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순례자의 길

등록일 2021-06-20 19:14 게재일 2021-06-21 16면
스크랩버튼
무엇을 기억한다는 것에 대하여
바람과 파도가 바위에 그린 그림.

어머~스앵님~, 그랜드캐니언 갈 필요 없겠어요. 여기 너무 멋져요! 미국 여행을 다녀온 영어 선생님이 해파랑길 15코스 중 발산리 근처 길을 걸으며 쏟아낸 탄성이다. 파도치는 그랜드캐니언은 없을 테니 여기가 더 아름다운 풍경일 거라며 나도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이 코스는 길이 바다를 품은 것인가 하노라면 어느새 바다가 길을 품고서 파도를 밀어와 발길을 움켜잡는 곳이다. 찰삭이는 파도가 발길에 닿을까 말까 하는 구간, 굽어지는 길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 저기를 돌면 무엇이 나타날까 궁금하게 만들어 걷는 이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곤 한다. 바다가 내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발걸음이 잰걸음이 된다.

오래전 나는 대만의 예류지질공원을 다녀왔다. 해안가에 자리한 바위가 멀리서 보면 버섯들이 오종종 모인 듯한 특이한 풍경이었다.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자연이 만들어 낸 기암 괴석들이 두런거리고 둘러앉았다. 숭숭 구멍이 뚫린 생강바위가 있고, 촛불을 밝혀야 할 거 같은 촛대바위도 있지만, 관광객을 길게 줄 세우는 바위는 따로 있었다. 파라오 여왕이 머리를 틀어올린 모습 같은 여왕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한없이 서서 사람들의 사진 찍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가능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을까 했는데, 그랜드캐니언의 웅장한 벽면 하나를 옮겨오고, 대만 예류지질공원의 기암괴석을 한 부분을 오려 붙여 포항시 동해면 발산리 바다 바로 옆에 멋진 풍경을 걸어놓았다. 오래전 층층이 쌓인 바위에 파도와 바람과 시간이 합작해서 만든 걸작품이었다.

이 길을 나에게 알려준 사람은 남편이다. 한 달에 한 번 산악회 친구들과 걷는 걸 즐기는데, 2월엔 해파랑길 14~16코스를 걸었다. 다녀와서 나와 걷고 싶은 구간이 있다며 따뜻한 기운이 움트는 초봄에 처음 그곳에 데려갔었다. 파도는 어린아이가 찰방거리는 것처럼 조용히 속삭였고 바위섬마다 갈매기가 앉았다 날곤 하며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 그림 속에 어린 딸을 데리고 무릎까지 옷을 걷어 올린 엄마 아빠가 해초를 따고 있어 더없이 평온한 주말 오후 풍경을 완성했다.

첫눈에 반한 나는 그다음 주에 또 가자고 졸랐다. 시댁에 다녀오는 오후 늦게 한 번 더 걸었다. 넓적한 돌을 맞대고 붙여 만든 아주 예쁜 길이다. 둘레길 대부분이 나무 데크를 이어붙여 완성했는데 여기는 징검다리의 돌 사이를 당기다 너무 힘껏 당겨 붙어버린, 그래서 ‘이쪽으로 걷기만 하면 해파랑길이 이어집니다.’ 하고 길이 일러주는 것 같다. 걷다가 바다가 암벽에 그려놓은 서사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바다 건너편의 제철소 뒤로 저무는 해를 배웅했다.

왼쪽이 바다라면 오른편은 산으로 이어졌다. 산과 바다 사이로 난 길을 여름비가 나리는 오늘 아침에 찾아가니, 바람이 파도를 끌고 길 위를 자꾸만 침범했다. 돌길에 손바닥만 한 연못을 만들어 하늘을 들이고, 고동 따개비들을 흩뿌려놓았다. 파도가 더 심해지면 돌아오자고 하며 널따란 해파랑길로 조심조심 나아갔다. 바닷가엔 바람이 많다고 일찍이 소문을 들은 풀꽃들이 서로 팔짱을 끼고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한철 지난 찔레꽃이 더 샛노란 수술을 뽐내며 납작하게 엎드렸다. 집 근처에 찔레는 덩굴의 키를 좀 더 높이려 애쓰는데 바닷가 녀석들은 크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은 지 오래였다. 인동초도 그 틈에 섞여 잔향을 풍기고, 땅채송화도 낮은 키로 노랗게 길을 덮었다.

오래전 순례자들은 걷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길 위에서 내딛는 걸음마다 지나치는 자연을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서 배웠다. 침식작용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바다에 자기 몸을 조금씩 내어주는 바위, 높이 올라가기보다 옆에 친구들 손을 꼭 잡고 서로 온기를 나누며 엎드린 바닷가 풀꽃, 그들은 오래 멀리 가기 위한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삶은 순응하는 것이라고 걷는 이에게 온몸으로 알려준다. 우리는 가만히 바람에 몸을 맡기고 바위와 꽃에 그려진 묵직한 경전에 귀 기울였다. /김순희(수필가)

무엇을 기억한다는 것에 대하여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