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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천하제일의 인재

국사무쌍 나라 안에 둘도 없는 뛰어난 무사. 천하제일의 인재라는 뜻의 말이다. 중국의 초한쟁패기에 활약했던 한의 명장 한신을 두고 소하가 평했던 말에서 비롯됐다. `사기회음후열전` 등에 기사가 나온다.진이 멸망하고 항우와 유방 두 영웅이 자웅을 겨루던 때의 일이다. 당시 유방의 군대는 고향을 떠나 산간오지의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촉땅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한신이라는 하급군관도 끼어 있었다. 그는 회음 출신으로 처음에는 초왕 항우를 섬겼으나 사람볼 줄 모르는 항우의 눈에 들지 못했다. 크게 실망한 한신은 결국 초의 진영을 도망쳐 나와 유방의 군대에 몸을 의탁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부장 하후영에게 발탁되어 정승 소하의 눈에까지 띄게 되었지만 여전히 말단군관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소하는 한신의 재주와 기개에 기대를 걸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방에게 그를 천거하곤 했다.그 무렵, 유방의 진영에서는 고향을 그리다 향수병에 걸린 부장이나 병사들이 도망치는 일이 잦아 사기가 갈수록 떨어졌다. 소하가 여러번 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량을 관리하는 치속도의 정도에 머물러 있던 한신도 유방에게 싫증이 나 도망쳐버리고 말았다.소하는 한신이 도망쳤다는 보고를 듣고 황망히 말에 올라 그의 뒤를 쫓았다. 큰 이룸을 눈앞에 두고 그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소하가 도망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유방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믿었던 소하마저 도망을 치다니 그 보고를 들은 유방은 크게 노여워했다. 그런데 이틀 후 소하가 돌아왔다. 유방은 기쁨과 울분이 엇갈려서 노한 얼굴로 고함쳤다.도망을 치다니, 정승된 자가 할 짓인가?소하는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도망친 것이 아닙니다. 도망친 한신을 쫓아가서 다시 데리고 온 것 뿐입니다”여러 부장들이 도망쳐도 가만히 있던 소하가 이름도 없는 한신을 쫓아가 잡아오다니 유방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하는 이렇게 설명했다.“이제까지 도망친 여러 장수 정도는 어디서든 얻을 수 있습니다만, 한신은 실로 국사무쌍이라고 할 만한 인물로서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인재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 파촉에서 평생을 그럭저럭 보내시겠다면 한신 같은 인물이 필요없습니다만 동쪽으로 나아가 천하를 거머쥐고 싶다면 한신을 놓치고서는 일이 어렵습니다”/쌍산 김동욱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2011-07-27

모든 일에 어긋남 없이 행동하라

무가 무불가(無可 無不可) 가(可)도 없다. 원래는 `행동에 중용(中庸)을 지켜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나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논어` 미자(薇子)편,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 나온다.`논어` `미자`편에는 공자가 옛날의 여러 일민(逸民)을 평한 내용이 있다. `일민`이란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 초야에 묻혀 벼슬하지 않는 사람, 곧 은자(隱者)를 가리키는 말이다.공자는 백이와 숙제등의 평을 열거한 후 끝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그들의 행동과 달라서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맹자의 설명에 의하면, 공자는 벼슬한만하면 벼슬하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 두었으며, 오래 머무를 만하면 오래 머물고, 속히 떠나야 하면 속히 떠났으니, 이것이 곧 무가 무불가의 태도라고 했다. 요컨대 공자의 행동은 모두 중용이란 잣대에 맞추어 과부족도 어그러짐도 없었기 때문에 이같이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 말은 요즘에는 대개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이다.한(漢)나라 때의 일이다. 농서 땅에서 일정한 세력을 갖고 있던 외효 밑에서 그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마원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외효는 한창 세력을 펴고있던 후한의 광무제 유수와 친교를 맺으려고 마원을 파견했었다. 이때 마주한 광무제와 마원은 서로 큰 인물임을 간파하고 여행을 같이하며 우의를 맺었다.외효는 마원이 돌아오자 광무제의 인물됨에 대해 물었다, 마원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광무제의 명석한 머리와 원대한 포부, 넓은 도량을 칭찬했다. 그러자 외효가 이렇게 물었다.“그렇다면 고조와 비교해 보자면 누가 위인가?”“글쎄요, 고조는 `가도 없고 불가도 없다`는 점이 있습니다만, 광무제는 정치를 좋아하고 향동은 절도에 알맞고 술같은 것은 즐기지 않는 인물입니다”그렇다면 고조보다도 한수 위라는 말이 아닌가?외효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나 마원의 말을 들어 광무제와 우호를 쌓기로 결정했다. 마원은 그로부터 볼모로 가는 외순을 따라 낙양에 가서 광무제를 섬기게 되었다./쌍산 김동욱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2011-07-20

