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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김현욱 시인여행이나 출장을 위해 짐을 꾸린 뒤 가장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책을 고르는 것입니다. 5학년 학생들과 2박 3일의 야영을 떠나기 전에 학교 도서관에 들러 고른 책은 고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 2009)입니다. 월간 샘터에 `새벽 창가에서`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칼럼을 모은 책입니다. 2009년에 1쇄를 찍었는데 지금까지 89쇄를 더 냈으니 대단한 스테디셀러입니다. 읽어 본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위안과 감동을 한 모양입니다. 저도 언젠가 지인으로부터 이 책을 추천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야영 활동을 하는 틈틈이 책장을 넘깁니다. 한 편 한 편 읽어나가자니 이 책을 추천하고픈 친구들과 제자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SNS에 책 표지와 가장 감동한 글귀를 올립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 대구, 서울 등지에 사는 친구들과 제자들의 댓글이 올라옵니다. 대학생이 된 제자들은 이즈음이 시험기간인가 봅니다. “시험 기간인데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댓글을 씁니다. “시험 끝나면 꼭 읽어보렴.” SNS에 올렸던 글을 소개합니다.“민숙아,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인데, 사람이면 누구나 다 메고 다니는 운명자루가 있고, 그 속에는 저마다 각기 똑같은 수의 검은 돌과 흰 돌이 들어 있다더구나. 검은 돌은 불운, 흰 돌은 행운을 상징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이 돌들을 하나씩 꺼내는 과정이란다. 그래서 삶은 어떤 예기치 못한 불운에 좌절하여 넘어지고, 또 어떤 때는 크든 작든 행운을 맞이하여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는 작은 드라마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아마 너는 네 운명자루에서 검은 돌을 몇 개 먼저 꺼낸 모양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남보다 더 큰 네 몫의 행복이 분명히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인용한 글은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 실린 에세이 `무릎 꿇은 나무` 중에 일부입니다. 민숙은 장영희 교수의 제자입니다. 그 어떤 학생보다 재능이 뛰어났고, 밝고 명랑하고, 겸손하면서도 똑똑하고,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하고 착해 늘 친구들을 다독거렸던 제자, 민숙은 의심할 여지없이 `정석`의 삶을 살겠거니 장영희 교수는 믿었습니다. 하지만 민숙의 삶은 `완벽한 조건을 갖춘 신랑감으로 보였던 그`가 남긴 상처로 넘어지며 어긋나기 시작합니다.“한번 빗나가기 시작한 삶은 자꾸 엉뚱한 데로만 치달아, 외로웠던 너는 그곳에서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고, 새삼 돌이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많은 경험 끝에 이제 넌 이 넓고 험한 세상에 두 살짜리 아기와 혼자 남게 되었구나. 아프고 지친 너는 이제 무심히 너를 지나쳐 앞으로 가는 사람들 뒤에 홀로 남아 이 무서운 삶을 살아 내야 한다”고 제자의 쓰라린 삶을 회상하는 대목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불행`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던 제자의 `불행`앞에 장영희 교수는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면서도 위의 `운명자루`이야기를 민숙에게 들려줍니다.불행은 `속수무책`이고 한번 빗나가기 시작하면 `도미노`처럼 삶을 무너뜨립니다. 하지만 불행도 행복도 총량이 있고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민숙에게는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는 스승이 있고 사랑스러운 아기가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도 작은 행복과 축복을 헤아리는 긍정적인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그러면서 장영희 교수는 로키산맥 해발 3천미터 수목 한계선 지대에 마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듯 서 있는 나무들 이야기로 민숙에게 쓰는 위로와 희망의 편지를 마칩니다. 그 이야기는`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116쪽을 펼쳐 꼭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시작하기`,`내가 살아보니까`, `괜찮아`,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 보라`와 같은 에세이는 색한지에 예쁘게 출력해서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읽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2016-06-14

교육과 나눔, 그리고 지구 2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야, 우리나라 차다!” 여기저기서 같은 탄성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새벽에 도착하여 잠도 몇 시간 못 잔 학생들이지만, 다른 문화를 배우려는 의욕은 대단했다. 그러다 발견한 “우리”에 모두가 놀랐다. 학생들이 발견한 건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에서 생산한 국내산 자동차! 학생들의 얼굴엔 피곤함보단 자부심이 한가득 피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어느 학생이 외쳤다. “선생님, 저기 있는 차 이름은 뭐예요? 우와 정말 많다.” 어느 학생의 말이 멈춘 곳에는 일본산 차가 있었다. 그 차를 보는 순간 작년 사전 답사 때 들은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 떠올랐다.“한 때 울란바토르 도로에는 한국 차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리고 한국 차들에 대한 인식도 매우 좋았다. 하지만 일부 비양심적인 무역상들이 들여 온, 홍수 때 물에 잠긴 차들 때문에 한국 차는 인기를 잃었다. 그 자리에 일본 자동차들이 들어왔다.”한번 잃어버린 신뢰를 다시 얻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안다. 필자가 전해준 말에 학생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학생들의 실망감을 부추기기라도 하듯 일본 자동차들이 학생들을 빤히 들여다보며 울란바토르 시내를 활보하였다. 그럴수록 학생들은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국산차를 찾았다.오후에 있을 `한국·몽골 청소년 문화교류`에 앞서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은 오전에 자이승 전승기념탑 전망대, 이태준 기념공원, 북드칸 궁 등 몽골 문화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본 자동차에 의해 상해버린 자존심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듯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짧은 시간에도 학생들은 몽골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준비해 간 교재를 읽고 또 읽었다.하지만 학생들을 더 부끄럽게 만든 건 역시 대한민국 어른들이었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해외여행 패션에 대해 국내외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한 적이 있다. 바로 그 유명한 등산복 패션! 필자는 그 유명한 등산복 패션의 실상을 몽골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몽골에서 본 등산복 패션의 한국 어른들은 분명 아이들에게 같은 대한민국 사람임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은 대한민국 어른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지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애국지사 이태준 선생 묘`라고 적힌 비석 앞에서 학생들은 감사와 추모의 묵념을 올렸다. 학생들이 지나간 자리에 몇 몇 등산복 어른들이 같이 묵념을 하였다. 다른 문화재에 대한 이해 없이 마치 전세를 낸 양 떠들썩하게 의미 없는 사진을 찍을 등산복 어른들 옆에서 학생들은 소련이 기증해주었다는 전승 기념탑 안의 모자이크 그림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오전 울란바토르 지역사회 탐방을 마친 학생들은 한몽 청소년 문화교류 행사장인 몽골 쎈뽈 초등학교로 향했다. 학생들은 한 달 이상을 몽골 원어민 선생님을 초빙하여 몽골에 대한 수업을 들었다. 행사장으로 향하는 학생들의 얼굴엔 새로운 기대감으로 가득했다.“쌤베노!”라고 하자 “안녕하세요!”라는 답이 메아리 되어 돌아왔다.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모든 정성을 모아 양국 인사말로 첫인사를 나누는 학생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국어와 몽골어로 `교육과 나눔, 그리고 지구`라고 적힌 현수막이 뜨겁게 응원해주었다. 이미 서로를 인정한 학생들에게 언어는 더 이상 그 어떤 장벽도 되지 못했다.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은 지난 몇 달 동안 태권도, 사물놀이, K-POP, 윷놀이, 제기차기, 공기 등 우리나라를 알리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몽골 학생들을 위해 태권도복을 준비하였고, 무겁고 번거로울 수도 있었지만 사물놀이 악기들을 직접 몽골까지 들고 왔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양국 학생들은 서로의 문화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울려 퍼지는 태권도의 우렁찬 함성소리와 흥겨운 사물 가락, 그리고 신나는 K-POP 등은 앞으로 이 학생들이 꽃피울 문화 융성 시대는 물론 나무로 넘칠 사막을 예견해주었다.

