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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불면증 심리상담 이야기

문가인참마음심리상담센터 원장얼마 전 뉴스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의 불면증 환자가 50만 명이라고 한다. 이는 정신과 등 의료기관을 이용한 사람만 통계수치로 집계된 것이니, 실제로는 더 많다는 이야기다.포항 인구가 약 50만 명이라고 하니 한 도시의 사람 전체가 불면증으로 잠을 설치고 있다는 것이다.미용실에 가서 노인들이 와서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는 경우가 있다. 그들의 이야기의 주제는 대부분 잠에 대한 것이다. 그만큼 수면은 우리의 적응과 부적응 더 나아가서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중요한 인간의 생리적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연예인에 관한 기사를 다루는 미디어에서도 연예인 아무개가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치료받았다는 내용을 흔히 접할 수 있다.그리고 일반인들도 ‘잠이 안 와서 약국에 가서 수면제를 처방받았어’라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다. 잠이 안 오면 수면제 정도 먹는 것은 숨길 일도 아닐 정도로 대중화되어 있는 것 같다.잠, 식사, 성, 배설 등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도 심리적 원인에 의하여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심리적 장애로 분류되는데, 잠의 경우는 수면장애라고 DSM-5(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편람 5판)에는 분류되어 있다.여러 가지 인간의 생리적 욕구가 부적응적이면 심리적 장애로 고통받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잠은 그 어느 것보다도 정신건강의 척도로 생각된다.정신과병원이나 한의원에 가면 “잠은 잘 주무십니까?”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게 될 것이다.나 또한 정신과병원에서 임상심리전문가로 근무할 때 조현병 환자들에게 매번 입원 동기에 대해 질문을 하곤 했는데, 거의 수학 공식처럼 그들은 비슷한 응답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임상심리전문가: “당신은 어떻게 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나요?”환자: “제가 1개월 이상 집에 혼자 있었거든요.”임상심리전문가: “네 그랬군요.”환자: “잠이 안 오기 시작하더니 어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여기에 데려와서 입원하게 되었습니다.”즉, 잠을 잘 못자면 심각한 심리적 문제인 조현병으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초보 심리학자 시절에는 불면증을 심리상담으로 낫게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잠이 안 오면 일단 병원에 가서 수면제를 처방받아서 약으로 치료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리라.그렇지만 수만 명을 심리상담해본 나의 임상적 결론으로는 불면증도 심리적 문제에 기인한 경우는 호전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불면증에 관한 심리상담 성공사례도 많을뿐더러 마음의 이치는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이 호전된다면 불면증도 호전될 수 있는 것이고 조현병도 호전될 수 있는 것이다. 불면증 환자란 ‘잠에 대한 잘못된 생각’, ‘잠에 대한 집착’, ‘잠에 대한 트라우마’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면증은 잘못된 생각을 바꾸는 인지행동치료와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최면치료로 극복될 수 있다.오늘도 잠 못 드는 그대여, 잠의 신은 원할수록 더욱 멀리 달아난다는 것을 잊지 말라.

2020-10-18

대통령의 편지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북한에 피살된 공무원의 유족이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위로편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얼마전 북한군 총격으로 숨진 해수부 공무원의 아들인 이 모 군이 문 대통령에게 쓴 편지의 답장 형식이었다. 문 대통령은 A4 용지 한 장 분량의 편지에서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심정을 깊이 이해한다”면서 “진실을 밝혀낼 수 있도록 내가 직접 챙기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여전히 실망스럽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면서 ‘월북’으로 판단한 해경 수사로 고인의 명예가 훼손된 만큼 관련 수사를 조속히 종결해 달라고 촉구했다.야당도 개탄스럽다는 반응이다. 국민의힘 김예령 대변인은 “대통령의 타이핑된 편지는 친필 사인도 없는 무미건조한 형식과 의례 그 이상도 아니었다”고 비판했고,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국민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지켜줄 대통령이 없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라 했다.송파병 당협위원장인 김근식 경남대 교수도 “대통령의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뿐”이라 했고,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 역시 “농사지으러 양산 가시는 길에 들러 ‘꼬옥’ 한 번 안아 주시면 좋았지 않았겠느냐”고 힐난했다. 날선 비판에 당황한 청와대가 “친필메모로 쓴 편지내용을 타이핑해서 전자서명해 보내는 게 관례”란 말로 해명했지만 왠지 마음에 확 와닿지 않는다.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이 기억에 떠올랐다. 영화 무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야기가 있는 이탈리아 베로나. 작가 지망생인 소피는 약혼자 빅토와 함께 베로나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 있는 ‘줄리엣의 발코니’의 돌벽에 비밀스러운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써서 붙이는 전 세계의 여성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줄리엣의 비서’를 자처하는 이탈리아 여자들은 줄리엣의 발코니에서 수거해 온 편지에 일일이 손편지로 답장을 썼다. 작가를 꿈꾸는 소피 역시 그 틈에 끼어들어 손편지 쓰는 일을 돕는다. 그러다 돌 틈에서 우연히 50년 전 쓰여진 낡은 편지 한통을 발견한다. 소피는 이루지 못한 과거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편지속 사연에 “사랑은 늦는 법이 없다. 저라면 용기를 내어 그 사람을 잡겠다”고 답장을 보낸다. 며칠 후 편지의 주인공인 클레어와 그녀의 손자 찰리가 나타나 세 사람이 함께 클레어의 옛 사랑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되고, 결국 클레어와 소피 두 사람 다 자신의 사랑을 찾게 된다는 줄거리다.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에게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저마다 사연을 담은 편지를 보내면 ‘줄리엣의 비서’라는 사람들이 손편지 답장을 쓴다는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따뜻한 손편지의 위력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이러니 이번 대통령의 편지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국민이 알던, 선량하고 가슴 따뜻한 그 대통령은 어디로 갔나 궁금해한다. 대통령 취임 3년여 만에 측근들의 철용성으로 눈 멀고, 귀 먹고, 가슴마저 차가워진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2020-10-15

제비뽑기

제비뽑기는 한자말로 하면 추첨(抽籤)이다. 주로 운에 맡기는 것으로 승부를 빨리 내고 싶을 때하는 놀이다. 경상도지방에서는 심지뽑기라 부르고 충청도지방에서는 꽁지뽑기로도 부른다. 제비는 잡다의 명사형인 ‘잡이’. ‘잽이’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원래 제비뽑기는 우연의 결정을 신에게 맡긴다는 뜻으로 신성하게 사용됐으나 뒤에 와서 어려운 분쟁을 시비 없이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성격이 바뀌었다고 한다. 오늘날 학교 입학이나 아파트 추첨, 복권 추첨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활용된다.복불복(福不福)처럼 운에 맡기는 놀이는 그밖에도 많이 있다. 사다리 타기나 가위 바위 보 등도 일종의 운에 맡기는 놀이다. 큰 부담 없이 승부를 빨리 내는 것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내기 등에 많이 사용한다.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디어헌터’에 등장한 러시안 룰렛 게임은 운에 맡기기는 하지만 목숨을 담보한 것이어서 위험천만한 놀이다. 회전식 연발 권총의 여러 개 약실 중 한자리에만 총알을 넣고 총알의 위치를 알 수 없도록 탄창을 돌린 후 머리에 총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기는 게임이다. 전쟁에서 포로에게 고문의 목적으로 사용했다고 하나 실제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가 히트를 치면서 영화 상영 후 5년 동안 미국에서는 러시안 룰렛으로 35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보도가 있었다.우리 생활주변에서 간혹 운에 맡겨 결정해야 할 일이 발생한다. 친구 사이에 커피내기와 같이 큰 부담이 없는 것들이다. 이 때는 제비뽑기가 적당하다.최근 서울의 한 아파트 전세물건에 10여 명의 입주 희망자가 몰려와 중개업소가 나서 제비뽑기로 입주자를 선정했다고 한다. 전세 대란이 빚은 희한한 제비뽑기다./우정구(논설위원)

2020-10-15

코스모스 꽃길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꽃길만 걸으라는 말이 있다. 늘 순탄하고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란다는 덕담이다. 하지만 인생길에는 길흉화복에 희로애락이 있기 마련이다. 가다보면 가시밭길도 있고 진창길도 나오기 때문에 더 간절히 꽃길만 걷기를 바라게 된다. 물론 어떤 길이 꽃길인지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것이다. 보통은 돈이나 지위나 명예가 주어지는 길을 꽃길이라 하지만, 외관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지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상당한 부와 지위와 명예를 누리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극단적인 선택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여기에 꽃길이 있다. 은유나 희망사항이 아닌 진짜 꽃길이다. 코스모스가 활짝 핀 가을 들길이 그것이다. 그 길은 아귀다툼도 없고 가식이나 거품도 없는 말 그대로 꽃길이다. 해맑고 화사한 빛깔이 있고, 그윽한 향기가 있고, 눈부신 햇빛과 시원한 바람이 있을 뿐이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나 자살을 하는 나라에서 죽고 싶도록 자괴감이나 상실감에 빠진 사람들은 와서 코스모스 꽃길을 걸어 보시라. 높푸른 하늘이, 찬란한 태양이, 삽상한 산들바람이, 화사한 꽃들이 그대의 인생을 환영할 것이다.이런 추억도 있다. 전교생이 사백 명쯤 되는 시골 초등학교였다. 학교 정문에서 멀리까지 코스모스를 심어 가을이면 날마다 꽃길로 등하교를 했다. 어느 해인가, 무슨 사연으로 가을 학기 중에 선생님 한 분이 학교를 떠나셨다. 전교생이 코스모스가 곱게 핀 길 양쪽에 늘어서서 선생님을 배웅했다. 선생님이 천천히 걸어가실 때 상급생 여자아이들이 훌쩍거리자 선생님도 눈시울을 붉혔다. 반세기도 더 지난 일인데 코스모스 꽃길을 볼 때마다 문득 생각이 나곤 한다.나는 요즘 날마다 꽃길을 걷는다. 매일 산책을 하는 들길에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인생의 어떤 은유적 꽃길보다 나는 이 코스모스 꽃길이 좋다. 나이를 먹을수록 은유나 상징보다 실재가 더 와 닿는다고나 할까. 우주만상은 무얼 감추거나 비유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명명백백 드러낸다는 것이 내 오랜 경험으로 얻은 깨달음이다. 진짜의 꽃길을 여기에 두고 사람들은 한사코 환상의 꽃길만 찾고 있는 게 아닌가.“길가에 핀 코스모스/ 영접 나온 소녀들 같다// 소들이나 돌보는/ 목부일이 고작인데// 아 글쎄, 나는 날마다/ 귀빈 대접 받는다니까” 야산 자락의 작은 목장에서 목부 일을 할 때 쓴 ‘자족(自足)’이란 제목의 시이다. 길가에 줄지어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연도에 나와 국기를 흔들며 국빈으로 오는 손님을 환영하던 여학생들을 연상케 한다. 코스모스 꽃들의 환영이 그보다 못할 게 뭔가.세상에는 꽃길이 얼마든지 있다. 일부러 심고 가꾸지 않아도 철따라 피고 지는 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가을의 억새와 갈대와 황금 들판도 꽃밭 못지않은 장관이다. 가을이 더 깊어지면 온 산천을 물들이는 단풍은 또 어떤가. 거기다 높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 산들바람을 더하면 세상에 그보다 좋은 꽃길이 어디 있는가. 그까짓 인생살이 굶지 않을 정도면 족한 줄 알고 도처에 나 있는 꽃길이나 맘껏 걷다 가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2020-10-15