정확하고 과학적인 관찰 통해 사물을 바로 표현하자

춘추필법(春秋筆法) `춘추필법(春秋筆法)`은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형식적이고 간결한 문장을 통해 엄격하게 포폄(褒貶)을 가한 `춘추(春秋)`의 독특한 필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자포폄(一字褒貶)`, `진언대의(微言大儀)`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춘추란 춘추시대노나라 은공(隱公) 원년(B.C. 722)부터 (哀公) 14년(B.C. 482)에 이르는 12공 242년 간의 기록을 담고 있는 역사서이다. 이것은 원래 노나라의 사관(史官)이 기록한 일기체의 궁정연대기(宮庭年代記)인데, 공자가 여기에 자신의 독자적인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미묘한 필법 아래 필삭(筆削)을 가했다. 이를 가리켜 춘추필법이라 한다. 공자의 기준은 `명분을 바로잡은 (正名分)`과 `포폄에 의거함`이었다. 그 예를 들어보자우선 사물의 명분을 바로잡기위해 공자는 단어하나의 선택에도 신중을 기했다. 예를 들어 `희공(僖公)`16년 조에 `운석이 송나라에 다섯 개 떨어졌다`라고 쓰지 않고 그렇게 쓴 것은 뭔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서 살펴본 후에 돌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그것을 헤아려보니 다섯개임을 알았기 때문에 사실을 안 순서를 살려 `운석우송오(隕石于宋五)`라고 표기했다는 것이다. 즉 정확하고 과학적인 관찰을 통해 사물을 바로 표현한 것이다. 또 오(吳)와 초(楚)나라 임금을 자(子), 제(薺와 진(晉)나라 임금은 후(侯)라고 불렀으며, 송나라는 비록 약소국이었지만 긍 임금을 공(公)으로 높여 표기한 것은 전통을 고수하려는 `정명분`에 속하는 것이다.포폄에 있어서 각각의 상황과 사건의 원인 선악(善惡)의 소재에 따라 달리 표현되었다. 선공(宣公) 2년 조에 `진나라 조순(趙盾)이 그의 군주 이고(夷皐)를 시해했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원래 임금을 죽인 자는 조순이 아니라 조천(趙穿)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순이 죽였다고 한 것은 조순이 조천을 토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순의 책임이라고 보아 그렇게 적었다는 것이다.또 은공 4년 조에는 `위(衛)나라 사람들이 주우(州旴)를 복에서 죽였다`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임금을, 군(君이라고 하지 않고 주우라고 한 것과 임금을 죽인 경우에 쓰는 말인 `시(弑)`를 놓아두고 `살(殺)을 쓴 것은, 원래 그가 토벌의 대상이었으며, 위나라 사람들이 외세의 힘을 빌어 위나라 땅이 아닌 복땅에서 그를 죽였음을 나타낸 것이다./쌍산 김동욱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2011-07-13