2016-06-09

화가(畵家)로 살아간다는 것은

▲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현대미술은 항상 사건을 몰고 다닌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미술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는지도 모르겠다. 화가의 심오한 작품세계와 철학적 사고에 대한 관심과 평가보다는 주변의 잡다한 문제들이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을 더욱 자극하는 듯하다. 기업인과 정치인들의 비자금에 연루 된 미술품 수집과 본인 작품의 진위여부를 두고 벌어지는 진실게임에 이어 유명 연예인의 대작(代作) 논란은 복잡한 현대미술만큼이나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가듯 깊은 수렁 속으로 점점 빠져드는 듯하다. 인류가 지구상에서 창의적인 사고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직접 제작한 행위 중 아직까지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미술`이라는 분야는 말 그대로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유형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행위”를 말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가수 조영남의 대작여부는 진정한 미술이 가지는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관점과 보편화 되고 있는 화가라는 직업에 관한 윤리적 문제의 혼돈에서 생겨난 문제이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 할 때부터 지금 이런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킬 때까지, 미술계 내부적으로는 전혀 이슈가 되지 않고 있는 문제이다. 그의 작품 활동은 예술에 대한 진지한 자기성찰과 진실된 창작행위라기 보다는 현대미술이라는 다소 가벼운 미학적 가치관과 표현방법에서 비롯된 자기과시형 내지는 고가로 거래될 수 있는 미술품의 상업주의적 활동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현대미술에 있어 대작은 관행이라는 보편적인 사례를 본인의 작품활동에 대입시키는 것은 지나친 억척이다. 화가에게 대작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사례들은 국내외적으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고 그런 행위에 대한 평가는 미술사적인 영향과 작가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사고로 인정되기도 한다. 화가의 심미안적 눈과 감각적인 표현과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줄 수 있는 손에 의해 제작되어진 창작품들이 복잡한 제작과정이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질 경우 조수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본인이 직접 다루어 보지 못했던 자료를 사용할 경우 철저하게 감리를 통해 본인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작품들만 선별해 발표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제작에 도움을 받은 경위를 자연스럽게 공개하기도 한다. 현대미술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서는 화가의 작품들이 본인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수많은 조수들과 함께 협업해 제작되어지고, 이를 `공장(factory)`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거동이 불편한 팔순의 원로화가가 평생동안 그려오고 있는 패턴의 작품을 아직까지 창작하며 전시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다분히 주변의 도움을 얻어가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 활동을 미술계에서는 크게 질타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사적 관점과 미술시장에서 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때 참조를 할 뿐이다. 방송활동과 콘서트 등 본업인 가수활동을 하며 본인 콘셉트의 그림을 남에게 대신 그리게 하고 그 작품들을 본인이 그린 것처럼 작품전을 가지고, 판매 하는 것은 유명작가들의 스튜디오 운영을 통한 활동과는 엄연히 다른 사례이다.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하는 화가는 3만여 명이며, 협회에 소속하지 않고 활동하는 화가들까지 포함하면 10만여 명이 넘게 된다. 이들 화가들 대부분은 생계형 화가로 오랜 시간 입문과정을 거쳐 미술계에 종사하고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기만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본인의 미학적 가치와 조형적 아름다움을 평가받기 위해 묵묵히 작품 앞을 지키고 있다. 결코 유명세를 얻어 돈벌이를 하기 보다는 수만년을 이어온 인류 속에서 본인의 예술적 가치를 미술로 평가 받고 싶기 때문에 오늘도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붓을 잡는다.

2016-06-07

200년 후

▲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이맘때면 뿌연 아카시아 꽃 흐드러지고 송홧가루가 마치 연막탄을 쏘아 놓은 것처럼 온 산천을 뒤덮어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나로서는 여간 괴로운 게 아니다. 꽃 피는 것이 반갑지 않을 리 없으나 올해는 꽃들이 유난스럽고 그 향기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온 세상을 진동한다. 이제 겨우 6월 초인데 툭하면 폭염주의보가 발령되는 걸 보니 자연의 시스템에 큰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인간도 자연과 같아서 잦은 변덕에 지치고 힘겹다. 예술가를 꿈꾸며 살아온 내 삶을 되돌아보니 예술창작 행위보다 오히려 예술 주변의 일들에 소진한 에너지가 너무 많지 않았던가 하는 회한이 깊다. 예전에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일이 특별한 경우로 여겨질 만큼 일반인들에게 미술은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요즘 이런저런 시민행사를 통해 접한 동호회나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연마한 일반인들의 작품이 전공한 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음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일반인과 예술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일반인의 작품과 예술가 작품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느 쪽에서 보나 우문이며 굳이 칸트의 예술철학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을 일이나 물끄러미 그런 생각에 빠져 드는 근원은 언제나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된다. 예술가를 꿈꾸며 청춘을 바쳐 미술을 전공했으나 막상 시대를 견인하는 작품은커녕, 바쁜 일상에 허덕이다 겨우 마감시간에 맞추어 전시장에 내걸린 그림이 민망해 마주보지도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곤 한다. 남에게 부끄러운 것보다 내 손을 통해 그려진 그림에게 부끄러운 건 또 무슨 마음일까? 그도 내가 만들어낸 생명체여서일까?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일까? 그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다음 세대 삶의 지표가 되고, 교육의 방향타가 되어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을 길러냄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요즘 문화센터나 평생교육원의 그림을 보면 서양의 19세기 미술과 비슷한 유형의 그림들이 많다. 대상을 사진으로 찍어서 그 외형을 그대로 그려내는 일, 빛에 의한 색채와 대상의 표면에 부딪쳐 반사되는 시각적 이미지와 감각들, 19세기의 치열했던 예술이 오늘날 삶의 여유를 즐기는 수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200년 전 빛을 쫓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다 실명한 화가들은 간데없고 오늘날 문화센터와 평생교육원의 여유로운 취미생들은 윤택한 삶을 위해 그때의 치열했던 예술을 현실에서 정신적 쾌감으로 향유하고 있다. 미래의 200년 후, 그때도 평생교육원과 문화센터가 있다면 거기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현대는 모든 예술의 벽이 허물어져 탈장르화 되고, 다른 장르와의 융합에 의한 시너지를 통해 강력한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시대정신을 이끌어 가는 게 오늘날 예술의 모습이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현대는 다양성의 시대라는 점이다. 말도 행동도 느린 나로선 이 시대의 예술이라는 물결의 속도가 부담스럽기 이를 데 없으니 말이다.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땐 본능적으로 개체를 보존하기 위한 절박한 환경임을 감지했을 경우라 한다. 이른 꽃들이 유난스럽고 갑자기 더워진 수상한 공기 속에서 마음의 불안을 느끼는 까닭도 이와 비슷할 것이며, 자연도 문명도 인간도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이기 때문이리라. 엄청난 지각 변동을 통해 생태계는 도태와 진화의 모습으로 정리되어 공룡처럼 없어지기도 하고, 메타세콰이어처럼 지구상 어디선가 300만년 동안을 기적처럼 살아남기도 할 것이다. 예술이란 그렇게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오랜 세월동안 스스로 진화를 거듭하며 견뎌내는 것이 아닐까?200년 후 지금 이 자리엔 누가 있을까? 그들은 무엇을 하며, 어떤 예술품이 남아 있을까?

2016-06-03

`채식주의자`와 `워낭소리`

▲ 강희룡 서예가세계3대 문학상의 하나인 맨부커상을 한국인 작품 `채식주의자`가 받았다. 한국인 최초로 받은 큰상으로 문학계와 서점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2004년에 소설로 발표되어 2009년 `청소년 관람불가`로 영화로 제작되었으나 큰 흥행은 없었고, 소설은 십여 년 후인 지금에 와서 빛을 본 것이다. 어릴 적 육식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입은 한 여인이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극단적인 채식을 통해 육체를 침몰시키며 죽음으로 정신적 자유를 갈망하는 내용이다.내용을 보면 주인공이 꿈에 나타난 영상(피가 흘리는 날고기를 먹는 자신)에 사로잡혀 육식을 멀리하자 채식만의 식단으로 인한 남편과의 갈등이 시작되고 남편은 처가 사람들을 동원해 아내의 이러한 이기적인 행동을 말리고자 시도하던 중 장인이 강제로 아내의 입에 고기를 넣으려 하자 자해를 하게 된다. 결과는 육식거부에서 시작해 식음을 전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한 여성이 자신을 가정과 가족 그리고 사회에서 속박시키는 모든 관습과 선입견에 따른 폭력에 저항하는 과정을 다뤘다고 볼 수 있다.처제의 엉덩이에 남아있을 지 모르는 몽고반점을 상상하며 변태적인 남성만의 욕망을 느끼고 있던 영상예술가인 형부는 이혼한 처제인 주인공을 모델로 쓰게 되고 결국 형부와 온몸에 꽃그림을 그리고 불륜을 저지르게 된다. 그 현장을 언니에게 들키고 정신병동에 입원하게 되나 깊어지는 병으로 나무가 되는 꿈을 꾸자 그 나무가 되기 위해 모든 음식도 끊는다. 결국 육체는 서서히 허물어져 가지만 정신은 오히려 무언가로의 해방과 자유를 향한 갈망을 멈추지 않는다. 현대사회 속 인간의 속박된 삶의 세계가 얼마나 많은 유무형의 폭력과 갈등 그리고 일그러진 성으로 얼룩져 있는지를 세상에 표출한 작품이라 하겠다.`워낭소리` 또한 2009년에 개봉한 영화다. 워낭은 소나 말의 턱 밑에 매어 놓는 방울을 뜻한다. 농경사회에서의 소는 최고의 재산이고, 최선의 농기구이며,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경북 봉화의 어느 산골에 80평생 땅을 지키며 소만 바라보고 소만 챙기는 농부할아버지와 소만 챙긴다고 섭섭함을 느끼는 할머니, 그리고 오랜 세월 할아버지와 함께한 늙은 소 누렁이가 있다. 워낭소리는 30년 동안의 누렁이와 할아버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다큐멘터리로 노인 부부와 일 소의 마지막 몇 년간을 주제로 삼았다. 평생 땅과 호흡해 온 최 노인은 대개 소의 수명은 15년 정도인데 무려 마흔 살이나 된 일소 누렁이와 30여 년 동안을 함께 하고 있다. 귀가 어두운 노인이지만 누렁이의 희미한 워낭소리만은 알아듣고 불편한 한 쪽 다리를 절룩이며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산을 오른다. 소 역시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뭇짐도 마다 않고 나르며 노인의 손발이 되어준다. 몸이 불편한 무뚝뚝한 노인과 늙고 무덤덤한 소, 이 둘은 인간과 동물의 환상적인 동반자인 것이다. 어느 날 소가 일어나지 못하자 수의사 진찰결과 누렁이는 늙음으로 오래 살지 못 할 거라는 말에 할아버지는 누렁이가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주다 소가 숨을 거두자 장례를 치러주면서 이 영화는 끝난다. 실제로 누렁이가 죽고 4년 후 노인도 세상을 뜨자 누렁이 곁에다 함께 묻어 장례를 치렀다.채식주의자는 삶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극단적인 육체적 파괴를 통해 죽음으로 영혼의 자유를 갈망하였고, 워낭소리는 자신을 낮추며 자연과 동물과 교감을 이루며 서로를 배려하는 동반자로 함께 생을 마감하였다. `주역`의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겸손은 높고도 빛난다(謙尊而光)”라고 적고 있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그 삶은 더욱 풍요롭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깊어질 것이다. 자신의 삶을 이기심에서 나와 긍정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면 비극적인 결말에 이른다. 부정과 긍정, 삶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는 자신에게 있다. 생각이 행동을 낳고 이 행동이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2016-06-02