BTS와 항미원조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한국 전쟁 70주년을 맞아 우리는 양국이 함께 겪은 고난의 역사와 수많은 희생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얼마전 미국 비영리단체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밴플리트상’을 받은 방탄소년단(BTS)이 전한 수상 소감이다.밴플리트상은 한국 전쟁 당시 미국 제8군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을 기리며 1992년 제정한 상으로 한·미 관계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 한다.BTS의 수상소감은 그간 한미가 함께 걸어온 길을 생각할 때 매우 당연하고 멋진 소감이었다. 그런데 이 발언으로 BTS는 중국인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뭇매를 맞고 있다. 중국 누리꾼은 “중국에서 나가라”, “BTS 좋아하면 매국노” 등의 글을 올리며 팬클럽에서 탈퇴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인이 BTS의 수상 소감에 대한 트집은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그들의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 때문이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중국은 북한의 한국에 대한 불법침략으로 수백만의 희생자를 낸 한국전쟁의 결과를 “미국에 항거하고 북한을 지켜 냈다”고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중국은 사실상 한국전쟁 중 한반도가 통일이 될 수도 있는 기회를 막은 국가이다. 압록강까지 진군한 한미연합군이 통일을 목전에 두었을 때 인해전술의 중국군의 한반도 진입으로 한국 통일의 절호의 기회는 좌절됐고 그리고 그후 70년 가까이 분단 한국은 고통을 받아왔다. 그러나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라고 그들이 부르는 한국전쟁 7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관련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방영하며 당시 참전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내부 결집을 꾀하고 있다.중국이 미국과 전방위 갈등을 벌이는 가운데 한국전쟁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것은 국내적으로 애국주의를 강조해 내부결집을 꾀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홍콩 민주화 활동가 조슈아 웡이 한국 BTS에 대한 중국 누리꾼들의 생트집을 비판하면서 중국의 민족주의 고조에 우려를 표했다. 웡은 중국 누리꾼들의 불합리한 공격 속에 BTS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중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는 정말 가관이다. 북한의 로켓으로 위장한 미사일 발사나 대륙간 탄도탄 발사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하고 의례적인 성명서만 내는 중국이 한국의 자체 방어를 위한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 문제에 관해서는 민감한 반응과 함께 도를 넘는 협박성 발언과 제재를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중국은 힌반도의 분단을 즐기고 있다. 결코 북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은 그들에겐 지역적으로 완충작용(buffer)을 해주는 고마운 국가이다.항미원조를 부르짖고 있는 중국에게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확고한 미국 및 우방과의 결속을 유지하면서 중국과 북한에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는 일본의 대외정책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러한 강한 힘만이 우리를 지켜낼 수 있다. 굴욕적인 미소로 평화를 구걸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럴수록 돌아오는 건 무시와 조롱일 뿐이다.

2020-10-15

고3 2학기 학교 시험을 차라리!

이주형산자연중학교 교감도로를 따라 가을이 들기 시작한 은행나무를 보면 속절없음이라는 단어만 생각난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속절없이 떨어지는 은행잎을 따라 필자의 마음도 속절없이 흩날린다.자연이 그리는 계절 모습에 필자가 할 수 있는 감탄사는 “벌써”뿐이다. 코로나19 대유행 초기에만 하더라도 더디게 가는 시간에 원망가(怨望歌)만 불렀다. 원망은 허망만 낳았다. 허망의 덫은 생각을 앗아갔다. 코로나19에 멈춘 세계처럼 필자의 생각도 완전히 멈춰버린 요즘이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가위눌림에 모든 감각은 기능을 잃었다.무감각의 덫에 갇힌 것은 세상도 마찬가지다.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려진 물건처럼 지금 사회는 정부가 코딩해 놓은 대로 움직여만 하는 인형 사회다. 정부 지침에서 조금이라도 의문을 가지면 바로 코로나19 전파자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골수 정부 지지자들로부터 무차별 온라인 폭격을 당한다. 반문을 떠나 의문조차 가질 수 없는 사회가 지금 사회다.2020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무한 재방송을 하는 인형극 같다. 주제는 코로나19 극복, 제목은 코로나19 공포 정치! 유행어는 “앞으로 2주가 최대 고비입니다.”이다. 인형 조종사는 성급한 일반화 오류의 쾌락에 중독된 정치인! 극의 특징은 조종 대상인 인형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양치기 인형극에 신물 난 대다수 국민은 이제 스스로 자기 일을 한다.세상일의 절대 진리는 완전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많은 국민이 알아서 자기 일을 해도 절대 못 하는 곳이 있다. 그곳은 교육계이다. 지침을 어기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교육계이다. 웃기는 것은 교육 목표가 “바른 인성을 갖춘 창의융합 인재 육성”이라는 것이다.코로나19는 지금 우리 교육의 실질 목표가 학생을 시험용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 아무리 등교 제한 조치를 하더라도 학교 시험만큼은 반드시 봐야 하는 것이 이 나라 교육이다. 배운 것도 없이 시험을 쳐야 하는 학생들의 처지는 교사들이 알 바 아니다. 그들은 당당히 말한다, 위에서 하라고 하니까!안 될 줄 알면서도 제안해 본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학교 시험만큼은 제발 없애자고, 아니면 횟수만이라도 줄이자고. 학생들은 그 시험을 “설문조사 시험”이라고 한다.수능도 무의미한 학생들에게 대학교 원서 접수가 끝난 후에 치르는 학교 시험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학생들은 하기 싫은 설문조사를 하듯이 문제도 읽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번호를 찍는다. 과연 이런 시험이 시험으로서 의미가 있을까! 교사들조차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시험 대신 차라리 졸업을 앞둔 학생들을 위한 진로 캠프를 하면 안 될까! 차라리 고등학교 3학년 2학기를 자유학기제로 하면 어떨까!그래도 만약 시험 점수가 필요하다면 모든 학생을 수능에 응시하게 해서 그 점수를 고등학교 마지막 내신 점수로 하면 어떨까! 그러면 최소한 수능에 대한 효용성이라도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속절없는 필자의 생각에 찬 이슬만 내리려는 한로(寒露) 아침이다.

2020-10-14

행복을 찾아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벨기에의 시인이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아동극 ‘파랑새’는 행복을 찾는 틸틸과 미틸 남매 이야기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찾아온 마술 할멈이 건넨 녹색 모자를 쓰고 파랑새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얘기다. 병을 앓고 있던 할멈의 딸이 나으려면 파랑새가 있어야 하기에 그런 부탁을 한 게다. 남매는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행복의 궁전, 미래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파랑새를 구하지만, 마침내 자기들 집에서 파랑새를 찾는다.많은 사람이 삶의 목적을 행복에서 찾는 세상이다. 본디 삶에 목적이 있을 수 없다. 운명처럼 주어진 삶의 조건을 의식하면서 생의 마지막 날까지 살아갈 뿐. 더욱이 행복은 추상적이어서 계량하기도 힘들거니와, 사람마다 체감하는 영역과 강도도 다르다. 그렇지만 우리는 행복을 입에 달고 산다. 왜 그럴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부탄 영화 ‘교실 안의 야크’를 보고 나서 다시 행복을 떠올렸다. 영화는 20대 중반의 게으른 초등학교 교사 ‘유겐’을 주인공으로 진행된다. 부탄에서는 모든 교사와 의사가 국가 공무원이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가 제공된다. 사범대학을 마치면 의무적으로 5년 동안 교사로 근무해야 한다. 유겐이 마지막으로 발령받은 곳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외진 루나나 초등학교다.해발 4800미터에 위치하고, 56명 인구에 9명의 학생을 가진 루나나. 영화는 루나나에서 유겐이 맞닥뜨리게 되는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사건과 사람들을 잔잔하고 따뜻하게 풀어간다. 무엇보다도 마을 처녀 살돈이 부르는 ‘야크의 노래’와 노래에 얽힌 사연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루나나 사람들에게 우유와 고기, 털은 물론이려니와 연료로 쓰이는 똥까지 제공하는 야크. 야크는 그들에게 툰드라 유목민의 순록과 같은 동물이다.루나나 사람들이 가장 슬퍼할 때가 야크를 잡는 날이라 한다. 티베트로 팔아넘길 야크를 잡던 촌장이 가장 아끼던 야크를 죽여야 했던 사연을 품은 야크의 노래. 살돈은 마을에서 가장 늙고 순한 야크 ‘노르부’를 유겐에게 주고 잘 보살피라고 한다. 야크를 교실에 데려와 학생들과 함께 있도록 하는 유겐. 마을과 사람들에게 동화되면서 유겐은 자신이 목동이라 생각하지만, 촌장은 그를 야크라고 말한다.교실 안의 야크는 진짜 야크 ‘노르부’이기도 하고, 루나나 마을 주민들과 함께하면서 존중과 사랑을 받는 유겐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겐은 겨울이 오기 전에 루나나를 떠나고 그토록 열망한 호주로 이주한다. 시드니 어느 술집에서 ‘야크의 노래’를 부르는 유겐. 우리는 유겐이 언젠가 루나나로 돌아가리라고 유추할 수 있다.촌장의 말이 폐부를 찔러온다. “부탄이 행복지수 세계 1위라는데, 젊은이들은 행복이 외국에 있다고 생각해서 여길 떠나요.” 행복을 찾아 떠난 틸틸 남매나 유겐이나 행복이 어디 있는지 훗날에야 깨닫게 되는 셈이다. 여러분은 어디서 행복을 찾고 있는지, 궁금하다. 행복은 정녕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우리나라에 있는 것일까?!

