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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6·25

등록일 2021-06-24 18:38 게재일 2021-06-2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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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한반도 북쪽의 김일성이 동족살상의 전쟁을 일으킨 지 72년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 동안 계속됐던 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지금까지 휴전상태로 있다. 6·25전쟁의 발발부터 전개과정은 명약관화한 일인데도 아직까지 논란거리로 만들려는 자들이 있다는 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수많은 희생으로 지켜낸 대한민국인데, 이 정부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6·25가 김일성의 남침이었다고 말하는 걸 꺼리는 자들이 있다니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닌가.

김일성이 남침준비를 해놓고 소련의 허락을 받기 위해 몇 차례나 스탈린을 찾아가서 간청한 사실도 이미 다 밝혀진 바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재가를 미루던 스탈린이 1950년 4월 김일성과 박헌영이 비밀리에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야 중국이 동조한다는 조건으로 남침전쟁을 승인하였다. 이처럼 6·25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이 치밀하게 모의하고 계획한 전쟁이었다. 반면 대한민국은 북한의 기습남침에 대비하지를 못하였다. 그해 6월초엔 사단장 등 지휘부의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고, 6월 23일부로 경계강화 조치를 해제시켜 전방부대 병력의 3분의 1가량이 외출이나 농번기 휴가를 나간 상태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였다. 김일성은 그날 오후 1시 35분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이 오늘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침을 하여 반격을 한 것’이라고 남침을 은폐하였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국군은 사력을 다해 대항하였으나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에 역부족으로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남침 사실을 보고받은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지시했다. 유엔은 신속히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38도선 이북으로 퇴각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유엔군의 파병을 결의했다.

유엔의 결정에 따라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이 병력을 지원했고 5개국이 의료지원, 39개국이 물자나 재정을 지원했다.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서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고 낙동강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던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명령으로 10월 1일에는 국군 3사단이, 7일에는 유엔군이 38선을 넘었고, 10월 19일에 국군1사단이 평양에 입성했다. 여세를 몰아 선발대는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10월 19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여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가 1952년 서울을 재수복, 3월 말에는 38선을 회복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막후 접촉에서 휴전에 동의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세계사의 유례가 없는 최장기간 휴전상태로 전쟁의 위험을 안고 사는 처지다. 더구나 김정은 일당은 지금 핵보유국임을 천명하고 대한민국을 협박하고 있다. 북쪽의 비대칭 핵위협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한미공조를 공고히 하는 수밖에 없다. 6·25를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악의를 가지고 왜곡하는 것은 심각한 해악이다.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진상을 알고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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