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7일 평양에서는 김정일 사망 10주년 추도대회가 태양궁전에서 개최되었다. 동시에 김정은의 10년의 행적을 찬양하는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은 현지 시찰 열차에서 심근 경색으로 사망하였다. 김정은은 장례 시부터 북한 정권의 최고 통치자로 행세하였다. 권력의지가 강한 김정은이 형 김정철을 제치고 미리 후계자로 결정된 결과이다. 1984년생 당시 27세였던 김정은은 애도기간 내내 눈물을 흘렀다. 그 후 그는 당 제1비서로 추대되고 오늘의 총비서, 국무위원장이라는 북한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김정은은 집권 초반부터 권력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그를 둘러싼 당·군 간부를 수시 교체하여 충성도 경쟁을 유도하였다. 공산주의 국가 권력 이양과정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백두혈통론’을 내세워 3대 세습을 이어갔다. 그는 2013년 고모부 장성택마저 공개 처형하고, 말레이시아에서 이복형 김정남도 처치하였다. 그는 집권 초반부터 2016년까지 현영철, 리용하, 장수길 등 약 100명의 권력 측근을 숙청해 버렸다. 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룡해, 당 조직비서 조용원, 동생 김여정, 현송월 부부장이 그의 핵심 측근이다. 김정은은 집권 후 인민제일주의를 내세워 인민 경제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인민들에게 ‘다시는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공언도 하였다. 그는 19개의 경제 개발 특구를 설정하고, 시장 경제의 허용을 통해 북한 경제의 획기적인 발전을 획책하였다. 그러나 4차례의 핵실험과 60여회의 미사일 시험발사는 유엔과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라는 역풍을 초래하였다. 더욱이 코로나 사태의 북·중 국경 봉쇄는 올해 총 교역액을 3억 달러로 추락케 하였다. 김정일 집권 시 3.86%의 경제 성장은 0.84%로 주저앉아 버렸다.
김정은의 핵·경제 병진노선에 따른 북미 협상을 통한 체제 보장이라는 외교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가 추구한 2018년 판문점회담, 9·19 평양 합의는 싱가포르와 하노이의 북미 정상회담으로 연결되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은 북미관계 뿐아니라 남북관계마저 경색시켜 버렸다. 핵개발을 북미 회담의 지렛대로 삼아 북미관계 개선과 체제 안전의 보장이라는 그의 목표는 좌절되어 버린 것이다. 개성 남북 연락사무소의 폭파는 남북관계마저 단절시켰으며 북미간의 외교적 돌파구도 보이지 않고 있다.
김정은 정권 10년, 북한 경제 회복과 체제의 안전이라는 그의 목표는 현재로서는 멀어진 꿈이 되어 버렸다. 유엔의 대북 제재와 코로나 팬데믹은 북한의 경제 문제를 더욱 압박하고 있다. 인민제일주의를 내세운 김정은 정권은 식량 문제마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제2의 고난의 행군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이 국가 제일주의를 앞세워 인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시장은 600여 개로 늘어나고 주민들의 휴대 전화는 벌써 800만대를 넘어 버렸다. 엄격히 통제된 북한 사회도 정보화시대에 ‘진공속의 안정’으로 남을 수는 없다. 평양의 봄은 언제쯤 오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