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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박증, 마음의 역설

문가인참마음심리상담센터 원장강박증이라고 들어보았는가?강박증이라는 단어는 평생 정신과 병원이나 심리상담센터를 가보지 않았어도 한 번쯤은 들어본 단어일 것이다. 강박증이라 함은 강박 사고(반복적인 사고)나 강박 행동(반복적인 행동)을 둘 다 지니고 있거나, 하나만 지니고 있어도 부적응이 심하면 진단되게 된다.자신도 괴롭지만, 그 괴로움을 주변 사람에게 호소하면서 주변 사람도 당황하면서 괴로워하게 된다.성인이 강박증을 지닌 경우도 괴롭지만, 성인은 그 증상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 있어서, 일할 때는 잊고 있다가 잠을 자기 전이나 휴식할 때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는 강박증을 지닌 아동을 만났을 때이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한 아동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강박증을 지닌 성인이나 강박증을 지닌 아동을 나는 꽤 많이 치료했다.참 헛웃음이 나온다.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초보 심리학자 시절, 모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님에게 강박증의 치료원리를 진심을 담아 물었다. 그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가 몰라서 회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 교수님을 만나면 강박증이 무엇인지, 강박증의 치료원리가 무엇인지 한마디로 말해줄 수 있다.나는 최근에 어떤 방탄소년단 같은 외모를 지닌 소년에 대한 강박증을 최면 상담했다. 그는 공부도 잘했고, 부모를 비롯하여 친구 및 선생님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부모도 그를 사랑하고 그도 부모를 사랑하며 정말 완벽한 가정이었다. 그 소년은 코로나19가 창궐한 3월 어느 날 잠이 오지 않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하고, 친구와 놀고, 선생님과 대화하지 못하는 날이 지속되자 잠이 오지 않게 된 것이다.그러다가 학교를 다시 나가게 되면 괜찮아지다가 어느 날은 원하지 않는 생각이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부모님께 같은 질문을 하게 되는 그날이 왔다. 그 소년을 너무나 사랑하는 그 어머니는 대한민국의 모든 인터넷 사이트를 폭풍처럼 검색하였고,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방에서 나를 찾아왔다.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어머니의 상상대로 되었다.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 비밀을 한가지 알려주겠다.그 비밀은 마음의 역설(paradox of mind)이다. 나는 아동과 볼펜의 스프링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 스프링은 가볍게 누르면 가만히 있지만, 세게 누르면 높게 튀어 올라서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그 소년은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최면을 진행하였고 그 소년은 환한 미소를 나에게 선물하였다.즉, 마음의 역설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잠을 자려고 하면 더 잠이 안오고, 어떤 생각을 안하려고 하면 더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강박사고를 지닌 사람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 침투사고가 계속 떠오르고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더욱 생각나서 괴로워지게 된다는 것이다.“강박증, 마음의 역설을 기억하라.”“어떤 생각을 안 하려고 하면 더 생각나고, 그냥 내버려 두면 그 생각은 사라진다는 것을.”

2020-12-13

삼무(三無)의 자동차 왕국

윤영대수필가저녁 산책을 하며 우현 사거리와 창포 사거리를 걷노라면 퇴근 시간이라 참 놀라운 광경을 본다.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어둠이 깔리는 긴 도로에는 반짝이며 다가오는 전조등과 반대편으로 몰려가며 점점이 줄지은 빨간 미등(尾燈)이 흡사 크리스마스 장식등 같이 아름답게 끝없이 이어져 있다.자동차 홍수의 시대. 언제부터 우리는 자동차 왕국이 되었는가!2020년 6월 말 기준 우리나라 자동차 등록 대수는 약 2천400만 대를 넘어 인구 2.1명 당 1대꼴, 1가구 1대의 시대라고 한다. 포항시민을 50만 명이라고 한다면 포항지역에만 20만 대가 넘는다는 계산이다. 나는 88서울올림픽이 치러질 즈음 처음 자가용을 가졌다. 그때만 해도 ‘마이카시대’라는 말을 처음 듣고 그 비싸고 귀한 자가용을 어떻게 집집마다 가질 수 있는가? 그런 시대가 온다니 ‘꿈을 꾼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거리에서 자동차의 물결을 보고 있는 것이다.1955년 ‘시발(始發)’이라는 조립 SUV가 처음 나오긴 했지만 1962년 첫 승용차 ‘새나라’를 연간 100대씩을 생산한 것을 시초로 국민의 인기를 차지한 ‘코로나’가 대량 생산의 길을 열었고, 45년 전인 1976년엔 우리 고유의 브랜드인 ‘포니’를 탄생시켰으며 2010년 이후에는 연간 약 400만 대의 생산능력을 가진 세계 5위권에 등극을 했다.차들이 쉴새 없이 지나가는 낙엽 진 거리의 간이 정류소에 앉아 생각에 잠겨본다. 저 많은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한 자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동차는 철판으로 만들고 기름을 태워 고무바퀴로 굴러가는데…. 우리나라는 지하자원 종류가 많아서 ‘광물의 표본실’이라고 불리지만 원료인 철광석, 원유 그리고 천연고무의 자원은 거의 전무한 데도 자동차 선진국이라니 신기하다.철광석은 거의 북한에 분포하며 호주, 브라질 등지에서 연간 약 7천300만 t을 수입하고 포스코, 현대제철 등에서 고품질의 조강생산을 하여 세계 6위 철강생산국이다. 원유는 그야말로 한 방울도 나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산을 중심으로 연간 약 10억 배럴 전량을 수입한다. 그러니까 1일 300만 배럴, 즉 150만 배럴 대형유조선 2척이 매일 먼 바다를 항해해 와야 한다. 그것을 잘 정유하여 42% 정도를 자동차 연료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석유화학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석유수출국이라는 명예도 안고 있다. 또 타이어를 만드는 원료인 천연고무나무밭은 한 곳도 없는 나라. 물론 100% 천연고무가 아닌 합성고무로 만들고 요즘 말썽이 되고있는 폐타이어를 수입하여 재생 타이어를 만들어 사용한다지만 자동차에 필요한 이들 3가지 원료가 우리나라에는 전혀 없는 삼무국(三無國)이다.이들을 전량 수입하여 우리의 뛰어난 산업 기술과 제조 능력으로 오늘날의 중공업 산업을 성공시켜 자동차 왕국을 건설한 것이다.아침저녁 도심의 넓은 도로를 꽉 채우며 극심한 정체를 유발하는 자동차 홍수의 현실을 보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우리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는 듯하여 앞으로 새로운 연료 방식인 수소차와 전기차의 도래도 기대해 본다.

2020-12-13

2020년 포항시의 주가 동향

주식시장에서 주식 가격은 투자가들이 그 종목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오르내린다. 특정 기업의 미래가치가 반영된 주식 가격 즉 주가가 저평가되었다고 보는 투자가는 사고, 주가가 고평가된 데다 미래 성장동력도 부족하다 느낀 투자자는 판다. 주가의 변동은 그러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주가는 검은색으로 표시된 전일 종가에서 오르면 빨간색, 내리면 파란색으로 표시된다.기업들처럼 각 지역이나 도시가 그 지역의 지속가능성, 미래에 대한 기대, 현실 경제 등을 재료로 주식시장의 한 종목으로 거래된다고 가정해보자. 2019년 종가를 기준으로 출발하였던 포항시 주가는 2020년을 마무리하는 지금 과연 빨간색일까, 아니면 파란색일까. 개인적인 시각으로 올해의 포항시 주가에 대한 동향을 월 단위로 짚어 보았다.1월 초 포항시 주가는 좋은 조짐을 보이며 상승 출발하였다. 9일 포항의 규제 자유 특구에서 GS건설의 ‘배터리 리사이클링 제조시설’에 대한 투자 협약식이 대통령까지 참석하며 열렸기 때문이다. 연초의 희소식에 포항시 주가는 빨간색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지난 연말 국회에서 통과된 포항지진 특별법의 시행령이 마련되는 대로 시민에 대한 피해 보상과 흥해지역을 중심으로 도시개발사업이 본격 추진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포항시 미래가치에 호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그런데 2월이 되자 포항시 주가는 예기치 않은 충격으로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19일 포항 최초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는 데다, 대구와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확진자가 늘어나면서 거의 모든 지역 내 경제주체의 경제활동이 빠르게 위축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3월 들어서는 11일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19에 대한 ‘세계적인 대유행(pandemic)’을 선언하고, 국내에서는 방역 마스크 부족 사태로 5부제 판매가 시행되었다. 포항에도 재택근무와 근로시간 조정과 같은 코로나19의 영향이 산업계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포항시 주가는 다시 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포항시가 자체 마스크생산공장을 건설하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리튬 이차전지 소재 생산기업인 에코프로지이엠이 24일 영일만 제1산업단지에 제1공장을 준공하면서 앞으로 5년간 총 3천억 원을 투자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져 포항시 주가의 하락세는 다소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다.4월에는 코로나19에 대한 긴급대책으로 포항시가 지역 소상공인부터 학계, 금융기관, 기업체와 협력체계를 구축하기로 하는 노력도 심리 안정에 도움을 주어 2월 이후의 포항시 주가도 추가 하락하지 않고 박스권을 유지하면서 조정기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5월이 되자 코로나19 사태가 조기 종식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지역 내 음식 숙박업과 소상공인, 전통시장을 불문하고 비대면, 비접촉의 영향이 확대되면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실물경제 관련 지표들이 크게 나빠져 포항시 주가는 지지선 아래로 다시 하락하였다. 게다가 지역에서 추진하던 차세대 방사광가속기 유치까지 실패하자 포항시 주가는 계속 파란색을 보였다.6월부터는 포항철강산업단지를 비롯한 지역 중소기업의 경영난이 본격적으로 심해지기 시작한 데다 시민들도 비대면 비접촉에 적응하여 대부분 생필품을 온라인이나 택배로 주문함에 따라 오프라인 중심으로 운영하던 지역 소상공인의 매출이 크게 하락하여 심지어는 휴폐업하는 곳까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포항시 주가는 큰 폭으로 하락하였다. 반면 포항지진 이후 하락 경향이 이어지던 지역 부동산경기는 상승세로 돌아섰다. 부동산규제를 회피하기 위한 수도권 투기 세력이 포항 지역까지 갭투자에 나서 진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의 하락 폭이 컸던 만큼 특정 매매 물건을 제외하고는 예년 수준의 시세 회복에 그쳐 이른바 ‘부의 효과(wealth effect)’까지 가시화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따라 포항시 주가도 부동산 경기회복이라는 재료만으로는 상승세로 전환하지 못하였다.7월 들어서도 포항의 부동산경기 상승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해 시작한 중앙상가의 영일만 친구 야시장이 재가동되지 못하는 등 여전히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실물경제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다만 오랫동안 막혀있던 포항공항의 하늘길이 진에어의 취항으로 열리면서 포항시 주가의 추가 하락을 막은 것은 다행이었다.매년 8월이면 포항 어촌마을과 해수욕장, 주변 상권에서 특수를 기대했었으나 올해는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아 거의 개점 휴업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포항시 주가도 여름철인 6월 이후 8월까지 하락 경향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반등 재료도 없어 여전히 바닥권에서 횡보하였다.9월 들어서자 바로 찾아온 마이삭과 하이선이라는 두 태풍으로 인해 어촌마을은 물론 시내 곳곳의 건물 외벽, 공장에 큰 피해가 발생함에 따라 포항시 주가는 다시 급락하였다. 하지만 지진 특별법 시행령에 따라 지진피해 보상에 대한 신청이 접수되기 시작하면서 시민들의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도 조금은 풀리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영일만항 국제 크루즈 부두의 완공을 계기로 포항과 일본, 러시아를 오가는 정기 국제카페리 노선이 정식 개설됨에 따라 국제 항만도시 포항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크게 높아졌다. 이에 따라 월초 일시 하락하였던 포항시 주가는 중순 이후 호재가 이어지는데 힘입어 올해 처음으로 상승 마감하며 빨간색을 나타내었다.10월에는 포항시 주가를 움직일 만한 큰 재료가 없었으나 문화의 달을 맞이하여 지역 내 다양한 문화 관련 단체, 기관들이 포럼, 연주회 등 문화행사를 비대면, 온라인중계 등의 방식으로 활발히 개최하면서 미래 문화도시 포항에 대한 기대감을 높임에 따라 포항시 주가도 폭은 크지 않더라도 9월 상승세를 이어 빨간색으로 마감하였다.11월이 되자 포항시 주가는 다시 가파른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였다. 5일 송도동과 항구동을 연결하는 ‘동빈대교’의 기공식, 13일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에서 국내 최초의 ‘그린 백신 실증지원센터’의 기공식에 이어 18일에는 영일만 제4 일반산업단지에서 (주)에코프로이엠 이차전지 양극재 공장의 착공식이 열렸다. 이처럼 포항시 미래가치를 높이는 희소식이 연이어 전해지자 연초 이후 하락하였던 포항시 주가는 단숨에 연초 기준가격을 넘어 본격적인 상승 장세를 타기 시작하였다.12월이 되어서도 포항여객선터미널과 환호공원 사이를 자동순환식 왕복 모노 케이블카가 오가는 이른바 ‘해상케이블카’의 설치가 추진된다는 소식, 철강산업의 재도약을 위한 기술개발사업의 본격화 소식, 대규모 연어 스마트양식 산업단지 조성과 같은 희소식이 잇달아 전해졌다. 이 소식들이 앞으로 포항시의 미래가치에 호재로 나타나면서 포항시 주가는 큰 폭의 상승세를 보여 결국 지난해 종가보다 상승한 빨간색으로 연말 장을 마감하였다.이상의 포항시 주가 흐름은 개인적인 견해지만 포항의 미래가치에 대한 기대감이 커질수록 인구도 투자도 늘어날 것은 분명하다. 주요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할 때 시민을 포함한 이해당사자에게 중장기적인 사업을 착실하게 보여줄수록 포항의 지속가능성과 더불어 포항의 미래가치는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 내년에는 올해 사업들이 계획대로 추진되고 포항의 실물경제도 큰 폭의 회복세를 보이기를 기대한다.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김진홍

