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면 뿌연 아카시아 꽃 흐드러지고 송홧가루가 마치 연막탄을 쏘아 놓은 것처럼 온 산천을 뒤덮어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나로서는 여간 괴로운 게 아니다. 꽃 피는 것이 반갑지 않을 리 없으나 올해는 꽃들이 유난스럽고 그 향기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온 세상을 진동한다. 이제 겨우 6월 초인데 툭하면 폭염주의보가 발령되는 걸 보니 자연의 시스템에 큰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인간도 자연과 같아서 잦은 변덕에 지치고 힘겹다.
예술가를 꿈꾸며 살아온 내 삶을 되돌아보니 예술창작 행위보다 오히려 예술 주변의 일들에 소진한 에너지가 너무 많지 않았던가 하는 회한이 깊다. 예전에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일이 특별한 경우로 여겨질 만큼 일반인들에게 미술은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요즘 이런저런 시민행사를 통해 접한 동호회나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연마한 일반인들의 작품이 전공한 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음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일반인과 예술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일반인의 작품과 예술가 작품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느 쪽에서 보나 우문이며 굳이 칸트의 예술철학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을 일이나 물끄러미 그런 생각에 빠져 드는 근원은 언제나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된다. 예술가를 꿈꾸며 청춘을 바쳐 미술을 전공했으나 막상 시대를 견인하는 작품은커녕, 바쁜 일상에 허덕이다 겨우 마감시간에 맞추어 전시장에 내걸린 그림이 민망해 마주보지도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곤 한다. 남에게 부끄러운 것보다 내 손을 통해 그려진 그림에게 부끄러운 건 또 무슨 마음일까? 그도 내가 만들어낸 생명체여서일까?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일까? 그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다음 세대 삶의 지표가 되고, 교육의 방향타가 되어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을 길러냄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요즘 문화센터나 평생교육원의 그림을 보면 서양의 19세기 미술과 비슷한 유형의 그림들이 많다. 대상을 사진으로 찍어서 그 외형을 그대로 그려내는 일, 빛에 의한 색채와 대상의 표면에 부딪쳐 반사되는 시각적 이미지와 감각들, 19세기의 치열했던 예술이 오늘날 삶의 여유를 즐기는 수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200년 전 빛을 쫓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다 실명한 화가들은 간데없고 오늘날 문화센터와 평생교육원의 여유로운 취미생들은 윤택한 삶을 위해 그때의 치열했던 예술을 현실에서 정신적 쾌감으로 향유하고 있다. 미래의 200년 후, 그때도 평생교육원과 문화센터가 있다면 거기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현대는 모든 예술의 벽이 허물어져 탈장르화 되고, 다른 장르와의 융합에 의한 시너지를 통해 강력한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시대정신을 이끌어 가는 게 오늘날 예술의 모습이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현대는 다양성의 시대라는 점이다. 말도 행동도 느린 나로선 이 시대의 예술이라는 물결의 속도가 부담스럽기 이를 데 없으니 말이다.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땐 본능적으로 개체를 보존하기 위한 절박한 환경임을 감지했을 경우라 한다. 이른 꽃들이 유난스럽고 갑자기 더워진 수상한 공기 속에서 마음의 불안을 느끼는 까닭도 이와 비슷할 것이며, 자연도 문명도 인간도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이기 때문이리라. 엄청난 지각 변동을 통해 생태계는 도태와 진화의 모습으로 정리되어 공룡처럼 없어지기도 하고, 메타세콰이어처럼 지구상 어디선가 300만년 동안을 기적처럼 살아남기도 할 것이다. 예술이란 그렇게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오랜 세월동안 스스로 진화를 거듭하며 견뎌내는 것이 아닐까?
200년 후 지금 이 자리엔 누가 있을까? 그들은 무엇을 하며, 어떤 예술품이 남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