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댓글을 보지 않지만 그 감동적인 동영상에 수많은 감동적인 사연이 덧붙여졌을 거란 예상으로 댓글을 클릭했다. 그런데 그곳엔 미담도 감동도 없었다. 오직 우리의 학교를 비난하는 말들만 있었다. 초중고 학창시절 자기가 왜 그런 모욕을 받아야 했는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분노에서부터 교사에 대한 증오와 복수를 다짐하는 댓글이 주렁주렁 이어졌다. 교사의 실명까지 언급하며 매달아 놓은 증오와 복수의 언어에 나는 한참이나 망연했다.
우리는 학교를 말할 때 대체로 아름다운 말과 온화한 미담을 내세운다. 지나간 옛 청춘을 추억하며 학교도 아름답게 채색한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학교를 왜 지금 학생들은 모두 벗어나고 싶어할까. 왜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고 폭력을 행사하고 그리고 자살까지 하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본 댓글, 그 네티즌들이 쏟아낸 증오의 학교 기억들은 수많은 학교 미담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보다 더 수많은 학교의 고통이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학교는 아름답지 않다. 학교의 소소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아름답지 않다고 학교에 오래 있은 나는 말할 수 있다. 찾아보면 우리의 학교는 외국의 그것보다 더 감동적인 장면이 많을 테지만 그렇다 해서 우리의 학교가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는 곳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언제나 억압과 복종과 경쟁의 공간이니까. 되짚어보면 나도 그러했고 여러분도 그러했으리라.
나는 그런 학교의 교사다. 그래서 나 역시 아이들처럼 학교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교사로 오래 있으면서 우리 교육이 강제하는 수많은 불합리와 억압에 힘들어 하며 아이들만큼이나 학교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하나 둘 의문이 일었고 나 자신에게 질문하기 시작하면서 힘을 얻었다. 내 옛 학창시절 당연하게 여겼던 학교를, 당연하게 여겼던 사회의 모습들을 다시 질문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학교와 사회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만큼 비판하기 쉬운 주제가 또 있을까 싶다. 모든 국민이 학교를 경험했기에 모든 국민이 학교 비판에 자신감이 넘친다. “아이와 부모 모두 이렇게 힘든 교육이 정상인가?”“이 엄청난 사교육비라니! 학교는 도대체 무얼 하는 거야?” 타당한 비판이다. 그런데 모두가 비판하는 학교 교육이 도대체 왜 바뀌지 않는 것일까? 이건 옳지 않다고 모두가 비난하는 데도 말이다.
불편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우리의 학교가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학교를 잘 알고 있다는 자기 확신 때문이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그 방식대로만 생각하고 있기에, 지금 학교 교육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우리의 교육을 비판하지만 이 교육을 잉태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로 서로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기도 해야 한다.
내가 가진 아름다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지금 아이들의 학교 고통을 먼저 묻는 것이 아이들에 대한 예의 아니겠는가. 그 동영상의 헌신적인 교사를 칭송하는 것보다 상처받은 댓글들에 먼저 응답하는 것이 지금 우리 교육 고통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