교육과 나눔, 그리고 지구 Ⅰ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드디어 간다. 정말 “드디어”다. 2014년부터 준비했다. 비록 교육청은 인정해주지 않는 학교이지만, 교육청의 매뉴얼대로 겨울방학마다 영하 30도를 훌쩍 넘는 몽골을 사전답사 차 다녀왔다. 그리고 해마다 5월에는 2차 사전답사를 갔다. 지난 2년 동안 어린이날, 어버이날은 필자에겐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아이가 정성스럽게 만든 카네이션은 항상 시간이 지나고서야 사막 바람이 훑고 지나간 필자의 가슴에서 피었다. 필자의 부모님은 카네이션 하나 없는 빈 가슴으로 어버이날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지난 2년 동안 필자는 몽골에서 1월과 5월을 보냈다.하지만 번번이 몽골로 가는 비행기는 이륙하지 못했다. 2014년에는 세월호 참사가, 2015년에는 메르스 참사가 몽골로 가는 비행기를 붙잡았다. 비록 아쉬움이 컸지만, 그 아쉬움보다 더 큰 슬픔 앞에서 비행기 티켓 취소에 대한 망설임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굳이 필자가 망설이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평소에는 학교 취급을 안 해주던 교육청이 국가적 참사(慘事)가 일어나면 팔을 걷어 부치고 교육 활동에 간섭을 하니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교육청이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을 정말 끔찍이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를 정도로 교육청은 학교 교육활동에 입을 대었다. 그런데 그것이 혹시나 모를 일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안다.정말 삼세판 끝에 이제는 간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 말한다. 19대 국회가 끝났으니까 갈 수 있다고. 임기를 마친 19대 국회를 평가하는 언론들의 공통된 단어는 `법안 1만 건 폐기, 역사상 최악의 국회`이다. 17대 국회에서는 3천172건, 18대 국회에서는 6천301건의 법이 폐기 되었는데, 19대 국회에는 1만7천여건의 법안이 발의가 되었고, 그 중 통과된 법은 고작 8천13건이라고 한다.폐기된 법안 중에는 `세월호 특별법 개정안`과 `가습기 살균제 특별법` 등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참사들에 대한 법안이 포함되어 있다. 언론들은 “19대 국회는 식물국회를 넘어 4년 내내 휴업(休業)을 한 것과 다름없다”고 보도하고 있다.아무튼 말 많고 탈 많았던 19대 국회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20대 국회가 문을 열었다. 늘 그렇듯 개업 집에는 처음에는 기대로 가득 찬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하지만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마음에 독을 품고 냉정하게 돌아선다. 20대 국회는 19대 국회의 비참한 최후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국민들이 20대 국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동안 지체된 사회 발전을 이번 국회가 꼭 이루어 주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힘들고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이 나라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꼭 보여주길 바란다. 필자 또한 여기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자 산(SAN)교육을 위해 몽골로 간다.교육계의 화두 중 `세계시민교육`이라는 것이 있다. 세계시민교육은 경주에서 열리고 있는 제66차 유엔 NGO 콘퍼런스의 주제이다. 산자연중학교는 세계화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미리 알고 그것을 `해외이동수업`이라는 정규과목으로 편성 운영하고 있다. 이번 해외이동수업 장소는 몽골이며, 수업주제는 `교육과 나눔, 그리고 지구`이다. 학생들은 이번 해외이동수업 기간 동안 몽골 사막 현장을 방문해 사막화 방지를 위한 조림 사업에 참여한다. 또 나눔 정신 실천의 일환으로 집이 없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몽골 초등학교 학생에게 직접 몽골 전통 집인 겔(ger)을 지어준다. 그리고 문화교류를 통해 우리의 우수한 문화를 몽골 청소년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몽골의 전통문화에 대해서도 배운다.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이 배우는 `배려와 존중, 그리고 소통` 정신이 20대 국회에도 꼭 전달되길 기원한다.

2016-06-01

그들의 뻔뻔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 황주환 안강여중 교사한 살 때부터 목에 튜브를 달고 사는 아이의 사진, 무거운 산소통을 끌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초등학생 등굣길 사진에 할 말을 잃었다. 수많은 아이와 산모의 죽음, 그리고 평생 숨 쉴 수 없는 고통에 살아야할 사람이 얼마인지 확인조차 안 된다. 확인된 사망자만 150명을 넘었고 수십만 명이 피해를 입었단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살인`사건,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의 경과를 주목하며 나는 평소 갖고 있던 질문이 곧바로 다시 떠올랐다. 옥시 사태는 살균제 독성을 알면서도 제조하고 유통시킨 기업들, 독성실험 결과의 누락 혹은 조작 의심을 받는 서울대 교수, 그것을 사주 혹은 이용한 법률대리인 김앤장, 그리고 외국에서는 유독물질인 것을 한국에서는 유통 가능케 한 감독기관 관료, 그리고 사망자가 속출해도 나 몰라라 해온 정부의 무책임이 한 묶음으로 작동했다. 무엇이 이들을 하나로 묶게 했을까?이 사태에 대해 많은 의견과 분노, 그리고 돈을 중심으로 모인 그들 비양심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교사인 나는 다른 질문을 하고 싶다. 이 사람들 모두 학창시절 성적이 어땠을까? 아마 이들 모두 학력 우수생이었을 것이다. 교사의 칭찬을 달고 지내며 우쭐했을 이들 성적 최우수 학생들이, 교수와 법률가 그리고 경영자와 고위관료가 되어서도 주변의 시선에 우쭐했을 테다.한국사회에서 공부 잘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자.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이고 그래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 칭찬받는 것은 마땅하다. 이들 공부 잘한 학생들의 사회공헌 정도에 따라 사회는 이들에게 적절한 부와 권력을 부여하는 것일 테다. 그런데 옥시 사태에서 보듯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저지르는 사회범죄의 해악은 너무 크다. 전문지식과 지위를 이용해 수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수많은 가정에게 평생의 고통을 안겼다. 돈 많은 그들이 좀 더 많은 돈을 가지기 위해서!사회에 해악이 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다양하다. 이는 공부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강남역 화장실 피해자 추모에 나선 것은 이 살인을 사회적 징후로 인식했기 때문이듯 모든 살인은 사회적 맥락을 가진다. 나는 옥시의 살인은 한 때 공부 잘했던 학생이 사익 때문에 `한국사회를 살해`하는 징후로 읽고 있다. 강남역 살인보다 더 잔인하고 더 큰 해악이다.그래서 공부 잘 하는 것을 최고로만 여기는 한국사회, 이를 상식으로 여기는 우리 의식을 다시 생각해보자. 한 때 공부 잘 한 학생이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사회 공공성을 파괴해도, 다시 말하면 그들이 우리의 폐를 망가뜨리고 우리를 숨 쉴 수 없게 하는데도 그들을 칭찬만 할 수 없지 않겠는가.수업 중 한 번씩 겪는 장면. 수업에 지장을 주는 한 학생을 지적하자 “쟤는 공부 잘하는데요!”라는 말이 불쑥불쑥 들려온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뱉은 변명이 아니다. 공부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급우를 변호하는 근거다. 개인 성취와 공공의 가치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대학이나 고시합격 혹은 회사에서 승진했다고, 동네마다 `축!ㅇㅇ대학 합격`, `축! ㅇㅇ승진` 같은 현수막을 내거는 것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성취를 공적 성취로 내세우는 이 문화를, 대부분 주민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인다.개인의 성취는 가족의 자랑은 될 수 있을지언정, 사회적 존중의 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학력우수생이 사회 공공성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이고, 그것에 기준해 칭찬과 비난을 나누어야 한다. 이를 구분하지 않는 문화에 교사인 나와 여러분의 의식이 일조하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2016-05-31

