 시인 내면에 쌓인 지층을 갈라내며 땅 속으로부터 하늘로 떠오른다.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새는 저 “너머의 지평으로” 날아가려고 한다. 시를 쓴다는 일은 또 다른 지평으로 넘어가려는 새에 이끌려 사는 일, 그래서 이 시인의 시 쓰기는 자신의 삶을 “너머의 지평”으로 이행케 하는 일이다. 문학평론가
2021-11-03
발포비타민 아닌 구운 햇빛 알갱이를 달라는 건봄날의 주문까맣게 구운 손으로 은화를 구걸하는 이도 있다편의점 아줌마가 꺼내는 별모양 쿠키에는대추야자 씨앗을 닮은 초콜릿이 박혀있다강아지 콧등에서 하품이 구워진다간혹 밤의 라디오가 구워주는 음악편지가 빵 속보다 촉촉하다아줌마의 오븐바닥에 눌어붙기도 한다이 유리창은 젖은 것부터 먼저 구워낸다고빗방울 마른 얼룩이 불똥으로도 보인다고, 중얼거린다위의 시에 등장하는 편의점에서는 편의점 아줌마가 준 별모양의 쿠키도 공간의 환상적 변환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변환 속에서 놀랍게도 모든 것들이 구워지기 시작한다. 강아지의 하품뿐만 아니라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편지까지 말이다. 그곳에서 음악은 “오븐바닥에” 찐득하게 눌어붙는다. 이는 이 공간이 예술이 숙성하는 곳임을 의미하는 것일 터, 그래서 이곳은 시가 구워지는 장소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문학평론가
2021-11-02
서울역 뒷산에 아름다운 노을이 핀 적이 있습니다그때 당신은하얀 컬러를 목에 두르고 있던 소녀였습니다나무들은 없고 아파트만 언덕에 가득해능선과 하늘이 없어졌지만우리의 마음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겠지요그 능선의 길은 어린 날의 향기를 품고 있습니다도시를 내려다보며우리는 지금도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이 뒷산에서살아가고 있습니다다시 그 민둥산 언덕에 오월의 바람이 불면빼곡한 우리의 나이테는 그 능선을 노래하죠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살게 된 “서울역 뒷산”에는 예전에 존재했던 삶의 향기인 “우리의 마음”이 남아 있다. 그것은 그 도시 뒷산 능선을 걸으며 함께 소년소녀 시절을 살았던 ‘우리’ 세월의 체취다. 그 체취, “어린 시절의 향기”는 여전히 능선의 길에 배어 “빼곡한 우리의 나이테”가 되어준다. 그 나이테는 옛날 아름다운 시절을 노래하며 도시화가 삶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말소시킬 수 없음을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1-11-01
나보다 내 몸이 더 정직하다는 걸 알고부터나는 몸의 길로 따르기로 했다아직도 경험하지 않은 ‘첫’ 이 너무 많은몸과 마음의 접경지대내 몸을 빠져나간 달, 그림자만 남아폐경이 배경으로 보이는내 몸의 비무장지대나 다시 월경을 꿈꾼다- ‘越境하는 밤’ 전문‘첫’이 일어난 사건은 새로운 일들을 불러일으켜 다른 삶이 도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다. 하여, ‘첫’이 일어난 “몸과 마음의 접경지대”-‘비무장지대’-에서 시인은 “아직도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꿈을 꾼다. 그에게 첫 폐경은 “그림자만 남”은 ‘배경’이 되어 (나이의) 경계를 넘어가는 ‘월경(越境)’을 꿈꾸도록 이끄는 사건이다. 시인은 이렇듯 폐경 이후에도 더욱 새로운 삶을 꿈꾸리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문학평론가
2021-10-31