2020-12-13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경주시민 여러분의 지혜와 역량

주낙영경주시장2020년 10월 28일은 경주시에 있어서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지난 40여 년간 경주시민들의 지역 최대 숙원이었던 천북면 신당3리 한센인촌 ‘희망농원 환경개선’을 위한 길이 마침내 열렸기 때문이다.이날 전현희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과 이철우 경북지사, 이강덕 포항시장, 주대영 대구지방환경청장, 희망농원 주민들이 함께 희망농원 현장을 방문하고 기관조정 회의를 열어 ‘희망농원 환경개선’사업을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희망농원은 1979년 보문관광단지 개발 당시 현재의 위치로 136가구 486명이 강제이주돼 양계를 위주로 생업을 유지해 왔다. 그동안 무허가 주택에서 거주하면서 노후화된 계사의 슬레이트 지붕에서 나오는 1급 발암물질과 악취, 해충, 오염수 배출 등 생활환경이 열악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여기에 계사 축분과 오염된 생활하수가 포항시민들의 식수원인 형산강으로 흘러들어가 많은 피해를 발생시켰다. 강제이주 당시 정부에서 지어준 주택과 계사가 무허가 건물이다 보니 태풍과 홍수 같은 각종 자연재해를 입어도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는 등 한센인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그동안 청와대, 국회, 여러 정부기관에 수차례 탄원서를 제출하고 문제해결을 호소하는 등 백방으로 뛰었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그런 세월이 무려 40여년, 경주의 한센인들은 정부의 외면과 여러 관계 부처가 연관되어 해결에 나설 주체가 없다는 핑계로 돛대를 잃은 채 표류하는 난파선처럼 절망적인 상황이었다.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고, 다만 절망에 이르도록 방치하는 상황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경주시는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불씨를 계속해서 지펴왔다. 민선7기 경주시정이 이 문제 해결에 반드시 마침표를 찍겠다는 굳은 각오로 전 행정력을 동원해서 매달렸다.다시 한 번, 한센인은 물론 경주시민 모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힘을 모았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끈질기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이 사안을 종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곳이 국민권익위원회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문제해결의 열쇠를 찾은 것이다. 곧바로 권익위의 문을 두드렸다.지난 3월 31일 권익위에 최초로 민원을 접수하면서 문제해결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권익위 주관으로 환경부를 비롯한 6개 기관이 모여 협의를 가졌다. 연이어 9월까지 관계기관이 다섯 차례의 현지조사와 실무협의를 거쳤다. 마침내 10월 세부조정안을 마련하고 조정일시를 잡으면서 희망농원 환경개선에 ‘희망’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40여 년간 복잡하게 엉켜있던 실타래가 드디어 풀리게 된 것이다.이번 기관조정회의의 핵심은 낡은 집단 닭 사육 시설과 폐슬레이트 철거, 노후 침전조, 하수관거 재정비를 위한 국비 210억원을 중앙부처에서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이에 따라 경주시는 우선 내년 상반기까지 철거와 재정비를 위한 기본정비계획을 수립하고 희망농원 주민들과 관련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 노후 주택정비 등 거주여건 개선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친환경 농작물 재배와 새로운 일자리 및 농가소득 창출을 위한 기반 조성, 한센 요양원, 복지시설, 생태공원 등 주민들을 위한 종합정비계획도 차례로 마련될 것이다. 경북도와 포항시, 대구지방환경청도 예산 확보와 적극적인 행정지원을 통해 신속하게 사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보태기로 약속했다.우리 민족 역사의 뿌리이자 문화의 중심인 이곳 경주는 이천년 동안 숱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경주시민의 위대한 정신으로 지켜온 곳이다. 신라 천년을 지켜온 호국정신이 그랬고, 인간존중과 만민평등의 정신을 내세운 동학정신의 태동이 그랬다. 사회적 약자를 보듬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실천한 최부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를 굳건히 지켜온 버팀목이 되는 사상과 지혜가 이곳 경주에서 시작되고 이어져 왔다.경주 한센인촌 희망농원 환경개선 사업도 그런 지혜와 역량으로 가능했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다가오는 2021년도 26만 경주시민이 계속해서 만들어갈 역사적인 해가 될 것이다.

2020-12-13

오래된 책을 사다

아들과 산책을 나갔다. 동네 산책로는 마스크 낀 사람들로 늘 붐벼 차를 타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갔다. 김병례 작가는 산책을 책을 산 것으로 표현했다. 자신처럼 매일매일 나가는 것은 월간지를 구독하는 것이고, 나처럼 계절마다 찾아가는 것은 계간지를 읽는 것이라고 했다.계간지 중에 오래된 책을 사러 나갔다. 이 동네를 들어서려면 먼저 은행나무 가로수를 지나고, 소나무가 솟을대문처럼 터널을 이룬 길을 지나야 나온다. 몇백 년의 세월을 지닌 아름드리 나무들이 성큼성큼 그늘을 만들어 준다. 마을의 오래된 역사를 정자나무가 책의 서문이 되어 알려준다. 여기가 이언적 선생이 살았던 마을이라고.옥산서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세심대로 향했다. 포장하지 않은 흙길에 아들과 나의 발소리만 사박사박, 딱따구리 녀석이 머리 위에서 나무를 쪼아대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미니 포로록 다른 나무로 자리를 옮겨 버렸다. 길옆으로 자계천이 따라붙는다. 가뭄이라 그런지 수량이 더 줄어 졸졸 낮은 목소리를 낸다.물 떨어지는 소리가 좀 더 커지는가 싶으면서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이곳을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닦는 곳이라고 세심대라 부른다. 이언적 선생이 사시는 동안 주변의 산과 계곡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사산오대(四山五臺)라 하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세심대이다. 읽은 책을 겹겹이 쌓아 놓은 듯한 책바위가 골짜기를 가득 채웠다. 바위에 이황 선생의 글씨로 ‘세심대’를 새겨넣었다. 그 옆으로 용추 폭포가 물소리를 증폭시킨다. 폭포 아래 용소를 건너는 외나무다리가 놓였다. 아들 손을 잡고 오래전 이 다리를 건너간 선생의 산책로를 따라 독락당으로 향했다.동네 골목길을 지난다. 집집마다 주소를 세심로 00번지라 적혔다. 동네 이름도 세심마을이라고 명패를 달았다. 까치밥을 단 감나무와 봄을 미리 준비한 매화나무를 구경하다 보니 금방 독락당 주차장이 나타났다. 버스 주차장 앞에 가게 이름은 ‘자옥슈퍼’다. 자옥산에서 따온 듯하다. 산 이름도 이언적 선생이 붙인 것이다. 독락당의 백미는 계정에서 보는 경치다. ‘계정’이라는 명패는 한석봉 선생의 글씨다. 봄, 여름, 가을에 지인들과 올라앉아 마루에 앉아 한나절 이곳을 지나는 바람을 즐기고 책도 읽었다. 그래서 오늘은 자계천에서 계정 뒤로 지는 노을을 보려 한다. 자계천으로 내려섰다. 돌다리를 건너며 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가라앉은 가을 나뭇잎 사이로 송사리가 분분히 노닌다. 그 위로 기와를 얹은 한옥이 까치발을 들어 물속에 모습을 비춰 매무새를 다듬는다. 물고기들이 계정에 올라 풍류를 즐긴다.계정은 건물에 붙여 달아낸 누각이다. 바위의 모양이 들쑥날쑥하니 기둥의 길이도 제각각이다. 돌의 모양에 따라 나무기둥 밑을 깎아서 앉히는 그랭이 공법을 썼다. 살창을 내어 물소리와 계곡 풍경을 집안으로 들여놓은 선생의 기발함을 누각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건물이 냇물에 한 발 내딛고 있어 난간에서 내려다보면 물 위에 떠 있는 듯하다. 건너편 앞산도 한 걸음 더 가까워져 손에 닿을 거리다.김순희수필가자계천에서 바라보니 굴뚝과 아궁이는 계정 밖에 나와 있었다. 난간 밑 벽체에 제비집처럼 매달아 놓았다. 세상에 아궁이가 저런 곳에 달렸구나, 세상에 이런 굴뚝도 있구나. 한옥의 설계도는 대목수의 머릿속에만 있다더니 선조들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인지 계절마다 간간이 넘겨보는 산책자는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한참을 물소리에 젖어서, 계정의 아늑함에 물들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아들과 독락당 담장과 담장이 만든 골목을 걸었다. 비스듬히 누운 향나무가 매력적인 사진을 만드는 곳이다. 가만히 한 컷 찍다 보니 발아래 빨간 산수유 열매가 떨어져 있다. 담 안에서 키를 키운 산수유의 품이 담 밖으로까지 뻗었다. 오늘의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오래전 미리 발간한 이언적 선생의 고서적의 품이 참으로 넓다. 오후의 산책만으로 그 뜻을 다 헤아리기 힘들어 월마다 구독해 펼쳐 봐야겠다.

2020-12-13

정치후원금, 세상을 바꾸는 “돈의 힘”

조윤현문경시선거관리위원회 홍보주무관모든 활동에는 돈이 필요하다. 정치 또한 마찬가지다. 권력은 막강하고도 달콤하지만, 정치자금이라는 비용이 필요하다.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누군가는 권한을 남용해 타인을 수탈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그 권한으로부터 지대를 추구하는 자에게 포획되기도 했다. 부정부패, 정경유착. 익히 들어온 이야기다. 정치자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이 때문일 것이다.이러한 부정을 방지하고자 정치자금법이 제정됐다. 엄격한 통제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법 또한 다른 수단으로서 돈의 힘을 빌린다. 제1조에서 말하는 “정치자금의 적정한 제공을 보장”, 바로 정치후원금이다.현행 정치후원금 제도에는 중앙당이나 정치인의 후원회에 기부하는 ‘후원금’과 선거관리위원회에 기탁하는 ‘기탁금’이 있다. 후원금은 해당 중앙당이나 정치인의 후원회에 기부되고, 기탁금은 국고보조금 배분율에 따라 각 정당에 배분·지급된다. 양자 모두 선거관리위원회가 운영하는 정치후원금센터(www.give.go.kr)에서 신용카드나 모바일결제, 연말에 버려지곤 하는 카드 포인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단으로 기부할 수 있다. 기부자는 기부금에 대해 10만원까지는 전액, 10만원을 초과하는 금액은 15%(3천만원 초과 금액은 25%)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단 정치적 중립의무가 있는 공무원과 교원은 기탁금만 기부할 수 있다.정치후원금 홍보와 세제혜택은 소액 다수의 정치자금 기부문화의 정착과 확산을 위함이다. 이로써 우선 정치자금 수입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소수의 밀실보다는 다중의 광장에서 부정은 발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이로써 정치문화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 정치후원금으로써 국민은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인은 국민적 평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치후원금은 정책 개발의 동기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정치인이 소신을 지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할 것이다.누군가는 지지하는 정치인을 위하여, 누군가는 싫어하는 정치인에게 욕을 하기 위하여, 또 누군가는 효과적인 세(稅)테크를 위하여 정치후원금을 기부할 것이다. 그 동기가 어떻든 간에 소중하게 기부된 정치후원금은 정치발전에 기여할 것이다.누구나 원하기 때문에 얻으려 노력하고, 그러한 노력의 여파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하여금 세상을 시나브로 바꾸어나가게 하는, 바로 그것이 돈의 힘이기 때문이다.