인문교육과 실용교육의 조화를 요구하는 개혁

▲ 임선애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부현재 한국의 대학은 대내외적으로 거센 변화와 도전의 소용돌이 속을 걸어가고 있다. 내적으로는 학령인구의 감소, 대학교육에 대한 수요 변화(사회 패러다임의 변화), 대학설립준칙주의의 부작용, 대학정원자율화의 후유증 등으로 시달리고, 외적으로는 첨단기술의 발달로 인한 교육환경의 변화, 고등교육의 세계화 경쟁 등에 내몰리는 형편에 놓여 있다. 이에 대학의 구조개혁은 불가피한 일이고, 개혁-평가-지원사업을 전제로 하는 국가적 차원의 처방들이 제시되고 있다.고등교육 개혁을 위한 정책들은 대학의 사회경제적 기여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을 중심으로 대학들이 체질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의 적용, 단발적이고 단기적인 정책들이 대학교육의 방향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비판도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발표된 `고등교육 재정투자 10개년 기본계획안`(2010), `대학 구조개혁 추진계획`(2014) 등은 장기적인 계획이라는 특징을 지닌다.특히 대학 교육의 질 제고 및 학령인구 급감 대비를 위한 `대학 구조개혁 추진계획`은 2023학년도까지 3주기로 나눠 대학 정원 16만명을 감축하고, 모든 대학을 5등급으로 절대평가, 등급별 차등적 정원감축 등이 그 주요 내용이다. 평가결과에 따른 정원감축 실시, 대학 교육의 질 제고를 위한 새로운 대학평가체제인 5등급제 도입, 지속적 구조개혁을 위한 법적·제도적 기반 구축 등을 세부 계획으로 제시하고 있다. 대학의 등급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평가의 기준이 예민한 문제가 될 것 같다.교육부는 지속적으로 평가의 방식을 객관화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지만, 평가의 모든 수치들이 `수월성(excellence)`으로 환원되는 데 대한 불만은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수치는 원칙적으로 목적이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할뿐더러 수치 그 자체로는 내용을 담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니기도 하지만, 평가를 위한 적절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대학구조개혁을 위한 정부의 재정지원 예산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날 것이고, 국가지원 사업 또한 다양해 질 것으로 예상된다.학부교육의 개혁을 위한 주요 사업으로는 ACE, PRIME, CORE 사업이 있다. 2015년 기준 32개교가 참여하고 있는 ACE 사업은 `학부교육의 질 향상`에 대한 관심을 촉발한 사업이다. 사업 참여대학들이 명확한 교육철학과 목표를 통한 학부교육, 학생들의 동기유발을 제공하는 혁신적인 교육프로그램과 제도 생성, 교양교육 과정, 교과목 및 운영방식 개선을 통한 학부교육 개선, 비교과프로그램을 통한 지역공동체 소통 체험 등의 성과를 내며 학부교육의 내실화와 특성화를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최근에 시작된 PRIME(산업 연계 교육 활성화 활성화 선도대학) 사업은 이공계 중심으로 정원이동이 이루어져 취업약정형·연계형 주문식 교육과정 도입 등 현장 실무 능력을 제고하는 한편, 다양한 기초학문 학업 이수를 통한 인문학적 소양, 기초지식 함양, 다전공 활성화, 융복합 교육과정 확대 등 문제해결형·통섭형 인재를 육성하려는 의도도 포함하고 있다.CORE(대학 인문역량 강화) 사업은 기초학문인 인문학을 보호·육성하는 동시에 사회수요에 부합하는 융복합 인재 양성에 기여하려는 취지로 시작됐는데, 실제로 사업에 선정된 대학들을 살펴보면 인문학의 실용성 제고를 지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프라임 안에 인문이 있고, 코어 안에 실용이 있는 형상이다. 바꿔 말하면 `인문 없는 실용 없고, 실용 없는 인문 없다`이다. 대학교육 개혁의 핵심은 인문교육과 실용교육의 조화에 있다. 어려운 문제이지만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2016-05-30

대작(代作)과 조수(助手)

▲ 강희룡 서예가대작이라 함은 남을 대신해 작품을 만들어주는 행위나 또는 그런 작품을 말하는 것이고, 조수라 함은 어떤 책임자 밑에서 지도를 받으면서 그 일을 도와주는 사람을 말한다.예술장르에서 조수를 통해 작품을 완성시키는 경우는 많다. 특히 건축분야는 건축가는 설계만 할 뿐이지만 노동자가 시공한 완성된 건축물은 건축가 작품이다.조각이나 회화분야에서의 벽화 같은 대작(大作)을 만들고자 할 때 혼자서는 어렵기 때문에 보조를 할 수 있는 제자나 조수를 두는 경우가 많다.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중요한 대작(大作)들은 대부분 조수나 하도급 업자들이 만들었다.19세기 오귀스트 로댕과 그의 조수였던 부르델은 근대조각을 논의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작가와 조수 관계이다.부르델이 로댕의 문하로 들어간 것이 서른두 살, 이후 마흔일곱에 그의 작업실을 나오기까지 15년을 로댕의 조수 겸 수제자로 작업을 하며 후대에 유명해지는 많은 조각가들의 스승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된다. 또한 영화로까지 제작된 로댕의 연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은 여성 조각가이다.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한 `지옥의 문`의 가운데 시인을 등장시키려고 하는 로댕의 시도가 벗은 채로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여러 인간의 고뇌를 바라보면서 깊이 생각에 잠긴 남자의 상, 즉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독립해서는 예술적으로 개화하는 듯하였으나 실패하고 불우한 삶을 살아간 끌로델이 만든 것 중에도 비슷한 모습으로 만든 것이 있어서 로댕이 끌로델의 작품을 모방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지옥의 문`은 끌로델이 로댕의 조수로서 작업을 도운 작품인 것이다.제프 쿤스는 1955년에 태어난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이다. 시카고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쿤스는 방향을 전환하여 꽃과 잔디로 만든 강아지 모양의 대형 조각물 `강아지 Puppy(1992)`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높이가 13m에 달하고 2만개의 화분으로 장식된 이 조각물은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에게까지 동심을 자극하며 사랑을 받았다.그는 스튜디오를 공장처럼 가동하기 위하여 30여 명의 조수를 고용하여 작품을 생산한다. 아이디어는 내지만, 실제 제작은 전문기술자들의 몫이다.매끈한 처세술로 끊임없이 투자를 만들어내고 결국에는 그의 명성으로 스폰서를 괴롭히는 악명 높은 예술가가 된 것이다.이렇듯 쿤스처럼 제작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로댕처럼 거푸집만 혼자 만들고 주물은 남에게 맡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최근 가수이면서 방송인 한 사람의 그림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대부분 국민들은 그를 가수나 방송인으로 알고 있지 화백으로는 생소하기 때문이다.스스로를 `화수(畵手:화가+가수)`라고 자칭한 그는 현대미술은 `이름미술`이다, `작가가 유명한 이가 아니라면 그림 수천 점을 남긴다 해도 모두 헛것이다`라고 그의 책에 적은 것을 보면 이 작가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이번 대작(代作) 화가의 폭로 직후 그는 미술계의 작업 관행일 뿐이라고 변명하지만 그림 크기가 대체로 대작(大作)도 아닌 작품을 남을 통해 완성한 후 본인 사인만 한다는 논리는 앞뒤가 안 맞는다. 그것도 8년 동안에 300여 점이 넘는다니 관행이란 주장에 대해 어렵게 생활하는 작가들에게는 공분을 살만하다.수년전 어느 여배우의 한국화작품이 수천만원에 팔렸다는 보도가 머리를 스친다. 가끔씩 공모전에서 대작이나 대필이 발생되어 문제가 되기는 했으나 대작이 갤러리를 통해 매매가 된다하니 예술의 도덕적 정신은 물질에 얽매여 사라진 사회가 된 것 같다.배우나 가수의 이름으로 그림을 갤러리에 걸고 시장에 매매하는 건 작품의 가치보다 연예인으로서의 이름값이라 본다.`나의 모든 작품은 내 손으로 그린다. 보조 작가를 쓰는 건 예술과 작가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한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말이 생각난다. 곧은 정신이 깃든 참된 예술품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016-05-26