(전 략)피가 고인 스테이크를 포크와 나이프로 써는 순간에도 오는지난밤 먹다 남은 치킨 조각을 한 입 물고 등교하는아이들과 함께 게으른 식탁을 뛰어넘어가는난민의 가방 속에 화약 냄새와 함께 머무는지극한 평화, 지독한 평화언젠가 사진에서 보았던 마더 테레사의 눈빛을 닮은평화는 흰 손이 아니라 검은 손, 애타는 검정클로이를 연주하는 열대 지방 사람의 검은 손에서피어나던 꽃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검정색은 통상적으로 죽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시에서 검정색은 평화를 상징하는 색으로 전환된다. 평화는 평온한 것만이 아니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고통 속에서 평화는 온다. 평화는 고요하면서도 뜨거운, 소용돌이 속의 태풍의 눈처럼 강렬한 것이다. “클로이를 연주하는 열대 지방 사람의 검은 손”처럼 고난을 딛고 피어오르는 예술에서, 그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를 꽃에서 평화는 자신을 검게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2021-10-28
밭을 매다 보면미처 파내지 못한 돌멩이를 만날 때가 있다언젠가 영역 밖으로 밀려날 운명임을 알면서도흙의 멱살 꽉 그러쥔 채 놓아주지 않는다겉으로 드러낸 부분만으로도얼마나 환한 상처인지 알 수 있지만어둔 햇빛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파면 팔수록 더 깊이 제 모습 드러내는,내 가슴에도 단단히 박힌 상처 하나 있다늦은 밤 취기에도 풀어 놓지 못하는, 그래서 더사랑은 재미없는 게임이었을 게다(….)돌멩이 하나 파낸 자리밭의 배꼽 같다위의 시에서 실패한 사랑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이는 상처는 밭에 박혀 있는 돌멩이로 비유된다. 그러니 밭은 시인의 마음을 비유한다. 그래서 “돌멩이 하나 파낸 자리”가 “밭의 배꼽 같다”는 진술은 상처를 파낸 자리가 마음의 배꼽 같다는 말이겠다. 어머니의 탯줄이 잘린 흔적이 배꼽이니, 시인에게 마음의 어머니는 상처인 것. 상처가 시인의 마음을 어머니처럼 키웠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0-27
나뭇잎은 나무의 고통이다. 나무는 뿌리에서 길어 올린 눈물의 유전자를 가지마다 매달린 익명의 이파리들에게 은밀히 주사한다. 실핏줄 속을 흐르는 붉은피톨들, 하지만 쉽사리 들키지 않게, 고통의 무늬는 뒷면에 양각으로 맺힌다. 나뭇잎은, 저려오는 아픔을 참아가며 여름 내내 써내려간 문장들. 가을이면 나무는, 더는 참지 못하고 나뭇잎을 붙잡았던 손을 놓아버리지만, 온 산이 핏빛으로 물드는 순간에도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는다.나무에게 나뭇잎은 기억 같은 것 아니었을까? 결국 소멸할 운명에 처한 사랑의 아픈 기억…. 그런데 나뭇잎은 나무의 시이기도 하다. 뒷면에 “고통의 무늬”가 “양각으로 맺”히는 고통의 시. 그래서 탈고 직전 단풍 든 나뭇잎은 ‘핏빛’이며, 그렇게 핏빛 시를 떨어뜨리는 나무는 굳건한 시인이다.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사한 기억-시-을 고통스럽게 떠나보내면서도, 나무는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0-26
하는 수가 없어 나는배를 가른다가른 배를 마리나 앞에 열어 보인다 마리나는 토한다하는 수가 없어 나는 갈비뼈를 톱질한다섬벅섬벅 뛰는 심장을꺼내마리나의 손에 쥐여 준다 마리나는 기절한다달은 여태 푸르고 마리나는 깨어나지 않고 여태 나는살아 있다 등 뒤에서 목을쳐 주기로 한당신은언제 오는가?이 시의 ‘마리나’를 시의 독자로 치환하여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화자의 자해 행위는 시 쓰기를 의미하며, 위의 시는 화자 자신의 시 쓰기가 시의 독자에게 이해되거나 사랑받지 못했다는 우울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해로는 자신의 목숨을 끊지 못하는 법, 목을 쳐줄 당신이 시인의 시 쓰기를 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당신은 나타나지 않고 있고, 시인은 시 쓰기를 계속해나간다. 문학평론가
2021-10-25