인생이란 한바탕 꿈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남쪽 나뭇가지의 꿈이란 뜻 곧 덧없는 한때의 꿈 훅은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한단지몽(邯鄲之夢)이 있다. 당대(唐代)의 전기작가(傳奇作家) 이공좌(李公佐)의 소설 `남가태수전`에서 비롯된 말이다. 당(唐)나라 德宗(덕종) 때 광릉(廣陵)지방에 순우분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술에 취해 집 앞의 큰 홰나무 그늘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디선가 남색 관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들은 순우분 에게 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괴안국왕(槐安國王)의 명을 받고자 대인을 모시러 온 사신입니다. 저희 와 함께 가시지요. 순우분은 얼떨떨했지만 사신이 권하는 대로 그를 따라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국왕이 성문 앞에서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한편 그를 당장에 부마로 삼았다. 순우분 이 그곳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왕이 그를 불러 남가지방을 다스려 달라고 부탁했다. 남가군(南柯郡)에 부임한 순우분은 20년동안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고 결국 그 공은 단라국(檀羅國)이 군대를 몰고 침략해 오는 바람에 크게 곤욕을 치렀다. 더욱이 그동안 그와 함께 고락을 나누었던 아내마저 병으로 사별한 뒤 그는 허무함을 느끼고 관직을 버리고 상경했다. 얼마 후 국왕은 遷都(천도)해야 할 조짐이 보인다 면서 순우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잠이 깨고 보니 수십 년 간의 그일들이 모두 꿈 이었다 순우분은 기이한 생각이 들어 자던 홰나무 뿌리 부분을 살펴보았다 꿈에서처럼 과연 구멍이 있긴 했다. 구멍 속을 자세히 살펴보니 넓은 공간에 수많은 개미때가 두 마리의 왕개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괴안국 이었고 두 마리의 왕개미는 국왕과 왕후였던 것이다. 또 거기서 남쪽으로 뻔은 가지에 나 있는 구멍에도 개미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남가군 이었다 순우분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마침 그날 밤에 큰 비가 내렸고 다음날 순우분이 다시 홰나무 구멍을 살펴보았을 때는 개미는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순우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괴안국 국왕이 천도해야할 조짐이라고 말했던 것이 바로 이 일이었던 것이다. 순우분은 한 순간의 꿈속에서 스쳐보냈던 20여 년을 떠올리고는 인생이란 바로 그와 같은 한바탕 꿈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그래 인생은 꿈이다. 그러나 그 꿈속에는 근면·성실·배려·노력하는 아름답고 위대함이 살아있는 행복한 일상이다./쌍산 김동욱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2011-07-06

효도는 인간의 근본 지금도 늦지 않았다

연리(連理)는 서로 다른 나뭇가지가 맞닿아서 결이 하나로 통해버린 것, (理: 나무나 무늬의 곁을 말한다) 원래는 지극한 효도를 비유하는 말이었는데 후에 부부간의 지극한 사랑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였다. 연리의가지(連理枝)라고도 한다. 후한서 채웅전의 기록이다.후한 말의 문인 채옹(蔡雍)은 뛰어난 학자였지만 효성이 지극한 사람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가 병으로 눕자 그는 병간호하는 3년 동안 계절도 잊어버렸으며 옷을 벗고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해진 후 백 일 동안은 아예 잠을 자지 않고 간호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시묘(侍墓)살이를 했는데 모든 일에 예의격식에 따라 했다. 그 여묘 옆에서 나무가 났는데 그것들의 가지가 서로 붙어 자라더니 곁이 이어져서 한 나무처럼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기이하게 여겨 채옹의 효성스러움을 칭찬하였다. 가지가 서로 붙어 한 결을 이루였다는 것은 곧 부모와 자식이 한 몸 한 나무가 되어 있다는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후에 와서는 부부애를 말하는 데에도 이 비유가 쓰이게 된다. 그것은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의 `장한가(長恨歌)`라는 시에서도 보인다.“원컨대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원컨대 땅에서는 연리(連理)의 가지가 되리”비익조는 날개가 하나뿐이므로 두 마리가 붙어서 날아야 비로소 날수 있다는 전설 속의 새이다. 이 새와 연리지에 비유해서 지극한 부부애를 노래한 것이다. 이는 현종과 양귀비가 서로 사랑을 맹세한 것을 읊은 것이라 한다. 그것이 지극한 효도를 뜻하건 깊은 부부애를 뜻하건 간에 가지가 한 결을 이루었다는 것은 퍽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얼마나 사랑이 지극하면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얽혀 하나가 되는 것 같겠는가. 효도는 인간의 근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효만큼 내 세울것이 없다. 인간 최고의 눞??가치다. 무엇을 논하랴. 지금도 늦지 않다. 지극한 효성만이 내일의 희망이다./쌍산 김동욱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2011-06-29