기후 비상사태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분명 달력은 신록으로 넘실거리는 5월이다. 그런데 시간은 5월과 6월을 건너뛰었다. 분명 날씨 뉴스만 보면 지금은 불볕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여름의 한 복판이다. 다급한 아나운서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 경기도 동두천은 기온이 34.2도까지 올라갔습니다. 폭염주의보는 나흘째 이어졌습니다.” 지난 주 전국 많은 지역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다. 누가 이 날씨를 5월 날씨라고 할까.문제는 폭염뿐만 아니다. 미세먼지 주의보, 황사 주의보, 자외선 주의보, 오존 주의보 등 폭염보다 우리를 더 긴장시키는 주의보들이다. 이들이 주의보로 끝나면 좋겠지만, 자연은 자신들의 경고를 무시한 인간에게 주의 단계를 넘어 경보, 나아가 중대 경보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자외선 차단제, 오존 마스크 등을 만들어낸다고 우쭐대는 우둔한 인간들에게 자연의 경고는 한낱 잔소리에 불과하다.“경기도는 22일 오후 5시를 기해 안산, 안양 등 11개 시에 오존주의보를 발령했습니다. 오존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가슴 통증, 기침, 메스꺼움 증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심할 경우 기관지염, 심장질환, 폐기종, 천식이 악화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나 노약자, 호흡기질환자, 심장질환자는 가급적 야외활동을 자제해 주세요.”같이 뉴스를 보고 있던 초등학교 3학년 나경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아빠, 나 이제부터 나가서 놀면 안 돼? 도대체 오존이 뭐길래 밖에서 놀지 못하게 해?” 활동성 강한 아이가 야외활동을 자제해달라는 말에 곧 울음보를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필자를 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니야, 나가서 놀아도 돼. 그런데 너무 오래 놀지 마.” “그래, 그럼 나 잠시 나갔다 올게.”하며 놀이터로 뛰어나갔다. 마스크도 없이, 자외선 차단제도 바르지 않고 뛰어가는 아이의 즐거운 뒷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몇 번이고 망설였다. 그리고 자외선 차단제 보다 더 강하게 말했다. “조금만 놀다 와!” 나경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친구가 기다리는 놀이터로 나갔다. 멀리서보니 그 친구는 모자와 마스크는 물론 온 몸이 하얗게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있었다.아이가 들어오면 오존에 대해 설명해 주기 위해 오존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었다. 오존은 산소 분자에 산소 원자가 결합한 O3라는 것을 과연 나경이가 이해할지. 또 오존은 일반적으로 자동차 등에서 나오는 질소 산화물, 주유소 같은 곳에 가면 냄새나는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굉장히 강한 자외선하고 반응한다는데, 이를 광화학반응이라고 하고 이 반응 때문에 오존이 생긴다는 내용은 또 어떨지.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고 메스꺼워졌다. 나경이가 걱정되어 잠시 놀이터에 가보니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너무도 재밌게 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오존의 2가지 얼굴이라는 글이 생각났다. “오존은 지상에서부터 10km 이상의 높이인 성층권에서는 오존층을 형성해서 피부암 등을 유발하는 자외선을 흡수해준다. 이런 곳에서는 우리에게 좋은 역할을 하는데 우리가 숨 쉬고 사는 대륙권에서는 인체에 굉장히 해로운 물질이다.” 당장이라도 나경이를 불러 집으로 오고 싶었지만 참았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올해가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운 날씨를 기록할 확률이 99%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기온이 급격히 오르는 이유에 대해 급속한 지구 온난화를 지적했다.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실천이 안 된다. 온몸이 벌겋게 변해 들어 온 아이가 화를 낸다. “아빠, 참 이상해. 우리 학교 옆에 있던 산이 없어졌어. 그리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자라고 있어. 이게 말이 돼.” 우리는 아무리 더워도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기후 비상사태는 분명 인재(人災)이기 때문에.

2016-05-25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김현욱 시인“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신동엽 시인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전문입니다. 신동엽 시인 하면 으레, `껍데기는 가라`를 떠올립니다. 자유와 저항의 시인이라고 불리지만 제가 봤을 때 신동엽 시인은 수도자, 구도자의 그것과 더 가깝습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서 `하늘`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먹구름`, `쇠 항아리`는 또 무엇일까요? 시를 다시 한 번 정독해보시기 바랍니다. 문학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와 구원의 차원에 가닿은 시편입니다.원효는 무덤 속에서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을 깨달았습니다. “어젯밤 잠자리는 흙굴이어서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무덤 속이라 매우 뒤숭숭하구나. 알겠도다. 마음이 생겨나므로 수많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흙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구나. 또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의식일 뿐이니,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원효가 깨달은 것은 인간은 누구나 제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신동엽 시인의 `쇠 항아리`를 저마다 덮어쓴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벗을 수 없는 쇠 항아리. 이 얼마나 끔찍하고 몸서리 칠 일입니까? 그러니 삶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일 수밖에요.“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주인을 따르듯이.” 법정 스님이 옮긴 `진리의 말씀`(나무를 심는 사람, 1999)에도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라고 합니다.혜능도 금강경 구결의 서문 첫머리에서 `무주위체`라고 했습니다. `토대를 허무는 것이 불도의 관건`이란 선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색안경을 쓴 채 살아갑니다. 쇠 항아리를 덮어쓴 채 그 속이 세상 전부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색안경을 벗고 쇠 항아리를 깨부수는 것. 그게 바로 `무주위체`입니다.금강경의 유명한 사구게입니다. “네가 존재한다고 믿는 그것들은 객관적 실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네 의지와 관심의 투영, 다시 말해 너의 그림자일 뿐이다. 이 사태를 선명히 자각할 때, 그때 너는 붓다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붓다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늘을 보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애초에 없습니다. 내가 바로 먹구름이고 내가 바로 쇠 항아리입니다. 내가 그림자이고 허상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구원의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외경과 연민에 떨고 싶습니다.

2016-05-23

몽골은 지금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세상이 꿀 향으로 달달하다. 산이든, 길이든 숟가락을 대기만 하면 달콤한 꿀이 숟가락 가득 담겨질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이 자신들의 소명인 양 자신들을 아프게 한 인간들을 위해 자연은 온 힘을 다해 철마다 해야 할 일을 성실히 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고마움도 모르는 인간들은 얼마나 더 아파야 철이 들지?그나마 철을 어기지 않고 제 할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농부들이다. 지금 과수원에 가보면 정겨운 가위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 손에 들려진 사과는 농부들의 선택과 집중의 결실물이다. 과수 농사 용어 중에 적과(摘果), 즉 열매솎기가 있다. 사과나무는 보통 한 꽃 눈에서 다섯 개의 열매를 단다. 그것을 그대로 두면 모두가 제대로 된 과일로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아깝지만 농부들은 한 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잘라 준다. 농부들은 한 개의 제대로 된 사과를 키우기 위해 아무리 큰 사과나무라도 모든 가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그 정성이 여름과 가을로 이어져 결국 하나의 먹음직스러운 사과가 탄생한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사과는 엄청난 생존 경쟁을 뚫고 선택을 받은 결과물이다. 선택과 집중! 세상 모든 일을 사과 농사짓는 것처럼 한다면 이 나라는 분명 꿀 향 가득한 살맛나는 사회가 될 것이다.철없는 우리 사회가 `옥시와 임의 행진곡`에 발목 잡혀 할 일을 못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철든 농촌은 밤낮 없이 바쁘다. 과수원이 그렇고, 들판이 그렇다. 우리의 들판을 보라. 그동안 휑하던 논들에 물이 차오른 것이 보이는가. 그 물은 자연이 베푸는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농부님들이 그 동안 내린 봄비를 정화수 담듯 정성껏 간직한 물이다. 농부들은 논물을 받아 놓고 논갈이 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갈고닦았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 그 논물에는 달이 수도 없이 뜨고 졌다. 그리고 계절을 건너는 바람들이 지난해의 풍년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흩날리는 꽃잎들은 찬란한 오색 단풍을 예고하였다. 우리가 먹는 밥에 윤기가 가득한 건 바로 자연과 농부의 합치된 마음 덕분이다.비록 우리 사회는 한 점의 희망조차 내다 볼 수 없는 철없는 암흑사회이지만, 그래도 우리 농촌만은 신바람 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지금의 사회상과 비교해서 우리 농촌에 가장 어울리는 말은 “더러운 곳에 머물더라도 항상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라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이 아닐까 싶다. 부디 지금의 오염된 정치와 사회가 우리 농촌의 신바람만은 막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필자는 지난 주 지금 우리 농촌의 신바람을 몽골에서 보고 왔다. 산자연중학교에는 해외이동수업이라는 특성화 교과가 있다.필자는 해외이동수업을 위해 작년에 이어 5월 연휴를 이용해 몽골을 다녀왔다. 그런데 거기서 분명 보았다, 신바람 나는 몽골을. 몽골은 작년과 달랐다. 그 다름은 공항에서부터 느껴졌다.여러 번 뚫린 우리의 공항과는 달리 꼼꼼한 검색이 필자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 당황스러움은 큰 공사들이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곳곳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필자는 몽골 사람들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통해 그것이 당황이 아닌 부러움임을 알았다.일 년도 안 되어 우리와는 너무도 다르게 변해버린 몽골! 그 이유를 현지 사람들은 7월에 있을 아셈(ASEM), 즉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ia-Europe Meeting)` 때문이라고 했다. 몽골 건국 이래 처음으로 열리는 국제회의 준비에 몽골 전체가 신바람이 나있었다.꿀 향으로 가득한 5월, 우리는 언제 몽골의 신바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신바람 넘치는 몽골이 마냥 부럽다.