2020-10-14

당기는 힘은 지역에 있다

장규열한동대 교수도시는 사람을 끌어당겼다. 국토면적 대비 도시면적은 겨우 16.7%이지만, 전체 인구의 91.8%가 도시에 산다. 특히 수도권의 인구집중 현상은 심각함이 도를 넘어, 전체 인구의 49.8%가 몰려 거주한다. 1㎞ 당 강원도에는 90명이 거주하는 반면, 서울에는 같은 면적에 무려 16,034명이 함께 산다. 어느 곳이 살기 좋을까. 질문을 바라보는 인식과 태도에 따라 답은 천차만별이겠으나, 일단 차이는 극명하게 보인다. 지역에서 청춘을 보내는 대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졸업 후에는 거의 모두 지역을 떠날 기대를 품는다. 모두 서울로 도시로 이주해 버린 지역에는 노인들만 남아 명맥을 겨우 유지한다.국토균형발전이라고 불렀다. 벌어진 일은 지방을 도시처럼 만들어 내는 게 고작이었다. 도시기능을 지역 환경에 적용하는 수준을 넘어, 획일화된 도시화를 진행하는 동안 지역 특성은 사라져 버리는 ‘문명의 지우개’를 경험하였다. 도시마다 거의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지역마다 있었던 풋풋하고 색다른 모습들은 점차 사라져가는 게 현실이 아닌가. 목포와 삼척은 어떻게 다른가. 군산과 포항은 무엇이 다른가. 원주와 나주는 무엇이 다르다 할 것이며 수원과 경주는 다른가 같은가. 동네마다 변하고는 있지만 모두 같은 얼굴로 바뀌어 가는 게 아닌가. 남다른 스토리와 특별한 풍습이 독특한 방언을 타고 사람들 사이에 나누어지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이 서울로만 이해되는 게 아니라, 부산과 인천, 광주와 춘천도 수도권 못지않은 흡입력을 가지는 지역이 되어야 한다.지역이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중앙의 결정과 지원에 의존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침 대통령이 이제는 지역부터 역동적으로 변화해 가는 토대를 마련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지역 주도로 창의적 발전모델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상상력은 지역에서 분출되어야 한다. 밖으로부터의 시혜에 기대는 발전모델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용솟음치는 창의가 있어야 한다. 동네마다 문화가 있고 마을마다 옛이야기가 있다. 고향냄새 가득한 먹거리가 있고 그곳에만 있는 볼거리가 있다. 도시로 몰려가느라 잊었던 기억을 다시 살려낼 소재가 지역에는 한가득이다. 바다와 산, 들판과 하늘은 도시에 없다. 풀벌레 소리 가득한 캄캄한 밤이 없으며 도란도란 익어가는 함께 사는 느낌도 수도권에는 흔하지 않다.도시화에 지친 현대인의 진정한 회복은 지역에서 일어나야 한다.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의 열쇠는 치밀한 지방화(Localization)에 있다고 한다. 지역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지역에 모두 맡겨야 한다. 새로운 것은 놀랍게도 늘 변방에서 나온다. 한국판 뉴딜정책에 방금 추가했다는 ‘지역균형 뉴딜’이 이번에는 지역의 추동력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과감한 지방분권을 지향해야 한다.지역이 살아나지 않고 나라가 반듯하게 설 방법이 없다. 서울공화국의 오명을 씻어야 한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선다. 지방을 세워야 국격이 오른다.

2020-10-14

뉴AI 시대

AI(Artificial Intelligence)는 인공 지능을 가리키는 말로, 컴퓨터에서 인간과 같이 사고하고, 학습하고, 판단하는 논리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인간지능을 본 딴 고급 컴퓨터프로그램을 말한다.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된 건 존 매카시와 마빈 민스키 등이 참석한 1956년 다트머스 컨퍼런스에서다. 초기의 인공지능은 확정된 환경에서 유한개의 솔루션을 탐색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현실은 환경도 매우 불확정적이고, 솔루션도 미리 유한개로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기계학습은 이런 문제들을 데이터 중심의 판단으로 풀어간다. 예를 들어 “A소설을 산 사람들이 B소설도 사더라.”라는 경향을 파악하고 관련 소설을 추천해주는 것 역시 기계학습의 대표적 이용 사례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컴퓨터에게 사진 이미지를 통해 누가 동일인물인지를 물어보았을 경우, 컴퓨터는 픽셀이 비슷한 무조건적 유사성을 따른다. 그러나 AI는 ‘시행 착오 기술’이다. 에러를 계속 교정, 결과를 얻는다.머신러닝(ML) 분야 국내 최고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는 장병탁 서울대 교수(컴퓨터공학, 서울대 AI연구원장)가 최근 “1세대 AI는 고전(Classical)AI, 2세대 AI는 현대(Modern)AI, 3세대 AI는 뉴AI로, 닫힌 세계인 1,2세대 AI와 달리 오픈 세계”라며 “AI가 가상에서 현실로 나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 마디로 뉴AI시대가 오고있다는 얘기다. 초기단계지만 기계가 스스로 학습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람이 데이터를 줘서 기계가 학습했지만 머신러닝이 나오면서 기계가 스스로 학습 및 프로그램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뉴AI시대가 부르는 사회적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어서 현기증이 날 정도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0-14

한글, 문자향에 물들다

정미영수필가내 안의 수많은 느낌표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린다. 꽃잎이 떨어져 날리면 어느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런 연유로 촉촉한 안개 속살 더듬거리듯 마음에 고인 언어들을 가끔 탐닉하기도 한다.며칠 전, 여든아홉에 돌아가신 할머니 기일에 참석했다. 할머니께 전하고 싶은 가슴 속 활자들의 여리고 긴 여음을 쫓아가다 보면, 어떤 때는 꽃봉오리가 터질 듯이 부풀어 있던 낱말들이 내 손길을 느끼자마자 흐드러지게 문자꽃을 피운다.편지지에 문자향을 가득 담아 제사상에 올려놓았다. 할머니가 살아생전 애지중지했던 낱말인 큰아버지 이름과 할머니 이름을 넣어 편지를 썼으니, 아마도 제사상에 오른 음식을 맛보기 전에 먼저 읽으셨으리라. 등을 구부리고 절을 하고 있으면 이따금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할머니 영혼의 자상한 손길을 내 몸이 떠올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할머니는 예순의 나이를 넘기면서 한글을 배우셨다. 그 해, 국군의 날이 되기 몇 달 전이었다.“이제껏 청맹과니처럼 답답하게 글씨도 모르고 한 평생 살았다 아이가.”더 늦기 전에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하셨다. 군대에서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던 큰아버지의 이름 석 자가 적힌 종이를 들고 충혼탑에 참배 갈 때 가져가고 싶다고 하셨다. 가끔 아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보면 멀리 달아날까봐 애가 탄다고 하셨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아들을 의지하며 살아오셨던 할머니는 평소에 자식을 앞세웠다고 말하시며 자책하는 날이 많았다. 그런 할머니가 현충일과 국군의 날이 되면 나를 데리고 찾아간 곳이 앞산 충혼탑이었다.자식 이름이 적힌 종이를 충혼탑 앞에 놓고 싶다는, 할머니가 유언처럼 내뱉은 말씀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한 평생 남은 자식들만이라도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열심히 사셨던 할머니가 아니던가. 글자를 모르는 것에 잔뜩 주눅이 든 할머니가 문득 안타까웠다. 나는 할머니를 꼬옥 안아드렸다.나는 할머니의 이름과 큰아버지의 이름을 도화지에 커다랗게 적고는 냉장고 앞에 붙였다. 글자를 그림처럼 눈에 익히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런 다음 기역, 니은, 디귿, 아주 기초적인 글자부터 가르쳐 드렸다. 내 나름대로 손 카드도 만들어서 자주 보여드렸다.드디어 국군의 날 아침이 찾아왔다. 모시적삼을 곱게 차려 입으신 할머니가 편지지에 삐뚤지만 큰아버지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나에게 종이를 내밀며 틀린 글씨가 있는지, 한 번 봐달라고 하셨다. 할머니의 손끝이 가볍게 떨려왔다. 나 또한 종이를 받아든 손이 떨리면서 폐부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와, 울 할매 대단하데이.”내 입만 쳐다보고 계시던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셨다. 할머니는 충혼탑에 도착할 때까지 본인이 쓴 글자를 자꾸만 쓰다듬으셨다.쪽빛 닮은 시월 햇살이 앞산 충혼탑 아래에 충만하게 쏟아졌다. 바람결에 실려 다니던 국가 유공자와 유족들의 일만 마디 말들이 소나무 우듬지 위에 빼곡하게 걸려 있는 듯해, 행간을 놓칠세라 열심히 읽었다. 할머니와 나는 묵념을 끝내고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할머니는 큰아버지의 내력을 나에게 담담히 들려주시며, 마련해 간 과일과 편지를 꺼내 놓으셨다. 그러고는 큰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보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셨다. 버석 마른 피부 밑에 눈물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눈물은 소맷자락을 적셨다.생각은 말로 내뱉는 순간 허공으로 흩어진다. 손으로 부여잡고 싶어도 이미 날아가 버린 문장들은 아스라이 사라지기 일쑤다. 할머니도 살면서 체득하셨나 보다. 자식에게 보고 싶다, 그립다, 라는 말을 소리 내어 들려주는 것도 좋지만, 문자로 남겨야 울림이 더 오래 간다는 것을. 할머니 기일 때 썼던 편지를 꺼내 문자향을 흠씬 들어 마신다. 할머니에 대한 먹먹한 기억과 다정한 추억 인자들이 내포되어 있다가 내 마음자락을 물들인다. 문자향은 쉼 없는 그리움으로 변주되어 잔잔한 포말을 일렁인다.

2020-10-14

사랑의 저울추

왜 이렇게 생겨 먹어서 사람들과 충돌만 일삼는 거지? 왜 선생님과 사이는 좋지 못하지? 왜 급우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서먹서먹하기만 하지? 왜 선생님들 하는 짓이 다 우스꽝스럽게만 보이지? 왜 얌전한 모범생이 되지 못하고 시 나부랭이나 끼적이다가 놀림감만 되지?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청소년기는 저런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의 중편 ‘토니오 크뢰거’는 자전 소설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당황스럽고 내밀한 고백으로 가득합니다. 그 은밀한 고백 밑바탕에는 평범한 시민성과 예술가적 기질 사이의 작가적 고뇌가 숨어 있습니다.토니오는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인데다 깊이 보고 자세히 봅니다. 토니오는 동급생 한스를 사랑합니다. 안타깝게도 한스는 토니오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토니오는 한스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소박하고도 가혹한 교훈을 토니오는 열네 살이란 이른 나이에 깨칩니다. 토니오는 그 경험을 실용적으로 활용할 강단조차 없었지요. 다만, 학교에서 주입하는 지식보다 이런 체험적 교훈이 훨씬 더 중요하고 흥미 있는 것으로 생각할 뿐입니다.토니오는 금발의 잉에를 사랑했지요. 웃고 있는 길쭉한 푸른 두 눈에 빠졌고, 수많은 웃음소리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구별하려고 안간힘을 썼지요. 애석하게도 잉에 역시 토니오를 고려해본 적은 없습니다. 악의 없는 무심함의 우정만을 보여줄 뿐이지요. 그녀는 같은 부류인 한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잉에와 한스 같은 안정되고, 평화롭고, 정돈된 치들은 애잔한 단편소설 따위는 읽지 않고, 그런 작품을 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아름답고 무심하고 명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역시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패배자이며 괴로움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토니오는 평온하고 건전한 시민을 대표하는 한스나 잉에가, 예술가적 기질로 길 잃은 시민이 되어버린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자각합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토니오는 자신의 길이 평범한 시민성을 지닌 이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토니오의 슬픔입니다.유행가 가사처럼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던가요. 누가 사랑이 충만으로 가득한 공정한 게임이라고 했던가요. 토마스 만의 일관된 방향처럼 사랑엔 공평한 저울추가 없습니다. 더 사랑해서 패배하거나, 덜 사랑해서 상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만 있을 뿐이지요. 덜 사랑한 자는 무관심해서 상기할 추억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되지요. 그래도, 그래도 말이에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건 그 순간만은 승리자가 되기 때문이지요. 곧장 어리석은 실패자로 돌아오더라도 그렇게 사랑의 감정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엔도르핀이 백만 배는 솟구친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이 마련한 고약한 매뉴얼대로 인간은 백전백패하면서도 사랑이란 문밖을 서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토마스 만은 사랑의 저울추에 대해 누구보다 독자들을 잘 설득하고 있는 셈이지요.김살로메소설가사랑에도 구별이 있습니다. 덜 사랑하는 자와 더 사랑하는 자. 사랑만큼 저울추가 확실히 기울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당사자들에게 똑 같이 할당되는 것이라면 애초에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입술이 부풀고, 이별 때문에 치통에 시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대상을 객관적·보편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덜 사랑하는 쪽이고, 대상에 주관적·감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면 사랑에 빠진 쪽이지요. 덜 사랑하는 쪽은 그 순도가 탁하기 때문에 덜 다치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쪽은 순도 백퍼센트이기 때문에 많이 다치고 감정의 파고에 시달립니다.토마스 만의 이러한 설파에 롤랑 바르트의 전언을 보태봅니다. ‘사랑의 단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배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덜 사랑하는 사람은 철새이고 사라지는 자입니다. 반면 사랑하는 자는 붙박이이자 처분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싱크대 한쪽에 밀려난 더러워진 프라이팬처럼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신세이지요. 부재중이거나 안개처럼 존재하는 그 덜 사랑하는 존재가 사랑인줄 알고 반 쯤 얼빠진 채 열린 창 곁을 서성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갈망하고 기대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속성인 것을. 스스로를 찔러대고 나약했던 그 순간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환상으로 남을 몹쓸 패배의 사랑!