실천하는 용기 있는 인재가 되자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한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원기(元氣)를 뜻한는 말로서 맹자(孟子)의 용어이다. 정기(正氣) 혹은 정대한 기(氣)라고도 한다.맹자 `공손추`상에 나온다. 전국시대의 철인 맹자가 어느날 제자인 공손추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정한 용기와 부동심(不動心·동요가 없는 올곧은 마음 상태) 등에 대해 묻고 대답하던 끝에 공손추가 이렇게 물었다.“감히 묻겠습니다만 스승님께서는 어디에 장점이 있으십니까”이 질문은 맹자가 앞서 자신의 부동심과 고자(告子·맹자의 성선설에 대하여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논박하던 전국시대의 사상가)의 부동심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것이 더 우위임을 말하자 공손추가 맹자의 부동심에는 어떤 장점이 있어서 그렇게 다른 것인지를 물은 것이다.여기서 맹자는 이렇게 잘라 말한다. 나는 말을 알며(知言)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르노라. 지언(知言)이란 마음을 다하고 본성(本性)을 알아서 모든 천하의 말에 그 이치를 궁구해 그 시비득실(時飛得失)의 까닭을 다 아는 것을 가리킨다.공손추는 또 물었다. “감히 묻겠습니다. 무엇을 호연지기라고 합니까” 맹자는 우선 그것은 말하기 어렵다고 하고나서 다음과 같이 호연지기를 설명하였다. “그 호연지기라는 것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정직으로써 잘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천지 사이에 꽉 차게 된다. 그 호연지기는 의(義)와 도(道)에 배합되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 의리(義理)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주자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기란 바로 이른바 몸에 충만 되어 있다는 것으로서 본래는 스스로 호연하되 수양을 못했기 때문에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맹자는 이것을 잘 길러 그 본래의 상태를 회복한 것이다. 지언을 하면 도의에 밝아서 천하의 일에 의심스러운 바가 없고 기를 기르면 도의에 배합되어서 천하의 일에 두려운 바가 없다. 정도(正道)·정심(正心)·정행(正行), 실천하는 용기 있는 인재가 필요한 때다. 우리 모두 진정한 호연지기 같은 대장부가 되자./쌍산 김동욱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2011-06-15

자기 분수에 맞는 정성을 다할때 비로소 빛난다

빈자일등(貧者一燈) 가난한 사람의 정성스러운 등불 하나 이는 곧 가난하지만 성심껏 보시(布施)하는 자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불교의 경전 중 하나인 `현우경(顯憂經)`의 빈녀난타품(貧女陀品)에 나오는 이야기이다.석가가 사위국(舍衛國)의 한 정사(精舍)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 나라의 난타(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부처에게 공양을 바치고 싶었으나 남에게 구걸을 하며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하루종일 돌며 구걸을 한 끝에 간신히 1전을 얻게 되었다. 그 돈으로 기름을 사서 부처에게 등불을 바치려고 했으나 기름장수는 그렇게 적은 양은 팔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난타는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주인에게 털어놓으며 사정을 했다. 난타의 정성에 감동한 주인은 훨신 많은 기름을 주었다. 난타는 기뿐 마음으로 등을 만들어 부처에게 공양했다. 그로써 난타의 등불은 다른 많은 등 사이에서 밝게 빛났다. 그런데 얼마 후 이상한 일이 생겼다. 밤이 지나면서 다른 모든 등불이 꺼져갔는데 난타의 등만은 세찬 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채 계속 밝게 타는 것이었다. 석가는 난타의 정성된 마음을 알고 그후 그녀를 비구니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빈자일등 이라고 하면 가난하지만 정성을 다한 보시를 뜻하게 되었다. 남에게 정성을 바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다만 자기 분수에 맞고 정성이 한껏 들어가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은 빛날 자격이 있다. 또한 그런 정성을 제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만이 그 선물은 제 빛을 누린다. 주는 이나 받는 이나 물건 자체에 정신이 팔려버리면 그것은 치사한 거래에 지나지 않는다. 사월 초파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이날 무렵 각지의 절집에는 소담스런 연등들이 가득 걸린다. 각자의 소망을 담은 등들이다. 그러나 과연 그 소망들이란 것에 제 욕심의 악취가 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절에다 혹은 교회에다 엄청난 액수의 보시나 기부를 했다고 해서 그만큼 자신에게 이득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다. 그들의 등불은 하룻밤을 지내기도 전에 사그라들고 만다. 희뿌연한 새벽의 안개가 들도록 꺼지지 않고 빛나는 등불은 바로 정성이란 이름의 등불이다. 우리는 어떤 등불을 밝혀야 하는지 타인과 자신이 같음을 밝히는 지혜의 등불을 켜자./쌍산 김동욱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2011-05-25