2016-05-18

현대의 화랑(gallery)역할에 관하여

▲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지난달 21~25일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BAMA)를 시작으로 국내 미술품견본시장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이제는 일반인들에게 아트페어란 단어는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한번쯤은 언론을 통해 접해 봤을 것이며, 미술에 약간의 관심만 있어도 한번쯤 관람해 보았을 정도로 보편화된 행사로 여겨지고 있다. 미술품견본시장을 뜻하는 아트페어(Art Fair)는 보통 다수의 화랑들이 한 장소에 모여 작품을 판매하는 행사를 말한다. 때로는 작가 개인이 참여하는 형식도 있지만 시장의 정상적인 기능을 활성화하고 화랑간의 정보교환, 작품판매 촉진과 시장의 확대를 위해 주로 화랑들이 주최해 화랑간의 연합으로 개최되고 있다. 미술품 구매와 무관하게 그저 눈요기를 위해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러한 관람객들의 꾸준한 증가세는 작가들과 화랑 관계자들에게 그나마 큰 힘이 되고 있다. 지금 당장은 경제적인 이유로 구매가 힘들더라도 꾸준한 관람과 관심이 이어진다면 언젠가 미술품에 투자할 수 있는 고객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관람객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고가의 미술품을 구입하는 사람들만이 콜렉터(collector)는 아니다. 100여 만원 미만의 저렴한 작품을 구입하는 일반인들도 훌륭한 콜렉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거대한 성을 건설하는데 조그마한 벽돌 하나를 쌓아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록 조그마한 벽돌이지만 예술이란 커다란 성을 지탱하게 해주는 초석 역할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오늘날 예술은 모든 대중들을 수용자로 채택하고 대중문화로서의 대중예술을 지향하고 있다. 즉 예술의 대중화는 예술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 미술을 비롯해 전 장르의 예술은 이제 더이상 소수 부유층들만의 전유물이 되지 않으며,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가고 있다. 미술 분야의 경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트페어를 비롯해 다양한 미술행사들이 연이어 개최되고 있으며 이러한 행사를 주도적으로 개최해 나가고 있는 공간들을 우리는 화랑(gallery)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현대 미술시장에 있어 화랑의 역할이 점점 중요시 되고 있으며 그 기능 또한 점차 확대되어 지고 있다.세계 미술시장의 역사를 먼저 살펴보면 1540년 네덜란드 앤트워프에 미술품거래소가 처음 설립되었으며, 1640년 유트리히트에서 `길드조합`의 미술 전람회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그 후, 1763년 헤그에서 열린 길드전시에서 여러 규칙이 개정되었고 초창기 성격으로서의 미술시장이 처음 시도되었다. 그리고 1870년대부터는 프랑스에서는 혁신적인 화랑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신진작가들을 발굴하고 후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1932년에는 세계 최초의 화랑협회가 영국에서 결성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본격적인 활동을 이어 나갔다. 우리나라 화랑 역사는 1950년대 최초의 근대 화랑인 반도화랑이 서울에 생겨나면서 본격적인 국내미술시장이 형성 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60년이라는 짧은 화랑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미술시장은 세계미술시장의 흐름에 적잖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우수한 화가들도 발굴해 세계 미술시장에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기능을 하는 화랑은 문화적 공간이면서 사업공간이기도 하다. 화랑을 운영하는 화상들은 예술 사업가이며 때론 미술애호가로서 작가들에게 미적 안목과 상업적 안목이 어우러진 조언을 아끼지 않는 동반자이다. 한마디로 화랑은 사회적 공간과 직결된 예술 공간이다. 이곳을 통해 작가와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시켜주고 작가들에겐 창작을 지원하며, 미술품 매매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는 제2 창조의 공간인 셈이다. 이번 주말 가족 봄나들이로 가까운 화랑을 찾아 전시를 관람하는 여유를 가지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2016-05-17

유네스코 학교 네트워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잔인한 4월이 끝났다.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다.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된다는 말이 있지만 여전히 이 나라 국민들은 고난의 길 위에서 하루하루 힘든 삶을 살고 있다. 언제 허리 한 번 쭉 펴고 눈부시도록 파란 5월의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을까. 학생들은 껍데기 시험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어른들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경제 불황에 빠져 겨우 숨만 쉬고 있다.수식어가 많은 5월답게 기념일도 참 많다. 근로자의 날,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석가탄신일, 스승의 날 등 어느 하나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날이다. 하지만 “가난한 집에 제사 돌아오듯”이라는 속담처럼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5월의 기념일들은 어쩌면 우리가 사는, 또 살아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힘이 들어도 이런 기념일들을 정성껏 챙긴다. 바쁘다는 핑계로 많이 놀아 주지 못한 아이들, 같은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들은 분명 우리의 삶의 이유이다. 5월엔 이들 기념일 말고도 민주화 운동 기념일, 성년의 날, 발명의 날, 세계인의 날, 부부의 날, 바다의 날 등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날들이 참 많다.5월의 많은 기념일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사랑과 감사다. 우리는 안다. 고마움, 미안함, 희생, 배려, 나눔 등이 5월과 동의어(同義語)라는 것을. 이들 단어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난 말들이다. 고맙기에 더 미안하고, 미안하기에 더 사랑스러운 것이 곧 사람이다.지난 주 토요일 산자연중학교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내걸렸다. 만국기만큼 많은 사람들이 산자연중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비록 저마다 말씨는 달랐지만, 사람들은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운동장 한편에서는 아버지들이 아이들을 위해 숯불을 피웠고, 또 한편에서는 어머니들께서 전국의 산해진미를 맛깔스럽게 차렸다.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마음껏 자신들의 기량을 뽐냈다. 점심 상 앞에서 학생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 되었다.점심시간 이후 학부모들이 체육관으로 모였다. 학부모들의 손에는 정성이 가득 담긴 보따리들이 들려있었다. 체육관 안에는 학부모들이 미리 가져다 놓은 물건들이 산을 이루었다. 보따리를 풀 때마다 그 속에서는 잘 말린 햇살 향 가득한 옷가지들과 신발, 학용품 등이 쏟아져 나왔다. 학부모들은 그것들을 다시 택배 상자 안에 정성스럽게 담았다. 상자 위엔 `몽골 쎈뽈초등학교 후원 물품`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박스가 무려 72개가 넘었다. 포장을 끝낸 학부모님들의 얼굴엔 비오듯 흐르는 땀과 함께 환희의 찬가가 울려 퍼졌다.마치 드라마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이야기 같지만, 이 이야기는 지난 주 산자연중학교 가족 운동회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안전사고 걱정 때문에 수학여행조차 못 가게 하는 학교장이 있는가 하면, 치맛바람 풀풀 날리는 시간 때우기 식의 형식적인 행사로 전락해버린 체육대회가 부지기수인 일반학교의 삭막한 모습과는 분명 다르다.아무리 세상이 급변해도 우리는 우리가 꼭 지키고 보존해야 할 것들이 있다. 유네스코는 이런 인류의 문화재들을 세계 문화유산이라고 해서 보전 하고 있다. 교육 또한 보존해야할 가치가 있는 교육이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유네스코 학교 네트워크라 하여 이런 교육을 발굴 보존하고 있다. 비록 교육부와 경상북도 교육청은 외면하고 있지만, 유네스코는 산자연중학교의 교육 가치를 인정해 올해 산자연중학교를 유네스코 학교로 지정하였다. 유네스코 학교들에 의해 절망의 늪에 빠진 우리 교육이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길 가정의 5월에 기원해 본다.

2016-05-12

금수저와 헬조선

▲ 강희룡 서예가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손꼽히는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소전주(小田主)를 몰락시켜 빈부격차를 심화시켰던 소수 권문세가(權門勢家)들의 토지 독점을 제한해야 한다는 한전제(限田制)를 주장했다. 또한 실속 없이 고담준론만 일삼아 지탄을 받던 선비들도 농업이나 생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을,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평가는 신분적 또는 족벌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개인의 재능과 실적을 준거로 삼아야 한다는 양천합일(良賤合一)도 주장했다.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반향을 불러일으킨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은 유럽에서는 별로였으나 미국에서는 유럽발 허리케인이 되어 세계적인 경제석학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은 부가 부를 쌓으면 신계급사회인 세습자본주의 시대가 오며, 이 세습자본주의가 능력주의 가치를 박탈하며 건강한 자본주의를 좀먹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 경제학자의 이러한 이론과 18세기 이익 선생의 견해를 견주어보면 그 핵심논리는 비슷하다고 하겠다.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금수저니 흙수저니 또는 헬(hell)조선이니 하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이는 부의 측면에서 한국의 부자는 4명 중 3명이 선대의 부를 세습 받은 금수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일본은 10명 중 8명은 흙수저가 부호 대열에 합류하였고, 가장 빨리 세계 부호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중국은 상속부자 비율이 고작 2%에 불과했다. 세계에서 상속부자 비율이 가장 높은 한국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제는 속담에 불과하게 됐다.법조에서는 사법고시로 획일화 된 법조인 선발체계를 유연화하고, 학부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의 사전지식을 습득하게 해 법조인의 전문성을 키운다는 취지로 2009년 도입된 로스쿨제도가 `현대판 음서제`라는 의혹들이 진실로 다가올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즉 로스쿨에 입학했거나, 하려는 학생이 자기소개서에 고위층 부모나 친인척의 신상을 거론하여 합격의 특혜를 받거나 성적에 특혜를 받고 있다는 의혹이 로스쿨 교수의 저서가 발간되면서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형평(衡平)의 배지를 달고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척결,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법의 정의를 세워야 할 사람들이 부모나 인친척의 지위를 이용하는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인간은 누구나 행동에 앞서 먼저 그것이 긴요한지 아닌지터 판단한다. 그런데 그 긴요함을 판단하는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에게 긴요한지 만을 따지지만, 어떤 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와 국가, 심지어는 세계를 판단 범위에 두고 긴요한지 여부를 고민한다. 전자가 이기적인 긴요함이라면 후자는 이타적인 긴요함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전자를 좇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에는 갈등과 부패가 만연하고, 후자를 추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안정되고 배려가 넘쳐난다.재미교포 한인 2세인 하버드대학생 조지프 최(최민우)씨는 아베 신조 총리가 위안부 문제를 사과하지 않음을 정당한 논리로 지적하고, 미국 공화당의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의 `한국의 안보무임승차론`이라는 황당한 궤변에 대해 설전을 벌였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그는 트럼프후보나 아베 총리의 잘못을 짚은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이들의 행태를 바로잡고 싶어서였다”고 설명했다.법관이 되고자 하는 욕심을 앞세워 부모나 친척의 이름을 파는 로스쿨 생들이나 그의 부모들은 부끄러운 자신을 돌아보고 그동안 사회에 높였던 자신들의 명예를 스스로 거두어야 한다.만약 이런 그늘진 방식을 통해 법관이 되면 이 사회는 부정과 부패는 난무하고 올바른 법치는 사라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문벌귀족에게만 권력을 대물림하던 지난 왕조국의 음서제 망령이 되살아난다면 소수를 제외한 일반 국민들에게는 힘들고 희망이 없는 국가 `헬조선`이 될 것이다.