풀을 베다가몸통 반이 날아간맹꽁이를 발견했다무릎을 꿇고수풀을 뒤져달아난 살점 반을 찾았다무릎을 꿇고민들레 옆에 구덩이를 파고냉이 잎을 깔았다비로소 제자리에 놓인 살점들박새가 둥지를 허물고 있었다- ‘숲은 왜 오월을’ 전문“몸통 반이 날아간” 맹꽁이의 시신을 발견한 시의 화자는 구덩이를 파서 냉이 잎을 깔고 그 위에 살점 반을 찾아 시신을 수습해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숙연만 마음으로 애도를 표한다. 어떤 존재의 죽음이든지 모든 죽음에 대해서는 책임감과 엄숙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박새가 둥지를 허물고 있었”던 것도 맹꽁이의 시신 위에 덮을 것을 마련하여 그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아닐까./문학평론가
2021-10-24
허공에 거적을 펴고시를 써온 것이 몇 년인가햇빛 오고 바람 불어 좋은 날새로 핀 벚꽃꽃눈보라 와작히 내리는데내 눈에선 자꼬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이는 지상에 발을 대고걸어가는 때문죽는 날까지도 그러리라시인이 거적을 펴는 허공은 백지 같은 공간이다. 백지는 비어 있지만 바탕이 실재해서 그곳에 시를 써넣을 수 있다. 그러나 허공은 지상의 현실이 아니다. 중력의 지배를 받는 지상은 마음대로 상상력을 따라 날아갈 수 없는 곳이다. 아름다우나 허망하게 지는 벚꽃이 지상과 허공 사이에서 살아가는 시인을 아프게 한다. 허공에 쓰는 시와 지상의 현실과의 낙차 때문에 시인은 눈물을 흘린다. 문학평론가
2021-10-21
어제부터 가게는 조금도 들썩이지 않았다저녁 무렵 길고양이 한 마리 어김없이숯불바베큐집 통유리 문 앞에 기웃거린다먹다 남은 닭 뼈의 추려낸 살신문지 깔아놓은 차 밑으로 가져다 놓던두툼한 안경렌즈를 낀 그녀의 둥그런 등이며칠째 보이지 않는다(….)앞발을 납죽이 뻗어 기다림을 펴본다통유리 문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한참을 유리문에 비쳐 본 후옆 담을 넘어 주차된 차 밑으로그림자를 말아 넣는다닫힌 문 앞喪中그 위로 어둠이 지나간다자신에게 밥을 주던 숯불바베큐집 주인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가게 문 앞에서 한참 그 주인을 기다리는 길고양이의 모습이 안쓰럽고 서글프다. 고양이는 문 앞에 쓰인 ‘喪中’이라는 글자를 알지 못하는 ‘문맹’. 고양이는 닭 뼈에서 추려낸 살을 주던 여주인의 “둥그런 등”을 보기 위해 가게 문 앞을 계속 기웃거릴 것이다. 길고양이의 안쓰러운 처지에까지 미치는 시인의 따스한 눈길이 느껴지는 시다. 문학평론가
2021-10-20
나는 칠월의 부드러움에 약하다부드러운 그의 부름에 안전선 앞에 얌전히 서 있다서로를 쓰러뜨려 포옹한 채 죽어 가고 싶은백주(白晝)의 결투 피하지 않을 것이다그가 나를 숨겨 두기 알맞은 크기로 접을 것이다부드럽게 접혀 있는 하얀 손수건처럼 녹아내리는슬픔을 완벽하게 빨아들이려는 자세로건너편 햇빛 속에 서 있는 그의 미소가 따듯하다직진하려는 버스가 출렁거린다 차창 밖에는휘파람을 부는 도시의 새들이 날아가고‘그’는 부드럽게 ‘나’를 부르며 길 ‘건너편’에 있다. ‘그’는 시인에게 따스한 미소를 건네준다. 거리에 서 있는 그의 존재로 인해 도시 공간은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버스가 출렁거”리고 “도시의 새들”은 휘파람을 불며 날아가는 것이다. 도시가 신생의 조짐으로 활기차다. ‘그’의 부름을 듣고 세상이 아름다움으로 상승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기에, 시인은 격렬한 죽음 충동 속에서도 삶의 의욕을 버리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2021-10-19
