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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뻔뻔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등록일 2016-05-31 02:01 게재일 2016-05-3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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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환<br /><br />안강여중 교사
▲ 황주환 안강여중 교사

한 살 때부터 목에 튜브를 달고 사는 아이의 사진, 무거운 산소통을 끌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초등학생 등굣길 사진에 할 말을 잃었다. 수많은 아이와 산모의 죽음, 그리고 평생 숨 쉴 수 없는 고통에 살아야할 사람이 얼마인지 확인조차 안 된다. 확인된 사망자만 150명을 넘었고 수십만 명이 피해를 입었단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살인`사건,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의 경과를 주목하며 나는 평소 갖고 있던 질문이 곧바로 다시 떠올랐다.

옥시 사태는 살균제 독성을 알면서도 제조하고 유통시킨 기업들, 독성실험 결과의 누락 혹은 조작 의심을 받는 서울대 교수, 그것을 사주 혹은 이용한 법률대리인 김앤장, 그리고 외국에서는 유독물질인 것을 한국에서는 유통 가능케 한 감독기관 관료, 그리고 사망자가 속출해도 나 몰라라 해온 정부의 무책임이 한 묶음으로 작동했다. 무엇이 이들을 하나로 묶게 했을까?

이 사태에 대해 많은 의견과 분노, 그리고 돈을 중심으로 모인 그들 비양심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교사인 나는 다른 질문을 하고 싶다. 이 사람들 모두 학창시절 성적이 어땠을까? 아마 이들 모두 학력 우수생이었을 것이다. 교사의 칭찬을 달고 지내며 우쭐했을 이들 성적 최우수 학생들이, 교수와 법률가 그리고 경영자와 고위관료가 되어서도 주변의 시선에 우쭐했을 테다.

한국사회에서 공부 잘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자.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이고 그래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 칭찬받는 것은 마땅하다. 이들 공부 잘한 학생들의 사회공헌 정도에 따라 사회는 이들에게 적절한 부와 권력을 부여하는 것일 테다. 그런데 옥시 사태에서 보듯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저지르는 사회범죄의 해악은 너무 크다. 전문지식과 지위를 이용해 수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수많은 가정에게 평생의 고통을 안겼다. 돈 많은 그들이 좀 더 많은 돈을 가지기 위해서!

사회에 해악이 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다양하다. 이는 공부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강남역 화장실 피해자 추모에 나선 것은 이 살인을 사회적 징후로 인식했기 때문이듯 모든 살인은 사회적 맥락을 가진다. 나는 옥시의 살인은 한 때 공부 잘했던 학생이 사익 때문에 `한국사회를 살해`하는 징후로 읽고 있다. 강남역 살인보다 더 잔인하고 더 큰 해악이다.

그래서 공부 잘 하는 것을 최고로만 여기는 한국사회, 이를 상식으로 여기는 우리 의식을 다시 생각해보자. 한 때 공부 잘 한 학생이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사회 공공성을 파괴해도, 다시 말하면 그들이 우리의 폐를 망가뜨리고 우리를 숨 쉴 수 없게 하는데도 그들을 칭찬만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수업 중 한 번씩 겪는 장면. 수업에 지장을 주는 한 학생을 지적하자 “쟤는 공부 잘하는데요!”라는 말이 불쑥불쑥 들려온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뱉은 변명이 아니다. 공부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급우를 변호하는 근거다. 개인 성취와 공공의 가치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대학이나 고시합격 혹은 회사에서 승진했다고, 동네마다 `축!ㅇㅇ대학 합격`, `축! ㅇㅇ승진` 같은 현수막을 내거는 것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성취를 공적 성취로 내세우는 이 문화를, 대부분 주민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개인의 성취는 가족의 자랑은 될 수 있을지언정, 사회적 존중의 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학력우수생이 사회 공공성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이고, 그것에 기준해 칭찬과 비난을 나누어야 한다. 이를 구분하지 않는 문화에 교사인 나와 여러분의 의식이 일조하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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