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플로리앙 드망주 주교의 서한집’(정진주 역)이 발간되어 재미있게 읽고 있다. 1875년 프랑스 솔쉬르에서 태어난 신부는 4년제 신학교 졸업 후 바로 한반도 선교사로 파견됐다.
그는 부산지역 본당신부, 신학교 교수를 거쳐 1911년부터 1938년 선종 시 27년간 대구에서 가톨릭 주교로서 봉사하신 분이다. 그는 23세에 프랑스의 부모를 떠나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부모님께 소상히 편지로 보냈다. 프랑스의 부모님께 보낸 이 편지에는 100여 년 전 한말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담겨 있다.
이 서간집에는 당시 주민들의 삶이 잘 드러나 있다. 부산 초량에서 시작한 그의 사목은 주로 가난하고 힘없는 조선인이 대상이다. 1900년 초엽 도로도 없던 시절 그는 조랑말을 타고 대구까지 원거리 사목 활동을 한다. 부산에서 대구까지 오솔길을 하루 16시간 강행군하여 3일 만에 겨우 대구에 도착한 이야기도 있다.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인 대구-부산은 당시는 무척 먼 거리였다. 그가 여행길 주막이나 여관에서 받은 밥상은 된장과 김치가 전부였으니 프랑스인인 그의 입맛에 맞을 리 없다. 당시의 시골 여관에는 호롱불만 있었고 그는 매캐한 골방의 돗자리 위에 지친 몸을 눕혀야 했단다.
당시 조선에는 장티푸스와 이질이 대유행했고 치료약이 없어 죽어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선교 신부도 여러 명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도 자주 등장한다. 신부는 대구에 왔다 돌아가는 도중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단다. 며칠 걸려 대구에서 조달된 키리네 몇 방울이 늦었다면 그는 살아나지 못할 뻔했다. 당시의 한국식구들이 놓인 초라한 여관방 이부자리에는 빈대와 이기 득실거렸다.
요즘의 젊은이들이 본적도 없는 이 해충을 잡는데 몇 시간이 걸렸다는 사연도 있다. 세계적 의료 선진국이 된 오늘의 우리와는 너무 대조적인 당시의 사회상이다.
이 서간에는 쇄국으로 일관하던 당시의 대한제국 말기의 흔들리는 국가 운명이 잘 드러나 있다. 조선조 말기의 관료 부패는 다반사였고 양반과 관료는 주민들의 삶을 속박했다. 신부는 가난한 신자를 돕기 위해 양반관료에게 그의 취업을 부탁한 적이 있다. 오히려 그 신자가 관청에 밉보여 불려가 고초를 당한 장면도 있다.
당시 관료들은 ‘네 죄는 네가 알렸다’고 곤장을 치면서 상민을 괴롭혔던 것이다. 이제 이 나라는 한말의 호위호식하는 양반 관료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아시아에서 최고의 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있으니 신이 도운 것일까.
신부가 체험한 어지러운 대한제국은 결국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버렸다. 선교 목적으로 파견된 많은 프랑스 외방선교회 신부들이 대원군에 의해 땅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 35년의 탄압에서 해방되고 분단된 형태지만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해방 후 우리는 세계사에 보기 드문 경제 성장과 정치 발전을 압축적으로 이룩하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은 GDP 규모 세계 10위권이며, 우리 대통령은 G7회의에도 초대됐다. 이제 우리는 어려울 때 우리나라를 도운 우방들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