2020-12-13

무자식 상팔자일까

무자식이 과연 상팔자일까? 자식이 없어 도리어 걱정이 없어 편하다는 이 말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은 것일까.요즘 젊은세대 가운데서는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통계상으로도 이는 확인이 된다.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결혼한 지 5년이 안 된 신혼부부 중 자녀가 없는 비율이 지난해 경우 42.5%다. 10명의 신혼부부 중 4명은 자식이 없다. 통계작성 이후 최고 수치라 한다.여성의 사회참여로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부담과 주거문제 등이 아이 없는 신혼부부를 양산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은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자녀를 낳지 않고 살아가는 맞벌이 부부를 말한다. 양육과 경제적 부담을 덜고 자기중심적 삶을 살겠다는 사람을 지칭하는 신조어다.최근 방송인 사유리씨가 일본에서 정자를 기부받아 출산한 일이 알려지면서 비혼 출산이 주목을 받고 있다. 젊은층 사이에 비혼을 희망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고 한다.하지만 전통적 가족관이 무너지는 우리 사회의 현상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수년 전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된 ‘무자식 상팔자’라는 드라마는 한가정에서 부부와 자녀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과 싸움을 소통과 화해로 풀어가는 과정을 그려 인기를 모았다. 보통의 가정이면 있을 법한 평범한 사건을 인간적인 터치로 풀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느끼게 한 드라마다.스웨덴의 스톡홀름대 연구팀이 400만명의 의료 기록을 분석해 봤더니 자녀를 낳았거나 입양한 부모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무자식 상팔자, 무턱대고 믿고 따를 일은 아닌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0-12-13

독재의 ‘꿀단지’

안재휘 논설위원유신헌법 제53조에 규정된 ‘대통령 긴급조치권’은 단순한 행정명령 하나만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무너뜨린 초헌법적 권한이었다. 1975년 5월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과 보도를 금지한 긴급조치 9호는 살벌했다. 긴급조치 9호는 800여 명에 달하는 무고한 지식인·청년 학생들을 마구 잡아 가뒀었다.‘긴급조치’는 국민을 굶주림의 도탄에서 구한 박정희 대통령의 영웅적 일생에 큰 흠집을 낸 독재의 상징으로 역사책에 남았다. 3선 개헌·유신헌법에 이어 ‘긴급조치’를 추동한 배경은 일말의 가책이 빚어낸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최근 민주당이 벌이는 입법독주 쇼의 배경에도 유사한 현상이 얼비친다. 그들을 비상식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 역시 일종의 ‘두려움’일 것이다.‘윤석열 찍어내기’에 혈안이 된 여권(與圈)의 칼춤이 금도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열린민주당 최강욱 대표가 대표 발의한 검찰청법·법원조직법 개정안은 실소를 부른다. 개정안은 검사·판사 등에 대해 ‘선거일 90일 전’까지로 돼 있는 현행 사직규정을 ‘1년 전’으로 늘리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법안 발의에는 민주당 의원 10명도 참여했다.누가 보아도 이 법안은 ‘윤석열 출마 금지법’이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마저 “당장 최강욱 자신도 공무원들의 정치적 중립을 감시하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을 그만둔 지 한 달 만에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느냐”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대표적인 헌법학자인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는 “헌법의 피선거권을 침해하는 명백한 위헌”이라고 지적했다.그러거나 말거나, 여권은 ‘윤석열 출마 금지법’을 밀어붙일 개연성이 높다. 이 정권엔 당장의 ‘위헌 시비’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헌법재판소도 대략 자기들 편이라고 믿고 있거니와 위헌심판은 워낙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우선 칼을 휘둘러 처치한 다음 시간을 벌고자 하는 전략이 작동하는 까닭이다.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5.18역사왜곡처벌법’은 박정희 시대의 ‘긴급조치 9호’를 연상케 한다. 이 법에는 5·18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자에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 벌금 처분의 끔찍한 처벌조항이 들어있다. 몇몇 인사들이 5.18에 대해 증거도 없이 함부로 말하는 방종을 두둔할 이유는 없지만,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 소지’ 를 지적한다.민주당은 세월호 관련 범죄 공소시효를 2022년 6월까지 정지시키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검 요청안도 일방적으로 가결했다. 내년 보궐선거와 내후년 대선까지 계속 세월호를 붙들고 선동을 하겠다는 뜻이다.여기저기에서 “제발 세월호 좀 그만 우려먹으라”고 외치고 있으니, 머지않아 ‘세월호왜곡처벌특별법’도 나오게 생겼다. 윤호중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야당의 비토권을 거세한 ‘공수처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면서 국민의힘을 향해 외친 ‘독재의 꿀’ 힐난은 어처구니가 없다. 작금 ‘독재의 꿀단지’를 노골적으로 탐하는 자들이 정녕 누구인가.

2020-12-13

달달 외우는 인재들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태정태세 문단세….” “웃어서 세우세….”어려서 이런 말들을 달달 외던 생각이 난다. 누구나 눈을 감고 초중등 학교 시절 외우던 말들이다. 이조시대 왕들의 순서를 외웠고, 영어의 will, shall 용법을 외우던 시절이다. 어떻게 쓰이는 지도 모르고 무조건 외웠 다.대부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달달 외우는 것을 잘하던 아이들이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생각하지 말고 외워!”우리나라 초등학교 4학년생과 중학교 2학년생의 수학·과학 성취도는 세계 최상위권이지만, 해당 과목에 대한 흥미도는 꼴찌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교육성취도평가협회(IEA)는 58개국 초중등 학생 50여만명이 참여한 ‘수학·과학 성취도 추이 변화 국제 비교 연구’결과를 발표했다.우리나라 초등학교 4학년생의 성취도는 수학 3위, 과학 2위를 기록했다. 이 평가를 처음으로 실시한 1995년부터 우리나라 초등학생의 성취도는 수학 2~3위, 과학 1~2위로 최상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 중학생의 성취도도 그동안 수학 1~3위, 과학 3~5위로 우수한 성적을 이어가고 있다.문제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수학·과학에 대한 자신감이나 흥미도가 밑바닥 수준이라는 점이다. 특히 중학 2년의 경우 수학·과학에 대한 흥미도가 조사 대상 국가 중 가장 낮았다고 한다.“미국 수재들은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 경쟁하기가 힘들어. 우리 교육방식의 문제야.” 몇 년 전 서울대에서 포스텍으로 자리를 옮긴 한 수재 과학자가 한 이야기이다. 그가 던진 독백과 같은 이 한마디가 내내 뇌리를 때린다.그가 해준 카이스트 총장이었던 미국 국적의 러플린 이야기도 흥미롭다.러플린은 벨 연구소에서 일했는데 괴짜이고 주변 사람과 어울리지 못해 쫓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로 돌아와 스탠퍼드 교수가 되었는데 벨 연구소에서 연구한 연구업적을 근거로 48세인 1998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 후 벨 연구소의 해당 연구실은 러플린을 몰아낸 걸 크게 후회하였고, 노벨상 수상자를 몰아낸 연구실로 낙인찍혔다는 이야기다. 그는 러플린이 괴짜 연구자라고 하면서 한국에서 성장했으면 학교를 다니다가 쫓겨났을지도 모른다고 말헀다.또, 현 서울대 총장의 일화도 흥미롭다. 그는 초등학교 그리고 그 명문 중고교를 내내 수석으로 다니면서 전국 대학 입학고사 수석, 대학 수석졸업을 했던 수재이다. .그러나 그는 스탠퍼드 유학시절 “태어나서 유학까지 수석이었으나, 논문을 쓰려니 수석을 못하겠어”라고 술회하여 주변 친구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난 한국의 암기식 교육의 피해자”라고 말하며, 그의 눈가에는 가벼운 이슬이 맺혔다고 한다.오늘도 대학입시를 위한 교육방송의 유튜브의 입시 강의가 요란하다. 수억대 연봉의 스타 강사들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그들은 “외우자, 문제 형식을 알고 해법을 외우자”라고 오늘도 외친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 노벨상을 탈 수 있을 것인가?

2020-12-10

돌아보는 달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다. 농협에서 발행하는 12장짜리 달력의 마지막 장이다. 새해 첫날, 새 달력을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담고 있는 큼직큼직한 고딕체 숫자들이 마치 부화를 기다리는 유정란(有精卵)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매년 서른 개나 서른 한 개들이 유정란 열두 판을 선물로 받은 셈이다. 물론 겨우 몇 개나 한두 판밖에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받은 것을 중도에 파기하고 가버린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올해 내가 받은 삼백 육십 여섯 개 중에 이제 스물 한 개가 남았다. 나는 지금까지 몇 개나 부화시켜 날려 보낸 것일까. 갓 깨어난 병아리처럼 새롭고 생기로운 날이 며칠이나 되었던가. 현자(賢者)들은 하나같이 지나간 것에 연연하거나 날을 앞당겨 걱정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충실하라고 한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보통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이 지금에 충실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기 마련이고.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달마다 저들의 환경과 생활에 관련된 이름들을 붙였다. 가령 크리크족은 12월을‘침묵하는 달’이라 했고, 수우족은 ‘나뭇가지 뚝뚝 부러지는 달’, 샤이엔 족은 ‘늑대가 달리는 달’, 위네바고족은 ‘큰곰의 달’ , 퐁카족은 ‘아무것도 갖지 않은 달’ 등으로 불렀다. 나는 12월을 ‘돌아보는 달’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 해의 마지막 한 달은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성찰하고 정리하는 기간으로 삼는 게 바람직할 거라는 생각이다. 자신의 삶의 궤적을 돌아본다는 것은 곧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 알기 위해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삶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돌아보면 지난 한 해 우리나라 정국(政局)은 한 편의 막장드라마요, 소위 망나니 춤의 난장판이었다. 일 년 내내 숨 가쁘게 이어져온 광기어린 ‘망나니 춤’은 국민들의 뇌리에 한 장의 캐리캐쳐를 또렷하게 각인시켜 놓았다. 검찰총장이란 명패를 단 사내를 결박해놓고 법무장관이란 이름표를 붙인 여자가 봉두난발하고 권력이라는 칼을 휘둘러대는 장면이다. 둘러선 군중들도 두 편으로 갈라져서 서로 핏대를 세우고 삿대질을 하며 싸우고 있는, 이 한 장의 그림이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풍자화가 아닐 수 없다.철학자 소크라테스는‘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일일삼성(一日三省)이란 말도 있다. 공자의 제자 증자가 하루에 세 번씩 자기성찰을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자신을 몰각하고 반성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다. 철면피, 파렴치, 몰지각, 적반하장, 후안무치, 막가파, 내로남불…. 이런 패륜의 말들을 날마다 곱씹어야 하는 한 해였다. 한 나라의 살림을 맡은 위정자들이 도무지 반성할 줄을 모른다면, 그 해악은 얼마 못 가서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는 한 해였다. 누구든 나라의 녹을 먹는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이맘때쯤 제발 자신을 좀 돌아보라고 간청하고 싶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서고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0-12-10

페어플레이 정신

정치와 스포츠는 닮은 데가 많다. 스포츠가 멋진 승부를 통해 관중의 인기를 얻어가듯 정치도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선 대중의 인기에 부응할 것에 대해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마케팅도 마찬가지다. 스포츠는 팀의 인지도와 이미지 개선을 위해 마케팅이 필수 영역이다. 궁극적으로 팀의 수익성 창출에도 크게 기여할 분야다. 정당도 마케팅을 잘해야 경쟁 정당에 대해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스포츠가 신인선수를 스카우트하듯이 정당도 실력과 덕망이 있는 인물을 꾸준히 영입하여 정당 조직의 기반을 굳건히 다져야 한다.스포츠가 좋은 경기와 멋진 승부로 팬들을 기쁘게 하듯이 정치도 좋은 정치를 펼쳐야만 지지자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다.다만 정치와 스포츠가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스포츠는 페어플레이 정신이 강한 반면 정치는 페어플레이 정신이 희박하다는 점이다. 아예 반칙을 밥 먹듯 할 때가 많다. 관중인 국민을 안중에 두지 않을 때도 있다. 페어플레이 정신을 지키겠다고 약속하고도 거짓말을 한들 제재가 안 된다. 이젠 국민도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페어플레이 정신은 정정당당한 경기 정신이다. 스포츠맨십이나 기사도 정신 같은 것을 말한다. 진실과 성실의 정신으로 공정한 게임을 하겠다는 뜻이다. 여당의 일방적 공수처법 통과로 지금 우리 정치가 극한 대립과 혼란으로 치닫고 있다. 처음부터 정치권의 페어플레이를 믿지는 않았지만 역시 우리 정치는 실망을 안겨주는 데 주저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무신불립(無信不立)은 정치가 국민의 믿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정책을 펼쳐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페어플레이 없는 우리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착잡할 뿐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12-10