옷에 다른 사람의 손이 닿을 때옷은 날아간다꽁지를 까닥거리다 연기가 된다옷은 끊임없이 시중을 원한다그래서 치맛자락이 길거나 자잘한 무늬로 틈을 보인다나는 벗겨주는 시중보다입혀주는 시중이 더 좋았다옷들은 저마다 기념일을 갖고 있었다아주 작은 옷에서 내가 나왔다그곳을 빠져나왔다고 할까그 옷을 벗었다고 할까점점 작아진 옷은 커버린 나를 잡고 칭얼거렸다옷장을 열어놓으면옷들은 자꾸 날아가려 한다위의 시에서 ‘옷’은 ‘나’를 치장하기 위한 한갓 도구가 아니다. 아니 마치 옷을 위해 ‘나’가 존재하는 것 같기까지 하다. 안은숙 시인은 사물에 대한 투시와 시적 사유를 통해 저 ‘옷’의 영혼을 인식하고, ‘옷’이 품고 있는 주체적인 욕망-날고자 하는-을 형상화했다. 그런데 주체의 욕망은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 저 ‘옷’의 욕망에는 그 옷과 밀착되어 살아온 시인의 기억과 욕망이 스며들어 있다. 문학평론가
2021-10-18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해변가의 따스한 자갈들, 해초들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하얀 발가락으로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쌘드백을 껴안고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네가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지자 사랑과 윤리의 세계가 새로이 탄생한다. 그 윤리는 “나는 너의 잠을 지”키는 일로 나타나며, 사랑은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발가락을 깊숙이 집어넣는다는 에로틱한 행위로 표현된다. 그 행위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걸으면서 “서로의 존재를 포옹”하는 행위로 전이되며, 그 포옹은 고독과 땀, 그리고 좌절 속에서 이루어진다. 진은영 시인에 따르면 이 과정이 ‘연애의 법칙’이다. 문학평론가
2021-10-17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바다를 만났고, 秒針과 秒針 사이에서 삶을 배웠다.새벽, 나를 깨우는 저 초침소리나의 죽비다.결국 돌이킬 수 없는, 내가 살아온 저 시간의 심연.돌이킬 수 없으므로 돌이킬 수 없는 나를자꾸 뒤돌아보는 새벽.아 눈보라처럼지는 꽃잎처럼시간이 흩날리며 가고 있다.김성춘 시인에게 1초와 1초 사이는 바다와 같다. 그만큼 초와 초 사이의 순간에는 삶의 무수한 탄생과 스러짐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바다가 있다는 말은 깊은 심연이 있다는 말과도 같다. 초와 초 사이의 심연에서 시인은 시간을 ‘뒤돌아’ 보고는, 시간이 ‘눈보라처럼’, ‘지는 꽃잎처럼’ 흩날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시간의 잔해들을 가시화하는 ‘초침소리’는 시인의 정신을 늘 깨어 있게 만든다. 문학평론가
2021-10-14
멀리 선 나무가 평화스러워 보여도몸을 만지면 상처투성이이네.바다가 멀리서 태평한 듯 보여도발을 디디면 파도가 그의 상처이네.강물이 조용히 명상에 든 것은굵은 비가 울고 간 후이고갈대가 하얗게 꽃을 흔듦은밤새 찬바람과 싸운 끝이네.자연은 슬픔을 꽃으로 피우네.사람만이 슬퍼서 병이 나네그리고 병이 깊을 때,그의 영혼은 그늘의 새순 같은 詩가 되네.시인에 의하면 자연은 평화롭지 않다. 상처투성이 나무, 바다의 상처인 파도, 굵은 비의 울음, 찬바람과 싸우는 갈대, 이 모두는 사람들처럼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산다. 하지만 자연은 병나지 않는다. 슬픔을 꽃으로 승화시키기 때문이다. 사람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병이 난다. 그러나 병이 깊어지면 사람의 영혼은 “그늘의 새순 같은 詩”가 된다는 반전이 일어난다. 시는 병들 수 있는 사람의 특권과 같은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0-13