단점보다 장점을 보는 안목을 키우자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 사이의 사귐이란 말로서 시세(時勢)에 따라서도 변치않는 두터운 우정을 일컫는다.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 열자 역명 편 등에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관중과 포숙아는 춘추시대 제(劑)나라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렸을 때 같은 고장에서 자랐는데 포숙아는 관중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가난했던 관중을 늘 도와주곤 했다고 한다. 당시 제나라는 양공 (襄公)이 형인 노()의 환공(桓公)을 죽이고 그의 부인을 차지한 후 정사를 돌보지 않아 매우 혼란스러웠다. 차츰 조야의 기미가 어지러워지자 관중은 공자(公子)규를 모시고 이웃 나라로 포숙아는 규의 이복동생인 소백(少白)과 함께 거나라로 망명했다(BC.686). 예상한 대로 그해 양공은 사촌동생 공손무지에게 암살당하고 왕위를 찬탈한 무지는 또 이듬해 다시 살해당해 제나라에는 국왕의 자리가 비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두 공자는 왕의 자리를 노리고 귀국을 서둘렀고 이런 사정으로 관중과 포숙아는 뜻하지 않게 정적이 되었다 관중은 이때 거에서 돌아오는 소백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용케 모면한 소백이 먼저 귀국해 환공(桓功)이라 칭하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관중의 압송을 요구했다. 고자 규는 자결하였으나 관중은 태연히 나아가 포박을 받았다. 제나라로 압송된 관중은 환공 앞에 릅릎을 끓고 처분을 기다렸다. 이때 환공이 그를 죽이려 하자 포숙아가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마 단지 제나라만의 군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이오(夷吾:관중의 이름) 외에는 달리 쓸 인재가 없습니다”환공은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에게 요직을 주었다. 이리하여 제나라의 재상이 된 관중은 우선 고아나 병든 사람을 비롯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휼정책을 시행해 민심을 얻은 후 이를 기초로 부국강병책을 추진, 제나라를 일거에 천하의 부국으로 만들었다. 그후 관중은 제후들을 규합해 제나라를 중심으로 동맹을 체결토록 함으로써 환공을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는 구호는 관중의 정치철학을 드러내는 유명한 구절이다.관중의 이같은 성공은 무엇보다 관중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지만 그 능력을 알아보고 중용될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따뜻한 우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은 상대를 알고 자기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손자 병법에 나오는 글이다. 잘 활용하여 뜨거운 인간애로 살아가는 지혜를 찾자. 단점 보다 장점을 보는 안목을 키우자./쌍산 김동욱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2011-05-18