2020-10-14

책은 이제 어디에 쓰나

며칠 전 나의 파주 책 ‘공장’에서는 큰 행사가 있었다. 새로 책이 들어온 것이다.파주 책 공장이라 하니 그 유명한 파주 출판단지 얘기인가 하시겠지만 그것과는 거리 멀다.출판단지에서도 줄잡아 사십 분은 더 들어갈 곰쓸개 웅담리에 서울에 있던 책을 옮겨 놓은 것이다.원래는 식품공장으로 쓰던 곳이었다. 거기 꽉 찬 기계며 비품들을 비워내고 책을 정리해 두려고 만든 새 공간이 바로 책 공장 그것이다. 산뜻, 깨끗하면 좋겠지만 아직도 공장 먼지를 털어내지 못한, 누추하기 짝이 없는 곳. 여기에 우체국 박스로 60개 넘는 책들이 새로 들어왔다. 전날부터 부산에서 책을 트럭 한가득 싣고 오시는 분과 시간을 맞추어 두었다. 아침부터 불광동에서 파주를 향해 출발, 문발리에서 잠깐 다른 일 보고 올라오는 차보다 늦을세라 종종걸음을 쳤다. 가면서 전화해 보니 아직 신갈쯤 오셨단다. 거기서 오려면 서울을 에둘러서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비로소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윽고 차가 오는데 1톤 트럭에 책 박스가 그득히 실렸다. 곧 또 부산까지 내려가야 한다고 두 분이 서둘러 짐을 부리는데 제법 큰 우체국 박스가 공장 바닥에 두 줄로 길게 늘어섰다. 이 많은 책을 다 어떻게 하나? 원주인이 남기신 책들 앞에서 앞으로 정리할 걱정이 태산 같다. 아무려나 문방칼과 가위를 가져다 몇 박스 개봉을 해본다. 나와 약 십 년은 연배 차이가 있으셨건만 당신의 지적 ‘재산’은 놀라울 정도로 나의 것과 같다. 많은 책들이 이미 내가 갖고 있던 책들과 겹쳐 그분과 나의 공동의 정신을 가리키고 있다.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말로,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된다던가 했다. 오늘 여기 하나 덧붙여 책을 좋아하면 가난을 면키 어렵다 할 것이다. 얼마나 귀한 책인가. 옛부터 사람들은 책을 숭상했으니 그 속에 든 온갖 것이 사람의 정신을 살찌게 해준다 믿었다. 이런 책의 ‘위의’가 무너져내리는 오늘이다. 묵직한‘물성’이 환대받던 시절은 갔다. 여기저기 처치 곤란이라는 투정들이 많다. 젊었을 때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들도 차차 나이가 참에 책의 부피와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 한다.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거나 새 집으로 이사라도 할 량이면 어떻게든 한꺼번에 처분하고 싶어진다. 받을 곳도, 받을 사람도 없어 수소문이라도 할 지경이다. 그나마 좋은 책은 가려 갖고 넘기려 하니 누군들 반기워할 수만도 없다.책이 천덕꾸러기가 된 시대에 나는 왜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나? 이 많은 책들은 나중에 어떤 처분을 받으려나? 어느덧 남은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을 지경이다. 이 책들의 쓰임을 위해 없는 지혜를 짜내야 할 판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10-14

비대면 문화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인간은 어느 생물체보다 자생력과 생존력이 강하다. 인류는 유사 이래 수많은 시련과 역경 속에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적응하며 종족 보존과 문명사회를 이뤄왔다. 또한 끊임없는 학습과 반복, 도전과 진화로 지속적이고 비약적인 방향으로의 새로운 발전을 거듭해가고 있다. 변화를 통해 진보하고 창의로 융합하여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인류사회의 궁극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그 원동력의 이면에는 정치, 경제, 사회, 관습, 이념, 정서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겠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문화적인 영향력이 상당하다고 여겨진다. 문화는 한 사회의 개인이나 인간집단의 정신적, 물질적 과정의 산물로 우리의 삶과 생활에 밀접하고 다양한 장르와 광범위한 양식을 포괄하고 있다. 문화적인 저력과 부침에 따라 사회나 나라가 성쇠하고 흥망이 좌우됨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문화의 파급력과 지속성이 크기 때문이다.언제 종식될지 모를 코로나19로 인해 새로운 ‘비대면 문화’가 늘어나고 있다. 온라인 수업, 화상 강의, 화상 회의, 온라인 공연, 영상 전시, 무관중 경기, 언택트 여행, 언택트 이코노미 등 교육과 연예, 예술, 체육, 레저, 경제, 의식 등 사회 전반적인 부문에서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하지 않거나 접촉을 지양하면서 최소한의 활동만 유지하는 비대면 트렌드가 자리잡아가고 있다. 미상불 전염병이 생경한 사회현상과 이색적인 문화를 전이시키는 듯하다.그러나 인간은 이미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질수록 서로 얼굴을 마주 보지 않는 비대면성(非對面性)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인터넷 매체를 통한 채팅, 통신망에서의 온라인 만남, 인터넷 주문, 비대면 계좌 등은 통용된지 십 수년 전의 일이고, 만능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심지어 비대면이 지나쳐 인간적인 만남과 소통까지 소원하고 단절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현실이다.중요한 것은 시대적인 흐름과 변화의 방향을 읽고 발 빠르게 대처해가는 일이다. 주변 상황에 촉수를 높이고 낯설지만 피할 수 없는 비대면의 움직임에 자구적(自救的)인 방안과 공생적인 가치를 찾아야 한다. 바이러스가 만연하는데 언제까지 대면문화만 고집할 것인가. 때에 따라선 비대면 문화가 훨씬 유용하고 효과적일 수도 있다. 예컨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화상으로 전시되는 기획전에서는 온라인 큐레이터의 자세한 작품설명과 연관되는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자연의 풍광을 무대로 송출되는 국악이나 클래식 연주는 물과 바람처럼 흐르는 음조의 선율이 향기로 피어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추석전야에 열린 나훈아의 방대한 언택트 공연으로 많은 국민들이 흉흉해진 한가위 분위기에 그나마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또한 지난 주 열린 방탄소년단의 온라인 콘서트는 전세계 100만명에 가까운 시청자들로부터 경이로움과 찬사를 받기도 했다. 첨단기기를 활용한 멀티뷰 기능과 증강현실(AR) 등으로 공연을 관람하는 팬들에게 흥미롭고 만족스런 볼거리를 제공할 만큼 비대면 문화도 충분한 메리트가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2020-10-13

그래도 북한과 대화 끈은 놓지 말아야 한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우리 사회 내부에는 북한과는 대화도 끊고 철저히 단절해야 한다는 사람이 상당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퍼주기 정책이 결국 핵개발로 연결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대북 협상은 불필요하고 북한을 철저히 고립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대북 정책도 그들을 짝사랑할 뿐이고 떡 줄 사람은 꿈도 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정부의 4·27 판문점 선언이나 9·19 평양 공동 합의는 개성 남북 공동 연락소 폭파로 이미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사실 북한 당국은 과거 우리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비인도적 만행을 수차례 저질렀다. 1968년 북한 124군 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 1976년에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그것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피살사건, 2010년 연평도 피격사건, 천안함 폭파사건도 이어졌다. 김정은 정권 이후에도 핵개발은 더욱 강화되고 주민들에 대한 인권 탄압은 더욱 노골화 되었다. 이러한 북한은 결코 우리가 상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강경 보수층의 주장이다. 대북강경책만이나 봉쇄정책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것이다.그러나 남북관계가 냉전시대처럼 얼어붙고 한반도 상황이 불안할 때의 손익을 냉철히 따져야 한다. 남북관계의 단절과 한반도의 불안 구도는 코리아 디스카운트(discount)로 연결되고 그것이 한국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GDP규모 세계 12위이며 수출 의존적인 한국 경제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폐쇄적인 북한의 소위 ‘자립 경제’ 구조는 잃을 것이 별로 없다. 북한은 그때마다 제2의 ‘고난의 행군’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고 북한 주민의 고통만 증대될 뿐이다. 우리 정부가 북한에 대해 ‘미워도 다시 한 번 정책’을 펴야할 이유이다.독일 통일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가장 큰 교훈은 양독 간 꾸준한 교류와 협력 정책이다. 분단 독일과 우리의 분단 상황이 다소 다른 측면도 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강대국 분할 점령이라는 상황구도는 우리와 비슷하다. 사민당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기민당으로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통일 정책으로 일관성 있게 추진되었다. 서독은 연 평균 약 26억불의 대 동독 지원 정책을 펼쳤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권 10여 년간 대북 지원액과 맞먹는 액수이다. 독일에서는 퍼주기 논쟁도 없었다. 결국 동독인들의 탈출이 후손을 위해 유익하다는 판단이 베를린 장벽을 허무는 계기가 되었다.결론적으로 우리는 북한당국의 억지와 부당성을 알면서도 대화의 끈만은 이어가야 한다. 우리의 화해 협력 정책만이 장기적으로 북한 주민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야당인 국민의 힘도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의 당위성만은 인정하였다. 여야가 통일 문제나 대북 정책이 정쟁의 수단이 되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 다행히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 이후 북한 김정은은 공식 사과문을 보내왔다. 그는 당 창건 75주년 기념사에서도 남북 관계개선의 의지를 보였다. 이런 때일수록 정부는 인내력을 갖고 그들을 협상의 테이블에 앉혀야 한다.