입법독재의 부메랑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10일 마침내 수적 우세를 앞세워 공수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당 173명과 민주당에서 탈당하거나 제명된 의원 3명, 그리고 군소정당 의원을 총동원해 국회 재적의원의 5분의 3인 180명을 넘는 의원이 동원돼 야권의 비토권을 없애는 공수처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공수처 설치 자체에 대해 여야는 물론이고 국민들간에도 찬반의견이 갈리는 상황이지만 민주주의가 다수결원칙이니 다수당을 차지한 여당의 뜻대로 공수처법이 통과될 것은 이미 예견된 바다. 그러나 여야가 서로 다른 의견이면 조근조근 의논해 합의할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쳐 합의안을 도출해내고,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할 때 표결에 붙여 다수결로 결정하는 게 민주주의 원칙이 아닌가. 여당이 수적 우세를 누리고 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토론절차 하나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였으니 ‘입법독재’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사실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불편한 제도다. 국민들은 국회를 평가할 때 ‘효율성없다’ ‘빨리 답을 내리지 못한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다양한 민의를 수렴해야 할 국회는 지도부 몇 명의 합의로 의사를 결정하거나, 수백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법안을 심의하면서 빨리빨리 답을 내리는 효율성과 결과주의를 지향해서는 결코 안된다. 그런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의 수적 우세를 무기로 시끄럽고 불편한 민주주의 방식을 버리고, 입법독재의 급행카드를 사용한 것이다.특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립에 관한 한 여야가 모두 ‘어떤 정권, 어떤 인사의 죄악을 덮어주거나 과장할까’ 우려한다는 점은 같다. 차이점은 공수처 신설을 주장하는 여당은 검찰이 비리의 주역이니 검찰을 감독할 공수처 신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고, 야당은 신설될 공수처 자체가 문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핵심인사들의 잘못을 덮고, 야당을 탄압하는 기관이 될까 우려한다는 점 뿐이다. 결국 다같이 나라걱정을 하는데, 개선방법 자체에 대한 의견이 확연히 갈리는 모양새였다. 이런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게 노무현 정부시절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천호선 전 정의당 대표의 공수처법 관련 발언이다. 천 전 대표는 “검찰이 강력하게 견제되지 않으면 세상의 정의는 심각하게 위협받는다”며 “수많은 사례에서 보듯이 그들의 이해에 따라 어떤 정권, 어떤 인사의 죄악을 덮어주기도 한다. 또 어떤 정권, 어떤 인사의 잘못은 과장하기도 또 조작하기도 한다”고 했다. 언뜻보면 야당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어쨌든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민주적인 입법행위를 해야할 국회가 서로 지켜야 할 정치적 합의나 약속, 신뢰를 무너뜨리고 만든 공수처법이 당장은 정부여당의 칼날로 요긴하게 쓰일지 모른다. 그러나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다. 국민들은 결코 개돼지나 바보가 아니란 야당의원들의 외침도 귀에 쟁쟁하다. 만약 머지않은 미래 총선에서 야당이 5분의 3이상 의석을 차지했다고 생각해보라. 그제서야 제 꾀에 넘어간 여우꼴이 된 민주당은 입법독재의 부메랑을 정면으로 맞게 될 것이다.

2020-12-10

어느 수능 고사장에서 생긴 일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지난 목요일 포항 어느 고등학교 앞에는 마치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연상케 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16시 전부터 마스크를 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말 그대로 인파(人波)였다. 사람들은 수능 한파를 이기고 교문을 지켰다.16시 30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교문을 중심으로 양옆 인도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교문 앞은 경건한 성지가 되었다. 17시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불가침의 공간으로 남겨둔 교문 앞으로 모였다.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나왔다. 아이가 들어간 시간이 생각났다. 아이는 7시에 “갔다 올게!”라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0시간이 지났다.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교정 안을 보는데 갑자기 눈이 뜨거웠다. 눈에 힘을 줄수록 벅찬 감정은 더 커졌다.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교문에서 잠시 눈을 거두다가 필자는 보고야 말았다. 많은 사람이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모습을! 사람들은 눈물로 서로를 응원하고 있었다.“어휴, 대학이 뭐라고, 또 시험이 뭐라고 저것들을 저렇게 고생시키나. 이 죄를 어이 할꼬.”연세 지긋하신 할머니께서 혼잣말처럼 하신 말씀은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교문 앞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모든 사람이 필자를 보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필자에게 정말 누구를 위한 시험인지, 또 무엇을 위한 시험인지를 따져 물을 것만 같았다.“저기 나 온다.” 어느 아주머니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교문 안으로 향했다. 한 학생이 종종걸음으로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를 보는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그 학생을 필두로 학생들이 강물처럼 나왔다. 여기저기서 아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는 하나같이 물기가 가득했다. 선두에 나온 아이가 부모님 품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수고했다는 말에 아이는 한동안 울었다. 그리고 분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어떻게 이럴 수 있어! 1교시 시험 치는데 형광등이 깜빡거려서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어. 지금도 멀미가 나려고 해. 나 이제 어떻게 해!”학생의 울부짖음에 사람들은 위로조차 잊었다. 학생을 꼭 안고 있는 학부모님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모두 그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피해를 호소하는 학생들은 모두 같은 고사장에서 시험을 본 학생들이었다.여기저기서 학생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시험 중간에 깜빡이기 시작한 형광등은 1교시가 끝나도록 고쳐지지 않았다고 한다. 최선을 다해 수능 시험장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아무리 돌발 상황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분명 주최 측의 잘못이다. 학생들은 당연히 피해자이다. 그냥 넘기기에는 학생들이 준비한 시간이 너무 아프다.“수능 4교시 종료로 종 2분 일찍 울려, 단체 소송 고려 중”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필자의 마음이 복잡해졌다.물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또 수능 준비 매뉴얼에 이 내용도 포함돼야 한다. 그 전에 피해 학생들에게 책임성 있는 사과가 꼭 있기를 바란다.

2020-12-09

無禮

박상영대구가톨릭대 교수두 달 전쯤, 국내외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모여 서로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된 적이 있었다. 모 대학의 교수가 자신의 학문 분야를 소개하고 있는데, 대뜸 어디선가 ‘아, 그건 정말 쉽잖아~!’ 하는 혼잣말 아닌 혼잣말이 크게 들려왔다. 다들 놀라 둘러보니, 그 주인공은 그 교수와 전공 분야도 완전히 다른, 여전히 포닥과정에 있던 나이 좀 있는 여성학자였다. 그러자 소개하던 교수는, “한 20년 넘게 공부해 온 저도 아직 이 분야를 다 모르는데, 누구는 쉽다하니, 오늘 제가 한 수 배우고 가야겠습니다.” 하며 여성학자의 무례함을 일축시킨 일이 있었다.사실 이러한 무례함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본다. 목 디스크가 걸린 것도 아닐 텐데 반갑게 인사한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지나가는 교수들, 버스에 천천히 오르는 노인을 향해 빨리 타라고 소리치거나 급히 차를 출발시켜 버리는 운전사들, 아파트 경비원에게 있는 갑질 없는 갑질 다 하며 뉴스의 일면을 장식하는 사람들, 익명성의 보호막 뒤에서 막말을 적는 댓글러들, 여러 사람 앞에서 온갖 모욕적 언사를 서슴지 않는 직장 상사들 등…. 이루 셀 수가 없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런 무례함을 많이 접하기에 무신경하지만, 사실 이는 결코 가볍게 넘기고 말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례함은 타인의 인격체를 갉아먹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타운대 크리스틴 포래스 교수도 그의 저서 ‘무례함의 비용’에서, 무례함은 사람들의 인지 능력을 빨아들여 산산조각으로 만든다 했고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기도 했으며, 뇌과학자인 에드워드 M. 할로웰 박사도 무례함은 목격자와 피해자에게 뇌화상(brain burn·나쁜 기억이 한동안 기억 속의 수면 아래 자리 잡는 현상)의 흔적을 깊게 남긴다고 했던 것이다.그렇다면 이러한 무례함은 왜 생길까? 그것은 바로 상대에 대한 공경과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禮는 원래, 제사상을 의미하는 示자와 일 년 동안 길러낸 곡식을 넘치게 祭器에 담는 豊자가 결합된 글자다. 따라서 문자대로라면 天神과 地神에게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는 절차를 의미한다. 신에게 제사 지낼 시, 공경함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아마 요식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즉, ‘禮’에는 외면적 형식(질서)과 그 속에 공경과 배려라는 두 가지 뜻이 모두 함의되어 있다. 그런데 무례한 사람은 이 두 가지 중 보통 후자가 크게 결핍되어 있다.예를 갖춘다는 것은 또한 무조건 남의 비위를 맞추란 뜻도 결코 아니다. 그것은 비굴함이지 禮가 아니다. 禮는 오히려 자기를 지키고 타인의 영역도 함께 존중함을 의미한다. 즉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이 ‘~~답게’를 잘 실천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무례한 이들은 이 ‘~답게’의 의미를 모른다. 그렇기에 이들은 타자의 영역을 침범하고 뇌화상을 입히고는 스스로 솔직하다 착각한다. 어찌 보면 불쌍한 나르시스트들이 아닐 수 없다. 어느덧 또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누구나 지난 공과를 짚어보곤 한다. 그 과정에서, 혹 타인에 대한 무례함을 범하진 않았는지 한번 되돌아보고, 나와 너를 함께 소중히 여기는 禮의 의미도 가슴 깊이 되새겨 보면 어떨까 싶다.

2020-12-09

암묵지(暗默知)를 형식지(形式知)로, 중소기업 학습조직화가 답이다

김동구 한국산업인력공단 경북동부지사장2020년은 방향과 속도 모두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급격하게 확산된 코로나19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우리의 일상은 물론 기업의 경영환경에도 큰 영향력을 받고 있다.가령 제조업과 같은 기존산업은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는 반면에 온라인쇼핑 같은 온택트(Ontact)산업은 예기치 못한 성장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마주하면서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변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기업의 생존과 경쟁력을 갖추는 것’을 추구하는 지식경영(knowledge management)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업무노하우 등 기업구성원들의 머릿 속에만 있는 암묵지(暗默知)를 문서나 매뉴얼 같이 여러 사람들 간에 공유되는 형식지(形式知)로 바꿔내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중소기업의 경우 수많은 암묵지들이 그대로 방치돼 기업에 도움이 되는 형식지로 변하지 못하는 현실이 존재한다. 결국 암묵지를 형식지로 바꾸는 것이 지식경영에 필수적인데, 여기에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실시하고 있는 ‘중소기업 학습조직화사업’이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중소기업 학습조직화사업은 중소기업이 업무관련 지식, 경험, 노하우를 사업장내에서 축적·공유·확산할 수 있도록 학습조활동과 인프라구축 등을 지원하는 사업이다.사업을 통해 기업구성원들은 학습조를 구성해 ‘기업 내 문제해결 중심의 직무관련 주제’를 선정한 후 8개월 동안 문제해결방안을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학습일지를 작성함으로써 기업구성원들의 지식과 생각을 문서화하는데 그것이 바로 암묵지를 형식지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학습조직화사업은 학습조활동 뿐만 아니라 우수학습기업으로 선정될 시 최대 2천만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는 ‘학습인프라 구축 지원’도 존재한다.한국산업인력공단 경북동부지사는 2008년 이후 총 48개의 기업을 학습조직화 사업에 참여시켜 기업의 지식자원 구축에 기여했다. 이처럼 중소기업학습조직화 사업은 기업 내 지식의 외부화를 생활화하도록 지원해 기업구성원들의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 사업으로, 더욱 많은 기업들이 참여해 혜택을 누리고, 지역 사회 발전을 이끌어주길 희망한다.