아름다운 우정은 네가 먼저 가지는 것

죽마고우(竹馬故友) 같이 대나무말을 타고 놀던 어린 시절의 벗. 곧 소꿉동무나 오랜 친구를 일컫는 말이다. `세설신어(世設新語) 품조(品藻)`편 `진서(晉書)은호전(殷浩傳)`등에 전한다.진(晉)나라 간문제(簡文帝) 때 환온(桓溫)과 은호(殷浩)라는 인물이 있었다. 환온은 일찍이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내고 있었고, 은호는 은사(隱士)로서 자처하고 있었다. 당시 촉(蜀)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를 양주자사(楊州刺史)에 임명했다. 은호는 마침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을 겸비한 인재였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환온을 견제하기 위한 간문제의 포석으로 은호가 벼슬길에 오르자 당장에 두 사람은 정적(政敵)이 돼 서로 질시하기 시작했다. 왕희지가 안타깝게 여겨 둘을 화해시키려고 했지만 오히려 은호가 듣지 않았다.그러던 차에,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하나인 후조에서 왕이 죽자 내분이 일어났다. 진나라에서는 중원 땅을 회복할 기회라고 여겨 은호를 중원 장군에 임명해 군사를 출동시켰는데, 은호는 출발지에서부터 말에서 떨어지는 일을 겪고는 결국 싸움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참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즉시 은호를 규탄하는 소를 올려 그를 서인으로 떨어뜨리고는 변방으로 귀양보내고 말았다.은호가 귀양간 후,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은호는 어려서 나와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였는데, 내가 싫증이 나서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지고 가곤 했다. 그러니 그가 내 밑에 앉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오늘날 죽마고우라 하면 어렸을 적부터의 친근한 벗을 말하지만, 여기에는 뜻밖에는 이같이 우정을 배신하는 서글픈 이야기가 관련되어 전하는 것이다.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치게 되는데, 그의 사람됨을 단편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전한다.귀양지에서 은호는 절대은 푸념이나 원망을 하지 않은 채 온종일 하늘을 바라보며 `돌돌괴사`라고 손가락으로 쓰곤 했다. 후에 환온이 은호를 상서령으로 삼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는데, 은호는 기꺼이 승낙하는 답장을 썼다. 그리고는 틀림없이 하느라고 수십 번이나 답장을 봉투에 넣었다 뺏다 하며 보다가 급기야는 넣는 것을 잊어버리고 빈 봉투만을 환온에게 보냈다. 빈 봉투를 받은 환온은 화가 나서 다시는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으며, 이로써 결국 은호는 배소에서 죽고 만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많다.상대를 원망하지 않는 은호의 우정이 가슴에 새기고 싶다 아름다운 우정은 네가 먼저 가지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다./쌍산 김동욱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2011-05-11

근본을 실천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자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한다. 곧 도저히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잘못된 방법을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경우와 애써 수고만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경우에도 이르는 말이다. 맹자 `양혜왕(糧慧王)`편에 나온다.전국시대,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유교(儒敎)의 인의(仁義)의 사상과 왕도정치(王導政治)를 설파하던 맹자의 발길이 한때 제(濟)나라로 향했다. 당시 제나라는 서쪽의 진(秦)나라, 남쪽의 초(楚)나라와 함께 대국으로 꼽혔고 선왕(宣王)도 능력있는 군주로 평판이 있었으므로 맹자는 그에게 왕도정치를 일깨워 주겠다는 큰 기대를 하고 찾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오직 힘있는 자가 최고인 패도정치의 시대였다. 선왕은 왕도정치를 설파하러 간 맹자에게 패도정치에 대해 물었다. “춘추시대 패자였던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의 사업에 대해 얻어들을 수 있겠습니까?”그러나 맹자는 그런 패도정치에 관해서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우리 선생님(공자를 뜻함)의 문도 들은 그들의 사적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후세에 전해진 것이 없어서 제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굳이 무엇을 말하라고 하신다면 왕도정치를 펴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이렇게 말하고 나서 맹자는 과연 자신이 왕도정치를 펼 수 있을지 자신 없어 하는 선왕에게 이렇게 되물었다.“전하께서는 전쟁을 일으켜 군사와 신하를 위태롭게 해서 제후들과 원한을 맺은 뒤에야 마음이 후련하겠습니까?”“아닙니다. 나는 그렇기 때문이 아닙니다”선왕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맹자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그러시다면 전하의 대망을 알 수 있겠습니다. 천하통일을 하여 사방의 오랑캐들까지 복종케 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와같이 무력으로 소원을 이루려고 하신다면 이는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것(연목구어)`과 같은 일입니다”“아니. 그것이 그토록 무리한 일입니까?”“오히려 그보다 더 심한 셈이지요.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은 비록 물고기만 구하지 못할 뿐 후에 다른 재앙은 없습니다. 그러나 군대를 일으켜 천하의 패자가 되려고 한다면 마음과 힘을 다하여 노력하더라도 뒤에는 반드시 재앙이 따를 것입니다”자연에는 섭리가 있다 인간사에는 없다. 물고기는 물에 구하고 산나물은 산에서 구해야한다. 지극한 자연의 섭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은 이 지구상에 인간뿐이다. 물고기는 물에서 구하는 근본을 실천하는 평범한 인간이 되자./쌍산 김동욱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2011-05-04