2020-10-13

악어의 눈물

이집트 나일강에 사는 악어가 사람을 잡아먹고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전설에서 ‘악어의 눈물’이란 말이 나왔다. 실제로 악어는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슬퍼서 흘리는 것이 아니라 눈물샘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아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악어의 눈물은 보통 위정자의 거짓 눈물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최근 김종인 국민의힘 대표가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한밤중 열병식에서 내보인 눈물을 두고 악어의 눈물에 비유했다. 그가 보인 눈물은 인민을 위한 연민의 정이 아니고 인민의 감성을 자극하는 일종의 통치수단이란 뜻이다.이해관계에 있을 때 어느 집단보다 가장 독하게 싸우는 정치인도 눈물은 흔하게 보인다. 선거에서 승리를 했을 때 그들이 보이는 눈물은 드라마틱할 정도다. 자신을 지지해준 주민에게 저렇게 감동적으로 고마움을 표시할까 싶다.역사적으로 볼 때 강력한 통치권자도 눈물을 보인 사례는 많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비는 눈물이 많기로 잘 알려져 있고,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도 부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강력한 지도자의 눈물은 연약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적인 면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들이 흘린 눈물은 백성들에게 각별하게 다가간다.그러나 눈물은 진실할 때 상대를 진정 감동시킬 수 있다. 상대의 눈물이 진실한지 여부는 쉽게 알 수가 없으나 눈물의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게 마련이다.미국의 저명작가 어빙은 “눈물은 천만단어 보다 힘 있는 웅변”이라 했다. 김정은의 눈물이 인민에게 힘 있는 웅변으로 감동적이게 전달 된 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인지 아닌지 판명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10-13

진실, 성실 그리고 절실

이창훈경북도청본사취재본부장여우가 토끼를 쫓고 있었다. 여우는 토끼보다 힘도 세고 속도도 훨씬 빨랐지만 결국 토끼를 잡지 못했다. 왜일까. 여우는 한끼의 식사를 위해 뛰었지만 토끼는 살기 위해 뛰었기 때문이다. 바로 간절함의 차이다.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흔히 세가지 ‘실’ 이 필요하다고 한다. ‘진실’ ‘성실’ 그리고 ‘절실’이다. 주어진 상황을 불평하지 않고 ‘이 벽을 반드시 넘고 가겠다’는 간절함이 클수록 눈앞에 놓인 한계는 작게 보인다.베토벤은 어릴 적부터 천재적인 재능과 노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스물일곱 무렵 귓병으로 청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깊은 절망 속에 급기야 죽을 결심까지 했다. 위대한 작품은 그때부터 꽃피기 시작한다.교향곡 3번 영웅, 5번 운명,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 등 대작은 대부분 청력이 무너진 이후 탄생했다. 특히 불후의 명곡으로 꼽히는 교향곡 9번 합창은 청력이 완전히 소멸된 후에 나왔다. 음악에 대한 그의 눈물겨운 간절함이 만들어낸 승리로 밖에 볼 수 없다. 간절함이 기적을 만들어 내듯 ‘세상의 모든 일은 간절한 만큼 이루어진다’는 말이다.경북도는 각고의 노력끝에 통합공항 후보지를 결정했고, 더 나아가 대구경북행정통합으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중이다. 대구와 경북을 하나로 묶어 메가시티를 만들어 수도권에 대항하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통합패러다임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민은 아직은 이에 무관심하다. 이에 따라 시민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전환시키는 보다 상세한 당위성과 절실함을 만들어내, 직접적으로 시도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뿐만 아니라 행정대통합은 향후 크고 작은 파고를 넘어야 하는 등 난제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실과 성실, 절실’함으로 무장해야 한다. 아직 초반이어서 그런지 진실은 보이나 절실함은 약하게 느껴진다.며칠전에 통합에 대한 첫 의회보고회에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이때 분위기는 통합에 대한 거시적인 고찰보다는 지사에 대한 의원들의 섭섭함이 묻어난 것으로 보인다. 지사는 300만 도민의 대표 집행기관이지만 도민들을 대표하는 의원들을 먼저 만나 이해를 구해야 함에도 부족했다.그동안 공항문제에 집중했고, 또 코로나로 인해 대외적인 활동에 한계가 있었지만, 행정통합의 로드맵에 앞서 우선 의원들에게 통합의 대의명분을 알리는 등 소통이 아쉬웠다는 생각이다. 중차대한 행정통합을 특정언론을 통해 알게되는 등 그동안 의원들은 상당한 섭섭함을 가졌고 이날 표출됐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의원들도 차제에는 더욱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지역의 미래비전을 우선 순위에 두고 상생을 위한 큰 그림에는 여야를 비롯 북부권 동부권 등 따로 없이 힘을 합쳐야 한다. 궁극적으로 통합결정은 시도민의 손에 달려있다. 통합신공항 입지결정이 경북도민의 절실함이 뿜어져 나왔기에 성공을 거뒀듯, 행정통합이라는 시도민의 손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진실, 성실, 절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20-10-13

1인 가구의 탄생

가족의 형태를 초등학교 교과서를 통해 처음으로 배웠다. 그 시절 나는 굉장한 우등생이었다. 난 백 점인데 넌 몇 점이야? 시험지를 앞에 두고 좌절하는 친구를 약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선생님의 질문에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대답하는, 그야말로 얄미운 짝꿍의 전형이었다. 아마 사회 교과를 배우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대가족과 핵가족의 개념을 설명했다. 가족은 다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현대 사회는 급속도로 핵가족화되어 간다고. 멀쩡한 구조가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다며 열변을 토하던 목소리가 생생하다.세상에는 가족 만들기를 포기하고 혼자 사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아주 특수한 형태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 혼자 사는 건 이상한 일이구나. 어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름지기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배웠던 나는 백 점의 어른, 기성세대가 동그라미를 그려주는 완벽한 미래를 고대했다.굴뚝이 있는 이층집에서 다정한 남편, 올망졸망한 아이들, 애교 많은 강아지와 함께 멋진 가족을 이룰 것이라고 다짐했다. 생을 살아내는 것도 우등생답게 거뜬히 해낼 줄만 알았다.시간은 무럭무럭 흘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나는 선생님이 그렇게나 한심하게 생각하던 혼자 사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난 이모랑 살아.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면 될 것을 “왜?” 하고 질문해서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던 경험이 있다. 나의 되물음에 친구는 우물쭈물하다가 몰라, 그냥 나는 그렇게 살아, 하고 말을 맺었다. 그가 내보이던 난처함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알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다.나는 그가 사회가 인정한 ‘정상 가족’ 안에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바랐다. 악의를 가진 말보다 더 날카로운 무지로 친구에게 상처를 줬다. 그 죄책감은 마음 한구석에 묵직하게 남아있다.가족의 형태는 다양하다. 이 당연한 사실을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피를 나눈 사람들, 그러니까 조부모, 부모, 형제, 자매가 함께 사는 것만이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이 그랬고 옆집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건너편 집의 누군가는 사돈의 팔촌과, 애인과, 햄스터와,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미국 ABC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모던 패밀리’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보여준다. 각기 다른 성향을 지닌 삼 남매를 키우는 부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백인 남자와 재혼한 라틴계 여자, 게이 커플과 그들이 베트남에서 입양한 아이,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이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지며 가족이라는 형태를 어렴풋이 만들어낸다.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에서 등장하는 가족은 사회 규범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이들은 이들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서 안정과 위안을 얻는다. 우리가 그렇게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족보’ 따위 없는 이들은 그 무엇보다 가족에게서 요구되는 이해와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듯 현대적 가족이 의미하는 것은 혈연으로 묶인 공동체가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그렇다면 홀로 살아가기를 택한 1인 가구는 어떨까. 1인 가구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의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여 작년에는 무려 30.2%에 다다랐다.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내 주위에도 혼자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출현하는 연예인 역시 그렇지 않은가. 이들은 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유의미한지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맛있는 식사를 하고 운동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집을 가꾸며 충만한 하루를 보냈다고 자부한다. 불 꺼진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외로움보다는 편안함으로 받아들이며 허심탄회하게 나 자신과 마주 앉아 사색하기도 한다. 이들의 모습에 우리는 모종의 대리 만족을 느낀다.혼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부끄럽던 시대는 지났다. 홀로 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상품은 시장에 즐비하게 나와 있다. 혼자 밥을 먹을 수 있게 테이블을 배치한 식당은 물론이고 1인 분량의 재료를 소분한 상품을 여러 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영화, 독서, 코인 노래방, 컬러링북, 다이어리 꾸미기 등 혼자 노는 방식도 무궁무진해서 집에서 보내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무엇보다 혼자여서 좋은 점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 자신과 강하고 다정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디어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서는 1인 가구에 대한 무례한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는 ‘노처녀’ 혹은 ‘노총각’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말인지에 관해 잘 알고 있다. 마치 어떤 하자가 있기 때문에 가족 제도에 편입하지 못했으며 출산과 같은 복잡한 일은 피하는 이기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식이었다.물론 아직까지 이런 교묘한 시선은 남아 있어서 명절과 같이 친인척들이 모이는 날이면 “그래서 너는 결혼 언제 한다고?”와 같은 구시대적 질문을 들어야만 한다. 혼자 살 거라는 대찬 포부를 밝히면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얼굴로 되묻는다. 사람이 어떻게 혼자 살 수가 있어?한집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주요한 특징처럼 보이지만, 이는 인간성이라기보단 동물성에 가깝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아프리카의 얼룩말이나 우리나라의 겨울 철새는 모두 무리를 이뤄 사는 동물이다. 이들은 다양한 이익을 얻기 위해 무리를 형성한다. 포식자의 공격을 빨리 알아차리고 먹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안정적으로 종족 번식을 할 수 있다.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이유, 생존을 위함이다. 인간은 단순히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존재다. 이것이 여타의 동물과 다른 지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무리 생활을 넘어 한 차원 높은 형태인 가족을 형성한다. 가족 공동체는 사회로 국가로 뻗어 나간다. 언어와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아간다. 토론하고 설득하고 이해하며 삶의 모양을 만들어가는 건 인간의 권리 중 하나다.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이유로 1인 가구가 되기를 선택한다. 그러나 비자발적으로 떠밀린 경우도 있다. 사별로 혼자 된 사람들이나 자녀와 함께 살지 않는 노인 계층이 그렇다. 또한 제도 속에 편입되고 싶지만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 이를테면 동성 부부의 경우는 1인 가구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이성 부부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지만 제도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성 커플이지만 결혼이라는 사회적 규약을 거부하고 동거 형태를 유지하는 이들 역시 1인 가구에 포함된다. 요즘에는 하우스 메이트를 구해 함께 사는 방식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공간을 쉐어하는 목적으로 만나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경제적 절약을 추구하는 것이다. 개와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이나 반려 식물과 함께하는 삶도 있다.인생은 정답이 있는 시험지가 아니다. 선입견에 갇혀 타인의 삶에 빗금을 긋는 과오를 저질러선 안 된다. 또한 비자발적으로 1인 가구로 편입된 이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법과 제도는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새로운 가족의 형태와 그를 뒷받침하는 역할에 관해 골몰해야 할 때다.문은강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은 현대적 가족의 의미를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주)티캐스트