2016-05-11

불편한 질문을 시작하자

▲ 황주환안강여중 교사 몇 달 전 우연히 보게 된 동영상은 감동적이었다. 외국의 어느 한 음악교사가 병마와 싸우고 있었는데 그 교사를 응원하기 위해 졸업한 제자들이 하나 둘 나타나며 합창을 하는 장면이었다. 졸업생들은 방황하던 학창시절 그 교사의 헌신적인 사랑에 힘입어 자기 삶의 중심을 잡았다며 회고했다. 학생들의 노래에 교사는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좀처럼 댓글을 보지 않지만 그 감동적인 동영상에 수많은 감동적인 사연이 덧붙여졌을 거란 예상으로 댓글을 클릭했다. 그런데 그곳엔 미담도 감동도 없었다. 오직 우리의 학교를 비난하는 말들만 있었다. 초중고 학창시절 자기가 왜 그런 모욕을 받아야 했는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분노에서부터 교사에 대한 증오와 복수를 다짐하는 댓글이 주렁주렁 이어졌다. 교사의 실명까지 언급하며 매달아 놓은 증오와 복수의 언어에 나는 한참이나 망연했다.우리는 학교를 말할 때 대체로 아름다운 말과 온화한 미담을 내세운다. 지나간 옛 청춘을 추억하며 학교도 아름답게 채색한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학교를 왜 지금 학생들은 모두 벗어나고 싶어할까. 왜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고 폭력을 행사하고 그리고 자살까지 하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본 댓글, 그 네티즌들이 쏟아낸 증오의 학교 기억들은 수많은 학교 미담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보다 더 수많은 학교의 고통이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학교는 아름답지 않다. 학교의 소소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아름답지 않다고 학교에 오래 있은 나는 말할 수 있다. 찾아보면 우리의 학교는 외국의 그것보다 더 감동적인 장면이 많을 테지만 그렇다 해서 우리의 학교가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는 곳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언제나 억압과 복종과 경쟁의 공간이니까. 되짚어보면 나도 그러했고 여러분도 그러했으리라.나는 그런 학교의 교사다. 그래서 나 역시 아이들처럼 학교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교사로 오래 있으면서 우리 교육이 강제하는 수많은 불합리와 억압에 힘들어 하며 아이들만큼이나 학교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하나 둘 의문이 일었고 나 자신에게 질문하기 시작하면서 힘을 얻었다. 내 옛 학창시절 당연하게 여겼던 학교를, 당연하게 여겼던 사회의 모습들을 다시 질문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학교와 사회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한국 사회에서 교육만큼 비판하기 쉬운 주제가 또 있을까 싶다. 모든 국민이 학교를 경험했기에 모든 국민이 학교 비판에 자신감이 넘친다. “아이와 부모 모두 이렇게 힘든 교육이 정상인가?”“이 엄청난 사교육비라니! 학교는 도대체 무얼 하는 거야?” 타당한 비판이다. 그런데 모두가 비판하는 학교 교육이 도대체 왜 바뀌지 않는 것일까? 이건 옳지 않다고 모두가 비난하는 데도 말이다.불편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우리의 학교가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학교를 잘 알고 있다는 자기 확신 때문이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그 방식대로만 생각하고 있기에, 지금 학교 교육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우리의 교육을 비판하지만 이 교육을 잉태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로 서로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기도 해야 한다.내가 가진 아름다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지금 아이들의 학교 고통을 먼저 묻는 것이 아이들에 대한 예의 아니겠는가. 그 동영상의 헌신적인 교사를 칭송하는 것보다 상처받은 댓글들에 먼저 응답하는 것이 지금 우리 교육 고통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다.

2016-05-10

진로교육의 선행조건

▲ 임선애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부우리가 사는 세계의 변화가 너무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변화에 대응하려는 교육계의 움직임도 역동적으로 보인다. 2015년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제정된 법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7월에는 인성교육법이 시행돼서 한동안 온 세상이 `인성`이라는 키워드로 분주하다가, 12월에는 진로교육법이 시행돼서 `취업난`과 함께 `진로`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를 뜨겁게 하고 있다. 또한 12월의 마지막 날에는 인문학진흥법 제정안이 국회본회의를 통과해서 각종 국가지원사업에서 한동안 소홀했던 인문학 교육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인성, 취업, 인문학은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 단어들이다. 취업의 현장에서는 인성이 좋고 지혜로운 인재를 찾기 때문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한 인간이 취업은 물론이고 직업의 세계를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뤄야 하고, 삶에 대한 통찰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인성을 갈고 닦아야 하고, 삶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인문학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할 것이다. 취업을 한다는 것은 직업을 선택하는 일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직업을 선택하는 문제는 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여정 중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에 시차를 두고 숙고해야 할 문제인데, 한동안 우리는 직업 선택의 문제를 취업의 문제로 한정하고 대학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로 여겨왔다. `학생 자신의 진로를 창의적으로 개발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성숙한 민주시민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데 목표`를 두고 있는 진로교육법은 초등학교 때부터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고 고민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자신이 선택하는 직업과 행복한 삶이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교과부에서 기획한 진로교육의 구체적인 목표는 자아 이해와 사회적 역량 개발, 일과 직업세계의 이해, 진로탐색, 진로 디자인과 준비 등 네 가지로 설정돼 있다. 한 인간은 사회적인 관계망 속의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탐색과 역량개발을 통해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재가 되기 위해 일정한 직업을 가지고 직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활동을 통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논리는 누가 봐도 그럴 듯하다. 이처럼 선한 취지에서 시작하는 진로교육은 몇 가지 선행조건들을 생각할 때 성공할 수 있다.첫째, 학생들이 자신들의 행복한 삶을 위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할 것이다. 진로교육 담당 교사들은 AI로 인해 새로 생겨나는 일자리가 200만 개, 사라지는 일자리가 700만 개로 예측하는 다보스포럼, 미국 내 700여 개 직업 중 절반이 20년 내 AI로 대체될 것으로 예측하는 옥스퍼드대 연구팀의 통계를 주의 깊게 참조해야 한다. 또한 학생들이 직업세계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확보하게 하고, 직업을 위한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둘째, 직업 이전에 세계의 변화를 읽을 줄 아는 거시적인 안목을 길러주는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싱귤래리티(singularity·특이점)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시점을 의미하는데 이 시기가 되면 세계의 변화는 예측의 가능성 희미해진다고 한다. 예측불가능한 세계에서 생겨나는 직업의 종류 또한 예측불가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셋째, 학생 스스로가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을 길러주는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교육은 자기 교육이라고 했다. 진로교과목이 교과과정의 한 교과목으로 생겨나면서 주입식으로 지식을 전수하는 교과목이 돼서는 안 된다. 학생 스스로가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사유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교육이 되도록 교사들은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16-05-09