우리의 위대한 전통문화 단단히 지키자

“한단의 걸음걸이” 곧 자기 분수를 잊고 무턱대고 남을 흉내내는 일을 빛댄 말이다. `장자`, `추수(秋水)`편에서 유래한다.옛날 연나라의 서울인 수릉에 한 젊은이가 살았다. 연나라는 작은 나라였다. 그젊은이는 보잘것없는 작은나라에 살고있는 처지를 한탄하며 큰 나라인 조나라를 동경했다.어느날 그는 드디어 조나라의 서울인 한단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보니 수릉 사람들의 걸음걸이와는 무척 달랐다. 젊은이는 열심히 한단 사람들의 걷는 모양을 배웠다. 그러나 한단의 걸음걸이를 다 배우기도 전에 그만 옛날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걷는 법을 아예다 잊은 그는 겨우 기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이 이야기는 `장자`, `추수`편에, 궤변론자인 공손룡과 위나라공자 위모의 대화에서 나온다.공손룡이 장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자. 위모가 우물 안 개구리는 밖의 세상을 알수 없고. 수릉의 젊은이는 한단의 걸음걸이를 배울 수없다고 하면서 비웃는 대목에서 나오는 얘기이다.거리에 나가보자. 아니. 나갈 것도 없이 잡지나 텔레비전 화면을 들여다보자. 무수히 많은 수릉의 젊은이들이 있다.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모를 정도로 외모들이 많이 변했고. 문화가 변했다.이미 문화면에서 국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지 오래다 세계화시대에 살면서 외국 것을 모방하지 말라고 외쳐도 그것은 이미 설득력을 잃는다 문화는 지역과 시간의 편차 없이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네것 내것 가리지 않고 골고루 여러 문화를 접할 수 있고 습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또 자기 문화만을 고집하는 편견에서 벗어나 다른 문화를 열린 시각에서 바라볼수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문제는 `줏대`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내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내 것 가운데 탁월한 점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남의 것만 흉내 내는 것이 문제이다.자기 줏대도 없이 유행만 따른다면 그것은 그저 소비적인 모방에 불과하다.오천년 동안이나 집적된 좋은 우리 것들을 돌보지 않고 그저 새로 들어온 남의 것만 따라다닌다면 우리는 영혼의 한 갈래를 잃는 것이나 같다. 흉내내다 보면 그문화의 영혼만 종속되어 버리고 마는것이다. 그래서 문화 패권주의란 말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것은 소중한것이다. 위대한 전통문화 이제부터 단단히 지키자./쌍산 김동욱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2011-04-27

길지 않은 인생, 소중히 살아가자

어부지리(漁父之利) 어부의 이득 곧 둘이서 다투는 사이에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득을 챙긴다는 말이다. 방휼지쟁과 같은 말이다. `전국책(戰國策)`, `연책(燕策)`에 나온다.전국시대 진(秦)나라에 대항하는 여러 나라들이 합종연횡(合從連橫)의 대책들을 서로 들고 나와 천하가 한창 어지러운 때였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대표적인 종횡가 합종 연횡술에 밝은사람 였지만 소진의 아우소려와 소대도 형 못지않은 유세객이었다. 소려는 주의 난왕에게 백발백중의 비유를 인용하고 중국의 동북방에 있었던 연 나라는 이웃한 서쪽의 조 나라와 남쪽의 제 나라와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때 연나라에 기근이 들자 조왕은 제나라에 군대를 파병하고 있던 터라 조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고자 했으므로 소대에게 조나라를 설득해 주도록 부탁했다. 소대는 다음과 같이 해문왕을 설득했다.“오늘 이 나라에 들어오는 길에 역수 연나라. 조나라와 국경을 이루는 강을 건너다 문득 강변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마침 조개가 입을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었는데 갑자기 도요새가 날아와 조개의 속살을 부리로 쪼았습니다. 화가 난 조개가 입을 굳게 다무는 바람에 도요새는 그만 부리를 끼이고 말았습니다. 도요새가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도 화가 난 조개는 입을 꼭 다물고 부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도요새가 `내가 이렇게 버티고 서서 오늘도 내일도 비가오지 않으면 너는 말라 죽고 말 것이다`라고 하자. 조개도 `내가 이대로 오늘도 내일도 놓아주지 않으면 너도 굶어 죽고 말 것 이다`라고 맞대면서 버텼습니다. 이렇게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마침. 그곳을 지나던 어부가 둘을 발견하고는 냉큼 어망 속에 잡아 넣어버렸습니다”느닷없는 조개와 도요새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하는 혜문왕에게 소대는 말을 이었다.“지금 전하께서는 연나라를 치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연나라가 조개라면 조나라는 도요새입니다. 연과 조 두 나라가 공연히 싸워 국력을 낭비한다면. 바로 이웃의 저 강대한 진나라가 운 좋은 어부가 될 것입니다”이 말에 혜문왕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낭장 침공 계획을 취소했다.인생은 길지 않다 소중한 인생을 살아가야한다. 혹시 시기와 질투·간섭 등으로 인해 당신의 어부지리를 당하지 않는지 유심히 당신의 그림자를 보자./쌍산 김동욱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2011-04-20