2020-12-09

알바트로스를 읽는 밤

과학사에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전환이 있었다면 제 개인사엔 ‘알바트로스적’ 사고 전환이 있었습니다. 알바트로스적 사고 전환, 이 말은 제가 지어냈습니다. 스무 살 시절, 어리바리한 저에 비해 독서로 무장한 후배는 통렬한 통찰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였지요. 격조 섞인 시니컬함이 그녀의 무기이자 매력이었지요. 그녀는 랭보와 보들레르와 말라르메 등 프랑스 시인을 좋아했는데, 치기로서의 제스처가 아니라 실제 그런 시인들의 성향을 좇았습니다. 세속적인 근성과는 먼 보들레르처럼 그녀가 가장 못 견뎌 한 것은 편안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었습니다. 대신 고매한 정신력으로 피로한 지적 노동자를 자처했지요.눈치 보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개별자로서 그 어떤 사고로부터 자유롭고자 했습니다. 자신 외에는 무관심하다시피 한 자유로운 행보, 그것은 타자를 먼저 자유케 함으로써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로움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시선을 타자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지요. 내 자유를 헌납할 테니, 네 자유도 속박해라, 이런 분위기가 팽배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그녀를 만나기 전 제게 세상은 무조건 아름답고, 선하고, 맑고, 명랑하고, 소박한 것이어야 온당했습니다. 추하고, 악하고, 흐리고, 어둡고, 화려한 것은 경계해야 할 그 무엇인 줄 알았더랬지요. 이유 불문하고, 타자를 의식하는 자로서 지닐 수 있는 당위의 사고틀이었지요. 이런 제 내면의 빈곤과 약점을 포착한 그녀의 눈썰미가 불편하면서도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평범한 학생들에 비해 온 우주를 꿰뚫는 듯한 그 눈빛이 저는 좋았습니다. 세계관의 확장 유무와는 상관없이 어느덧 제 사고 방식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녀와의 교류 덕분이었지요.남다르게 앞서가는 존재는 외롭고 고독하기 마련입니다.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를 읽던 그녀를 떠올립니다. 거대한 알바트로스는 선원들에게 잡힌 신세입니다.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성치 못한 몸으로 그 큰 날개를 질질 끌며 선원들의 담뱃불에 부리 지짐을 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홀로 우뚝한 영혼인 알바트로스는 평범한 선원들 앞에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적 상황을 엮어 자신의 처지를 시적 은유로 치환했습니다. 천상의 생각을 지닌 영혼들이 지상으로 내몰리면 알아서 개척자가 됩니다. 제 눈에는 알바트로스를 읽는 그녀야말로 보들레르의 화신이었습니다. 우뚝한 새가 평범함의 지상에 유배당했을 때 겪게 되는 가혹함. 그녀는 정말이지 제 정신의 웃자람을 알바트로스 새가 된 것처럼 것처럼 태연히 즐겼습니다. 선원들을 둘러싼 방관자 어디쯤에 위치한, 깜냥도 되지 않은 저는 마냥 그녀가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녀 인생관을 지배한 한 가지 철학은 언제나 단독자로서의 우뚝한 자아에 닿아 있었습니다.위대한 철학자의 큰 업적도 알고 보면 작은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사유는 디테일한 경험의 집적물이지요. 남들 눈에는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체험이 한 사람의 인생관을 형성합니다. 좀 더 지난 뒤 그녀의 그런 사유체계가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 인식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전적이고 정통적인 철학자들이 존재나 의식 등, 자기 안의 문제들에 몰두했다면 현대철학자 레비나스는 특별하게도 그 관심을 ‘타자’에게로 확장시켰습니다. 집단적이고 전체적인 사유에 반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라면 레비나스 식 타자의 철학에 공감할 것이에요. 그에 따르면 ‘나와 같을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가 있다.’라는 걸 인정하는 것입니다. 타자 존재에 대한 이런 확고한 인정(認定)이자 책임감이 곧 자아 주체성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니까요.김살로메소설가스스로 자유로워지려는 자는 타자부터 자유케 합니다. 획일성이란 성에서 탈출하려면 자신만 족쇄를 자른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타자의 수갑부터 풀어주는 게 우선이지요. 문제가 되는 건 언제나 타자는 그 수갑을 풀 의지나 마음이 없을 때지요. 타자는 결코 내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어떤 영향권 아래 두고 조종하고자 할 때 강요된 이데올로기가 생기는 것이지요. 저만치 나아가는 개인의 뒤꿈치를 당겨 집합적 타원 안으로 밀어 넣는 일, 그 안에서 길들여진 풍요를 예감하는 것만이 온당한 줄 알았던 제게 후배와의 교류는 알바트로스적 사고의 전환을 거쳐 레비나스 식 통찰로 나아가게 한 것이지요. 내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며, 내 욕망도 타인의 욕망이며, 내 환희 또한 타인의 그것입니다. 타자의 존재를 대범하게 인정함으로써 타자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하는 희열, 보들레르를 다시 꺼내 읽는 밤, 타자의 고유성을 먼저 알고 끝내 스스로 자유로웠던 그 시절의 그녀가 저 멀리 알바트로스 새가 되어 날갯짓하고 있습니다.

2020-12-09

수지침, 정(情)을 건네다

정미영수필가남편의 모습에 모처럼 활기가 넘친다. 봉사 가는 주말 아침이면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나 부지런을 떤다. 그를 보며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부부에게도 이제 주변 사람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걸 느낀다.몇 년 전, 남편은 수지침을 배워 자격증을 땄다. 그러더니 회사 자매마을에 가서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람된 일을 하는 남편이 듬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못마땅했다. 나는 바깥일, 집안일, 어린 삼남매 키우느라 힘이 든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처음에는 입 안에서만 얌전하게 맴돌던 말들이었다. 나중에는 가시가 섞인 채 입 밖으로 튀어나와 남편의 가슴에 사정없이 꽂혔다.서로 얼굴 붉히기를 몇 차례 주고받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은 나에게 자신이 봉사하는 곳에 가보자며 조심스레 권했다. 나는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에 파고들어 자꾸만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아침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찾아간 마을 회관 역시 썰렁했다.시간이 흐르자 할머니 한 분이 남편을 마주하고 앉았다. 할머니는 온 몸이 다 쑤신다고 했다. 남편은 할머니의 거뭇하고 투박한 손 여기저기에 침을 꽂았다.뻗은 손이 힘들었던지 할머니가 팔꿈치를 허벅지에 대자,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가 저절로 굽어졌다. 할머니의 허리는 꼬부라진 자세가 더 편하다고 부추기는 듯했다. 한참을 절하듯 그렇게 있었다.남편이 할머니의 손을 뒤집어 새끼손가락의 상처를 가리켰다. 곪아 탱탱해진 것을 보고 가족과 함께 병원에 서둘러 가보라고 권했다. “가족은 무슨….”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속속들이 사정을 알지 못하니 코끝이 찡해지며 마음 한 켠이 아렸다. 잠시나마 따뜻한 시선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면 할머니의 꼭꼭 숨겨진 사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보따리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나는 할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동무를 자청했다. 할머니는 조금 전의 침울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이내 함박꽃 같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이마의 주름살이 펴질 듯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오랜 만에 이웃집으로 마실 나온 아낙네처럼 이야기를 쏟아 놓았다.할머니는 침을 빼자마자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주머니를 뒤져 속에 든 것을 꺼냈다. 종이 부스러기에 섞여 사탕 한 알이 나왔다. 그 사탕을 손에 꼭 쥐어주고는 말했다.“고맙데이. 복 받을 끼다.”할머니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한 겨울 선착장에 묶여 있는 배처럼 사람이 그리우셨던 것이다. 모처럼 당신 걱정을 하는 이들과 얼굴을 맞댄 시간이 어쩌면 메마른 마음에 훈훈한 단비를 적셔가는 일이 되었을 터이다.우리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이리라. 나부터 마음의 문을 열어야 상대도 내 손잡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다가가기 힘들었지만 할머니에게 바투 다가앉으니, 모자란 것이 많은 나에게 정을 내셨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할머니에게서 배웠다. 가족이 아니면 어떤가, 내 마음자리에 누군가를 들여놓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남편은 내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자신은 행복하다고 했다. 요즈음 가족 아닌 남에게 ‘복 받을 것이다. 고맙다’라는 말을 어디 가서 들을 수 있겠냐며 웃었다. 온기 머금은 웃음 때문에 그 동안 응어리졌던 내 시린 마음이 봄눈 녹듯 흘러내렸다. 나는 예민했던 내 몸의 신경들이 느긋해지는 것을 느끼며 사탕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수지침을 꽂으며 사람에 대한 정(情)을 덤으로 건넨 남편의 마음이 내 마음밭으로 또르르 굴러 들어왔다.오늘 아침도 돋을볕을 맞으며 남편이 재바르게 움직인다. 봉사 활동을 나가기 위해 수지침 가방을 꼼꼼히 살피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남편을 뒤따르기 위해 부지런을 떤다. 그런 나를 남편이 자상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따스한 돋을볕이 천천히 나에게로 옮겨오는 중이다.

2020-12-09

큰 다리 놓는 법

장규열 한동대 교수영일만대교는 들어설 수 있을까? 십 년도 넘게 논의하고 검토하며 지역에 필요한 일로 확인하였다. 중앙정부의 30대 프로젝트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던 일이 이제는 예산의 문제로 주춤거린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교통정체를 해소할 방안이면서 관광효과도 기대된다는 게 아닌가. 산업도시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영일만항 물류의 흐름을 확충하고, 글로벌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터이다. 동해안고속도로가 연결되면 국토의 동쪽 허리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핵심통로의 역할도 기대된다. 지역 내 교통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나라의 도로환경에도 기여할 대목이다. 관광자원의 확보는 물론 국제적으로 자랑할만한 글로벌 미래자산 가치마저 느껴지지 않는가.내년도 국가예산으로 영일만대교 설계를 위한 20억원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예상되는 소요경비에 비하여 턱없이 적은 금액으로 보이지만, 국가가 일의 필요성을 다소라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한다. 지역에서 이와 관련하여 책임있는 인사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언론을 통하여 듣는 것처럼, 주로 같은 정당 소속 인사들과 접촉하며 호소하는 일은 효과 면에서 제한적이지 않을까. 정치권과 재계 일반에 접촉의 폭을 획기적으로 넓혀야 하는 게 아닐까. 실질적인 영향력이 확인되는 정치권 인사들과 재정과 국토관리을 다루는 정부 기관을 두루 아우르는 소구력도 발휘해야 할 터이다. 필요한 민자(民資)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가.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재계와 기업들을 설득하여 참여를 유도하는 노력도 함께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큰 계획의 틀을 다시 잡아야 한다. 영일만대교가 지역과 나라에 왜 필요한지 그 타당성을 보다 분명하게 확인해야 한다. 다리를 놓은 다음 누리게 될 기대효과와 미래가치도 다시 살펴 확정하여야 한다. 지역이 우선 확신을 가져야 누구를 상대해도 설득이 가능할 것이 아닌가. 영일만대교는 시위와 데모로 인정받을 규모가 아니다. 조사와 분석, 기획과 설득의 모든 과정에 보다 신중하고 치밀한 접근과 대응이 있어야 할 터이다. 프로젝트의 규모와 지역에 미칠 영향과 효과를 생각하면, 다른 그 어떤 과제에 비하여 매우 의미있는 족적을 남길 수 있는 ‘큰 다리’가 아닐까. ‘글로벌포항’의 지향성을 고려하면, 국제적인 맥락에서 참여와 투자를 유치해 보면 어떨까.도시의 위상과 지역의 문화가 새발전의 기틀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하기보다 우리 안에서 긍지와 희망을 찾아야 한다. 내연산에서 솟아올라 구룡포로 흐르는 지역의 기운을 시민들의 삶에 잘 연결해야 한다. 영일만대교는 외형으로 훌륭한 자원이 될 뿐 아니라 지역의 자긍심을 한층 솟구치게 하는 모멘텀이 되어야 한다. 바다와 길을 잇는 ‘큰 다리를 짓는 일’에 지역의 관심과 기대가 더욱 모아야 한다.윈스턴 처칠이 이렇게 말했다는 게 아닌가. ‘비관적인 사람은 모든 기회에서 문제에 매달리지만, 낙관적인 사람은 모든 문제에서 기회를 발견한다.’ 영일만대교는 우리의 기회가 아닌가.

2020-12-09

보유세 vs 거래세

세법상 공식 명칭은 아니지만 ‘보유세’는 납세의무자가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에 부과하는 조세로서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종부세)를, ‘거래세’는 재화 또는 용역의 거래에 대해 부과되는 양도소득세(양도세)와 취득세 등을 일컫는다.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보유세는 강화하고, 거래세는 낮추는 게 맞는 방향”이라고 말했다. 그랬던 정부가 7·10 대책을 통해 다주택자의 종부세 최고세율을 6.0%로 올렸고, 양도세와 취득세까지 인상 계획을 밝혔다. 보유세와 거래세를 모두 올려 논란을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정부 관계자는 부동산 시장 상황과 투기 수요 억제를 위해서는 당분간 양도세 등 거래세 인하를 추진할 수 없다고 한다. 추후 부동산 가격 급등 우려가 없고 활발한 거래가 필요한 시점이 되면 재고해볼 수 있겠지만 당장은 정책 기조를 바꾸기 어려워 보인다. 더구나 지방세수에서 양도세 등 거래세 비중이 크기 때문에 거래세 인하는 지방자치단체의 반발을 부른다.변창흠 신임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 역시 양도세를 불로소득 환수 수단으로 규정해온 학자출신이라 취임하면 양도세 인상기조를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부의 이런 기조 탓에 주택 공급 물량이 늘지 않아 주택시장 불안이 심해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당초 정부는 부동산 보유세 부담을 높이면 다주택자가 시장에 물건을 내놓으면서 주택 공급이 확대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양도세 부담 탓에 다주택자 상당수가 증여로 돌아서거나 ‘버티기’에 나섰다.거래세 강화가 보유세 강화의 정책 효과를 반감시킨 셈이니 진퇴양난의 형국이다. 물론 서민들에게는“세금 고민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푸념만 쏟아지는, 먼나라 얘기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2-09