2020-10-13

양파와 단호박

양파를 넣은 단호박 수프.깨끗하게 껍질을 벗겨 씻어 놓은 양파는 말갛게 투명한 우윳빛을 드러내듯, 빨리 요리에 써 달라고 단단하게 주먹 쥐며 아우성치는 듯이 느껴진다. 햇살을 받으며 스테인 채반에 얹혀 있는 양파는 보기만 해도 요리 본능을 자극한다. 양파의 장점은 어떤 요리와도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고기 요리나 야채 볶음이나 생선조림 그 어디에 넣어도 아작아작한 식감과 달큼함이 때론 요리의 주된 식재료보다 더 맛있게 느껴질 때도 있다.단호박 수프를 좋아하는 나는 양파와 단호박으로 수프를 자주 해 먹는다. 초록색의 단단한 겉껍질 속에 숨은 속살을 웬만해선 드러내지 않는 단호박은, 고를 때부터 맛있는 걸 선택했길 간절히 바라며 신중하게 장바구니에 담는다. 집에서 식도로 단호박을 반으로 갈랐을 때 진한 노랑을 드러내면 일단 안심이다. 먼저 채 썬 양파를 약불에 올린 냄비에 버터와 함께 오랫동안 양파의 단맛이 우러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볶아준다. 이 과정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수프에서 양파의 매운맛에 입안이 공격당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껍질을 제거하고 썰어 둔 단호박도 넣고 살짝 볶아둔 뒤 물을 넣고 끓인다. 단호박이 잘 익었으면 한 김 식힌 후 믹서에 갈고, 다시 한번 우유나 생크림으로 농도를 맞춘 후 간을 하고 흰 후추를 톡톡 넣어주면 색상도 고운 단호박 수프는 완성이다. 오로지 양파와 단호박이 열 일 한 음식이다.요리를 하면서 어느 요리에나 잘 스며드는 양파 같은 사람이고 싶다. 또 양파를 잘 품으면서도 자기 색깔을 잃지 않는 단호박을 닮고 싶기도 하다./권현주(포항시 북구 장성동)

2020-10-12

인연

가을에 접어들면서 일교차가 커지고 있다. 추석이 지나면서 낮과 밤의 일교차가 10℃ 이상으로 커지고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진돗개의 공격을 피해 라일락 나무 옆 담장 위에서 먹고 자던 고양이가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가지러 가려고 현관문을 열면 늘 먼저 야옹 하고 내게 인사를 건넸다. 발레리나처럼 몸을 늘려 스트레칭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고양이는 7년 전 어미젖을 덜 뗀 듯 눈매가 희미하고 털이 보송송한 모습으로 우리 집과 인연을 맺었다. 사람들 왕래가 뜸한 아파트 뒤쪽에서 비틀거리며 걷는 폼이 위태롭게 보였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가져온 우유를 주자 그 시간이면 나타나 주는 우유를 깨끗이 핥아 먹었다. 현관 앞에 집을 만들어 주고 사료를 담아 주었더니 애초부터 제 보금자리 인양 눌러 살았다. 아이들 품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 고양이는 빨래를 너는 내 다리에 감기고 담장 너머 텃밭까지 졸졸 따라다녔다.어느 날 빨래를 걷는 남편의 다리에 감겼다가 그만, 밟히고 말았다. 그 후유증으로 사료를 먹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입자가 작은 사료로 바꿔주고 고양이용 캔을 사서 사료에 버무려 주었더니 곧잘 먹었다. 사료 냄새를 맡고 도둑고양이들이 몰려들었다. 사료를 주고 돌아서기 무섭게 그릇이 바닥을 보였다. 학교 갈 준비로 바쁜 아이들을 불러 세워 고양이가 사료를 다 먹을 때까지 교대로 보초를 서게 했다. 소유하는 것에는 그에 맞는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요일을 정해 밥 당번을 시켰다. 그렇게 한 가족처럼 산지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어 집을 떠났다. 성장한 아이는 부모를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지만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무심코 고양이가 머물던 담장 위로 눈길이 간다. 아침이면 야옹 하고 인사를 건네던 울음소리가 그립다./김지연(경주시 마동)

2020-10-12

농장 가는 길

달려드는 자동차를 피하기 위해서 취하는 일종의 자위 수단이다. 대부분의 차량은 서행하며 조심을 하나 일부는 출근길이 바빠서도 그렇겠으나 막무가내로 달려들며 심한 경우 손이나 옷이 스치게 되는 경우까지 있어 호미를 들되 도로 쪽으로 향한 손에 적당하게 벌려 들고 흔들며 촌놈 행색으로 휘적휘적 걸어간다. 달려들면 제 차에 흠집이 생길 것이므로 모두 조심하나 가끔 나팔을 울리며 조바심을 치는 경우도 있으나 깡그리 무시하고 그대로 걸어간다.다리 끝부분에는 좌우로 밭이 있다. 왼편에는 만해 형님 밭이고, 오른편에는 이화씨의 농장이다. 제멋에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마을에는 잘 나고 똑똑하신 분들이 많다. 그러나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부터 내가 존경하던 분들은 만해 형님과 우리 부부가 천사라고 부르는 이화씨이었는데 불행하게도 한 분이 먼저 떠나시고 이제 이화씨만 남았다. 재작년에 초보 농군인 우리는 마늘 두 접을 심어 종자보다도 못한 수확을 한 적도 있는데 이화씨는 반 접을 심어 두접반을 수확한다. 항상 필요한 양보다 많이 심고 거두어 이웃들과 나눈다. 우리더러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대로 뽑아 먹으란다.나는 농장이라고 뻥을 치나 실은 하천 부지를 개간한 국가의 땅이다. 처음 강둑에 매실나무를 심을 때만 해도 어느 천 년에 효도를 보겠느냐고 하시던 마을 분들이 우리가 매실을 수확하는 것을 보시곤 묘목들을 심으셨다. 농장 둑에는 왕보리수, 감, 대추가 달린 나무가 보이고. 무성한 오가피나무에는 산비둘기가 집을 짓고 알을 낳고 부화하여 새끼를 데리고 떠난 빈 둥지가 숨어있다. 농장에는 봄에서 가을까지 열 가지도 넘는 야채며 채소들이 자란다. 매일 아침이나 한낮이나 저녁에는 한두 번쯤은 들려 살펴보고 만져보고 대화한다. 아마도 나무며 채소들은 나의 발소리를 기억할 것이고 멀리서 내가 나타나면 주인님 오신다고 영차영차 할 것 같다./류대열(경주시 외동읍)

2020-10-12

책이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

“당신은 지금 이탈로 칼비노의 새 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를 읽을 참이다.”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가 책을 읽고 있다 보면, 불현듯 책 속에 있는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 작가는 언제나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서 작가의 말건넴이란 이런 소설가의 창작이나 독서의 몰입에 대한 비유가 아니다. 칼비노는 책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 실제로 말을 걸어온다.이탈리아의 환상문학 작가인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는 소설의 목소리나 서술의 형식에 있어서 지금까지 존재했던 소설 작품들 중 가장 독특하다고 해도 좋을 작품 중 하나이다. 서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많은 이론가들 역시 특히 독자에게 전하는 작가의 목소리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을 특별한 사례로 손꼽고 있기도 하다.이 소설은 철도역에서 시작한다. 여느 작가가 그렇듯 칼비노도 어느 철도역에나 있을 법한 풍경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기관차에서 나오는 증기 구름, 그리고 냄새, 낡은 기차의 뿌연 유리창과 멀어져가는 기적 소리들이 이 소설의 초반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당연히 그 배경 속으로 역시 여느 소설이 그러하듯이 아마도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사람이 카페로 들어온다. 역 안의 풍경과 시골 역 한 켠에 있는 카페에 지금 막 들어선 남자를 묘사하는 시선은 작가의 그것이다. 그러다가 소설 속 목소리는 남자의 것으로 바뀐다. “나는 카페와 전화 부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남자다” 그러면서 작가는 ‘당신’이라고 불리우는 독자를 소설 속에 초대한다. “그 남자는 ‘나’라고 불리며 당신은 이 역이 ‘역’이라고 불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듯 그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이처럼 이 소설에는 ‘작가’와 ‘나’와 ‘당신’이 공존한다. ‘작가’는 한편으로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나’가 하고 있는 행동들 속에 담긴 심리를 이해하면서 그것들을 소설 속에 기록해둔다. 또 독자인 ‘당신’이 갖고 있는 마음속 상태를 예민하게 짐작하면서 작가의 마음속, 그리고 독자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소설’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다룬다. ‘메타픽션’이라는 형식으로 작가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목소리가 소설이 되어가는 양상을 다뤘던 경우는 적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이 소설은 독자의 자리를 소설의 내부에 만들어 두고 그 독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소설이라는 현상에 참여하도록 한다.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인 당신은 이 책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를 30페이지 넘게 읽고 있다가, 제본의 실수로 같은 페이지가 중복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당신이 서점에 항의를 하러 가보니 서점 주인은 제본소의 실수로 책의 속지가 타지오 바자크발이라는 폴란드 작가의 책과 뒤섞여 버렸다고 한다. 당신은 서점에서 만난 다른 여성 독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우연히 발견한 이 바자크발이라는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하고, 그 사이에 책의 중단과 그 책에서 연결되어 파생된 다양한 책들을 읽어나가면서 책의 또 다른 독자인 루드밀라와 책이 얽혀 있는 다양한 관계들을 경험한다. 독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바자크발이나 칼비노의 완결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이든 읽어나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삶이라는 것이다.소설의 마지막에 당신은 루드밀라와 결혼하여, 다시 책을 읽는다. 루드밀라가 불을 끄고 그만 자라고 말하자, 당신은 “조금만 더 보고. 이탈로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인데 거의 다 읽었어” 라고 말하며, 소설은 끝난다.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은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인가. 아니면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당신의 삶 자체인가. 이 소설은 이렇게 질문한다.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인가? 아니면 당신의 삶 자체인가?/홍익대 교수

2020-10-12

다시 미니멀라이프를 꿈꾸다… 문경 심원사(深源寺)