따뜻한 봄날 진실된 마음의 옷으로 갈아입자

용두사미(龍頭蛇尾) 용의 머리에 뱀의 꼬리 곧 시작은 거창하나 결국은 별 볼 것이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벽암집`의 기록에서 비롯됐다. 송나라 때 원오극근이라는 이가 평석(評釋:시가나 문장을 비평하고 주석 하는 일)한 `벽암집`은 선사들의 선문답을 모아놓은 `공안집(共案集)`이다. 송나라 때는 특히 황실의 보호를 받아 불교 그중에서도 禪宗(선종)이 번성하고 불교 서적도 활발히 출판됐다. `벽암집`도 그중 하나다.육주(陸州) 땅의 용흥사(龍興寺)에 진존숙(陳尊宿)이라는 이름난 승려가 있었다. 진존숙의 말년의 일이다. 어느 날 그는 한 낯선 행려승을 보고 물었다. 어디서 오셨소이까. 그러자 그 행려승은 갑자기 으악 소리를 질렀다.“허허, 일갈(一喝:한번 큰소리로 꾸짖음) 당하고 말았군”진존숙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그는 또 으악하고 말았다. 진존숙은 이번에는 그 소리를내는 행각승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얼른보기에는 제법 상당한 수행을 쌓은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자세히 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닳은 데는 있다. 그러나 옳은 것은 아직 아니다” 용두사미겠거니 승려 자신이 용과 같은 기품을 가진 인물인 양 애썼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느낀 진존숙이 이렇게 다시 물었다. “당신은 으악 으악 하고 허세를 부리네만 3갈 4갈 한 다음엔 어떻게 이문답을 수용할 참인가”말하자면 머리는 용이지만 꼬리는 뱀과 같은 인물 즉 허세뿐인 인물로 보였다는 뜻으로 물은 것이다. 그러자 그 행각승은 입을 다물었으니 결국 뱀의 꼬리를 보이고 만 일이다.이로부터 용두사미란 말은 시작은 거창하지만 뒤로 갈수록 조잡하고 거칠어지는 일을 비유하게 됐다.그렇다. 인간은 역시 속물인가 보다. 허영과 허세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성실과근면, 노력, 가족사랑을 실천해왔던 인품을 가진 고귀한 민족이었다. 농경 사회였던 우리나라는 농부는 농사일에 최선을 다했고 선비는 어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말보다는 실천하고 서로 나누는 품앗이 사회였다. 그러나 지금은 과연 어떠한지 물만 먹고도 배고픔을 참아내던 모습은 어디가고 물질만능주의에 인간의 본 모습은 사라지고 서로 속고 속이는 말하기 민망스러운 일들이 자주 발생 한다. 제발 이제 그만 하자.이제부터는 허세의 누더기 옷은 벗어버리고 따뜻한 봄날에 진실된 마음의 옷으로 갈아입자./쌍산 김동욱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2011-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