배운다는 것

한강 다리를 건너며 오늘은 강물이 험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가로등조차 하나도 안 켜놓은 것 같다고 느꼈다. 멀리 보이는 말없는 나무들도 어지러운 세상을 근심하고 있다.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고, 내 정신이 내 정신 같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내일은 대전에 부모님 뵈러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장난 삼아 산 플래시로 어두운 산숲을 비추어 본다.마음 속으로 그 ‘민주주의’라는 것이 나를 아주 망쳐 놓았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았다고, 쓸데 없는 가치의식에, 목표에, 측정에, 비판에, 분노에, 이율배반과 환멸에, 나는 그렇지 않아도 망가진 몸과 마음 상처를 덧나게 하고 있다.어두운 방에 작은 불을 켜고 가끔은 들춰 보리라 생각한 명호 형의 두꺼운 책을 심심파적 삼아, 잠도 오지 않으니까 편다. 명호 형은 참 큰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논어’를 새로 읽을 뜻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일까?하, 배운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고 명호 형이 풀이해 놓은 것을 곰곰히 다시 생각해서 정리해 본다.배운다는 것은 그러니까 첫째, 그냥 지식, 정보의 존재를 아는 것이 아니요, 그것을 익히는 것, 습관으로, 실천으로 만드는 것이다. 알고 행동은 다르게 하는 겉배움은 배움이 아니요, 알았으니 행동으로 옮기는 속배움이라야 한다. 둘째, 배우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나처럼 함께 길 가는 친구를 알아 그가 찾아와 즐거운 것이요, 이 배움 때문에 설혹 가난해도 원망할 것 없이 즐겁게 받아들일 줄 아는 것, 내 스스로를 닦으니 내실 있어 기쁜 것이다. 셋째, 또 뭐냐, 그러니까 배움이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 것, 그러니까 세상에는 나보다 나은 사람, 훌륭한 사람 천지요, 나만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넷째, 배운다는 것은 늘 배움의 태도를 잃지 않기에, 이것은 내 생각이지만 쓸데없이 무겁지도, 위압스럽지도 않은 것이고, 뭣보다 고루해지지 않고 나날이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절차탁마한다고도 할 수 있다.명호 형은 공자를 가리켜 기철학자라 했다. 주리론, 주기론 하는 기철학이 아니요, ‘나’를 다스리는 뜻과 방법을 알고자 하는, ‘나’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실제로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중차대한 문제니,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낼 여가도, 여력도 없다. 다만 ‘나’를 위해 거울이 될 남을 알지 못할 것이 두려운 것이다.하, 배운다는 것이 이리도 무서운 것이라니, 나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것이다. 먼저 세상의 근심을 밀어내고 내 스스로를 돌아보기로 한다.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면, 지난 잘못들은 악몽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12-09

아, 울산대학교!

김규종 경북대 교수바다를 처음 보았던 것은 고2 수학여행 때였다. 동대구역에서 해병대 군용트럭이 우리를 포항에 자리한 해병대 숙소로 데려갔다. 해병대 1일 입소를 통해 호연지기를 키워주겠다는 교장의 의지였다. 그때 처음 갯내음을 맡고 나서 내가 한 일은 바닷물을 맛보는 것이었다. 바닷물은 짰다, 아주 심하게. 내게 바다는 그렇게 다가와서 지금까지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울산에서 3수로 괴로워하던 친구가 보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5월의 대학축제를 팽개치고 도착한 울산은 현대의, 현대에 의한, 현대를 위한 도시였다. 현대 직원용 아파트에서 이틀 묵으면서 방어진과 주전 바다를 보고, 경주를 경유(經由)해서 서울로 돌아온 일이 엊그제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런 울산을 지난주에 다시 다녀왔다. 이번에는 목표지점이 울산대학교로 바뀌었다.어느 도시에도 그곳을 대표하는 대학이 있기 마련이다. 울산과학기술대학교(유니스트)가 있지만, 명실공히 울산의 간판 대학은 울산대학교다. 울산광역시에 거점 국립대학교가 없어서 서운하지만, 그래도 울산대학교는 분명 자타가 인정하는 울산의 명문대학이다. 차가운 초겨울 날씨를 뚫고 울산대학교 인문관에 도착한 즉시 ‘뭔가 이상한데’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일까?!복도와 화장실에서 감촉되는 싸늘한 냉기는 과객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대학을 방치(放置)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970년 울산공대를 모태로 시작된 울산대학교 50년 역사가 아련했다. 설립자인 정주영 회장의 배움을 향한 갈망이 근간이 되어 만들어진 울산대학교. 고려대학교 공사판에서 부러운 눈으로 학생들을 보면서 향학의 꿈을 키웠던 청년 노동자 정주영.나는 한국의 유일한 기업가로 정주영을 꼽는다. “임자, 해봤나?” 대형 유조선에 물을 가득 채워 서산 간척지의 악명 높은 물살을 이겨낸 신화의 정주영. 그런 희대의 인물이 설립한 울산대학교가 위축되고 찌그러지고 있는 것이었다. 삼성의 성균관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울산을 대표하는 대학을 이렇게 홀대하는 것은 정말로 뜻밖이었다. 대학의 위축과 몰락은 도시의 위축과 몰락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킨다.위대한 현대의 신화를 학문과 교육에서 뒷받침해야 마땅할 울산대학교가 오후의 햇살 속에서 자꾸만 작아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하루였다. 오늘날 사립대학의 발전과 융성은 재단의 풍부한 물적 지원과 대학 자체의 자율성과 교수들의 책임감으로 이루어진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 체제를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한 사립대학 재단들은 하루빨리 배워야 한다. 대학은 돈 버는 곳이 아니라, 인재를 길러내는 곳이다.너무나도 자명한 이치를 망각한 허다한 재단과 이사장과 총장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미래와 어린것들이 구슬프다. 그들에게 다가올 희망의 광명이 환하게 퍼질 날을 고대하면서 다시 한번 말한다. “현대여, 울산대학교에 투자를 아끼지 마시라!”

2020-12-08

따로 또 같이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스산함이 더해가는 때, 코로나19의 재확산 일로로 어수선함마저 더해가는 연말이지만 한 줄기 차분한 위무 같은 이색적인 문화행사가 열렸다. 포항예총에서 주관한 ‘2020 포항예술인 한마당’ 송년 예술축제의 일환으로 기획 전시된 ‘화사(畵寫)한 문화(文話)’전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는 종전의 여타 전시회와는 다르게 예총 산하의 문인협회, 미술협회, 사진협회 작가들이 협업과 융합을 통해 독창적인 시서화(詩書畵) 작품을 한자리에 새롭게 선보였다는 것이 주목된다.연초부터 휘몰아친 난마 같은 희대의 전염병에 시달려 가뜩이나 초조하고 침울해진 시민들의 가슴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진 뉴노멀 시대의 새로운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활자로 구성된 시나 수필 등의 문학작품을 주로 책을 통해 접하던 것을 시인들의 육필원고와 화가, 서예가, 사진가들의 독특한 심미안으로 투영된 콜라보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으니 이채롭지 않으랴. 코로나로 인해 다소 낯설어진 일상에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창작품을 선보인다는 것은, 익숙해진 것들과의 ‘낯설게 하기’라는 예술 본연의 신선한 자극과 지향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시 속에 그림이 있고(詩中有畵) 그림 속에 시가 있다(畵中有詩)고 한다. 시와 그림의 유기적인 맥락과 상관성을 나타나는 말로 여겨진다. 한 점의 그림이 연상되는 시와 한 편의 시가 드러나는 그림은 시와 그림의 불가분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시적인 정취를 나타내는 시정(詩情)과 그림 속에 나타난 뜻을 일컫는 화의(畵意)는 서로 통하기 때문에 두 정신은 일치한다고 본다. 시인은 시어(詩語)로 그림을 쓰고 화가는 시각언어인 그림으로 시를 그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양예술은 시서화가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시·서·화 등은 각각의 카테고리에서 충분한 예술성을 드러낼 수도 있겠지만, 상호 조화롭게 결합되어 예술의 통일체를 이룰 때 보다 풍부한 미학적 운치가 부여된다고 본다. 그것은 곧 다양한 예술장르가 각기 지닌 특색이 조화롭게 섞여서 또 다른 하나의 장르를 새로이 창출해내는 ‘따로 또 같이’의 예술정신과 진배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예술의 섬세하고 다채로운 표현양식으로 시의 향기를 귀로 들으면서 어루만진다든가 음악의 선율을 눈으로 보면서 맛을 느낀다든가 하는 식으로 수렴과 확장의 시너지효과를 얼마든지 극대화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어쩌면 예술은 따로 하면서도 같이 하고 같이 하면서도 또 따로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로 하는 작품에서는 개성을 한껏 살릴 수 있고, 같이 하는 예술에서는 공명의 완성도가 한결 커질 수 있다. 따로따로 살아가지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듯이, 너무나 당연시했던 일상들이 정말 그리운 현실의 삶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등한시하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것들을 성찰하게 된다.온 세계가 낯선 환경에 직면하여 저마다의 일상에서 코로나에 대처하고 극복하기 위해 변화하는 와중이지만, 비대면 사회문화 속에서 메말라가는 정서에 따로 또는 같이 느끼며 감성을 움직이고 위안을 받는 예술작품을 통해 믿음과 희망을 가졌으면 한다.

2020-12-08

6펜스가 필요한 세상에서 달을 보는 일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안정적인 중산층의 전형으로 전혀 특별할 것 없는, 그야말로 틀에 박힌 삶을 살아가는 재미없는 남자다. 그는 어느 날 돌연 직장과 가정을 떠나 파리의 뒷골목을 떠돈다. 그뿐 아니다. 제 발로 태평양의 외딴 섬을 찾아가 깊은 숲에 자리 잡고 문둥병에 걸려 장님이 된 채로 생을 마감한다.그는 왜 이런 무모한 행동을 했던가. 가슴 한구석에서 시작된 예술에 대한 열망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의 아내의 말대로 그림은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지속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안락과 명예를 버리고 예술을 향한 본능을 따라간 것이다.스트릭랜드가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고갱의 삶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끌고 가기 위하여 인물의 삶을 단순화시켰고 그로 인해서 스트릭랜드는 기이하면서도 신비하고 보다 더 천재에 가까운 예술가로 포장되었다. 아마 작가는 고갱의 그림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강렬함을 토대로 하여 가공의 인물로 만들었을 것이다.우리는 흔히 예술가를 바라볼 때 보통의 사람과는 다른 구석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스트릭랜드처럼 예술을 위해 자신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일말의 거리낌 없이 고통을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연상된다.나는 이따금 현실감각이 없다는 말을 듣곤 한다. 창창한 나이에 소설을 쓰겠다고 나선 것부터 그렇다. 다달이 통장에 찍히는 월급은 포기한 지 오래다. 당연히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도 않다. “사대 보험은? 저금은? 노후준비는? 경제적 혹독함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는군.” 하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발끈해 나 자신을 변론하고 싶다. 하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는 것은 정말 사실이라 어떤 대꾸도 못 한 채로 입을 다물고 만다.반대로 직접 만나보니 생각보다 예술가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동글동글한 분위기에 허파에 바람 든 것처럼 잘 웃어서 오히려 상대를 당황하게 하고 만다. 냉철하고 신랄한 느낌을 기대했지만, 예상보다 고분고분한 모습에 조금 실망했다는 경우도 있다.나 자신을 스스로 예술가라고 선언하는 것이 낯부끄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전의 나 역시 예술가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빗겨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에 관해 어떤 초월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으리라고 상상했다.바로 이런 것들이 예술가를 낭만화시키려는 경향이다. 이 때문에 원고료를 제대로 정산받지 못해 항의하면 세속적이라는 답을 듣던가, 예술가라면 응당 고독과 불행을 당연시 여겨야 한다는 편견이 만연했다.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들은 이러한 이중적 시선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예술에 대한 전근대적인 인식을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중에도 글쓰기는 분명한 노동이며 그에 따른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눈에 띈다.청탁 시스템 속에서 글을 쓰는 작가들은 글이 발표되지 못하면 돈을 받지 못한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작업한 원고가 잉여 자원으로 취급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자신을 ‘활자 노동자’로 칭하고 글을 파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들의 글을 받아보고 싶은 사람들에 한하여 정기적으로 시나 소설, 에세이를 보내주는 메일링 서비스가 그러하다. 다매체 시대에 걸맞게 출판사를 통하지 않고 작가가 직접 독자를 만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미등단 작가나 지면의 기회가 적었던 신인 작가들은 다양한 플랫폼으로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인다. 이러한 흐름은 점점 커져 시장의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메일링 서비스는 간단하지 않다. 단순히 텍스트를 쓰는 것을 넘어서 콘텐츠를 기획하고 홍보하면서 구독자를 모집하고 발송하는 등 모든 영역을 혼자 진행하고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는 노동에 가깝다. 이들은 창작물을 작업할 뿐 아니라 품이 드는 일까지 자처하고 있다. ‘6펜스’(구제도하에서의 은화) 없이는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기는커녕 허리 통증 치료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예술가들이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전업 작가를 꿈꾸지만 정작 글쓰기만으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작가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생계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작품 활동에 매진한다면 당연히 훨씬 질 높은 창작물이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공고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예술가는 영원한 비정규직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나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을 쓰는 것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다. 돈을 벌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가혹한 세상 속에서 고고하게 자기 삶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소설을 발표하는 것 이외에도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여러 영역에서 글을 써서 고료를 받는다. 그 돈으로 관리비를 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소설을 쓴다. 책상 앞에 앉아 작업하는 시간을 최저시급으로 계산한다면 먹고사는데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면서.하지만 정말로 이것이 자본으로 치환된다면 대체 얼마여야 하는 것일까. 물론 소설만으로 돈을 벌면 좋겠지만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니다. 이 작업은 절대로 값을 매길 수 없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그러니 이러한 물음도 가능할 수 있다. 예술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하거나 완전한 자본의 논리 안에서 포함하여 보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다. 예술은 견고하게 존재하는 세계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균열을 내는 일을 한다. 노동을 자본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라는 개념에서 봤을 때, 예술을 단순한 노동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달과 6펜스’에서 스트릭랜드는 그저 천재적인 예술가로만 묘사되진 않는다. 세상의 윤리로 보면 그는 이기적이면서도 괴상한 사람이다. 비정상적인 충동에 시달려 가족을 버렸고 주변의 사람들을 고통받게 한다. 만일 당신이 훨씬 더 가난해진다면, 몸이 아프게 된다면 지금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그는 의문을 던진다. 세속의 가치에 절절매는 것, 빈곤과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 가난하기를 택했다. 문둥병에 걸리게 되지만 절망에 빠지기는커녕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 모든 일은 불행이 아니었다. 삶을 살아가는데 찾아온 하나의 사실에 불과했다.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이것이 스트릭랜드가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다. 예술은 상품이 아니며 “더 높은 것, 아름다움과 진실을 통찰하는 것”이라며 예술의 숭고함을 중시했던 칸트도 “최고의 예술은 비즈니스”라며 예술의 상업성을 내세운 앤디 워홀도 시대를 관통하는 철학자이자 예술가였다. 이들은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관하여 골몰했고 거기에 가 닿기 위해 노력했다. 사회적 통념이나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예술은 시대적 상황에 순응하지 않고 불화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성이다. 창조를 향한 충동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달과 6펜스’가 시대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널리 읽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세상에는 세상을 균열 내려는 이들이 더욱더 많아져야 한다. 그럴수록 사회 전체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힘은 커진다. 컴컴한 하늘에서도 기어코 별을 찾아내는 이들 덕분에 밤이 오는 것이 무섭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동그랗고 반짝이는 것 중 꼭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을 때, 동전 대신 달을 택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을 응원한다.