청화산과 속리산 사이 828m의 도장산 깊숙한 곳에 심원사가 있다. 쌍용구곡의 비경을 감상하며 절을 찾아 가는 길은 초입부터 걸음이 설렌다. 계곡 옆 작은 주차장에 두어 대의 차가 주차돼 있지만 산길을 한적하다. 발밑에서 돌멩이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가빠지는 나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온다.심원사는 직지사 말사로 태종 무열왕 7년(660년) 원효 대사가 창건하여 창건 당시에는 도장암(道藏庵)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뒤 이 절의 연일이 유정을 도와 일본에 가서 포로들을 데려오는 등의 공훈을 세워 선조 38년 나라로부터 부근 십 리 땅을 하사받았다. 영조 5년 낙빈대사가 옛 절터에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현재의 심원사로 고쳐 부른다. 1958년 건물이 전소되어 1964년 법당과 요사채를 세워 오늘에 이르지만 예전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으며 특별한 문화재도 전하지 않는다.돌길에 익숙해져 갈 때쯤 서서히 숲의 속삭임이 들린다. 계곡 물소리도 들린다. 좁은 산길은 가을 공기로 가득하다. 발품을 팔지 않으면 당도할 수 없는, 오염되지 않은 절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즐겁다. 쉽게 얻은 것일수록 쉽게 잊혀지게 마련이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하는 산사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다.미세한 숲의 소곤거림에 내 귀는 훨씬 예민해진다. 작은 폭포와 맑은 물,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바람, 숲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작은 움직임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경이롭다. 그토록 반짝이던 나뭇잎은 어느 새 윤기를 잃고 까칠하다. 머지않아 이 계절도 눈 깜짝할 사이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성급히 돌아서는 계절의 뒷목덜미를 바라보며 나는 진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으리.저만큼 보이는 산문 앞에서 나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낮고 겸손해서 오히려 높아 보이는 문, 이토록 아름다운 일주문은 본 적이 없다. 가벼운 양철지붕과 작고 소박한 현판, 무명옷 두르고 사립문을 서성이던 잊혀진 애환과 정서가 녹아 흐르는, 저문 기억들이 말없이 서 있다. 세파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온 산문이 뿌듯하도록 자랑스럽다.작은 산문을 경계로 속세로 이어져 있던 길은 더 이상 나를 따르지 못한다. 적송 한 그루와 오동나무가 사천왕을 대신하고 주목이 울타리처럼 자라는 길을 따라 경내로 향한다. 이 길 위에서는 누구나 나무향이 날 것 같다. 살이 오른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노닐고 있는 조그만 철재다리, 그 극락교 너머에 심원사가 있다.숲이 울리도록 진돗개가 짖어대며 나온다. 녀석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서둘러 대웅전으로 향한다. 크고 잘 생긴 녀석의 눈에 나는 큰 불청객은 아니었나보다. 이내 경계심을 푼다. 꼬리를 흔들며 법당 문 앞을 지키는 영리한 녀석에게 나는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단청을 하지 않은 대웅전, 석가모니 삼존불을 모신 수미단과 후불탱화, 어디에도 화려함을 탐내지 않았다. 법당 안은 단출하고 소박하다. 천장에 달린 소원등도 많지 않다. 소박함이 나를 낮고 경건하게 만든다. 하지만 허리통증이 심해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삼배를 마칠 수밖에 없다.풍족해 보이지 않지만 결핍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맑은 기운이 일렁이는 심원사의 가을은 온전한 소박미로 눈부시다. 가지런한 장독대에서는 여성스러운 정갈함이 배어 있다. 비구니 스님이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오실 것 같다. 요사채 뒤편 허름한 건물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주인이 있음을 알린다.잘 자란 산수국과 돌배나무가 대웅전을 지키고, 흔하디흔한 풀꽃들이 이곳에서는 더 사랑스럽다. 요사채와 삼성각, 존재감을 드러내는 풀과 나무들의 눈빛을 읽을 수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고즈넉한 평화가 머문다. 고향집에 온 듯 꾸밈없는 따스함이 곳곳에서 피어난다.대웅전 옆 빈터에는 빛바랜 연등 하나 모과나무 가지에 걸려 홀로 쓸쓸하다. 그 아래 시멘트 벽돌 위에 나무판을 얹어 만든 투박한 벤치가 허전하도록 시리다. 벤치에 앉아 있으면 모과나무 이파리가 툭툭 어깨를 치며 무뎌진 감성을 깨워줄 것만 같다. 서리 오기 전에 모과를 거두는 밀짚모자 쓴 스님이나 시집을 읽으며 고독한 영혼을 달랠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풍경조차 비어 있다.조낭희 수필가가을이 깊어지기 전에 모과나무는 빈 몸으로 서기 위해 묵상 중이다. 떨어진 나뭇잎을 밟는데 풍경소리가 대신 울어준다. 이곳에는 외로운 것이 없다. 이 계절이 서늘하도록 아름다운 건 비움의 미학 때문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 나도 몇 번이나 미니멀라이프를 꿈꾸었다. 하지만 비워진 공간은 또 다시 물건들에 점령당하곤 했다. 영혼을 방치한 채 소유에 지쳐가는 삶, 비우지 않고는 어떤 것도 품을 수 없다.심원사의 묵언 같은 말씀 한 자락 품고 나오는데 운치 있는 별채가 보인다. ‘금장암’이란 현판을 내건 개집을 보고 뒤늦게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금장이를 향한 스님의 애정이 곳곳에 묻어나는, 숨어 살 듯 고요함을 사랑하는 심원사는 독백 같은 절이다.산문을 나서는 내게 가을의 속삭임이 들린다. 그대, 이 가을엔 시집 한 권 들고 여행을 떠나라. 아름다운 계절일수록 걸음이 빠른 법이니 조용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서둘러야 하리.

2020-10-12

한국정치판의 조슬(蚤蝨)들

강희룡 서예가조선후기 실학자 홍대용의 사상을 집대성한 철학소설이 바로 ‘의산문답(醫山問答)’이다. 이 책은 중국 동북지방의 명산 의무려산(6BC9巫閭山)을 배경으로 벌이는 문답 형식의 글이다. 이 책 내용에 지구 자전설을 흥미롭게 풀어쓴 책의 뒷부분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무릇 지구는 우주 가운데 살아있는 것이다. 흙은 그 피부와 살이고, 물은 그 정액과 피다. …. 초목은 지구의 머리카락이고 사람과 짐승은 지구의 벼룩(蚤)과 이(蝨)다’. 벼룩이나 이는 사람과 짐승의 피부에 달라붙어 피를 빨고 사는 기생충이다. 자연 속에서 생성되고 움직이며 펼쳐있는 모든 삼라만상이 다 지구를 살리는 역할을 하나 유독 사람과 짐승은 지구에 해가 되는 기생충 존재로 본 것이다.벼룩은 ‘벼룩의 간을 빼 먹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작은 것의 대명사로 불리고 민첩성이 있기에 잡기가 쉽지 않다. 이슬(蝨)자는 ‘이’를 말하지만 다르게 ‘관(官)의 폐해’를 일컫는 단어이기도 하다. 인간사회에서 소수라도 벼룩이나 이처럼 유해한 기생충 유형의 인간이 정치권이나 고위공직자에 섞여있으면 그 사회는 곧 공정과 정의가 사라지게 되며, 반칙과 불공정이 그럴듯한 궤변으로 정의로 둔갑한 채 활개를 치게 된다. 결국 사회는 병들게 되고 망국을 재촉하게 되며 그 피해는 국민들에게 돌아온다.지난달 23일 우원식, 윤미향을 비롯한 의원 20여명이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을 국회에서 발의했다. 이 법안은 민주유공자와 그 유가족들과 자녀들에게 입시혜택과 학비지원, 취업혜택, 의료비 감면, 양육, 주택, 금융권의 장기 저리대부 등을 제공한다는 골자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과 여당에는 자칭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들의 자녀가 대학입학과 학비면제, 취업은 물론 금융권 등에서도 혜택을 보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까지 선정된 민주화 유공자들에 대해선 이미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져 왔으며 여권 고위층에도 억대의 보상금을 받은 이들이 적지 않다. 민주주의와 사회공정을 외치던 운동권 여당에서 자신들이 포함된 셀프특권법안을 만들려는 것이다.민주주의에서는 공정한 절차와 과정이 없는 역차별 제도는 헌법이 금지하고 있기에 이 법안은 80년대 운동권이 스스로 사회적 특수계급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아직까지도 명확한 유공자선정 기준과 명단을 국민 앞에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겉으로 민주화유공자 몇 명의 이름을 세우고 뒤로는 자신들이 이 법안에 편승하여 가족과 함께 대물림 혜택을 받으려는 꼼수인 것이다.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싸우겠다던 심장이 권력의 단물에 녹아 과거의 가치는 소멸된 민주화의 낡은 세력으로 남아 영욕에 찬 기득권집단이 되어 이 사회에 벼룩이나 이 같은 존재의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화운동은 긴 세월 모든 시민들이 함께 투쟁하여 얻은 결과이기에 지금의 민주주의 한국에서 명예로 이미 보상 받지 않았는가!

2020-10-12

아무것도 안하기

류영재포항예총 회장올해의 추석연휴는 유난히 길었다. 직장에 매인 몸이 아니니 평일이나 휴일이나 별반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휴일에는 쉬는 편이다.그동안은 깜냥에 비해 많은 일을 했던지, 아니면 이제 체력이 좀 떨어질 나이가 되었는지 휴식도 일삼아 해주어야 뒤탈이 없다.이번 추석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했다. 넋 놓고 TV를 보다가 졸리면 잠자고, 잠자다 일어나면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잡초를 뽑기도 하고, 자잘한 돌멩이를 걷어차기도 하고, 공활한 가을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또 있다. 띠 동갑인 막내 동생이 와서 2박3일 동안 두런두런 옛날이야기도 했고, 마을길을 걸으며 들판의 코스모스도 함께 보았다. 막내는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나를 오빠이자 아버지처럼 따랐는데, 몇 해 전 담낭에 심각한 이상이 생겨 생사를 넘나드는 모습을 손수무책, 그냥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기억에 더욱 마음이 애틋하다. 막내는 같이 놀자고 보채는 두 마리 키 큰 멍멍이들과 공 던지기 놀이도 했고, 나는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았다. 막내는 나와 같은 개띠지만 덩치 큰 개 두 마리를 무서워하였으나 그들의 줄기찬 꼬리질에 넘어가서 ‘개 고모’가 되었고, 집으로 돌아가서 도착 안부도 개안부가 먼저였다. 개보러 자주오라니 대답이 걸작이다. “개 보러 갔다가 오빠도 잠깐 보고.”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안한 게 아니라 그동안 허겁지겁 정신없이 사느라 못하던 것들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지친 심신의 휴식을 위하여 명상을 시작했다. 명상이라야 뭐 대단한 건 아니고, 하루에 10분 남짓 시간동안 혜민 스님의 명상안내에 따라 가는 것이 고작이다.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명상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세상과 더불어 편안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자신과 타인을 함께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것이며, 편안하게 숨 쉬며 존재를 자각하는 일이다.18일차 명상의 주제가 ‘아무것도 안하기’였다. 혜민 스님은 한결같은 편안한 목소리로 오늘은 특별한 일 하지 않고 편안하게 쉬어가는 날이라며 프랑스의 플럼빌리지 얘기를 하셨다. 플럼빌리지는 명상을 오랫동안 가르친 틱낫한 스님이 만든 수행공동체로, 이곳에 가면 나이나 성별, 종교, 인종 등을 초월하여 다 같이 모여 앉아 명상수행을 한다.여기서 스님이 인상 깊었던 것은, 스케줄에 맞추어 열심히 명상 수행을 하다가 일주일에 하루는 ‘레이지 데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게으른 날’이다. 그날은 정해진 스케줄 없이 쉬던지 잠을 더 자고 싶으면 자도 되는 날이다. 틱낫한 스님은 내 몸과 마음에 좋은 명상도 적당히 쉬어가면서 해야지 너무 열심히 하려고만 하면 중간에 지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게으름의 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정말로 현명한 생각이다. 무슨 일이든 지나치면 독으로 변하는 법이니까.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게으른 시간을 가져볼 일이다. 편안하게 숨 쉬고, 편안하게 내쉬고….