수타산 중턱에서 커다란 적송 그루터기를 보았다아직 바닥에 흩어져 있는 송화빛 톱밥이숲으로 향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이제 소나무는200년의 생애를 밑동에 꾹꾹 눌러 담고나이테 속으로 사라졌다마음의 길을 가늘고 촘촘하게 새겨놓고 떠났다틈 없이 새겨진 나이테의 흔적에서소나무가 남긴 단단하게 여문 생의 기록을 보는 것 같았다(….)수타산 중턱 적송 그루터기는온 숲을 채우기도 하고 다시 비우기도 한다.이 지상의 삶을 끝내고 떠난 소나무는 하나의 ‘사원’과 같은 ‘생의 기록’인 나이테를 남긴다. “한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깊어진 이 나이테는 ‘마음의 길’을 새겨놓은 시집과 같은 것 아닐까? 시에 따르면 소나무의 죽음은 “지상의 집 한 채”인 자신의 시집을 “완성하러 떠”난 것, 그 시집-나이테-은 더 깊어지는 삶을 스스로 살아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여, 소나무는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낳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0-12
노루목으로 가려다가길을 잘못 들어 토끼봉에 올랐다.지도 펴고 다시 보니구름 한 조각지도를 덮었다.그렇다.노루목이든 토끼봉이든구름되어 자유로이흘러가면 그만인 것을.여행은 우연과 마주치게 해준다. 지리산을 오르면서 시인이 어찌 길을 잘못들 것을 예상했겠으며 구름 한 조각이 지도를 덮을 줄 예상했겠는가? ‘시인-여행자’는 이 우연한 마주침을 위해 여행한다. 그리고 그는 이 우연히 맞닥뜨린 자유의 순간을 시로 표현함으로써, 기화하기 쉬운 그 순간을 영속화하여 일상의 삶에 부착한다. 그 결과 우리들은 시를 읽으면서 그 자유의 순간을 추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0-11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기 전모든 것은 잠시 망설인다나비는 칸나의 빛깔과 코스모스의 향기 사이를주춤주춤 거리고잠자리, 잠자리는 허공의 자유와잘 데워진 탱자나무 울타리의 휴식 사이에서 머뭇거린다(….)햇살은 나팔꽃 줄기에 머물러 씨앗을 먼저 터뜨릴까마타리의 몸 끝에서 꽃의 눈자락을 틔울까 망설인다망설임, 비는 여름비와 가을비 사이를 망설이며 내린다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갈 때열기와 서늘함이 서로를 슬쩍슬쩍 건드리며닿았다 풀려갈 때나는 망설인다마음속의 마음을 전할까, 감출까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마음은 흔들리고 설레며 망설인다. 이러한 사랑이 시작되는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다. 여름의 열기와 가을의 서늘함이 “서로를 슬쩍슬쩍 건드”리는 ‘계절이 바뀔 때’ 말이다. 사랑은 존재를 전환시킨다. 뜨거운 기대와 서늘한 실망의 마음이 사랑하는 자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사랑의 계절에서 사랑에 빠진 모든 것들은 망설임과 머뭇거림 속에서 존재 전화의 경계선에 놓인다평 문학평론가
2021-10-07
이 길은시간이 걸린다무심히 걸어야 한다비탈길 마른풀 사이사이에서조금씩 울음을 참다가그래도 사랑하려면유목민의 뼈로 갈아끼워야 한다절대 머무를 수 없게이별의 길은 비탈길이다. 그곳엔 습기가 부족하다.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인지 마른 풀만이 있다. 그래서 멈추어 바라볼 꽃도 없다. 이곳은 이별한 자의 마음 속 공간일 터, 이별한 자의 마음은 이렇듯 황량하다. 이별한 자는 이러한 황량한 길을 ‘무심히’ 걸어가야 한다. 울음도 참아야 한다. 다시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어딘가로 계속 움직이는 유목민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시인에게는 사랑 자체가 유목적인 것, 즉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가능한 무엇일지 모르겠다. 문학평론가
2021-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