2020-12-08

검찰 개혁의 당위성은 차고 넘친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촛불혁명 이후에도 무소불위의 검찰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민주화 과정의 어려운 고개를 넘었음에도 검찰의 권력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추미애 장관과 윤석열 총장의 한 치의 양보 없는 갈등 구도는 제로섬 게임으로 치닫고 있다. 나라를 위해 매우 불행한 일이다. 추 장관은 윤 총장 징계요구는 검찰개혁의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고, 윤 총장은 살아있는 권력수사에 대한 보복이라는 입장이 강하다. 검찰개혁이라는 문제 본질은 묻혀버리고 정쟁으로만 치닫는 상황이 불편하다. 검찰 개혁의 당위성은 모두 인정하면서도 합의된 해법은 찾을 수 없을까.10여년도 훨씬 넘은 오래된 일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어느 경찰서장 한 분을 어느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다. 나도 그 식당에 어느 부장검사와 업무협의로 식사가 예약되어 있는 터였다. 그 서장은 내가 이 식당에 온 이유를 알고는 얼른 자리를 피해 나가 버렸다. 당시만 해도 검사는 언제나 갑이고 경찰은 을의 신세였다. 검찰의 수사 기소 독점구조는 경찰에 대한 상하 수직적 구조를 강화시켰다. 학교 대선배였던 그 서장의 불편한 심기를 뒤 늦게 알게 되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의 검경간의 조정이 이제 겨우 방향만 잡힌 상태이다.검찰 권력의 비대화 배경에는 지방 토호 세력의 자기 보호 본능도 한 몫 하였다. 과거 유력 기업인, 재력가는 사전 보험 식으로 검찰에 줄을 대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과거 검사인 어느 선배 부친의 시골 상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집 찾기를 우려 했는데 마을 앞 십리 길은 조화가 늘어서고 경찰이 친절히 안내까지 해주었다. 당시 초임 검사도 ‘영감’으로 호칭되고 어느 자리나 상석에 배정되었다. 몇 해 전 유림 향사에서 젊은 검사가 초헌관이 되는 모습을 보았다. 이런 왜곡된 문화가 검찰 독점 권력의 온상이 되었다.과거 재직 시 잠시 학생관련 보직을 맡아 공안 검사들과 수차례 만난 적이 있다. 검찰의 조직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부장 검사 옆의 젊은 검사는 항시 긴장하는 모습을 보았다. 회식에서도 부장 옆 자리의 젊은 검사들의 순종하는 모습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상관이 건배사로 ‘좌익 척결’하면 아랫사람이 ‘우익보강’하던 시절 이야기다. 검사 동일체 원리는 검찰 조직의 상명하복 문화의 온상이 되었다. 윤 총장의 징계 회부에 전 검찰 조직이 들썩이는 이유도 결코 이러한 조직문화와 무관치 않다.이러한 검찰 조직문화는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 문화와 융합하여 검찰 개혁을 어렵게 한다.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당연한 귀결이고 여론의 지지까지 받고 있다. 그러나 검찰의 관행이나 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가까스로 입법화된 공수처는 하루 빨리 가동되어 살아 있는 권력인 검찰도 수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검경간의 수사권과 기소권 분리원칙은 엄격히 실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검찰내부의 조직적 반발은 계속되고 있다. 여야 정치권의 정쟁은 검찰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020-12-08

‘크리스마스 악몽’

1993년 제작된 ‘크리스마스 악몽’은 월터 디즈니 계열사 터치스톤 픽처스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뮤지컬 영화의 제목이다. 미국의 유명한 동화인 ‘크리스마스 전날’에서 제목을 따온 영화로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방영된다.아이들이 보기에는 너무 어두운 내용이 많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2년 늦게 개봉됐다. 크리스마스와 핼러윈데이를 결합한 독특한 소재의 영화다.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최근 크리스마스 대이동을 앞두고 미국이 또한번의 크리스마스 악몽을 맞게 될 것을 공개 경고했다고 외신이 전했다. 현재 미국의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1천400만명에 달한다. 세계 확진자 수의 21% 수준이다.추수감사절처럼 이동 자제 권유가 먹혀들지 않는다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한 주 동안만 2만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할 것으로 질병센터는 예측했다. 또 크리스마스에 이어 연말까지 대이동이 이어진다면 미국 내 전체 누적 사망자 수는 33만명에 달해 역대 가장 우울한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내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우리나라에도 연말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고 있다. 예년이면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캐럴송이 퍼져 나올 무렵임에도 연말 분위기가 전혀 살아나지 않고 있다.수도권을 중심으로 2.5단계 거리두기 조치가 내려지면서 수도권은 이미 셧다운 상태다. 초저녁 무렵부터 거리에는 어두움의 그림자가 내리고 차들도 서둘러 집에 가는 모습이 마치 전시상태를 방불케 한다.세계 각국이 최악의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사실상 올 크리스마스 악몽은 미국만의 악몽이 아니다. 올 연말 찾아온 크리스마스 악몽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지구촌 모두의 고민거리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12-08

66년생 오진선

최미경동화작가‘2020년 9월 10일자 부동산매매계약서 제 5조에 따라 매도인 오진선은 매수인 최민식에게 부동산매매계약의 해제를 통보합니다. 계약에 따라 계약금의 배액을 상환하고자 하오니 매수인 명의의 계좌번호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오진선씨는 다시 한 번 자신이 보낸 문자를 들여다보았다.B부동산에서 보내준 문자를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한 것이니 법적으로 문제시 될 것은 없었다.오진선씨는 자신의 머릿속에 맴도는 ‘법적으로’라는 단어를 혀끝에서 여러 번 굴려보았다. 요 며칠 그 단어가 꽤 근사하고 합리적이다 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그러다 네이버 검색창에 들어가 ‘법’이라 쳤다.“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칙,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 오진선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 9월 아파트 계약서를 쓸 때를 떠올렸다.부동산정책이 바뀌면서 골치 아픈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가지고 있던 물건 몇 개를 정리해서 갈아타려 했다. 그 중 하나가 S4차 아파트였다. 그런데 계약서를 쓰고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슬금슬금 전세가가 오르기 시작하더니 11월이 되자 두세 달 전 매매가 보다 웃돌았다. 잔금 날짜까지 10일 정도 남았는데 아침저녁으로 S4차아파트의 매매가는 최고가를 쳤다. 매매계약서에 적힌 잔금날짜와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세입자의 이사날짜와 계약 파기 시 물어내야 할 금액까지, 숫자들이 우글우글 머릿속에서 기어 나와 밤새 오진선씨의 온 몸을 기어 다녔다.날이 세자마자 오진선씨는 B부동산에 전화를 했고 중도금이 없는 상황이니 계약을 파기해도 현시점의 아파트 매매가면 물어준 배액의 몇 배 이상까지 거뜬히 당길 수 있다는 확답을 받았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혹시나 매수인이 중도금을 넣기 전에 세입자부터 내보내야 했다. 잔금일자를 당기자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먼저 떠올렸던 게 B부동산인지 오진선씨인지 중요하지 않았다.오진선씨가 그 날 오후 네일샵에서 빌더젤과 엠버를 섞어 손톱라인을 그리는 동안 잔금일자가 당겨졌다는 통보를 받은 세입자와 매수인의 마음은 바빠졌다.3일 후면 노모가 살던 집을 비워야 하는 50대 아들과 3일 후면 생애 처음 ‘우리 집’을 가지게 된 세 아이와 그 아이들의 엄마 그리고 40대 중반의 가장이 쉽게 잠들지 못한 금요일 밤이었다.그리고 이튿날 아침 계약을 파기한다는 내용을 매수인에게 전했다는 B부동산중개사의 전화를 받았다.오진선씨는 소파에 반쯤 누워 TV채널을 돌리다 살짝 배가 고파졌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한 통 왔다. ‘사모님, 저희 다음 주면 이사간다고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들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오진선씨는 문자를 읽다말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오진선씨는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잔금일자를 하루 남겨둔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이었다.*위 글은 현재 아파트가격이 급등하자 매도자들이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사례가 잇따른데 따른 가상의 글임을 밝혀둡니다.

2020-12-07

율곡(栗谷)의 제 3의 길

강희룡 서예가우리의 생각은 대개 흑 아니면 백, 보수 아니면 진보라는 이분법으로 결정짓는데 익숙하다. 나 아니면 남,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 그래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을 회색분자라고 하며 낙인을 찍는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란 대부분 흑과 백을 넘어선 데에 더 나은 길이 있는 법이다. 율곡 선생의 ‘율곡전서(栗谷全書), 증유응서몽학치군설’에 ‘학문이 부족하면서 바삐 벼슬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학문이 충분하면서 벼슬하지 않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라는 글이 실려 있다.500여 년 전 시대 역시 선비들은 대부분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선조 8년 인사권을 쥐고 있던 이조전랑 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대해 동인인 김효원과 서인인 심의겸의 대립이 결국 조선의 붕당정치를 가져왔다.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면서 이후 망국적 행태의 당쟁으로 이어져 결국 민생은 피폐되고 국제정세에 무지했던 관료사회는 임진왜란이라는 화를 불러들인다.혼란한 시국에는 권력자에게 아첨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지키려는 사람은 학문이 충분한데도 세상을 등지고 살았고, 벼슬하기에 급급한 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고 하였다. 사람들은 보통 벼슬하기에 급급한 사람을 소인이라고 비판하고, 지조를 굽히지 않고 세상을 등진 채 사는 사람을 군자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율곡은 이런 식의 이분법적인 생각에서 빠져나와 세상이 혼탁하다 하여 모두 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버리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논리를 편 것이다. 그래서 원칙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어려움을 개선할 수 있는 이른바 제 3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이 율곡에게는 다름 아닌 학문이었던 것이다. 논어에서 ‘관직생활에서도 틈이 나면 학문을 익혀야 하고, 학문이 넉넉하게 되었으면 관직에 나아가야 한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학문을 충분히 쌓은 사람은 관직에 나와 자신의 학문을 현장에서 실행하고, 관직 생활을 하는 현장에서도 틈만 나면 계속 학문을 쌓아서 현장 문제에 대한 바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계속하다 보면 당장 눈앞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은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어느 정도라도 덜 수 있다. 여기서 학문이란 얄팍한 지식 몇 조각으로 잔머리 굴리며 자신의 욕심이나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민 앞에 궤변이나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바탕으로 한 지식을 지혜롭게 국가를 위해 펼치는 것을 말한다. 옛사람에게 있어 뜻이란 배움이요, 배움이란 성인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선(善)을 따르기는 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욕심을 따르기는 물이 낮은 데로 흐르는 것처럼 쉬운 법’이라는 옛말처럼 뜻이 굳세지 않으면 영욕에 마음이 흔들려 뜻을 빼앗기지 않는 경우가 드문 법이다.더구나 물질적 가치와 권력욕의 추구가 최고의 선인 것처럼 목표로 쉽게 설정되는 요즘 세태에서 옛 학문이 추구하는 목표가 새삼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현실이다. 국민 고혈로 호의호식하는 공복(公僕)들의 정신자세는 선공후사(先公後私)가 아니라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의무만이 어깨에 매달려있다는 것을 새겨야 할 것이다.