2020-10-12

역지사지는 불가능하지만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오래전 이야기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버스를 타고 등교하게 됐다.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치면 서로 미소로 인사하던 초등학교 동창이 언제부터인지 내가 인사해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 후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알게 된 사실은, 자기는 열심히 웃어줬는데, 내가 외면해서 자기도 인사를 안 했다는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아는 사람을 만나면 엄청 과장되게 인사하게 됐다. 이런 에피소드는 사람마다 차고 넘칠 것이다. 내 딴에는 좋은 의도로 한 행동도 엉뚱한 오해를 사기도 하고, 나 역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잘못 이해하고 서운해하기도 한다. 이런 어긋남은 아무리 전문적인 수련을 한 상담 전문가도 예외는 아니다.실존심리치료 전문가 어빈 얄롬은 “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라는 책에서 내담자 마리를 치료한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고백하고 있다. 마리는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우울증에 걸려 얄롬을 찾아왔는데 3년이 넘는 치료에도 큰 진전이 없었다. 결국 자문 치료자의 최면 치료 도움을 받기로 하고 마리가 최면 치료를 받는 동안 옆에서 지켜보았다. 마리는 최면에 들어있는 동안 미소를 두 번 지었는데, 하나는 자문 치료자가 마리에게 그녀의 턱 통증에 대해 구강외과 의사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도움을 받으라고 권했을 때이다. 두 번째는 마리에게 금연을 권하면서 개를 키운다고 상상하라고 하면서 그 개에게 독이 든 음식을 주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몸도 돌보라고 했을 때이다.얄롬은 마리와 구강외과 의사의 불편한 관계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마리가 이전에 애완견을 안락사시켰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의 웃음은 자문 치료자의 조언이 마리에게는 효과가 없다는 의미였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마리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자문 치료자는 마리가 자신의 조언을 수용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최면에서 깨어난 후 마리의 대답은 얄롬의 확신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처음 미소는 구강외과 의사와의 불편한 관계를 그가 몰랐으면 하는 마음의 표현이었고, 두 번째 미소는, 얄롬이 자기 개를 안락사시키라고 했기 때문에 얄롬이 불편할까 봐 개 이야기는 그만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결국 두 심리치료 전문가는 당사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미소의 의미를 해석한 셈이다. 그러니 플로베르가 키우던 앵무새까지 조사해도 플로베르라는 사람을 제대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던 줄리언 반스 이야기가 이해가 간다.네가 나라면 웃을 수 있느냐며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호소하기 위해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상대방에게 내 사정을 다 보여주어도 완전한 공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모든 교류가 무의미하거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만 알아도 서로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고 남을 알아보지 못할까를 걱정하는 태도를 갖는 것만으로도 관계는 성장할 수 있다.

2020-10-12

신종 보이스피싱 ‘전화 가로채기’

‘전화 가로채기’는 전화를 가로채 받을 수 있는 앱을 피해자 스마트폰에 깔도록 유인한 뒤 돈을 갈취하는 보이스피싱 범죄를 일컫는다. 전화 가로채기는 보이스피싱 조직이 피해자 스마트폰에 악성 앱을 설치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후 범죄 조직은 금융사나 경찰 등을 사칭해 금융사기에 연루됐으니 확인 바란다는 식의 연락을 한 뒤, 악성 앱을 통해 피해자 스마트폰을 감시한다.피해자가 금융사 대표번호, 112 등으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려 하면 사기꾼이 전화를 가로채 자신들에게 연결해 안심시키며 원하는 계좌로 입금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또 보이스피싱 집단이 피해자가 평소 거래를 해 오던 은행 이름으로 기존 빚을 갚으면 신용도가 높아져 낮은 금리로 추가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등 피해자가 관심을 보일만한 내용의 문자를 보낸다. 이 문자에 안내된 번호로 전화를 걸면, 이들은 보안을 위해 문자에 링크된 애플리케이션(앱)을 스마트폰에 내려받도록 유도한다.피해자가 앱을 설치한 후 평소 거래하던 은행, 카드사 등에 전화를 걸어도 보이스피싱 집단이 피해자가 설치한 앱을 통해 전화를 가로채 마치 은행원 등 관련 직원인 것처럼 상담을 해 돈을 갈취하는 방식이다.이는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검찰, 금융감독원 등 국가기관을 사칭하던 보이스피싱 방법에서 한걸음 더 진화한 신종 보이스피싱 기법이다.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공식 앱 장터 외에서는 애플리케이션 설치하지 않기 △스미싱 차단을 위한 보안 앱 및 모바일 백신 설치하기 △문자 메시지에 포함된 URL 클릭 하지않기 등이 필수다. 눈 뜬 채 코 베이고 싶지않다면 모두 조심, 또 조심할 일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0-12

‘차벽(車壁)’ 너머 ‘맹탕’

안재휘 논설위원광화문 일대에 쳐진 물 샐 틈 없는 차벽(車壁) 설치물 장관을 바라보며 ‘대한민국 경찰은 세계적인 설치미술 그룹이 됐다’는 우스개가 생각났다. 우리 경찰은 현존하는 그 어떤 예술가도 할 수 없는 ‘재인 산성’이라는 제목의 설치미술 작품을 선보였다. 이명박 정권 때의 ‘명박 산성’ 실험과 박근혜 정권의 ‘근혜 산성’이라는 시행착오를 맹비난하면서 배워 완성한 새로운 버전의 산성이니 그 완벽성이야 두말할 나위가 있을까.광화문 ‘재인 산성’을 외신들은 어떻게 볼까, 세계인들은 서울의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코로나19 확산을 막는 가장 훌륭한 장비가 마스크이고 그 다음으로 손 소독제, 에틸알코올 정도라는 건 지구촌의 상식이다. 거리 두기도 한 방안일 수는 있을 것인데, 기발한 수단인 ‘산성’이 신종 방역장치로 등장한 셈이다.정권의 잘못을 비판하려는 모든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수백 대의 경찰 버스로 광장을 틀어막고, 차량 시위마저 금지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하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유원지·관광지는 내버려 두고, 굳이 광장만 다 틀어막고 행인들 모두를 검문 검색하는 일을 ‘방역’이라고 우기는 건 야릇한 일이 아닐 수 없다.수십 수백 대 차량이 사람을 가득 채우고 교통신호를 기다리거나 주차장에 몰리는 건 괜찮고, 깃발이나 현수막을 단 차량엔 단 1명만 타야 한단다. 그것도 일행이 9대를 넘기면 안 된다니, 이런 코미디가 어디 또 있을까. 그야말로 코로나19는 작금 문재인 정부의 정권 안보를 담당하는 으뜸 방패다.정치 전략적인 차원에서 보면, 코로나19를 무기로 써먹는 문재인 정권의 용의주도함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그것도 실력’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다. 야당은 도무지 마땅한 대안세력으로서의 미더움을 장만해 내놓지 못하고 있다. 치열한 투쟁도 안 보이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의지도 흐릿하다. 뭘 어쩌자는 심산인지 도통 모르겠다.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지금 이 정국 속에서 야당이 더불어민주당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과거 ‘명박 산성’과 ‘근혜 산성’ 때 했던 그들의 행태를 돌이켜보면 상상은 어렵지 않다. 방역이라는 변수가 다른 요소이긴 해도, 아마도 광화문에 둘러쳐진 경찰 버스 몇 대쯤은 부서지거나 불이 붙지 않았을까. 상황을 꿰뚫는 기발한 시위수단이 고안됐을 수도 있다.국정감사장에서 국민의힘은 예상대로 전혀 맥을 못 춘다.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인 국회 안에서 절대다수인 여당은 불리한 증인신청을 모조리 거부하고 있다. 민주당의 전략에 제1야당은 고작 ‘야당 간사직 사퇴’ 같은 영양가 없는 저항 정도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에 쳐진 ‘다수 횡포의 차벽’에 막힌 견제세력은 절멸 상태다. 완고한 ‘차벽’ 너머의 참담한 ‘맹탕’ 정치에 한숨이 절로 난다. 불임 정당의 초라한 몰골인 국민의힘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흔들리는 국운을 바로잡을 지혜, 열정이 조금이라도 있긴 한 건가.

2020-10-11

부부 일심동체

남편을 위해 정성을 다해 살아가는 아내를 열녀(烈女)라 불렀다. 옛날에는 열녀를 기리는 비(碑)를 세워 그녀의 공덕을 찬양하고 널리 알렸다.유교에서 중요시하는 덕목으로 효(孝)와 열(烈)이 있다. 효는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이며, 열은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이다. 여필종부(女必從夫)의 개념이다. 여성의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한 봉건적 발상에서 비롯된 잘못된 역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조선시대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재혼을 할 수 없도록 아예 법제화했다. 법으로 재혼을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개가(改嫁) 자체가 죄악시 되는 사회였다. 지금 생각하면 남존여비 사상의 병폐가 얼마나 극심했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요즘 젊은이들은 절반 정도가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하는 성인의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남학생보다 여학생일수록 더 그렇다.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그들이 바라보는 부부란 서로의 인격이 존중받고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동반자적 관계이지 어느 한쪽 우월적 개념은 아니다. 부부가 뜻이 잘 맞아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된다면 좋지만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일심동체를 위해 서로 노력하자는 데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즘 젊은이의 사고다.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남편이 코로나 와중에 요트 구입 차 미국으로 출국한 사실에 대해 “문제가 없다”는 응답이 절반 정도 나왔다. 다소 의외지만 법률적 문제가 없다면 개인의 자유개념이 존중돼야 한다는 뜻으로 보인다.강 장관은 “남편의 해외여행을 억지로 막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부부 일심동체’라는 말이 더 이상 우리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된듯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10-11

조화로운 삶의 기술

김현욱시인세계적인 위빠사나 명상 지도자, 고엔카는 조화로운 삶의 기술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스로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고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 평화와 조화를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며, 사심 없는 사랑, 연민, 타인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함, 평정심으로 가득 찬 완전히 순수한 마음이라고 하는 최상의 행복을 향해 나아가면서 나날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조화로운 삶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부조화의 원인을 발견해야하는데 원인은 항상 각자의 내면에 있다.위빠사나는 긴장과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뿌리 깊은 집착이 있는 곳까지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구조를 탐구하도록 도와준다. 자신의 실제를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신과 육체의 모든 본질을 경험하고 나서야 정신과 물질 너머에 있는 궁극을 알 수 있다.그 시작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왜 호흡일까? 낱말, 주문, 형상, 특정 상황과 같은 대상은 더 강한 상상과 환상을 요구한다. 어떤 단체에서는 부수고 죽이는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게 하는데 이는 결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고엔카는, “호흡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호흡을 관찰하는 것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수행의 길에서 모든 발걸음은 종파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합니다. 호흡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호흡은 알고 있는 것에서 알고 있지 못하는 것으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호흡은 의식적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일 수도 있으며, 의도적일 수도 있고 자동적일 수도 있는 하나의 육체적 기능이기 때문입니다.”호흡은 본질적으로 마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걱정과 근심, 흥분과 분노로 가득 찬 마음 상태가 되면 호흡은 거칠고 빨라진다. 번뇌가 사라지만 호흡은 다시 차분해진다. 이처럼 호흡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관찰, 탐구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대상이다.알다시피 마음은 하나의 대상에 머물지 못하고 항상 다른 대상으로 떠돌아다닌다. 마치 원숭이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끊임없이 옮겨 다니듯이 말이다. 마음은 그 어떤 대상에도 머물지 못한다. 끊임없이 배회한다. 문제는 항상 마음이 과거 아니면 미래에서 헤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마음의 습성 때문에 우리는 후회와 불안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수행의 첫 걸음은 지금 이 순간 코로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통해 현재에 마음을 고정할 때 시작된다. 지금, 여기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이다.마음은 늘 무지, 갈망, 혐오로 덮여 있다. 환상, 망상, 갈망, 집착, 혐오, 미움으로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고통은 시작된다. 이러한 마음을 정화하는 방법은 호흡을 관찰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호흡에 마음을 완전히 집중한 순간, 순간들이 길어지면 마음의 습성을 바꿀 수 있다. 코로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 현재를 알아차리면서 반응하지 않고 오로지 관찰하는 것으로 마음은 조금씩 깨끗해진다. 조화로운 삶의 기술을 배우는 첫 걸음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조용히 앉아서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시간을 가져보자.

2020-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