예술이란 이름 뒤의 일탈행위

▲ 강희룡 서예가예술은 하나의 기술, 즉 어떤 사물을 만드는 기술이고 이 기술은 규칙에 대한 지식과 그 규칙을 적용시킬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한 규칙들을 알고 이용하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예술가인 것이다. 예술을 이렇게 파악하는 데는 독특한 전제가 있다. 즉 자연은 완전하며 인간은 행위함에 있어 스스로 자연과 비슷하게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법칙의 지배를 받으므로 예술가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해서 거기에 따라야 하며 자유를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유는 예술가가 자신의 행위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에서부터 쉽게 비껴나기 때문이다. 미가 주관적으로 해석되었을 때는 이미 그 위대성을 상실한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미의 주관주의적 원리를 받아들이면서도 객관적 보편적 요소들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많은 예술 장르 중 사진을 예술의 범주에 넣느냐 마느냐는 아직까지 논란의 중심에 있다. 사진가의 작업은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 사회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상호 교감하고 주석을 붙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사진을 제작하는 모든 과정은 인생을 깊이 있고 풍부하게 그리고 더 다양하고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서다. 사진은 아주 짧은 순간을 정지시켜 표현하는 예술행위이다. 감동을 일으키도록 찍은 사진세상의 모든 대상이 사진이라는 기계적 복제로 예술의 이름으로 발표된다면 이것은 가장 저급한 예술이 될 것이다. 사진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보다는 시대의 정신과 삶을 정제된 이미지 형태로 보여주어야 한다.약대를 졸업한 약사 출신의 어느 노 사진가의 금강송 사진전이 지난 4월 11일부터 15일 동안 서울예술의전당에서 열렸다. 강원도 평창 반경 50㎞ 내에 있는 설악산과 오대산 등 해발 500m 이상 산에서 찍은 소나무 작품 60여 점이 전시되었다.문제는 이 작가가 2011년부터 2년 동안 경북 울진의 입산이 금지된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에서 세 차례에 걸쳐 무단 입산하여 수령 200년이 훨씬 넘은 금강송을 포함해 나무 수십 그루를 임의로 벤 혐의로 2014년 법원의 선고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사진가가 본인 맘에 드는 금강송 한 그루를 찍기 위해 사진구도 설정에 방해가 된다고 주변의 수 백 년 된 다른 금강송을 비롯해 수십여 그루의 나무들을 마구 톱질하여 잘라버린 것이다. 이런 엽기적인 사건이 뒤늦게서야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작가 사진속의 금강송도 두 개의 가지가 맘에 안 든다고 잘려나간 상태로 찍혀 전시되었다. 그 잘려진 두 개의 가지가 원래 어떤 자연형태이었는지는 톱질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에서 한 사진가의 일그러진 예술적 논리와 세속적 탐욕에 의해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고작 사진 몇 장을 찍기 위해서 안타깝게도 수 백 년 동안 풍상을 견뎌온 노송들과 주변의 나무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잘려졌을 것이라고는 감히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50년간 300여 점을 찍었다 한다. 이 긴 세월동안 찍은 사진 속에 있는 금강송 주변의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훼손되었는지는 그 일행들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금강송 사진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2012년 5월 프랑스 파리 시청 국제미술관 전시를 통해서였다. 경상북도와 울진군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 그가 프랑스까지 가서 금강송 파리사진전까지 열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문화체육관광부장관까지 참석해 격려사를 하기도 했다고 하니 아무리 몰랐다 하나 그 모양이 참 우습게 되었다.작품대상은 예술적인 시각에서의 자연적인 미로 그것이 하나의 예술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사진가라면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돈이나 명예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애초에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이런 일탈행위는 결국 이미지로 포장된 추악함이 인간 내면세계를 감싸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천하의 완전한 예술은 `자연`그대로가 아닌가.

2016-05-04

도시의 미래

▲ 류영재 포항예총회장지난 주말 정원의 고장 순천에서 `생태문화수도 순천의 미래 비전`이라는 심포지엄을 겸하여 전국예총 임원회의가 있어 다녀왔다. 우주선 나로호의 성공적 발사로 유명해진 고흥반도는 위작문제로 절필을 선언하고 만년을 타국에서 외롭게 지내다 지난해 타계 소식을 접하여 몹시 안타까워했던 화가 천경자의 고향이며 유자가 많이 나는 곳이라 `물산이 풍부한 고장`으로 기억되고 있었던 곳이다.내 눈에 비친 그곳은 신선한 바람과 넓은 들판, 넉넉한 태양, 신록이 반짝이는 연초록의 들판 사이로 군데군데 드러난 붉은색 황토 등 전형적인 남도의 풍경이었으며 누가봐도 감탄사가 절로 나는, 혼자서만 보기 아까운 절경이었다.순천시는 올해들어 `아시아 생태문화수도`추진전략을 제시하며 순천을 `도시가 아니라 정원`이라 규정하고 자연친화 생태중심의 도시임을 천명했다. 2013년 전격적으로 국제정원박람회 유치 신청을 하였고, 그 당시까지 우리 정서에는 생소하였던 형식의 박람회를 창의적인 신념으로 개최하였다. 순천만 국가정원 조성의 성공은 엄청난 경제효과와 일자리 창출을 하였고, 지방의 작은 도시였던 순천은 미래형 생태환경 친화도시의 대표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창의적인 생각과 생태문화가 산업이 된 것이다도시는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이다. 모든 도시가 생성되고 성장하며 쇠락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며 산업도시의 경우 주력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 도시의 명운도 함께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회생의 대안이 문화예술이었던 사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미래사회를 주도하는 산업은 자연, 생태, 문화, 예술 등의 환경과 창의성이 바탕이 되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천년이 지나도 마르지 않을 샘이며 해가 거듭될수록 깊어지는 샘물, 굴뚝 없는 공장이 바로 문화공장이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순천만과 갈대숲, 국가정원은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어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고, 정원은 박람회 개최 당시보다 한결 더 자연스럽고 풍성한 모습으로 완성되어가고 있었기에 부러운 생각과 함께 옛 포항의 갈대밭에 대한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영일만의 무성하던 갈대숲은 포스코의 건설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적어도 지난 50년은 산업생산이 자연환경보다는 훨씬 더 효과적인 먹거리였음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덕분에 포항시가 오늘날과 같은 대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고, 포스코는 여전히 우리 도시의 대표적인 먹거리로 기능하고 있다.그러나 현대는 산업생산의 시대에서 생태환경과 문화예술의 시대로 빠르게 변해가고 있으며,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하다. 지금 포항시는 창조도시를 표방하며 여러 분야에서 변모를 추구하고 있다.필자도 창조도시 분과위원으로 참석하여 송도동 구항의 시멘트 공장 이전 부지에 문화공장 건설의 필요성에 대하여 발언한 적이 있다. 포항의 명운을 좌우할 랜드마크가 될 건축물의 입지조건을 갖춘 곳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포항의 심장인 그곳에 공론을 통하여 정말 멋진`아트센터`가 건립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중심축이었던 창원시도 `대한민국 문화예술특별시` 추진을 선포하고,`동양의 구겐하임미술관` 건립 계획을 수립하여 빌바오(구겐하임 분관 건립으로 도시재생에 성공함)와 협약을 체결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남들이 한다고 해서 우리도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변화에 대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잘 알고 있다.송도, 그곳에 가장 포항다운 랜드마크 건립을 위하여 머리를 맞대야 할 때라는 생각에 갑자기 조급해진다.

2016-05-03

난향(香)에 젖어

▲ 차봉준 숭실대 교수·베어드학부대학법정 스님의 글 `무소유(無所有)`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난()을 키우는 것이 여간 많은 정성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줘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스님의 말처럼 여간한 정성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난을 돌보는 일이다. 적어도 내게는 분명 그러하다.교직에 몸담고 있다 보니 이러저러한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마다 으레 난 화분이 선물로 들어온다. 아마도 난초가 지닌 고고한 군자의 기품을 배우라는 것과 학자로서의 품위를 잃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선물이 곤혹스러운 까닭은 군자니, 학자니 하는 의미가 부담스러워서라기보다는 얼마나 오랜 시간 식물로서의 생(生)을 이어가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다. 그렇다. 나는 식물을 키우는 능력에 있어서는 젬병이다. 아무리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견디는 것을 가져다주어도 내 손에서만은 단명(短命)하고 만다. 이 지경이니 어떤 화초보다도 까다로운 난초는 더 말해 뭐하겠는가.한 열흘 전쯤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 일찍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와 일상의 행위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하루의 일정들을 확인했다. 메일함을 열어서는 간밤에 들어온 이러저러한 문서들을 확인하며 불필요한 것들은 지워나갔다. 그런 중에 이상한 냄새가 계속해서 풍겨오는 것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냄새지?`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한참 만에 눈에 들어온 냄새의 실체를 확인하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냄새라기보다는 향기(香氣)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벌써 4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창가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난초에 하얀 꽃들이 피어있었던 것이다. 주인의 무심함에는 아랑곳없이 자신만의 자태를 맘껏 뽐내며 작은 꽃잎을 활짝 펼쳐 든 그 모습에서 많은 생각이 스쳐가기 시작했다.그 중에 하나. 바로 그 화분을 나에게 선물로 보낸 분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지난해 여름 칠순(七旬)의 짧은 생을 마감한 스승님이 제자가 교수 자리를 얻을 걸 축하하며 손수 들고 온 화분이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화분 가득히 꽃들이 만개해 있었지만, 역시 내 손을 거치는 모든 식물들이 그러하듯 그 화려함은 오래가지 못했고, 심지어 4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개화도 보여주지 않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2년 전쯤에는 거의 말라 죽었다 생각되어 문밖에 내 놓았던 걸 연구실 청소를 해 주시던 아주머니가 다시 살려낸 후 지금의 자리에 가져다 둔 것이다. 물론 그 후로도 가끔씩 생각날 때 수분만 공급할 뿐이었지, 각별한 정성을 쏟아 부은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꽃이라니.그 날 이후로 아침에 방문을 열 때마다 이 녀석을 가장 먼저 살피는 버릇이 생기게 됐다. 간밤에 별일은 없었는지, 혹 다른 잎사귀에도 꽃이 피지는 않았는지.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의하자면 버려야 할 `집착`이 생겨버린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집착에 잠시 더 매여 있을 작정이다. 기분 좋은 흥분거리가 없는 요즘에 이런 정도에 작은 집착을 보이며 지내는 것이야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것 같다. 나는 오늘 아침도 방문을 열자마자 풍겨오는 난향(香)에 젖어 이백(李白)의 시 한 수를 읊어본다. “풀이 되려거든 난초가 되고(爲草當作) / 나무가 되려거든 솔이 되려무나(爲木當作松) /난초는 그윽하여 향풍이 멀리 가고(幽香風遠)/솔은 추워도 그 모습을 아니 바꾸나니(松寒不改容).”

2016-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