2020-12-07

비탈에 서도 외롭지 않은 그대… 경주 주사암(朱砂庵)

오봉산은 신라 선덕여왕 때 백제의 군사들이 여근곡(女根谷)에 숨어 있다 격퇴된 곳이며, 부산성(富山城)이 있어 경주의 서쪽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뿐만 아니라 화랑 득오곡이 죽지랑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그 오봉산 정상 아래 숨어 있는 주사암을 찾아 산길을 오른다.‘53 선지식의 돌탑’,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라는 팻말과 작은 돌탑들이 썰렁한 겨울 산길을 밝힌다. 섬세한 손길은 이내 담력시험이라도 치르듯 53굽이의 아찔한 경사길로 이어진다. 조금만 방심하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산길을 비틀거리며 차가 오른다. 마주 오는 차와 교행할 수 있도록 중간중간 길어깨를 만들어 놓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겨울 응달에 기대선 나목들의 침묵, 그 사이로 얼어붙 듯 숨죽인 허공이 우리를 지켜본다.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 거쳐 간 험난한 과정을 떠올리며 내 나약한 숨결에도 기도가 실린다. 산 위 주차장에 이르렀을 때, 스피커에서 마중 나온 염불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가 창건한 주사암은 투구모양을 한 오봉산 정상(685m)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주사암은 풍수지리학적으로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있는 형국이라 에너지가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한다. 절 입구 양쪽에는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며 서 있다.조심스럽게 경내로 들어선다. 작은 법당 뒤로 투구 모양의 바위가 주사암을 보듬고 앞으로는 부산성이 든든하게 막아주고 있다. 활짝 열린 법당문 안으로 겨울 햇살 홀로 부처님 진신 사리를 친견하고 나는 염불 소리에 젖어 산사의 풍경에 몸을 맡긴다.산악용 자건거를 탄 남자가 안장에서 내리지 않고 법당 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평화롭던 공기는 달아나고 말았다. 잠시 인드라망의 그물이 출렁이며 파동을 일으킨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마당 바위 쪽으로 사라지는 그의 당당한 발걸음과 근육질 몸매가 안쓰럽다. 상호 배려와 겸손의 깨달음은 그토록 멀고 힘든 것인가.경내를 둘러보다 나도 마당바위로 향한다. 까마득한 절벽 위, 툭 트인 산과 허공을 배경삼아 자전거로 한껏 멋을 내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근처에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지’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날렵한 동작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화랑들의 기상이 들릴 듯 하고, 주사암 설화 속에 등장하는 좌선 중인 도인의 모습도 아른거린다.저 너른 허공의 품에 안겨 나도 참선하듯 앉아 있고 싶다. 조용한 날 다시 오리라 마음먹고 돌아오는데 어느 보살님이 국수공양을 하고 가라며 인사를 건넨다. 매주 일요일은 무료로 국수공양을 한다는 안내문이 생각났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소박한 건물을 바라보다 용기를 내어 들어섰다.공양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 사이로 국수를 삶아 건져내느라 분주한 봉사자들이 보인다. 그저 받기가 조심스럽다. 국수에 육수를 붓고 갖가지 고명을 얹어 구석진 자리에 앉는다. ‘몸과 생각이 자유로워지는 곳. 이 공양 받으시고 하루빨리 도업 이루소서’ 걸어놓은 현수막에서 주사암의 마음을 읽는다. 귀한 음식을 앞에 놓고 고작 ‘오관게’를 읊고 있는 나, 편안함에 길들여진 마음조차 남루하다.담백한 육수와 갖가지 고명이 어울린 국수에서 정갈한 산사 맛이 난다. 주지 스님이 어떤 분인지 뵙고 싶다. 삶의 근간인 밥의 힘을 알고 사람을 제대로 섬길 줄 아는 분이리라. 산문 걸어 잠그고 참선하는 수행에도 높은 뜻이 숨어 있지만 대중들과 호흡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은 세상을 좀 더 낮고 가깝게 만들 것이다.뒤늦게 대웅전 법당에서 백팔 배를 올린다.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보살행을 실천하는 불자들의 짧은 인사가 문턱을 넘나들고 겨울 햇살이 내 등을 어루만진다. 진정한 보살은 의지하는 것이 없어 즐거움이나 기쁨을 구하지 않으며, 선정의 결과로 색계천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긴 겨울 앞에 선 암자가 쓸쓸해 보이지 않는다.조낭희 수필가주지 스님을 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구적인 외모와 소탈한 인품의 효웅 주지스님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산문 근처에 목사님의 시를 걸어놓을 정도로 열린 마음을 가진 분, 53굽이의 산길을 손수 청소하고 불자들을 맞으며 무료공양 해 오신지가 벌써 5년째라고 한다.스님은 무료공양의 덕을 옆에 앉은 송경규 회장과 봉사자들, 소식을 듣고 다시마와 국수를 보내주시는 분들의 공으로 돌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송 회장의 맑은 눈빛과 동안의 비결을 알 것 같다. 주사암과 스님에 대한 애정이 보살행으로 이어진 것인지, 그의 보살행으로 주사암과 스님을 사랑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선지식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묵묵히 선업을 닦는 사람들을 통해 부처님은 오시리라. 이곳에서는 높고 낮음, 삶과 죽음,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보름달이 뜨면 마당 바위에 도인처럼 앉아 계실 효웅 스님을 떠올려 본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적막이 있을까?

2020-12-07

만약(If)과 아마도(Quizas)의 사랑이야기

영화의 제목이 주는 울림이 감상의 다양한 변주를 낳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영연화’ 또한 그렇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을 의미하는 영화제목은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 그 순간을 쌓아가는 과정과 그 이후의 무너짐을 기대하게 된다. 찬란함이 계속해서 유지됐다면 그것을 ‘순간’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영화 ‘화양연화’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의 정의나 사랑의 기준을 잡는 영화가 아니라 사랑의 시작과 끝, 과정의 세심한 감정들을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영화다. 치열하거나 복잡하거나 고난과 시련이 없다. 아니 있었어도 생략되거나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영화 속 사랑의 진행은 더디다. 완급의 조절에 있어서 모든 결정적 순간들은 한 순간 주춤한다. 영화 속 자주 등장하는 슬로우모션 장면처럼 아예 늘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진행의 단계들은 상세한 설명이나 대사없이 이루기가 어려운 영화는 아니다. 다만 섬세한 디테일들이 빼곡히 그 간극을 메우며 진행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따지고 볼 것이 아니라 분위기에 젖어 감상하는 영화다.‘사랑’의 시작에 있어서 핵심은 ‘확인’이다. 상대에 대한 나의 감정과 나에 대한 상대의 감정을 확인함으로써 본격적인 단계에 진입한다. 영화 ‘화양연화’에서는 ‘사랑한다’는 확인의 장면이 없다. 직접적인 고백이 없기에 시작이 불분명하고 사랑의 진행률이 선명하지 않다. 이 또한 모호한 대사와 미세한 동작과 유려한 영화적 장치들로 짐작하고 느낄 뿐이다.‘화양연화’의 사랑은 ‘불륜’이다. 상대의 불륜에 나도 불륜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개연성을 지니더라도 ‘도덕’의 기준을 들이댄다면 불편한 영화가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 ‘화양연화’를 좀 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과연 불륜을 먼저 저지른 것은 남자의 아내와 여자의 남편이었는가 아니었는가. 먼저 불륜을 저지른 것은 각자의 아내와 남편이었지만 그 반대로 읽어도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는 끊임없이 특정한 선택의 기로에서 ‘가정(假定)’을 한다. 이 가정을 두고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상황을 ‘연습’한다. 가정에 대한 연습이 어느 쪽이 사실이었는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불륜에 대한 알리바이를 ‘가정’했을지도 모른다.‘화양연화’는 ‘if’에 대한 영화다. 선택과 확인의 기로에서 이들은 다양한 선택을 두고서 연습을 한다. 주인공인 두 남녀가 헤어지는 ‘연습’이 대표적인데, 사실과 연습이 뒤섞이면서 어느 것이 실제로 진행된 것인지 모호해진다. 고백을 했는지, 실제로 만나서 사랑을 했는지, 사랑하고 헤어진 것이 맞는지, 영화의 모든 결정들을 ‘만약(if)’으로 두어도 좋다.‘화양연화’중에서 인상에 남는 음악이 넷 킹 콜이 부른 노래 ‘Quizas, quizas, quizas’다. 직역하면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다. 사랑의 확인과 선택의 물음에 ‘아마도’라고 답한다. ‘아마도’는 확답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래서 ‘아마도’는 ‘만약(if)’을 선행시킨다.사랑의 결과는 영화의 시작에서 바로 밝혀진다.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버렸다’라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랑의 시작과 헤어짐의 과정 중에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 가와 이유가 중요하다.영화 마지막 남자는 앙코르와트에서 이 모든 사실을 영원히 봉인해 버린다. 추억에 대한 봉인이 아닌 선택과 이유에 대한 봉인이다. 선택과 이유를 알지 못해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그것이 없어서, 항상 주춤하며 진행되고, 미세한 떨림이 간극을 메우기에 더 애틋한 영화가 된다.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는 아름다운 영화다. 영상과 음악, 의상과 미술, 미장센까지 과감한 선택과 집중으로 감정의 흐름을 흐트리지 않는 영화다. 더불어 등장인물들의 뒷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화양연화’라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다./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0-12-07

할머니는 일학년

저녁 먹고 나니 잠이 쏟아진다. 소파에 누워 스르륵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얼마나 잤을까? 깨어보니 밤 12시가 다 되어 간다. 다들 잠자리에 들었기에 나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잠을 재촉해도 눈이 말똥해졌다. 30분 뒤척이다 다시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을 켰다.다들 잠든 밤이니 스펙터클한 영화도 싫고, 살인이 난무하는 서스펜스는 어깨가 아파 더 싫고, 호러 영화는 무서워서 혼자서 보는 것은 무리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박한 영화를 골라야지 하며 쭈욱 둘러보다가 고른 영화가 ‘할머니는 일학년’이다. 다큐멘터리인가 하는데, 시작하자마자 가슴이 저리기 시작한다. ‘집으로’영화가 떠오른다. 하지만 ‘집으로’ 영화보다 조금 무게감이 있다고 할까. 장면마다 나는 자꾸 눈물이 났다. 대사가 많거나 아주 슬퍼서라기보다는 그저 눈물이 났다.아들을 홀로 키웠던 까막눈의 할머니, 엄마를 잃고 새로 얻은 아빠까지 사고로 잃은 일곱 살 여자 아이 동이, 베트남에서 시집와서 노름꾼 남편과 팥쥐 엄마 닮은 시어머니를 둔 며느리, 이렇게 셋이 한글을 배우는 이야기이다.할머니는 아들이 사고로 죽으며 남긴 수첩을 유품으로 받았다. 거기에 적힌 아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읽지 못하니 안타까워 초등학교에 무작정 찾아간다. 배경을 자세히 보니 시월에 수업을 다녀온 영양의 초등학교였다. 동네로 달려가는 버스가 지나친 길은 주실마을 앞 숲길이었다. 영양에서 찍었구나 싶어 자막이 올라갈 때 도와주신 분들의 이름까지 자세히 읽었다.세 사람이 글을 배우는 과정에서 서로를 의지한다. 할머니는 글을 배우자 세상에 대해 문을 열고, 베트남 새댁은 남편을 집으로 들어오게 하는 쪽지를 쓰고, 동이는 가족을 얻는다. 글은 이래서 배워야 한다. 글자는 더 큰 세상으로 가는 문이 되어 주니까. 새벽까지 나는 실컷 울었다. 눈은 퉁퉁 부었지만 밤낮없이 돌아다녀 몸살이 날 것 같던 내 몸이 가뿐해졌다. /이향기(포항시 북구 장성동)

2020-12-07