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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향(香)에 젖어

등록일 2016-05-02 02:01 게재일 2016-05-0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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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봉준<br /><br />숭실대 교수·베어드학부대학
▲ 차봉준 숭실대 교수·베어드학부대학

법정 스님의 글 `무소유(無所有)`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난()을 키우는 것이 여간 많은 정성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줘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스님의 말처럼 여간한 정성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난을 돌보는 일이다. 적어도 내게는 분명 그러하다.

교직에 몸담고 있다 보니 이러저러한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마다 으레 난 화분이 선물로 들어온다. 아마도 난초가 지닌 고고한 군자의 기품을 배우라는 것과 학자로서의 품위를 잃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선물이 곤혹스러운 까닭은 군자니, 학자니 하는 의미가 부담스러워서라기보다는 얼마나 오랜 시간 식물로서의 생(生)을 이어가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다. 그렇다. 나는 식물을 키우는 능력에 있어서는 젬병이다. 아무리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견디는 것을 가져다주어도 내 손에서만은 단명(短命)하고 만다. 이 지경이니 어떤 화초보다도 까다로운 난초는 더 말해 뭐하겠는가.

한 열흘 전쯤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 일찍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와 일상의 행위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하루의 일정들을 확인했다. 메일함을 열어서는 간밤에 들어온 이러저러한 문서들을 확인하며 불필요한 것들은 지워나갔다. 그런 중에 이상한 냄새가 계속해서 풍겨오는 것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냄새지?`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한참 만에 눈에 들어온 냄새의 실체를 확인하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냄새라기보다는 향기(香氣)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벌써 4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창가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난초에 하얀 꽃들이 피어있었던 것이다. 주인의 무심함에는 아랑곳없이 자신만의 자태를 맘껏 뽐내며 작은 꽃잎을 활짝 펼쳐 든 그 모습에서 많은 생각이 스쳐가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하나. 바로 그 화분을 나에게 선물로 보낸 분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지난해 여름 칠순(七旬)의 짧은 생을 마감한 스승님이 제자가 교수 자리를 얻을 걸 축하하며 손수 들고 온 화분이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화분 가득히 꽃들이 만개해 있었지만, 역시 내 손을 거치는 모든 식물들이 그러하듯 그 화려함은 오래가지 못했고, 심지어 4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개화도 보여주지 않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2년 전쯤에는 거의 말라 죽었다 생각되어 문밖에 내 놓았던 걸 연구실 청소를 해 주시던 아주머니가 다시 살려낸 후 지금의 자리에 가져다 둔 것이다. 물론 그 후로도 가끔씩 생각날 때 수분만 공급할 뿐이었지, 각별한 정성을 쏟아 부은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꽃이라니.

그 날 이후로 아침에 방문을 열 때마다 이 녀석을 가장 먼저 살피는 버릇이 생기게 됐다. 간밤에 별일은 없었는지, 혹 다른 잎사귀에도 꽃이 피지는 않았는지.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의하자면 버려야 할 `집착`이 생겨버린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집착에 잠시 더 매여 있을 작정이다. 기분 좋은 흥분거리가 없는 요즘에 이런 정도에 작은 집착을 보이며 지내는 것이야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것 같다. 나는 오늘 아침도 방문을 열자마자 풍겨오는 난향(香)에 젖어 이백(李白)의 시 한 수를 읊어본다. “풀이 되려거든 난초가 되고(爲草當作) / 나무가 되려거든 솔이 되려무나(爲木當作松) /난초는 그윽하여 향풍이 멀리 가고(幽香風遠)/솔은 추워도 그 모습을 아니 바꾸나니(松寒不改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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